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속기사는 핑크 슈즈를 신는다

   
벡 도리 스타인(역:이수경)
ǻ
마시멜로
   
15800
2019�� 07��



■ 책 소개

 

어느 날 도착한 한 통의 편지
“사실 이것은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근무하는 일입니다”

 

우연히 발견한 구인공고에 큰 기대 없이 지원했는데, 알고 보니 백악관의 속기사를 뽑는 것이었다면? 게다가, 대통령과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일이다. 소설이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테지만,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통통 튀는 에너지가 넘치는 이 이야기는 한 젊은 직원의 눈을 통해 바라본 오바마의 백악관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가 풀어낸 백악관 스토리는 어느 소설보다 흥미진진하고, 그 어떤 회고록보다 매력적이다.

 

■ 저자 벡 도리-스타인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나버스에서 태어났으며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했다. 백악관에서 5년간 일하기 전에는 미국 뉴저지 주 하이츠타운, 워싱턴DC, 한국 서울에서 고등학교 영어를 가르쳤다. 이 책은 그녀의 첫 책이다.

 

2012년 벡 도리-스타인은 아르바이트 5개를 뛰면서 근근이 살아가던 중 우연히 구인공고를 본 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속기사로 백악관에서 일하게 된다. 워싱턴D.C.의 아웃사이더였던 그녀는 이제 대통령과 늘 동행하는 엘리트 집단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다. 녹음기와 마이크를 들고서. 세계 곳곳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출장길에서 동료들과 진한 우정을 쌓는다.

 

화려한 엘리트 사회의 풍경과 드라마적 요소, 흥미로운 사건이 한데 녹아 있는 이 책은 생각지도 못했던 우정을 쌓고,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정말 중요한 게 뭔지 깨닫고, 그 과정에서 진짜 자기 목소리를 발견해가는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

 

■ 역자 이수경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를 졸업했으며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인문교양, 경제경영, 심리학, 실용, 자기계발,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영미권 책을 우리말로 옮겨 왔다. 옮긴 책으로 《뒤통수의 심리학》, 《영국 양치기의 편지》, 《완벽에 대한 반론》,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 《멀티플라이어》, 《소소한 즐거움》, 《해피니스 트랙》, 《블루오션 전략 확장판》, 《앱 제너레이션》 등이 있다.

 

■ 차례
속기사가 되려는 이들에게 010
한국의 독자들께 012
프롤로그 _ 이곳은… 015

 

제1막 ㆍ2011-2012 019
인생의 점들은 나중에 연결된다 / 한식구가 된 걸 환영합니다 / 풀 기자단과 함께 / 버자이언트 / 떠들썩한 정장 군단 /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 따로 또 같이 / 큰 꿈을 꾸어라 / 날쌘돌이 전략가 / 위를 올려다보라 / 지독한 슬픔의 물결

 

제2막 ㆍ2013 135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 희망과 변화 / 해를 뒤쫓아 날아가며 / 우리 삶의 매듭들 / 빛의 삼각형 / 물 마시면 안 돼요 / NG 모음 / 꿈꾸던 일을 행동으로 / 지금 우리의 단락을 올바로 써야 한다

 

제3막 ㆍ2014 237
발바닥 파열 / 상처 / 기도가 소리로 이뤄져 있다면 / 모든 게 다 있는 여자 / 트리플 보기 / 마음속의 수학 문제 / 나는 호프를 믿습니다 / 침몰하는 배

 

제4막 ㆍ2015 315
리더, 외로움을 감내해야 하는 자리 / 앞날을 위해 건배 / 깨어나, 일어나 / 가짜 친밀함 / 어메이징 그레이스 / 선(善)을 향하여 / 스완 송 / 1루타, 2루타, 그리고 삼진아웃 / 우리는 테러의 공포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제5막 ㆍ2016-2017 393
우리에게 남은 소중한 시간 / 연애 사업 컴백 / 다시 엉망이 되다 / 화려한 파티복 뒤에는 / 모든 게 정당화되는 영역, 사랑과 전쟁 / 30대에 입성한 걸 환영해 / 펄스 / 낯선 것과 마주하기 / 나의 버저비터 / 이딴 일 그만두라고 / 변함없이 해는 뜬다 / 자신의 일에 집중하십시오 / 마할로 / 끝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을 방법은 없다

 

에필로그_광대를 들여보내주오 487
감사의 말 492

 




백악관 속기사는 핑크 슈즈를 신는다


제1막 ㆍ2011-2012 019

인생의 점들은 나중에 연결된다

“무슨 일 하세요?” 워싱턴 D.C에서는 누군가를 만나면 제일 먼저 이런 질문을 받는다. 나 같은 백수로서는 제일 듣기 싫은 질문이기도 하다. 지금은 2011년 10월, 여름부터 지금까지 하루 종일 주방 식탁에 앉아 아무도 읽지 않을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높이를 낮추고 또 낮췄건만. 이제는 면접 단계까지 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입사지원서가 제대로 접수됐다는 사실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내 통장 잔고와 자신감은 진즉 사라졌을지언정 나라는 인간은 아직 이 우주에서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 말이다. 불합격 소식을 들은 정중한 이메일을 보내주는 고용주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컴퓨터 화면에 무심하게 떠 있는 구글 스프레드시트만이 암담한 취업 가능성과 엄청나게 남은 학자금 대출, 나흘 뒤에 내야 할 집세를 알려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얼마 없는 돈마저 날리러 얼간이들이 가득한 술집에 가야 한다.


