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취향

   
김민철
ǻ
북라이프
   
13500
2018�� 07��



■ 책 소개

 

“나만의 취향 지도 안에서 우리는 쉽게 행복에 도착한다.”

 

《모든 요일의 기록》과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 깊고 향긋한 ‘글맛’을 전하며 수만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던 김민철 카피라이터가 이번에는 ‘취향’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좋아하는 음악, 책, 여행, 취미처럼 단편적인 것에서 시작해 사람 취향, 사랑 취향, 싫음에 대한 취향, ‘나’라는 사람에 대한 취향까지, 취향의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그 넓은 바다에서 ‘나의 취향’을 건져 올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취향을 말할 때 조금은 주저하게 된다. ‘나’라는 사람의 선택과 결정이 모두 들어간 그 한 가지는 왠지 고급스럽고 독특하고 더 새로워야 할 것 같다. 결국 우리는 ‘나’를 말할 때조차 스스로 타인의 시선을 끌고 와 ‘비교 지옥’에 입성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주눅 들게 하는 ‘취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제자리를 찾은 ‘취향의 의미’에 따라 개인적인 삶의 공간, 물건, 관계, 여행에 대한 것부터 직장인으로서는 드러내기 쉽지 않은 ‘일’에 관한 취향도 꺼내놓는다. 그리고 취향이 변해가는 과정, 타인의 취향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고민 등 그 무궁무진한 영역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취향’의 카테고리에서 풀어나간다.

 

■ 저자 김민철
남자 이름 같지만 엄연히 여자. 카피 한 줄 못 외우지만 엄연히 카피라이터. 회사를 꾸준히 다닌 덕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라는 직함까지 얻게 되었다.

 

회의 시간의 치밀한 필기를 바탕으로《우리 회의나 할까?》를 냈고, 평소의 다양한 기록을 바탕으로《모든 요일의 기록》이라는 책을, 틈틈이 떠난 여행에서의 기록을 바탕으로《모든 요일의 여행》을 썼다.

 

덕분에 종종 작가로 불리기도 하지만 본업은 여전히 광고이며 일룸 ‘가구를 만듭니다’, e편한세상 ‘진심이 짓는다’, SK브로드 밴드 ‘See the Unseen’, SK텔레콤 ‘사람을 향합니다’, T ‘생각대로 T’ 등의 캠페인에 참여했다.

 

■ 차례
프롤로그

 

1
나도 한번 라라랜드 원피스를
어떤 선언
안사람 바깥사람
봄밤의 조르바
멋진 언니, 더 많이 원합니다
관대한 사람
동네 호프집의 가르침
No라고 말하는 방법에 관하여
취향의 지도

 

2
우리도 사랑일까
대화불가능론자의 탄생
서른아홉 살의 본조르노
제 전공은 짝사랑입니다
연애의 고수
파이팅 소이소스
비굴하지 않게, 초라하지 않게
겨우 술 한 잔

 

3
예쁘지 않은 팀장이 된다는 것
두 번째입니다
마음 한 톨도 아까우니까
구례의 록 스피릿
비관론자 납치사건
이상한 셈법
가족의 탄생
끝까지 즐겁자

 

4
빛이 되는 도시, 빚이 되는 도시
사소한 불운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가로늦게 말하는 ‘가로늦게’
신기한 거울나라
초짜 페미니스트
연결과 분절
팔레르모에서




하루의 취향

취향의 지도

“빨래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는 내공이 없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빨래 너는 걸 좋아하는 사람, 빨래 개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각 과정을 제각각의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나의 경우엔 대학교 땐 빨래 너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결혼을 하고서는 빨래 개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드물게 손빨래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손빨래라는 말만 들어도 기겁을 하는 나 같은 사람도 많다.


