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대로 산다

   
황상호
ǻ
이상북스
   
13000
2016�� 10��



■ 책 소개

 

서울을 벗어난 사람들
모두가 가는 길을 과감히 벗어난 사람들
그래서 더 행복한 사람들 이야기!

 

이 책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 CJB청주방송국 황상호 기자는 2013년부터 3년여 동안 충북 지역에 이주해 사는 14인의 예술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기자 명함을 떼고 생업이 아닌 다른 분야를 취재하러 다닌 것이다. “예술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고 한다. 또 지역 공동체 회복에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에 순수예술보다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들을 만나 그들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귀 기울여 들었다. “두려움을 이겨 내고 대안을 선택한 사람들의 말 속에는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의 온갖 핑계와 잡념을 털어 낼만 한 죽비 한 자루씩은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 과소비하지 않고 간소하게 사는 것, 진짜 나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아 충분히 만끽하며 사는 것.

 

좁디좁은 서울 안에서 밀려날까 두려워 과도한 경쟁과 속도로 물신주의에 흠뻑 젖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다른’ 삶도 있음을 슬며시 보여 준다. 그래서 더 행복한 여러 삶의 모습을 제시한다. 마음 한켠에 또 다른 삶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대안을 알려 준다.

 

■ 저자 황상호
2010년부터 CJB청주방송국 사회부에서 일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허술한 민간단체보조금을 집중 취재해 2015한국민영방송대상 네트워크 기자상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외국인보호소에서 버젓이 발생한 이주노동자 폭행사건을 취재해 한국기자협회가 선정한 이달의기자상을 받았다. 공동 집필한 르포 《벼랑에 선 사람들》은 한국인권재단이 선정한 2012올해의인권책으로 꼽혔다.

 

경상도 울산 출신이지만 ‘우리가 남이가~’ 정서가 싫어 거처할 곳을 찾다 연고 없는 충청도에 정착했다. 주로 소맥을 마시는 데 여가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꾸역꾸역 살고 있다. 철학가를 흉내 내며 길고양이 새끼를 기르고 있는데 예상과 달리 우애가 깊지 않다. 고민이다.

 

■ 사진 유순상
제천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공부했고, 현재 충주에서 화실을 운영하며 아들 병헌을 키운다. 이것저것 관심이 많지만 문화예술 쪽에 애착이 크다. 요즘 관심사는 ‘도시재생’, 다 같이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주제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매일 나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산다. 답은 늘 좇아가면 달아나지만.

 

■ 차례
저자 서문: 그들을 만나 행복했다

 

1 욕망의 도시를 벗어나 새 꿈 펼친 ‘흙수저’ 아티스트
_청주시 수암골의 림민 작가
2 죽다 살아난 이 남자의 선택!
 _충주시 동량면 인형극단 ‘보물’의 김종구 대표
3 ‘확 깨는’ 그의 시, 이렇게 만들어졌다
_제천시 백운면 원서문학관의 오탁번 시인
4 호주제 없앤 ‘꼴통 페미’가 동학에 꽂힌 이유
_옥천군 청산면의 한의사 고은광순
5 이 책 인세로 술 마시고 저 책 인세로 쌀 사면 된다
_제천시 덕산면의 만화가 이은홍
6 우리 마을 통장님, 알고 보니 미술 작가
_청주시 사직동의 653예술상회 이종현 작가
7 ‘수묵 누드’ 개척한 그녀의 그림 인생
_충주시 동량면의 화가 문은희
8 쾌락이 있고 예술이 꽃피는 시골 만화방
_괴산군 문광면의 탑골만화방 양철모 작가
9 예쁜 꽃밭 그리려고 한갓진 농촌에 살아요
_충주시 엄정면에 사는 그림책 작가 정승각
10 주류 전통음악에서 뛰쳐나온 소리계의 펑크 로커
_충주시 신니면의 경서도소리꾼 권재은
11 ‘천년의 세월’을 머금은 종이를 뜨다
_청주시 문의면의 공예가 이종국
12 자계예술촌에서 벌어지는 ‘그믐달의 들놀음’
_영동군 용화면의 박창호 예술감독
13 비바람 속에서도 뒷마당을 묵묵히 지키던 장독처럼
_청주시 오송읍의 박재환 옹기장
14 가난한 예술가와 활동가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곳
_괴산군 칠성면의 숲속작은책방