단테는 지옥을 아홉 구역까지만 나눴다. 하지만 열 번째 구역이 있다면 그곳에는 백악관에서 두 블록 떨어진, 바닥이 끈적거리는 형편없는 술집에 앉아 젊은 정치꾼들에게 둘러싸여 즐거운 척하는 가식적인 사람들이 가야 하리라. 그런 술집들은 삭막하고 개성 없는 TGI프라이데이스와 비슷하다. 게다가 칵테일 한 잔에 17달러씩이나 한다. 그곳에 갈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영화 <죠스>의 주제 음악이 울리기 시작한다.


또 질문이 날아올 게 뻔하다. 질문은 무시무시한 상어처럼 수면 바로 밑에 숨어 공격할 타이밍을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 무슨 일 하세요? 무슨 일 하세요? 무슨 일 하세요?


워싱턴 D.C.에서 술집의 해피 아워(할인 시간대)에 모인 사람들의 가면 뒤에는 대개 인맥을 쌓거나 이성에게 작업을 걸려는 속내가 숨겨져 있다. 나는 둘 다 관심 없다. 내가 이곳 골드 핀에 온 것은 남자 친구와의 약속 때문이다. 남자 친구 동료의 여자 친구가 무슨 연구소에 있는데, 거기서 자료 조사하는 일자리를 소개해준다고 해서 그녀를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약속 장소에 오니 ‘연구소 걸’과 얘기해봐야 무얼 하나 싶다. 나는 연구소나 홍보회사, 비영리조직 같은 곳에 안 맞는 사람이다. 그동안 그런 데 지원했다가 합격은커녕 불합격 통보조차 못 받았다.


나는 연구소 걸을 찾는 일은 일찌감치 접고 바텐더 앞에 자리를 잡는다. 맨정신으로 있느니 차라리 취하는 게 낫다. 그래야 은행 잔고 걱정도, ‘무슨 일 하세요?’에 대답할 걱정도 잊을 테니까.


워싱턴은 유서 깊은 기념물을 구경하고 벚꽃놀이를 즐기며 주말을 보내기엔 더없이 좋은 도시다. 하지만 세상에 정치 말고는 중요한 게 없다는 듯한 이곳 분위기는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월스트리트의 투자금융가이자 엽기적 살인마로 나온다-옮긴이)만큼이나 끔찍하게 느껴진다. 이 도시에선 심지어 트레이더 조스(미국의 슈퍼마켓-옮긴이)의 계산대 직원까지도 내가 산 물건들을 테트리스 게임 챔피언도 울고 갈 실력으로 봉지에 담으면서 내게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


이번만큼은 나의 사교 생활이 간단해 보였다. 나는 이 도시 전체와 연인이 아닌 친구로 남기로 했고 눈곱만큼도 아쉬움이 없었다. 2011년 봄,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던 일은 이 도시 특유의 자아도취에 빠진 남자랑 엮이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날 저녁 뒤뜰 바비큐 파티에서 일어난 일은 사랑에 빠진 것이라기보다는 ‘사랑에 걸려 자빠진 것’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덥고 습한 저녁이었다. 케이프 코더를 두 잔째 마시고 있을 때 2층에 있던 남자가 맥주와 감자 칩을 손에 들고 베란다로 나왔다. 훤칠한 키에 옅은 갈색 머리칼, 떠돌이 캘리포니아 주민 같은 편안한 친근감의 소유자였다. “안녕, 난 샘이라고 해.” 그가 곰의 발처럼 커다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거뭇거뭇한 턱과 황록색 눈동자를 가진 샘은 내가 만나본 가장 귀여운 남자였다. 그가 나를 쳐다볼 때마다 내 가슴은 가게 앞에 세워진 홍보용 바람 인형의 팔다리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샘이 내 농담에 웃음을 터뜨릴 때는 행복해서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우리는 날마다 문자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매일 저녁 만나기 시작했다. 바비큐 파티가 있고 2주 후, 샘과 나는 홀푸즈(유기농 식품 전문 마켓-옮긴이)의 계산대 줄에 서 있었다. 카트 안의 물건들을 꺼내면서 내가 말했다. “너, 내 남자 친구 맞지?” 그렇게 우린 공식 커플이 되었다.


