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작가 최인호가 40년간 적어 내려간
딸의 이야기 그리고 그 딸의 딸에 대한
12년 사랑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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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인호가 40년간 적어 내려간 딸의 이야기 그리고 그 딸의 딸에 대한 12년 사랑의 기록. 『나의 딸의 딸』은 작가이기에 앞서 한 아버지며 할아버지인 최인호가 딸과 손녀에게 전하는 가슴 벅찬 사랑과 감사의 고백이다. 그것은 또한 딸과 손녀를 이야기의 축으로 삼아 한 가족의 40년 세월을 기록한 장려한 가족연대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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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면 이 책은 그저 그런 개인의 회고담이나 추억담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수시로 묻는다. ‘내게 온 너는 누구인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으로 알 수가 없구나.’ 그 물음은 삶의 불가해성을 향한다. 그것은 딸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삶의 지속,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만난 너와 나의 인연의 신비에 대한 경탄이자 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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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총 2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작가의 딸 다혜의 탄생에서부터 유치원 입학, 초중고 시절, 대학교 입학과 졸업, 결혼, 신혼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무려 40년에 이르는 세월을 사랑과 경이로움의 시선으로 기록해나간 이야기다. 2부는 다혜가 딸 정원이를 낳으면서 시작해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는 12년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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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최인호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63년 단편소설 『벽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되고, 1967년 단편소설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2년 단편소설 『타인의 방』으로 현대문학신인상을, 1982년 『깊고 푸른 밤』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1985년 배창호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면서 큰 흥행을 이루었다. 1998년 장편소설 『사랑의 기쁨』으로 한국가톨릭문학상을, 2003년 중편소설 『몽유도원도』로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에는 암 투병 중에 집필한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로 “후기 산업사회가 초래한 자아상실과 분열, 망각과 착란 등 현대인의 총체적인 초상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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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가 산업화되어가면서 발생한 문제들을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한편, 도시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설 속에 치밀한 심리묘사와 극적인 사건을 갖추어 소설의 대중성을 확대시켰다. 1970년대 대중문화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그의 소설들은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고래 사냥』(배창호, 1984), 『겨울 나그네』(곽지균, 1986) 등으로 영화화되면서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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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타인의 방』 『잠자는 신화』 『영가』 『개미의 탑』 『위대한 유산』,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 『도시의 사냥꾼』 『지구인』 『잃어버린 왕국』 『길 없는 길』 『왕도의 비밀』 『상도』 『해신』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제4의 제국』 『유림』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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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최다혜
1972년 최인호의 딸로 태어났다. 서울예고와 이화여대 서양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Eastern Michigan University, College of Arts and Sciences에서 석사학위 Master of Fine Art, M.F.A를 받았다. 국내는 물론 미국과 중국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연 바 있으며 현재 화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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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1부 나의 딸
2부 나의 딸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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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딸의 딸
나의 딸
아무래도 아이들이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부모들의 입버릇도 따지고 보면 거짓말인 것 같다.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저 꼴등이나 면하고 딴 아이들한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따라가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워낙 몸이 약한 딸이라 지진아나 미숙아처럼 열등생이나 되지 않고 따라와 준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고 아내 역시 말하곤 했었다.
위태위태하게 다혜는 늦게 입학한 학교생활을 용케도 따라가더니 제법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는 모양인지, 서너 달 지난 뒤부터는 일곱 시 반이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고 이 닦고 책가방 챙겨서 학교 가곤 해서 내심 기특하다고 느끼곤 있었는데 2학기 들어가고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공부가 내가 봐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어려워진 것이다. 내 자신 지난 세월을 돌이켜봐도 초등학교 삼, 사 학년 때나 배웠을 내용의 어려운 학과목을 이제 불과 일 학년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것이다.
숙제도 늘어 딸아이는 학교에 갔다 오면 서너 시간 숙제에 매달려 있다. 측은하긴 하지만 그런 일상생활에서 의무와 책임을 배워나가는 교육의 연장이고 보면 함부로 도와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시험성적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늘 떠들고 다니고 있긴 했지만 막상 딸아이의 시험지를 펼쳐들었을 때 두 개, 세 개가 틀린 것을 확인하면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곤 했었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백 점이 만점이므로 언제나 백 점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빛나는 과거를 가진 나로서는 시험지마다 두 개 혹은 한 개, 많을 땐 세 개, 네 개, 운이 좋아야 백점 맞는 딸아이의 점수가 못내 못마땅하기만 했었다.
