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의 동물수첩

   
박성호 (지은이)
ǻ
몽스북
   
18800
2025�� 08��



■ 책 소개


낯선 땅에서 만난 낯선 동물들

 

낯선 땅을 돌며 겪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자 그곳에서 만난 동물들에 관한 기록이다. 박성호 작가는 세계 90개국을 돌며 우연히 낯선 동물들과 마주하게 되었고 그 순간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수첩에 담았다. 북국의 순록과 사하라의 사막여우, 아이슬란드의 토종말, 아마존의 카피바라, 우간다의 대머리황새, 벨리즈의 매너티까지. 

 

이름도 생김새도 익숙하지 않은 동물들이 각기 다른 세상에서 다른 표정으로 살고 있다. 작가가 들려주는 동물들의 이야기는 다큐처럼 사실적이지만 동시에 시처럼 감성적이다. 먹이를 구하던 눈빛, 귀를 쫑긋 세운 호기심, 낯선 인간을 대하는 조심스러운 태도, 초연한 듯한 무심한 몸짓까지. 작가는 동물을 멀리에서 관찰하기도 하고, 그들의 눈빛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으려고 해본다. 

 

동물과 함께 숨쉬고 물 속을 유영하기도 하며 동물들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해본다. 자연 속 피조물의 삶을 보며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 안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동물의 숨결을 느끼며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낯선 생명체가 전해주는 위대한 힘에 매료된다.

 

■ 저자 박성호

인생의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 지구 탐험을 선택한 여행가.

선한 사람과 동물, 광활한 자연 속 홀로 누워있기를 좋아한다.

낯선 풍경을 오래 들여다보고, 말없는 존재에 마음이 기운다.

 

1992년생. KAIST 산업디자인학과를 수석 졸업했지만, 세상을 향한 호기심에 이끌려 여행 작가의 길을 택했다. 지금껏 지구 90개 나라를 여행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을 비롯한 방송과 다양한 강연을 통해 여행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된 호주 바나나 농장 생활기를 『바나나 그다음,』에, 산골 칩거 생활기를 『은둔형 여행인간』에 담았다. 이번 책 『여행가의 동물수첩』은 세계 곳곳에서 눌러 쓴 수첩 속 낯선 동물과의 특별한 순간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ant.sungho

www.antsungho.com

 

■ 차례

Prologue 길 위에서 만난 동물들 8

 

여행가라는 직업 14

노르웨이 브로스메틴덴 산봉우리_순록

 

먹이를 노리는 피리 소리 34

모로코 마라케시 제마 엘프나 광장_코브라

 

어른은 자라서도 아이가 될 때가 있다 48

이집트 서부 사하라 사막 지대_사막여우

 

침묵이 타오르는 하얀 평원 62

아이슬란드 스나이펠스네스 반도_아이슬란드 토종말

 

날개 없이 날다 76

벨리즈 키코커 아일랜드_매너티

 

아마존 강가의 작은 몽상가 92

볼리비아 북부 아마존 유역_카피바라

 

절벽 위의 표정들 110

에티오피아 A2 고속도로_바위너구리

 

안갯속 은밀한 사생활 126

페로 제도 미키네스 섬_퍼핀(코뿔바다오리)

 

꺾인 고개의 저승사자 144

온두라스 코판_가면올빼미

 

사바나 물웅덩이 발레단 162

나미비아 오카우쿠에조 캠핑장_스프링복

 

물지 않는 상어 176

벨리즈 키코커 아일랜드_너스상어

 

차를 훔친 것처럼 188

나미비아 남서부 나미브 사막 지대_겜스복

 

못생긴 새와 모닝 샌드위치 202

우간다 진자 빅토리아호_대머리황새

 

세월은 등껍질로 말한다 220

잔지바르 프리즌 아일랜드_알다브라 코끼리거북

 

구김 없는 어른 238

마다가스카르 안다시베 국립공원_리머(여우원숭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254

페루 콜카 캐니언_안데스 콘도르

 

Epilogue 희망은 너구리처럼 튀어나온다 274

Bonus Track 버릇없는 궁둥이 279

 




여행가의 동물수첩


어른은 자라서도 아이가 될 때가 있다

이집트 서부 사하라 사막 지대_사막여우

사람들은 흔히 '사막'이라고 하면 탐스러운 오렌지빛 모래 언덕을 떠올리겠지만, 세상에는 하얀 사막도 있다. 끝없이 펼쳐진 깨끗한 백사장 같다. 때로는 너무 희어서 섬광처럼 눈이 시리다.


