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가 웃었다

   
김영철
ǻ
김영사
   
14800
2022�� 02��



■ 책 소개


슬픔에 무릎 꿇지 않고, 기쁨에 자만하지 않고,
나답게 매일을 살아가는 일

코미디언 김영철의 에세이. 책 제목 《울다가 웃었다》는 울음과 웃음 모두 삶의 소중한 자양분임을 뜻한다. 웃음을 아는 사람이 슬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고, 슬픔을 아는 사람이 웃음의 가치를 알 테니까. 

라디오 DJ로서 청취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고, 코미디언으로서 웃음에 깊이 천착한 연예인. 가장이자 동생이자 아들로 살아왔고, 친구로서 어깨를 빌려주기도 하고 빌려오기도 한 보통의 생활자. 양 갈래의 길을 걸어온 그는, 눈물을 부끄럽지 않게 내비치며 호탕하게 웃기까지 기울여온 수많은 노력을 책 안에 담았다.

■ 저자 김영철
1974년생. 매일 청취자들의 아침을 활기차게 깨우는 라디오 DJ이자 데뷔 23주년을 맞이한 코미디언. 삶을 긍정하는 서사를, 타인과 대화 나누기를, 다정하고 사려 깊은 격려를 좋아한다.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명상을, 동네 책방에 들러 책 읽기를, 틈날 때 종이신문 보기를 즐긴다. 인터내셔널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19년 동안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코미디언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가수, 작가, 종합 예술인으로도 불리길 바란다. 

부지런함이 재능이 될 수 있다고, 꾸준함이 실력이 될 수 있다고, 쉰 살이 되면 더 행복할 거라고 믿는다. 주눅 들지 않고 묵묵히 나의 길을 걸어가며, 유쾌하고 진실하게 나이 들고 싶다. 현재 SBS 파워FM 〈김영철의 파워FM〉 DJ와 JTBC 〈아는 형님〉의 고정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김영철ㆍ타일러의 진짜 미국식 영어》 시리즈, 《일단, 시작해》 등이 있고, 《치즈는 어디에?》를 비롯한 세 권의 번역서를 펴냈다. 〈따르릉〉 〈신호등〉 〈안되나용〉 등의 싱글앨범을 발표했다

■ 차례
작가의 말
여는 글: 울음과 웃음이 반복되는 코미디 같은 인생

1장. 슬픔: 행복엔 소량의 울음이 있다
곁에 없는 형을 만나는 꿈
그리움의 넓이
두 번의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인생 댓글
별일 없느냐는 말
행복은 빈도다
별게 다 서글퍼질 때
미카사 수카사
최소한의 효도
두 청취자

2장. 농담: 우리에겐 웃고 사는 재미가 있다
귀여운 부풀림
힘을 뺄 때 보이는 것들
겸손은 없어요?
도마를 선물로 주시다니요
굿 뉴스, 배드 뉴스
투 머치 하지 않을 때 얻는 것들
홀로 2주를 보낸다는 것
상쾌한 생각을 하다가
당신에겐 봄방학이 있나요?
왜 이렇게 싸돌아다닐까?
글쓰기의 재미
뜻하지 않은 칭찬
지시대명사를 쓰지 않겠다
글을 쓰는 태도
기차가 늦으면 어떡하지?
결심은 문득 하는 것

3장. 꿈: 누구나 잘하는 게 하나쯤 있다
헤매고 휩쓸려보는 거야
나의 친한 친구
확실히 아는 것들
부지런히 뛰다 보면
권태롭지 않기를
부러워서 배운다
10년 전, 10년 후
오래전 쓴 대본
아주 특별한 생일
중요한 사람
모든 걸 능숙하게 할 수는 없다
거꾸로 시간을 되짚어보니
차근차근 해낼 수 있는 것부터

4장. 사람: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

건조한 배려가 필요하다
냉장고를 채우는 이유 하나
무례하지 않은 말
미워하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
헛말 방지 대책
지켜야 할 선
애청자들
타일러 라쉬
통역사에게 배운 것들
세상에서 가장 웃긴 그녀

닫는 글: 앞면과 뒷면이 있는 사람
인물색인표
도움받은 책

 




울다가 웃었다 슬픔: 행복엔 소량의 울음이 있다

그리움의 넓이

라디오 방송에서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사연인즉, 청취자의 엄마는 식당을 운영한다고 했다. 하루는 청취자가 식당 일을 봐주다가 전화를 받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 음식을 오지 않는다는 고객의 항의였다. 딸은 배달하러 간 엄마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골목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왜 울어?”라고 딸이 물으니, 엄마가 “이제 나이가 들어 길도 잘 못 찾겠다”라고 말했다. 이 사연을 읽는 순간, 그때 생각이 나서 오열했다.