처음엔 참고 내색을 하지 않기는 했었다. 해놓은 말도 있으니 이 정도면 어디냐 그저 고맙고 다행이지 하고 자위를 하곤 했지만, 한 번 두 번 반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딸아이의 그런 성적이 나를 닮지 않고 지 어머니의 나쁜 머리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사실 아내가 머리 나쁘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다만 아내는 노력형이고 나는 하나만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천재형인데 딸아이가 나를 닮았다면 치사하게 하나, 둘 정도 틀리는 시험지를 받지도 않을 거라는 울분 같은 것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혜를 불러 조용히 타일렀다.
"다혜야. 이 애빈 니 나이 때 늘 백 점만 맞았다. 그런데 이게 뭐냐. 넌 언제나 두, 서너 개 틀리지 않니. 난 막 화가 난다. 화가 나서 이빨이 갈린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아내와 다혜는 아침마다 전쟁을 벌였다. 아내는 잔인한 가정교사 노릇을 시작한 것이었다.
아내의 스파르타식 교육에 한마디 불평하지 않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외우고, 암기하고 복습하는 딸아이의 창백한 얼굴을 보니 아아, 이것이 전쟁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생존경쟁이라는 것이로구나, 모른 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시간이 모자라 아내가 딸아이를 차에 태우고 학교에까지 가는 짧은 시간에도 못다 한 공부를 달달 시키는 것을 보고, 또 그것을 한마디 불평하지 않고 따라가는 딸아이를 보고 나는 돈 안 주고 가정교사 한 명 고용한 것 같은 수전노처럼 싱글벙글거리기만 했었다.
마침내 다혜는 방학 전 학력평가고사에서 두 개만 틀리고 모조리 백 점을 맞는 경이적인 성적을 올렸다.
"아빠, 나 백 점 맞았다아-." 뛰어들어오는 딸아이의 손에 시험지가 자랑스레 나풀거리고 있었다. 마치 챔피언을 꺾고 새로 챔피언이 된 홍수환 선수가 제 어머니에게 고함을 치르듯.
나는 대한민국 만세라는 말 대신 우리 다혜 만세다라며 아이를 얼싸 안았는데 그날 밤 아내는 아이들을 먼저 재우고 나서 손톱에 묻은 매니큐어를 지우고 있다가 불쑥 내게 말을 꺼냈다.
"왜 다혜의 시험공부에 대해 악착같이 덤벼들었는지 알아요? 이런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내 나이 여섯 살 때 아니면 일곱 살 때였겠죠. 역에 차가 설 때마다 사람들은 물을 갖고 나가서 팔았지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물을 한 그릇 들고 기차 옆으로 걸어갔지요.
그리고 그저 앉아만 있었어요. 그때 웬 큰 남자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내게 물었어요. 얘, 꼬마야 너 그 물 팔 거냐, 네, 하고 내가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그 사람은 웃으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곤 그 물을 단숨에 들이켰어요. 그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지요. 맛있었다 아가야, 네 물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물이었다."
아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났어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그 기억하고 다혜 공부시킨 것 하구 무슨 상관이야?"
"모르겠어요. 그때 나이랑 지금 다혜 나이랑 비슷하구 갑자기 그 애가 맏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지금도 아내의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자세히 모른다. 다만 동시대를 보낸 나이로서 어렴풋이 헤아려 짐작이 될 뿐이다.
***
지난봄의 일이니깐 벌써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우리 집 작은 뜨락에도 꽃나무들은 제법 있어 해마다 봄이 오면 늘 목련꽃부터 피기 시작하는데, 나는 이놈의 목련이 필 무렵이면 이상한 느낌을 받곤 한다.
목련꽃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왠지 귀기(鬼氣)가 어려 있다. 한밤중에 목련꽃을 보면 왠지 마음이 섬뜩해진다. 무슨 상복을 입은 여자 같기도 하고, 종이로 만든 조화 같기도 하고, 승무를 추는 여인의 머리에 씐 고깔 같기도 하고, 잘 빨아 널어 말린 버선짝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해마다 그런 느낌을 받곤 하다가 올봄에 나는 왜 목련꽃이 섬뜩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오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목련꽃이 만발하지만 나무엔 푸른 이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릇 꽃이란 푸른 잎과 어울려야 빛나고 아름다운데, 잎은 전혀 없고 앙상한 가지에 솜사탕 같은 풍성한 꽃들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니 꽃 같지 않고 종이로 만든 조화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아, 그것 참, 왜 목련에는 잎이 없을까.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마침 영화감독을 하는 배창호가 옆에 있다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 내게 그 이유를 가르쳐주었다.
