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페리 앤더슨
1938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좌파 이론지 「신좌파 평론」의 주간을 역임했고, 편집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현재 UCLA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으며1996년 「창작과비평」 창간 30돌 기념 국제학술대회인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을 향하여 : 민중과 민족·지역 운동들의 역할"에 초청되어 한국을방문했다. 지은 책으로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역사유물론의 궤적』 등이 있다.
■ 역자 이현
서강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노동자의 책(&>www.laborsbook.org)"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실현가능한 사회주의의 미래』가 있다.
■ 차례
서문
1장 고전적 전통
2장 서구마르크스주의의 도래
3장 이론과 실천의 분리
4장 개념의 혁신
5장 서구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
후기
참고문헌
옮긴이 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
1장 고전적 전통
역사유물론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10년 뒤, 각각 유태인 변호사와 섬유 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산업혁명 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봉기에 강하게 끌렸던 20대의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적 유산, 그리고 푸르동의 정치이론을 진보적으로 청산했고,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발견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부르주아 경제학 이론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1844년 파리에서 처음 알게 된 두 사람은 당시 대륙을 뒤흔든 1848년의 봉기(1848년 프랑스 2월혁명)에 앞서 함께 (공산주의자 동맹의 위임을 받아) 『공산주의당 선언』(1848)을 집필했고, 이 봉기의 여파로 국제적 폭동이 끊이지 않았던 그 해에 극좌파의 위치에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반혁명 세력의 표적이 된 두 사람은 결국 영국으로 망명(1849년 8월), 30대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줄곧 그곳에서 머물렀다.
런던에서 궁핍한 생활을 했던 마르크스는 맨체스터에 있던 엥겔스의 정신적?물질적 도움을 받아 (그리고 1851년부터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통신원으로 있으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전반을 재구성하는 기념비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15년 후에 마르크스는 『자본』을 출간했고, 제1인터내셔널의 설립(1864~1876)에 관여했다. 마르크스의 말년과 사후에 엥겔스는 유럽에서 대중적으로 정치세력화된 역사유물론을 체계화하는 한편, 제2인터내셔널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동했다.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마르크스의 모든 주요 저술이 대중에게 알려졌는데, 이 저술이 대중에게 소개되는 과정은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변화와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일관되고 발전된 경제이론을 후세에 남겼지만, 이것에 비해 부르주아 국가의 통치구조에 대한 정치이론이나 그 구조를 전복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 정당의 혁명적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전략과 전술은 남기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 작업과 프롤레타리아 실천투쟁 간의 역사적 관계가 갖는 궁극적인 역설(이론과 현실의 괴리)은 국제주의라는 독특한 형태를 낳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두 사람을 계승한 이론가 집단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것도 대부분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 상대적으로 뒤늦게 역사유물론에 도달한 이론가들이었다. 안토니오 라브리올라, 프란츠 메링, 칼 카우츠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등은 모두 낙후된 동부 유럽 또는 남부 유럽 태생이었다. 이들 역시 자국의 국민정당을 이끄는 데 있어서 지도적인 구실을 하지 못했다. 이들의 저술들은 마르크스가 남긴 유산의 발전이라기보다는 완성이었다. 학문적으로 마르크스의 미간행 원고들과 마르크스의 전기를 출간하기 시작한 것도 이 세대가 한 일이었고, 이것들을 사회주의 운동에 처음 소개한 것도 이 세대였다.
당시 세계 자본주의의 국제정세도 변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주요 산업국들은 국내 독점자본의 성장과 제국주의의 해외 팽창이 지속되면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기술혁신, 이윤율 상승, 자본축적의 증대, 그리고 강대국 간 군비경쟁이 가속되었다. 이런 객관적인 조건은 1874년부터 1894년까지, 즉 파리코뮌의 패배 직후부터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최초로 벌어진 전쟁인 보어전쟁(1899~1902)과 미국-스페인 전쟁(1898)이 발발하기 직전까지와는 현격히 다른 것이었다.
