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온

   
조신영
ǻ
클래식북스
   
17500
2020�� 12��



■ 책 소개


지친 당신을 위로하는 정온의 지혜
이 또한 지나가리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우리에게 『정온靜穩』은 시의적절한 위로다. 주인공 고요한을 따라 여행하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은 그 답을 찾는다. 일시적인 처방이 아니다. 어떤 폭풍우에도 쓰러지지 않을 절대 가치를 선사한다.

정온靜穩, 오티움 쿰 디크니타테 Otium Cum Dignitate

위엄으로 가득한 평온. 혹은 배움으로 충일한 휴식의 뜻으로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 구절이다. 저자가 5년의 멈춤 동안 갈구했던 마음이다. 가면을 쓴 채로 도무지 누릴 수 없었던 정온이다.

『정온靜穩』은 흔들리는 우리를 끌어안는다. 어머니 품처럼 따스하다. 세상의 빠른 속도에 맞추어 사느라 지친 우리를 일으키는 친절한 손길이다.

스토리텔링으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정온’의 신비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세상이 일으키는 시끄러운 소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 걸어갈 용기가 영혼에 퍼진다.

■ 저자 조신영
한국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경청』, 『쿠션』 등 모두 11권의 책을 썼다.

생각을 생각하는 힘, 즉 엘리베이션 파워Elevation Power를 기르는 일이 삶의 자유를 확장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믿는다. 이 일을 위해 생각학교ASK를 설립, 운영 중이며 고전적 교육방법인 트리비움(문법, 논리, 수사)으로 리버럴 아츠를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즐겁게 탐구하고 있다.

■ 차례
작가의 말
1부 번 煩
2부 온 穩
3부 정온 靜穩
에필로그

 




정온


번煩

1

새벽을 달리는 자동차 소음이 먼 곳에서 들려왔다. 형광등 미세 잡음이 가늘게 들려오는 시간, 요한은 서재 겸 침실로 사용 중인 옥탑의 커다란 방에서 기지개를 켰다.


요한은 오래전부터 반지에 새겨진 문장을 소재로 소설을 썼고 각고의 노력 끝에 초고를 완성했다. 하지만 원고를 받은 출판사마다 반응은 냉정했다. 거절 회신을 받은 곳은 단 한군데뿐이었다. 나머지 출판사들은 아무 답변도 없다.


거절과 무시를 반복할수록 요한은 원고 수정에 집착했다. 페이지마다 온통 빨갛게 적힌 노트를 보며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확신에 빠져들었다. 노트 속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몽골의 초원 한가운데 아시아와 유럽 대륙의 드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한 왕이 있었다. 그는 칭기즈 칸이 지명한 후계자로 몽골 제국을 다스리는 대 칸(Kahn)으로 즉위한다.


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색바랜 몰스킨 노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깨알같이 적힌 글씨를 훑어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애잔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선율이지만 오래전 녹음이라 왠지 허전했다.


하프 연주를 정점으로 「콜 니드라이」 후반부가 펼쳐질 무렵 카톡 알림이 울렸다.


백작쌤.


학생들이 요한을 부르는 별명이다. 영어를 잘 가르치는 데다 고고한 취미, 품격 있는 생활 때문에 붙은 별명이리라. 요한은 폰 위로 엄지를 놀리려다 움찔하더니 배를 움켜잡았다. 휴대전화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송곳같이 예리한 것이 위장 아래쪽을 찌르는 통증이 몰려왔다. 요 며칠 동안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기분 나쁜 복통이다. 요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배를 문지르고 몸을 굽혀 휴대전화를 주웠다.


한동안 화면을 들여다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언짢은 기분을 무시하며 전화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음악에 집중하려는 순간 통증이 다시 몰려왔다.


요한이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짜증이 올라올 때마다 반사적으로 찾았던 것이 담배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요한은 문득 자신이 2년 전에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몸서리쳤다.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화이트보드용 마커를 찾으려 서랍 맨 위 칸을 열었다. 핑크빛 카드 하나가 꽂혀 있었다. 좌우를 살펴 확인한 요한은 카드를 열었다.


