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 잘 살고 있습니다

   
장보현
ǻ
생각정거장
   
14800
2019�� 10��



■ 책 소개

 

제 1회 카카오 브런치북 금상 수상작
지속가능한 작업과 조화로운 삶, ‘서스테인 라이프’

 

매일 아침 똑같은 지하철, 똑같은 칸을 오르내리며 생각한다. ‘퇴사 해야지, 여행 가야지, 귀농 해야지…’ 지금,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살다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지금 이 자리에서 잘 살 수는 없는 걸까?

 

《지금 여기에 잘 살고 있습니다》는 서울 서촌의 20평 남짓한 한옥에 살고 있는 30대 부부의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이 도시에서 버티거나 떠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사진가 남편과 작가 아내의 기록은 제1회 카카오 브런치북 금상을 수상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직접 고친 집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리고, 옥상에 채소를 심어 가꾸며 사는 젊은 부부의 소소한 일상은 ‘지금 여기서’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다.

 

■ 저자 장보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한국 예술학을 전공했다. 옥상 정원이 있는 서울 도심의 작은 한옥에서 남편과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운 좋게 세 들어 살게 된 한옥은 계절마다 새로운 할 일을 주고, 새로운 영감을 준다. 놀이 삼아 일 삼아 썼던 S‘ustain Life’로 제 1회 카카오 브런치북 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도시생활자의 식탁》이 있다.

 

■ 사진 김진호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을 전공했다. 지속가능한 작업과 조화로운 삶을 모토로 ‘서스테인 웍스’라는 이름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사진과 영상을 만들고 있다. 틈날 때마다 글 쓰는 아내와 아내가 가꾸는 집과 언제나 아름다운 고양이를 찍는다.

 

■ 차례
프롤로그 고양이 두 마리와 오래된 한옥에 삽니다

 


입춘 봄맞이 입춘첩
우수 정월 대보름 밥상
경칩 도심 한옥의 봄맞이
춘분 봄의 식탁
청명 옥상 정원의 봄
곡우 떠나는 봄을 병 속에 담아

 

여름
입하 여름의 라이프 스타일
소만 여름의 문턱에서
망종 가장 아름다운 여름
하지 여름의 식생활
소서 장마의 추억
대서 한옥의 빛과 그림자

 

가을
입추 계절의 호사
처서 한옥의 가을
백로 추수의 기쁨
추분 햇것으로 뭉친 가을 약밥
한로 옥상 정원의 가을
상강 비밀의 정원, 가을 습지

 

겨울
입동 미리 맞이하는 겨울의 설레임
소설 달콤 따듯 겨울차
대설 지붕마다 겨울이 내리는 밤
동지 연말의 식탁
소한 털실을 엮으며 삶을 이어가다
대한 경계에서




지금 여기에 잘 살고 있습니다


경칩 _ 도심 한옥의 봄맞이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날 즈음, 나는 바지런을 떨며 집안의 묵은 먼지와 때를 벗겨내곤 한다. 성주신에 대한 예를 표방하나 그저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는 막연하고도 무책임한 기복(起福)일 것이다. 겨우내 얼어 있던 한옥의 흙벽이 서서히 흘러내리기 시작하면 그 간극을 메꾸는 것도 이맘때 할 일이다. 꽃샘추위가 찾아올지언정, 매서운 추위와 작별을 고하는 나름의 의식이다. 천장과 벽 사이 희미하게 늘어진 묵은 거미줄을 떼어내고, 레몬 오일을 듬뿍 묻힌 마른 수건으로 서까래와 대들보, 기둥을 어루만진다. 80년이 넘은 묵직한 통나무는 기름을 머금을수록 되살아난다. 새콤한 레몬향을 비집고 이 땅 위에 오래도록 시커먼 뿌리를 내린 소나무의 짙은 향기가 집안을 감돈다.


