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

   
후안옌 (지은이), 문현선 (옮긴이)
ǻ
윌북
   
18800
2025�� 07��



■ 책 소개


먹고사는 일과 인간성을 지키는 일 사이에서 자유와 의미를 찾아 나선 한 사람의 이야기

 

이 책은 택배량 세계 1위, 택배의 첨단이자 천국으로 불리는 중국 베이징에서 실제로 택배기사로 일하며 그 ‘천국’을 지탱하는 심연을 경험한 저자의 화려한 데뷔작이다.

 

저자는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일, 하지만 누구도 쉽게 버티기 힘든 일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것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친다. 택배기사로 일하면서는 1분에 100원은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일분일초를 돈으로 계산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물류센터에서 야간 ‘까대기’를 할 때는 낮밤이 바뀐 피로감과 실시간으로 머리가 나빠지는 기분에 시달리고, 장애인이나 몸이 약한 동료를 외면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저자는 단순히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길고양이를 부르는 동료 택배기사의 모습 같은, 각박한 일과의 틈 사이에서 발견한 마법 같은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남보다 늦된’ 자신이 문학과 음악을 접하며 발견한 생각들, 이렇게 나를 키워낸 부모님과의 관계, 내가 쌓아가는 주위 사람의 관계 등에 대한 신선한 사유를 펼쳐낸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언론과 독자는 물론 문학계에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큰 사랑을 받은 것은, 이 책이 일하는 사람의 일상을 담담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런 현실을 살아내게끔 하는 이상과 그 사이에서 발견한 인간적 품위와 숭고함까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저자 


후안옌

노동자이자 작가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20년 동안 광둥성, 광시성, 윈난성, 상하이, 베이징 등 여러 지방과 도시를 옮겨 다니며 경비원, 베이커리 수습생, 편의점 직원, 노점상, 온라인 쇼핑몰 직원 등으로 일했다. 이후 광저우 근교 순더의 물류센터에서 야간 상하차 일을 하고, 베이징으로 옮겨가 2년간 택배기사로 일했다. 야간 근무 경험을 인터넷에 올리자 엄청난 반응이 일었고, 택배기사 경험과 다른 경력을 더해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를 출간하게 됐다. 첫 책을 출간하자마자 ‘올해의 책’,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쓰촨문학상, 중국청년작가상, 산렌도서상, 단샹제문학상 등 중국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다.

 

역자 문현선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와 같은 대학 통역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다. 현재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에서 강의하며 프리랜서 번역가로 중국어권 도서를 기획 및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연매장’, ‘색, 계’, ‘원청’, ‘피아노 조율사’,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제7일’, ‘아버지의 뒷모습’ 등이 있다.

 

 

■ 차례

 

1장. 광저우 물류센터 야간직

1년의 야간 노동이 남긴 것

 

2장. 베이징의 택배기사

구직과 면접

수습 기간과 입사

떠돌이 신세

정식 팀원이 되었지만

별점과 병가

성수기와 이직

핀쥔택배

1분 0.5위안이라는 시간 비용

복수 메모장

분실과 배상금

해고와 코로나19

 

3장. 상하이 자전거 가게

편의점 야간 직원

자전거 가게에서의 1년

 

4장. 다른 일들

첫 번째 일부터 여덟 번째 일까지

아홉 번째 일부터 열한 번째 일까지

글쓰기를 시작하다

열두 번째 일

열세 번째 일과 열네 번째 일

열다섯 번째 일

열여섯 번째 일과 열일곱 번째 일

에필로그: 래티샤 필킹턴의 위대한 실의

 

후기. 삶의 또 다른 부분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


베이징의 택배기사

정식 팀원이 되었지만

삼륜차를 받고 얼마 뒤 정식으로 팀에 합류했다. 우리 팀이 맡은 구역은 투차오 지하철역 이남의 이루이둥리 일대였다. 나는 그중에서 가오러우진과 신청러쥐 두 단지와 옆쪽의 유니버설스튜디오 공사장을 맡았다. 공사 중이라고 봉쇄해놓은 유니버설스튜디오는 면적이 무척 넓었다. 알아보니 총면적이 4제곱킬로미터에 이르렀으며, 그 넓은 땅에 전부 울타리를 쳐놓았고 출입문도 20여 개나 되었다. 나는 췬팡난제 남쪽, 신청러쥐 맞은편에 있는 3호 대문을 맡았다.


