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칠 짐은 없습니다

   
주오일여행자
ǻ
꿈의지도
   
14000
2019�� 07��



■ 책 소개

 

2kg 남짓의 물건만 담은 가방을 메고
여행을 떠난 두 사람의 200일간의 기록

 

의지대로 살아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긴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여행 중 일상은 여행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행이 인생의 아주 작은 문제 하나 해결해주지 못해 분했고, 동시에 재취업 걱정만 늘어갔다. 그러던 중 프라하에서 우연히 만난, 거대한 배낭에서 온갖 물건을 쏟아내는 두 여행자를 보고 깨달았다. 달라져야 하는 건 새로운 여행지로의 이동이 아니라 여행의 방식이었다는 걸. 그래서 여행의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우연에 몸을 맡겨 보고, 오늘의 행복에 집중하며, 진짜 인생을 바꾸는 여행을 해보기로. 잡동사니로 가득 찬 20kg 짐을 2kg으로 줄였다. 무거운 짐을 덜고 여행의 진정한 가치에 집중하기 위해 미니멀 여행을 떠났다.

 

《부칠 짐은 없습니다》는 매일 같은 티셔츠를 입고 7개월간 대륙과 계절을 오가며 여행한 두 사람의 여행기이다. 같은 티셔츠를 7개월 동안 입고, 스무 가지 물건만 가지고 여행하는 일이 과연 인생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 저자 주오일여행자
여행을 낯선 곳에서의 산책이라 믿는 사람. 동네 사람 몇 안 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게 유일한 자랑이다. 직장을 그만둔 후 여행하고 글을 쓰며 도처에서 사는 걸 배우려 했으나, 큰 성과는 없다. 내일은 무엇을 할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글을 쓰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Part 1 더 가볍게 여행할 수 없을까?
배낭 없이 배낭여행
비워보면 알게 될지도
무엇을 살지, 어떻게 살지
짐 없이 여행한다는 건

 

Part 2 여행은 가볍게, 영혼은 무겁게
여행은 가볍게, 영혼은 무겁게
배낭 없는 용의자 둘
우산이 없어도 괜찮아
할머니의 겨울
우리가 마음을 열면

 

Part 3 매일 같은 옷을 입는 여행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지루할 때
우리가 배낭과 바꾼 건
다정한 무관심
여행이 한 편의 영화라면
촛불을 켜는 일

 

Part 4 더 즐겁고, 더 자유롭고, 더 가치 있는
지금 여기서 춤을 추자
섬의 하루 (feat. 이어폰을 준비하세요.)
너를 정의하는 게 너의 여행이라면
다른 집, 다른 삶
저 돌고래 한 마리처럼

 

Part 5 여행, 산책하듯 가볍게
9년 동안 우리는
타이베이-크루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랑 여행해줘서
산책하듯 가볍게

 

에필로그 

 




부칠 짐은 없습니다


더 가볍게 여행할 수 없을까?

배낭 없이 배낭여행

나의 삐딱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프라하는 유달리 낭만적이고, 별스럽게 아기자기했다. 햇살에 반짝이는 도시의 붉은 지붕과 오래된 다리 위에서 울려 퍼지는 보헤미안의 노래, 중세 시대를 가득 담은 100여 개의 탑까지. 오그라드는 대사를 팍팍 날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랑스러운 도시의 풍경이 그 어떤 로맨틱 영화도 실패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도시에서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두 명의 여행자를 만났다.


두 명의 여행자를 만난 건 구시가지의 한 카페였다. 우리 네 사람은 얇은 반죽으로 둘둘 말려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프라하의 빵, 트르들로의 맛이 과대평가되었다는 데 공감하며 금세 가까워졌다. 두 명의 여행자는 자신들도 빈에서 우연히 만난 동행이라고 했다. 우리는 예쁜 여행객들 사이를 이방인처럼 배회하며 코젤 생맥주를 물처럼 마셨고, 매일 해 질 녘이면 페트리진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며칠을 보냈다. 일정이 달라 서로 다른 곳으로 헤어져야 했던 마지막 날, 우리는 각자의 배낭을 메고 프라하의 터미널에서 다시 만났다. 그날, 그 터미널이, 앞으로 우리 여행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말이다. 관심도 없던 프라하가 과연 일생의 인연으로 느껴지는 순간을 만나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한 채.