안채 정리가 끝날 무렵 자연스레 발길이 옮겨간 곳은 부엌. 한 칸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이곳은 조왕신이 관장하는, 엄연히 다른 성역이다. 동절기의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 덕분에 두고두고 먹거리가 되어준 감자와 양파, 마늘은 봄이 온 것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연녹색 싹이 돋아났다. 냉장고의 식재료는 염장식을 제외하고 어디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는지 살뜰히 살핀다. 불현 듯 냉동고에 얼린 타르트지가 말을 걸어온다. 나름의 영생을 얻은 식재료가 일상에 난입해 마치 오브제와 같이 일상을 환기시킨다. 때마침 냉장고 코너에 적당히 쌓인 계란과 치즈가 눈에 띄고, 자연스레 계란과 치즈가 뒤섞인 달콤한 타르트로 거듭난다. 언제고 지속될 일상의 식탁을 위해 타르트를 구워 조왕신에게 안녕을 고하던 초봄, 흘러가는 계절 속에 깃은 이런 사소한 일상의 연결고리가 좋다.


고소한 향기를 풍기며 타르트가 식어갈 동안 옅은 봄볕이 내려앉은 옥상 정원에 오른다. 얼고 녹기를 반복한 화분 흙을 어루만지며 비료와 낙엽을 섞어 파종 전 흙 상태를 고르게 하는 것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일, 아니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보리 싹으로 한 해 농사를 점치던 경칩의 전통 풍습 대신 뿌리로 겨울을 나고 귀여운 새싹을 내민 다년생 허브로 옥상 정원의 풍요를 기원해본다. 블루베리 나무는 마른 가지를 뚫고 봄볕을 맞아 새순을 터뜨렸다. 옅은 초록색의 보드라운 감촉이 손대지 않아도 느껴진다. 새순을 둘러싼 겉잎은 이미 따사로운 태양빛에 붉게 물들었다. 머지않아 꽃을 틔우고 절정으로 치달을 봄을 지나 싱그러운 신록으로 화할 것이다.


세찬 봄비가 내리기 전에 배수로 난간 청소도 서둘러야 한다. 지붕 한 바퀴를 돌며 모든 지난겨울의 낙엽과 마른 나뭇가지로 화로에 불을 지핀다. 작년 가을에 만개하여 겨울 동안 바짝 마른 허브의 잔해는 순식간에 타올랐다. 불꽃에서 바질 특유의 독특한 향이 피어오르더니 서서히 집안으로 퍼져나간다. 서산 너머 말그스름한 봄의 태양은 석양빛으로 물들었고, 대문 밖 좁다란 골목은 여전히 흘러가는 주 d이다.


부쩍 따사로워진 햇살에 봄이 성큼 다가왔나 설레발치다가도 엄연히 서린 겨울의 희미한 끝자락을 잘 보내야겠다는 마음이 깃드는 춘삼월. 때에 맞춰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발복(發福)의 비밀이 아닐까. 해 질 녘 옥상에서 내려와 알맞게 식은 타르트를 한 입 베어 문다.

곡우 _ 떠나는 봄을 병 속에 담아

계절의 끝자락, 봄의 마지막 절기, 새로운 계절의 문턱. 아직 가시지 않은 봄날의 기억을 파노라마 펼치듯 괜스레 들춰본다. 마음껏 즐기지 못한 봄날이 아쉽기만 하다. 진달래 만개한 능선 따라 즐기는 트레킹이라던가, 꽃그늘 아래 펼쳐진 피크닉 같은 것들. 작년 봄에도 꼭 같은 아쉬움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아마 재작년 봄도 그랬을 것이다. 돌아올 봄을 기약하며 계절을 흘려보내는 일상의 타성, 아쉬운 감정이 깃든 채 훗날을 기약하는 불완전함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봄의 끝자락에는 지나가는 계절을 붙잡기 위해 나만의 작은 의식을 치르곤 한다. 제철을 놓치면 꼬박 한 해를 기다려야 다시 만날 수 있는 어여쁜 딸기로 이것저것 만들어 보는 것이다. 초봄의 딸기가 생명력 넘치는 상큼한 그 자체였다면 늦봄의 딸기는 검붉게 농익어 달고 깊다. 가판대에 쌓이는 딸기의 양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대로 장바구니에 넣지 않으면 흘러가는 봄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병 속에 담긴 딸기잼은 계절이 바뀌어도 봄을 기억나게 하고, 검게 농익은 딸기를 듬뿍 얹은 타르트는 여름 속으로 흩어져버리면 그만일, 봄을 위한 오마주를 그려낸다.


