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을 위한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은이), 우르줄라 미헬스 벤츠 (엮은이), 홍성광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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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원
   
18000
2025�� 09��



■ 책 소개


“매우 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우 행복해지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책에 수록된 아포리즘들은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짧게 읽고 곱씹을 수 있다. 우리는 몇 줄 안 되는 구절을 통해 불안의 근원을 직시하게 되고, 동시에 그것을 감당할 내적 힘을 발견하게 된다. 번역은 쇼펜하우어 철학서 원전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포함한 다수의 독일 철학서를 번역한 홍성광이 맡았다. 그는 쇼펜하우어를 ‘연민과 온정의 철학자’로 명명하며 우리가 익혀야 할 쇼펜하우어의 숨겨진 정수를 전달한다. 

■ 저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19세기 가장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힘에 대한 존중과 결합된 날카로운 객관적 분석은 그를 탁월한 철학적인 인간 전문가로 만들었다. 외국 문화에 대한 개방성은 그에게 초개인적이고 초월적인 세계관을 열어준다. 그는 삶의 지혜에 대한 아포리즘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아포리즘은 종종 냉철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간결하고 재미있으며 정곡을 찌르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불안과 고난, 억압과 적대감이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식과 실천을 통해 이에 대응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인생 경험으로 그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명랑하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고통과 죽음이 만연한 세상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규명하고 이해하기 위해 일생을 보냈다. ‘고통스러운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인간 존재의 거의 모든 차원을 탐구했고, 문학, 음악, 철학, 심리학에서 깊이 공명한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개발했다. 그는 어떠한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진리만을 따르는 자유인이자 진정한 철학자의 모습으로 인간 행동의 내면에 숨은 동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불화를 겪었고, 칸트의 저작을 읽고 사물과 세상을 보는 눈을 뜨면서 칸트주의자를 자처하지만 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지 않고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쇼펜하우어는 피히테, 괴테와 개인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프리드리히 셸링과의 양면적인 관계, 헤겔에 대한 경멸, 자신의 철학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투쟁을 지속한다. 자신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철학 교수들과는 화합할 수 없는 상극관계였다. 그는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톨스토이, 니체, 비트겐슈타인, 사뮈엘 베케트, 보르헤스, 프로이트, 카를 융, 토머스 하디 등 다양한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 역자 홍성광
서울대학교 인문대 독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 『마의 산』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한독문학번역연구소 번역상 수상, 2022년 한독문학번역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 특별 번역가 문학상 수상. 저서로는 『독일 명작 기행』과 『글 읽기와 길 잃기』가 있다. 옮긴 책으로는 쇼펜하우어의 『쇼펜하우어의 철학 이야기』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 읽기와 글쓰기』,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노벨레』, 게오르크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헤세의 『헤세의 문장들』 『청춘은 아름다워』 『헤세의 여행』 『헤세의 책 읽기와 글쓰기』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싯다르타』 『환상동화집』, 뷔히너의 『보이체크. 당통의 죽음』, 토마스 만의 『예술과 정치』 『마의 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중단편 소설집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카프카의 『성』 『소송』 중단편 소설집 『변신』, 실러의 『빌헬름 텔. 간계와 사랑』,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며

1부 우리의 행복은 우리를 이루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의 요구와 통찰력 사이의 올바른 관계
우리 행복의 90퍼센트는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휴식 없이 진정한 행복은 불가능하다

2부 자신만의 믿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한다
-우리 자신은 우리 행위의 수행자이다
모든 위로의 시작은 인간이 무에서 생겨나지 않았다는 가르침이다
진실은 호불호의 문제와 상관없다
명성이 아니라 명성을 얻을 만하게 해주는 것이 값진 것이다

3부 그대 스스로를 위해 생각해야 한다
-원형, 의식하기, 보다 높은 예술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습득한 지식을 자신만의 생각으로 소화해야 한다
아름다운 작품을 느끼는 마음이 필요하다

4부 회복은 자연의 산물이다
-자연의 목소리 속에 있는 세계의 중심
자연은 인간의 의지를 빛으로 끌고 간다
삶의 의지는 모든 생물의 가장 내적인 핵심이다
신체는 스스로 치유하는 기계다