3호 대문은 하루 평균 물량이 10여 개로 배달 건이 많지는 않지만 배달하기 쉽지 않았다. 일단 공사장 안에 들어갈 수 없어 문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문 앞에는 택배함도 없고 경비원이 대신 받아주지도 않았다. 공사장은 수많은 구역으로 나뉘고 구역별로 시공업체가 다른데 경비원은 그런 시스템과 별도로 고용되어 있었다. 수취인들은 대부분 차가 없어 걸어오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20여 분이 걸리건만 꾸물대기까지 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꾸물대는 것처럼 보였다.


여름날 삼륜차를 3호 대문 앞에 세우면 철판은 순식간에 손이 델 정도로 뜨거워졌고 열 통 넘는 전화를 돌리고 나면 어느새 땀투성이가 되었다. 하루에 두 번씩 갔는데, 갈 때마다 30분 이상 기다렸고, 영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계속 전화를 해서 재촉해야 했다. 다 왔다는 말은 시간을 끌려는 거짓말일 때가 많았다. 심지어 내가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나 “지금 나왔는데 안 계시네요?”라고 전화해 따지는 사람까지 있었다.


매일 가오러우진부터 배달을 시작했다. 아침에 지점에서 출발해 20여 분이면 도착했다. 가오러우진 주민의 절반은 도시 정비 사업에 따라 외지로 나갔다가 주택이 지어진 뒤 다시 들어온 농민들이었다. 단지 대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너비 5미터, 높이 3미터의 대형 스크린이 있었다. 매일 아침 삼륜차를 몰아 들어갈 때마다 스크린에서는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야외 영화를 상영하던 농촌의 풍습이 그대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 중 누가 세상을 뜨면 가족이 단지 밖에 임시 빈소를 차리고 조문을 받았다. 빈소는 색색으로 꾸며졌다. 조립식 빈소는 길이가 30~40미터, 높이 3미터, 너비 4미터에 이르는 데다 출입하는 쪽에는 처마와 기둥, 아치까지 있었다. 처음 빈소를 봤을 때 나는 어느 대형 가전 브랜드에서 판촉 행사를 하는 줄 알았다.


가오러우진은 총 열여섯 동으로 구성되었고 1동에서 7동에는 기존 마을 주민이, 8동에서 16동에는 외지에서 온 세입자가 살았다. 원주민 동은 배달이 쉬웠다. 전부 현지인이라 낮에 노인들이 집에 있었다. 장을 본다든가 하는 이유로 잠시 집을 비웠더라도 물건을 문 옆이나 계량기함에 두면 됐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잘 알고 챙기기 때문에 광고지를 붙이는 사람조차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와 달리 세입자 등은 구성원이 복잡했다. 대부분 베이징 호적이 없는, 외지에서 온 젊은이들로 여럿이 함께 세를 얻어 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낮에는 다들 일하러 가 집에 사람이 없었다. 한집에 살아도 서로 잘 모르고 낯선 사람이 많이 드나들어 택배 물건이 잘 사라졌다. 처음 가오러우진에 갔을 때 같은 팀 동료는 내게 8동에서 16동을 맡기고 자신은 1동에서 7동을 맡았다. 나는 매일 가오러우진 절반과 신청러쥐 전체, 유니버설스튜디오 공사장을 오가느라 숨 돌릴 새 없이 바쁘고 피곤했다.


시간이 가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차올랐다. 같은 구역 안에도 배달하기 좋은 곳과 나쁜 곳이 있고, 누가 좋은 곳을 맡으면 다른 사람은 나쁜 곳을 맡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동료들끼리 제로섬게임을 하는 듯 내가 좋거나 남이 좋을 뿐, 모두가 좋을 수 없었다.