여름을 방불케 하는 한낮의 온도에 버터와 크림 그리고 타르트 반죽은 상온에서 부드럽게 풀어진다. 인공적인 온도와 습도를 빌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타르트와 쿠키, 케이크 굽기에 완벽한 날들이 이어진다.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건조하거나 습하지도 않은 그런 날들.


어쨌거나 봄은 사라져가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엔 라일락 향기가 가득 실렸다. 투명한 바람은 맨살을 자극하고 고양이들은 어느덧 털갈이를 마치고 보송보송한 털끝으로 때 이른 여름을 맞이하는 듯하다. 햇볕을 유난히 좋아하는 미셸은 이제 처마 끝을 따라 순회하는 볕을 총총 따라다니지 않아도 태양의 기운을 충분히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한옥 안채로 볕드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도래할 여름을 맞이하기 앞서 스치듯 지나간 봄을 계절의 끝자락으로 흘려보낸다. 여전했던 봄날,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며.



여름

입하 _ 여름의 라이프 스타일

미풍을 타고 흩날리는 진한 라일락 향기는 봄의 종말을 암시한다.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빛의 각도는 더욱 날카로워졌고, 기상 시간 또한 조금 당겨진 감이 있다. 미셸은 확연히 달라진 사물의 온도를 가장 먼저 알아채고, 평소 낮잠을 청하던 창가 옆 소파에서 비교적 볕이 닿지 않는 깊숙한 안채로 자리를 옮겼다.


터줏대감 미셸의 감각을 좇아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감지하고 가장 먼저 러그를 걷어냈다. 그리고 꼬박 일 년 만에 대자리를 펼친다. 아직은 이른 감이 들지만, 절기에 따라 변화하는 생활 방식은 일상을 환기시킨다. 때 이른 한낮 더위에 달아오른 체온을 식히기 위해 대자리 위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좌식 생활로 옮아간다. 소반과 방석, 대자리, 발과 같은 공예풍이 일상을 점거하기 시작하고, 한옥의 대들보, 마룻보, 판대공, 서까래 등의 아름다운 목재 구조물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온다. 쓸모 있는 아름다움이 펼쳐진 한옥의 여름 풍경이다. 흐르는 계절 따라 생활 방식이 조금 달라진 것뿐인데, 눈높이에 따른 시야의 상대성을 마주하고 일상 철학을 곱씹어 보기도 한다.


하루가 다르게 성큼 자라나는 옥상 정원의 잎채소는 이맘때가 가장 사랑스럽다. 맨 먼저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는 루콜라는 여름의 문턱에서 입맛을 돋우는 훌륭한 식재료로 거듭난다. 여름이 한창일 때는 매운맛이 강하고, 가을 무렵에는 쓴 맛이 우러나지만 이 시기의 풋풋한 루콜라는 달콤 쌉싸래한 맛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마치 지금 호흡하고 있는 이 절기와도 같이.


