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아이를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고 싶은 부모들에게 지침이 될, 대를 이어 전해지는 명문가의 정신적 유산과 삶의 철학을 담은 책이다. 한번쯤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명사 25인을 기자들이 직접 만났다. 데니스 홍, 강지원, 김영란, 최재천 등 뒤따르는 직함이 없어도 누구나 알 만한 성공한 명사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그들이 돈이나 명예로 표상되는 사회적 성공을 거둬서가 아니라 내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진정한 행복과 가치를 아는, 멘토로 삼고 싶은 선배 부모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을 토대로 성공과 행복의 기반을 마련하고, 나아가 그 유산을 다음 세대로 전해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다. 편집된 스토리가 아닌 생생한 육성으로 전해지는 진솔한 담화는 내 아이를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고 싶은 부모들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와 긴 여운을 남긴다. 아이를 키우다 문득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선배들은 아이를 어쩜 저렇게 훌륭하게 키웠을까 궁금할 때 이 책은 우리가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답안 중 하나다.
■ 저자 중앙일보 강남통신 팀
박혜민 팀장, 전민희 기자, 박형수 기자, 송 정 기자, 정현진 기자, 윤경희 기자, 박미소 기자, 이영지 기자, 김민관 기자, 김소엽 기자
‘강남통신(江南通新)’은 「중앙일보」의 섹션으로, 격조 있는 삶과 문화를 두루 담고 있다. ‘최고의 유산’은 자녀가 더욱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기준이 될 만한 정신적 유산을 찾아 명사들을 만나고 있다. ‘최고의 유산’은 돈이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다. 작은 생활습관부터 삶을 대하는 태도와 철학까지, 자녀교육 현장에서 흔들리는 후배 부모들에게 선배 부모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 차례
1장 존중과 배려
UCLA 기계항공공학과 교수 로봇박사 데니스 홍
표현하는 사랑
강지원 변호사와 김영란 전 대법관 부부
자유롭게 살아라
독서로 SAT 만점 아들 키워낸 국립생태원장 최재천
알면 사랑한다
간송 전형필의 유지 이어받은 간송미술문화재단 사무국장 전인건
배려와 예의
동화작가 정채봉의 맏딸, 아버지 뒤 잇는 동화작가 정리태
아이처럼 맑은 동심
5남매 모두 의대·약대 보낸 구룡포 농부 황보태조
자녀와 격의 없이 대화하라
2장 감사와 나눔
4대 디자인 어워드 석권한 카이스트 배상민 교수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아라
인구문제연구소 박은태 소장과 박유현 대표, 박미형 소장
의로움을 좇아라 그리고 용감해라
4대째 의사 가족 민치과 민병진 원장과 딸 민승기 대표
헌신하는 삶을 살아라
김영환 전 회장 뜻 이어가는 송원그룹 김해련 회장
약속을 지켜라, 솔선수범해라
삼남매를 피아니스트, 뮤직비디오 감독, 가수로 키운 ‘보아 엄마’ 성영자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라
긍정의 힘으로 가족 지키는 배우 최민수 씨 부인 강주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라
3장 꿈과 도전
4대 극한 마라톤 완주,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 송경태
너의 길을 스스로 찾아 나가라
아이돌 그룹 ‘비스트’ 손동운의 아버지 청주대 호텔경영학과 손일락 교수
무슨 일을 하든 최고의 경지를 꿈꿔라
11개국 1,200여 개 매장 운영하는 식품회사 짐킴홀딩스 김승호 회장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만화가 장차현실 작가와 다운증후군 화가 딸 정은혜
스스로의 힘으로 당당하게 살아라
패리스 힐튼이 찾는 셰프 ‘아키라백’ 백승욱
자존심을 지키는 겸손한 마음과 행동
방황하는 남학생들의 마음을 여는 지원 인스티튜트 허지원 대표
한결같이 우직하게 큰 나무 같은 사람이 되라
4장 정직과 성실
2대째 새 박사, 윤무부 교수와 아들 윤종민 교수
남들보다 부지런해라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차남, 신생아의학의 대부 피수영 교수
항상 정직하라, 남에게 관대하라,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겨라
교사의 길 지킨 어머니가 멘토, ‘젊은 거장’ 피아니스트 손열음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고 너만의 열매를 맺어라
고졸 순경 출신으로 치안정감에 오른 이금형 전 부산지방경찰청장
하루하루 매순간 최선을 다해라
직영 지점 115개, 연봉 1억 직원만 200명 준오헤어 강윤선 대표
먼저 연락해라
케이무크 수강신청 누적 건수 1위 미시경제학의 권위자 서울대 이준구 교수
좋은 습관을 몸에 익혀라
최고의 유산
존중과 배려
UCLA 기계항공공학과 교수 로봇박사 데니스 홍 - 표현하는 사랑
자녀는 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중하고 이해시켜야 할 존재입니다
2015년 10월 17일, 서울대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열린 한국공학한림원 창립 2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데니스 홍이 Bridge to the Future를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었다. 데니스 홍은 로봇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리는 미국 UCLA 기계항공공학과 교수이자 로봇연구소 로멜라 소장이다.
