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세상의 아름다움

   
정약용(역자: 박무영)
ǻ
태학사
   
6000
2001�� 07��



■ 책 소개
다산 정약용의 산문들은 이미 여러출판사에서 나왔지만 그 글들이 대부분 사회개혁적인 다산의 모습과 당시 사회를 고발하는 글들이 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뜬세상의아름다움』은 이와는 달리 다산 정약용이 살아간 "사람의 길"을 보여주는 글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이 글들을 읽다보면 다산 정약용의 위대함이어디에 있는가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요즘같이 메마른 세태에서 이러한 아름다운 서정이 넘치는 글들을통하여 이 무더운 여름을 감동하면서 보낸다면 더위도 한 풀 꺾이지 않을까?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일반에는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로만 알려져 있지만,다산은 당대의 첫 손가락에 꼽히던 시인이기도 했다.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시문집에는 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치열한 내용의 시와 문장들이 수록되어 있다. 무너져 가는 봉건왕조 말기의 사회적 모순상을 피를 토하듯 고발하는 시들-현대의 어떤 리얼리즘 시인이그 치열함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순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문장들이 갖는 지성의 깊이는 과연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여유당전서』의 시문집에는 이 "위대한" 사람의 인간적 내면을 보여주는 시와문장들도 함께 들어 있어서, 이 글들을 읽다보면 이 "위대한" 사람이 살갑게 느껴진다. 아내를 그리워한 한 사람의 지아비, 자식들의 앞날을걱정하느라 잠 못 이루는 한 사람의 평범한 아비를 만나게 되고, 그가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으로서 삶을 산 방식이 따뜻하게 사무쳐온다.그리고서야 비로소 나도 다산의 자식들 중의 하나가 되어 그의 가르침을 다소곳이 듣는 마음이 된다.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다산인지라, 다산은 "생활"의 깊은엄숙함을 외면하지 않았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어떤 고상한 이상이건 이데올로기이건, 이 "생활"의 진지함 앞에 경건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을외면하고 왜곡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러므로 다산의 사유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사람의 삶"을 떠나지 않는다. 그는 끝내 어떤방식으로든 "초월적인 태도"는 갖지 않는다. 생애 전반기의 「지금 여기서[於斯齋記]」 같은 글에서는 좀 더 경직된 모습으로, 유배기의 「뜬세상의아름다움[浮菴記]」에서는 좀 여유 있는 달관을 곁들인 모습을 띠지만, "지금 여기서 이 사람들과 사는 삶"을 최종적인 진·선·미의 가치로 삼는그의 태도는 한결같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의 삶"이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밥 먹고 똥 싸고 애 낳고 살아야 하는 구체적인 생활의 모습을 하고있다. 그는 끝까지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사람다운 방식으로 "성화聖化"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다산 평생에 걸친 것이고, 이웃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완성된다. 내 자식의굶주림과 남의 자식의 굶주림을 똑같이 여겨야 할까? 그것은 위선이다. 생활에 매몰되고 말아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인정과 실정에 반하는 지나친고상함도 "사람의 길"은 아니다. 내 자식의 굶주림 때문에 남의 자식의 굶주림도 구원해주려고 노력하는 것-그것이 다산이 걸어간 "사람의길"이었다. 


■ 저자 정약용
조선 후기 실학자, 경세가, 문인으로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자하도인紫霞道人. 1789년(정조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규장각초계문신 출신의 학자 관료로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정조의 화성華城 건설 사업에 동원되어 수원성 축조를 지휘하기도 했던 그는 무엇보다도현실 개혁을 구상하고 실천하려고 했던 경세가였고, 유형원과 이익 등의 실학을 계승하고 집대성한 실학자였다. 정조 급서 후, 신유사옥으로 천주교와인연이 깊었던 남인들이 대거 숙청될 때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갔다가 19년 만에 풀려났다.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경세유표經世遺表』 『마과회통麻科會通』 등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술들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집성되었다.