 

추천의 글 행복의 역설 _ 도종환(시인, 국회의원)
변방의식을 일깨우는 _ 송재봉(충북 NGO 센터장) 




내 뜻대로 산다


확 깨는 그의 시, 이렇게 만들어졌다 _제천시 백운면 원서문학관의 오탁번 시인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간 박달도령과 그를 기다리다 상사병에 걸려 숨진 금봉낭자의 전설이 깃든 충북 제천시 박달재. 소나무 오종종히 서 있는 그 고갯길을 따라 백운면 애련리로 들어가다 보면 폐교된 백운초등학교 애련 분교를 고쳐 지은 원서문학관이 나온다.


폭설해피버스데이의 시인 오탁번은 10월 중순의 어느 날 원서문학관 마당에서 맨손으로 마늘밭 거름을 섞고 있었다. 시어를 엮어 문장을 만드는 글쓰기처럼 농사도 정성이 있어야 한다. 지난 2003년 이곳으로 귀향한 오 시인은 이웃 농부들에게 흙을 일구고 비료 쓰는 법을 귀동냥해 가며 텃밭을 가꾼다. 농사가 주는 기쁨은 수확이 다가 아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말처럼 자연과 어울리며 깨닫는 신비로움이 크고, 그것은 곧 시가 되었다.


문학청년에서 풍자와 해학의 시인으로

그의 글 실력은 원주고등학교 시절부터 빛을 발했다. 청소년문예지 《학원》에 시와 산문이 여러 차례 실렸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시 걸어가는 사람으로 학원문학상을 받았다. 《고대신문》 기자를 하던 스물네 살 때는 동화 《철이와 아버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으로 입상했다. 군 입대를 앞두고는 소설 《처형의 땅》으로 등단했다. 동화, 시, 소설 등 세 장르에서 모두 싹수를 보였던 셈이다. 이후 《손님》《우리 동네》등 시집 8권, 《현대시의 이해》《헛똑똑이의 시 읽기》등 평론집과 산문집을 다수 발표했다. 1997년에 시 백두산천지로 제9회 정지용문학상을 받았고, 2008년에는 38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인터뷰 도중에 전화가 걸려 왔다. 충북 청주의 한 신문사에서 문화행사의 시 낭송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사양할 듯 하다가 결국 약속을 잡는다. 오탁번의 시에는 특유의 천진함과 자유, 유머가 넘친다. 그래서 전국의 시 낭송회에 자주 초대된다.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폭설) 등 눈치 보지 않는 표현들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박현수 경북대 국문과 교수는 "오탁번의 익살은 삶의 틈새를 진솔하고 자유롭게 오가는 시원시원한 행보에서 시작한다"고 평했다.


"내가 원래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지. 어렵게 자랐지만 유년 시절부터 장난기가 많았어. 시란 것이 이념이나 사상을 담기엔 한계가 있지. 서동요나 헌화가를 봐. 다 놀이면서 시잖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슬프게 탄식하는 소리는 웃음소리와 닮았어. 허허를 생각해 봐."


오 시인은 젊은이들이 문자메시지 등을 쓸 때 애용하는 이모티콘(그림문자)이나 특수문자도 시에 자유롭게 활용한다. 체면과 규범에 갇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국어사전을 베개처럼 안고 산다고 한다. 홰친홰친(낚싯대에 물고기가 걸린 것처럼 탄력 있는 물체가 흔들거리는 모양새), 다람다람(물방울 따위의 자그마한 물건들이 잇따라 매달린 모양), 눈흘레(눈요기로 상대를 보며 성교하는 일을 상상하는 것) 등 잘 모르던 우리말을 찾은 날엔 위스키 한 잔 원샷하고 산삼 찾은 심마니마냥 동네를 쏘다닌다고 말한다.