일주일에 한 번씩 흰 빨래를 삶는다는 사람도 있다. 듣기만 해도 그게 어떻게 가능하나 싶지만, 그게 그 사람의 빨래 취향인 것이다. 그러니까 “빨래 좋아하세요?”에는 그 결결이 다른 빨래 취향에 대한 배려가 없다.


청소의 경우에도 물건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나다), 청소기부터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고(남편이다), 물건에 붙은 먼지부터 닦는 사람이 있고(우리 집에 좀 와주세요), 그 전부를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내가 물건 정리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나는 물건을 각자의 자리에 주욱 늘어놓는 걸 정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싸악 치우는 걸 정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방식으로 여행을 인수분해 해보면 어떨까? 최근 “광고에도 전문가가 있는 것처럼 여행에도 전문가가 있으며, 전문가가 미리 다 짜놓은 충실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 말하는 분을 만났다. 그분의 여행 취향은 명백히 패키지여행이다. 나는 여기에 어떤 편견도 개입시키고 싶지 않다. 패키지여행의 반대말을 자유여행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자유여행을 떠나면서도 모든 일정을 마치 패키지여행처럼 촘촘히 다 계획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갈 식당과 거기서 먹을 메뉴와 카페에서 머무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떠난다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다. 반면 친구 한 명은 도착하는 첫날의 숙소 정도만 예약해놓고 나머지 계획은 최소화해서 떠난다고 했다. 아예 첫날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운명의 신에게 모든 걸 맡기는 사람도 있다. 물론 하루도 집 밖에서는 잘 수 없다는 강경파도 존재한다. 여행을 싫어하는 것도 여행의 취향 중 하나다. 여행에 대한 각종 동경과 찬양만 넘쳐나는 이 시대에, 마땅히 존중받아야만 하는 취향이라 생각한다.


나의 여행 취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여행만큼이나 여행 준비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휴가 갈 시간이 없을 때에도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가지?”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며, 비행기 티켓도 심심하면 검색해본다. 지도 앱을 수시로 켜서 계획도 없는 도시의 작은 식당에 별표 치는 것도 좋아한다. 최근 여행은 떠나기 1년 반 전에 이미 목적지를 정했고, 비행기 티켓은 10개월 전에 사두었다. 수시로 바뀌는 마음에 따라 수시로 여행 루트를 짰더니 종국엔 내가 짠 루트만 열 개가 넘었다. 너무 이상한 사람 같다고? 그럼 그냥, 여행 루트 짜는 걸 여행만큼이나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두자.


여행 준비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더니 사람들은 내가 모든 정보를 빼놓지 않고 수집해서, 모든 일정을 다 정해놓고 움직이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내 기준에서의 여행 준비는 ‘어느 도시에 갈 것인가?’, ‘그 도시에 얼마나 머물 것인가?’ ‘어떤 숙소에 머물 것인가?’가 거의 전부다. 특히 숙소 사이트에 들어가서 온 도시의 집들을 다 살펴보며, 나와 가장 취향이 맞는 집주인을 고르는 일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극심해지면 갑자기 숙소 사이트를 켜고 ‘이 집에 머무르면 어떨까?’를 상상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유형이랄까. 말하자면 여행 준비를 공상에 다 쏟아붓는 사람이 바로 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경우 여행지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나면 그제야 허겁지겁 가이드북을 뒤적이다가 결국 되는대로 돌아다니는 게 나의 여행 취향이다.


어디 빨래, 여행에만 취향이 있겠는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도, 쉬는 방법에도 심지어 회사 일에도 취향은 여지없이 개입한다. 사람들은 내가 그토록 오래 회사를 다니는 것에 대해서 신기하게 생각하지만, 이것도 명백히 취향 탓이다. 14년을 한 회사에 다니는데 왜 유혹이 없었겠는가? 다른 회사에서의 유혹은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누군가가 자신이 버는 돈을 말하며 나에게도 프리랜서로 전향하라고 유혹을 한다거나, 어떤 회사에서는 아이디어 내고 카피 쓰는 일만 해보라며, 큰돈을 제시하기도 했다.