5부 객관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위대하다
-자신과 타인과의 교제에 관하여
현재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해야 한다
예의는 현명함이고 무례는 어리석음이다
도덕적 탁월함은 모든 이론적인 지혜보다 우위에 있다

6부 우리에게는 두뇌보다 더 현명한 무언가가 있다
-내적 충동과 실제로 성취된 시간
인간의 인생은 처음 손 댄 예술 작품과 같다
읽고 배우는 것만큼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성격은 머릿속이 아니라 마음속에 들어 있다

7부 죽음이란 삶을 담는 커다란 저수지다
-우리 참 존재의 불멸성
마음의 선함은 불가사의한 신비이며 초월이다
지구의 어느 곳이든 지구 위이듯, 모든 삶의 형식 역시 현재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자연 속에서 존속한다

해설 연민과 온정의 철학자 쇼펜하우어_홍성광
연보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을 위한 쇼펜하우어


자신의 삶만을 읽으라

삶의 이유를 오롯이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휴식 없이 진정한 행복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진지할수록 그만큼 더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


이 모든 현실, 즉 충만한 현재는 물속의 산소와 수소처럼 아무리 필수 불가결하고 밀접한 화합물로 이루어져있다 해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반쪽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서 기인한다. 객관적인 측면이 아무리 멋지고 좋다 해도 주관적인 측면이 아둔하고 열악하면 열악한 현실과 현재가 되고 만다. 이것은 아무리 경치 좋은 곳이라도 날씨가 나쁘거나 질 나쁜 카메라로 찍으면 변변치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의 피부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의식 속에 들어 있어, 자신의 의식 속에서만 갇혀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그를 도와줄 방법이 별로 없다. 무대 위에서 어떤 사람은 제후의 역할을, 다른 사람은 고문관의 역할을, 또 다른 사람은 하인이나 병사, 또는 장군 등의 역할을 한다 해도 이러한 차이는 단지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현상의 핵심인 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똑같이 고통과 궁핍에 시달리는 가련한 희극배우에 불과하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다. 지위와 부의 차이에 따라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행복과 즐거움의 내적 차이가 결코 그런 역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도 한풀 벗기고 나면 궁핍과 고통에 시달리는 똑같은 가련한 멍청이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가장 효과적인 위로는 우리보다 더 불행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전적으로 의욕과 성취 사이에서 흘러간다. 소망은 근본적으로 곧 고통이다. 성취는 금세 포만을 낳는다. 목표는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무언가를 소유하면 그것이 지니고 있던 매력은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소망과 욕구가 다시 나타난다. 그게 아니라면 황량함, 공허, 무료함이 뒤따르고, 이에 대한 투쟁은 곤궁에 대한 투쟁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고통스럽다. 소망과 충족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으면 이 둘에 의해 생기는 고뇌가 최소한으로 줄어들고, 가장 행복한 인생행로를 이루게 된다.


취미는 향유의 지속적인 원천이다.


모든 의욕은 욕구에서, 즉 결핍이나 고뇌에서 생긴다. 이 욕구는 충족되면 끝난다. 그렇지만 하나의 소망이 성취되더라도 적어도 열 개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남는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지속되고, 요구는 끝없이 계속된다. 즉 충족은 짧은 시간 동안 불충분하게 이루어진다.


심지어 최종적인 충족 자체도 겉보기에만 그럴 뿐 소망이 하나 성취되면 즉시 새로운 소망이 생긴다. 이는 마치 거지에게 늘 던져주는 적선이 오늘 그의 목숨을 이어주어 고통을 내일까지 연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의식이 의지에 사로잡혀 있는 한, 끊임없는 희망과 두려움으로 여러 욕망의 충동에 내몰려 있는 한, 우리가 의욕의 주체인 한 지속적인 행복도 마음의 안정도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좇거나 피하고, 재앙을 두려워하거나 기쁨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이 요구되는 의지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의식을 충족시키고 움직인다. 그러나 마음의 휴식 없이 진정한 행복은 불가능하다.



신체는 스스로 치유하는 기계다

내 견해에 따르면 급성 질환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유기체에서 벌어진 무질서를 막기 위해 자연 자체가 도입하는 치료 과정과 다르지 않다.


