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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주의자: 샘 올트먼, 오픈AI, 그리고 미래를 발명하기 위한 질주
AI 권력을 한 사람의 삶으로 읽는다는 것
챗GPT 이후 인공지능은 기술 뉴스의 소재를 넘어, 정치와 경제, 일상의 언어를 바꾸는 힘이 되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 거의 항상 같은 이름이 따라붙는다. 샘 올트먼.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키치 헤이지가 쓴 전기는, 이 인물을 따라가며 AI 시대 권력이 어떤 구조와 정서 위에서 움직이는지 보여주는 긴 루트맵이다.
페이지를 따라가다 보면, 뛰어난 개발자의 성공담보다, "기술·자본·신념·불안이 한 사람의 몸을 통과하며 결정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공지능 모델의 내부 구조를 아는 것만으로는 지금의 AI 문명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어떤 사람이 어떤 감각과 세계관으로 이 시스템들을 움직이는지, 그 인간적인 층위를 읽어야 비로소 큰 지도가 보인다.
불안한 소년에서 ‘판을 짜는 사람’으로
이야기의 출발점은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미국 중서부 세인트루이스다. 말수가 적고, 주변과 어울리기보다 컴퓨터에 몰두하던 소년이 첫 매킨토시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 도구”를 손에 쥔다. 주변의 시선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화면 속이라는 경험이, 이후 “현실도 어느 정도는 설계할 수 있다”는 감각의 씨앗이 된다.
스탠퍼드를 중퇴하고 시작한 첫 스타트업 루프트(Loopt)는 위치 기반 SNS라는 아이디어로 수천만 달러의 투자를 받지만, 대박보다는 “무난한 실패”에 가깝게 끝난다. 이 시기를 돌아보며 그는 “일을 끝까지 해내는 방법은 그냥 정말 끈질기게 버티는 것뿐이다(The way to get things done is to just be really fucking persistent)”라고 말한다. 천재성보다 끈질김을 더 믿는 태도, 세계가 재능보다 지속성에 반응한다는 통찰이 여기서 형성된다.
루프트의 매각은 한 사람의 커리어에서는 얼핏 옆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선택을 보면, 이 경험이 “직접 만드는 사람”에서 “판을 짜는 사람”으로 방향을 틀게 만든 계기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코드 작성보다, "사람·자본·아이디어를 엮어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이 생긴다.
와이콤비네이터가 가르쳐준 생태계의 감각
와이콤비네이터(Y Combinator)에 합류한 뒤 역할은 완전히 바뀐다. 이제는 자금을 신청하는 창업자가 아니라, 수많은 창업자를 평가하고 도와주는 쪽에 서게 된다. 어느 팀이 성장하는지, 어떤 아이디어는 번쩍이지만 금세 사라지는지, 어떤 사람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지를 가까이에서 본다.
이 과정에서 눈길이 한 회사의 제품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흐름"으로 옮겨간다. 투자자와 창업자, 규제와 언론, 사용자와 팬덤이 어떻게 얽혀서 한 시대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몸으로 배우게 된다. 그 경험이 이후 인공지능을 다루는 방식에도 그대로 스며든다. AI 모델이라는 기술만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둘러싼 사람·국가·기업들의 움직임 전체를 동시에 보려는 시야가 생긴다.
조직 문화에 대한 생각도 이때 뚜렷해진다. 그는 “창업자라면 주 100시간을 일하고 모든 걸 쏟아붓는 삶도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직원은 그럴 수 없다(If you’re the founder of the company ... most other people you hire ... have other lives)”고 말한다. 스타트업 영웅 신화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리듬을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기술의 속도와 인간의 속도 사이의 간극을 알고, 그 간극을 조율하는 사람이 판을 오래 유지시킨다는 감각이 쌓인다.
오픈AI: 공익, 자본, 종교적 상상력이 뒤섞인 실험
다음 무대는 인공지능 연구 조직 오픈AI. 출발점에는 짧지만 강렬한 문장이 있다.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인공지능을 개발하겠다는 약속. 그러나 고성능 AI 모델은 선언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존재다. 전력, GPU, 데이터센터, 연구자 연봉이 끝없이 들어가야 하고, 그 비용은 결국 자본과 시장에서 나온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비영리 재단과 영리 회사를 겹쳐놓은 독특한 구조, 이른바 "캡드 프로핏(capped-profit)" 모델이다. 투자자와 직원에게 수익을 열어둔 채, 일정 배수 이상 이익은 공익 쪽으로 돌아가도록 설계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한쪽에서는 “전례 없는 실험”이라는 찬사가 나오고, 다른 쪽에서는 “실리콘밸리식 도덕 포장”이라는 비판이 붙는다.