그는 자신이 세계 재난구조 로봇 대회에 출전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온갖 고난을 뚫고 결선에 출전했지만 결국 로봇이 넘어져 부서지면서 수상권에서 탈락했던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실패가 두려워 시도조차 않는다면 배울 수 없습니다. 모든 로봇은 넘어지고 부서집니다. 중요한 건 다시 일어서는 거죠." You cant always win, but you can always learn은 탈락 후 눈물 흘리던 자신의 로봇 개발팀 동료와 미래의 과학자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던지는 그의 메시지였다.
수백 명의 청중 가운데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노부부가 있었다. 데니스 홍의 아버지 홍용식 씨와 어머니 민병희 씨였다. 인하대 명예교수인 그들은 이날 아들의 강의를 처음 지켜봤다. 두 사람은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며 개구쟁이 데니스가 이렇게 성장했다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은퇴 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두 사람은 인하대 홈커밍데이를 맞아 한국에 다니러 온 길이었다.
강의가 끝난 뒤 데니스 홍과 그의 부모를 만나 데니스 홍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개구쟁이 막내아들의 인생에 든든한 버팀목이자 사랑과 행복의 원천이 됐던 가르침이 그 속에 있었다. 이제 데니스 홍 자신도 일곱 살 이산의 아버지가 됐다. 부모님의 가르침은 아들을 거쳐 손자에게로 전해지고 있다.
시간을 함께 보내며 사랑을 표현하라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만약에 인터뷰 중에 아들한테서 영상 전화가 걸려오면 전화를 받겠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데니스 홍이 인터뷰 전에 구한 양해였다. 그는 아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데, 영상통화 연결도 그 중 하나다. 대통령이나 삼성이나 구글의 CEO와 미팅을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는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아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집에 있을 땐 매일 5시간씩 아이와 놀아준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놀아주는 게 아니라 같이 논다. 본인이 진짜 신나서 아이와 즐긴다.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이와의 약속을 특별히 중요시하는 이유가 있나요?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영상전화를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100번 전화를 받다가 한 번만 전화를 놓쳐도 부자간의 믿음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영상통화 버튼을 누르면 반드시 아빠와 연결된다는 믿음의 있으면 제가 한국에 있든, 학교에 있든, 지구 반대편에 있든 물리적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는 행사 때문에 한국에 왔다가 하룻밤 자고 바로 미국에 가서 아들과 놀았습니다. 그 다음날, 다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죠. 그냥 한국에 있으면 편할 걸 왜 그렇게 무리하게 이동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아들과 보드게임을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에 두 나라를 오가느라 정신없긴 했지만 결국 약속을 지켰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일종의 투자입니다. 지금은 아빠가 최고라고 생각해도 나이가 들고 사춘기를 겪으면 달라질 거 아닙니까. 저는 유년시절에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아이들은 절대로 엇나가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혹여 나쁜 길로 빠진다고 해도 금방 제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의 아버지 홍용식 씨도 그랬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주말에는 꼭 자녀와 함께 글라이더나 호버크라프트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던 70년대에 아버지가 아이들과 놀아주는 건 드문 일이었다. 주말을 반납하고 일하는 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다. 홍용식 씨는 아이들에게는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무엇보다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데니스 홍은 당시에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고 같은 입장이 돼보니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며 새삼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말한다.
