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남인숙
ǻ
21세기북스
   
14300
2019�� 04��



■ 책 소개

 

방전은 빠르고 충전은 느린 내향인의 사회성 버튼,
필요할 때만 누르고 타고난 본성 밖으로 딱 한 걸음!

 

‘사회성 버튼’은 내성적인 사람들이 외향적이어야 할 상황에서 누르는 의식 속의 ‘외향성 ON’ 버튼이다. 이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내향인의 에너지는 빠르게 방전되지만, 이는 내향인이 원만한 사회관계를 맺어가기 위해 마련한 최선의 자구책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사회화 부담은 내향인만 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사회’와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그 때문에 사회화가 필요한 것은 외향인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래서 내향인의 사회화는 굳게 닫힌 문의 빗장을 푸는 방향으로, 외향인의 사회화는 활짝 열린 문에 빗장을 거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즉 내향인은 외향인을, 외향인은 내향인을 닮아가는 과정이 사회화인 것이다.

 

저자는 어느 쪽이든 자신이 타고난 성향에 극단적으로 주저앉는 것은 어른의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자기 성향을 알고 그 성향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탓으로 미루며 내 세계를 좁히자는 것이 아니다. 크고 작은 선택에 직면할 때마다 자신에게 한정되어 있는 에너지의 양을 가늠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성실하게 감당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과는 영리하게 거리를 두면서 내가 편안하게 활보할 영역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 저자 남인숙
한국과 중국 등에서 38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로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하며 2030 여성 독자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 또한 『여자의 모든 인생은 자존감에서 시작된다』, 『인생을 바꾸는 결혼 수업』, 『서른을 배우다』, 『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 『나는 아직 내게 끌린다』, 『남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 『나는 무작정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 『여자, 그림으로 행복해지다』 등 성실한 글쓰기를 통해 현실적인 조언을 과감하게 건네는 ‘여성들의 멘토’로 사랑받아왔다. 『사실,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에서 그녀는 그동안 강한 메시지 뒤에 숨겨놓았던 내성적인 자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속 깊은 큰언니’의 마음으로 다양한 관계 속에서 지독한 내향인으로 겪은 경험과 심리를 털어놓으면서, 내성적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이해와 인정을 바탕으로 자기 삶의 패턴을 주도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도록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 차례
프롤로그|내성적이라는 고백

 

Chapter 1 내성적인 사람으로 산다는 것
나는 내향인일까, 외향인일까?
내가 과묵하다고요?
삐- 사회성 버튼을 눌렀습니다
조용한 외향인, 시끄러운 내향인
외향적인 사람이 부럽습니다
내향인은 모두 ‘아싸’일까?
내향인의 천적, 호감형의 나쁜 외향인
저 예민한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일까?

 

Chapter 2 삐- 사회성 모드로 전환 중
외향인이 기본 인간형입니까?
서양식 파티에 오시겠습니까?
만남, 네 사람까지가 한계입니다
사람, 좁고 깊게 사귀고 싶습니다
딸깍, 사회성 버튼이 고장 났습니다
나는 정말 성공하고 싶은 걸까?
내성적인 사람들의 야망

 

Chapter 3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고양이와 궁합이 맞는 이유
저녁 약속을 잡지 않는 이유
냉혹한 범죄 수사물이 취향인 이유
왜 실연한 조연은 외국으로 떠날까?
충격적으로 좋은 소식이 내향인에게 미치는 영향
내 삶이 지루해 보이나요?
나를 너무 챙겨주지 마세요
내가 울면 그냥 혼자 내버려두면 좋겠어
과묵한 미용실 단골입니다
머리만 대면 바로 잠드는 삶에 대하여

 

Chapter 4 딱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방구석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을까?
집순이의 조건
무선 청소기를 선택하듯이
장점은 생각하기, 단점도 생각하기
그깟 일들, 나도 ‘툭’ 털어버리고 싶습니다
나도 사이다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혼자가 좋은데 결혼해도 되겠습니까?
우울감은 이렇게 처리합니다

 

에필로그|내밀하고 미지근하고 느린 것들에 대해

 




사실,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내성적인 사람으로 산다는 것

삐- 사회성 버튼을 눌렀습니다

일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대충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저 사람은 원래 내성적인 사람인데 지금 외향인 모드로 활동하고 있구나. 애쓰고 있구나.