요한의 미간에 가느다란 선이 그려졌다. 현직 교사로서 짬짬이 독주회를 열기도 하고 지역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하는 첼리스트, 박하늘 선생.


클래식에 심취해 있는 요한의 매력을 박하늘은 한눈에 알아봤다.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인 요한을 모두 싫어했지만, 클래식에 관해 대화를 나누거나 가끔 함께 음악을 들을 때면 하늘은 요한의 순수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카드를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교실로 향하는 요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수업을 모두 마친 요한은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오가는 복도를 지나 교무실로 향했다.


"백작쌤!"


학생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기가 꺾인듯한 윤수 모습에 신경이 곤두섰다.


"다큐멘터리? 「하얀 광야white Wilderness」?"


"레밍lemming(나그네쥐)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뛰기 시작하면 다른 레밍들도 따라 뛰어요. 셀 수도 없이 많은 레밍의 무리가 영문도 모른 채 미친 듯이 달리다가 결국 절벽 끝에서 줄줄이 바다로 떨어지는 장면이 충격적이었어요. 멈추지 못하고 떨어져 죽다니."


“이렇게 미친듯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까지 한 마리 레밍이 되어 달려가는 꼴이 우습잖아요.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요.”


"아빠는 부사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죠. 돈 잘 벌어요. 하지만 그자가 얼마나 불안에 떨고 있는지 저는 알아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 꼴이죠. 집에만 오면 독한 술을 마시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허리띠로 엄마를 패요. 엄마는 얼굴만은 때리지 말아 달라고 사정해요. TV에 출연해야 하니까. 그렇게 맞으면서 이혼도 못 해요. 레밍처럼 무작정 달리고 있는 거예요. 엄마는 그럴수록 더 일에 매달리고 제 매니저 역할에 집착하죠.”


요한은 윤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설득을 시작했다.


“쌤,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견디기 어렵다는 듯 윤수가 말을 끊었다. 요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힘없이 걸어가는 윤수 뒷모습을 보며 요한은 허탈한 표정으로 음료수를 들이켰다.


2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리는 동안 서늘한 기운이 학교 전체를 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교감이 말했다.


"오늘 새벽 6시 무렵이라고 합니다. 청담동 한 아파트에서 2학년 3반 안윤수 군이 투신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휴대전화 상단에 표시가 올라왔던 노란색 카톡 알림이 떠올라 황급히 폰을 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새벽 5시 35분 그리고 5시 48분. 윤수의 메시지가 두 차례나 들어와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고 있는 노란 얼굴 아이콘이 첫 번째 메시지다. 그리고 두 번째 메시지.


더 달릴 힘이 없어요.


"윤수군 휴대전화를 확인해 보니 아무래도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눠야 이번 사건의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요한이 경찰차에 실려 학교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전교생이 창문으로 내려다보았다. 제자 목숨을 앗아간 현행범으로 체포당한 기분에 요한은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수사관이 물었다.


“상담 중에 무슨 특이한 내용은 없었나요?"


"윤수가 무척 불안해 보였던 건 사실이에요.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제 말에 집중하지도 못했습니다. 뭐랄까, 넋이 나간 것 같았어요. 부모님의 이중적인 모습에 절망감을 느꼈다고 호소했어요. 그런 이야기야 요즘 가정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수사관이 말을 자르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수사관이 담배를 비벼 끄며 뭐라고 윤수의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요한의 귀에 윙-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수사관 말이 들리지 않았다. 입술 모양을 보아하니 분명히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듯했다. 무슨 말일까?


마치 벗어 놓은 옷자락처럼 스르르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요한이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찧으며 쓰러졌다. 깜짝 놀란 수사관이 몸을 숙여 요한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았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4

요한은 무덤덤한 자신의 반응에 놀랐다. 의사들은 분명히 남은 시간이 한두 달이라고 했다.