그런 사막은 미국 뉴멕시코주 남부에도 있고, 에티오피아 북쪽 고원에도, 볼리비아 우유니에도 있다. 하나같이 곱고 아름다운 곳이다.


언젠가 나는 이집트 사하라의 하얀 사막에서 하루를 묵은 적도 있다. 무수히 쏟아지는 별빛 아래, 흔들리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퍽 낭만적인 밤이었다.


해 진 뒤 사막에서 지어 먹는 밥은 왜 그리 맛있는 것인지. 모래를 끌어모아 가운데를 파내 작은 화로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위에 석쇠를 올려 닭고기를 지글지글 굽는다. 속이 완벽히 익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다가, 라임즙을 적당히 뿌리고 소금, 후춧가루를 살짝 쳤다.


반찬은 오이, 양배추, 당근을 절여서 만든 중동식 피클, '토르시'. 그리고 흔히 '걸레빵'이라 부르는 납작한 이집트 전통 빵 '에이쉬'뿐이지만, 이 정도면 만족이다. 분위기만 좋으면 그런 것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긍정의 힘이 생긴다. 그저 불만 꺼뜨리지 않으면 된다. 버적버적 불꽃이 장작을 씹어 먹는 소리는, 사막에 유일하게 남은 소리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붉은빛 작은 반구가 만들어지고, 반딧불이 같은 불티가 그 안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반구 바깥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넓디넓던 세상이 오직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기분이다. 겨우 집 한 채보다 클까 말까 할 정도의 작은 별.


신기하지 않나? 그 작은 소행성 속의 나는 꽤 중요한 인물이 된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유일한 빛도 꺼뜨릴 수 있는. 그러니 의자나 테이블이 없어도 무척이나 대접받는 기분이다.


밥을 다 먹고 난 뒤에는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푹신하고 시원한 모래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하늘에선 은하수의 푸른빛이 조용히 출렁이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데, 하늘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단 삼십 초만 바라봐도 알 수 있다. 수두룩이 빽빽한 별들이 제각기 으스대며 반짝이고 있으면 정말로 물결치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 부는 호수에 비친 밤하늘처럼, 부드럽게 일렁인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건 너무 흔해서 소원 비는 것조차 귀찮아진다.


다음날 침낭 속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불길은 사그라져 있었다. 재에 덮인 불씨만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나는 일출을 보기 위해 천막 뒤편의 바위를 기어올랐다. 마을버스 높이쯤 되는 커다란 바위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숨을 헐떡이며 올라 정상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이내 해가 떠올랐다. 끝없는 지평선만 이어진 사막 한복판 위로. 나는 다급히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이제 막 고개를 내민 해는 생각보다 빠르게 떠오르니까. 렌즈 조리개를 바짝 조이며 서서히 초점을 맞춰갔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얀 사막은 빛의 색감을 그대로 닮는다. 처음엔 세상이 온통 시뻘건 마그마에 잠겨버린 듯싶더니, 조금씩 분홍빛 포근한 세상이 피어났다. 누군가 실수로 파스텔핑크 물감을 엎질러 놓은 것 같은.