오 시인은 향수의 시인 정지용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 민중시가 유행할 때도 대학에서 서정주 시론을 강의했다. 제자에게는 통영 고향의 시인 백석을 연구시키기도 했다. 서정시를 가르치면 비겁자로 몰리기도 했던 시대였다. 학생들에게 비난을 받은 일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일부 진보 성향 시인들이 대자보처럼 시를 쓰는 게 못마땅하다고 말했다.


"민중시의 치열성은 의의가 있다손 치더라도 대자보의 격문과 다를 게 없어. 나는 언제나 문학 작품으로 현실을 다룰 때는 그 현실조차 문학의 일부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문학의 위쪽이거나 혹은 아래쪽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거든."


오 시인은 수도여자사범대학을 거쳐 서른여섯 살부터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일했고, 2008년 8월 정년퇴임했다. 교수라는 안정된 자리에서 작품 활동으로 상도 타고 하니 문단의 시기와 질투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밤새 고민하며 써낸 시를 "가벼운 재주 자랑"으로 폄하하는 시선에 가슴앓이도 많이 했다. 하지만 세월은 그 모든 것을 지나가게 만들었다.


전생의 꿈을 꾸듯 찾아온 고향

오 시인은 지난 2003년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의 부지와 건물을 샀다. 자신이 다니던 국민학교의 분교다. 교실 세 칸과 숙직실, 안채를 손보아 아담한 문학관을 만들었다. 제천과 원주 일대를 둘러보다 결국 삶의 밑변이었던 천등산 박달재 아래 자리를 잡았다. 문학관의 이름은 원서헌(遠西軒), 제천에서도 먼 서쪽이라는 뜻의 조선시대 지명이다. 해가 지는 곳이다.


"서방정토(불교에서 말하는 서쪽 끝의 극락세계)의 심상이 떠오르게 하지. 서쪽은 해가 기우는 쪽으로 몰락을 의미해. 그런데 소멸은 곧 생성의 출발이기도 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먼 서쪽이라는 뜻의 원서라는 이름이 그윽하고 좋게 다가왔어."


원서문학관은 누구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와서 둘러보고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다. 오 시인은 매년 여름방학이면 지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무료 어린이시인학교를 열고 각지에서 온 시인들이 자원봉사를 했다. 또 원서문학관 시의 축제를 통해 야생화와 농부, 모국어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오 시인은 이제 학생들보다는 시 선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혼자 이 모든 일을 하려니 작은 몸뚱이가 힘겨워. 요즘 시 교육이 엉망이거든. 교육자들을 상대로 재교육을 하고 싶어. 그게 내 역할이기도 하고."


전생의 꿈을 꾸듯 찾아온 고향에 손윗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오 시인은 젊은 시절 라라(《닥터지바고》의 여주인공의 이름)라고 불렀던 아내 김은자 교수(한림대 국문과)와 함께 이곳에서 느린 삶을 즐길 생각이다. 텃밭에 심은 채소와 함께 고기를 구워 먹으며 정겨운 손님들과 두레반(둘러앉는 밥상) 밥냄새를 풍기며 살고자 한다.



예쁜 꽃밭 그리려고 한갓진 농촌에 살아요 _충주시 엄정면에 사는 그림책 작가 정승각

봄에 태어난 아이 춘희. 춘희는 엄마가 덮어 준 이불 아래 누워 지낸다. 유리가루처럼 반짝이는 아침 햇살과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왕버들을 창 너머 올려다본다. 아빠는 일본 군수공장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엄마가 실종된 아빠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왔지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졌다. 1945년 8월이다.


그때 춘희는 엄마 뱃속에 있었다. 세상은 하얗게 불타 검게 바스러졌다고 한다. 춘희는 그 땅에 구겨진 몸으로 태어났다. 재일조선인 원자폭탄 피해자의 아픔을 담은 그림동화책 《춘희는 아기란다》가 2016년 4월에 출간됐다. 이 책의 그림을 그린 정승각 작가를 충주시 엄정면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림책 작가로 걸어온 길