췌장암이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감정적 동요, 연민, 슬픔이나 분노가 일렁이지 않았다. 묵직한 납덩어리 하나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있을 뿐이었다. 요한은 침착하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병원에 남아 사망 선고를 듣고 구질구질한 소리를 들어야 하나?’

-그건 아니야. 아버지를 생각해봐. 얼마나 주위를 힘들게 했니? 서둘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해.

-무조건 한국을 떠나자.


‘그래야겠지. 그런데 어디로? 어디가 가장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고요한 마음을 다 정복한 척 위선을 떨던 ’고요한‘이란 인간이 마지막으로 고요하게 사라지기에 적당한 곳은?’


질문을 던지면 자판기처럼 즉각 대답을 툭툭 던져 주던 요한의 내면이 잠시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초록 광야.

‘초록 광야?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인데.’

-네 작품으로 들어가.

‘기발한 생각이야. 아버지의 숙제를 풀기 위해 인생을 걸고 십수 년을 만져 온 작품, 그 무대 속으로 뛰어 들어가란 말이지? 그래, 초록 광야는 작품의 무대, 바로 몽골 초원이야.'

-바로 그거야. 오늘 말귀를 잘 알아듣네.

'그래, 초록 광야가 제격일 거야. 온 우주에 나 혼자 고립시킬 수 있는 곳이니까. 그곳에서 진짜 나를 만나는 거야. 그리고 저 엉터리 작품을 제대로 고쳐 놓고 영원히 사라지는 거지.

-게다가 그곳에는 <밝은생각학교> 권문호 교장이 있어. 그 친구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인생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든 게 순조로워지는군.'


요한이 직접 링거 바늘을 뽑고, 사물함에서 소지품을 대충 챙겨 넣고 낡은 배낭을 둘러멘 것이 새벽 2시 반이었다. 병상 위에 간호사들이 볼 수 있도록 병원비 정산을 위한 카드 번호와 유효 기간을 적어 두고 병원을 떠났다. 간헐적으로 복통이 습격했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집에 도착한 후, 항공권 예약 시스템으로 들어가 인천발 울란바토르 행 항공편을 검색했다. 대한항공과 몽골의 미야트 항공, 두 항공사가 운행하고 있었다.



온穩

2

“선생님, 그래서요? 아까 듣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요.”


게르의 활기찬 분위기는 대화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요한은 자르갈에게 이야기 나머지 부분을 들려주었다.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칸의 명령으로 반지를 찾아 나선 현자들이 사막의 성자를 찾아내는 장면요!"


자르갈은 사막의 성자처럼 목소리를 아래로 내리깔고 말했다.


"칸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때, 혼란으로 가득차고 고통이 절정에 이르고 완전히 절망했을 때, 오직 그 때만 이 반지를 빼어 비밀의 문장을 보아야 한다고 꼭 전하시오."


자르갈은 신비한 반지를 구하러 사막으로 들어간 현자처럼 간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사막의 성자 역할로 바꿔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닐 때 반지 안에 새겨진 비밀의 문장을 본다고 한들 그 문장은 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소. 칸에게 명심하라 이르시오.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는 반지를 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지의 문장은 단 한 번의 기회만 준다는 것을 알리시오."


들려준 이야기를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문장들을 살려 냈다. 요한은 나머지 부분을 설명했다.


칸은 마지막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지. 그 와중에 칸을 호위하며 함께 달아나던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말은 새벽이 되자 그대로 고꾸라져 숨을 거두고 말았고 칸은 그야말로 혼자 맨발로 달아나는 처지였어.


적들은 이제 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추격을 좁혀 왔고 돌아갈 방법도 없었어. 그렇다고 절벽 위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었고, 살아서 이 상황을 빠져나갈 가능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지.