***


취업,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갈수록 암울해지는 날들의 연속이다. 모아놓은 돈도 떨어져가고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도 없다. 경기 대침체 때문에 웬만해선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을 거라던 아빠 말이 맞았던 걸까? 2011년 가을, 지금은 무급 인턴 자리조차 구하기 쉽지 않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과연 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 점점 자신감이 줄어든다.


내 자신감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샘이 스티브 잡스가 했던 말을 보내준다. ‘인생의 경험이라는 점들이 어떻게 연결돼 그림이 완성될지는 미리 알 수 없다. 나중에 되돌아봐야만 알 수 있다. 그러니 그 점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것임을 믿어야 한다.’ 나는 이 말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종이에 파란색 크레용으로 적어 냉장고 문에 붙여놓는다.


10월의 어느 우중충한 화요일, 드디어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시드웰 프렌즈에서 함께 일했던 상사다. 나더러 학교에 다시 나와 줄 수 있겠냐고 한다. 6개월 출산 휴가를 갔다 온 정규직 교사가 업무에 적응하는 동안 추가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2년 1월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다섯 가지다. 워싱턴 인터내셔널 스쿨의 대체 교사, 크레이머북스 앤드 애프터워즈 카페의 종업원, 시드웰 프렌즈 교사, 방문 과외교사, 고급 요가복 브랜드 룰루레몬의 매장 종업원. 룰루레몬에서는 일주일에 20시간 일한다. 세 종류의 유니폼을 담은 배낭을 메고 워싱턴 곳곳을 뛰어다니며 일하는 덕분에 생활비는 충당되지만 늘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데다 너무 바빠서 샘도 거의 만나지 못한다. 여러 군데로 출퇴근하며 정신없이 살자니 한 군데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빵빵한 복지 혜택과 근사한 직급이 주어지는 정규직 직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많은 영문학 전공자들이 로스쿨에 다닌 후 법률계로 진출한다. 나도 한번 상상해본다. 뒤로 깔끔하게 올려 묶은 헤어스타일로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확실한 연봉이 나오는 직장으로 출근하는 내 모습을. 내가 변호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영화 <앵무새 죽이기>, <어 퓨 굿 맨>, <금발이 너무해>에서 본 게 전부이므로 인터넷 창을 열고 자료를 검색해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크레이그리스트(중고 제품 거래, 부동산, 구인구직 등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는 생활정보 웹사이트-옮긴이)에서 법률회사 속기사를 구한다는 글을 발견한다. 거기 한번 지원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자기소개서를 첨부하라는 안내 문구에서 피식하고 웃음이 난다. 속기사 지원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버니스란 사람이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력서는 보내셨지만 자기소개서를 첨부하지 않으셨네요’라는 내용의 이메일이 왔을 때 나는 ‘이력서를 보시면 필요한 내용이 다 있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낸다. 버니스에게서 다시 답장이 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테스트를 받으러 오라는 연락이 온다. 아마도 타이핑 테스트인가 보다. 까짓, 타이핑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금요일, 16번가에 있는 한 건물에 도착한다. 5층으로 올라가니 어떤 여자가 나를 빈방으로 안내하고는 테스트를 마치기까지 한 시간쯤 걸릴 거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타이핑 테스트가 아니다. 시험은 객관식 문제들로 구성돼 있고 심지어 내가 대학원 진학을 고려했을 때 치렀던 GRE 모의시험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언어 유추 영역도 있다. 이거 재밌는데!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시험을 끝마친다.


다음 주 월요일, 버니스에게서 이메일이 온다. 시험 결과가 좋으니 다시 와서 면접을 볼 수 있겠냐는 내용이다. 버니스와 면접을 보기로 한 날, 룰루레몬에서 직원 교육이 꽤 길어진다. 하지만 면접이 있으니 일찍 보내달라는 말을 매니저에게 하고 싶지가 않다. 결국 나는 면접을 펑크 내고 만다.


마침내 일이 끝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매장을 나오면서 보니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 있다. 그래서 면접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버니스에게 사과 이메일을 보낸다.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잠재우면서.


오빠에게 생일 선물을 부치러 우체국에 가는데 갑자기 나 자신이 우주 최강 등신처럼 느껴졌다. 우체국에 줄 서 있는데 휴대폰에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버니스다.


안녕하세요, 레베카. 바쁜 일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실 이것은 백악관에서 근무하는 일이고, 만일 채용된다면 당신은 대통령의 국내 및 해외 출장 시에도 동행하게 됩니다. 만일 마음이 바뀌면 연락 주십시오. -버니스


다음 주, 나는 면접을 보러 가서 버니스와 마주 앉는다. 버니스의 고급스러운 사무실 창밖으로 백악관이 보인다. “대통령의 속기사 자리에 사람을 구하는 중이에요.” 그녀가 말한다. 이건 분명 21세기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버니스에 따르면 만일 채용되면 인터뷰, 브리핑, 전화회의, 연설 등을 녹음한 후 그 내용을 속기사 사무실에서 타이핑하는 일을 하게 된단다.