■ 역자 박무영
1959년 서울 생. 다산 정약용이보이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내용이 시 세계의 문학적 특질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주목한 「정약용 시문학의 연구-사유 방식과의 관계를 중심으로」로이화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산으로부터 시작해서 조선 후기 한국 한시의 다양한 면모들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여성 한시에 관심을 가져서 『한국고전여성작가론』을 공저로 내기도 하였다. 현재는 춘천의 한림대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


■ 차례
태학산문선을발간하며
일러두기
"사람의 길" - 다산 정약용


적벽, 물염정
서석산 유람기
소나기 속의 폭포 구경 - 세검정의 절승
최군의 시
금강산에 가는 까닭
중국 간다고 우쭐하기에
내 뜨락의 꽃나무들
그림자 놀이
지금 여기서
천진암의산나물
곡산 북쪽의 산수
늙은 낚시꾼의 뱃집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돌도 칭찬만 하게
나를 지키는 집
은자의거처
백련사의 단풍
뜬세상의 아름다움
다산의 친구들 - 짧은 편지들
네가 앓을 때 나는
우물 바닥에서 본별빛
소라껍질 두 개
낡은 활옷에 씀
큰 형수님의 추억
나무나 돌도 눈물을 흘리는데
귀족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형님께 1
꽃 피자 바람이 부니 - 형님께 2
초정의 개고기 - 형님께 3
예번과 인정 - 형님께 4
해장선사의 죽음 -형님께 5
마음 속 계산 - 형님께 6
남의 아비 되어 - 아이들에게
자포자기하지 말아라 - 아이들에게
바라지 말고베풀어라 - 아이들에게
유아 보아라
가을 매가 날아오르듯 - 학유에게 노자 삼아 주는 훈계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입을속이는 방법 - 가훈
세상의 두 가지 저울 - 연에게
가난한 근심
백운대의 추억
장천용





뜬세상의 아름다움


백련사의 단풍
游蓮社觀紅葉詩序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금속 악기의 소리로 곡을 시작해서, 곡의 끝에서는 그 소리를 거두어들이는데, 온화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기지 않고 길게 이어지며 온갖 악기의 소리가 조화를 이루게 한다. 이에 한 악장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늘은 일 년을 한 악장으로 삼는다. 그 시작에는 피어나고 우거지고 곱고 어여뻐서 온갖 꽃이 향기를 뿜는다. 그 끝 무렵에는 빨간 색과 노란 색, 자주 빛과 푸른빛으로 물들이고 단장하여, 넘실넘실 일렁이며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한다. 그런 다음에야 거두어 들여 깊이 간직하니, 그 오묘한 능력을 뽐내고 빛내려는 것이다. 만약 가을바람이 한 번 불자마자 쓸쓸히 다시는 피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앙상하게 다 저버린다면, 그래도 한 악장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산 속에 산 지 몇 해, 매번 나무가 붉게 물드는 때가 되면 술을 준비해서 시를 지으며 하루를 즐기곤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곡을 마무리하는 연주(曲終之奏)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였다.


올해 가을은 농사가 몹시 흉작이니 놀러 갈 마음도 나지 않는다. 다만 다산의 주인과 어울려 백련사에 감으로써 전례를 끊지 않고 보전했을 뿐이다. 양가의 자질子姪들이 따라왔다. 술을 마신 뒤 각기 시를 한 편씩을 지어 두루마리에 썼다.


때는 가경嘉慶 14년 기사년(1809) 상강霜降이 지난 지 사흘째다.


강진 시절의 어느 해, 단풍놀이한 감상을 적은 글이다. 다산은 단풍으로 온통 물들어 일렁이는 천지를 바라보며 ‘인생의 장엄한 황혼’을 떠올렸었나 보다. ‘가을 바람이 불자마자 다 저버린다면 그래도 한 악장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화려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마감하던 신유사옥이라는 가을 바람 이후, 그 이후의 삶이 가을단풍처럼 장엄한 것이 되기를 기약했던 것일까?


백련사白蓮社는 다산초당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다산초당 뒤의 언덕으로 올라가면 곧장 백련사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고 한다. 다산은 이 백련사의 승려들과 사귀며 그들과 『주역』을 논하기도 하고, 유명한 백련사의 차도 얻어 마셨다.



뜬세상의 아름다움
浮菴記
화순和順 사는 나경羅炅인데 자는 창서昌瑞다(원주).

나산처사 나 공은 연세가 거의 팔십인데도 홍안에 푸른 눈동자로 태연자약한 품이 신선 같으시다. 다산의 암자로 나를 방문하셔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름답구려, 이 암자는! 꽃과 약초가 나뉘어 심겨 있고, 시내와 바위가 환하게 둘려 있으니 세상사에 아무런 근심이 없는 사람의 거처로세. 그러나 그대는 지금 귀양살이 중인 사람일세. 주상께서 이미 사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셨으니 사면의 글이 오늘이라도 도착하면 내일엔 이곳에 없을 터, 무엇 때문에 꽃모종을 내고 약초 씨를 뿌리고 샘을 파고 도랑에 바위를 쌓으며 이처럼 구원久遠의 계획을 세우는가?