생으로 충만한 초여름에는 모든 것이 꿈틀댄다. 옥상에 오르는 빈도가 부쩍 늘어나면서 도시의 또 다른 생태계와 마주한다. 한두 마리씩 눈에 띄던 개미는 불루베리 뿌리 속으로 거대한 제국을 일궜다. 각양각색의 날벌레는 꽃대를 추켜올린 캐모마일과 블루베리 줄기 사이로 빼곡이 알을 낳고 껄끄러운 잎채소에서 부화한 호랑나비 애벌레가 왕성한 식욕으로 잎을 먹어 치운다. 개미 군단은 진딧물을 주식으로 삼고, 달콤한 꿀을 찾아 날아온 벌은 애벌레를 사냥한다. 캣닢에는 고양이 이빨 자국이 남아 있다. 우연히 만난 지붕 위의 고양이와 인연을 맺는 일도 이 시기에 일어난다. 나는 그저 그들이 조금은 안도할 수 있도록 미셸의 주식과 깨끗한 물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과업을 하나 더 보탤 뿐이다. 옥상 정원의 주인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그토록 진하게 풍겨 오던 라일락 향기는 어느덧 꿀 내 진동하는 아카시아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었다. 도처에 만발한 아카시아 군락은 초여름 청량한 바람에 온몸을 맡기고 춤을 춘다. 이따금씩 내리는 촉촉한 이슬비 사이로 성큼 다가온 여름의 향기. 하루가 다르게 세력을 확장해가는 녹음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여름의 기억들을 들추어낸다. 지난여름, 더 지난여름, 오래전 여름, 그리고 다가올 여름.


하지 _ 여름의 식생활

좀처럼 저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태양이 지상에 14시간 이상 머무는 시기가 오면 비로소 여름을 피부로 만끽한다. 제철의 풍부한 먹거리와 불현 듯 쏟아지는 소나기, 저녁이 되어도 저물지 않는 석양빛 등 굳이 달력을 뒤적이며 절기를 구분 짓지 않아도 도처에 널린 단서들은 낮이 밤보다 길어지는 이 계절을 어김없이 지목한다. 그렇게 하지에 들어서면 정말로 생동하는 봄과 풍요로운 여름의 기운을 머금고 알이 꽉 찬 감자가 땅 속의 안부를, 붉은 주황빛으로 물든 살구가 지상의 소식을 전해 왔다. 여름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이다. 마당 한 구석엔 깊은 땅 속에서 캐낸 뽀얀 감자와 여름의 태양빛에 붉게 그을린 살구가 한 아름 쌓였다.


감자

땅속에서 갓 캐어 올린 여름의 햇감자는 수분 함유량이 풍부해 응집력이 약하다. 뜨겁게 쪄낸 감자는 너무도 손쉽게 바스라져 버린다. 포슬포슬한 감자의 식감, 여름의 감촉일까.


어떤 아침은 기름진 마요네즈에 버무린 감자 샐러드를 빵에 곁들여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고, 어떤 점심은 감자를 예쁘게 썰어 소금과 후추, 약간의 허브 향신료로 밑간을 한 뒤 오븐에 굽는다. 냄비에 양껏 삶은 감자가 차고 넘치면 여지없이 빵 반죽에 들어가곤 하는데, 반죽이 밤새 부푸는 다음날은 기상 시간이 앞당겨진다.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여야 갓 구워 나온 포슬포슬한 감자 빵을 아침 식사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옥상 위로 하루가 다르게 뻗어가는 로즈메리 잔가지 또는 파슬리 조각을 뜯어 버터와 함께 향을 입히면 훌륭한 요리가 된다.


살구

여름을 랑데부하는 매개는 언제나 살구였다. 매실과 복숭아의 중간쯤 돼 보이는 어여쁜 과실은 누구네 집 뒷마당, 산기슭 어딘가에서 여름의 시작을 알려 준다. 장마가 지기 전 서둘러 따야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상큼한 살구를 맛볼 수 있다. 아버지는 살구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지난봄 포도밭 구릉지에 살구나무를 심고야 말았다. 그 예전 할아버지가 산기슭에 그려 놓았던 무릉도원이 그리웠던 것이다. 나는 그 추억을 따다가 한 아름 짊어지고 도시로 돌아온다.