백악관 공식 자료를 공보실과 대통령 기록물 보관소로 보내는 일도 하며, 오바마 대통령이 가는 모든 곳에 동행하게 된다. 복지 혜택이 보장되는 풀타임 정규직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대부분의 풀타임 직장보다 더 풀타임이다. 주말에도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시드웰 프렌즈에 출근한 나는 교내 식당에 앉아 있다가 휴대폰을 깜박하고 교무실에 놓고 온 걸 깨닫는다. 혹시 버니스에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 늘 갖고 있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키 큰 중학생과 몸이 부딪힌다. 사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중간쯤 올라갔을 때 그 키 큰 중학생이 말리아 오바마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 생애 최고로 운 좋은 엉덩이 충돌이었음이 드러난다. 백악관 속기사에 합격했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한식구가 된 걸 환영합니다

첫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 일찍 페기에게서 이메일이 온다. ‘우리 사무실은 EEOB 5층입니다. 백악관 서쪽에 있는 큰 건물이에요. 아직 정식 직원증이 없으니 방문객용 출입구로 들어와야 합니다. 신분증 꼭 지참하세요.’ 백악관으로 출근한다는 생각에 너무 들뜬 나머지 마지막 줄을 못 보고 화면을 닫을 뻔했다. ‘한식구가 된 걸 환영합니다.’ 소름 끼치게 기분 좋다.


방문객용 출입구에 도착하니 페기가 마중 나와 있다. 보안검사대를 통과한 뒤 그녀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내부를 구경시켜 준다. 앞으로 이런 곳에 날마다 출근하게 된다니. 세상에, 믿기지가 않는다.


풀 기자단과 함께

새벽 기상, 야근, 주말 근무까지. 다시 기숙학교로 돌아간 기분이다. “네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기는 한 거니?” 어느 토요일 아침, 전화 통화를 하다가 엄마가 묻는다. “엄마도 참! 부활절엔 집에 가 ㄹ거예요. 제가 보낸 이메일은 읽어봤어요?” “이따 밤에 읽으려고 고이 아껴두고 있어.”


나의 백악관 모험담이 담긴 장문의 이메일을 엄마에게 간간이 보내고 있다. “알았어요. 이제 끊어야 돼요.” 보안요원들이 있는 백악관 출입문 앞에 서서 엄마에게 말한다. “나 지금 기자단 있는 데로 가야 해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장비를 챙긴 후 기자단 담당관 마리와 카메라로 무장한 ‘풀(pool) 기자단’이 모여 있는 하급 공보실 앞으로 간다. 풀 기자단은 백악관 기자단 중 13명의 취재기가 및 사진기자로 구성된 그룹으로, 대통령의 모든 동선을 따라다니며 동행 취재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몇 달 동안은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나는 이곳의 규칙을 지키며 창문 없는 터널 같은 웨스트 윙 복도들을 걷고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웨스트 윙에서 쓰는 은어들도 익혀야 한다. 기자들이 대통령을 ‘오바마’라고 부르는 것이 들리면 나와 백악관 직원들은 민망해서 움찔한다. 우리는 ‘포터스(POTUS,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의 약자)’ 또는 ‘대통령’이라고 하지, 대통령의 성만 부르는 일은 절대 없기 때문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페기가 나더러 ‘날개를 펼 때’라고 말한다. 나 혼자서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을 탈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후의 일정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흘러가고 우리는 오클라호마시티의 호텔에 도착한다. 나는 대변인의 개글, 두 차례의 공식 논평, 한 차례의 <NBC>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녹음한다. 내가 풀 기자단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페기와 리사, 루카스, 마지는 내가 보내준 오디오 파일을 이용해 녹취록을 정리한다. 오늘 일정으로 벌써 녹초가 되기는 했지만 나는 출장이 체질인가 보다. 매순간 재밌었다. 기자들을 만나고, 컨벤션센터의 복도를 누비고, 주요 직원들에게 내 소개를 하고, 무대 뒤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지켜보고, 연설이 끝난 후 대통령이 바로 내 옆을 지나갈 때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떠들썩한 정장 군단

리사와 페기와 나는 교대로 출장길에 올라 각자 전체 출장 건수의 약 3분의 1씩 소화한다. 포터스의 에어포스원 이동 일정이 거의 매일 있다시피 해서 나는 짐을 풀 시간도 없다. 출장에서 돌아와 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또 출장이다. 어떤 때는 3개 주를 돌아야 하고, 어떤 때는 동쪽 끝의 도시에 들렀다 곧장 서쪽으로 날아간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침 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일찍부터 일어나 옷을 챙겨 입는다. 7시를 막 지난 시각, 호텔 헬스장의 창문 블라인드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뒤쪽 벽을 옅은 오렌지 빛으로 물들이고 러닝머신의 TV 화면에 눈부신 반사광을 만들어낸다.


