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충돌과 융합

   
최광식
ǻ
21세기북스
   
22000
2023�� 04��



■ 책 소개


역사상 가장 뜨겁게 폭발했던 사유의 시대
충돌과 융합의 동아시아 사상사

고대 중국에서부터 이어진 유교와 도교 전통 아래, 외래종교 불교의 유입, 토착신앙의 발전 등 1~8세기 동아시아는 인간과 삶에 관한 다채로운 생각들이 얽히고설킨 사유의 용광로와 같았다. 우리의 기틀을 이루는 세 가지 사상은 국가 통치이념인 유교, 내세를 기원하는 불교, 개인 수양을 위한 도교로 나뉘어 충돌 끝에 조화를 이루었다.

저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충돌과 융합이 기록된 고전들을 폭넓게 해석하며, 이 시대에 중요한 가치들을 다시 되새긴다. 유교의 가치를 통해 “공정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공정하지 못한 지금의 정치인들”에게 성찰을 촉구하고, “말만 가득한 ‘내로남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다시 새길 가치를 제시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단합했던 불교의 가치와, 일상의 기반이 되었던 도교의 제사 문화 속에서 풍부하게 꽃피는 문화의 힘을 돌아본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시대정신의 강력한 힘은 상생에 있다. 유, 불, 선의 각기 다른 사유들이 충돌하고 융합하며 우리 문화는 소통과 화합의 가치를 꽃피웠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의식의 저변을 이루는 다원주의적 사상, 종교문화의 시작점을 거슬러 가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금 우리의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가’하는 깊은 질문을 남긴다. 

■ 저자 최광식
저자 최광식은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이다.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 문학박사를 졸업하였으며,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미국 UCLA, 중국 베이징대학, 일본 도호쿠대학 방문교수를 지냈다.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한국사연구회 회장, 중국의 고구려사왜곡대책위원장,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 고려대학교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화재청장,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다. 

신화와 제의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했으며, ‘삼국유사’에 보이는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 그리고 유, 불, 선의 충돌과 융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한국 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실크로드와 한국문화’, ‘삼국유사의 신화 이야기’, ‘삼국유사 읽기’ 등이 있다. 공저 및 역서로는 ‘점교 삼국유사’, ‘삼국유사’, ‘삼국유사의 세계’ 등이 있다.
  
■ 차례
서문 충돌과 융합의 시대, 유교 불교 도교의 삼중주
PART 1 동아시아의 통치이념이 된 유교 - 오긍 ‘정관정요’
01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관의 치’를 기억하라
02 저절로 다스려지는 통치의 기술
03 군주라도 두려워 말고 허물을 비추라
04 사람을 가려내는 기준을 마련하다
05 ‘인의예지’로 삶을 완성하라
06 모든 것에는 그에 맞는 자리가 있다
07 도교를 믿되 유교로 다스려라
08 국학 안에 공자의 사당을 세운 이유
09 멈출 줄 안다면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10 동아시아 정치 철학의 확립

PART 2 융화의 정신으로 신라 중흥을 꿈꾸다 - 최치원 ‘계원필경’ ‘사산비명’
01 유, 불, 선을 융합한 풍류도 정신의 부활
02 당나라에 널리 퍼진 최치원의 문명
03 비호와 배척을 오가던 불교의 토착화
04 유, 불, 선의 가르침은 하나로 통한다
05 토착신앙을 아우른 다원주의 의식
06 불교의 나라에 우뚝 선 신라의 고승
07 승려의 삶을 기록한 유학자
08 선종의 유입과 교종 세력의 반발
09 효를 지키고 자연을 따르며 선행을 베풀라

PART 3 유학자가 바라본 사유의 용광로, 삼국과 통일신라 - 김부식 ‘삼국사기’
01 삼국의 역사를 가려내어 교훈으로 삼다
02 김부식이 본 삼국과 통일신라 사상의 특징
03 신라, 유교와 불교의 유연한 공생
04 사상의 분열로 국력을 잃은 고구려
05 신앙에 치우쳐 현실을 보지 못한 백제
06 불교의 폐단으로 인한 신라의 패망
07 삼교가 공존한 신라의 제사 제도
08 김유신은 왜 그 많은 기도를 올렸을까?
09 현세는 유교로, 내세는 불교로
10 유학의 종주가 된 원효대사의 아들