터미널에서 다시 만난 두 여행자는 자기 몸만 한 크기의 배낭을 의자에 앉혀둔 채로 우리를 맞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낭이었다. 그들의 배낭을 주머니 안에 세상 만물을 담고 사는 만화 주인공, 도라에몽 같았다. 배낭 안에서 온갖 물건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최고급 침낭과 텐트는 기본이고, 동네의 작은 약국을 방불케 하는 상비약 종합 세트와 깊은 맛의 사천 짬뽕을 끓여낼 법한 요리 도구와 언제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한 벌씩 챙겨 왔다는 극강의 방한복까지! 자주 사용하지도 않고 무겁기만 한 물건들을 자랑하듯 보여주는 그들에게 전부 필요한 물건인지 묻고 싶었다. 바로 그때, 거대한 배낭이 뒤집히며, 온갖 물건들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아, 지금 우리의 모습이 저들과 다르지 않구나. 이 커다란 배낭에는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 지난 여행 동안 이 중에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사용했을까?’


두 여행자가 프라하를 떠나고, 우리는 한동안 터미널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무슨 짐이 이리도 많을까? 온갖 비상약 중 실제로 사용한 것은 두통약과 밴드 약간뿐이고,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는 블루투스 스피커는 사용법마저 잊어버렸다. 혹시 몰라 챙긴 여벌옷들 중 한 번도 입지 않은 티셔츠도 있었다. 분명한 여행의 목적 없이, 남들이 정한 무수한 조건과 변수에 맞춰 온갖 짐들을 챙겨 넣은 것이다.


K와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배낭에 있는 물건들을 양말 하나까지 전부 꺼냈다. 그리고 딱 ‘오늘 하루’에 필요한 물건만 남겨보기로 했다. 가장 불필요한 것들을 먼저 하나둘 제외했다. 배낭에서 제외된 물건들 대부분은 미래의 어떤 순간을 위한 대비책이었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 미래의 위험이나 필요에 대비해, 이 무거운 배낭을 지고 매일 힘에 부치는 걸음을 옮겨 왔던 것이다.


우리는 배낭을 정리하며, 몇 개월 뒤나 혹시나 필요할지 모를 불필요한 잡동사니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인정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의 위급한 상황이나 미래의 행복할지도 모르는 어떤 날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저당 잡히는 고리를 끊어내자고 마침내 결심했다.


본래 배낭여행은 최소한의 차림과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용기 있는 자들의 여행을 뜻하는 게 아니었던가. 돌이켜보면 진짜 배낭여행은 어떤 브랜드의 배낭을 메는지보다, 얼마나 실용적인 물건을 많이 챙겼는지보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가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부분이었다. 최소한의 짐만 추려 떠나는 새로운 여행, 배낭 없이 떠나는 배낭여행, 적은 짐과 가벼운 가방이 우리에게 선물할 여행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여행은 가볍게, 영혼은 무겁게

여행은 가볍게, 영혼은 무겁게

텔아비브 공항은 아테네의 어느 신전이 떠오를 만큼 웅장했다. 하늘처럼 넓은 천장을 받치고 선 기둥 사이로 점처럼 작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떠돌았다. 드르륵드르륵- 캐리어 끄는 소리가 공항 안을 헤매고, 수하물 찾는 곳을 알리는 화살표가 머리 위를 떠돈다.


예전 같았으면 수하물을 찾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 배낭에 눌리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양의 어깨와 공허한 허리춤에서 풍선이 돋아난 듯 가벼웠다. 그래, 짐이 없다. 짭짤한 사해에 배처럼 두둥실 몸을 띄워, 물 위에서의 낮잠을 즐기는 듯한 환상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최소한의 물건만 남은 여행 가방의 간소함이 삶의 복잡함을 이기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할 것’이라는 장석주 시인의 말을 구호처럼 외치며, 델아비브 공항 검색대를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가벼운 몸과 자유로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짐이 나오는 컨베이어 벨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유유히 지나쳤다. 배낭이 언제 나올지 몰라 목을 쭉 빼고 컨베이어 벨트만 바라보던 지난날 우리 두 사람도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


모래 위에 지은 섬 아닌 섬, 델아비브는 온통 노란색 건물로 가득했다. 구도심은 귀퉁이가 닳아 뭉툭해진 낡은 빌딩으로 북적였고, 오랜 건물들 사이로 현대적 디자인의 거대한 빌딩이 버섯처럼 돋아있었다. 그 옆으로 유대교 회당과 검은 옷을 입은 랍비들이 보였다. 진짜 이스라엘에 온 것이다.