와이어드에 실린 발췌문은 이 조직 실험의 정신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쓴다. 일라이저 유드코프스키의 파국론, 피터 틸의 기술 엘리트주의, 싱귤래리티와 트랜스휴머니즘 같은 사상이 얽히며, 인공지능이 일종의 종교적 상상력의 대상이 되어 버린 풍경이 펼쳐진다. 거기서 나온 문장은 이렇다. “세상을 구원하고 싶다면, 세상을 끝낼 수 있는 수단부터 손에 넣어야 한다”는 식의 역설.
인류를 돕겠다는 이상과, 위험한 도구를 먼저 쥐겠다는 욕망, 그리고 그 도구를 둘러싼 자본과 권력의 정치가 한곳에 겹친다. 오픈AI라는 조직은 연구소이자 스타트업이자 종교적 운동에 가까운 분위기를 동시에 띠는 공간이 된다.
다섯 날의 쿠데타: 해임과 복귀가 보여준 것
2023년 11월, 오픈AI 이사회는 짧은 한 문장을 남기고 CEO를 자리에서 밀어낸다. “일관된 솔직함이 부족했다.” 왜, 어떤 맥락에서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발표가 터진다.
며칠 안에 상황은 급변한다. 직원 수백 명이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함께 떠나겠다”는 서명에 줄줄이 이름을 올리고, 전략적 파트너인 마이크로소프트는 샘 올트먼과 핵심 인력을 통째로 데려오겠다고 선언한다. 권력의 축이 어디에 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명목상 최고 결정권은 비영리 이사회에 있었지만, 실제 힘은 "인재, 자본, 제품에 대한 통제력"이 모인 쪽에 있었다.
닷새 뒤, 해임은 뒤집힌다. 그는 다시 CEO로 돌아오고, 그를 내보내려 했던 이사들은 자리에서 물러난다. 외부에서는 “현실을 자기 의지에 맞게 휘어버린 한 사람의 순간”이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하지만 이 장면을 찬사로만 받아들이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많다.
인공지능 같은 인프라 기술을 다루는 조직에서, 비영리 거버넌스 구조는 직원·투자자·빅테크의 연합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공익을 수호한다는 간판을 단 이사회가, 정작 공익보다 못한 협상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섯 날의 쿠데타는 한 사람의 힘을 증명한 사건이 아니라, "제도 설계의 취약함을 드러낸 사건"에 가깝다.
낙관주의자의 언어: 꿈, 시뮬레이션, 영수증
이야기의 표지에는 “낙관주의자”라는 단어가 크게 박혀 있다. 낙관은 여기서 단순한 성격 묘사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프레임이다. 미래에 대한 감각이 문장 하나에 농축된다.
“이 모든 것은 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꿈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This is all a dream. And in the dream, anything is possible).”
현실을 일종의 시뮬레이션처럼 보는 사고방식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세계를 수정 가능한 코드,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인식하는 태도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거대한 시뮬레이션이라면, 그 시뮬레이션의 규칙을 조금씩 바꾸는 일도 가능하다”는 식의 생각이 인공지능, 핵융합, 장수 기술에 대한 집요한 투자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같은 입에서 이런 말도 나온다.
“영원히 낙관주의자로 남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미래가 영수증을 요구한다(You don’t get to be the Optimist forever. Sooner or later, the future asks for receipts).”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는 기술과 리더십은 언젠가 실제 결과로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 데이터에 의해 감시당하는 시민들, 알고리즘 편향으로 피해를 보는 집단들 앞에서, “언젠가 좋아질 것”이라는 말만 반복할 수는 없다.
낙관주의자는 결국 "언젠가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는 청구 대상"이 된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는 버티기 어렵고, 현재의 불평등과 위험을 완화할 구체적 장치가 필요하다. 이 문장은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기술 리더에게 던져진 숙제로 읽힌다.
노동과 자본의 재편, AI 이후 경제에 대한 상상
그의 머릿속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경제 구조를 재편하는 에너지에 가깝다.
“생각하고 학습하는 소프트웨어가 지금 사람들이 하는 일을 점점 더 대신할 것이다(Software that can think and learn will do more and more of the work that people now do).”