내향인은 남과 최소한의 상호작용만 하는 것을 편안해하지만, 제아무리 극단적인 내향인이라도 그런 식으로만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생업을 ‘사회생활’이라는 말과 자주 겹쳐서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알고 보면 먹고살기 위해 버는 돈의 상당 부분이 남과 잘 어울리는 데 따른 대가인 경우가 많다.


설사 마음껏 내성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해도 그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자세가 침대에 누워 있는 건데, 어쩌다 몸이라도 아파서 침대에 붙어 있으면 맨정신으로 몇 시간 누워 있는 일도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허리가 아프고 온몸이 결린다. 살아 있는 동물이라면 단일한 상태로 오래 있는다는 게 정말로 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느낌이라는 건 언제나 상대적이어서 덜 편안한 상태로 있어봐야 편한 게 편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마냥 안으로 파고들어 살 수 없는 결정적 이유는 우리 인간이 대표적인 집단생활 동물이라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엄청난 열량을 잡아먹는 뇌를 이렇게까지 발달시킨 게 고도의 사회생활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자연에서 혼자 살아남으려면 미적분을 풀 수 있는 지능보다는 이빨이나 근력 같은 게 더 유용하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DNA 안에는 ‘관계’ 안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설계 구조가 들어 있다. 그 때문에 아무리 혼자 있는 게 좋고, 원래부터 친했던 소수와만 지내는 게 편하다 해도 어느 정도는 본성 밖으로 발을 내딛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삶이 가치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 대체로 이 영역 안에 있다.


지독하게 내성적인 나는 몇몇 상황에서 의식 속의 버튼을 누른다. 나는 그걸 ‘사회성 버튼’이라고 부른다. 상대가 나보다 더 내성적이라든가, 내가 대화를 이끌어야 할 상황이라든가, 공개적인 자리에 나섰을 때라든가, 그 밖에도 외향적이어야 할 상황은 많다. 상대의 본성이 어떻든지 외향적인 태도가 그 사람을 편안하게 해줄 확률이 높아서다. 사람들과 어울리면 외향성은 본성의 표현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예의와 배려가 된다.


일단 버튼이 눌려지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달리 긴장감을 느끼지도 않고, 억지로 웃지도 않으며, 대화도 자연스럽게 끊이지 않고 이어간다. 어릴 때는 절대 못 하던 일(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다든지, 어색한 사람에게 먼저 연락한다든지)도 이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내향인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 버튼을 누른다. 어떤 사람은 이 버튼이 어찌나 작동을 잘 하는지 주변 사람 모두가 그를 외향인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나 같은 사람이야 주변에 누군가가 있어도 상황에 따라 해제 모드일 때도 있지만, 그런 이들은 온전히 혼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버튼을 끄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바깥세상에서 ‘외향성 ON’상태로 있다가 집에 돌아와 버튼을 해제한 나는 녹초가 되고 만다. 그날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좋은 시간이었다고 해도 그렇다. 아니 즐거울수록 더한 것도 같다. 나는 종종 나 자신이 무선 청소기의 ‘2배 출력’ 버튼을 누로고 있는 상태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기세 좋게 모터를 돌려대지만 두 배로 빨리 방전되고 만다. 혼자 일만 한 날에는 오후에 다른 작업도 할 수 있는데 사람을 만난 날에는 지쳐서 더 이상 본업을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사회성 버튼 ON 상태의 에너지 소모가 훨씬 큰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직장인들의 잦은 회식이나 퇴근 후 업무 연락 같은 일들이 일종의 폭력이라고 느껴진다. 이게 다 사회성 버튼에 과부하를 일으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사회성 버튼에 불이 들어와 있는 내향인들이 눈에 띌 때마다 안쓰러웠는데, 지금은 저 버튼이라도 자유자재로 켜고 끌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하고 싶어질 때가 더 많다. 그건 수없이 본성을 거스르는 용기를 내고서 얻은 트로피다.