정 작가가 동화책에 눈을 뜬 건 1980년대 대학 시절로, 지인이 부탁으로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의 수해 지역 아이들과 벽화를 그리면서부터다. 당시 그 동네는 개천보다 지대가 낮아 장마 때면 으레 수해를 입었다. 작가는 미술학원을 하는 선배에게 쓰다 남은 몽당 크레파스를 얻어 와 아이들에게 그림 수업을 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정 작가의 지도 없이도 거침없이 그림을 그렸다. 원근법에 구애받지 않고 느낀 그대로 그렸다. 작가는 "아이들의 그림을 보고 망치로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흙바닥에 앉아 수해복구용 스티로폼에 종이를 올려 두고 그림을 그리더라고요. 크레파스를 갖고 천둥 치고 비가 내리는 장면을 막 그려 내는 거예요. 이건 누가 봐도 물난리가 난 현장이에요. 가르칠 필요가 없었죠. 전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나는 석고상을 그려서 겨우 미대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은 으악 하고 토해 내듯 그리더라고요."


작가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에서 받은 충격과 순수미술의 경제적 한계를 고려해 그림책 작가로 진로를 정했다. 그리고 출판사를 찾아다녔다. 1988년, 한 출판사의 공모전에 처음 당선돼 아동문학가 권정생의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의 삽화를 그렸는데, 우여곡절 끝에 8년 만에야 책이 나왔다.


그뒤 권정생 선생의 원고를 받아 동화그림책 《오소리네 집 꽃밭》과 《황소아저씨》 등을 그렸다. 다른 작가들은 권 선생의 원고조차 받기 어려웠지만, 오랜 인연을 맺은 권 선생은 정 작가에게 자신의 원작을 직접 동화 문장으로 고쳐서까지 원고를 만들어 주었다. 이 외에도 정 작가는 바보처럼 웃지만 일본 경찰에게 물러서지 않는 할아버지 이야기 《벌렁코 할아버지》와 동학농민운동을 그린 《새야 새야 녹두새야》 등 10여 권의 단행본을 그렸다.


"그림책 작가 수명이 평균 5년이에요. 한번 유행을 타면 서점에 무섭게 깔리지만 5년쯤 지나면 뭘 해도 진부한 것으로 취급받아 시장에서 사라지죠. 늘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터득해야 해요."


그는 초창기에 목판화와 어울리는 색을 찾기 위해 조선시대 민화를 공부했고, 동양화의 필치를 살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민요를 배웠다. 외양간 황소와 생쥐들의 우정을 그린 《황소 아저씨》를 그릴 때는 점토로 그림판에 돋을새김 부조를 뜨고 모시로 풀칠을 해 그림을 그렸다. 까슬까슬한 질감이 만져질 듯하다.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를 그릴 때는 고구려 벽화 속 사신의 압도적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탱화를 그리는 스님을 찾아가 비법을 전수받아 황, 청, 백, 적, 흑 등 우리 전통 오방색과 금박가루를 아교풀에 갠 금니(金泥)로 그림을 그렸다.


"서양화 데생 기술이 좋다고 우리나라 외양간이나 농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전통 색과 전통 음악의 가락을 알아야 우리 것을 그릴 수 있죠. 선을 그리는 건 이성적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몸으로 그리는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민요도 배우고 장구도 치고 노래극도 해요. 그래야 우리만의 선이 나와요."


아이들 책은 문장도 다르게 써야 한다. 이 때문에 정 작가는 글 쓰는 작가가 원작의 문장을 그림책 문장으로 수정할 때 적극 관여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구급차 소리를 어른들은 삐뽀삐뽀라고 표현하지만 《춘희는 아가란다》에서는 번역가 박종진 씨와 의논해 "위용...웨용...위용...웨용"으로 썼다. 형용사 하나 상투적으로 따라 쓰지 않는다.


"아롱다롱 표현하는 동심 천사주의가 동화책을 망쳐요. 학습된 언어가 아니라 아이들이 처음 느낀 그대로 쓰도록 해야 해요. 아이들은 그림과 문자를 접할 때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만져 보고 냄새 맡아 보며 오감을 동원해 책을 느끼거든요."


꽃과 새를 그리려고 농촌에 산다

경기도 성남에 살던 정 작가는 1997년에 동시 쓰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충주시로 귀촌했다. 당시 외환위기의 여파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림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잠시 그림을 그리려고 충주 외가에 왔다가 눌러앉았다. 그때 탄생한 그림책이 《오소리네 집 꽃밭》.