1982년, 내가 아홉 살 때였다. 엄마는 아버지와 별거를 하면서 부산역 근처 아리랑 호텔 뒤쪽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나는 엄마를 만나러 부산에 갔고, 일요일 밤에 기차를 타고 울산으로 돌아왔다. 큰형과 큰누나는 성인이 되어 엄마를 매주 만나러 가지는 않았고, 나와 중학생이었던 애숙이 누나만 매주 엄마를 만나러 갔다.


매일 달력을 보며 엄마 만나러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토요일이면 기차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기차역에 가서 엄마 보고픈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울산 서생역에서 부산역까지는 두 시간. 그때는 KTX처럼 빠른 속력을 자랑하는 기차가 없었고, 나는 비둘기호에 앉아 느릿느릿한 속도에 애가 탔다. 부산에 도착하면 우리는 엄마가 하는 일을 도왔다. 엄마의 사촌 동생인 평순이 이모네 두 아들, 정환이 형과 동환이 형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지금도 두 형에게 전화가 오면 눈물이 핑 돈다.


그때부터 기다림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달이랑 친해진 것도 그때쯤이었다. 일주일 중 하루 엄마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가 일요일에 엄마랑 긴 하루를 보내고 난 뒤 저녁 8시 막차를 탔다. 기차 맨 끝 칸에 앉아 창밖에서 손을 흔드는 엄마를 보면서 눈물을 쏟아냈다. 식당을 운영한 지 1년이 지나고 엄마는 울산으로 돌아왔지만, 엄마와 떨어져 지냈던 그 시간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라디오 청취자의 사연을 듣다가 울었던 건, 그때 고생하던 엄마의 모습과 그런 엄마를 늘 그리워하던 내 모습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 식당 손님이 엄마에게 무례하게 굴기도 했는데, 그 장면만 생각하면 목이 멨다. “저도 엄마가 식당 했을 때가 생각나네요”라고 감정을 추스르며 넘어갔지만, 라디오를 듣고 있던 청취자들은 모두 눈치채지 않았을까 싶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마음 먹먹했던 시간이 아홉 살의 나에게 있었다. 


별일 없느냐는 말

2019년 가을이었다. 무릎 수술을 한 엄마가 허리 재수술을 했다. 주중에 수술을 받은 엄마를 만나러 금요일에 울산으로 내려갔다. 뼈가 닳고 닳아서 이번이 마지막 수술이 될 거라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말 앞에 나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모았다. 부모님의 닳아버린 뼈마디를 마주한 모든 자식의 바람은 똑같지 않을까.


그 며칠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눈시울이 붉어지고 때때로 우울해졌다. 다행히 엄마의 수술은 잘 끝났고 지금은 건강하게 지낸다. 수술 후 주 3회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 살이 눈에 띄게 빠져서 마음이 아렸는데, 요즘은 살도 조금 올랐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폐 끼치는 건 싫어하지만 계산 하나는 정확하다. 언젠가 큰누나가 엄마에게 김장값 20만 원 주는 것을 깜빡했다. 마침 둘이 함께 농협 마트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엄마는 딱 20만 원어치 물건을 사더니 “아이고, 내 지갑을 안 갖고 왔다”라고 했다. “엄마, 이거 내가 낼게”라고 하는 큰누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니 김장값 안 줬다 아이가, 맞제?”


내가 특히 좋아하는 엄마의 장점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옥수수 먹을래?”라고 묻는 엄마에게 “아니”라고 답을 하면 그걸로 끝이다. 엄마는 먹어라, 말아라, 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옥수수를 삶아 식탁에 올려두고 간다. 나는 엄마의 이런 행동이 너무 재밌다.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또 그걸 어떻게 이겨냈는지, 나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런데 엄마는 나의 전부를 알고 있는 것 같다. 가끔 뭔가를 눈치챘는지, 엄마가 “별일 없나?”라고 물으면, 내 마음은 아이스크림처럼 녹는다. 힘든 마음이 단번에 치유된다. 엄마가 모든 걸 다 아는 게 신기하다.