우리는 작은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바라보며, 숙소와 가까운 정류장 이름을 비교하고 있었다. 읽을 수도 없는 글자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며 암호를 해독하듯 골몰하고 있으니, 우리 앞을 서성이던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가 타야 할 버스를 찾아 알려주셨다. 그리고는 도움이 필요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언제든 도움을 청하라고, 누구든 나서서 당신을 도울 거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델아비브 사람들은 항상 친절하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반드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혹시 길을 찾기 힘들거든, 주변 사람에게 휴대폰을 빌려 자신에게 꼭 전화하라고 당부한 것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들이 흔쾌히 전화를 빌려줄 것이라고 덧붙이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들의 염려와 환대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가시가 손에 박힌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국토의 60프로가 사막이라 기본적인 물조차 얻기 힘들다는 이 척박한 땅에서, 대부분의 호텔은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로 넘친다.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으로 사막을 이토록 풍요로운 오아시스로 만든 이스라엘이 대단하기도 하지만, 엄청난 물 소비량으로 매번 주변 국가에서 물을 수입하는 실정과 주변국들의 수자원짜리 독점하여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현실이 씁쓸하기도 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본 가자 지구의 물 부족 문제와 텔아비브의 수영장 물결이 묘하게 일그러지며, 손가락에 박힌 보이지 않는 가시가 따끔거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어디쯤에서 우리는 여행의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왜 여행을 할까?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피곤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삶을 어떻게든 바꿔보기 위해, 모두 저마다의 이유와 결심으로 자기만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 곁을 스쳐 가는 수많은 사고와 갈등을 목격하며 우리의 여행이 언제나 자기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누군가는 분쟁이 벌어지는 곳으로의 여행이 부당한 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라 비판하고, 누군가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 사고가 몇 사람의 불행인지 측정하고 있을 테지만,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믿어보는 쪽을 택했다. 하루키는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9년 예루살렘상을 수상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오지 않는 것보다 오는 것을, 외면하기보다 무엇이든 보는 쪽을, 침묵하기보다 여러분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는 쪽을 선택했다’라고 말하며.


우리 역시 무엇이든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건 아닐까? 친절한 사람들의 미소와 흉터처럼 남은 지도 위의 불편한 점선, 그리고 우리가 행운처럼 비껴간 비극을 담담히 가슴에 담으며, 우리도 무엇에든 침묵하지 않고 누구에게든 말을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 같은 글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담는 사진으로, 그리고 새로운 실험이자 최소한의 윤리인 우리의 여행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매일 같은 옷을 입는 여행자

우리가 배낭과 바꾼 건

“오, 파도바? 파두아? 어떻게 읽는 거야. 여기 어때? 살아생전 도대체 들어본 적이 없는 도시야. 베네치아에서 오래 머물기엔 물가가 너무 살 떨렸잖아. 축제도 이제 시시하고. 그렇다고 밀라노에 가자니 내 패션이 너무 후지고. 이탈리아 토박이가 알려준 곳이라 더욱 믿음이 가. 여기로 가자.”


K와 나는 지금 파도바로 가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밀라노에 가는 길 위에 있겠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는 파도바로 가는 중이다. 사실 파도바는 본래 우리 여행 계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도시이다. 심지어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다. 생각보다 일찍 베네치아를 떠나게 되면서 우리는 당장 이탈리아 북부의 수많은 도시들 중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로마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의 추천이 떠올라 급히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그 친구는 파도바가 작지만 운치 있는 도시라며 꼭 한 번 가보길 권했다. 그런 소도시야말로 이탈리아를 제대로 즐기는 법이라며. 가만 생각해보니 작고 한적한 소도시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딱 맞는 여행지였다.


우리는 터미널에서 급히 계획을 변경해 파도바행 버스표를 샀다. 밀라노에 머무르려던 계획을 바꿔, 이리도 갑자기, 그렇게 무작정 말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모두 우리에게 짐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이름도 생소한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로 이동하고, 무작정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도시로 훌쩍 떠나고. 이 모든 변화는 우리가 가볍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여행은 언제나 계획표 너머에, 모험은 늘 우연 이후에 있었다.


