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웃고 나서 혁명

Ihtilali Nasil Yaptik

   
아지즈 네신(역자: 이난아)
ǻ
푸른숲
   
12000
2011�� 03��



■ 책 소개
탄탄한 서사와 날카로운풍자로 대중에게 널리 읽히며 사랑받고 있는 터키 대표작가 아지즈 네신의 단편집.

정치나 권력이 내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며 거기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를 간결하고 생생하면서도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 정치란 대단한 결심을 하고 뛰어드는 무언가가 아니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비판적으로 살아가는점을 정확히 건드리고 있다.

언론의 자유라는 외침이공허한 울림으로 돌아오는 우리의 현실과도 놀랍도록 맞물리는 작품 <민주주의 영웅 되기, 참 쉽죠?&&, 투쟁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활동을 해왔지만, 오히려 민중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간과한 반정부 인사의 아이러니한 현실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 <사람들이깨어나고 있다&& 등 모두 13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 저자 아지즈 네신(Aziz Nesin)
1915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터키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풍자 문학의 거장 아지즈 네신은 터키의 대표 지성(知性)이자, 터키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이다. 서슬 퍼런계엄령 하에서도 권력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글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간 네신은 터키 국민들의 신산한 삶을 어루만지는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영어, 독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비롯해서 34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이탈리아, 러시아,루미나아, 불가리아 등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풍자 문학상을 휩쓸기도 하였다. 1972년에는 고아들에게 교육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네신재단’을 설립했으며, 1995년 사망 후 유언에 따라 그의 작품에서 발생되는 모든 인세가 이 재단에 기부되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으로는『생사불명 야샤르』『제이넵의 비밀 편지』『당나귀는 당나귀답게』『툴슈를 사랑한다는 것은』『개가 남긴 한 마디』『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없다』가 있다.

■ 역자 이난아
한국외대 터키어과를 졸업하고 터키 국립 이스탄불 대학과 앙카라대학에서 터키 문학을 전공하였다. 앙카라 대학 한국어문학과에서 5년간 외국인 교수로 강의했으며, 현재 한국외대 터키어과 강사로 있다. 저서로는『터키 문학의 이해』『오르한 파묵과 작품 세계』(터키어) 등이 있으며, 『내 이름은 빨강』『검은 책』『하얀 성』『눈』『새로운 인생』『툴슈를사랑한다는 것은』『제이넵의 비밀 편지』『당나귀는 당나귀답게』『스타를 사랑한 거위』『파디샤의 여섯 번째 선물』『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없다』 등 많은 터키 문학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또한 『한국 단편소설집』『이청준 수상전집』『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터키어로 옮겨소개하기도 했고, 엮은 책으로는 『세계 민담전집-터키편』이 있다.

■ 차례
우리는 외메르 영감을 뽑지 않겠다 
혁명이, 아무도 모르게 
지붕위에 미친 놈이 있다 
악몽 
민주주의 영웅 되기, 참 쉽죠? 
사장 위에 여사장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다 
문명만세! 
우리 집에 미국인 손님이 온다 
암호가 뭐기에 
모든 것은 주지사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얼마나 멋진나라인가! 
황소가 승자다 

옮기고 나서
우리는 여전히 풍자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일단, 웃고 나서 혁명


혁명이, 아무도 모르게

우리는 혁명을 일으켰고, 정권도 잡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혁명을 일으켰다는 걸, 정권을 잡았다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혁명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산했고, 아주 사소한 실패의 가능성까지 모두 고려했습니다. 역사상 그 어떤 혁명도 우리가 한 만큼 치밀하게 계획된 적이 없고, 완벽하지도 않았지요. 우리는 그저 단 한 가지를 잊었을 뿐입니다. 달력을 보는 것을 말입니다. 달력만 봤더라면, 7월 중순경에 우리 나라 외브레케에 적게나마 비가 온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외브레케에 7월 중순에 비가 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건 모든 일상의 마비를 뜻합니다. 비가 몇 방울만 떨어져도 라디오 방송국은 방송을 못 하고, 전화는 불통되고, 도시가스는 끊기고, 자동차를 포함한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되어버리지요.


하지만 우리는 7월이 혁명을 일으키기에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외브레케의 7월은 몹시 더워서, 장관을 비롯한 정부의 모든 고위 관료들과 유명 인사들은 가족과 함께 산이나 해안으로 피서를 떠나고, 하루 벌어 먹고살기도 힘든 사람들만 남아 수도인 마트락폴리스(웃기는 도시라는 의미이다)가 텅 비다시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트락폴리스의 정부 부처, 공공기관에는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텅텅 비게 되는 거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일으키는 혁명이란 정부 부처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끝이라, 지루한 나날을 견디지 못해 자, 오늘밤 혁명이나 일으키세, 친구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벌일 수 있는 일이지요.