나는 3마일을 달리고 나서 속도를 높인다. 4마일을 넘겼을 때 다시 속도를 높인다. 5마일까지만 뛰어야지. 결국 7마일을 뛰고 나서 속도를 늦추고 거울 속 내 모습을 본다. 시뻘게진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흘러 얼굴만 보면 프로레슬링 선수 저리 가라다. 러닝머신을 완전히 멈추고 숨을 고르는데, 곁눈질로 흘긋 보니 오른쪽 러닝머신에 누군가 올라선다. “그거보단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텐데요.” 그 사람이 말한다. 나는 농담을 건네는 남자가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려본다. 대통령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것 같죠?” 대통령이 주변에 있는 보좌관들을 향해 묻는다. 내 빨간 얼굴이 더 새빨개진다. 다들 웃고 대통령도 웃는다. 나도 따라 웃어야 하는데 웃음이 안 나온다. 너무 놀라 얼이 빠져서.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잖아요.” 대통령이 윙크를 하며 내게 말한다. 모자챙 밑에서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껌을 씹으며 대통령이 거듭 말을 걸어오는데도 나는 꿀 먹은 벙어리다. TV에서만 보던 연예인을 눈앞에서 맞닥뜨린 기분이다.



제2막 ㆍ2013 135

꿈꾸던 일을 행동으로

가을에 아시아 순방을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취소된다. 망할 놈의 의회에서 예산안 합의에 실패해 연방정부가 셧다운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마치 파티를 열기로 해놓고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포터스가 브루나이와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정상들과의 회담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들 국가의 지도자들에게도 심려를 끼치게 됐다는 생각입니다.”


셧다운 때문에 백악관의 많은 직원들이 강제 휴직에 들어가지만 나는 연방공무원에 속하지 않으므로 평상시와 다름없이 출근한다. 포터스는 의회가 생떼를 쓰면서 나라 전체를 볼모로 잡고 있다며 의회를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판한다. 나는 포터스가 영화 <디파티드>의 마크 윌버그가 말했던 대사를 인용해 공화당 당원들을 비난할 때 속으로 통쾌함을 느낀다. “저는 제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아닙니다.”


한편 뉴저지에 있는 샘에게서 이메일이 온다. 나는 샘을 사랑한다. 샘은 마치 가족과도 같은 남자다. 우르르 쾅쾅 천둥이 칠 때도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줄 남자다.


10월 중순에 마침내 셧다운 사태가 일단락되고 정상 업무가 재개된다. 조 바이든 부통령이 도넛을 잔뜩 들고 와서 직원들에게 안겨준다. 일주일 후 우리는 드디어 건강보험 시스템 웹사이트인 ‘HealthCare.gov’의 서비스 시작을 목격한다. 하지만 ‘대실패’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웹사이트 작동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 포터스조차도 엉망으로 돌아가는 이 웹사이트에 대해 기자들과의 백그라우라운드 브리핑에서 실망감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오바마케어를 위해 싸워온 그 힘든 시간들에 비하면 웹사이트 오픈쯤은 당연히 쉽게 해낼 수 있는 부분이어야 하는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한 점은, 이번 사태로 연방정부가 기술적 부분에서 얼마나 개선할 점이 많은지를 모두가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포터스의 2008년 대선 승리에는 첨단기술로 무장한 시민사회단체가 큰 역할을 했다. 포터스는 이번 사태의 수습을 위해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비롯한 주요 온라인 플랫폼들의 최고 전문가들을 불러 모으고, 이들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연방정부의 건강보험 시스템을 완성한다는 최종 목표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이다. 앞으로 몇 달 후엔 웹사이트의 버그가 완전히 수정돼 정상 가동될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IT 천재들이 청바지에 플란넬 셔츠 차림으로 웨스트 윙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자주 볼 것이다.



제3막 ㆍ2014 237

트리플 보기

포터스와 출장 팀 직원들이 워싱턴에 이틀간 다녀오기 위해 떠난다. 바이든 부통령 및 고위 보좌관들과 함께 이라크 주둔 미군 문제와 퍼거슨의 심각해지는 긴장 상태에 관해 회의를 하기 위해서다(2014년 8월 미국 퍼거슨시에서 비무장 흑인 소년이 백인 경찰관의 총에 맞아 사망한 후 흑인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확산되고 뿌리 깊은 인종 갈등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다-옮긴이). 부대변인이 알려주길 이 이틀간은 개글이 없을 예정이니 나는 그냥 마서스비니어드에 남아 있어도 된다고 한다. 제이슨과 함께 이동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정예 군단이 없는 마서스비니어드에서 맞는 첫 아침, 조깅을 하러 나간다. 달리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대통령과 보좌진은 어떻게 그 수많은 국내외 문제들에 동시에 대응할 수 있을까? 각각의 모든 문제가 애매모호한 동시에 사활이 걸린 중요한 내용일 때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할까?


