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오렌지

   
후지오카 요코(역:박우주)
ǻ
달로와
   
16000
2022�� 04��



■ 책 소개


암 선고를 받은 료가와 그의 곁을 지키는 가족, 친구의 이야기

이 책에는 병과 죽음에 대한 진지하고도 사려 깊은 시선이 담겨 있다.

주인공 료가는 고향을 떠나와 홀로 도쿄에서 성실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평범한 청년이다. 언제까지고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리라 믿던 어느 날, 암 선고를 받은 료가의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왜 하필, 어째서 나일까’라는 좌절감에 마음마저 무너져 내리는 료가를 다잡아주는 것은 늘 그의 곁을 지키는 가족과 환자와 간호사의 입장으로 다시 만난 동창 야다이다.

믿을 수 없는 현실과 맞닥뜨린다면, 더군다나 그 현실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희망을 놓고 포기하는 사람,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사람, 자괴감과 좌절감에 못 이겨 주저앉고 마는 사람 등 저마다 다양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료가는 이 모든 과정을 겪는다.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고, 또다시 무너지는 료가의 모습은 병이 주는 공포를 상기시킨다.

만일 이에 그쳤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남은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에 있다.

■ 저자 후지오카 요코
저자 후지오카 요코는 1971년 교토에서 태어나 도시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호치신문사에서 근무하다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대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이후 지케이간호전문학교를 졸업했다. 2006년 단편소설 ‘유언’이 작가 미야모토 테루의 심사로 제40회 북일본문학상 추천작에 선정되었다. 2009년 장편소설 ‘언제까지나 하얀 날개’로 데뷔했으며, 이 작품은 2018년 도카이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저서로는 ‘손바닥의 음표’, ‘맑았으면 좋겠네’, ‘만천의 골’등이 있으며, 저서 중 ‘오쇼린’은 영화화가 결정되어 이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 역자 박우주
역자 박우주는 서울여자대학교와 세이신여자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하고, 나고야대학 대학원 인문학연구과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며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일대조언어학을 연구하다 현재는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오가와 이토의 ‘토와의 정원’, 아오야마 미치코의 ‘도서실에 있어요’ 등이 있다.
  
■ 차례
1장
2장
3장
4장
5장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어제의 오렌지


1장

위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처음 감지한 건 어느덧 반년 전쯤의 일이다. 그러나 좋지 않다고 해도 이따금 통증이 있는 정도로, 시판 위장약을 먹으면 가라앉는 수준의 통증이었다.


그랬던 것이 최근 한 달 전쯤부터는 약을 먹어도 통증이 가시지 않게 되었다. 자다가도 제 신음 소리에 잠을 깨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두 손으로 명치를 감싸 쥔 채 이불 속에서 작게 웅크리고 있는 일이 연일 이어졌다. 위장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강렬한 통증을 느끼게 되자 아무래도 이건 문제가 있구나 싶어 가까운 내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며 진통제를 처방해주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위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하기에 소견서를 들고 대학병원을 찾은 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진료를 받은 다음 날 검사를 받았고, 오늘은 그때 채취한 조직의 검사 결과를 들으러 온 것이었는데......


차가 빨간불에 멈춰 섰다. 눈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마쓰바라의 말이 아득히 되살아났다.


악성이었어요. 악성 종양입니다. 정밀 검사를 받으셔야 해서, 가능하면 내일이라도 입원을------.


선잠이 든 탓인지 꿈을 꾸었다. 그립고, 무서운 꿈이었다. 꿈속의 료가는 열다섯 살이고, 아빠가 사준 오렌지색 등산화로 얼어붙은 눈을 힘껏 밟고 있었다. 옆에는 자신과 똑같은, 열다섯 살의 교헤이가 있었다.


그날 료가와 아빠, 교헤이 세 사람은 겨울 산에 와 있었다. 중학교 졸업식을 일주일 앞두고, 아빠가 졸업 기념으로 ‘셋이서 나기 산을 등반하자’는 말을 꺼낸 것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아빠의 영향으로 형제는 초등학교에 가기 전부터 수없이 많은 산을 등반해왔다. 1000미터 이하의 낮은 산을 비롯해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는 1925미터의 기리가미네 고원, 고학년이 되어서는 겨울의 다이센 산이나 2000미터가 넘는 야쓰가타케 산 등반에 도전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가 야구부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바빠진 까닭에 셋이서 하는 등산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등산 전날, 집에서 짐을 꾸리고 있을 때 료가는 아빠의 모습이 어쩐지 평상시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형제에게 등산을 가자고 권유한 아빠에게서 각오가 엿보인 듯했기 때문이다.