앞서 말했다시피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고려하고 또 계산하고도 어떻게 우리가 7월에 외브레케에 비가 약간 온다는 사실을 잊었는지, 도통 모를 일입니다.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었지요!


우리는 자정 정각에 행동을 개시해 모든 정부 부처를 점령할 계획이었습니다. 혁명위원회의 일원인 미라라이가 말했습니다.

"중앙은행은 점령하지 맙시다." 

그러자 페릭 휴세인 장군이 왜냐고 물었지요.

"별 쓸모도 없는 공공기관들을 점령하느라 힘을 허비하지 말자는 얘기죠."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자 쓸모없는 정부 부처, 그러니까 재무부, 시청, 인구통계청 등은 제쳐 두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부 부처를 꼽다가, 쓸모 있는 기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미라라이가 말했습니다.

"쓸모없다는 이유로 공공기관들을 점령하지 않는다면, 혁명을 포기해야 할 판인데요."

그러자 군수 메흐메트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쓸모 있는 공공기관이 없다는 그 이유가 바로 우리가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혁명을 일으키는 명분을 알게 되었지요.


나는 우리가 정권을 잡았다는 것을 라디오로 국민에게 발표하기 위해 방송국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길에서 만난 동지들과 함께 행진곡 <나의 뒤리에를 속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를 부르며 라디오 방송국에 도착했습니다. 내가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브레케 국민에게 우리가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을 공표하려던 차에 메흐메트 군수가 찾아왔습니다.


"쓸데없이 떠들고 있군그래. 비 때문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겨서 방송이 나가질 않고 있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미라라이가 말했습니다.

"전화가 다시 연결되었군. 전화로 여기저기 알리겠네. 그러면 그들은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하겠지."


그는 무작위로 전화번호를 눌렀습니다.

"나는 혁명위원회의 미라라이 에뷜히잡이오. 우리가 정권을 잡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전화한 거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시오."

"그런데 거기가 어디요?"

"나는 수상인 무흐타르 장군이오."


미라라이는 "뭐라고요?"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습니다. 비 때문에 전화가 혼선되는 바람에, 일개 국민과 통화한다는 게 그만 수상에게 혁명을 고발한 셈이 된 것이지요.



민주주의 영웅 되기, 참 쉽죠?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는 않았지만 글을 많이 썼다. 공책 세 권 분량의 시를 썼고, 지역 신문 한두 곳에 내가 쓴 시가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시골 구석이라 아무도 내 글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나라가 발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스무 쪽이 넘는 글을 써서 어느 신문사에 보냈다. 만약 그 신문사에 내 글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필자로 만들어주리라.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신문에 네 글이 실렸던데!"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나는 태연한 척하며 친구에게 물었다.


"가끔 신문에 글을 쓰기는 해. 신문사 몇 곳에서 매일 글을 써 달라고 하는데도,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내 글을 어느 신문에서 봤는데?"


친구는 들고 있던 신문의 5면에 실린 독자들과 함께라는 꼭지를 보여주었다. 나의 스물두 쪽짜리 글이 다섯 줄로 줄어들어 있었다. 내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고, "한 시민은 우리 나라가 발전하려면 읽고 쓰는 사람이 늘어나야 하며 사탕무를 재배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라는 문장 다음에 그 다섯 줄이 게재된 것이다.


신문에 글이 실리고 나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모두가 내 글이 신문에 실렸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제발 시장(市長)에 대한 불만도 쓰게나!"

"도로 문제도 써."

"산림을 보호하자고 써!"


아, 그 다섯 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 만약 열다섯 줄이 실린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신문에는 기자가 있다. 기자가 되려면 신문사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신문사에 편지를 보냈다.


어느 날, 내가 편지를 보낸 신문사 중 딱 한 군데에서 답장이 왔다. 새로 생긴 신문사인데 나라 곳곳에서 소식을 전해줄 지역 기자를 찾고 있다고 했다. 만약 일할 의사가 있다면 기자증을 발급해줄 테니 증명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즉시 내 사진을 보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기자증이 도착했다. 내가 한 신문사의 기자가 된 것이다. 이제는 화젯거리를 찾아 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첫 기사는 어느 노파가 적십자사에 50리라를 기부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사는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축구 경기에 대한 기사를 써 보냈다. 그것도 실리지 않았다. 살인 사건 관련 기사를 보냈다. 도로가 정비되었다는 기사를 썼다. 앙카라의 고위 공무원들이 우리 마을을 방문했다는 기사도 썼다. 나는 전보, 편지, 전화로 쉴 새 없이 신문사에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일하는 신문사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를 읽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까지 내가 보낸 기사들이 왜 신문에 실리지 않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신문사 입장에서 보면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사건 축에도 끼지 못하지만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은 기사로서 중요하다는 것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기자로 일하는 신문사에서도 중요하고 가치 있는 기삿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런 유의 소식이 아니면 싣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신문에 실릴 만한 중요한 기삿거리를 찾아 동분서주하느라 가게 일은 아예 뒷전으로 미루었다. 하지만 놀랄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한데 다른 기자들은 어떻게 일을 할까? 그런 기사를 어디서 찾아 싣는 거지?