살구는 후숙으로 맛이 드는 여느 과일과 다르게 보관이 쉬운 편은 아니다. 신선한 살구를 냉장고에 잘 둔다고 해도 나무에서 갓 따내 맛보는 향긋한 상큼함은 금세 사라지고 없다. 언젠가 냉장고에서 꺼내 먹은 살구는 내가 기억하는 맛이 아니었다. 그 뒤로는 살구를 냉장고에 넣지 않는다. 신선한 살구를 실컷 맛본 뒤 몽땅 병조림으로 저장하거나 잼으로 졸인다. 병조림을 위한 살구는 과질이 단단한 것이 좋고, 무르기 시작한 나머지는 잼이 된다. 병 속에 차곡차곡 담긴 살구가 언제고 여름의 공감각을 자극할 것이다. 이 여름이 끝날 때까지, 아니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단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며 뚜껑을 야무지게 닫아 본다.



가을

한로 _ 옥상 정원의 가을

밤새 꿈나라를 헤맨 무의식을 두드리는 건 언제나 아침의 빛이다. 여름날 부지불식한 침실을 침투하던 태양빛이 무자비하게 아침잠을 깨웠다면, 추분점을 경계로 남쪽으로 기운 황도의 빛은 은은한 사선의 각도로 하루의 시작을 일깨운다. 기상 시간은 아무래도 늦춰진 감이 있다.


발밑에 감도는 차가운 공기층은 인기척에 잠을 깬 고양이와의 따뜻한 포옹을 극적으로 연출하는 듯하다. 여름의 기운은 솜털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 솜털, 솜털이라면 그야말로 솜을 틔운 목화가 있다. 여름의 태양빛을 머금고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맺은 이 목화 나무에서 꽃이 얼마나 피었는지, 솜뭉치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구경하는 것이 가을을 맞이한 옥상 정원의 이슈다.


목화 나무는 밑동부터 하나둘씩 결실을 맺으며 괄목한 변화를 파노라마로 펼쳐 보인다. 흰나비의 날갯짓을 떠오르게 하는 꽃은 이틀 사이 분홍빛으로 물들다 금세 떨어지고, 통통한 씨방을 맺은 뒤 거짓말처럼 솜을 틔운다. 가을의 한가운데 피어난 아름답고 포근한 목화송이는 왠지 따사로운 겨울을 암시하듯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가을의 정원은 쇠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벌어지는 일교차, 건조한 대기, 부쩍 줄어든 날벌레... 어떤 것은 서둘러 꽃을 피워 결실을 맺으려 하고, 어떤 것은 뿌리로 양분을 저장하고, 어떤 것은 아름다운 열매를 내어주고 서서히 소멸해간다. 잦아드는 가을의 정원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거나 전혀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하나둘씩 갈변하는 잎사귀를 정리하고 시들해진 허브를 뽑고 앙상한 나뭇가지를 가지런히 절단하거나 알아서 스러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순환하는 생의 절정을 관망할 수 있는 시기가 이맘때 즈음인 까닭이다.


서리가 내려앉기 전에 온전한 허브 한 조각이라도 딸 수 있기를, 괜스레 분주한 마음이 깃든다. 차일피일 수확을 미루던 당근도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하자 한꺼번에 식탁 위로 옮겼다. 옥상 정원과 부엌의 거리는 고작 열 걸음도 채 되지 않건만, 도심 속 작은 공간에서 결실을 맺은 나만의 작물을 마주하는 건 언제나 벅찬 일이다.


계절 속에 절기를 따라 식탁의 모습도 변해간다. 가을의 식탁은 다채로움이 절정에 이른다. 토마토소스, 모차렐라 치즈, 바질 잎으로 구워 낸 마르게리타 피자와, 갓 수확한 당근의 흙먼지만 털어내고 올리브유에 살짝 구운 당근 샐러드, 약간의 소금과 화이트 발사믹으로만 토핑을 하고 치즈를 뿌리면 풍성한 한 끼 식탁이 꾸며진다.