"예쁜 농촌 꽃밭을 그리려고 한갓진 농촌에 왔어요. 그런데 제가 상상하던 꽃밭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꽃들은 우거진 풀들에 숨어 있었고 꽃송이는 생각보다 자그마했죠. 도감 속 들꽃과 현실 속 들꽃의 모습은 달랐어요. 꽃과 새를 그리려면 농촌에서 살아야겠구나 생각하고 귀촌했어요. 도시 생활로 누적돼 있던 빚에서도 해방됐죠."


작가는 오랫동안 어린이 문화운동을 하고 있다. 아이들과 도심 골목길에 벽화를 그리고 다양한 미술교육법을 개발해 아이들과 그림놀이를 한다. 전문 학위는 없지만 사단법인 공동육아연구원의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어린이집 교사들과 놀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또 서울과 부산, 충주 등의 각지 도서관을 돌며 교사와 학부모, 아이들에게 동화책과 어린이 교육법에 대해 강의를 한다.


"아이들은 그림이 보드라우면 책을 만져 보거나 볼에 갖다 대요.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도 하고요. 모든 감각을 동원해 느끼려고 하죠.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면 아이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알게 되고 제 표현력도 올라가요."



가난한 예술가와 활동가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곳 _괴산군 칠성면의 숲속작은책방

가을 끝자락, 굽이굽이 산길을 지나 사람이 살까 싶은 마을에 도착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의 발끝마저 보이지 않았다. 산짐승들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한 남자를 불렀다. 옅은 불빛과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숲속작은도서관 김병록 사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인 사정이 있어 인터뷰가 어렵다고 돌연 말했다. 나는 여러 사정을 들으며 미안한 표정으로 건네 준 그의 막걸리만 들이켰다. 다락방에서 하룻밤 꼴딱 새고 다음날 아침 소득 없이 발길을 돌렸다.


동화 속 장면 연상되는 가정식 서점

탈핵, 평화, 공동체 회복 등 개념 있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던 그 도서관은 그 뒤에도 가끔 생각이 났다. 그리고 몇 해 뒤 김 사장 부부의 소식을 신문과 방송에서 접했다. 부부는 중앙 일간지는 물론 지상파 9시 뉴스까지 출연해 인터뷰를 했다. 귀촌한 뒤 우여곡절을 겪으며 꿈을 경작한 이야기를 담은 책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를 출간하면서부터다.


사람보다 나무가 많고 가로등 불빛보다 별빛이 많은 곳, 충북 괴산군 칠성면의 숲속작은책방을 다시 찾아갔다. 그 사이 도서관 간판은 책방으로 바뀌었고 책을 읽는 공간은 책을 파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일반 전원주택으로 설계된 집은 약 620평방미터(188평) 규모에 나무로 된 낮은 담이 감싸고 있고 잔디밭 마당에는 인동초와 작약, 말발도리 등 야생초 50여 종이 오밀조밀 자라고 있다. 마당 한복판에는 숙녀의 손거울 같은 작은 연못이 있다. 프랑스 그림책을 본떠 만든 푸른 개 모양의 의자, 핀란드 동화 캐릭터 무민이 그려진 창고, 장미 넝쿨이 휘감고 있는 빨간색 철제문 등은 동화 속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숲속작은책방 대문 앞에는 이런 도발적인 글귀도 붙어 있다.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그러나 책 한 권은 꼭 사 가야 해요. 국내 최초로 가정식 서점을 연 김병록‧백창화 부부의 이야기는 이렇다.


책으로 마을 재생하기

서울서 나고 자란 김병록 사장은 현재 방송통신위원회로 통합된 종합유선방송위원회에서 1990년대 초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영화와 비디오의 등급을 결정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도 6년 동안 일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방송콘텐츠진흥재단의 초대 상임이사를 맡았다. 남들이 철밥통이라고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억대 연봉을 받고 일하던 시절이다. 당시 쓸 수 있는 판공비가 월 200여 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직에 구속받는 게 점점 싫어졌고, 정치권의 입김에 좌우되는 인사에 환멸이 느껴졌다.