갑작스레 도착한 파도바는 쌀쌀한 날씨에도 산책을 멈출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도시였다. 멋스럽게 늙은 중세 시대의 건물들이 깊은 숨을 쉬고, 뜨거운 한낮의 해와 갑작스러운 비를 막아주는 둥근 아치형 지붕이 편안한 산책로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름저차 들어본 적 없는 이 낯선 도시 곳곳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난 이야기들이 잔뜩 숨겨져 있었다.


인간은 걷는 만큼 존재한다고 했다. 여행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파도바를 걸으며 우리가 비로소 진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버스로 오며 가며 보았다면 알지 못했을 도시의 매력을 걸으며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길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연결하는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귀한 여백을 마련했기 때문에, 천천히 걸으며 발견하는 여행의 즐거움 덕분에 우리는 파도바에서 무려 삼 주를 머물렀다. 예전처럼 그저 여행을 왔다면 딱히 볼 것도 없고 지루해서 쉽게 지나쳐버렸을, 작고 심심한 도시에 말이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파도바에서의 일상은 아주 단조롭다. 하루 중 중요한 일과는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나서는 것뿐이다. 아침 8시,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툭툭 털며 길을 나선다.


드라이기가 없어 매일 젖은 머리를 말리는 게 일이었지만, 이제는 아침 산책의 햇볕과 불어오는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는 일이 귀하다. 젖은 머리를 펄럭이며 공원을 걸을 때마다 행복하다. 드라이기를 넣을 배낭 대신 아침 산책의 기쁨을 얻었다. 짐이 없는 우리에게 필수품은 더 이상 드라이기가 아니다. 엑셀을 열어두고 배낭 안을 가득 채울 물건들을 적을 필요도 없다. 대신 우리는 머릿속에 필요한 몇 가지만 생각한다. 정해진 시간에 시작하는 4시간의 산책, 머리를 말릴 햇살, 그날에 맞는 시 한 구절. 그것이면 여행은 충분해진다.


“어쩌면 우리가 짐과 바꾼 건 시간이 아니었을까? 여행을 하면서도 짐에 치이고 시간에 쫓기곤 했잖아. 출근하듯이 집을 나서서, 업무 보듯이 사진을 찍고.”


“그래, 배낭을 옮기고, 짐을 쌌다가 다시 풀고, 서둘러 관광 명소를 보고,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고, 배낭과 맞바꾼 건 산책이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생긴 빈 시간에 느긋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잖아. 어쩌면 짐이 없어서 비로소 우리가 바라 왔던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몰라.”



더 즐겁고, 더 자유롭고, 더 가치 있는

지금 여기서 춤을 추자

배낭 없이 유럽을 여행한 지 100일 만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암스테르담은 여전히 흥미롭고, 무한히 자유로웠다. 운하를 건너는 자전거 사이를 걸으며 ‘돌아왔다’는 푸근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의 지인을 만나 맡겨두었던 배낭을 돌려받았다. 거대한 크기와 묵직한 무게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무거운 걸 등에 지고 그동안 어떻게 여행했는지. 우리는 배낭을 한국으로 보내고 가볍게 떠나는 이 여행을 계속해보기로 했다. 여행 가방이 작고 가벼울수록 여행은 묵직하고 담대해진다고 믿으며, 여행의 즐거움은 여행 가방의 무게와 반비례하는 법이라 믿으며.


K와 나는 유럽을 떠나 새로운 대륙으로의 이동을 결정했다. 아시아의 첫 번째 나라이자, 배낭 없이 떠난 여행의 일곱 번째 나라는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를 이루는 수천 개의 섬들 중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신들의 섬, 발리이다. 새로운 대륙으로 떠나는 새로운 아침, 우리는 잔뜩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아무리 먼 거리를 가야 한다고 해도, 오늘 밤 전혀 새로운 행성에 착륙해야 한다고 해도, 떠날 준비는 딱 1분이니까.