현재 대통령은 점점 세력을 확대하는 중동의 ISIS(이슬람 급진 수니파 무장 단체-옮긴이),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푸틴의 움직임, 아프리카의 에볼라 바이러스 유행 등 글로벌 현안을 마주하고 있다. 미군은 여전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이고, 북한은 계속 미사일 발사 시험을 감행하고 있으며, 소리 없이 진행되는 기후변화가 인류에게 가하는 위협은 아무도 정확히 예측 할 수 없는 상태다.


국내에서는 오래된 인종 분열 문제의 심각성이 성조기의 빨간색과 흰색, 파란색만큼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금 미주리주 퍼거슨은 집단적 분노로 요동치는 가운데 시민들이 흑인 소년 마이클 브라운을 죽인 백인 경찰관에 대한 조사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 마이클과 에릭 가너는 경찰의 잔인한 과잉 진압에 희생된 가장 최근 사례들이지만 그런 일은 과거에도 수없이 있었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2014년 7월 뉴욕에서 경찰이 무허가 담배 판매가 의심되는 흑인 남성 에리 가너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가너가 폭행당한 후 응급처치 없이 방치돼 사망해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일었다-옮긴이). 유색인종 아이들이 자신이 결국 감옥에 가거나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 느끼며 자란다면 우리는 어떤 희망을, 어떤 의미의 진보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걸까? 우리 모두 초등학생으로 다시 돌아가 “어느 곳에든 불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정의를 위협한다”라고 했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말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공격용 소총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뉴타운의 아이들, 전미총기협회의 눈치만 보는 공화당원들의 총기규제 개혁안을 통과시키도록 설득할 수 없었던 부모들의 아이들 말고 과연 누구를 보호해야 할까? 기말고사를 끝낸 후 공원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열다섯 소녀 하디야 펜들턴 말고 과연 누구를 보호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세상은 지금껏 항상 이런 비극으로 가득했던 걸까?



제4막 ㆍ2015 315

리더, 외로움을 감내해야 하는 자리

사랑과 번뇌와 배신과 믿음이 뒤섞인 4년 가까운 시간의 끝에서 샘과 나는 헤어졌다. 지금 샘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나는 워싱턴에 있다. 이별이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내 길을 결정했다. 샘과의 이별이 한없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필요한 선택이고 옳은 결정이었다. 선거 캠프에서 하루에 15시간씩 일하는 샘과 2년 동안 미주리주에서 살 수는 없다. 나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백악관의 풍경과 일상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만약 세인트루이스로 떠났다면 극심한, 어쩌면 치명적인 포모 증후군(중요한 기회를 놓치거나 자신만 제외되는 것 또는 소외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옮긴이)에 시달렸을 것이다.


에어포스원에서 만난 동료들은 나의 지지자이자 상담가, 형제이자 베스트 프랜드가 되었다. 내가 어떻게 우리만의 비밀 클럽을, 헬리콥터와 특별한 휴대폰과 먼 나라로의 여행을 누리는 이 클럽을 떠난단 말인가? 미래가 우리 앞에 서성이고 있다. 똑딱 악어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나란히 러닝머신에서 뛸 시간도, 켄자스시티의 호텔 바에서 동료들과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실 시간도, 웨스트 이그젝에서 실파랑 수다를 떨다가 “나머지 얘긴 이따 비행기 안에서 해줄게”라고 말할 시간도 이제 2년밖에 안 남았다. 2017년 1월 20일(오바마 대통령의 퇴임일-옮긴이) 이후에는 대통령 집무실의 인터뷰 도중 포터스가 사용한 어떤 중요한 단어의 뜻을 부랴부랴 검색해볼 일도 없을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불이 켜지기 전에 그곳을 나와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나는 지금 훌쩍 떠나버릴 수가 없다.


샘을 자신의 꿈을 좇아 짐을 싸서 그 먼 곳으로 떠났다. 우리는 함께 울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 남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내 꿈이 뭔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세인트루이스의 주방 식탁에 앉아서 자기소개서나 쓰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또다시 걸어서 백악관으로 향한다.


나는 이곳에 있고 싶다. 이 도시의 늪에, 워싱턴족들과 해피 아워의 양복쟁이들 속에. 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남은 임기 2년 동안 이뤄내는 것들을 지켜보기로 했고 그 대가로 새겨질 마음의 멍들을 감내할 것이다. 위를 올려다보기 위해 조용히 나의 일에 충실할 것이다. 포터스가 지난 12월에 이렇게 말했다. “나의 대통령 임기는 이제 4쿼터에 접어듭니다. 흥미진진한 장면은 4쿼터에 나오기 마련입니다.”