새로 들어오면 제일 나쁜 단지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은 조금 나은 단지로 갈아탈 기회가 생겼고 그러다 좋은 단지를 얻으면 오래 자리를 지켰다. 배달하기 힘든 단지는 새로 온 사람에게 넘겨졌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 따지지 않았던 신입도 시간이 가면 불공평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 심적 변화는 한두 달, 때로는 그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으면 신입은 남아 있지 않는다. 그래서 팀원의 절반은 변하지 않는데 나머지 절반은 수시로 바뀌었다.


나는 동료와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싫고 추하게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를 이용해 편의를 누리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도 싫었다. 매일 남보다 늦게 퇴근하면서 적게 번다면 짜증과 불만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심해의 물고기는 눈이 보이지 않고 사막의 동물은 갈증을 잘 참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되는지는 내가 처한 환경에 좌지우지되지, 본성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업무 환경이 조금씩 나를 바꾸고 있음을, 더 조급하고 쉽게 욱하고 무책임하게 바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금껏 지켜왔던 기준을 지킬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졌다. 한번은 모르는 여자한테 한바탕 난리를 친 적이 있었다. 원래 누구한테 호통치는 성격이 아니라 그 일은 아주 강한 기억으로 남았다.


단지 내에 주차하고 물건을 배달할 때 우리는 대부분 삼륜차 열쇠를 뽑지 않았다. 하루에 백 번도 넘게 열쇠를 뽑으면 시간 낭비고, 단지에서 택배차를 훔칠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날 택배 상자를 들고 2층으로 막 올라갔을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복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랬더니 오륙십 대 정도 되는 여자가 세 살쯤 되는 아이를 안고 내 운전석에 앉아서 놀고 있는 게 아닌가. 아이는 운전 흉내를 내는 듯 두 손을 핸들에 올려놓고 있었다. 아이가 열쇠를 살짝만 비틀어도 차가 앞으로 튀어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물건을 내려놓고 득달같이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얼마 전에 동료 하나가 깜빡하고 핸드 브레이크를 잠그지 않은 채 택배를 배달하러 갔다가 삼륜차가 강풍에 밀려 옆에 주차된 자가용을 치는 일이 있었다. 동료는 1600위안을 배상해야 했다. 나는 아이가 삼륜차 시동을 걸어 파손이나 상해를 일으킬까 봐 걱정스러웠다. 앞에 주차된 자가용을 치면 내가 어떻게 배상한단 말인가? 행인이라도 치면 더 끔찍하고, 아이가 운전석에서 떨어져 바퀴에라도 깔리면.... 그런 상상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내가 씩씩거리며 호통을 치자 여자는 겸연쩍게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린애가 철이 없다고 어른마저 철이 없어요?”라고 말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사실 그건 영화 대사였다.


1분 0.5위안이라는 시간 비용

과연 택배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극소수일 것이다. 어쨌든 나와 내가 아는 택배기사는 누구도 일을 사랑하지 않았다. 노동의 가치를 느끼는 순간은 월급이 나올 때뿐이지, 고객의 기쁜 표정이나 감사의 말을 접했을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타인의 호의가 기쁘다고 해도 말이다.

계산해보니 내 주변의 택배기사와 음식 배달원은 숙식 비용을 빼고 평균 7000위안을 받았다. 베이징의 생활비와 업무 강도를 기반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시장 가격이다. 임금이 그보다 낮으면 노동력은 다른 지역이나 업종으로 옮겨갔다.


매달 26일 일하므로 내 일당은 270위안이었다. 그게 내 노동 가치였다. 하루에 열한 시간을 일했는데 아침에 지점으로 나가 물건을 내리고 분류해 다시 싣는 데 한 시간이 걸리고 구역으로 이동하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그런 두 시간은 고정비용이었다. 남는 아홉 시간 동안 배달한다고 계산하면 한 시간에 30위안, 분당 평균 0.5위안씩 성과를 내야 했다. 그게 내 시간 비용이었다. 물건 하나를 배달할 때 평균 2위안을 받으므로 4분마다 하나씩 배달해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다른 일을 고민해야 했다.