PART 4 민족의식을 일깨운 화합과 통합의 가치 - 일연 ‘삼국유사’
01 우리 시조가 알에서 나오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02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명확히 인식하다
03 피리를 불어 통일신라의 건국을 알리다
04 이차돈은 왜 불교를 위해 죽었을까?
05 신라 중심에 놓인 호국의 보물, 황룡사
06 함부로 살생하지 않으나 쉬이 물러서지도 않으리라
07 신라의 불교는 사람을 고치고 나라를 지킨다
08 불교와 토착신앙을 아우른 신라의 제사
09 젊어서는 유학자로, 늙어서는 승려로
10 불자가 된다고 효를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PART 5 사상의 융합 위에 국가 체제를 완성한 일본 - 도네리 친왕 ‘일본서기’
01 신라의 왕자, 일본으로 건너가다
02 일본에 유교를 전래한 백제
03 유교에서 불교, 도교에까지 문을 열다
04 억압과 숭상 끝에 일본에 수용된 불교
05 유교와 불교의 가치를 헌법으로 명문화하다
06 다이카개신, 천황의 통치를 강화하다
07 일본이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한 이유
08 이념의 융합으로 완성된 일본의 국가 체제

참고문헌

 




사유의 충돌과 융합


동아시아의 통치이념이 된 유교 - 오긍 ‘정관정요’

저절로 다스려지는 통치의 기술

당태종과 신하들의 문답 대부분은 ‘논어’, ‘맹자’, ‘중용’ 등 유교의 경전을 바탕으로 유교적 통치이념을 강조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무위지치’'의 개념도 그렇다. 무위지치란 성인의 덕은 지극히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천하가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위징은 태종에게 상소를 올려 ‘무위지치의 열 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임금은 자기가 원하는 것 앞에서 만족할 때 자신을 경계하고, 토목공사를 일으킬 때는 그칠 때를 알아서 백성이 편안한 생활을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위태로운 일을 생각할 때는 겸손함과 온화함으로 자신을 경계하고, 자만하여서 차고 넘는 것을 두려워할 때는 곧 큰 강과 바다가 개천의 물줄기를 모두 받아들인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 ‘군도’편, ‘정관정요’ 권1


권1 중에서 ‘군도’ 편은 최고 통치자인 임금이 갖추어야 할 도리에 대하여 태종과 신하들이 문답을 주고받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위징은 상소를 올려서 “수많은 임금들이 천명을 받아 창업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덕행을 잃고 수성을 제대로 한 임금은 별로 없다”라고 하였다. 창업할 때는 성심성의를 다하여 신하들을 대하였지만, 뜻을 얻고서는 방종하여서 거만하게 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결국 두려워할 것은 민심이며, 물은 배를 두둥실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으므로 마땅히 신중하여야 한다며 ‘무위지치’를 위한 열 가지 방법을 논하였다. 자신의 총명한 눈과 귀를 사용하여 올바로 판단한다면 무위의 위대한 도리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징은 각종 미덕을 펼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직무를 맡기며, 정확한 의견을 선택하여 일에 반영하면 신하들과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나라에 충성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임금은 사냥을 즐길 수 있고, 오래 살 수 있으며, 백성들에게 역설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태종과 위징은 편안함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태종은 정치에서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임명하고, 충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왜 어려운지 이유를 물었다.


이에 대하여 위징은 대답한다. “임금들이 상황이 위급할 때는 어질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임명하고 충언을 받아들였으나, 천하가 안정되고 살기 좋아지면 게을러지고 태만하게 되어 충언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편안한 시기가 오면 나태하게 되어 국력이 쇠약하고 위급한 상황에 이르게 되므로 이러한 때일수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음에 수록된 ‘정체’ 편에서도 임금이 겸손하게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신하들도 거리낌 없이 시비를 가릴 수 있을 때 나라의 정치가 안정된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태종은 자신의 눈과 귀 및 팔다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신하에게 맡길 테니 임금과 신하가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자며, 신하들의 협조를 당부하면서 군신일체를 중요한 덕목으로 제안하였다.


앞서 설명하였듯 태종과 신하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대부분 유교의 경전에 들어 있는 이야기를 인용하기에, 자연스럽게 유교적 통치이념을 강조한다. 그러나 ‘무위지치’는 노자가 ‘도덕경’에서 주장한 ‘무위이화’와도 사상적으로 통한다. 따라서 유교와 도교가 융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을 가려내는 기준을 마련하다

공정한 원칙을 버리고 충직하고 어진 사람을 멀리한다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다하여도 나라를 성공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 권3의 ‘택관’ 편에서는 신하의 행위에는 여섯 가지 장점과 단점이 있다고 하며, 육정과 육사에 대하여 논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육정은 첫째, 일의 단초가 발생하지 않고 조짐이 드러나기 전에 홀로 나라의 존망과 득실의 요체를 미리 살펴보고, 사단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방지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상황에 처하도록 하는 신하가 성신이다.


