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가는 길

   
유몽인(역자: 신익철)
ǻ
태학사
   
7000
2002�� 03��



■ 책 소개
탈속적 문인 어우 유몽인의산문집. 표제작 "나홀로 가는 길"은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글을 두고 "백년 이래 처음 보는 기이한 문장"(노수신, 유성룡)이라는 극찬과 "법식을벗어난 문장"(심수경, 정문부)이라는 혹평이 일자, 이를 소재삼아 쓴 글이다. 임진왜란의 참혹한 실정을 체험한 후 쓴 "홍도"나 "강남덕의어머니" 같은 작품에는 민중들의 고난과 이를 극복하는 역정이 감동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저자인 유몽인은 방달한 기질을 지닌 자유주의적 성향의 문인이며, 이에 세상의 규범이나격식과 충돌할 소지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서 실제 행동으로 표출된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한편으로 엄격한 원칙과 절조를지닌 인물로 자기 억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문학적 성과 중 최고봉이라 할 『어우야담』은 이러한 의식의 소산이며, 민간의구비문학이 지닌 진실성과 발랄한 미의식을 깊이 있게 수용하여 당대의 시대상을 폭넓게 구현하였다.


■ 저자 유몽인
조선조 중기의 문장가. 자는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於于, 간암艮庵, 묵호자默好子이다.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 때역적으로 몰려 아들 "약" 과 함께 처형당했다가 1794년(정조 18년) 신원되었다. 시호는 의정義貞. 그의 문장은 제재와 구상이 독창적이고,의경이 참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집으로 『어우집』이 있으며, 야담집 『어우야담』은 수필문학의 백미로손꼽힌다.


■ 역자 신익철
전남 함평 출생.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유몽인의 문학관과 시문의 표현수법의 특징」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있으며, 광운대학교, 한양대학교에 출강중이다. 지은 책으로 『유몽인 문학 연구』등이있다.


■ 차례
태학산문선을발간하며
일러두기
유몽인론 - 분방한 기질의 탈속적 문인


제1부 일반 산문
박고서사에 부치는글
나 홀로 가는 길
묶음과 풀어줌
글로 전송하는 까닭
매학첩에 부치는 글
...


제2부 야담과 일화
명기 황진이
불교에몸을 바친 이예순
재상가 서녀 진복의 일생
남녀 간의 정욕이란
선비 보쌈
...


제3부 문예론
진정한고문이란
『사기』를 배우기 어려운 이유
시경을 읽는 법
싯인의 궁천
현실을 풍자하는시
...


원문 제1부
원문 제2부
원문제3부




나 홀로 가는 길


동국 제일의 명산 지리산
遊頭流山錄

나는 본성이 소방疏放하여 젊은 시절부터 사방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벼슬길에 오르기 전에는 삼각산을 내 집처럼 여기어 아침저녁으로 백운대에 올랐으며, 청계산?보개산?천마산?성거산에서 책을 읽었다. 사명使命을 받들어 팔도를 다님에 미치어서는 청평산을 보고, 사탄동寺呑洞에 들어갔으며, 한계산과 설악산을 유람하여 봄가을로 풍악과 구룡연, 비로봉을 보았다. 동해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서는 영동구군嶺東九郡의 산수를 두루 다녔다. 적유령을 넘어 압록강의 근원까지 가보았으며, 마천령과 마운령을 넘어서 장백산에서 칼을 짚고 섰으며, 파저강波猪江과 두만강에서 말에 물을 먹이기도 했다. 북해에서 뱃놀이하고 돌아 나와서는 삼수갑산까지 가보았다. 길게 뻗은 혜산령 고갯마루에 올라 장백산을 굽어 보았으며, 명천明川의 칠보산을 지나 관서의 묘향산을 올랐다. 길을 바꿔 서해 바다를 지나 구월산에 올랐으며, 백사정白沙汀에 배를 대기도 하였다. 세 차례 중국에 사행가면서 요동으로부터 북경에 이르는 길에 뛰어나고 아름다운 산수는 둘러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의 지세는 동남쪽이 낮고 서북쪽이 높아서 남방 거악巨嶽의 산꼭대기가 북방 산의 발꿈치에도 못 미칠 것으로 생각하였다. 두류산(지리산)이 비록 명산이라 말하지만 우리나라를 다 둘러보고는 풍악(설악산)이 동방의 산수를 집대성한 것으로 여기었다. 바다를 보고는 다른 것을 물로 여기기 어려운 것처럼 두류산은 그저 하나의 돌무더기로 보아왔을 뿐이다. 이제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 보니 두류산이 웅장하고 걸특하여 동방 뭇산의 으뜸이 됨을 알게 되었다. 살이 많고 뼈가 적음(多肉少骨)은 곧 두류산의 고대高大함을 더해주는 것이다.