오직 자연 자체와 자연에 의해 이루어진 치유만이 근본이다. 의사들의 치료법은 대부분 그들이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증상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치료법 이후에도 불편함을 느낀다. 반면 우리가 자연에게 시간을 준다면 자연은 점차 치유를 완수한다. 우리는 병이 나기 전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거나 고통 받았던 개별적인 부분이 강해진다. 가끔 찾아오는 가벼운 질환의 경우 이러한 사실을 편안하게 또 위험 없이 관찰할 수 있다. 나는 예외, 즉 의사만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복은 단순히 자연의 산물인데 의사는 자연이 한 일로 진료비를 받는다.


심장은 확장과 수축이라는 복잡한 이중 운동을 하면서 지칠 줄 모르고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다. 28번의 박동으로 대순환과 소순환에 의해 혈액을 몸 전체에 공급한다. 폐는 증기기관처럼 쉬지 않고 펌프 운동을 한다. 장은 연동운동을 하며 계속 꿈틀거린다. 모든 샘은 흡수와 분비작용을 멈추지 않는다. 뇌조차도 맥박과 호흡에 따라 이중 운동을 한다. 하루 종일 앉아서 생활하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외적인 운동이 거의 없는 경우에는 외적인 안정과 내적인 소요 사이에 심하고 해로운 부조화가 발생한다. 내부의 지속적인 운동조차도 외부의 운동을 통해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내부가 감정적 동요로 들끓고 있는데 그것을 외부로 표출하지 못할 때 생기는 부조화와 유사하다. 나무조차도 무럭무럭 자라려면 바람을 통한 운동이 필요하다.


운동 없이는 누구도 건강할 수 없다.


신체는 스스로 치유하는 기계다.


수면의 필요성은 뇌수 활동의 강도 즉 의식의 명료성과 정비례한다. 지능이 높은 동물은 깊이 오래 잔다. 인간들도 두뇌가 양과 질에서 발전될수록 또 활동적일수록 더 많은 잠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완전히 깨어 있을수록, 즉 그의 의식이 더 명료하고 더 활발할수록 그에게는 수면의 필요성이 더 커진다. 그래서 그는 더 깊이 오래 잔다. 많은 사유와 힘든 두뇌 활동은 수면의 필요성을 높일 것이다. 근육을 오래 많이 쓰면 졸린 것도 뇌수가 척수의 숨뇌와 운동성 신경을 통해 계속 근육을 민감하게 자극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근육은 힘이 고갈된다. 우리가 팔과 다리에서 느끼는 피로의 원래 본거지는 뇌수이다. 마찬가지로 팔다리에서 느끼는 통증도 실제로는 뇌수에서 느끼는 것이다. 뇌수는 운동성 신경뿐 아니라 민감성 신경과도 관계하기 때문이다. 뇌수에 의해 활성화되지 않는 근육, 예컨대 심장근육은 바로 그 때문에 피로를 모른다. 근육을 많이 쓰는 중이나 쓰고 난 후에 깊은 사유를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모든 인식 작용과 표상 작용은 완전히 활동을 멈춘다. 하지만 생명이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 본질의 핵심은 결코 중지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핵심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도, 따라서 비육체적인 것으로도 휴식이 필요하지 않다.


단순히 식물적인 생명 활동만 지속되는 수면 중에 의지는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뇌수의 활동과 인식의 노력에 의해 힘이 약해지지 않으며 원래의 근원적인 본성에 따라 홀로 활동한다. 그러나 이는 유기체로서 단순히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수면 중에 의지의 모든 힘은 유기체를 보존하고, 필요한 경우 유기체를 수선하는 일을 한다. 따라서 모든 치유, 모든 고마운 위기는 수면 중에 일어난다.