"형, 봄에 피는 꽃은 잎이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 역할을 하니까요."
"어째서?"
나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곽지균이 설명을 해주었다.
"봄에 피는 꽃들은 모두 이파리보다 꽃이 먼저 핀다구요.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모두 보세요. 꽃이 활짝 폈다가 지고 나야만 잎이 무성하게 자라나잖아요."
아아, 그렇구나. 봄꽃은 잎을 무성하게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 피어나는 전야제의 꽃이다. 그렇다면 여름의 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피어나는 꽃이 아닌가. 그렇다면 또 가을에 피는 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씨앗을 보존하기 위해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렇다. 나무마다 피어나는 꽃들도 다 제각기 나름대로의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향기로운 꽃가루와 달콤한 꿀로써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몫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봄에 피는 꽃이 성급히 열매를 맺으려 하면 그 나무는 스스로 시들어갈 것이요, 봄에 피는 꽃이 느닷없이 씨앗을 남기려 한다면 스스로 잎이 마르고 죽어가게 될 것이다.
나는 요즈음 딸아이를 볼 때마다 그 목련꽃을 느끼곤 한다. 다혜는 계절로 치면 4월의 초봄에 접어들었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사춘기의 소녀가 되고 있었다.
차츰 부모에 대한 불만이 많아지더니, 특히 제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전에는 안 그러더니 제 어머니가 뭐라고 꾸중을 하면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고 덤벼들고 어떤 때는 울면서 제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를 지르면서 울기도 한다. 전에 없이 고집을 부리고 떼를 쓰고 신경질을 부린다. 이른바 사춘기적 증상이 만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요사스런 봄꽃이 만발하고 난 뒤, 그리고 어느 순간 일순에 끝나버린 연극의 막처럼 봄꽃이 하염없이 지고 나면 다음에는 청춘의 신록들이 눈부시게 무성히 자라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혜의 사춘기적 증상은, 신경질은, 말대꾸는, 불만은, 분노는 신록을 무성하게 하기 위한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그 꽃잎이 피었다가 지기까지 본인은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이며, 제 어머니는 얼마나 전전긍긍 쩔쩔매게 될 것인가.
아내는 이제 겨우 봉오리에 불과한 딸아이의 히스테리 증상에도 쩔쩔매고 있다. 학교 갈 때마다 아내는 마치 딸아이의 하녀처럼 비굴하게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고 있다.
그뿐이랴.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중․고등학교 학생을 자녀로 가진 부모들의 고통스러운 하소연을 여기저기 신문․잡지에서 보고 들은 것은 많지만, 막상 내 딸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 되고 나니 이 나라 교육제도가 왜 이런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무서운 지옥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바로 생지옥이다. 시험 때면 12시에 잠들고 4시에 일어난다. 온 집안이 딸아이의 시험 준비에 신경이 곤두세워진다. TV가 무엇이랴.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나서도 물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공부하고 나서도 좋은 석차가 못 되는 모양이다. 평균 90점에 가까운데도 열 손가락 안에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건 정말 해괴하고 이상한 일이다.
문제는 이 생지옥이 앞으로 6년간 계속된다는 것이다. 아아, 이 6년 동안 아내와 나는 폭삭 늙겠구나. 부부싸움도 제대로 못하겠구나. TV도 못 보겠구나. 아니다. 아들 녀석까지 함부로 화장실에서 오줌도 못 누겠구나. 문도 소리 내어 여닫지 못하고 집 안을 생쥐처럼 살금살금 기어 다니겠구나.
아아, 그렇다. 우리 다혜가 이제 봄나무가 되었다. 사춘기의 광기 어린 꽃봉오리가 툭툭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고 있다. 이 꽃이 만발하고 났다가 속절없이 지고 나면 다음엔 청춘의 실록이 우거질 것이다.
그러나 그 꽃이 만발했다 질 때까지의 긴 세월 동안 이 죄 없는 애비와 에미는 얼마나 속을 태우고 늙어갈 것인가.
바라옵건대 신이시여, 짓궂은 바람 건 듯 불게 하지 마옵시고 못된 벌레 아예 멀게 하옵시고 그저 부드러운 햇볕과 따뜻한 봄비를 때맞추어 주옵시고 때가 만발하게 피었다가 경우 바른 손님처럼 미련 없이 훨훨 옷깃 떨쳐버리고 가옵시게 두루 보살펴주옵소서. 그리하여 눈부신 신록을 딸아이의 몸과 마음에 가득가득 피어나게 하옵소서.