태양이 대지에 머무는 시간과 대기의 습도는 점점 잦아들고 있다. 스산한 바람과 건조한 피부결을 꼬박 한 해 만에 조우한다. 서랍장에 방치한 수분크림을 잘 보이는 곳에 꺼내어 둔다. 공기의 온도가 달라졌다.



겨울

대한 _ 경계에서

며칠 전 제법 흩날리던 함박눈이 채 녹지 못하고 이웃집 기왓장 사이에서 얼음 덩어리가 되었다. 미셸은 늘 그래 왔듯이 창가 옆 사다리에 올라앉아 가냘픈 음성으로 울부짖는다. 어서 문을 열라는 신호다. 밤새 내린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궁금해 미셸을 따라 옥상에 오른다. 햇살과 마주한 미셸의 수염 끝자락이 유난히 뾰족하다. 허공을 향해 온몸을 추켜세우고 일찌감치 봄을 감지하는 듯하다.


24절기의 마지막을 흘려보내며 겨울을 매듭짓는 시간. 순환하는 계절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한 해를 갈무리하며 봄을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이 깃든다. 시절은 입춘을 향한다.


정오 무렵이 되면 겨울 햇살이 유리창을 투과해 부서지기 시작한다. 나는 괜스레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인다. 그 빛은 낮은 고도를 그리며 금세 비켜가기 때문이다. 모양을 바꾸어 가며 빛을 쪼개던 그림자의 형상을 좇다 보면 어느새 빛은 달아나고, 잔광이 거실을 비추고 있따.


거실은 오래된 집에서 일상의 농도가 가장 짙은 곳이다. 하루가 시작되면 나는 물론 남편과 고양이들도 약속이나 한 듯 거실을 향해 암묵적으로 정해진 각자의 자리를 점한다. 한옥 한 귀퉁이에서 떨어져 나온 판재를 개조해 만든 소파 테이블은 집의 일부인 양 생활의 일부를 대변하고 있다. 때로는 식탁이 되기도 하고, 따뜻한 차와 달콤한 디저트를 곁들인 티 테이블이 되기도 한다. 집중력을 발휘해 작업에 매진했던 순간 또한 이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졌다.


달아나는 빛이 작은 부엌을 스쳐간다. 겨울의 막바지에 이른 태양빛은 부드럽게 피사체를 감싼다. 대한과 입춘의 경계에서 볕은 한층 부드러워졌지만 겨우내 추위에 움츠러든 몸과 마음은 동토마냥 굳어 있는 것 같다. 이른 저녁을 준비하며 묵직한 무쇠솥을 꺼내 본다. 겨우내 갈무리해 둔 비황 작물과 한기를 피해 땅속의 양분을 한껏 품은 뿌리채소, 두툼한 양고기와 와인, 건조한 태양빛에 말린 허브가 한데 뒤섞인 스튜를 만들 생각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솥에 뭉근히 끓여낸 스튜는 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이는 위로의 묘약이다. 뜨거운 솥의 잔열로 익힌 야채와 장시간 조리된 고기의 부드러운 식감, 스튜가 완성되기 전 데치듯 첨가한 채소의 아삭함이 따뜻한 스튜의 국물과 어우러진다. 살짝 첨가한 와인은 국물 속에 은은하게 배어 산미를 자극하고, 곁들여 마시는 차가운 와인은 입속으로 퍼져나가며 다음 숟가락을 재촉한다.


태양이 대지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달라진 태양빛의 각도와 겨울이 물러서기 전 곧 소멸되어버릴 한기를 마지막으로 힘껏 토해놓은 듯한 추위, 그리고 피부가 갈라질 듯한 건조함을 다시 마주한다. 월동을 위해 숨죽여 있던 스산한 풍경 틈으로 작은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한다. 귀가 간지럽다. 봄이 오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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