갈수록 나는 경제적 각도에서 문제를 보고 비용의 관점에서 시간을 따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1분이 0.5위안이므로 소변보는 비용은 화장실이 무료라도 2분은 걸리니 1위안이었다. 점심 식사는 기다리는 10분을 합쳐 20분은 걸리므로 시간 비용이 10위안이고 15위안짜리 덮밥을 사 먹었다면 25위안이었다. 그건 내 기준에서 사치였다! 그래서 늘 점심을 건너뛰었다. 화장실 가는 횟수를 줄이려고 물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배달하러 갔을 때 수취인이 집에 없으면 전화 통화에 1분을 쓰니 통화료 0.1위안에 0.5위안의 시간 비용이 소요되는 셈이었다. 수취인이 택배함에 넣어달라고 요청하면 시간 비용이 더 들 뿐만 아니라 택배함 요금으로 평균 0.4위안까지 내야 해 손해였다. 수취인이 다른 날 집으로 배송해달라고 하면 전화도 걸고 두 배의 시간을 써야 하므로 손해는 더 커졌다. 그나마도 순조로울 때 이야기이고, 전화를 안 받으면 멍하니 기다리느라 1분, 0.5위안을 써야 했다. 전화가 연결되어도 고객이 끊지 않고 내가 들어줄 수 없는 일을 집요하게 요구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전화 한 통만으로 시간 비용이 배달 비용을 초과했건만 물건마저 여전히 손에 남아 있었다.


시간이 돈임을 절실하게 인지했다고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는 건 아니었다. 작업 방식을 바꿔 물건을 무조건 택배함에 넣는다거나 전화를 안 받는다거나 모르는 번호를 차단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변화라고 하면 돈을 따지는 동시에 별로 개의치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늘 건물에 올라가지 않는 택배사 기사들을 부러워했다. 그들은 물건을 곧장 택배함에 넣거나 단지 내 보관소에 두고 수취인에게 문자를 보내 직접 가져가도록 했다.


많은 사람이 매일 택배를 이용하면서도 택배기사의 작업 방식은 잘 모른다. 나는 그런 무지를 우리의 노동 보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하루는 징퉁루스벨트광장에서 물건을 배달하고 있었는데 쇼핑몰 직원인 수취인이 징퉁루스벨트광장에서 완다광장으로 자리를 옮겨간 뒤였다. 나는 전화를 걸어 완다광장으로 주소를 바꾸면 다음 날 배달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당연히 택배기사도 다른 사람으로 바뀔 터였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이렇게 가까운데 왜 하루가 더 걸려요? 이따가 가져다주시면 되지 않나요?”


그렇게 묻는 사람은 그 사람 하나가 아니라 꽤 많았다. 문득 나한테는 빤히 보이는 일이 남들한테는 상상도 안 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참을성 있게 응대했다. 우선 루스벨트광장에서 완다광장까지는 그가 가볍게 말하는 것처럼 가깝지 않았다. 삼륜차 배터리가 충분해도 오가는 데 30분 넘게 걸렸다. 둘째, 거리는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휴일에 쇼핑하는 사람이라면 도시의 쇼핑몰 두 곳은 매우 가깝게 느껴지겠지만, 택배기사는 하루에 한두 개 단지만 오갈 뿐이었다. 우리에게는 몇 킬로미터 밖의 완다광장이나 수십 킬로미터 밖의 톈안먼광장이나 똑같이 멀었다.


마지막으로 완다광장은 무척 넓고 내가 잘 모르는 곳이었다. 쇼핑몰 안에 들어가 특정 점포를 찾으려면 많은 시간이 들 게 뻔했다. 나는 쇼핑을 잘 하지 않아서 조금만 큰 쇼핑몰에 가도 동서남북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하려 했으면 그렇게까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상상하지 못한 것은 내가 건당 2위안밖에 받지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선의에서 그렇게 이해해보려 했다. 내가 얼마를 받는지 알면서도 속 편하게 자기만을 위해 와달라고 요청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복수 메모장