일출을 보고 나서는 다시 천막으로 돌아와 칫솔을 챙겼다. 여전히 잠이 덜 깬 채, 세상 귀찮은 걸음걸이로 양치하러 갔다. 쭈그리고 앉아 치약을 짜는데, 바위 뒤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났다. 자칼인가 싶었다. 아프리카 평원에서 이른 아침에 먹이를 찾아 떠도는 자칼은 흔하다. 녀석은 다른 동물이 사냥해 먹고 남은 찌꺼기를 훔쳐 먹는 것을 업으로 삼은 놈인데, 생김새도 덩치도 늑대와 개의 중간쯤 된다. 다만 뾰족한 이목구비와 찢어진 눈 탓에 왠지 모르게 음흉해 보이는 놈이기도 하다.


바위 뒤쪽에 어젯밤 썼던 접시를 모아둔 게 생각났다. 뭐라도 물어 가면 곤란할 테니, 나는 놈이 보이는 곳으로 돌아가 멀찌감치 지켜보기로 했다.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지만, 멀리 쫓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 자칼은 없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는 화들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바위 뒤로 숨어버렸다.  그곳엔 자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그마한 동물이 찾아와 있었다. 『어린 왕자』에서나 보았던, '사막여우'였다. 그것도 무려 두 마리나! 나는 진심으로 거액의 복권이라도 당첨된 기분이었다. 펑펑, 마음속에 잭팟이 터졌다.


장담할 수 있는데, 사막여우는 우주에서 가장 귀여운 생명체다. 쫑긋한 큰 귀와 작고 오뚝한 코, 촉촉한 눈망울과 새하얀 배. 그리고 먹에 살짝 담갔다 뺀 붓처럼 생긴 꼬리, 만지지 않아도 느껴지는 부들부들한 털까지.


아아, 나는 귀여운 동물 앞에선 한없이 마음이 약해진다. 창가에 꺼내 둔 아이스크림처럼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린다. 귀여움을 느끼는 감정은 무엇보다 강력하다. 때론 질투와 증오도 훌쩍 뛰어넘는다.


사막여우도 자기가 귀여운 걸 알까? 아마도 모를 것이다.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귀엽다. 나는 이 작은 친구들을 도망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막여우는 무척이나 겁이 많은 동물이니까. 그래서 멀찍이 쭈그리고 앉아 양치를 하며 지켜보았다. 지구 수십억 인구가 그날 아침 일어나서 양치를 했겠지만, 그날만큼은 내가 가장 행복한 양치질을 했을 것이다.


녀석들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끼깅 소리를 내며 울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서로 물고 밀치고 난리가 났다. 빙빙 돌며 쫓고 쫓겼다. 얼핏 보면 둘이 티격태격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안다. 녀석들은 지금 자기들 방식으로 놀고 있다는 것을. 그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사람을 감질나게 한다. 애간장을 다 태운다.



아마존 강가의 작은 몽상가 

볼리비아 북부 아마존 유역_카피바라

일반적으로 말해서, 동물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녀석들은 대개 호기심이 왕성한 데다 제각기 특출난 감각 기관도 갖고 있으니까. 알다시피 갯과 동물의 경우에는 냄새가 효과적이고, 고양잇과 동물에겐 움직이는 물체가 효과적이다.


유전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험난한 야생에서 살아남은 녀석들에겐 생존에 대한 원초적 욕망이 뼛속 깊이 심어져 있다. 이 때문에 웬만해선 경계심을 풀지 않고, 주변 상황에 민감히 반응하기 쉽다. 물론 사람에게 길들여진 경우나, 도심 속 비둘기처럼 '이것들이 감히 나를 건들지는 않겠지?' 하고 경험을 습득한 경우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보통의 메커니즘으론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카피바라, 놈은 이상하리만치 목석 같다. 무시무시한 카이만 악어와 아나콘다가 득실거리는 정글에 살면서도, 언제나 명상에 잠겨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다. 같은 서식지에 사는 다람쥐원숭이와는 결 자체가 다르다. 악동 노릇을 하는 다람쥐원숭이는 숲속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지만, 카피바라는 늘 같은 자리에 있다. 현세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누군가 옆에서 알짱알짱해도 시종일관 릴랙스, 오직 릴랙스다.