돗토리 현 야즈 군과 오카야마 현 가쓰타 군의 경계에 위치한 나기 산은 해발 1255미터의 낮은 산으로, 경로 자체는 난이도가 높지 않다. 여름의 나기 산은 이제껏 수차례 등반했고, 더 높은 겨울 산에 오른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등산 도중 교헤이와 둘이서 소변을 보러 갔을 때, 부주의하게도 설비를 밟았다가 추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어떻게든 등산로까지 되돌아가고자 둘의 몸을 로프로 연결해 눈 표면을 오르던 중, 료가는 태양 빛을 향해 ‘하느님, 제발 살려주세요’ 하고 기도했던 일이 생각났다.


텐트를 나온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발이 얼어붙은 듯 차가워졌고, 손끝의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묵직하게 제작된 등산화는 겨울 등산용으로 신으라며 아빠가 중학교 졸업을 기념해 사준 것이었다. 색상은 교헤이가 블루 사파이어였고, 료가는 선셋 오렌지. 너무나도 눈부신 오렌지색에 주눅이 들어, 교헤이만큼 천진스레 “고마워”라고 말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료가와 교헤이는 서로를 북돋우며 야영한 장소에서부터 단단한 설벽을 신중히 등반했고, 이윽고 능선에 이르렀다. 능선으로 나오니 시야는 양호했다. 맑게 갠 파란 하늘 아래서 나침반을 사용해 방위를 확인한 다음, 눈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등산로로 향했다.


즐겁게 추억담을 늘어놓던 교헤이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이불 밖으로 비어져 나온 료가의 발에 교헤이가 시선을 두었다. 양말을 신고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료가의 발가락은 왼쪽 오른쪽 모두 뒤틀린 모양을 하고 있다. 동상의 상흔이다. 악천후 속 텐트에서 밤을 넘길 때는, 신발을 비닐봉지에 넣어 기온이 높은 곳에 두어야 한다. 그 사실을 잊은 교헤이는 신발을 텐트 출입구 근처에 방치해두었고, 아침이 되어서야 신발이 젖었다는 걸 깨달았다. 교헤이는 왼발을 다친 상태였으므로 료가가 자신의 신발과 바꾸어주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사흘 후, 료가는 외출신청서를 내고 잠시 집으로 돌아갔다. 수술을 받고 나면 2주 정도 입원해야 하므로 부족한 옷을 가지러 갔다.


전화 너머로 교헤이가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너는 강해. 그러니까.”


아주 잠시 교헤이의 목소리가 끊기더니, 이내 “그러니까 괜찮아” 하는 굵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열기를 띤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댄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인터폰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 너머의 교헤이에게 “네가 보낸 짐인가 봐”라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문을 열어 두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그렇지만 보기보다 묵직한 종이상자를 택배기사로부터 넘겨받았다. 아마도 20대 초반일 것이다. 녹색 캡 모자를 쓴 젊은 택배기사는 짐을 전달한 후 “가보겠습니다”라며 기세 좋게 물러갔다.


상자 안에 담겨 있던 것은, 열다섯 살의 료가가 신었던 등산화였다.


종이상자로 손을 뻗어 그 낡은 신발을 만져보았다. 제법 빛은 바랬지만, 낯익은 오렌지색에 체온이 올랐다.


이 신발을 보내온 교헤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까스로 그쳤던 눈물이 또다시 차올랐다.


그랬다. 그날의 나는, 살기 위해 눈보라 속을 헤쳐 나갔던 것이다. 열다섯 살의 나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따윈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이 신발을 신고, 병원으로 돌아가자.



4장

“나왔어.”


본가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고 복도 안쪽에 있는 거실을 향해 말을 건넸다. 료가가 도쿄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집 안은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다. 교헤이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세면대로 갔다. 두 손을 꼼꼼히 씻은 다음 소독약을 발라 문질렀다.


료가가 도쿄에서 오카야마의 본가로 돌아온 것은 지난주, 8월 끝 무렵이었다.