홍씨와 민씨 역시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어머니 민병희 교수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사랑한다 응원한다 자랑스럽다는 편지를 수시로 써서 세 아이의 점심 도시락에 넣어줬다. 단 한 번도 공부 열심히 하라는 내용을 쓴 적은 없었다. 현재 큰아들 홍준서 씨는 미국 국방연구원으로, 딸 홍수진 씨는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암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부모님께서 학교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나요?
공부를 가르쳐주기는커녕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성적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어요. 특히 초등학교 때는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과목 간 편차가 심해서 성적표를 보면 수와 가뿐이었어요. 좋아하던 과학과 미술은 수였지만 왜 배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사회, 지리, 도덕 등의 과목은 모두 가였죠.
부모님은 공부를 직접 가르쳐주신 적은 없지만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깨닫게 도와주셨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글라이더의 삼각날개를 만드는데 날개 안쪽 지지대의 길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수학 시간에 배운 비례를 이용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또 큰 나무 옆을 지나갈 때 삼각함수를 이용하면 나무 그림자의 길이만으로도 나무의 높이를 계산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이상한 암호 같은 기호가 실생활에 널리 이용된다는 걸 안 뒤로 그 어떤 과목보다 열심히 수학 공부를 했습니다. 교수가 된 지금도 학생들에게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 이론과 수식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본인의 아들에게는 무엇을 가르치나요?
저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실컷 놀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야 창의력이 생긴다고 믿어요. 그래서 공부를 가르치는 대신에 다양한 실험을 함께 합니다. 이제 일곱 살 된 아들은 어릴 때의 저처럼 세상의 모든 걸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왜?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살죠. 그럴 때면 저는 답을 알려주는 대신에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돕습니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 창의적인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죠.
아이와 함께 놀 때는 별의별 실험을 다 합니다. 아들이 "낮과 밤은 왜 있는 거야?"라고 물으면 야구공과 전구를 찾아 지구와 태양을 만듭니다. 이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지구의 자전에 대해 알려줍니다. 또 "냉장고 불은 언제 꺼져?"라고 물으면 "우리 함께 알아볼까?"라고 말하며 휴대전화의 동영상 녹화 버튼을 켠 채 냉장고에 집어넣습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스스로 원리를 깨달을 수 있게 돕는 거죠.
감사와 나눔
김영환 전 회장 뜻 이어가는 송원그룹 김해련 회장 - 약속을 지켜라, 솔선수범해라
내 일에 최선 다하는 부모 보며 아이들도 성실히 배웁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자신처럼 어려운 처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돕겠다고 결심했다. 회사를 창업하고 성장 가도에 오르자 회사 자본금 두 배의 돈을 모아 장학회를 설립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항상 사사로운 이익을 좇지 말고 남과 더불어 살라고 당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업을 이어받은 딸은 선친의 뜻을 이어 "나눔이 삶의 최고 가치"라고 말한다. 김해련 송원그룹 회장과 고 김영환 송원그룹 전 회장의 이야기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은 나눔이다
암 투병 중에도 행복하다고 말하던 사람. 김해련 송원그룹 회장은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한다. 송원김영환장학재단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학비를 지원해준 수백 명의 장학생에게 둘러싸여 감사 인사를 받았다.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금이 바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했다. 암과 싸우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환한 얼굴이었다.
송원그룹은 창업주이자 김 회장의 부친인 고 김영환 회장이 1975년 한국전열화학을 인수한 것이 모태가 됐다. 석회석을 원료로 한 제강정련제를 국내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외에 8개 계열사에서 합금철, 중질탄산칼슘 등을 생산하는 산업용 소재 기업이다. 일반 소비자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설립 41년째, 매출 4,000억 원대의 중견 기업이다.
김 회장의 기억 속 아버지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지극히 아끼던 딸 바보였다. 팔삭둥이로 태어난 김 회장은 어린 시절 내내 병을 달고 살았다. 11세 때 어느 날 밤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과 구토에 시달리다 의식을 잃었다. 아버지는 딸을 들쳐업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병원을 찾았다. 몇 시간 만에 발견한 한 병원에서 겨우 문을 열어줘 딸은 응급처치를 받고 목숨을 건졌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었는데 당시 아버지는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저를 업고 뛰었대요. 외동딸이 잘못될까 봐 애가 타셨던 거죠."