수많은 유혹 앞에서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며칠을 고민하다가 문득 이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일 취향’을 중심에 두고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카피라이터가 이런 말을 하면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이디어를 내고 카피를 쓰는 게 아니었다. 물론 싫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게 핵심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잘하기 위해 끝없이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 내가 ‘좋아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들은 회의를 하고, 거기서 나오는 아이디어의 길을 잡고, 그걸 잘 정리해서 사람들과 공유하고, 최적의 스케줄을 짜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냉정하게 나를 바라보면, 나는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다 일을 진행하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렇다면 돈 때문에 아이디어를 내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는 직업을 택하는 것은 나의 일 취향에 전면적으로 반하는 일이었다. 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을 끝까지’ 진행할 때 일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일 취향을 존중해줄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회사에 남기로 결정했다. 내 취향이 그러하니까.


단순히 옷을 하나 고르는 것도 취향의 영역이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취향의 영역이다. 옷을 고를 때 내 마음을 의식하는 것처럼, 나머지 모든 일에 있어서도 내 마음의 방향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방향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리하여 남의 시선을 배제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나의 마음을 꼼꼼히 파악하여,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물론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 내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불확실한 것이 많을수록 가장 확실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나의 마음이 향하는 것들로 완성된 나만의 취향 지도 안에서 나는 쉽게 행복에 도착한다.



서른아홉 살의 본 조르노

로마의 숙소는 외곽에 잡았다. 아니,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비수기라도 로마는 1년 내내 관광객이 넘쳐나고, 중심부의 숙소는 까마득하게 비쌌기 때문이었다. 외곽으로 눈을 돌렸더니 싼 값에 좋은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대신 아침마다 관광지로 가는 길이 멀었다. 그래서 아침에 집을 나서면 버스 정류장 바로 뒤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버스 티켓을 사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며 여행 기분을 냈다. 버스 티켓은 한 장에 1.5유로, 커피 한 잔은 0.8유로. 안 마시면 손해 본 기분까지 드는 커피 값이었다.


카페에 들어가 왼편 카운터에 있는 할머니에게 손짓 발짓으로 버스 티켓 두 장과 커피 두 잔을 샀다. 이제 커피 영수증을 바에 있는 바리스타에게 가져다주면 되는 일이었다. 여행을 막 시작한 찰나였고, 살짝 긴장되었지만 최대한 무심한 척 바리스타 아저씨에게 영수증을 내밀었다. 영수증에 에스프레소 두 개라고 명백히 적혀 있으니 내가 따로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바리스타 아저씨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크게 달랐다. 아저씨는 내가 내민 영수증은 보지도 않고, 내 눈부터 마주쳤다. 그리고 말했다.


“본 조르노.”(안녕하세요.)


아저씨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커피는 한 방울도 내려줄 수 없다는 기세로. 인사를 받을 거라고 생각도 못한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뗐다.


“본... 본 조르노.”


그제야 아저씨는 표정이 밝아졌다. 휴, 간신히 관문 하나를 통과했다 싶은 찰나, 아저씨는 다시 나를 향해 말을 했다.


“두에 카페?”


무방비 상태에서 다시 이탈리아어 공격을 받자 내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멍한 표정으로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저씨는 손가락 두 개를 내밀며 다시 말했다.


“두에 카페?”(커피 두 잔?)


그제야 나는 알아듣고 “씨”(네)라고 간신히 대답했다. 커피는 금방 나왔고, 아저씨는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부끄러움은 갈수록 커졌다. 아저씨는 커피를 주는 대신 인사를 가르친 것이다. 인사부터 하는 거야. 너는 지금 자판기 커피를 뽑는 게 아니잖아. 나는 사람이야. 너는 나의 커피를 마시고 싶은 거고. 그럼 인사부터 하는 거야. 영수증만 떡하니 내미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난 거니까.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본 조르노.