돌이켜보면 내가 살면서 얻은 좋은 것은 대부분 사회성 버튼을 켠 상태에서 얻은 것이다. OFF 상태에서 떠올리고 숙성시킨 생각들은 ON 상태에야 발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어른이 되어 이 버튼을 쥐게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그들이 너무 많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랄 뿐이다.


지독한 내향인인 내 지인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다가도 중간에 기운이 좀 떨어진가 싶으면 망설임 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쟤는 끝까지 남는 법이 없더라” 이런 핀잔을 듣기는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도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도 좀 배워야 한다.


종종 방전되는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자리를 지키곤 하는 건 내가 사회성 버튼을 켜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부끄럽다기보다는 그들이 나와 함께하는 데에 부담을 느낄까 봐 두렵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이 집에 돌아가 끙끙 앓는다는 걸 알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


이 글을 내 지인들이 읽게 된다면 그들이 내 연락을 피해버리기 전에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그걸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으니 당신을 만나는 거라고.



삐- 사회성 모드로 전환 중

나는 정말 성공하고 싶은 걸까?

“너는 방탄소년단만큼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아이돌로 데뷔를 하겠니?” 요즘 가장 화제인 아이돌 그룹의 기사를 함께 보다가 지인이 불쑥 던진 질문이다. ‘왜 아니겠어?’라고 냉큼 대답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나는 쉽게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 질문에 대한 내 안의 답을 잘 모르겠다. 나는커녕 내 딸이 아이돌 데뷔를 해도 될 나이일 정도로 세상을 살았는데도 나는 아직 이렇게 선명하지 못하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나서는 건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누군가가 억지로 떠다밀면 뭐든 그럭저럭하던 아이였다. 잘하는 무언가가 있고 그걸 인정받는 게 싫지는 않으면서도 그 과정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차차 성공이라는 것이 그런 종류의 과정임을 깨닫게 되면서 내 마음은 점점 아리송해진다.


나는 정말 성공하고 싶은 걸까?


경험치가 쌓일수록 절감하는 것은 인생 자체가 마케팅이라는 점이다. 마케팅이라는 건 실은 특별한 게 아니다. 자기 장점을 드러내는 활동인데, 연예인이나 상품을 판매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가 많다. 직접적으로는 SNS나 퍼포먼스 같은 것일 테지만, 넓게 보면 사람을 만나 사귀거나 설득하는 일도 전부 마케팅이다.


어느 분야에서 일하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라도 애써 타인에게 알리고 각인시키지 않으면 그냥 묻히고 만다. 낭중지추라는 말처럼 뛰어난 사람이 저절로 눈에 띄기도 하지만, 자기 마케팅 없이 저절로 성공하는 경우는 세계 0.1퍼센트 천재들, 혹은 복권 당첨 수준으로 운 좋은 이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요즘 나는 적당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그 재능을 개발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이 가진 것을 알리는 노력도 해야 한다는 걸 확인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성공이란 자기 마케팅을 하는 노력과 유명세의 부작용을 견디는 맷집을 상당 부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건 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아주 껄끄러운 일이다.


내성적인 사람들의 속마음이라는 게 이렇다. ‘내가 혼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어내면 그 가치가 저절로 알려져서 자연스럽게 성공하면 좋겠다. 그리고 그 성공은 남들 앞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유지되면 좋겠다.’


이렇게 풀어놓으면 인생에서 좋은 것만 뽑아 먹겠다는 도둑놈 심보 같지만 누구나 이런 욕망이 마음 안에 있다. 다만 외향인에 가까울수록 자기 마케팅에 대한 저항감이 적어서 그것을 감수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뿐이다. 그래서 보다 저항감이 큰 내향인이 자기 마케팅을 하려면 성공 욕구가 훨씬 커야 한다.