나의 딸의 딸
요즘 자주 듣는 인사말 중의 하나가 "왜 그렇게 젊으세요?"라는 말이다. 최근에 낸 책이 반응도 좋아, 될 수 있는 대로 오라는 방송국이나 신문사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의 첫마디가 왜 그렇게 젊으세요라는 인사말이다.
대부분 십여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이니 인사치레로 그렇게 말을 하는 줄 알았는데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 듯 그렇게 인사를 하는 걸 보면 내가 젊어 보이기는 젊어 보이는 모양이다.
하기야 나도 이제 쉰 살도 훨씬 넘었으니 하루로 말하면 오후 서너 시쯤 되었을 거고, 계절로 말하면 만추의 가을이고, 인생으로 말하면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는 노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젊어서부터 일찍 문학활동을 하였고 한때는 본의 아니게 청년 문화의 기수로까지 불려져 나에겐 청년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래서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도 내게서 청년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최근 내가 아무리 청년 행세를 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노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한 달 전에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10월 25일 다혜가 딸을 낳았다. 나의 딸이 딸을 낳았으니 나는 외손주를 얻은 것이고 졸지에 외할아버지로 퇴출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출산 예정일보다 열흘 정도 아이가 일찍 태어나 부랴부랴 아내가 조산을 하러 미국으로 떠난 후 한 달 넘어 아들 녀석과 홀아비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할아버지가 됐다는 사실에 영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이 좋아져서 아들 녀석의 인터넷으로 외손주의 사진이 전송되어 왔다. 컬러 프린트가 안 되어 흑백으로 프린트가 된 사진을 받아 내 서재의 책상 위에 놓아두고 오며 가며 들여다보곤 한다.
배내옷을 입고 두 팔을 벌리고 털모자를 쓴 아이의 얼굴은 꼭 동화에 나오는 엄지공주 같다. 오며 가며 그 사진이 눈에 띄는데 그럴 때면 나는 소리 내어 손주의 이름을 불러보곤 한다.
"정원아 정원아, 야 임마 성정원."
그러면 저절로 웃음이 떠오르고 나는 혼자서 "하하하 헤헤헤 히히히 호호호" 갖은 발광을 하면서 웃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웃음이 나오려면 기쁘다는 감정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감정이 없이 자꾸 비눗방울 거품처럼 웃음이 나온다.
몇 달 전 황순원 선생님의 영정을 서울대학교 영안실에서 보았을 때는 슬프다는 감정이 없이도 계속 눈물이 솟아나와 난처했던 적이 있었다.
이처럼 슬프다는 감정이 없이도 눈물이 나오고 기쁘다는 감정이 없이도 계속 웃음이 나오는 것을 보면 나야말로 이제 롱펠로우의 시처럼 타다 남은 장작개비란 말인가. 훨훨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 식어빠진 잿더미란 말인가.
우연히 만났던 한국일보의 장명수 사장에게 그 말을 했더니 대뜸 "그것은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슬픔을 느낄 겨를이 없이 눈물이 나오고 기쁨의 감정이 없이 웃음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자연에 가까워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마침내 한 달 만에 아내가 미국에서 돌아왔다. 사위가 찍어 보내준 비디오를 둘려가면서 보았다. 나는 그 비디오를 보면서 문득 에이브러햄 링컨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내 할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보다 나는 나의 손자가 무엇이 되려는지 그것이 더 궁금하다."
그렇다. 난 내 할아버지의 모습도 할머니의 모습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내 앞에 놓인 저 손주 녀석의 모습인 것이다. 저 아이는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모르지만 알 수 없는 저 신비한 곳에서 이 지상의 세계로 던져져 우리 가족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제 나는 남은 인생을 링컨의 말처럼 내 손주가 무엇이 되려는지를 궁금하게 지켜볼 것이다.
청년 할아버지. 그것이 요즘 내가 내 스스로에게 붙인 별명이다. 청년 할아버지인 나는 갓 태어난 손녀딸을 통해 되풀이되는 인생의 모습 모습을 궁금하게 지켜보면서 보다 많은 것을 배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내 딸 다혜가 이제 자신을 닮은 딸을 낳았다. 아아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들은 누구이길래 이렇게 서로 가족을 이루고 한때 만났다 헤어져 어디로 돌아가는가. 참으로 알 수가 없구나.