참, 근데 카피바라를 아시는지? 대형견만 한 덩치를 가진 꼬리가 없는 쥐. 앞니가 튼튼한 그 쥐 맞습니다. 다행히 징그럽지는 않고요.


내가 카피바라를 만난 건 아마존을 방문했을 때였다. 어느 12월의 여름(남반구이므로), 그곳 깊숙이 자리한 베이스캠프에 며칠 묵은 적이 있다. '지구의 허파'라는 명성답게 끝없이 으리으리한 정글이었다.


카피바라는 아마존에서 찾기 힘든 동물은 아니었다. 물가 여기저기에 흔하게 있었다. 심지어는 베이스캠프 바로 앞에 흐르는 작은 강 건너에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도착하자마자 통나무집에 짐을 풀어놓고 나와 녀석을 구경했다. 바람 부는 그늘 아래 적당한 그루터기에 걸터앉아서.


비록 무시당하긴 했어도 "안녕, 카피바라 씨!" 하며 말도 걸어봤다. 그때까진 '아아, 내가 정말 아마존에 왔구나.' 하고 한창 들떠 있던 터라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좋았다. 구체적으론 '아마존에 왔다.'라는 사실보다 '생각대로 이루었다.'라는 것에 마음이 뿌듯했다. '가려고 마음먹었더니 진짜로 왔네.' 하는 놀라움. 잠시나마 세상이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이럴 땐 정말 인생을 아낌없이 사는 기분이다. '똑바로'인지는 몰라도 '제대로'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정글의 진실을 알아차릴 때가 왔다. 피라냐 낚시 한 번, 아나콘다 찾으러 나간 것 한 번 말고는 내내 널브러져 있었다. 태양에 주르륵 녹아가는 밀랍 인형처럼 안일하고 나태하게. 그러면서 더더욱 많은 시간을 강 건너 카피바라를 관찰하는 데에 쏟게 되었다.


지켜본바, 녀석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비정한 녀석이다. 내가 그토록 매력 없는 수컷인가 서운할 정도로.


발발거리는 새끼 치와와였다면 고개를 백 번은 더 돌렸을 것이다.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무던히 애를 썼지만 모두 허사였다. 예컨대 관심 받기 좋아하는 꼬마처럼 힘껏 물수제비를 뜨고 있어도, 해먹 위에 앉아 설원을 달리는 야생마처럼 흔들흔들하고 있어도. 녀석은 어찌 된 노릇인지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다른 동물에게도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람에게만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그저 한결같았다. 살포시 눈을 감고 턱을 든 채로 가만히 있거나, 아몬드 초콜릿을 닮은 눈동자로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만 지켜보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몸가짐에 과장이나 허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아마존의 작은 몽상가' 같았다.


그렇지만 터무니없는 몽상가는 아니다. 진짜배기다. 강을 바라보는 아득한 눈빛에, 가볍지 않고 어딘가 고귀한 기운이 있었다. 머릿속에 온전하고 단단한 자기 세계를 구축해 낸 것만 같은. 이른바 외유내강이다. 이따금 코를 실룩거리거나 작은 귀를 파닥이기도 했지만, 그건 의지와 상관없어 보였다.


항상 그러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잠에서 깨어 양치하러 나왔을 때도 그러고 있었고, 점심을 먹고 쉬러 나왔을 때도 그러고 있었다. 밤하늘 달빛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사라져 있기도 했지만, 잠시 다른 일을 하고 돌아오면 늘 그렇게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없으면 허전한 병풍처럼 되어버렸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한여름 따가운 햇빛을 받은 강물은 펄떡이는 연어 빛깔처럼 번뜩였다. 나지막이 끊이지 않는 물소리는 제법 듣기 좋은 배경 음악이 됐다. 시계는 보지 않았다. 볼 필요도 없었고. 다행히 긴 시간 그러고 앉아 있어도 지겹지 않았다. 나도 전생에 카피바라였을까? 세상 모르고 마냥 보았다. 녀석은 대체 물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옛날에 본 영화 중에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가 있다. 감독은 로버트 레드포드. 그때도 이미 오래된 영화였는데, 지금처럼 잔잔한 강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영화이다.