농담: 우리에겐 웃고 사는 재미가 있다

겸손은 없어요?

나는 비판과 지적보다 칭찬 받은 기억을 오래 간직한다. 칭찬을 받을 때면 늘 짜릿하다. 내가 칭찬을 즐기는 이유다. 칭찬해준 사람이 “내가 그런 말을 했어? 너에게 칭찬을 했어?”라고 하면 증인을 모아서 사실 확인까지 받아내는 편이다.


새 책을 쓰면서 편집자가 제시한 새로운 방식을 따랐다. 매주 두 편씩 숙제하듯 쓴 글을 일요일에 보내면, 다음 날 편집자가 피드백을 해준다. 그 피드백에는 작가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칭찬이 담겨 있다. “원고 읽다가 울었어요” “할 말이 많은 작가님이세요” 등의 말이 그렇다. 어쩜 그 피드백 때문에 더 신나서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매주 두 편씩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보통 주말에 몰아서 쓴다. 또 노트북을 항상 들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자판을 두드린다. 친구들과 차를 마시다가 잠깐 한 시간가량 시간이 비면 “나, 노트북으로 작업 좀 해도 돼?”라고 허락을 받는다.


얼마 전, 제주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친구들과 밥을 먹고 나서 아주 한적하고 고즈넉하기까지 한, 한라산도 살짝 보이는 커피숍에 갔다. 글이 저절로 써질 것 같은 기분에 야외에 앉아 조용히 글을 썼다. 친구들은 차를 마시며 각자의 오후를 즐겼다. 나는 한 시간 정도 모니터 앞에서 집중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밀린 숙제를 마무리한 기분으로 “기다려줘서 고마워, 다 했어!”라고 ‘빨래 끝’을 외치듯 환호성을 질렀다.


모 잡지사 에디터였던 친구가 “오, 오빠 글 쓴 거 저 봐도 돼요?”라고 물어서 망설임 1도 없이 “한번 보고 말해줘. 어떤지!” 하고 노트북을 건넸다. 잡지가 부편집장까지 한 친구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10여 분 흘렀을까, 나는 은근 긴장이 되었다. 그가 두 편을 보더니 “오빠, 진짜 글 잘 쓰네요!”라고 했고, 나는 “그지?”라고 맞장구를 쳤다. 같이 있던 친구들이 내 말에 빵 터졌다.


그의 평가가 궁금해서 “구체적으로 말 좀 해봐” 했더니, 우선 생동감이 있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정확하고, 문장 표현도 좋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신이 나서 “1월 초 모 신문사에서 칼럼 청탁이 들어왔어. 미드로 영어 공부를 하는 칼럼이었는데, 담당자가 1주 특집을 하려다가 3주 연재를 하기로 데스크 팀장님과 이야기했다고 하면서 ‘글 한번 제대로 써보세요!’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안 그래도 이번에 김영사와 계약했어요!’라고 말했지” 하고 덧붙였다.


그러자 남자 후배 동생이 한마디했다.


“형은 겸손이 없어요?”


그 말에 또 한 번 빵 터졌다. “겸손은 없지. 뭐, 그게 뭐야?” 하고 받아쳤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누나가 “그냥 감사합니다, 너 영어 잘하니까 그냥 ‘땡큐’라고 해”라며 나를 막아섰다. 다시 모두 웃었다.


‘글 잘 쓰네요’라고 하면, ‘아니야, 그냥 쓰는 거야!’라거나 ‘아니에요, 별말씀을요!’라고 대답하는 게 나는 싫다. 그냥 쓸 거면 왜 글을 쓰지? 잘 썼다고 칭찬해주면 ‘그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라고 말하는 게 어때서!


우리는 지나치게 겸손하다. ‘예뻐요’라고 칭찬하면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영어 회화에 자신감을 갖게 된 이유는 ‘지나치지 않은 겸손’ 덕분이다. 외국 사람이 ‘너 영어 잘하는구나!’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혹은 ‘고마워요’라고 하지만, 난 한 단계 나아가 ‘알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내 말에 당황해하거나 놀라서 웃는 외국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나는 겸손에 대해서 다르게 말하고 싶었다. 물론 내가 모자라고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저런 대답이 가능했다. 내가 대문호거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이라면 저런 대답이 오만하게 보였을 터이다.