귀촌을 위해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 백창화 씨는 15년 동안 여성잡지와 출판사에서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했다. 2002년부터는 경기도 일산에서 사립 도서관인 숲속작은도서관을 운영했고, 2009년 서울 마포구로 이사한 뒤에는 서울시 마포구립 작은 도서관 네 개를 위탁해 운영하기도 했다. 회원들의 후원금을 받고 부족한 돈은 남편의 월급으로 메꿔 나갈 만큼 도서관에 애착이 컸다.


김병록 사장의 상임이사 임기가 끝나고 백창화 씨의 도서관도 건물 임대계약 만료가 다가왔을 무렵,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미술평론가 정진국 교수가 쓴 《유럽의 책 마을을 가다》였다. 정 교수가 유럽 책 마을 스물네 곳을 1년 동안 탐방해 쓴 여행기였다. 시골 사람들이 헌책을 사고팔며 책으로 마을을 재생하는 이야기, 그 마을에는 시 낭송과 음악회 등 문화 콘텐츠가 가득했다.


"책을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부는 2010년 4월 이탈리아 로마를 시작으로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 4개국의 크고 작은 마을들을 탐방했다. 27일 동안 책 마을과 서점, 박물관 등 책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다녔다. 갈 곳 없는 작가들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 주던 프랑스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거대한 조형물부터 손바닥만한 엽서까지 수천 종의 피노키오 관련 상품을 만들어 파는 이탈리아 콜로디 피노키오 국립공원, 무너져 가는 성을 책 마을로 재생시킨 영국의 헤이온와이 등이 대표적이다. 어느 시장에 들렀다가는 좌판에서 파는 책 읽는 고양이 인형에 매혹되기도 했다. 모든 여정이 놀이이자 공부였다.


노는 듯 쉬는 듯 미친 듯 다녀온 유럽 여행은 2012년 《유럽의 아날로그 책 공간》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백창화 씨가 글을 쓰고 김병록 사장이 사진을 찍었다. 책은 전국의 작은 도서관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져 나가 얼마 전까지 3쇄 7000여부가 팔렸다. 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사업 공모에 당선되기도 했다.


귀촌의 출발점에서 쓴 잔을 마시다

귀촌을 결정하고 부부가 선택한 곳은 충북 괴산군의 미루마을로, 4만여 제곱미터 부지에 60여 가구가 입주하도록 새롭게 조성된 마을이었다. 김병록 사장은 처음 신문광고에서 이 마을을 봤다. 경기도의 한 대학 총장이 괴산군과 직접 협약을 맺은 사진과 함께 괴산군이 사업을 보증한다는 설명이 솔깃했다. 무엇보다 교육문화마을을 내세우는 취지가 마음에 들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귀촌의 별빛 꿈. 그런데 공사는 계속 지연되었다. 그 사이 서울 집주인이 집을 전세에서 월세로 바꾸었다. 도서관 임대 기간도 끝나 급하게 컨테이너 박스를 빌려 책 수천 권을 보관했다.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틸 수 없었던 부부는 2011년 6월 물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괴산 집으로 무작정 입주했다. 처음에는 생활이 되지 않아 한동안 인근 마을에 월세 방을 따로 임대해 지냈다. 게다가 운영하려던 마을회관 도서관이 시공사의 공사비 부족 등으로 준공이 안 나 무산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란 말이 딱 들어맞았다. 김병록 사장은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날품팔이에 나섰다.


이웃 농가를 도와 감자를 캐고 괴산댐에 가서 청소를 했다. 목수를 따라다니며 막일도 가리지 않았다. 이렇게 6개월쯤 지났을까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라도 가꿔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마당에 덤프트럭 세 대 분량의 마사토를 깔고 수평을 맞췄다. 공사하고 남은 나무를 모아 꽃밭을 만들었다. 서툰 목공 기술을 동원해 오두막을 지었다. 1천 만 원이 넘게 들 거라고 추산했던 오두막은 재료비 150만 원을 들여 혼자서 만들었다.