배경은 미국 몬태나주의 빅 블랙풋 강가. '두 아들과 아버지의 낚시'라는 단순한 소재를 통해 가족 간의 사랑, 갈등 그리고 참다운 인생에 관한 질문을 잔잔하게 그려냈다. 극적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신이 없어서 어깨 힘 빼고 편안히 볼 수 있다. 여러모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영화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도 좋고, 작은아들 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의 젊은 시절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에 깊은 산울림 같은 여운이 있다. 러닝 타임도 딱 적당하다. 한적한 산골 마을의 정취를 좋아한다면 꼭 한 번 찾아보시길.



물지 않는 상어

벨리즈 키코커 아일랜드_너스상어

괜스레 탐탁지 않아 거리를 두려는 사람이 자꾸만 친해지고 싶다고 들이대는 기분을 아시는지? 확실히 그런 기분이 유쾌하다고 할 수는 없다. 상당히 난처하면서도 찔리는 기분이다. 거듭 선을 긋는 내게 치졸한 도덕적 결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심하면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기도 하고. 상대가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일전에 나는 이런 기분을 물속에서 느낀 적도 있다. 그것도 육지에서 한참 떨어진 카리브해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을 때였다. 더할 나위 없이 파랗고 아름다운 바다였다.


투명한 파도가 일렁이면 반짝이는 물비늘이 수면 위를 꽃밭처럼 덮었다. 작은 물고기 떼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고, 덩치 큰 가오리와 바다거북도 근처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난처함을 느낀 것은, 자꾸만 내 몸에 비비적대는 상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짙푸른 여름빛이 완연했던 어느 날의 이야기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나설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이른 아침이었고, 아마도 잠이 덜 깬 탓이 컸을 것이다. 되레 들떠 있던 쪽은 선장 아저씨였다. 구릿빛 근육질 몸매에 주름 가득한, 전형적인 바다 사나이다. 아저씨가 선글라스로도 숨길 수 없는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익살스럽게) 놀라지 말라고, 지금 가는 곳에는 물지 않는 상어가 가득하니까."


그런데 죄송하게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나는 원체 리액션이란 게 없는 사람이라 아저씨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지도 않았다. 톰 크루즈를 닮은 상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알 게 뭐냐. 그저 열린 여행자의 자세로 '세상에는 물지 않는 죠스도 있는 거구나. 뭐야, 시시한걸. 하고 심드렁히 받아들였다.


이윽고 엔진이 꺼지고, 배가 멈추자 귀가 한결 편안해졌다. 푸드덕거리는 가마우지 날갯짓 말고는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얕은 바다 밑엔 하얀 모래가 곱게 깔려 있었고, 물이 어찌나 맑은지 그대로 바닥이 관통해 보였다. 조개도 산호도 해초도 없어서 경치 좋은 호텔 수영장에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상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상어 비스름한 것'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선장 아저씨를, 시답잖은 농담을 좋아하는 허풍쟁이로 분류해 두었다. 적어도 토막 난 생선 미끼를 바다에 풀어놓기 전까지는.


실로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다. 족히 스무 마리는 되어 보이는 상어떼가 사력을 다해 돌진해 왔다. '뚜 둠, 뚜 둠' 하는 상어 전용 등장 곡이 울릴 새도 없었다. 덩치는 작았지만, 삼각형의 뾰족한 등지느러미는 제대로 달려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자신이 한 말을 증명하듯, 허리를 숙여 바다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나는 순간 아저씨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등에 비비대며 반기는 상어들. 녀석들은 분명 '어루만지고 귀여워해 달라'고 앞다투어 애원하고 있었다. 좀처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격렬히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들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세상에는 리트리버 새끼처럼 행동하는 상어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배가 멈춰 있으니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는 침을 발라 물안경을 닦아내고 머리에 썼다. 천천히 배의 후미로 걸어가 텅 빈 바닷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짧은 파문이 일었다. 차가운 물결이 몸을 휘감고, 이내 수정처럼 맑은 물속에서 눈을 떴을 때......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상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마치 진득한 키스 세례라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물지 않는'이란 단어가 까마득히 증발해 버렸다. 오로지 '상어'만 남았다.