내가 나산의 남쪽에 암자를 튼 지 이제 삼십여 년일세. 사당과 위패가 모셔져 있고 자손들이 그곳에서 성장했네. 그러나 거칠게 깎아 기둥을 꽂고는 썩은 동아줄로 동이어 놓았을 뿐이라네. 동산과 채마밭도 가꾸지 않아 쑥대와 콩잎이 우거져도 임시변통으로 대충 수리할 뿐 아침에 저녁을 생각지 않는다네.


왜 이렇게 하겠는가? 우리의 삶이란 것이 떠다니는 것이기 때문이지. 혹은 떠다니다 동쪽으로 가기도 하고 혹은 떠다니다 서쪽으로 가기도 하며, 혹은 떠서 다니기도 하고 혹은 떠서 멈추기도 하며 혹은 떠서 떠나가기도 하고 혹은 떠서 돌아오기도 하니 그 떠다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치지 않는다네. 이런 까닭에 나는 스스로를 부부자浮浮子(둥둥 떠다니는 사람)라 하고 내 집을 부암浮菴(떠다니는 집)이라 부른다네. 나도 오히려 이렇거늘 하물며 자네임에랴. 이러니 그대의 일이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군.”


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아아, 통달하신 말씀이십니다. 삶이 떠다니는 것임을 선생께선 이미 아십니다. 그렇지만 호수와 연못이 넘치면 부평초의 잎은 도랑물에도 나타납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면 나무인형도 따라 흘러갑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며 선생께서는 더욱 잘 아시는 것입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물고기는 부레로 떠다니고, 새는 날개로 떠다니며 물거품은 공기로 떠다니고 구름과 노을은 증기로 떠다닙니다. 해와 달은 움직여 굴러다님으로써 떠다니고 별들은 밧줄로 묶여서 떠 있습니다. 하늘은 태허로서 떠 있고 땅은 작은 구멍들로 떠 있어서 만물을 싣고 억조창생을 싣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천하에 떠다니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큰 배를 타고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배 안에서 물 한잔을 선창 안에 붓고 겨자를 배처럼 띄워놓고는, 자기 자신이 바다 위에 떠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그것이 떠있다고 비웃는다면 어리석다하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지금 천하가 온통 다 떠다닙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떠다닌다는 사실에 홀로 상심하셔서 자신을 ‘떠다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자기 집에 ‘떠다니는 집’이란 이름을 붙이며 떠다니는 것을 슬퍼하고 계시니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저 꽃과 약초, 샘과 바위들은 모두 나와 함께 떠다니는 것들입니다. 떠다니다 서로 만나면 기뻐하고 떠다니다 서로 헤어지면 시원스레 잊어버리면 그만일 뿐입니다. 무어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떠다니는 것은 전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어부는 떠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고 상인은 떠다니면서 이익을 얻습니다. 범려范?는 벼슬을 그만두고 강호에 떠다님으로써 화를 면했고, 불사약을 찾아 떠났던 서불徐?은 섬나라에 떠가서 나라를 열었습니다. 당나라의 장지화張志和는 벼슬을 그만두고 강호에 떠다니면서 즐거워했고, 예찬倪瓚은 강호에 떠다님으로써 역도들에게 붙잡혀 가는 것을 면하고 안락했습니다. 그러니 떠다니는 것이 어찌 하찮은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공자孔子 같은 성인도 또한 떠다닐 뜻을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떠다닌다는 것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물에 떠다니는 것도 그런데, 어찌 땅에 떠 있는 것을 가지고 상심하겠습니까?”


오늘 더불어 말씀 나눈 것으로 부암기浮菴記를 지어 선생의 장수를 축원하는 선물을 삼고 싶습니다.


이 「부암기」는 30대 후반에 쓰여진 「어사재기於斯齋記」에는 없는 여유와 달관이 있다. 꽃이 진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으며, 꽃이 진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으랴? 지고 말 꽃이기에 더욱 아름답고, 더욱 사랑스럽다. 집착할 것도 한탄할 것도 없이, 그저 충분히 살고 가면 될 뿐이다.

?

글을 실제로 이끌어나가는 데는 묘한 착종이 있다. “뜬세상, 허무한 삶”이라는 나경의 한탄을 다산은 엉뚱하게도 글자 그대로 “떠 있는 것”으로 치환시켜 이야기를 전개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러니 같은 단어를 가지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산이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독자는 그럴 듯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잠시 후에는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런들 어떠랴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또한 들을 만한 걸.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