불면증은 우려할 만한 증상이다. 이때 매일 두 시간씩 혼자 빠른 속도로 산책하는 것이 중요하다. 광천 목욕 이상으로 도움이 될 것이고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나는 건강이 행복에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그러니 여기서는 건강을 증진하고 유지하기 위한 매우 일반적인 몇 가지 행동 수칙을 말해보고자 한다. 인간은 건강한 동안에 온몸과 신체 각 부위를 잔뜩 긴장시키고 고통을 주어서 온갖 종류의 안 좋은 영향에 저항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르도록 몸을 단련해야 한다. 그러나 몸에 병적 상태가 나타나면 즉각 반대되는 조치를 취해서 병든 신체나 그 일부를 어떤 방식으로든 잘 보살피고 돌보아야 한다. 병에 걸려 쇠약해진 몸은 단련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근육은 많이 쓸수록 강해지지만 신경은 그럴수록 약해진다. 그러므로 근육은 적당히 긴장시켜 단련해야 하지만, 신경은 결코 긴장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눈은 밝은 빛, 특히 반사된 빛에 노출되거나 어두운 곳에서 눈을 혹사시켜서는 안 되고 작은 물체를 장시간 보고 있어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귀는 너무 강한 소음을 피하고, 특히 뇌는 억지로 지나치게 오랫동안 쓰거나 때 아니게 혹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소화하는 동안은 뇌를 쉬게 하는 것이 좋다. 뇌 속에서 사고를 만들어내는 생명력이 미죽(위산과 섞여 암죽 상태가 된 음식물)과 유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위와 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근육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안이나 그 후에도 뇌를 쉬게 하는 것이 좋다.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지를 다쳤을 때 사실 통증을 느끼는 부위가 뇌인 것처럼 걷거나 일하는 것도 팔다리가 아니라 뇌다. 뇌에서 연수와 척수를 거쳐 팔다리의 신경을 자극해 사지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팔다리가 느끼는 피로도 실은 뇌에서 느끼는 것이다. 피로를 느끼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근육, 즉 뇌를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는 근육뿐이고, 반면에 심장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근육은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근육을 너무 많이 쓰는 동시에 정신적 긴장을 하거나, 두 가지를 잇달아 무리하게 행하기만 해도 뇌가 손상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작품이다. 자연은 모든 존재가 어떤 다른, 바로 자신과 같은 존재에 생명의 불꽃을 붙인 다음 우리 눈앞에서 자기 자신을 만듦으로써 그를 증명한다. 외부에서 재료를 취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형태와 운동을 취하면서. 이렇게 경험적으로도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예의는 현명함이고 무례는 어리석음이다

기본적으로 덕이나 심지어 성덕(聖德)과 같은 마음의 선함은 의지보다 우월한 인지력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자신의 의지와 그 의지의 직접적인 충족보다 단순히 타자의 고통이 행동을 더 많이 결정함으로써 인지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성은 커다란 선의와 협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악의와 협력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이성이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커다란 효과를 발휘한다. 이성은 나쁜 의도뿐만 아니라 고상한 의도, 어리석은 준칙뿐만 아니라 현명한 준칙을 똑같이 조직적이고 수미일관하게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고 도움을 주며 이는 사실 이성의 수용적이며 보존적인,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성질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은 본질적으로 덕론이 아니라 마음의 평정을 통해 행복을 얻는 것을 목표이자 목적으로 삼는 이성적 삶에 대한 지침이다. 스토아학파 윤리학의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이란 내적 평화와 마음의 평정에서만 얻을 수 있고, 이 평정은 다시 덕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미덕이 최고의 선이란 표현은 바로 이 사실만을 의미한다.


플라톤을 제하고 고대의 모든 도덕 체계는 행복한 삶을 위한 지침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덕은 결코 죽음 저편이 아니라 현세에서 목표를 갖는다. 그들에게 덕이란 진실로 행복한 삶에 이르는 올바른 길일 뿐이다.