김 회장이 초등학생이던 때 아버지는 작은 합섬 회사에서 일했다. 새벽에 회사에 가서 한밤중에나 퇴근하니 아버지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경상도 출신으로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다정한 애정 표현에는 서툴렀다. 하지만 업무 차 좋은 음식점에라도 가면 꼭 음식을 따로 포장해 가져와 딸에게 먹이는 살뜰한 아버지였다. 회사 야유회가 있을 때면 꼭 딸을 데려가곤 했다.
"제가 맛있는 걸 먹을 때면 얼마나 행복한 표정으로 절 보셨는지 몰라요. 허약하던 제가 건강해진 것도 아버지의 정성 덕분이었어요."
열심히 일해 30대에 최연소 이사로 승진했던 아버지는 김 회장이 12세가 되던 해 회사를 그만뒀다. 정도를 지켜야 한다며 경영자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퇴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퇴사한 아버지는 회사를 직접 경영하겠다 결심하고 39세였던 1974년 한국전열화학을 인수했다.
공장에서 먹고 자던 고학생의 꿈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장학 사업을 하기 위해 회사를 경영한 분이었어요. 창업 3년 만에 회사 매출이 손익분기점을 넘자마자 사내장학금 제도를 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직원 자녀라면 누구나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학비를 지원받았다. 직원이 장학금을 학비 외의 용도를 쓸 것을 염려해 자녀를 회사로 불러 손수 장학금을 건넸다. 그리고 6년 뒤인 83년 회사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자 아버지는 줄곧 꿈꿔오던 장학회를 설립했다. 회사 자본금 5,000만 원의 두 배인 1억 원을 출연해 송원김영환장학재단을 세웠다. "창업한 지 9년째, 회사가 채 안정되지 않은 시기였어요. 기업의 사회 환원 활동에 대한 인식도 낮았죠.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돌아보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걸 사명으로 생각했어요."
아버지의 장학사업에 대한 애착은 컸다. 딸의 눈에는 장학사업을 하기 위해 기업 경영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매년 장학회 기금 규모를 늘려 더 많은 학생을 지원해 나갔다. 1억 원으로 출발한 기금은 현재 156억 원으로 늘었다. 매해 85여 명의 학생들이 연 1,000만 원의 장학금을 받는다.
사회 저명인사도 많이 배출했다. 이제는 사회에서 자리 잡은 장학생 선배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후배 돕기에 나선다. 2013년 장학회 출신들이 자발적으로 설립 30주년 기념 보은행사를 열던 날 김 회장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장학생 대표로 한 학생이 김용택 시인의 참 좋은 당신을 낭송하고 "저희도 누군가의 사랑의 불이 되어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감격한 얼굴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장학회가 내 인생에 없었다면 삶의 비전이나 사업의 목표도 없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 바로 장학생들의 감사편지예요.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고 정성껏 보관하셨죠. 아버지는 장학회를 통해 자신이 꿈꾸던 것들을 다 이뤘기 때문에 삶에 후회가 없다고 했어요.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회고록 제목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라고 지었죠."
정직과 성실
2대째 새 박사, 윤무부 교수와 아들 윤종민 교수 - 남들보다 부지런해라
원망과 고마움은 종이 한 장 차이, 매 순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국민 새 박사 윤무부. 전 세계를 누비며 새를 연구한다.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는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새를 보러 다니던 아들은 스무 살이 되자 아버지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선택했다. 아버지는 현재 경희대 명예교수 아들은 한국교원대 윤종민 박사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다. 새를 좋아하고, 열정적이며 끈질긴 성격을 가졌다.
새 여행 함께하던 아이, 아버지와 같은 길 걷는다
조류학자 윤무부 교수 집에는 어디든 새가 있다. 새를 찍은 사진, 새 기념품 등이 집안 곳곳에 놓여 있고, TV 스크린에선 새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다. 벽에는 한 청년이 촬영 장비를 짊어지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 걸려 있다. 어디서 본 듯한 노트북 광고의 한 장면이다.
"얘가 우리 아들 종민이에요. 잘 생겼죠?" 덤덤한 말투지만 아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사진 속 윤종민 씨는 아버지가 졸업한 경희대에서 아버지와 같은 생물학을 전공하고 미국 미시간대와 콜로라도주립대에서 생물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교원대 황새생태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들 종민 씨는 아버지가 하는 강의를 들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수강 신청을 못한 경우에도 아버지의 강의실에 슬쩍 들어와 맨 앞줄에 앉았다. 윤 교수는 "그런 아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던 게 벌써 20년 전 일"이라며 웃는다.
