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철학은 처음이야

   
박찬국
ǻ
21세기북스
   
17800
2023�� 03��



■ 책 소개


생각이 확장되고 삶이 단단해지는 인생 첫 철학 수업
읽다 보면 생각이 톡톡 깨어나는 특별한 질문

십 대, 깊은 고민이 시작될 시기이다.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친구들과는 또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이런 고민들을 하며 시시하지 않은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으려고 분투한다. 어떤 고민에도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많은 어른들에게 철학으로 위로와 통찰을 주었던 서울대 박찬국 교수가 흔들리는 청소년들을 위해 가장 친절하고 다정한 철학 이야기를 건넨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청소년들에게, 저자는 그들이 하는 많은 고민들이 철학의 근본질문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칸트가 말했듯 철학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어렵고 현학적인 수사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건네듯이 칸트, 니체, 하이데거 등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유를 넘나들며 자아, 인생, 인간, 우정 등을 다룬 철학 이야기를 읽다 보면 십 대가 처음으로 겪는 방황이나 고민들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풀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앞으로 다양한 고민을 하고 수많은 선택과 후회를 경험할 십 대들에게, 그때마다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생각하는 힘,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게 도와주는 이 책은 지적인 측면은 물론, 새로운 시각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 저자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롯한 실존철학이 주요 연구 분야로 원효학술상, 운제철학상, 반야학술상 등을 받았다.

힘들고 지친 많은 현대인들에게 철학을 통해 창의적 영감과 활기를 불었던 박찬국 교수가 이번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눈높이 철학 수업을 선사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는 힘을 키우게 하여 사고력과 논리력을 확장시키고, 나아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관과 중심을 가질 수 있도록 친절하고 재미있게 철학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 논문 등을 발표하며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_ 철학이 어렵고 낯설게 느껴지나요?

1강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철학에 눈뜨는 순간 1 실존한다는 것의 의미
철학을 잘 모르는 나도 철학을 할 수 있나요?
내 자아는 내가 만드는 대로 달라질 수 있나요?
존경하는 사람을 닮으려 노력하면 저도 달라질 수 있을까요?

2강 내가 개나 고양이보다 우월한 존재일까요?
인간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특별한 존재인가요?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티끌 같은 존재일까요?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보다 개가 더 도덕적이지 않나요?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더 강하고 뛰어난가요?
다른 존재를 존중하는 태도가 양심일까요?
인간의 내면에는 천사와 악마가 함께 존재하나요?
■철학에 눈뜨는 순간 2 권위주의적 양심과 인본주의적 양심의 차이

3강 불안하고 외롭고 자신감을 잃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고 버거운 걸까요?
상상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일까요?
자유가 주어질수록 불안감이 커지는 이유는 뭘까요?
자유를 포기하면 나는 더 행복한 삶을 살까요?

4강 인간과 똑같은 인공지능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이 발전해 인간을 공격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철학에 눈뜨는 순간 3 유물론, 유심론, 이원론
욕망, 감정, 윤리의식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요!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아질 수도 있나요?
■철학에 눈뜨는 순간 4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감정이나 욕망을 갖게 된다면?
인간의 다리보다 자동차가 우월한가요?
강한 인공지능이 감정을 느낀다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같을까요?

5강 참된 친구란 무엇일까요?
친구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픈 것처럼 친구도 그럴까요?
우정은 내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나요?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곁에 좋은 친구들이 다가올까요?
동정과 우정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친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주고 싶어요!

6강 나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행복은 과연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일까요?
행복은 고난이나 고통과 모순되는 것일까요?
이성적 능력을 잘 실현하면 행복이 찾아올까요?
모르는 것을 알아가며 몰입할 때 행복감이 느껴져요!
힘든 일을 이겨냈을 때 느껴지는 뿌듯함은 뭘까요?
■철학에 눈뜨는 순간 5 저항을 극복함으로써 느끼는 행복

7강 바람직한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가 궁금해요!
사해동포주의라는 이념은 신화일까요, 진리일까요?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는 어떻게 다른가요?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신이 모든 걸 들어주실까요?

8강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사고팔리나요?
자본주의 사회는 비인간적인 사회일까요?
모두 천사가 되어야만 공산주의 사회가 가능할까요?
■철학에 눈뜨는 순간 6 사회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
경쟁을 통한 발전은 자본주의 사회의 장점인가요?
나의 발전이 어떻게 사회의 발전으로 연결되나요?

9강 나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성장해갈까요?
인간을 역사적 존재라고 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인간의 자유, 상상력, 시간의식은 어떻게 연관될까요?
■철학에 눈뜨는 순간 7 자유와 상상력 그리고 시간의식의 관계
지나온 역사가 없었다면 현재의 내 삶도 없겠지요?
더 나은 미래 세상을 위해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뭘까요?

10강 아픈 지구를 위해 난 뭘 해야 할까요?
환경위기가 생겨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나’라는 존재는 계산 가능한 에너지에 불과한가요?
■철학에 눈뜨는 순간 8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관
멋대로 자연을 지배하고 조작하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미래 세대를 위해 지금의 나는 어떤 실천을 해야 할까요?