타인의 가치를 순순히 또 기탄 없이 인정하고 승인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남의 견해를 반박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들이 믿고 있는 불합리를 하나하나 설명하여 생각을 고치려고 한다면 므두셀라(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로 969세까지 살았음)만큼 오래 산다 해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야기를 나눌 때 비록 호의를 갖고 있더라도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절대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는 쉽지만, 사람을 바로잡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듣고 있는 경우라서 화가 나기 시작하면 익살 광대 두 명이 대화를 나누는 희극 장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의 온갖 걱정과 근심, 안달과 성화, 불안과 긴장 등은 대부분 타인의 견해와 관계 있는 것으로, 질투와 증오도 앞서 말한 근원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명예욕이라는 동기를 합리적인 한도로 억제해 지금의 한 50분의 1 정도로 낮추는 것이, 즉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몸속의 가시를 빼내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 지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머릿속에 든 대부분의 견해가 얼마나 그릇되고 불합리하며, 이치에 어긋나고 터무니없는 것인지, 따라서 그것들 자체가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없음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타인의 견해는 우리에게 별로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나아가 그러한 것들은 대체로 비호의적임을 알아야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은 타인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나 그들의 말투를 들으면 화병이 날지도 모른다. 결국 명예라는 것도 엄밀히 말해 다만 간접적인 가치만 지닐 뿐 직접적인 가치는 없음을 알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는 데 성공하면 그 결과 믿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안정되고 명랑해져서 한층 더 확고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를 취할 것이며, 행동도 한결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예의는 현명함이고, 따라서 무례는 어리석음이다. 쓸데없이 경솔하게 적을 만드는 것은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미친 짓이다. 밀랍은 성질이 딱딱하면서도 부서지기 쉽지만 조금만 열을 가하면 부드러워져서 마음대로 어떤 형태로든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고집 세고 적의를 품은 사람조차도 약간의 예의와 친절을 베풀면 고분고분하고 호의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예의가 인간에게 하는 작용은 열이 밀랍에 하는 작용과 같다. 존경받을 만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의 존경을 표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예의는 실행하기가 어려운 과제이다. 예의와 자존심을 겸비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다.


타인에 대한 증오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 동정심을 요구한다.


행복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적의를 품는 사람들은 그가 몰락하면 종종 그를 지켜주고 위로하며 도와주는 사람으로 변하곤 한다. 미약하나마 그와 비슷한 일을 경험하고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은 지금까지 그에게 가장 큰 냉대, 심지어 악의를 드러내었어도 이제 꾸미지 않은 동정심으로 그에게 다가서는 것을 놀랍게도 보지 않았던가! 불행은 연민의 조건이고, 연민은 인간애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의 의지와 열망에 일치하는 모든 것은 이 의지와 관련해 좋은 음식, 좋은 방법, 좋은 전조라고 불리며 그 반대는 나쁘다고, 살아 있는 존재의 경우에는 사악하다고 불린다. 성격상 다른 사람의 노력을 방해하길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호의적이고 도움을 주는 사람,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가능한 한 그들을 돕고 지원하는 사람은 같은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러한 성격의 본질적인 점으로 돌아가 보면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과 남을 덜 구분 짓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가 있더라도 자화자찬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허영심은 흔하지만 공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라도 자신을 칭찬하면 사람들도 그게 허영임을 확신한다.


타인의 외적인 태도, 행동거지에 대해 자기 혼자서 내심 면밀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성향과 버릇이 있는 자는 결국 자신의 개선과 완성에 힘쓰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자신이 걸핏하면 엄격히 비난하곤 하는 행위를 스스로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정의감이나 자부심과 허영심도 충분히 가지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결점을 개선하기 위해 타인이라는 하나의 거울이 필요하다.


약을 너무 많이 복용하면 목표한 효과를 내지 못한다. 훈계와 비판도 한도를 훨씬 넘어서면 이와 마찬가지이다.


사물 자체인 의지는 모든 존재의 공통된 소재이고 사물들의 일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이 의지를 모든 사람, 그리고 각 개인과 공유하고 있고 동물들, 심지어 더 아래쪽에 위치하는 존재들과도 공유하고 있다. 모든 만물이 의지로 가득 차 있고 그것으로 충만해 있는 한, 의지 그 자체라는 점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와도 평등하다. 반면에 인간을 다른 존재보다 높여주는 것은 지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표현은 되도록 지식에 한정되고 두드러져야 한다. 전적으로 공통된 것으로서의 의지는 사실 비속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지의 격렬한 표출은 모두 비속하다. 이는 우리를 종속의 단순한 실례이자 표본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며 오직 종속의 성격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모든 분노, 제어하기 어려운 기쁨, 모든 증오나 공포, 요컨대 모든 흥분, 의지의 모든 움직임은 비속하다. 의지가 너무 강렬해져 의식 속에서 지식을 압도하고, 인간을 인식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의욕하는 존재로서 나타나게 하는 경우 그것은 비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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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