얼른 커피 한 잔을 털어놓고 나오면서 나는 다시 아저씨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말했다. 이번엔 내가 먼저. “그라찌에.”(감사합니다.) 아저씨는 무심히 대답해주었다. “프레고.”(천만에.) 그 한마디로 실수를 간신히 만회한 기분이었다. 버스는 곧바로 왔다. 자리에 앉아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방금 일을 곱씹다 보니 생각은 자연스럽게 오래전 새벽 버스 풍경으로 옮겨갔다. 프랑스 시골 마을, 루르마랭에서의 일이었다.


아직 깜깜한 월요일 새벽, 루르마랭의 버스 정류장은 북적였다. 차들이 줄지어 섰고, 중고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차례로 내렸다. 처음엔 뭔 일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아마도 주말 동안 집에 들렀다가 다시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는 아이들 같았다. 워낙 시골이었으니까 학교가 없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영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같이 길고 가늘고 우수에 찬 것 같은 외모의 아이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 목적지까지 두 시간이 걸린다기에 뒷자리에 앉아 잘 준비를 했다. 지도상으로는 별로 멀어 보이지도 않던데 왜 두 시간이 걸린다는 거지? 약간의 궁금증을 가지며.


나의 궁금증은 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풀렸다. 정말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버스는 또 섰다. 오호라. 이 정도 간격으로 선단 말이지? 완벽한 완행버스라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 버스를 더 완행으로 만드는 요인이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인사. 정류장에서 새로운 아이들이 타면, 버스 안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듬성듬성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는 비켜주려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금 막 들어온 아이와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가 비주(양쪽 볼을 맞대며 인사를 하는 행위)를 했다. 한 명과 비주하고, 그다음 일어선 사람과 비주하고, 그리고 또 비주, 비주, 비주. 문제는 버스를 타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거였다. 맨 처음 버스에 타는 사람이 자신의 지인들과 비주를 하고 나면, 이제는 두 번째 탄 사람의 순서였다. 그 사람의 지인들이 또 다 일어서고 비주, 비주, 비주.


그 모든 인사가 끝날 때까지 버스는 천천히 달렸다. 우와, 이러느라고 이 새벽에 이렇게나 완행인 거야? 처음엔 신기하다가도 나중에는 어이가 없었고 결국 버스에서 내릴 때가 다 되어서는 너털웃음이 났다. 그래, 저 인사가 안 될 건 또 뭐 있겠어? 저 만남에 시간을 못 내줄 이유는 또 뭐 있겠어? 결국 이 안에서 조급증을 느끼는 사람은 나뿐인데. 가야 할 학교도 없고, 출근해야 할 직장도 없는, 시간만 잔뜩 있는 여행자가 시간 앞에서 제일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고작 인사에 시간을 세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두 도시 안에서, 서로 다른 두 시간 안에서 묘하게 나만 비슷했다. 거기까지 서울의 김민철을 나는 꾸역꾸역 데려간 것이었다. 바쁘니까 인사는 생략하고, 머쓱하니까 고개만 까딱하고, 진심은 상대에게 미루고, 무뚝뚝한 얼굴로 일관하는.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 것이 일상이고, 누군가가 한 발 다가오면 기어이 한 발 물러나는. 그게 너무 생활이 된 건지 하루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표정에 화들짝 놀랐다. 사람들이 평소에 이렇게나 딱딱한 내 표정을 마주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다고 무례한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해보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서울에의 일상에 ‘진심’이라는 단어를 둘 자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로마의 그 카페를 나서면서는 내 마음이 좀 달라졌다. 아니,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이 아니라 인사였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아니, 내 기분이 좋아하는. 그 인사 하나가 도대체 뭐 어렵다고. 마을버스를 타면서 기사님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기사님이 혹시라도 받아주면 나까지 덩달아 기분 좋은데 인사를 안 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그 인사가 진심이 아닐 이유는 또 뭐가 있다고. 사람과 사람이 만났으니, 미소 1그램과 진심 1그램만 더 담아서 인사를 해보자는 다짐을 했다. 인사를 처음 배우는 두 살짜리 꼬마처럼, 서른아홉 살이 되어서야 겨우. 안녕하세요.