그래서일까. 내향인인데도 뒤늦게 적극적인 자기 마케팅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람들의 이면을 보면 많은 경우에 아주 강력한 동기가 있다. 주로 여러 인생 사건으로 성공이 절실하게 필요해진 경우다. 자연스럽게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유명인들 뒤에는 본성을 거슬러야 할 정도로 격렬한 사연들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성적인 사람이라도 그 잠깐은 파도에 오르듯 본성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제 눈에 보이는 황금빛 트로피가 성공의 본질이 아님을 아는 나는 어릴 때만큼 성공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내 삶에 대해 슬퍼하지도, 타인의 삶의 성패를 함부로 재단하지도 않는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이 곧 인생 성공이 아니라는 명제를 삶의 골목을 돌 때마다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내 삶을 마케팅하는 영업인이 아니라면 스스로의 본질을 뛰어넘게 만들 만큼 호된 고비가 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성공을 위해 처절한 고난을 기다릴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고, 그렇다고 실패하고 싶지도 않은 나는 이제 성공이나 실패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왜 실연한 조연은 외국으로 떠날까?

여기 로맨스 드라마에서 필수 구도인 삼각 관계가 있다.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좋아할 수도,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 때로는 양쪽 다인 경우도 있다. 어쨌든 필연적으로 두 남녀 주인공이 맺어지고 연적이었던 조연들은 밀려나는데, 꽤 많은 경우 그들은 해외로 나가면서 사라진다.


그건 주요 러브 라인의 결실을 단단히 못박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도 있다. 비록 조연이라 사랑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이 나라에서 못 볼 꼴 보지 말고 외국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를 달래라는 시청자의 배려를 대변하는 것이다. 외국으로 나간다는 것,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기분 전환이나 휴식을 의미하니까.


하루는 드라마에서 실연을 하고 비행기를 타는 조연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저 기분이라면 정말 비행기를 타고 낯선 곳으로 가고 싶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내게 여행이란 나쁜 기분을 바꾸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 가장 건강하고 기분이 홀가분할 때 더 좋은 것을 얻으러 가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 지난 나쁜 경험을 잊게 해줄 것 같지만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오래전 마음에 상처를 입고 나를 달랠 방법을 찾던 중 혼자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내키지 않았지만 막상 떠나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그러나 그렇게 떠난 여행은 위로는커녕 더 큰 괴로움만 주었다. 입국장에서부터 받은 인종차별이 평소보다 서러웠고, 곳곳에 도사린 돌발 상황들은 당연한 이벤트가 아닌 고난으로 느껴졌다. 낯선 곳에 가 있는 내내 힘들기도 했지만, 다녀와서는 그 후유증과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동시에 감당하느라 더 괴로웠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실연 따위의 일들로 이미 고갈된 상태라면 가벼운 시행착오에도 몇 배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외국에 가도 우리는 비슷한 일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코스타리카 커피를 마셔도 카페에서 헤어진 연인과 함께했던 장면이 떠오를 수 있고, 북극에서 오로라를 봐도 지지리 추위를 타던 그의 구스다운 실루엣이 떠오를 수 있다. 지구를 떠나 무중력 상태의 우주정거장에서 거의 완벽하게 다른 일상을 살면 좀 잊을 수 있을까.


도파민이 분비될 때의 자극을 좋아하는 외향인이라면 새로운 자극과 모험이 과거의 슬픔을 잊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정된 상황에서의 행복감에 더 긍정적인 쾌감을 느끼는 내향인에게는 여행이라는 자극이 더 큰 고통을 안길 수도 있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으로부터 떠난다’라는 상징적인 의식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꼭 새로움에 대한 압력이 가득한 낯선 곳으로 도망치듯 떠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나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일이 생기면 내 익숙한 자리에서 변화를 시도해본다.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물건을 내다 버리는 것이다. 사소한 스트레스일 때는 필요 없는 서류나 써지지 않는 필기구를 정리하고 더 나아가면 옷가지를, 인생이 흔들릴 만한 스트레스와 맞닥뜨리면 가구를 버리기 시작한다. 물론 아무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남기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각을 경험하기 위해 맛집 투어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로 운동과 소식으로 몸무게를 덜어내기도 한다.


잊고 싶어서 떠나는 거라면 내가 있는 곳에서 떠나는 게 아니라 ‘나’를 떠나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행이라는 물리적 떠남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전형적인 내향인인 내게는 아니다.


여행이라는 소중한 경험 투자는 고생을 사서 하고 싶을 만큼 힘이 있을 때 하고 싶다.



딱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나도 사이다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종종 무례한 사람에게 무례한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딱히 대처랄 것 없이 어물어물 넘겼다가 나중에 꼭 후회를 하고 만다. 어릴 때부터 나 자신이 머저리 같다고 느낀 감정 뒤에는 꼭 이런 장면이 있었다.