계속해서 상어들이 품속에 파고들었다. 까슬까슬한 가죽이 허리며 엉덩이며 할 것 없이 맨살에 강렬히 닿았다. 난생처음 느끼는 아찔한 감촉이었다. 자기들 딴에는 장난 삼아 간지럽히는 거였겠지만, 솔직히 나는 무서웠다. 종종 귓가에서 죽음의 콧김을 느껴야만 했으니까. 만약 녀석들이 돌고래나 해달이었다면 '그래 얼마든지 날 갖고 놀아라. 다만 끝나고 제자리에만 갖다 놔.'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이빨 달린 상어였다.


혹여나 녀석들을 실수로 치게 될까 봐 선뜻 팔다리를 휘젓지도 못했다. '야야, 귀찮게 하지 말고 딴데 가서 놀아!' 하는 시건방진 태도도 보일 수 없었다. 그저 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얌전히 떠 있어야만 했다. 돌이켜 보면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무시무시한 귀상어나 백상아리도 아니고, 겨우 이런 시시한 상어에게 겁을 먹다니. 덩치도 내가 두세 배는 컸을 터인데.


그래도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물 밖에서의 용기와 물속에서의 용기는 아주 다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닷속에서 한없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본디 망망대해란 그런 곳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홈그라운드가 아니다. 아가미 없는 동물이 언제든 익사해 죽을 수 있는 곳이고, 시속 백 킬로미터의 어뢰처럼 돌진하는 거대 다랑어와 충돌할 수 있는 곳이다. 비록 희박한 확률이겠지만.


어쨌든 바닷속에서 상어와 헤엄치고 있는 것은 들판에서 굶주린 승냥이를 마주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타이밍 봐서 눈을 찌르고 부리나케 도망쳐야지.' 따위의 무모한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다. 나는 그야말로 철저히 무장 해제된 반란군처럼 의지가 완전히 꺾여 버렸다.


"이봐! 그놈들 절대로 물지 않는다고.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그때 아저씨가 사람 좋은 목소리로 외쳤다. 물속에서 굳어 있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이제 보니 착한 아저씨다. 하지만 나는 빈정거리는 염세주의자처럼 '이봐 아저씨, 세상에 절대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하고 속으로 대꾸했다. 아무래도 못돼 먹은 건 내 쪽이다. 어쩔 수 없었다. 당시 물속의 나는 의심에서 비롯된 껄끄러움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형상화된 불신 그 자체였다. 상어의 외모에서 공포심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강아지처럼 구는 게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믿지 못한 건 그들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밑에 도사리고 있을 원초적 본능이었다. 어쨌든 상어는 상어였으니까.


극적인 풍경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피범벅이 된 상어 주둥아리. 단면이 으스러져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사람 다리. 존 싱글턴 코플리의 그림 '왓슨과 상어'에 묘사된, 삼켜지기 직전 인간의 공포 서린 눈빛까지. 사람은 두려움 앞에서 누구나 예술가가 된다.


그렇게 이십여 분쯤 흘렀을까, 무사히 배 위로 올라왔다. 다행히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계속해서 다음 포인트로 이동할 시간. 한데 녀석들은 못내 아쉬운지 물보라를 일으키며 떠나는 배를 한참이나 따라왔다. 제발 가지 말라고 낑낑대는 신발장 앞 강아지들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어찌나 애잔한 마음이 들던지.


이렇게 순수한 녀석들을 잠시나마 의심했다는 게 미안했다. 마치 내가 녀석들을 잠재적인 나쁜 상어들로 만든 것 같았다. 나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심연으로부터 이기적인 마음을 끌어 올린 것일까? 하긴 이런 내적 성찰도 물 밖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이려나? 뒤늦게 사과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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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