조영남 선생님의 <겸손은 힘들어>라는 노래가 있다. 어떤 이는 겸손이 몸에 배어 있고, 또 다른 이는 겸손하지만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가 ‘음식 잘하네?’라고 칭찬해주면 ‘그지? 맛있지?’라고 해보면 어떨까. ‘운동신경이 뛰어나네?’라고 칭찬해주면 ‘그럼, 타고났지. 올림픽은 나가지 못하는 실력이지만!’이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우아하고 당당하게 칭찬을 받아들이는 센스!



꿈: 누구나 잘하는 게 하나쯤 있다

거꾸로 시간을 되짚어보니

나이가 드니 살아온 시간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다 불현듯 후회하고 머리를 쥐어뜯기도 한다. ‘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아, 그때 참 내가 말이야’라고 나 자신에게 말을 걸다가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40년 전,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억은 상당히 많이 휘발되어 슬프다. 반장을 했고, “차렷! 경례”를 외쳤고, 담임선생님이 모말녀 선생님이었다는 기억은 선명하다. 다만 반 친구들과 함께한 기억은 흐릿해졌다. 고향 친구들을 불러서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3학년 때 기억은 드문드문 떠오른다. 몇 년 전 후쿠오카 공항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김부자 선생님을 만났다. 38년 전 만남을 서로 기억해낸 건 신기한 일이다.


30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내가 가장 예민했던 시기다. 슬픔을 들키지 않으려고 많이 웃었다. 공부해서 학자가 되기보다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보낸 사연이 소개되어서 학교에서 스타 대접을 받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고, 그걸 소풍 가서 틀어 장기 자랑을 하는 데 사용했다. 수학은 일찌감치 포기해서 수학 시간에 영단어 외우기에 바빴고, 과학을 잘하지 못했다. 지금 라디오 방송할 때 과학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 공부 좀 해놓을걸 하는 후회가 든다.


20년 전, 스물여덟 살이었다. 첫 장거리 여행을 했고, 본격적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고, 연남동 근처에 첫 전셋집을 마련해서 애숙이 누나와 살았고, 애숙이 누나가 나를 뒷바라지 해줬다. 그 시절 신촌, 홍대, 여의도를 오가며 열심히 일했다. 그때도 여전히 사랑할 줄 몰랐고 고백에 서툴러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쭈뼛쭈뼛했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다. 1997년에 데뷔해 코미디언 3년 차가 되어 슬럼프가 찾아왔다. 고향에 내려가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고향, 가족, 치구를 향한 그리움을 참았다. 그때의 인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젊은 혈기로 으쌰! 으쌰! 힘을 내어 달리다 보니 서른 살이 되었다.


10년 전, 서른여덟 살이었다. <강심장> 덕분에 SBS 연예대상 만능 엔터테이너상을 수상했다. 그다음 해 SBS에서 <김영철의 펀펀 투데이> 라디오 DJ를 맡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큰 화제를 일으키진 못했지만 나름 고군분투했다. 영어 공부를 더 해야 하나 싶어 유학을 다녀올까 고민했더니, “갔다 와서 어쩌게? 교육 방송에서 영어 선생님 할 거야? 어디 하버드 대학이라도 갈 거야? 유학 갔다 보면 네가 하는 영어 기대치가 올라가서 완전 잘해야 해. 유학 가지 말고 여기서 영어 가끔 틀려가며 쓰고, 다리품 팔아가며 영어 학원 다니면서, 부지런하게 배우면서 방송하는 게 더 보기 좋아. 가지 마!” 했던 선희 누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누나가 시킨 대로 여전히 틀려가며 아직도 배우고 있다. 10년 전 영어 능력과 지금의 영어 능력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실력이 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시작해》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고, 서른아홉살에 출간했다.


책에 쓴 아버지 이야기는 한 번의 만남으로 모든 걸 다 용서하고 화해한 듯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그때가 지금보다 더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씩씩하지만, 여전히 겁도 많고 무서움도 많다.


앞으로 10년 후, 나는 어떤 모습일까? 머리숱은 줄어들 테고, 주름살은 늘어날 테고, 더 홀쭉해질지 뚱뚱해질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적으로 성장한 내가 기대된다. 그리고 여전히 꿈꾸고 있기를 바란다. 꿈꾸는 자는 언제나 젊고, 꿈을 상실한 자는 늙어가는 거니까. 내가 꿈을 이뤘다면 다른 이가 꿈을 꿀 수 있도록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2032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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