수렴적 사고를 하는 내향인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나이가 엄청 들어 보이시네요” 같은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생각에 빠진다. 내가 요즘 일을 많이 했더니 얼굴이 상했나? 오늘 옷을 나이 들어 보이게 입었나? 그러느라 그 상황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상대가 무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맞받아치며 “그러세요? 저는 그쪽이 저보다 훨씬 연배가 높으신 줄 알았는데...... 우리는 같은 노안이네요, 호호”라고 ‘사이다’처럼 톡 쏘듯 시원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뒤늦은 시나리오를 쓰면 답답해한다.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매번 그런 일이 닥치면 같은 과정을 순서대로 밟는다.


그러나 부당한 상황에서 바로 대응하는 건 발산적 사고를 하는 외향인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내향성이 강한 사람은 아무리 대처 방법을 미리 배우고 익힌다 해도 막상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또 우물거리며 당하고 넘어가게 된다.


겁이 많거나 소심해서가 아니라 사고의 구조와 흐름이 달라서 일어나는 일이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경험과 학습을 수없이 반복했는데도 여전히 이런 일을 겪고 나면 매번 후회를 한다. 조금의 후회도 없이 대처하는 건 아마 죽을 때까지 안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후회의 종류와 종류는 달라졌다. ‘그때 이런 말을 해줬어야 하는데......’라는 게 예전의 후회였다면 요즘의 후회는 이렇다. ‘좀 더 빨리 도망쳤어야 하는데!!!’


호신술을 배우는 사람들은 칼을 든 사람에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사범들로부터 비슷한 가르침을 받는다고 한다. 최선을 다해 도망치라고. 그건 비겁한 행동이 아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를 피하는 건 자신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가장 현명한 길이 될 때가 많다.


타인에게 무례한 사람들은 말의 칼을 든 사람들이다. 내가 제압한다고 해도 상처를 입는다. 그런 사람들은, 상호작용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작은 파편만으로도 치명상을 입고 절뚝이기 마련인 내향인이 대면해 후련한 결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무례함에 대한 최선의 복수는 최대한 빨리 그 사람에게서 도망치고 내 인생의 모든 장면에서 그를 조용히 제외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건 가장 세련된 복수법이기도 하다.


사실 어른들의 세계에서 나쁜 구성원에 대한 처벌은 대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복잡하고 의외성 가득한 세상에서 누군가를 뚜렷한 적으로 만드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 사람과 어떤 입장으로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다가,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도 타인의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 힘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쁜 태도에 대한 세상의 징벌은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어쩌면 업계 사정이 좋지 않아서 일거리가 안 들어온다는 푸념 뒤에, 어쩌면 운이 나빠 추진하던 일이 틀어졌다는 한숨 뒤에 세상의 조용한 보복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조리와 무례함에 대해 시원시원한 대응을 못 할 때마다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상대에게 한 방 먹이는 데에 소질이 없는 내 성정이 오히려 방패막이가 되어줬던 것 같다. 말로 사이다를 주는 사람들은 간혹 그 때문에 실수도 크게 하는데, 그 실수를 메우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건 수렴형 내향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며칠 전, 어떤 자리에서 몹시 무례한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모욕적인 말과 태도로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면서 자신을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유형이었다. 여전히 나는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인식하지 못했으며, 내 기분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만 느꼈다. 그때 이런 경우를 대비해 기계적으로 훈련시킨 내 의식이 삐뽀삐뽀 경보음을 울렸다. ‘어서 도망쳐! 어서!!!’ 나는 “아, 네 그러시군요” 하고는 그 자리의 다른 사람을 향해 화제를 돌린 후 최대한 빨리 거기서 벗어났다.


이제 누군가의 말에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면 재빨리 그에게서 거리를 두고 나를 보호한 다음 천천히 이유를 찾는 것으로 내 매뉴얼이 작동한다. 그렇게 하면 내가 예민한지, 상대가 무례한지가 명확히 보이고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앞으로도 내 인생의 사이다는 속 시원한 말을 제때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방식으로 찾아올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손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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