비관론자 납치사건

집 앞 슈퍼가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엔 편의점이 들어선다고 했다. 예상했던 수순이다. 내가 사는 동네는 망원동. 동네를 탐험하는 외부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동네다. 문 닫는 세탁소가 생겼고, 길게 줄을 늘어선 디저트 가게가 생겼다. 평범한 밥집 대신 특이한 카페들이 구석구석 문을 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에는 새로운 가게가 생기는 속도 따라잡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서면 새로운 가게로 바뀌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집 앞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슈퍼 하나가 문을 닫는 일 정도는 망원동에서 뉴스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예상 가능했다고 해서 어떤 충격도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나에겐, 우리 부부에겐. 이건 망원동의 핵심에 진도 6.5 이상의 지진이 일어난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기우뚱. 어어어어어. 콰광.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 거지? 근데 재난 문자는 왜 안 오는 거지?


한 달 전만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진이 한반도를 강타하기 전, 폭염이 몇 달 동안 우리 일상을 녹여버렸던 때의 일이다. 집에서 가스레인지 불을 켜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퇴근길에 남편을 만나 치맥을 먹었다. 언제나 맥주는 모자라니까, 슈퍼에 들렀다. 맥주 몇 병 더 사서 집에 들어가려고.


맥주를 계산하다 말고, 슈퍼 아저씨는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닭발 좋아해요?” 한 번도 닭발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좋아한다 싫어한다 어느 쪽의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으니까 아저씨가 한마디 더했다. “내가 아까 닭발을 볶았는데 맛있게 잘됐어. 소주랑 같이 마셔요.” 이래도 되나 망설이며 난감한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는데, 아저씨는 벌써 채소 냉장고 앞에 작은 의자를 깔고 있었다.


엉거주춤 목욕탕 의자보다 낮은 그 의자에, 원래는 컴퓨터 책상이었음에 분명한 정체불명의 테이블 앞에, 당면 진열대 옆에, 그러니까 슈퍼 구석에, 왼손에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들고, 오른손에는 나무젓가락을 들고, 동네 아주머니까지 다 함께 모여 앉았다. 아저씨는 소주를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꽐꽐 부었다 그 컵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소주를 부을 수 있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아무리 소주를 들이부어도 그 컵은 넘치지 않는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갑자기 멋모르는 30대에서 세상 이치를 다 통달한 50대로 건너뛴 느낌이었다. 닭발을 질겅질겅, 소주를 꼴깍꼴깍.


냉장고 바로 옆에 앉은 나에겐 중대한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오이를 꺼내 아저씨에게 전달하는 일. 아저씨가 “거기서 오이 좀 꺼내 줘봐”라고 말하면 나는 가격표가 버젓이 붙어 있는 오이를 꺼내서 아저씨에게 건넸다. 아저씨는 능숙하게 랩을 벗기고, 오이를 씻고, 착착 썰어서 우리 앞에 놔주었다. 늦은 밤 손님은 드물었고, 오이는 금세 바닥났다. 그때마다 아저씨는 오이를 또 꺼내라고 했다. 쏴쏴 씻고, 착착 썰었다.


나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이 초대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뭔가, 동네 유지가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은 이 슈퍼 구석탱이 술집에 초대받은 적이 없다는 동네 아주머니의 증언까지 더해지자, 나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 자부심에 취기가 더해지고, 더위까지 더해져서 나는 자꾸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슈퍼 아저씨는 또 무심하게 말했다. “더우면 그 옆에 냉장고 문 열어요.” 아저씨, 장사는 어쩌려고요. 이 삼복더위에 채소가 시들면 어쩌려고요. 우물쭈물하고 있으니까, 동네 아주머니가 나 대신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열어라 그럴 때 열어야 해. 저 짠돌이가 언제 맘 바뀔지 모른다니까.”