에필로그_ 철학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나요?

 




이런 철학은 처음이야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여러분은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보통은 조각 실물이 아니라 사진만 보았을 테지요. 하지만 실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 작품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한 남자가 턱을 괴고 앉아 생각에 잠긴 단순한 모습입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이 조각상을 보고 우리는 왜 그토록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일까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표정은 물론이고 몸 전체에서 진지함이 풍겨 나옵니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지 고민하는 걸까요? 아니면 어떻게 해야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걸까요?


사실 우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돈이나 취직보다는 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의미 있고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를 고뇌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직장에 취직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더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왜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과연 많은 돈과 좋은 직장이 좋은 삶을 보장하는가’라고 물어야 하는 겁니다.


좋은 삶이란 우리가 참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나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풍요 이면에는 그림자가 있지요. 많은 사람이 게임, 마약, 알코올 등의 중독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에요.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도 많고 심한 경우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데도 행복하지 않은 걸까? 어떻게 해야 참으로 만족하는 좋은 삶을 살 것인가? 우리는 보통 시험이나 과제에 쫓기고 갖가지 오락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깃들어 있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진지해집니다.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풍겨나오는 진지한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 속에 숨어 있던 ‘생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동물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러한 독특한 존재 방식을 ‘실존’이라고 불렀지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인간을 ‘실존적 존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이 실존적 존재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내가 개나 고양이보다 우월한 존재일까요?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보다 개가 더 도덕적이지 않나요?

여러분이 키우는 강아지에게는 영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니면 강아지도 영혼이 있긴 하지만 인간의 영혼처럼 고귀하지 않은 것일까요? 인간에게는 정말로 고귀한 영혼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 증거는 무엇일까요? 흔히 제시하는 증거는 인간이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인간이 선한 생각도 하고 선한 행동도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 행하는 살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른 동물이 인간에게 끼치는 해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지요. 이런 점을 볼 때 과연 인간의 영혼이 동물의 영혼보다 더 선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인간은 오늘도 엄청난 수의 동물들을 도살했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만 도살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종족인 인간도 살해합니다.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민족을 무자비하게 침략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을 믿는 자들이 저지른 악행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나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고귀한 영혼이 없는 자들로 여겼습니다.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로 본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노예들이 반항하면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것처럼 무자비하게 그들을 학살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나라의 사람들만 학살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방해다 된다고 여겨지면 기독교를 믿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학살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때 서로 싸웠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다른 나라의 국민들에게 포탄을 쏟아부었지요.


인간에게 고귀한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그리고 그 종교를 믿는 이들이 저지른 악행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런 것을 보고 있자면 과연 인간에게 고귀한 영혼이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만약 고귀한 영혼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인간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더 많이 갖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한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들을 끊임없이 싸우고 서로를 죽입니다. 이에 반해 강아지는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고 배만 채우면 만족합니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저 재미있게 뛰어놉니다.


강아지나 돼지 그리고 소가 인간보다 훨씬 선하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돼지나 소는 인간을 위해서 희생만 합니다. 인간은 물론이고 다른 동물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지요.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면 인간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 고귀한 영혼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만일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선한 존재라면,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동물들과 더 소통을 잘할 것 같지 않나요?



불안하고 외롭고 자신감을 잃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고 버거운 걸까요?

‘나는 혼자야’ 혹은 ‘나는 못난 사람이야’라는 생각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런 생각은 고독감과 무력감이라는 강렬한 감정을 가져옵니다. 저도 어렸을 적부터 종종 이러한 감정들에 휩싸이곤 했지요. 그럼 다른 동물들은 어떨까요?


개처럼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동물이라면 외로움 같은 감정은 느낄 것 같습니다. 개도 혼자 있다가 자신을 예뻐하는 사람이 오면 반가워하니까요.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아끼는 친구나 가족이 있어도 고독감과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은 유난히 고독감과 무력감을 잘 느끼는 동물인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청소년기에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 있기에 온전히 자기 힘으로 삶을 감당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청소년들도 나름의 힘겨움을 겪습니다. 성적에 대한 압박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짓누르기 때문이지요. 이런 힘겨움은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할 뿐 아니라 심지어 실행까지 한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한동안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꽤 유행했습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언급되어 더 널리 퍼지기도 했지요. 카르페 디엠은 ‘순간에 충실하라’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동물이야말로 이 말을 가장 잘 실천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순간에 충실하고 싶지만 다른 것들이 방해하지요. 과거에 상처받은 일이 자꾸 생각나 머리를 어지럽히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아름다운 노을을 보면서도 괜한 후회의 감정에 빠져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곤 하지 않나요? 혹은 멋진 그림을 눈앞에 두고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경험은요? 아마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왜 인간에게는 산다는 것이 이토록 버거운 걸까요? 동물들처럼 가볍고 단순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동물은 본능에 따라서 사는 반면,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삶을 꾸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람직한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는 어떻게 다른가요?