둘째, 정성껏 국사를 처리하고 매일 임금에게 아뢰고, 임금에게 좋은 생각이 있으면 따르고, 임금에게 허물이 있을 때 바로잡는 신하가 양신이다.


셋째,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어질고 재능 있는 자를 추천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늘 옛 성현의 행실을 칭찬하며, 그것으로 임금의 의지를 격려하는 신하가 충신이다.


넷째, 일의 성패를 분명히 알고, 일찍 대비하여 방책을 구하고, 틈이 있는 부분을 막고 재앙의 근원을 끊으며, 재앙을 복으로 만들어 임금으로 하여금 마침내 근심이 없게 하는 신하가 지신이다.


다섯째, 공문을 준수하고 법령을 받들어 관리를 임명하고 일을 맡길 때 뇌물을 받지 않으며 봉록을 사양하고, 포상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음식을 절약하며 검소하게 사는 신하가 정신이다.


여섯째, 나라에 혼란이 발생할 때, 아첨하지 않고 간언으로 임금의 안색을 바꾸게 하고, 임금의 허물을 면전에서 말하는 신하가 직신이다.” - ‘택관’편, ‘정관정요’ 권3


성신, 양신, 충신, 지신, 정신, 직신 등 육정에 대한 이야기는 전한 시기 유향이 한대까지의 사적과 유명한 인물들의 일화를 편집한 ‘설원’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유교적 정치사상과 사회윤리에 입각하여 교훈적인 내용을 실었는데, 이어서 육사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첫째, 관직에 안주하고 봉록을 탐내며 공사에 힘쓰지 않고, 세태의 흐름에 따라 부침하며 일이 발생하면 관망하고 자신의 견해가 없는 신하는 구신이다.


둘째, 임금이 어떤 말을 하든 모두 좋다고 하고, 임금이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옳다고 하며, 몰래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바치고, 그것으로 임금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임금의 술수에 영합하여 자신의 관직을 보존하며, 임금과 함께 즐기면서 이후의 폐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고 아첨하는 신하는 유신이다.


셋째, 마음속은 간사하고 나쁜 생각으로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근신하고, 교묘한 말과 온화한 낯빛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지만 안으로는 어진 사람을 질투하는 신하는 간신이다.


넷째, 교묘하게 잘못을 가리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속으로는 골육지친의 관계를 이간하고, 밖으로는 조정에서 반란을 조장하는 신하는 참신이다.


다섯째, 권력을 쥐고 전횡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사사로이 패거리를 지어 자기 집만 부유하게 하고 임의로 임금의 뜻을 위조하는 신하는 적신이다.


여섯째, 화려하고 교묘한 말로 임금을 속여 불의에 빠지게 하고, 사사로이 당파를 결성하여 임금의 눈을 가려서 흑백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고, 시비가 불분명하여 임금의 악명이 전국에 전해지고 사방의 이웃 나라에까지 퍼지도록 하여 나라를 멸망시키는 신하는 망국지신이다.



융화의 정신으로 신라 중흥을 꿈꾸다 - 최치원 ‘계원필경’ ‘사산비명’

유, 불, 선을 융합한 풍류도 정신의 부활

삼국시대에 전래 수용된 유교와 불교 및 도교는 삼국의 통일 이후 통일신라에서 사상적으로 각기 더욱 발전하였다. 처음 유교는 기원 전후한 시기에 낙랑군을 통하여 전해졌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신라는 5세기경에 수용하였다. ‘임신서기석’에는 6세기 신라의 청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할 것을 맹세하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불교 또한 고구려와 백제에는 4세기 말, 신라는 5세기 말에 이르러 전래 수용되었다. 그러나 순조롭게 공인되었던 고구려와 백제와 달리, 신라는 6세기 초에 이차돈의 순교를 통하여 공인이 이루어졌다.


한편 백제의 ‘산경문전’을 보면 도교가 6~7세기경 수용된 것을 알 수 있으며, 고구려의 경우는 을지문덕 장군이 우중문에게 보낸 시에서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7세기 전반에는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에는 7세기 중엽 통일전쟁 직후에 조성한 월지를 비롯한 궁원지를 통하여 도교적인 무위자연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왕경의 북쪽에 북원궁, 남쪽에 남도원궁, 동쪽에 청연궁을 조영하여 가산을 조성하고 도교적인 의례를 지내기도 하였다.