그 밤, 술은 잘 들어갔다. 우리는 7년 단골이었던 그 슈퍼 아저씨의 과거를 처음 들었고, 그날 아침 유독 싸가지 없던 한 손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같이 욕했다. 물론 아저씨는 더 크게 욕했다. 나는 더울 때마다 손을 뻗어 냉장고 속에 넣었다. 금방 서늘해진 손으로 또 금방 미지근해진 소주를 마셨다. 슈퍼에 술은 많았다. 당연하게도. 술이 들어가는 만큼 그 슈퍼에 대한 사랑이, 이 동네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저씨가 슈퍼를 정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망원동에 대한 나의 자부심, 그 핵심이 사라진다니. 지진 같은 소식이었다.


월요일마다 오는 타코야키 트럭 아저씨의 결혼 준비 소식을 들으며 타코야키를 양껏 포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슈퍼에 들렀다.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맥주를 배달해 주었다. 우리 집 베란다에 수많은 맥주 박스들이 착착 쌓였다. 아저씨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툭 물었다. “순대 국밥 좋아해요?” 멀리 식당을 열 생각인데 꼭 놀러오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정말로 마지막으로, 우리 집을 떠났다. 망원동이 순식간에 텅 빈 느낌이었다.


이제 우리 집엔 누가 맥주를 배달해주는 걸까. 이제 누가 나에게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거라며 공짜로 우유를 챙겨주는 걸까. 이제 누가 김장김치 맛 좀 보라며 슬쩍 디밀어주는 걸까. 이제 누가 대책 없이 비싼 설탕을 사려는 나를 말려주는 걸까. 마음은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우울을 과장했다. 나는 순식간에 비관론자가 되어버렸다.


망원동 비관론자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우울한 기운을 잔뜩 내뿜으며 터덜터덜 출근을 하던 아침이었다. 내 앞으로 차 한 대가 지나갔다. 트렁크 틈 사이로 커다란 나뭇가지 하나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심지어 거미줄까지 생생한 나뭇가지였다. 처음엔 칠칠치 못한 운전자라 생각했다. 그다음엔 무시무시한 상상이 이어졌다. 거미줄이 칠 정도로 운행을 안 한 자동차라면 무슨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저 트렁크 안에? 혹시 저 차 안에? 비관론자답게 별의별 비극을 다 상상하며 걸어가는데, 그 차가 섰다. 그러더니 운전하던 아주머니가 창문을 내리고 나를 불렀다. 좁은 골목길이라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도 없고, 대답을 하자니 뭔가 찜찜하고, 어째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 아주머니는 나를 다시 불렀다.


“차 타요.”

“네?”

“지하철 타러 가는 길이죠?”

“...네.”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줄게요.”

“네?”

“어차피 가는 길이에요. 얼른 타요.”


아, 어쩐다. 공포영화에서는 꼭 이럴 때 뭔 사달이 나던데. 나는 슈퍼 구석 목욕탕 의자에 앉았던 것처럼 다시 엉거주춤 차 뒤에 탔다. 어찌할 바를 몰라 등도 붙이지 못한 채로 앉아 있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한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말씀했다.


“우리 딸이 이 길을 그렇게나 지루해하더라고. 차로 가면 이렇게 금방인데.”


아주머니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지하철 역 앞에 배달해놓고 사라졌다. 마치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슈퍼 아저씨가 나를 집 앞에 배달해놓고 갔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맥주 박스들을 우리 집에 배달해주고,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던 것처럼. 그리고 정말로 고맙게도 아주머니는 내 마음속 비관론자까지 납치해서 떠났다. 웃음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자, 다시, 우리 동네, 좀 좋아해볼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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