지금이야말로 반지를 빼내 기적을 경험해야 할 시점이라고 계속 울부짖는 소리가 칸의 마음속에서 들려왔어. 그러나 제국의 리더였던 칸은 냉철한 승부사였지.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다. 아마도 적들은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른다. 저들이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은가. 설령 내가 만약 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도 운 좋게 살아날 수도 있지 않은가? 아직은 반지를 뺄 때가 아니다.'


이런 내면의 싸움을 비웃기라도 하듯 적들이 불과 몇십 미터 앞에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어.


마침내 칸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야겠다고 결심해. 1%라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거지. 그 순간 칸의 눈에 절벽 아래에서 포효하고 있는 사자의 무리가 들어왔어. 사자들은 굶주린 표정으로 사납게 칸을 노려보고 있었지.


이제 완전한 한계상황이라고 생각한 칸은 반지를 손가락에서 뺐어. 그 안에는 고대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단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3

별똥별이 축포처럼 터지는 우주를 배경으로 요한은 이야기 마지막 부분을 들려주었다.


반지의 글을 보는 순간, 아무르 칸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해. 팽팽한 긴장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며 갑자기 모든 것이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귀에 들려오던 급박한 군사들의 발소리, 창과 칼이 부딪치며 들리던 저주스러운 금속 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세포 하나하나가 나른한 이완 상태로 들어가며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한 거지.


이 구절을 읊조리는 순간 칸은 절대 고요 상태로 접어들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그 어떤 불안과 위협도 느껴지지 않는 지극한 평화가 영혼에 임했어. 정온(靜穩)의 순간이었지. 고요함과 평온함, 바로 그 순간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어.


칸을 뒤쫓던 군사들이 무엇엔가 홀린 듯 추격의 방향을 틀어 반대쪽을 수색하기 시작한 거야.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칸의 귀에는 더 이상 적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


칸의 복귀를 축하하는 입성식이 끝나고 성대한 축제와 축하연이 벌어졌어. 사람들은 거리에서 춤을 추었으며, 휘황찬란한 불꽃놀이가 열렸지. 칸은 기쁨에 취해 흥분했고 행복한 기분에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 바람에 잘못하면 이대로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어.


반지를 빼서 그 안에 있는 그 신비한 문장을 읽었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절벽에서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칸은 다시 한 번 절대 고요의 상태를 회복했어. 흥분과 기쁨과 행복의 격동하는 기분이 차분해지고 호흡이 평온해지기 시작했으며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킬 수 있었지. 정온(靜穩)을 다시 경험한 거야.


다음 날 아침. 요한은 한사코 떠나지 않으려는 자르갈을 설득해 울란바토르로 가는 미니버스에 실어 보냈다. 누가 지켜보는 가운데 최후를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언어적으로 완벽한 고립 상태를 만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서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끝까지 감정에 휩싸이지 않겠다는 요한의 각오는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이 아직은 어느 낯선 이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동요도 일지 않았다.


4

리코더를 멈추고 요한은 모닥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르갈의 미소가 불꽃에서 보였다. 별빛처럼 영롱한 두 눈을 떠올리며 지난밤의 대화를 생각했다.


자르갈이 말했다.


"최근 읽은 책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에요. 선생님도 읽어 보셨죠?"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대면하자 대체 자기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형벌을 받나 생각해요. 늘 판사로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던 습성 때문이겠죠. 이반은 자기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 마주한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에 절망하죠.


절친 피요도르는 이반이 죽으면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할 생각, 보수가 오르고 판공비까지 나올 것을 기대해요. 이반 일리치의 부인은 연금이 줄어들까 걱정하고, 사교계에서 잘나가던 딸은 아버지 장례식 때문에 자기 결혼 계획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반은 깨달아요.


자기는 평생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희생을 감내해 왔는데 정작 그들은 이반의 죽음에 관심이 없다는 비참한 현실을요. 그리고 생각하죠. 삶과 주위 사람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바로 기만이라는 것을요. 이반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삶이 온통 기만투성이며 허위였다는 걸 깨달아요."


죽음만이 유일한 진실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었다.