마지막 쿼터에서는 나태하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나는 부지런히 외곽슛을 쏘고, 리바운드를 잡고, 공을 가로채고, 블로킹을 하고, 반칙을 당해 자유투를 얻고, 종료 버저가 울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해 뛸 준비가 돼 있다. 언젠가 마이클 조던이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원하는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어떤 사람들은 간절히 소망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나게 만든다.


***


우리는 델리에서 이틀을 보낸다. 어지러이 빛나는 밝은색과 황금빛 찻잔들, 미로 같은 정원이 한낮의 태양 아래 땀을 흘리는 우리의 눈앞에 끊임없이 나타난다. 인도 사람들은 이번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로 특별히 노래까지 만들었다. 모디 인도 총리가 비행장에서 포터스를 맞이하면서 힘차게 포옹한 이후로 ‘오바마, 오바마, 오!’ 하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이 경쾌한 노래는 어딜 가나 거리 곳곳에서, 그리고 TV에서 계속 울려 퍼진다.


출장 기간에 백악관 직원 대부분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일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남자를 여행 중에 보좌하는 일은 그런 일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을 빛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는 외모 따위에 신경 쓸 틈도 없고 어떤 때는 더러운 기분도 참아내야 한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팔꿈치로 옆 사람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진통제 반 통을 삼키면서 생존을 위해 교양 따위는 우주로 날려버린다. 정해진 일정에 착오가 없도록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려면 몸이 아파도 감내해야 한다. 발레리나의 슈즈 안에는 온통 망가진 발가락이 들어 있지 않던가.


방문 국가에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선발대 팀과 현지 공무원들이 협력해 대통령의 일정 및 방문지와 관련된 사항을 조율해놓는다. 비밀경호국 요원들은 대통령이 이동하는 동선을 꼼꼼히 체크하고 대비한다. 그리고 우리는 현지 관습을 숙지하고 문화적 규범을 존중하면서 최대한 정중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국무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행동하고 부모님과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지키려고 애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별로 어려울 게 없다. 환한 미소와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잊지 않으면 웬만해선 문제 생길 일이 없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모든 행동거지를 특별히 신경 써야 한다. 군인들에게 손을 흔들어서도 안 되고 이동 중에 자동차 운전사에게 말을 걸어서도 안 된다. 남자들과 눈이 마주쳐서도 안 된다. 혼자 다니지 말고 늘 일행과 함께 이동해야 하고 튀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국제적인 해프닝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너무 잘해냈어!” 에어포스원으로 돌아온 후 한 여성 고위보좌관이 좌석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신발을 벗어 던지면서 다른 여성 보좌관에게 말한다. 다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든 걸 무사히 해냈다. 저녁에 궁에서 있었던 만찬과 담소에 대해서도 다들 만족하는 분위기다. 출장의 마지막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 이제 무사히 끝난 것을 감사하고 축하할 시간이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도 긴 여행 중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여행이다. 다들 시차 피로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지중해를 지나가고 있는 우리는 모두 너무 녹초가 된 나머지 녹초가 됐다는 사실도 못 느낀다. 워싱턴에 도착하고 나면 그제야 몸이 아플 것이고, 다음 주 내내 시차로 인한 피로와 컨디션 난조에 시달릴 것이다.


일곱 시간 후, 창밖 비행기 날개의 위이잉 소리에 잠에서 깬다. 직원 객실의 불이 이미 다 켜져 있고 사람들은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으로 조용히 우에보스 란체로스(토르티야와 계란, 토마토소스 등을 곁들여 먹는 멕시코 요리-옮긴이)를 먹고 있다. 앞쪽 스크린에 리암 니슨이 나오는 영화가 틀어져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다. 서류와 짐을 정리하고, 휴대폰을 다시 켜고, 신발을 찾아 신느라 다들 분주하다. 나는 베개를 보관함에 갖다놓고 담요를 갠 다음, 옷을 갈아입으려고 화장실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린다. 밤샘 파티가 끝나고 정리하는 시간이 우울한 건 에어포스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비행기에서 바퀴들이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차라리 착륙이 지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곧 이런 비행도 끝나는 날이 올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도 끝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과거형으로 말해질 것이고, 기록의 일부가 될 것이다. 45대 대통령이 에어포스원의 탑승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그의 부하직원들은 기내에서 셀카를 찍고 기자들은 신문 1면에 실을 사진을 찍을 것이다. 우리는 주방 식탁 혹은 회사 책상에 앉아서 그 사진들을 볼 것이다.


이제 곧 “지난번에 거기 출장 갔을 때 말이야...”라고 말할 일도 없어질 것이다. 조금 뒷면 이 비행기는 비행을 끝내고 착륙한다. 하지만 끝없는 지평선 밑으로 넘어가는 해를 창밖으로 쳐다보는 지금, 우리늰 역사의 눈앞에서 날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높은 상공에서 순항할 시간은 아직 조금 더 남았다.