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교와 불교 및 도교는 각각 활발히 발전하였다. 귀족의 자제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유교 경전을 배우고 외국인 대상의 시험인 빈공과에 합격하기도 하였으며, 신라에는 유학의 경전을 시험 보는 국학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후 9세기에 접어들자, 각기 발전을 이루고 있었던 유교와 불교 및 도교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하나로 융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당시의 최치원은 ‘난랑비서’를 통하여 토착신앙을 기반으로 외래종교인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하나로 아우르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공직생활을 하며 작성한 문서와 시문을 모아서 귀국 후 ‘계원필경’을 편찬하고 왕명으로 선사들의 탑비문인 ‘사산비명’ 등을 지었는데, 이들에 유, 불, 선 삼교 합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도 유교와 불교 및 도교에 대한 인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난랑비서’이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고 하며, 그 가르침을 개설한 근본은 선사에 상세히 갖추어져 있으며, 실은 삼교를 포함하고, 군생들과 접하여 교화를 한다. 또한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를 하고, 집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은 노나라 사구(공자)의 뜻이요, 무위의 일에 처하고 말하지 않는 것의 가르침은 주나라 주사(노자)의 종지이며, 어떤 악업도 짓지 않는 것과 여러 선행을 받드는 것은 축건태자(석가모니불)의 교화이다.” - ‘난랑비서’


선사란 화랑들의 역사를 기록한 ‘화랑세기’를 이른다. 화랑세기를 지은 김대문은 “현명한 재상과 충신이 화랑으로부터 나왔으며,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군인이 이로부터 말미암았다”라고 하였다. 화랑도는 화랑과 낭도로 이루어지며 그중에서 가장 우수한 화랑을 국선이라고 하였는데, 김유신 장군도 국선을 역임한 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화랑과 국선이 수련하면서 항상 염두에 두는 이념이 ‘풍류도’인 것이다. 풍류도에는 유교와 불교 및 도교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통하여 중생들과 소통하여 교화하고자 하였다. 본래 우리나라의 토착신앙은 천신과 산신을 숭배하는 것이지만,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와 도교, 그리고 인도에서 비롯하여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불교가 융합된 것이다.


결국 토착신앙인 자연숭배 신앙에 유교적 가치인 충효 사상, 노자의 무위자연사상, 불교의 이상인 집착과 구애를 받지 않는 자비와 선행까지 모두를 아울러 함께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유학자가 바라본 사유의 용광로, 삼국과 통일신라 - 김부식 ‘삼국사기’

신라, 유교와 불교의 유연한 공생

왕위에 오른 무열왕은 당나라의 선진 제도를 받아들여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라의 발전을 도모하여 즉위 7년째에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고구려마저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니, 이를 위하여 전쟁 영웅 김유신에게 자신의 공주를 시집 보내 유대를 공고히 하고 그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사후에 화장을 하고 유골을 동해안 입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문무왕은 당나라를 몰아내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드러내기 위하여 즉위 21년째 6월에 신라의 왕궁과 성곽을 새로이 신축하고자 하는 뜻을 품는다. 이에 의상법사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궁궐의 신축보다는 정도를 행하 는 것이 왕업을 더 빛나게 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공사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문무왕이 궁성을 신축하는 데 불교 승려인 의상법사에게 그 의견을 물어보았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만큼 불교계가 당시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상법사가 문무왕에게 신축을 만류하는 명분은 ‘정도’이다. ‘정도’를 행하여 왕업을 더욱 영속적으로 이어나가자는 것은 유교적 가치에 따른 것이다. 이는 당태종이 궁궐을 지으려는 준비를 다하였지만 궁궐을 신축하지 않았다는 ‘정관정요’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의상법사는 불교 승려이면서도 왕업의 지속성에 대하여 언급할 때는 유교적인 가치로 판단의 근거를 삼고 있다. 그야말로 유교와 불교가 함께하는 유, 불 융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구나 문무왕 이전의 왕들을 모두 무덤에 매장하였던 것과 달리, 문무왕은 불교식 장례인 화장을 하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그만큼 불교가 당시 대중화되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경우 유골을 보관하는 골호가 7세기부터 나타나고 있다.


불교는 5세기에 신라에 전해졌지만, 귀족 세력의 토착 신앙과 갈등을 겪으며 법흥왕 대에 이차돈이 순교하고 난 이후에나 공인되었다. 여기에 장례문화는 매우 보수적인 것이어서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바로 화장을 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 장례가 화장제로 변화하게 된 계기는 삼국통일전쟁을 치르면서라고 할 수 있다.