어느 날 창가에 앉아 있는데, 불현듯 기자로서의 영감이 떠올랐다. 맞은편 들판에서 갓 새끼를 낳은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 양 떼 사이에 당나귀 두 마리가 있었다. 나는 그 당나귀들을 보고 느낀 점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전보로 그 글을 신문사에 보냈고, 그 기사는 다음 날 신문 3면에 실렸다.


당나귀가 양을 낳았다


어제 우리 마을에서 스물여섯 살 된 수컷 당나귀가 양 두 마리를 낳았다. 새끼 양 한 마리는 나이팅게일처럼 지저귀는데, 다른 한 마리는 벙어리에다 귀머거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컷 당나귀는  꼬리로 양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마을 노인들 말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는 유례없는 일이니 이를 행운과 길조로 여길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이제야 체면을 차린 셈이었다. 성공은 사람이 일하는 데 힘을 실어준다. 내가 뒤이어 보낸 소식도 신문 1면에 실렸다.


내가 무엇을 쓰든 신문에 실렸다. 그것도 제1면에. 내가 쓴 많은 기사가 대서특필되곤 했다.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기사를 꾸며내는 일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외출해 라크(터키 전통 술. 주로 물에 희석해서 마신다) 한 병을 마시고 대마초 세 대를 피우면 기상천외한 영감이 떠올랐다. 나는 돈을 더 벌기 위해 더 많은 거짓 기사들을 썼다.


독자들은 싫증을 빨리 낸다. 아무리 흥미롭고 새로운 기사라도 금방 그 영향력을 잃는다. 그들은 매일 더 흥미진진한 기사를 기다린다. 처음에는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를 목 졸라 죽이는 것에 관심을 갖지만, 며칠이 지나면 이런 기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럴 때는 살인자가 자기 아내를 잘게 토막 냈다고 써야만 한다. 독자들은 이내 이런 것에도 익숙해져 싫증을 낸다. 그러면 이번에는 아내의 살을 고기 다지는 기계에 넣었다고 꾸며대야 한다. 이런 기사를 세 번쯤 읽으면 독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이게 뭐 대단하다고? 예사로운 일이잖아. 이런 걸 왜 신문에다 쓰고 난리야." 그러면 나는 살인자가 기계로 다진 아내의 살점으로 미트볼을 만들어 안주로 먹었다고 쓴다.


이런 식으로 계속 꾸며대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꾸며대도, 시간이 지나면 독자들은 또다시 시들해진다. 그러면 신문사는 내게 "제발 더 흥미진진하고, 더 특이한 기사를 보내요"라고 전화를 해댄다.


나는 꽤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내게 존경을 표했다. 어디를 가든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가장 좋은 자리로 나를 앉혔다. 그들이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두려워해서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 등 뒤에서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고 수군거린다. 나를 화나게 하면 내가 자신들을 모욕하는 기사를 쓰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열여섯 살 소녀가 서른 살짜리 남자를 산으로 납치했고, 여든 살 노파가 열 살짜리 소년을 집에 감금했다는 기사를 신문사에 보낸 날이었다. 고위 공무원이 우리 주를 방문했다. 신문에 기사를 꾸며대기 좋은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그 고위 공무원이 마음에 들어, 옳은 기사를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유명 기자이니 신문사도 어쩌다 한 번 보낸 옳은 기사를 싣지 않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날은 어찌 되었든 간에,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거짓말 한마디 보태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사를 썼다. 정당 문제, 국내 문제 등에 관해 거짓말을 쓸 수는 없었다.

 

내가 기자가 되어 쓴 바른 기사가 처음으로 신문에 실린 날, 나는 체포되었다. 지금 나는 교도소에 있다. 여러분도 각 신문에 "교도소에서 머리카락이 잘린 민주주의의 영웅"이라는 기사와 함께 실린 내 사진을 보았을 것이다. 내 직업을 배반한 벌을 받은 셈이지만, 어쨌든 민주주의의 영웅이 되었다.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단 한 가지가 부족했는데, 지금 그것을 채워가고 있다.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다

그는 너무도 힘들게 감옥살이를 마쳤다. 교도소를 나온 뒤로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유배 생활을 했는데, 그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현란하고 복잡한 수도로 돌아왔지만, 그곳에서도 외롭고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아내와는 수감 당시 이미 이혼했다.