경쟁력 갖추려면 남들과 똑같이 하면 안 된다
윤 교수의 새에 대한 사랑은 경남 거제도 장승포에서 시작됐다. 윤 교수의 집은 바닷가 시골 마을 이었다. 대문 열고 나가면 눈앞에 바로 바다가 펼쳐지는 곳이었다. 윤 교수의 아버지는 농사를 짓는 농부이자 고기 낚는 어부였고, 집안에선 목수 역할도 했다.
윤 교수는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눈치 빠르고 심부름 잘하는 넷째 아들을 언제나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린 소년에게 최고의 장난감은 바닷가 새떼였다.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저 새는 어디로 가는 걸까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고, 바닷가에 앉아 있는 새를 쫓아다니며 놀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산과 들로 데리고 다니며 새를 보여주곤 했다. 논병아리, 갈매기, 물오리 같은 새 이름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공부 못하기로 소문난 소년이지만 새 이름만큼은 척척 외웠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이해해 주는 친구이자 멘토였다. "열 살 때부터 새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고 해요. 그걸 유일하게 이해하고 지지해준 게 바로 아버지였고요." 눈치 빠르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점이 윤 교수는 아버지와 닮았다. 아버지는 바보처럼 부지런하기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성취하려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아침 일찍 눈도 떠지는 거라고 했다. "진짜 교육은 강요하는 게 아니라 왜 그걸 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죠."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법도 아버지에게 배웠다. 남들과 똑같이 하면 경쟁력이 없다고 했다.
윤 교수는 학창 시절 제일 먼저 등교해 화장실 청소를 했다. 시간이 남아 여자화장실 청소까지 하니 교사들이 처음엔 이상한 눈초리로 봤지만 나중에는 모두의 칭찬을 받았다. 윤 교수는 그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려면 사소한 것부터 노력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손해 봐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고 가르치셨어요. 그건 제 평생 철학이 됐죠. 종민이에게도 항상 강조하는 내용이에요."
아들이 학문으로 성공하기 바랐던 아버지는 어린 윤 교수를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6·25 전쟁 직후 부자는 미군 부대 전용 야간열차를 탔고, 그렇게 서울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윤 교수가 한영고에서 3년, 경희대에서 4년 공부하는 동안 어머니와 누나는 주말마다 번갈아 들러 밥을 짓고 청소를 해주고 갔다.
비싼 사교육이 좋은 교육만은 아냐
어린 시절 종민 씨는 윤 교수가 떠나는 새 여행의 동반자였다. 새로운 새 서식지가 발견되거나 희귀 새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버지는 카메라를 들고 바람같이 달려갔고, 종민 씨는 그런 아버지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어린 시절의 그 여행 때문에 가창오리, 휴전선 두루미, 예산 황새, 군산 태극오리 같은 새 이름을 종민 씨는 구구단처럼 외웠다.
가족들 사이에 마찰이나 갈등이 있을 때도 함께 여행을 하면서 풀었다. "우리 가족은 불만이나 다툼거리가 있을 때면 다 같이 새를 보러 갔어요. 화가 나서 뿌루퉁하다가도 바깥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자연스럽게 풀리곤 했죠.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녀들과 여행을 많이 다니라고 합니다. 공부하라는 잔소리보다 스스로 동기를 찾아 공부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아이들의 엉뚱한 질문도 그냥 넘기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아이들 질문은 어른보다 날카롭습니다. 가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게 되죠. 그럴 때 심호흡을 하고 아이가 관심 갖는 내용부터 차근차근 얘기해 줘야 합니다." 아이들은 민들레가 왜 봄에 흰 솜털이 나는지, 꽃은 왜 몇 년이 지나도 늘 처음처럼 노란색인지를 물었다. 그는 잘 모르는 질문이 나올 때도 그냥 모른다고 하지 않고 봄에 찾아오는 추위가 더 무섭다거나, 꽃도 아빠랑 엄마를 닮는다는 식의 창의적인 대답을 해줬다. 늘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했다.
"유명한 학교에서 비싼 사교육을 받게 해주는 게 좋은 교육은 아닙니다. 저 역시 아버지가 해주셨던 이야기를 제가 받은 최고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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