“오카야마로 돌아가려고.”


오봉 휴가가 한창일 때 료가에게서 그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면서 정기 검진을 통해 림프절 전이가 새롭게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전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본가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생각해보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전화 너머의 료가는 침착했다. 도리어 교헤이 쪽이 동요해, 이야기 도중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목이 메었다.


재발했다고 해서 체념한 것은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일터로 복귀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료가의 옆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각하지 않겠다고 필사적으로 뛰어온 가지야 쇼스케를 말이다. 제시간에 올 리 없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수업 시작종은 이제 몇 초 뒤면 끝날 것이었다. 하지만 집합 장소인 모래판과 가지야의 거리는 50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가지야 쇼스케는 지각이군. 저 녀석이 뛰는 속도로는 제시간에 올 수 없어. 실은 교헤이 역시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지야가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뛰어’, ‘힘을 내’ 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다. 어떻게든 될 것이다. 제시간에 올 수 있다. 포기하지 마라, 하고,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아사이와 주위 남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네가 가지야라면 어떨 것 같은가? 만일 네가 가지야의 입장이라면, 어떻게든 제시간에 가고자 전력을 다해 뛰지 않겠는가?


자신이 그런 식으로 가지야를 감싼 것은, 아사이를 향한 분노가 치민 것은, 머릿속에 죽을힘을 다해 치료에 맞서는 료가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렇게 운을 뗀 료가는 그해 봄, 막 열여섯 살이 된 참이었다. 물론 교헤이 역시 료가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교헤이와 료가는 자신들의 방에서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아 있었다. 산모수첩을 카펫 위에 올려둔 채,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그 산모수첩은 자신의 집이 아닌 엄마의 본가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엄마 심부름으로, 완성된 할아버지의 유카타를 가지고 할머니 집에 들렀을 때 우연히 목격한 것이었다.


그날, 교헤이는 꾀를 부려 현관이 아닌 뒤뜰을 통해 할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귤나무 사이를 누비며 안채로 다가가자 정원 너머로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는 툇마루가 있는 부쓰마에서 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교헤이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었다. 불단을 앞에 두고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가슴에 조그마한 책 같은 것을 두 손으로 포개고,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할머니는 정신을 가다듬듯 앞치마 소매로 눈을 비비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할머니가 부쓰마를 나감과 동시에 교헤이는 발소리를 죽여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툇마루에 올라 부쓰마로 들어갔다.


불단 아래쪽에 있는 작은 서랍을 슬쩍 앞으로 당겼다. 할머니가 가슴에 품고 있던 무언갈 그 서랍 안에 넣는 모습을 교헤이는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서랍 안에는 경전이랄지, 구불구불한 글씨로 불경 같은 것이 적힌 책자가 들어 있었다. 교헤이는 그보다 더 아래쪽을 살폈다. 경전 아래엔 상자에 든 선향이 있었고, 그 상자로 감춰놓다시피 한 낡은 ‘산모수첩’이 들어 있었다.


주저 없이 손에 들어 펼쳐보았다. ‘사사모토 교헤이’. 그곳에는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뭐야, 내 산모수첩이잖아. 체중 1890그램. 신장 42.0센티미터. 볼펜 글씨로 교헤이의 출생 당시 키와 몸무게가 적혀 있었다. 미숙아였다고는 들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작았다. 나 참, 할머니는 이걸 보고서 울고 있던 거야? 하여간 노인네는 못 말린다니까. 지금은 이렇게나 많이 컸는데. 맥이 빠져 순식간에 흥미를 잃었고 그대로 수첩을 다시 서랍 안에 돌려놓으려 한 순간, 덜컥했다. 그렇다, 덜컥.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고 억지로 목을 구부린 듯한 그런 감각.


엄마의 이름이 달랐다.


엄마의 이름은 사사모토 도코여야 했다.


그런데 그 수첩에는 ‘사사모토 오토’라고 적혀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일요일, 낚시를 하고 돌아온 료가에게 교헤이는 할머니 집에서 들고나온 산모수첩을 보여주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고 혼자서 끌어안고 있을 만한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할 상대는 료가 이외엔 생각할 수 없었다.


교헤이가 내민 산모수첩을 본 료가는 얼마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하고 물어 왔다. 다정한 어조였다.