이 전망 위에 또 다른 확신이 겹친다. “권력은 노동에서 자본과 기술로 더 많이 이동할 것이다.” AI가 성장할수록 인간 노동이 맡던 작업은 코드로 대체되고, 그 코드의 소유권은 소수 기업과 투자자에게 집중된다. 기존 자본주의가 가진 불평등의 구조가 더 날카로운 형태로 강화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기본소득, 데이터 배당, 공동 소유 같은 아이디어가 진지하게 언급된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부를 사회 전체로 재분배하지 못하면, 기술의 발전 자체가 정치적 파국을 부를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해법의 방향은 여전히 “더 많은 성장, 더 빠른 혁신, 더 정교한 정책”에 머무른다. 기본 구조를 손대기보다는, 성장이 일으키는 충격을 정책으로 완화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재분배를 설계하는 위치에 누구를 앉힐 것인가?" 인공지능 기업의 리더와 투자자들이 스스로 기금을 만들고 복지를 설계하는 구조는, 민주주의의 스펙트럼에서 어디쯤에 놓이는가? 노동과 자본의 균형을 재설정하는 일까지 기술 엘리트의 자기 규제에 맡길 수 있는지, 이 전기는 직접적인 답 대신 긴 여운을 남긴다.
AI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두 공포의 동맹
이야기 주변에는 늘 두 가지 극단이 맴돈다. 하나는 “AI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유토피아, 다른 하나는 “AI가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디스토피아다. 와이어드에 실린 발췌는 싱귤래리티 연구소, 익스트로피 운동, 초기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논쟁을 따라가며, 현재 딥마인드와 오픈AI를 키운 정신적 계보를 짚어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극단이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같은 구조를 강화한다는 사실이다. “곧 초지능이 나와 천국을 열 것”이라는 설득과, “곧 초지능이 나와 우리를 파괴할 것”이라는 경고는,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속도와 규모를 정당화하는 방식만 다를 뿐, "핵심은 똑같이 인공지능에 대한 특권적 통제 권한을 소수에게 몰아주는 서사"라는 점이다.
샘 올트먼의 위치는 이 두 극단의 가운데쯤에 자리한다. 위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위험을 관리하는 능력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 속도를 늦추지 말고 전진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미래에 대한 공포와 열망이 함께 작동하는 장면에서, 낙관주의자의 얼굴은 희망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권력 집중의 얼굴이 된다.
한국 사회에 대한 시사점: 기술 권력을 누가 관리할 것인가
이 긴 이야기는 미국의 한 CEO와 특정 조직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질문 자체는 국경을 넘는다. 한국에서도 행정, 교육, 의료, 금융의 여러 영역에서 인공지능 도입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챗봇, 자동 심사 시스템, AI 교사, 의료 영상 판독 같은 서비스는 이미 시범적 수준을 넘어 상용화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
이때 가장 쉬운 질문은 “언제쯤 우리도 저런 서비스를 똑같이 갖게 될까?”라는 종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다른 데 있다.
“저 정도의 권력을 가진 기술 시스템을 어떤 구조 아래에 둘 것인가?”
비영리와 영리, 공익과 자본, 창업자와 이사회, 파트너 빅테크와 시민사회의 긴장이 오픈AI라는 사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국의 공공기관과 기업도 비슷한 갈림길에 서게 될 가능성이 크다. 공공 데이터를 맡길 파트너를 어떻게 고를지, AI 인프라에 대한 주권을 어느 정도까지 유지할지, 사적 기업이 설계한 알고리즘이 행정과 복지에 개입할 때 어떤 감시 장치를 둘지 등, 아직 제대로 토론하지 못한 문제들이 많다.
샘 올트먼의 행적을 세밀하게 따라가는 이 전기는,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좋은 거울 역할을 한다. 특정 인물의 선택을 따라가면서,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둘러싼 제도와 권력 구조를 상상하는 연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 시스템이 언어를 배우는 만큼, 시민도 AI 거버넌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영수증을 요구하는 미래’를 준비하는 시민에게
낙관주의는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다.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으면, 아무도 AI 연구와 창업, 정책 실험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그 낙관주의가 누구에게 어떤 비용을 전가하는지 보지 못한다면, 미래는 현재보다 덜 공정한 곳이 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미래가 영수증을 요구한다”는 말은,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에게만 던져진 경고가 아니다. 편리함과 효율을 기꺼이 소비하면서, 그 대가가 어디에서 빠져나오는지 묻지 않는 사용자에게도 같은 질문이 돌아간다. 데이터는 누구의 손에 모이고 있는지, 알고리즘은 누구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는지, 자동화의 이익과 손실은 어떻게 나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샘 올트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서사는, 한 사람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판단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종류의 과제를 내민다.
"거대한 낙관주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무조건 신뢰할 것인가, 전적으로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강력한 제도와 감시, 시민적 참여 속에 가둬 둘 것인가.
인공지능이 문명의 인프라가 되어버린 시대에, 이 질문은 특정 CEO나 특정 회사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과 권력을 감시하는 시민의 교양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샘 올트먼의 삶을 따라가는 이 전기와, 거기서 뽑아낸 인용과 서사들은 하나의 긴 지식 에세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낙관주의자가 제출해야 할 영수증을 미리 상상하는 독자에게, 지금 이 이야기는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