책 좀 파는 판매의 기술, 기승전 책 사

괴산군 미루마을은 화석에너지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그린에너지 마을이다. 주변 농가들도 농약을 잘 쓰지 않아 여름밤이면 반딧불이가 들판을 수놓는다. 가로등도 거의 없어 해만 지면 별빛이 쏟아진다. 김병록 사장은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오두막에 일부러 전기를 가설하지 않았다. 캠핑용 의자와 해먹도 설치했다. 가을에는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겨울에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주인장은 손님과 아침 또는 저녁을 같이 먹는다. 이때 손님의 "취향을 저격해" 책을 추천한다. 이는 백발백중 책 판매로 이어진다. 판매하는 책은 대부분 생태와 환경, 평화에 관한 것들이다. 부부가 시골로 내려온 이유도 그것이고, 시골 서점을 찾아온 손님들이 대부분 공유하는 관심사이기도 하다. 비장의 무기인 플립북(연속된 그림을 빠르게 넘기면 애니메이션 효과를 내는 책)과 팝업북(책을 열면 그림 등이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책)을 펼치며 손님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우리 집 손님은 오시면 책을 한 권만 사 가지 않아요. 어차피 괴산까지 오기 힘드니까 양손 가득 보따리로 사 가죠. 우리 부부와 대화의 끝은 대부분 책을 사 가라는 거예요. 기승전 책사죠."


숲속작은책방의 거실과 안방, 다락방에는 2만여 권의 책이 진열되어 있다. 굳이 책장이 아니라 신발장과 다락방, 계단 등 자투리 공간에도 책이 많이 쌓여 있다. 특히 거실은 3미터 넘는 책장이 둘러싸고 있다. 대부분 부부가 직접 읽고 고른 책이다. 종교인과 의료인 등 각계 전문가들이 추천한 책도 있다. 상당수가 대형 서점이나 온라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소성 있는 책들이다.


이 책방의 가장 큰 특징은 책에다 손글씨로 쓴 띠지를 붙이는 것이다. 띠지는 출판사들이 책 홍보용으로 쓰는 일종의 광고지다. 그런데 백창화 씨는 일일이 손으로 책 소개 글을 써서 띠지로 둘렀다. 손님들이 이것을 기념품처럼 가져가기 시작했다. 손글씨가 귀한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먹힌 것이다. 이제 띠지를 만드는 것이 백창화씨의 중요한 하루 일과가 되었다.


동네 작은 서점의 존재 의미

2015년 8월에 출간한 책 《작은 책방, 우리 책 좀 팝니다!》에는 이런 자신들의 이야기와 함께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의 위세 속에서 자기만의 길을 모색하는 전국 70여 개 작은 서점들의 분투기가 담겼다. 부부는 작은 서점들을 직접 돌아보고 전국 책방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그림지도와 민박이 가능한 책 공간을 묶은 전국 북스테이 지도를 만들어 넣었다. 서울과 청주, 대구, 대전 등의 작은 서점을 돌며 북 콘서트를 하고 있다.


"대형 서점만 있으면 팔리는 책만 팔리고, 또 그런 글을 쓰는 작가만 살아남아요. 악순환이죠. 다양한 책이 살아남으려면 작은 서점이 살아야 합니다. 동네 서점에서 책 한 권 사는 일이 전체 문학을 살리는 나비의 날갯짓이 될 수 있지요."


부부는 분기별로 책방에 지역 시립합창단 등 음악가들을 불러 콘서트를 열고 한 달에 한 번 책모임도 한다. 시인과 주민을 초청해 시 콘서트도 열었다. 행사가 있으면 마을 부녀회가 음식 준비 등을 돕는다. 또 일본 헌책방 거리와 연계해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그림책도 소개할 계획이다.


"곧 아들도 군에서 전역하고 십 수년 뒤 우리 노후가 걱정되기는 하죠. 그런데 지금 저희가 상상도 못했던 서점을 만든 것처럼 미리 불안해하지 않으려고요. 현재에 집중하려고요. 낯선 이를 냉대하지 않는 곳,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룻밤 잠과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시민 활동가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공간 하나쯤 필요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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