자르갈의 기억력은 대단했다. 요한은 한동안 별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르갈이 덧붙였다.


“선생님 이야기에 나오는 패스 어웨이가 왜 칸에게 평화를 선사했는지 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패스 어웨이가 곧 죽음을 기억하게 만드는 표현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어요. 사라진다는 뜻도 있지만, 죽음이라는 뜻이 더 강하잖아요.”


가면을 쓰고, 타인으로부터 존중과 사랑을 얻기 위해 몸부림쳐 온 삶.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야기되는 불안과 두려움, 자기방어를 위한 선 긋기. 만족할 만한 인정과 존중을 받을 때는 잠시 긴장을 풀었다가 또 언제나 파도처럼 밀려오는 외부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기만에 빠져 정신줄을 놓을 수 없었던 삶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나 따위가 이런 얄팍한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정온(靜穩)을 가르치려 들었다니.


배낭에서 노트를 꺼내 펼쳐 들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빠르게 넘겨보았다. 자신의 인생 전부라고 할 만한 것. 영혼과 눈물이 묻어 있는 이야기. 저 모닥불에 던지면 채 십 분 안에 소멸해버릴 무가치한 것.


생각 한쪽에서 격한 감정이 일어나며 심장을 뛰게 했다.


-그래, 이 글이야말로 내가 온갖 가면을 쓰도록 부추긴 주범일지도 몰라.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면서 매달린 이 작업. 정온을 얻지도 못했으면서 고상한 척, 다 이룬 척 스스로 속이게 만든 이 글. 이 노트야말로 기만 덩어리 그 자체다.

'안 돼, 요한. 넌 지금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어, 손으로만 쓴 노트야. 따로 보관해 놓은 복사본도 없잖아. 지금 그 노트를 태우면 어쩌려고 해? 침착해. 오랜 노력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태워 버릴 셈이야?


노트를 반으로 접어 공중으로 치켜든 요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꼼짝하지 못했다. 이글거리는 불길을 노려보며 몇 분이나 시간이 흘렀을까?


요한은 노트를 모닥불 속에 던져버렸다.


위선과 기만의 껍데기 고요한의 삶은 이 노트와 함께 다 사라져버리기를…….


5

자르갈이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난 아침,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있어 게르 틈으로 내다보았다. 오후마다 음식을 날라 오고 집을 정리해 주는 현지인 할아버지가 서 있다. 무슨 일로 이 아침에 찾아왔을까?


표정이 어두웠다.


이빨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할아버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어로 연신 무어라 떠들었다. 손가락으로는 게르 천장을 가리키고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뭔가를 전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무슨 말인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마을 쪽을 가리키기도 하고 하늘을 손가락질한 다음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남긴 후 총총 사라지고 말았다.


사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일주일 내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평소처럼 요한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10시 무렵에 게르를 나섰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몸이 무거웠다. 한 걸음을 떼기가 벅찼다.


얼굴에 갑자기 뜨거운 불길이 와닿는 통증이 느껴졌다. 바람에 좁쌀만한 크기의 모래와 황토가 섞여 있었다.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빨리 이 상황을 피하지 못하면 질식해 죽을 것이다.


모래폭풍이다.


바위를 타고 기어올라 두 번째 틈새에 몸을 집어넣었다. 어깨가 끼어 역시 요한의 몸을 숨기기엔 폭이 좁았다. 마지막 희망은 틈새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오른쪽 다리를 틈새에 걸치고 몸을 굴려 보았다.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어릴 적 서재에 위로 난 천창을 올려볼 때 기분이 떠올랐다. 미친듯한 모래폭풍이 대지를 할퀴고 지나가는 모습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의 모습처럼 보였다.


요한의 의식이 가뭇가뭇 흐려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다. 귓가로 끈적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노인은 이 날씨를 경고한 거다.

흐려지는 의식 가운데 노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공포에 찬 그 표정.

숨을 몰아쉬던 요한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디스 투… 샐… 패스 어웨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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