사람들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우리는 보통 신이 있는지 없는지, 천국이나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종교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프롬에 따르면 어떤 종교가 참된 종교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그 종교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는가’입니다.


이러한 기준은 니체가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기준과 비슷합니다. 니체 역시 종교에서 중요한 것을 ‘그 종교가 인간을 정신적으로 병들고 허약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강건한 인간으로 만드는가’라고 보았습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종교 자체보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종교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떻게 변화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종교는 종교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그것을 믿고 행하는 사람들을 통해 의미를 갖습니다.


프롬은 인류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종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종교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종교를 인본주의적 종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종교는 권위주의적인 종교라고 했지요. 인본주의적인 종교는, 인류는 모두 존엄하며 다른 모든 인간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는 기독교와 불교는 인본주의적 종교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도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부처 역시 인간뿐 아니라 다른 생명을 존중하면서 자애롭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본주의적 종교는 이렇게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구현할 것을 촉구(재촉하여 요구함)하는 종교입니다. 반대로 권위주의적 종교는 어떤 특정한 교리(동시에 불합리한 교리)에 대한 믿음과 특정한 예식체계에 대한 참여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 교리에는 인본주의적 종교의 성격과 권위주의적 종교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가르치지요.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도 하느님처럼 그 어떠한 조건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본주의적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성숙하고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교리에는 예수를 하느님의 독생자이자 하느님 자신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교리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를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며 공포심을 불어넣습니다. 이러한 교리는 권위주의적 교리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리를 믿는다고 해서 사랑에 더욱 충만하고 건강한 인격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목사나 신부들의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취급하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사고팔리나요?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라고 불립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는 사회입니다. 사유재산이란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재산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해줄 수도 있고 사업을 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도박이나 유흥으로 탕진할 수도 있겠지요.


자본주의 사회와 대립되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입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개인 재산의 상속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국가가 경제를 계획하고 관리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사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다”라든가 “자본주의 사회라 빈부격차가 심하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보았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자본주의 사회에 갖고 있는 특성, 특히 다른 사회들과 다른 점을 가장 잘 드러낸 철학자는 카를 마르크스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보편적인 상품시장경제’라고 규정했습니다. 저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과 분석을 다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러한 규정은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사고팔리는 상품이 됩니다. 심지어 인간의 노동력까지 사고팔리지요.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사고팔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노예제 사회는 어땠을까요? 노예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섬겨야 하는 주인이 정해져 있습니다.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노예가 마음대로 다른 주인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는 없었지요. 이는 서양 중세 시대 농노들이나 조선 시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다릅니다. 자신이 일하는 회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사장이 더 많은 임금을 준다거나 직원들을 더 인간적으로 대한다면 그곳으로 옮길 수 있지요. 달리 말하면 자기 노동력의 가치는 더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팔거나 혹은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팔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픈 지구를 위해 난 뭘 해야 할까요?

미래 세대를 위해 지금의 나는 어떤 실천을 해야 할까요?

근대 이전에도 인간은 식물과 동물을 다양한 방법으로 변형시켜왔습니다. 어떤 식물을 다른 식물과 접을 붙이기도 했고, 동물들의 경우 건강한 것들끼리 짝짓기하게 만들기도 했지요. 그러나 현대사회는 동물을 단순히 고깃덩어리로만 보고 있습니다. 동물들이 지닌 고유한 삶의 방식을 무시하는 한편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완전히 변형시키려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자연과 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토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생물종들을 멸종시킬 수는 있지만 새롭게 창조할 수는 없지요. 따라서 생물종들이 번식하고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수만큼은 보존해야 합니다. 그것은 후대에 대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들은 지구의 유한성, 세대 간 윤리, 생물의 보호를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근대적인 제도나 윤리에 의해서는 보장될 수 없습니다.


지구는 유한합니다. 이러한 유한성은 지구 한 부분의 파괴가 지구 전체의 위기로 확대되는 사태를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국가의 차원을 넘어서 국제적인 규제가 강력히 요구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는 근대적인 정치‧경제체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세대 간 윤리를 관련해서 말해보지요. 환경위기는 현재의 세대가 가해자가 되고 미래 세대가 피해자가 되는 범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후대를 생각한다면 지구 생태계가 35억 년에 걸쳐 모아온 태양에너지가 집적된 석유와 석탄을 불과 수백 년 동안에 모두 사용해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무수한 생물종이 멸종된 황폐한 자연을 후대에게 남겨주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이기주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법은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만을 고려할 뿐 후대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환경위기를 극복하려면 근대의 법체계와 윤리체계를 바꿔야 합니다. 생물들을 진정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단순히 인간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생물들 각각의 고유한 삶과 권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인간만이 보호해야 할 권리를 소유하는 것으로 보는 근대적인 법체계와 윤리체계를 넘어서야 하지요.


인간이 근대적인 자연관과 인간관을 넘어서는 동시에 이것들을 토대로 한 정치‧경제체제와 법체계, 그리고 윤리체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만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더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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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