하루는 지점에서 잡담하던 중 한 동료의 아는 택배기사가 길에서 아우디를 부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아우디 운전사가 뒤에서 발악하듯 경적을 누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택배기사가 쇠막대기로 아우디 보닛과 앞 유리창을 박살 냈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충동을 한두 번 느낀 게 아니었다. 한바탕 패주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그런 충동은 끊어지는 순간 미친 듯 튕겨 나가는 케이블 같아서 일단 터지면 앞뒤 따지지 않고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쏟아내게 한다. 그 택배기사는 배상할 능력이 없어서, 어쩌면 배상하고 싶지 않아서 감옥에 갔다고 했다. 다 잃고 나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일하고 갈등은 피했는데도 주소를 잘못 적은 사람이 고객센터에 나를 신고한 적이 있었다. 그 수취인은 퉁징위안 단지로 이사했지만 루이두궈지 북구로 물건을 배달시켰다. 두 단지는 2킬로미터 떨어진 정도였고 배달할 때도 이상한 점이 없었다. 청년이 문을 열어주기에 나는 수취인 성명을 말했고 청년은 아무 말 없이 물건을 받았다. 자기가 아니라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별로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말 없이 물건을 받는 사람은 하루에도 몇 명씩 있었다. 게다가 내가 탐정도 아닌데 누구든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늘 너무 바빠서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을 아끼려고 물건을 엘리베이터 문에 끼워놓곤 했다. 그러면서도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있는 게 양심에 찔려서 최대한 빨리 돌아가려 했으니 수취인과 떠들 여유가 없었다. 그건 다른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민폐였다.


그런데 이틀 뒤 불만이 접수되었다. 수취인이 물건을 받지 못했는데 수령한 것으로 뜬다며 항의했다고 부점장이 위챗으로 알려주었다. ‘허위 서명’으로 50위안의 벌금이 부과되지만 반박할 수 있다고도 했다. 나는 진청푸 단지에서 나오자마자 삼륜차 운전석에 앉아 수취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라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운전하면서 전화했겠지만, 너무 화가 나서 그럴 수 없었다.


“ 고객센터에 항의하셨습니까?”

“물건을 못 받았는데 어떻게 제가 받았다고 표시될 수 있어요?”

“그 주소지에서 받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제가 신분증이라도 검사해야 합니까?”

“죄송하지만 앱에 기사님 전화번호가 없어서 연락할 수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고객센터에 전화했고 기사님한테 불만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어요. 고객센터에서 처리해준 것뿐이에요.”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고객센터에서는 비수기 때 택배기사들의 서비스 품질을 올린다는 명목으로 고객의 항의를 유도하곤 했다. 반면 성수기 때는 많은 물량을 빠르게 배송해야 하니 최대한 우리 편의를 봐주었다. 그런 상황은 점장과 부점장이 미리 귀띔해주었다. 나는 그 수취인이 자신이 주소를 잘못 적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랬으니 고객센터가 불만을 접수한 거라고 의심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물건을 찾아주지 않을지 모른다고 걱정했을 수도 있다. 주문서의 배송 정보에 내 연락처가 있는데, 전화번호가 없어서 연락 못했다는 말도 내게 직접 연락했다가 거절당할까 봐 걱정했던 것 같았다. 결국 간편하게 해결하고 싶어 고객센터에 연락한 것이다. 고객센터를 통하면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물론, 이건 전부 내 추측일 뿐이다.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내게 사과했고 무례하거나 오만하게 굴지도 않았다. 그저 긴장한 기색만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루이두궈지 북구로 가서 물건을 회수해왔다. 물건은 그때까지도 거실에 놓여 있었고 다른 세입자가 돌려주었다. 받자마자 퉁징위안으로 가져갔다. 퉁징위안은 내 구역이 아니었지만 내가 담당한 구역 바로 건너편이라 매일 지나가는 곳이었다.