***
우리 집에도 시간이 멈춰버린 방이 하나 있다. 이사를 한 지 6년째가 되어가는데도 아직 커튼도 없고, 변변한 가구도, 벽에 걸린 그림조차 없어 썰렁한 연극 세트와 같은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장식된 것은 정원이의 물건, 낙서 그리고 정원이가 쓴 편지들이다.
정원이가 두 살 때 그린 그림부터 방학 중에 올 때마다 장난삼아 끼적인 낙서, 유리창에 붙인 스티커, 가구 위에 쓴 수성볼펜 흔적, 학교 운동장에서 주워온 돌멩이 등 정원이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아내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거실 벽면에 붙여놓거나 진열장 속에 보관해둔다.
하다못해 신문지를 구겨서 만든 종이 슬리퍼, 주워온 자갈들 위에 그린 웃는 모습의 장난감 등도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와 나는 정원교를 믿는 토테미즘의 맹신자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집은 성정원의 모든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시간이 멈춰진 갤러리인 것이다.
2주 전이었던가, 토요일 날 성당에 들러 특전미사를 끝내고 전 가족이 단골 중국집에 모인 적이 있었다. 그날 정원이는 자신의 지갑을 들고 오더니 전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은 내가 저녁을 살 거야. 그러니까 먹고 싶은 음식 마음대로 먹어. 그 대신 하나도 남기면 안 돼."
아내는 알고 있었다. 정원이의 지갑 속에는 만 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음을. 자신이 만든 액세서리를 팔아 푼푼이 모은 돈이었다. 외출하기 전 정원이가 아내로부터 잔돈을 만 원짜리 한 장으로 바꾸어두었다는 것이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나는 화장실 가는 척 일어서서 미리 계산을 했다. 그리고 계산을 하는 여직원에게 귀띔을 해두었다.
"조금 있다가 우리 손녀가 계산을 할 텐데요. 얼마예요 하고 물으면 무조건, 무조건 만 원이라고 대답해주세요." 여직원은 알겠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모든 식사가 끝나자 정원이가 호기롭게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계산을 마친 정원이는 윤정이의 손을 잡고 함께 가기 위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틈을 노려서 내가 여직원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주면서 이 돈을 갖고 있다가 우리 손녀가 지나가면 이렇게 저렇게 말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눈치 빠른 여직원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가족들은 식탁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언니 정원이는 동생 윤정이와 다정히 손을 잡고 음식점을 걸어 나왔다. 그때였다.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정원이를 불러 세웠다.
여직원은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면서 말했다.
"왜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가셨어요. 자, 여기 있습니다. 잔돈이요."
나는 그때 정원이의 얼굴에서 기쁨으로 가득 찬 하늘나라를 보았다.
그날 밤 돌아오는 차 속에서 정원이가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하느님이 제일 좋아."
"왜" 다혜가 물었다.
"우리를 지켜주시니까, 그리고 또 우리 가족을 만들어주셨으니까."
문득 박목월의 시 가정이란 작품이 떠오른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후략)"
시인인 가장(家長)은 가장 큰 문수의 신발을 신고 있고, 막내둥이는 코가 납작한 가장 작은 신발을 신고 있지만 현관으로 비유되는 가정에서는 모두 정다운 하나의 가족이다. 가장은 나날을 눈과 얼음의 길을 걷는다고 하더라도 집에 돌아오면 더러워진 신발을 벗는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들판을 달리는 전사로서의 무장해제를 뜻하며, 지친 신발을 벗음으로써 가정 속에서 평화와 위안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우리 집 현관은 내 신발과 아내의 신발만이 놓여 있던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다혜의 꼬까신이 놓이고 어느 날 도단이의 운동화가 그 곁에 놓였다. 아이들의 신발 문수가 점점 더 커지더니 어느 날엔가 우리 집에 새로운 신발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위 민석이의 것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엔가 나의 딸이 낳은 정원이가 가족의 뉴 페이스로 등장하였다.
정원이의 신발은 그야말로 꽃신이었다. 사랑하는 며늘아기 세실이의 비단구두와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하고 시인이 노래하였던 것처럼 막내 윤정이의 또 다른 꽃신도 현관에 놓여졌다.
아직 시인의 가족처럼 아홉 켤레의 신발은 아니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집 현관에는 여덟 켤레의 신발이 차곡차곡 놓이게 된 것이다.
세월이 더 흘러가면 또 다른 꽃신이 현관에 놓이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시인의 가족 수를 추월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 집안은 종류가 다른 갖가지 신발로 꽃밭처럼 만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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