우리는 테러의 공포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속기사실에 있을 때 그 소식을 듣는다. 리사가 휴대폰으로 뉴스 특보를 확인하고 곧바로 TV를 켠다.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에서 들어오는 보도 화면이 계속 쏟아진다. 장애인 시설 총기난사로 14명이 사망한 이번 사건은 뉴타운 이후 최악의 비극이다. 9.11테러 이후 미국 땅에서 벌어진 가장 끔찍한 테러 공격이다. 하지만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침착하다. 그리고 이제 진저리가 난다.


속기사실에는 아직 큰 변동이 없다. 나는 업무용 이메일을 계속 확인한다. 공보실에서 업데이트 지침을 발송할 것이다. 대통령의 서명 발표에 관한 공지도 올지 모른다. 아직은 기다려봐야 한다. 하지만 웨스트 윙에서는 직원들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차분하게 움직이려 애쓰고 있다. 이런 때에 적용되는 프로토콜과 지시와 절차상의 단계들이 있다. 전화 통화가 이뤄지고, 서류가 전달되고, 성명 내용이 작성된다.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제임스 코미 FBI국장, 로레타 린치 법무장관, 제이 존슨 국토안보부장관, 백악관 정보 보좌관들로부터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는다. 6개월 된 딸을 부모님 집에 맡여놓고 범행을 벌인 테러범 부부는 도주하다가 경찰과 벌인 총격전 도중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다.


얼마 후 백악관 출장 팀이 샌버너디노 방문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진다. 대통령이 그곳에 가서 총기 테러 생존자들과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 너무도 많이 목격한 장면이다. 분노와 절망을 추스르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소름끼칠 만큼 익숙하다.


총기난사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러 서부로 날아가기 전, 대통령은 의회에 도움을 호소한다. 그는 연설에서 비행기 탑승 금지 명단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 총을 살 수 있는 현재 법률상의 허점을 없애야 한다고 의회에 촉구한다. 현재는 FBI의 테러 감시 대상자가 AR-15 라이플을 구입하는 것을 법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다. 샌버너디노 사건의 범인은 군용 공격형 라이플을 사용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포터스는 말한다. “비행기에 탑승시킬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라면 총을 구입하게 방치해서도 안 되는 위험인물입니다.”


대통령의 내면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는 의회가 총기규제 강화안에 반대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마땅히 초당적인 관심사여야 한다. 하지만 공화당원들은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에 도통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죄 없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목숨을 잃고 가정이 파괴되고 있는데도.


포터스가 말한다. “우리는 강인하고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테러의 공포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5막 ㆍ2016-2017 393

자신의 일에 집중하십시오

포터스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십시오.” 백악관 인턴들에게도, 제리 사인펠드(미국의 유명 코미디언-옮긴이)에게도, 베트남의 젊은이들에게도 포터스는 늘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나는 왜 그 말의 의미를 간과했을까? 우리는 지금 독일에 와 있고,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나는 자신의 일에 집중할 줄 아는 여성인 앙겔라 메르켈과 포터스의 기자회견을 녹취해 정리했다.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패싸하드 멤버들이 그렇고, 에리브릴 헤인즈가 그렇고, 메건 루니가 그렇고, 수전 라이스가 그렇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들과 운동선수들, 뮤지션들이 그렇다. 그리고 루스도 그렇다. 이 세상에 노트리어스 알비지보다 더 멋지게 자기 일에 집중하는 여성은 또 없으리라(미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여성과 소수자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노력해온 인물로, 전설적인 흑인 래퍼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의 이름을 따 젊은 층에서 ‘노트리어스 알비지’로 불린다-옮긴이).


지난 5년을 가만히 되돌아본다. 내게 없어서는 안 되었던 것들을. 물리도록 들은 음악들. 좋아하는 책, 몸속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농구 경기와 그럭저럭 괜찮은 맛의 보드카. 우정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친구들. 운동화. 나는 내가 지켜야 했던 규칙들과 깨트려야 했던 규칙들을 생각해본다.


이제 발끝으로 살금살금 걷는 짓은 안 할 것이다. 차라리 내 분홍색 플랫슈즈를 신고 마음껏 춤출 것이다. 숨죽이려 애쓰지 않고 큰 목소리로 앙코르를 외칠 것이다. 미래의 수많은 ‘제시’들을 위해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싶다. 그들이 위를 올려다볼 수 있게, 그저 우연한 필요에 의해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온당한 이유로 존중받을 수 있게. 미래는 여성의 것이다. 끝내주게 멋진 여성들이 이미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저 밑에 있는 다른 여성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이 올라오도록 힘껏 도와주는, 그래서 기꺼이 함께 올라가려는 여성들 말이다.


늘 그랬듯 포터스의 말이 옳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