나를 보자 여자는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50위안을 배상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그의 항의로 50위안의 벌금을 내게 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객 불만에 내가 불복했고, 고객센터에서 확인 전화할 때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면 되기 때문에 돈은 받지 않았다. 내가 본 손해는 여자가 잘못 쓴 주소로 물건을 배달했다가 다시 찾아오고 새 주소로 배송해 결국 세 번 배달한 것이었다. 돈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억울함, 불필요한 번거로움 때문에 화가 났다. 인정할 수 없는데도 받아들여야 하는 불공평, 불친절, 비인간적 규정과 조건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취인에게 화를 내면 나도 불공평하고 불친절하며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기에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일들

글쓰기를 시작하다

하루는 길을 가고 있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빨간불에 불법으로 길을 건너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꿔 역주행하다가 무방비 상태였던 내 앞에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다치지는 않았어도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씩씩거리며 욕하고 주먹으로 운전자를 내리치기까지 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둘러싸더니, 그렇게 몰아세우면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나를 질책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니 너그럽게 대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만약 내가 임신부였다면 어땠겠는가? 내가 그렇게 반문하자 사람들은 대꾸하지 못했다. 내 강경한 태도가 거슬렸는지 한 젊은이가 “지금 싸우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죠? 그럼 저랑 싸워요”라며 나섰으나 옆에 있던 노인들에게 저지당했다. 노인들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더 따지지 말고 각자 갈 길을 가라고 했다.


사실 나는 따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쩌면 내 안에 가득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대립하고 질책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내 안에 있던 히스테리, 긴장감, 위태로운 정신 상태가 집약된 사건이었다.


완전히 그 일 때문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나는 방에 처박혀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장사를 접고 부모님께 2만 위안을 돌려드린 뒤에도 내 수중에는 몇 만 위안이 남아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셨고, 지금까지도 모르신다. 일도 안 하고 외출도 안 하고 누구를 만나지도 않자 부모님은 영문을 몰라 걱정하고 엉뚱한 생각까지 하셨지만, 딱히 손쓸 방법도 없으셨다.


나는 온종일 멍하니 방에 처박혀 있었던 게 아니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09년 10월이었다.


개인 사업은 확실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하지만 쇼핑몰은 오후 2~3시부터나 손님이 오기 시작하지, 오전에는 한가했다. 그래서 나는 가게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심심풀이용 책도 읽고 문학작품도 읽었다. 문학작품은 몇 권 안 됐지만 그래도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무척 감동적으로 읽었다. 샐린저의 ‘아홉 가지 이야기’도 참 좋았다. 샐린저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순수함, 나아가 훼손된 순수함을 다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첫 글쓰기는 샐린저를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는 레이먼드 카버를 읽으며 그가 묘사한 일상생활의 붕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지금보다 훨씬 감상적이었기 때문인지 쓸쓸한 리처드 예이츠의 작품도 좋았다. 트루먼 커포티의 작품도 읽었다. 내게는 자전적인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 “티파니에서 아침을”보다 훨씬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때는 미국 현실주의 작가들이 그려낸 일상과 감정이 가슴에 와닿았다. 상품화된 사회와 소비주의 등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인간의 삶이 동질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문학작품을 많이 읽을수록 현실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일이든 사업이든 감정이든 내 삶에는 좌절과 고통이 가득했다. 나는 내가 적응하기 힘든 세상에서 인정받으려 애쓰다가 끊임없이 실망하고 실패했다. 물론 실패를 외부 환경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었다. 나도 남들한테 인정받으려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었다. 글쓰기처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내 정신세계는 현실 세계가 척박해지는 만큼 풍요로워졌다.


이 책에서 이야기한 경력들은 내가 쓴 여러 소설에 반영되었다. 둘을 비교해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내 소설은 고지식하고 딱딱하며 비통하고 증오로 가득하다는 인상을 준다. 소설과 비교할 때 이 책은 무척 가볍다. 나부터가 편하게 썼기 때문이다. 지난 일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 그만이지, 머리를 굴려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가 없어서 부담이 덜했다.


또한 이 책에는 소설에 담을 수 없는 부분, 수면 아래 8분의 7에 해당하는 부분이 들어 있다. 내가 겪은 일들의 맥락, 당시의 느낌과 정신상태, 내가 처한 환경을 설명했다. 객관적인 글쓰기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니, 내 글 역시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주관적인 시선과 입장에서 사건을 보고 느끼기 때문에 똑같은 사건을 겪어도 사람마다 진술이 다를 수 있다. 나는 최대한 사실을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 중립을 유지하려 애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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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