교헤이는 ‘이 이야기는 엄마 아빠에겐 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도 자신이 산모수첩을 봐버렸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지금 이대로의 가족으로 있고 싶다’고.


료가는 교헤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도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둘은 ‘이 이야기는 두 번 다시 하지 말자’고 정한 뒤 산모수첩을 할머니 집 불단 서랍에 돌려놓았고, 이날 이때까지 무엇 하나 달라진 것 없는 생활을 보내온 것이었다.


슬슬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본가를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현관 초인종 소리가 났다. 시간은 열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아주 잠깐 미야무라 교장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 남자가 찾아온다면 교헤이의 집 쪽일 것이었다. 설마 본가로 찾아올 리는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료가를 지켜보고 있는 엄마를 돌아보며 방을 나왔다. 아무래도 미치히라에게 연락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료가는 침대에 누워서도 여전히 얕은 호흡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현관 미닫이문을 열자 에메랄드색 폴로셔츠에 큼지막한 검정 배낭을 멘, 낯익은 얼굴이 달빛에 비쳐 있었다. 할 말을 잃은 교헤이는 입을 벌린 채로 밤늦게 나타난 뜻밖의 방문자를 마주 보았다.


“너...... 너....... 왜 여기 있어?”

“왜라니, 미치히라 씨가 말씀 안 하셨어? 이다음부터 내가 료가 군을 담당하게 됐어.”


어깨에 메고 있던 배낭을 발밑에 내려놓더니 야다가 배낭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명함 지갑을 꺼냈다. 어둠 아래, 익숙지 않은 손놀림으로 명함을 꺼내어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하고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명함에는 ‘방문 간호사 야다 이즈미’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근데 너, 도쿄 병원은?”

“8월을 끝으로 퇴직하고 왔어. 참, 참, 교헤이 군, 퇴직금 얼마나 나왔는지 알려줄까? 25만 엔이야, 25만 엔. 12년을 일했는데 겨우 그거야. 후회 없어.”


오카야마 역 근처의 맨션을 빌려 사흘 전 이사를 마쳤다며 야다가 웃었다.



5장

“출발할까?”


그렇게 말하자 교헤이가 “그래” 하며 한쪽 손을 들었다. 교헤이의 등에는 료가가 걷지 못하게 될 때를 대비해, 접힌 등산용 휠체어가 메여 있었다.


“다시 한번, 나기 산을 오르고 싶어.”


한 달 전쯤 엄마에게 그런 소망을 전한 이후 교헤이가 준비해준 것이었다.


나기 산은 해발 1255미터의 산으로, 보통은 두 시간 반 정도면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오늘처럼 날씨가 좋으면 위험하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료가의 몸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를 고려해 교헤이뿐 아니라 야다와 다카나까지 동행해주었다.


10킬로그램이 넘는 등산용 휠체어를 짊어지고도 교헤이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엄마 곁에는 앞으로도 교헤이가 함께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듬직하기도, 섭섭하기도 해서 료가는 작게 웃어 보였다.


어느새 눈 주위의 근육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잠이 들려는 료가의 몸을 누군가의 손이 흔들었다. 생각처럼 눈이 떠지지 않아 손가락을 눈 위아래에 대고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야, 료가, 도착했어. 정상이야!”

“......정상?”

“그래, 여기가 꼭대기야.”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없게 된 지 30분쯤 지나 도착한 정상은 초원과 같이 광활했다. 태양이 가까워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나 보였다.


다시 한번 산을 오르고 싶었던 이유는 19년 전 자신의 강인함을 떠올리고 싶어서였다. 앞으로 자신의 몸에 일어날 일을 겁내지 않고 온전히 마주할 수 있도록, 열다섯 살의 자신으로부터 힘을 얻기 위해 온 것이었다.


차츰 빛이 강해졌다. 온 세상이 새하얀 설경으로 바뀌었고, 저 멀리 사람 하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빠였다.


두 팔을 벌린 아빠가 빛 속에 떠올랐고, 머지않아 모든 것이 끝나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형으로서의 역할도 끝이 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쥐고 있던 주먹을 쓱 풀었다.


“료가, 고생 많았다.”


아빠의 다정한 목소리에 마지막 힘을 짜내어 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아빠의 모습은 사라졌고, 그 대신 등산로에 늘어진 세 사람의 기다란 그림자가 바라다보였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