일단 살 집부터 찾아야 했다. 수소문 끝에 집을 찾기는 했다. 방 한 칸에 조그만 거실이 딸린 손바닥만 한 무허가 건물이었다. 시내 중심가까지 걸어서 두 시간쯤 걸리는 곳으로, 언덕 위에 무허가 집이 대여섯 채 있는,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뭣할 정도로 작디작은 마을이었다. 그에게는 책이 가득 든 가방과 간단한 집기 말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은 커튼 대신 신문지로 가렸다. 그는 만족했다. 이제는 먹고살기 위해 일거리를 찾는 일만 남아 있었다.


저 멀리, 그의 집 맞은편에는 천막을 쳐서 만든 구멍가게가 있었다. 구멍가게 조금 왼쪽에는 아무렇게나 차양을 세워 만든 청과물 가게가 있었다. 그는 이 두 곳에서 물건을 사다가 주인들과 친구가 되었다. 둘 다 자신들의 형편과 벌이에 불만이 있었다. 손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손님이라고 해 봤자 하루에 대여섯 명뿐이었고, 그마저도 돈을 많이 써서 이익을 남겨주는 손님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가게의 주인들은 밑천이 모자라 목 좋은 곳에 가게를 열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가 무허가촌으로 이사 온 지 며칠이 지나자, 구멍가게 앞에 시미트(깨를 뿌린 고리 모양의 빵) 장수가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허가촌 앞은 작은 장터로 변했다. 행상인들이 모여들다 보니, 구멍가게와 청과물 가게 사이에 찻집까지 생기고, 사람들의 왕래도 많아졌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이웃 무허가 집들의 방도 월세로 나갔다.


그는 이렇게 활기차고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일자리는 여전히 구하지 못했다. 고용주들은 일자리를 줄 듯하다가도, 그를 뒤따라온 경찰에게 그의 신분에 대해 듣고는 손사래를 쳤다.


친구들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역시 빈털터리에 백수 신세인 그들에게 돈을 빌리기는 어려웠다. 최소한 월세 부담이라도 덜기 위해 도시에 사는 친구의 아파트를 함께 쓰기로 했지만, 무허가촌에서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월세도 밀렸고, 구멍가게, 청과물 가게 그리고 다른 상인들에게 적은 돈이나마 외상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갚아야만 했다.


어느 날 밤, 무엇을 팔아 빚을 갚고 이사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구멍가게 주인, 청과물 가게 주인 그리고 찻집 주인이었다.


찻집 주인이 말했다.

"이사 가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청과물 가게 주인도 거들었다.

"예, 이 부탁을 드리려고 우리가 찾아온 겁니다."

"이사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월세를 못 내고 있거든요."

청과물 가게 주인이 말했다.

"압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상인들이 의논을 해봤는데, 이 집 월세를 우리끼리 모아서 매달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를 떠나지 마세요."

구멍가게 주인도 말을 보탰다.

"우리를 떠나시지만 않으면 됩니다. 월세는 걱정 마세요."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하마터면 울 뻔 했다. 긴 세월을 국민을 위해 투쟁했는데, 마침내 처음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의논했습니다. 당신의 생계도요. 당신의 한 달 생활비가 얼마든 간에 우리끼리 나누어 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떠나지 마세요. 우리를 두고 가지 마세요."


세 사람이 동시에 애원했다.


그는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이 나라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겪은 일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옛날 같았으면 자신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큰 봉사를 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제 사지가 멀쩡한데 일을 해야지요. 제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주었다고 제가 이곳을 떠나는 것을 막으십니까?"


청과물 가게 주인이 말했다.

"더 해주실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당신의 선행을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이 무허가촌으로 이사 오자 당신을 감시하기 위해 청소부나 구두닦이로 변장한 경찰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경찰들을 통제하기 위해 다른 경찰들도 왔고요. 그래서 이 일대가 북적거리게 되었지요."


찻집 주인이 말했다.

"저도 당신 덕분에 찻집을 열고 입에 풀칠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들은 해가 저물도록 우리 찻집에 죽치고 앉아 카드놀이도 하고, 주사위 놀이도 합니다. 그들이 하루에 최소한 커피 서너 잔만 팔아주면 저는 먹고살 만하지요."


그는 상인들을 가여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모두 사복 경찰이던가요?"

"경찰도 있고, 경찰이 아닌 사람도 있던데요. 지금 당신이 떠나가면 이곳은 다시 예전처럼 변하고 말 겁니다. 당신을 따라 경찰들도 모두 가버리고 말 테니까요……"


구멍가게 주인이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끝장입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