삼국통일전쟁을 겪으면서 운명을 달리한 신라의 장군들과 군사들을 일일이 매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장례는 화장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문무왕도 왕이지만 솔선수범하여 불교식 장례인 화장을 한 것이다. 그리고 후손들이 일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도록 동해안 입구에 유골을 뿌려 대왕암을 기억의 장소로까지 설정하였다.


이에 더하여 문무왕은 태자가 덕이 있으니 바로 왕위에 오를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은 이를 보내는 도리와 남겨진 이를 위한 섬김을 강조하면서 자기의 관 앞에서 즉위하도록 당부하였다. 이러한 유언은 매우 유교적인 가치에 의한 것으로 장례는 불교식으로 지냈지만, 통치의 이념은 유교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족의식을 일깨운 화합과 통합의 가치 - 일연 ‘삼국유사’

함부로 살생하지 않으나 쉬이 물러서지도 않으리라

신라에 전해지는 계율인 ‘세속오계’는 유교적 가치와 불교적 가치를 모두 강조하고, 전쟁이 심하였던 당시 삼국의 상황에 걸맞은 호국적 성격 또한 강하게 나타낸다. ‘삼국유사’ 4권의 원광서학조에서,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준 ‘세속오계’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사군이충’ 임금에게 충성하고, ‘사친이효’ 부모에게 효도하고, ‘교우유신’ 친구와 사귈 때 믿음을 가지며, ‘임전무퇴’ 전쟁에 임해서는 후퇴하지 않고, ‘살생유택’ 살생을 할 때는 시기와 크기를 잘 선택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은 유교적인 가치인 충효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친구와 사귈 때 믿음을 가진다는 것도 유교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전쟁에 임하여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은 호국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여기에 살생을 할 때 시기와 크기를 잘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은 불살생의 불교적 가치를 경우에 따라서 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원광서학조에서는 ‘속고승전’을 인용하여 원광법사가 불교에 귀의하게 된 이야기를 전한다. 중국에 가서 불교의 종지를 듣고 난 이후, 세간의 경전이 썩은 지푸라기처럼 여겨져 헛되이 유교를 찾은 것이 실로 생애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원광법사가 원래 신비한 기량이 넓고 문자에 물들기를 좋아하여 도가와 유학을 섭렵하였으며, 여러 대가와 역사서를 연구하여 문명이 삼한에서 뛰어났다고도 전한다.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성실론’과 ‘열반경’을 공부하고 ‘성실론’과 ‘반야경’을 강론한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귀국 후에 나라를 위하여 전표와 계서 등 나라에서 오가는 국서를 썼다는 것과 임금의 병환을 치료하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편 원광법사는 토착신앙과도 관련이 있다. ‘수이전’을 인용한 기록을 보면 그는 30세에 조용히 거처하며 수도할 생각으로 안강에 있는 삼기산의 금곡사에서 홀로 지냈다. 그런데 산신이 나타나 중국에서 불법을 공부하여 나라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것을 권유하면서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계책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원광법사가 그 말에 따라 중국으로 가서 11년을 머물렀는데, 삼장에 널리 통달하였으며 유학도 겸하여 배웠다고 한다.


진평왕 22년 중국에 온 신라 사신을 따라 본국으로 돌아온 원광법사는 산신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이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로 갔다. 밤중에 또 산신이 와서 중국을 잘 다녀왔느냐고 묻고는 계를 받겠다고 하여 수계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서쪽으로 불법을 배우러 가는 사람이 많게 된 것은 그가 일찍이 중국에 가서 불법을 배워 길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어지는 기록에서는 원광법사가 귀국하여 항상 ‘대승경전’을 강설하였으며, 검사표를 쓰고,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인들이 지켜야 할 ‘세속오계’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원광법사는 승려이지만 국가를 위해서는 걸사표를 썼다. 동왕 30년 왕은 수나라의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그에게 걸사표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는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로서 할 일이 아니지만, 저는 대왕의 나라에서 대왕의 수초를 먹으면서 감히 명령을 좇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글을 지었다. 동왕 33년에 신라는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를 청하였으며, 이에 수양제는 100만의 군대를 이끌고 이듬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원광법사는 불교 승려이면서도 국가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다. 충효사상을 강조하는 세속오계를 남기면서도, 도교에도 해박하였고 토착신앙 또한 신봉하였다. 유, 불, 선의 융화를 몸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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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