일어나면 샤워부터 한다. 배낭을 없애고 기내 반입에 제한이 있는 액체류의 보디 워시와 샴푸 대신 고체형 비누를 사용한다. 얼굴과 몸을 한 번에 씻어낼 수 있어 목욕 시간도, 짐의 무게도 절반으로 줄었다. 배낭을 없애고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확장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는 셈이다.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한 벌뿐인 옷을 챙겨 입는다. 100일 전 배낭을 없애면서 많은 옷가지들 중 어떤 옷을 고를지 꽤 고민했다. 딱 한 벌의 옷만 골라야 했으니까. 디자인이 괜찮은지, 요즘 유행에 걸맞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잦은 세탁에도 잘 견뎌줄 내구성과 오래 입어도 편안한 모양, 그리고 옷이 만들어진 과정이 중요했다. 우리는 옷이 얼마나 튼튼한지, 수선해가며 오래도록 입을 수 있는지, 얼마만큼의 물을 사용해 만들어졌는지 살폈다.


오늘로 백 번째 이 티셔츠를 입는다. 몇 개월 내내 입다 보니 티셔츠 자락이 조금 망가졌고 색이 약간 바랬지만 나는 이 티셔츠가 마음에 든다. 일반 면 티셔츠에 비해 생산 과정에서 100리터의 물을 절약한 데다, 공정 무역 봉제 제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00일 내내 나의 든든한 바람막이였으니까.


여러 번의 경우를 거쳐 도착한 발리는 더위로 우리를 반겼다. 훅- 끼쳐오는 더운 바람에 눈물이 날 뻔했다. 정말이지 유럽의 겨울 추위에 진절머리가 나던 참이었다. 덴파사르 공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자주 보이는 한국 관광객들이 반갑고, 의아할 정도로 많은 호주 관광객들은 낯설었다. 새벽임에도 축축하게 덥혀진 공기 냄새.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전혀 새로운 대륙이었다. 땀으로 질척해진 운동화를 고쳐 신었다. 두툼한 바지와 긴팔 셔츠는 접어 올리고, 연신 땀을 흘리며 가까운 숙소를 향해 걸었다. 덥다. 정말 오랜만의 무더위였다.


뱃멀미로 고생하다 겨우 도착한 길리 트리왕안은 작고 귀여운 들꽃을 닮았다. 자동차가 없는 작은 섬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마차가 덜컹덜컹 흙길을 내달렸고, 자전거를 탄 여행자들이 섬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릴없이 자전거를 타거나 차가운 바다에 덤벙덤벙 뛰어드는 것,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에 벌렁 눕는 것이 전부인 작은 지도였다. 그러니 하루에도 몇 번씩 먼 바다로 스노클링을 나가는 여행자들이 많을 수밖에.


K와 나도 큰 마음먹고 스노클링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딱히 할 일이라고 없는 섬에서의 유일한 일과이기도 했고, 모든 여행자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시간을 보내니 왠지 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 사항처럼 느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생에 첫 스노클링이었다. 수영도 할 줄 모르니, 여태 뭐 하고 살았나 싶다.


우리가 오른 배의 이름은 럭키. 부디 우리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주길 바랐는데 역시 여행은 뜻대로 되는 법이 없다. 비교적 짧은 구간이었는데 배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뱃속에서 뱀처럼 구불거리는 멀미 기운이 감지됐다.


여행자들이 물방개처럼 바다 위를 누빌 때 우리는 죽은 모기처럼 배에 드러누웠다. 바다 위를 여유롭게 흘러 다니는 여행자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덤 앤 더머’처럼 시덥지 않은 농담과 만담을 시전하며 멀미를 견디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백 명의 여행자 앞에서 뱃멀미로 구토하는 흑역사를 남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엇이든 해보지 않으면 그것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인지, 그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평생 알 수 없다. 그래서 가끔 여행이 거대한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여행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던 나의 맨 얼굴을 보여주니까. 우리도 바다라는 시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바다라는 시험지를 통해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확인한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일정에서 스노클링과 스킨 스쿠버, 서핑 등 계획했던 각종 수상 레저들을 과감히 제외했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몇 달 전 불필요한 짐을 버릴 때 했던 다짐과 다를 바 없는 선택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느라 소중한 지금을 낭비하지 말자. 온 인생을 남들이 가진 것을 갖기 위해 허비하지 말자.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지금 이 순간만을 있는 힘껏 끌어안자.


짐이 없어진 후로 우리는 전보다 더 현재에 집중했다. 가지지 않기로 선택한 것에 대해 타인과 경쟁하지 않고, 소유한 물건의 목록과 촌스러운 운동화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여 하지 않고, 미래의 불행보다 오늘의 여행에 집중하며 매 순간을 음미한다. 결국 여행도, 인생도 찰나 같은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완성되는 게 아닐까?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