이를 문장에 비유하자면 굴원은 슬프고, 이사는 웅장하고, 가의는 밝고, 사마상여는 풍부하고, 양웅은 현묘한데 사마천이 이들을 겸한 것과 같다. 또 맹호연은 고상하고, 위응물은 전아하고, 왕유는 교묘하고, 가도는 청아하고, 피일휴는 험벽하고, 이상은은 기이한데 두보가 이들을 겸한 것과 같다. 지금 살이 많고 뼈가 적다고 하여 두류산을 얕잡아 본다면 이는 유사복劉師服이 한유를 똥덩어리와 같다고 기롱한 것과 같다. 이 어찌 산을 안다고 할 수 있으랴.


지금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근원하여 사천 리를 뻗어 내려와 끝없이 이어지면서 우뚝 솟은 기세가 남해에 이르러 다한다. 대지를 주름잡아 우뚝하게 솟은 봉우리가 12주에 둘러있으며 너비는 이천 리에 이른다. 안음과 장수는 그 어깨를 매고 있으며, 산음과 함양은 그 등을 짊어지고 있고, 진주와 남원은 그 배를 받치고 있으며, 운봉과 곡성은 그 허리를 끼고 있고, 하동과 구례는 그 무릎을 베고 있으며, 사천과 곤양은 그 발꿈치에 닿아 있다. 웅대하게 서려 있는 기세는 호남과 영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저 풍악은 북쪽에 있지만 사월이면 눈이 녹는데, 두류산은 남쪽 끝에 있으면서도 오월에 얼음이 언다. 그 높낮이는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인이 일찍이 논하기를 천하에 큰 강이 세 개 있으니, 황하와 장강과 압록강이라 하였다. 이제 보건대 압록강의 크기는 왕도의 한강에 불과할 뿐이다. 직접 보지 않고 범박하게 논한 것이니, 전기傳記에 기록된 것 또한 정확하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 동방의 바다와 산악을 모두 내 두 다리로 밟아 보았으니, 비록 자장子長이나 박망博望의 유람에 견주어도 내가 그리 못하지 않다고 자부한다. 나의 족적이 미친 바로 그 우열을 가린다면 두류산이 동방 제일의 산이 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약 인간세상의 영리를 버리고 영원히 떠나 돌아오지 않고자 한다면 오직 이 산만이 편안히 여생을 보낼 곳이다. 전곡錢穀이나 갑병甲兵에 대해 깊이 앎은 백수白首의 서생이 요량할 바가 아니니, 조만간 허리에 찬 인끈을 풀고 나의 애초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 그윽하고 고요한 지경에 한 칸 승방僧房을 빌릴 수 있으면 그만이지 어찌 꼭 나의 본관지인 고흥高興 만이 나의 뜻을 이룰 땅이겠는가?

만력 39년 신해년(1611) 4월 묵호옹?好翁은 쓴다.

* * *

유몽인은 1611년 잠시 남원부사를 지낸 일이 있는데, 이때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장편 산수유기의 끝 대목이다. 지리산의 산세를 ‘살이 많고 뼈가 적음’에 견주고, 그 웅장한 자태를 사마천이나 두보와 같은 대문장가의 호한함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지리산을 의인화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12주에 걸쳐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자신이 우리나라의 명산을 직접 밟아보지 않음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거니와, 그의 산행은 “지팡이 내던지고 붉은 바위를 타며, 바지 걷고 맨발로 푸른 이끼를 밟는다(擲杖膺丹壁 蹇裳跣綠苔-?登獅子峰?)”라고 노래할 만큼 탈속적 정취를 지닌 것이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