이 시대에 활동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수적으로 이전 세대보다 훨씬 많았는 데다, 이 새로운 세대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베를린 동쪽 지역 출신이었다. 레닌(1870~1923)은 러시아 볼가 강 하류, 룩셈부르크(1871~1919)는 폴란드 갈리시아, 트로츠키(1879~1940)는 우크라이나, 바우어(1881~1938)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이들은 모두 주요 저술을 1차대전 이전에 집필했고, 20대 후반에 자신들의 기본적인 이론적 견해를 발표했다. 젊은 세대에 속했던 이 이론가들은 각자 모국의 국민정당 지도부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자본의 독점화와 제국주의를 초래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현격한 변화는 지속적인 경제분석과 설명을 필요로 했다. 더구나 이때 마르크스의 저술은 경제학자들의 전문적인 비판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본』은 새롭게 발전되어야 했다. 1899년에 카우츠키가 『농업문제』를, 레닌이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내놓았다. 1907년엔 바우어가 『민족 문제와 사회민주주의』를, 1910년엔 힐퍼딩이 『금융자본』을 펴냈다. 1차대전 발발 직전인 1913년엔 룩셈부르크가 『자본축적론』에서 제국주의를 분석했다.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자본주의적인 배후지(식민지)의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 따라서 식민지 강대국들이 발칸,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으로 군국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으로 팽창해나간 것은 하나의 필연이라는 룩셈부르크의 주장은, 새로운 시대라는 견지에서 『자본』의 범주를 전세계적 차원에서 재고하고 발전시킨 가장 급진적이고 독창적인 시도로 평가받았다. 1915년엔 부하린이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를, 1916년엔 레닌이 『제국주의-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를 출간했다. 따라서 20세기 초 대략 15년 동안은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상이 가장 크게 번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도 급속하게 부상하고 있었다. 중부 유럽에서 노동자계급 정당이 빠르게 성장하고 동유럽에서 구체제에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창궐하면서 새로운 이론(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 또는 혁명이론)이 형성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레닌은 숙련되고 헌신적인 노동자계급 정당이 주도했던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권력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필요한 개념과 방법을 고안해냈다. 선전과 선동을 적절히 혼합하고, 파업과 시위를 주동하며, 계급동맹을 이끌어내고, 정당의 조직을 공고히 하는 것, 그리고 민족자결을 조종하고, 국내외 상황을 파악하면서, 일탈적인 투쟁들을 바로잡고, 의회를 적절히 이용하고, 폭동을 준비하는 등의 특수한 방식들이 종종 ‘실천적’ 수단으로 간주되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결국 국적에 따라 서로 분열되고 말았고, 1차대전 후 페트로그라드에 운집한, 굶주리고 피폐한 대중의 자발적 봉기로 인해 러시아의 차르 체제는 1917년 2월 붕괴되었다.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당은 권력을 장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7년의 신속한 승리는 곧바로 제국주의 세력의 봉쇄, 개입, 그리고 1918~1921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기간에 러시아혁명의 역사적 진행은 레닌의 저술들에서 이론적 방향을 찾았으며, 러시아혁명의 토대가 된 정치사상(이론)과 행동(실천)의 통일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 되었다.
1920년 이후 소련은 고립되었고, 산업은 파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는 약화되었다. 농업은 황폐해졌고, 농민은 불평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중부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원상 복구됐지만, 혁명 러시아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련에 대한 봉쇄가 해제되고 대륙의 나머지 국가들과 접촉이 재개됐지만, 해외의 정치적 지원도 없이 경제적 후진성에 발목이 잡혀 있던 소비에트 국가는 위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당 기구를 통한 권력 찬탈이 날로 심해졌고, 노동자계급의 예속이 심해졌으며, 공공연한 애국주의가 극에 달하면서 1922년 병석에 누운 레닌은 뒤늦게나마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1929년에는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국(대공황)이 유럽 대륙을 휩쓸면서 대량실업을 만연시켰고 계급투쟁을 격화시켰다. 그 결과 가장 잔혹하고 폭력적인 형태의 사회적 반혁명(파시즘)이 동원돼 각 나라마다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노동자계급의 자율적인 조직들을 제거해나갔다. 유럽 대륙에서 파시즘의 공포정치는 노동자계급의 위협에 맞서 자본이 선택한 역사적 해결책이었다. 1939년 마침내 2차대전이 발발했다. 나치의 침략 전쟁은 유럽 대륙에서 마르크스주의 시대의 종말을 선고했다.
2장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도래
1945년에 파시즘은 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패배했다. 2차대전 이후 국제적으로 국력과 위상을 강화한 소련은 유럽 최남단에 있는 발칸 지역을 제외한 동유럽 전역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통합된 ‘사회주의 진영’이 유럽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미국과 영국이 나머지 절반 지역에서 정쟁 이전의 자본주의 체제를 구제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우,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의 선봉에 섰던 전국적인 공산당들이 처음으로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주요 조직으로 부상했다.
전후 주요 서유럽 국가들은 군사독재나 경찰국가로 후퇴하는 일이 없었다. 완전한 보통선거권에 기초한 의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로 선진 산업세계에 안정적으로, 그리고 정상적으로 유지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반복해서 일어난 파국적인 경기 침체도 없었다. 반면 소련과 동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를 감시?감독했던 억압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주의체제들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경제는 비교적 낮은 단계에서 시작해 빠르게 성장했지만, 자본주의 블록의 안정성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변화된 세계에서 혁명이론(마르크스주의)은, 오늘 우리가 ‘서구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는 역사적 변화를 완성했다.
루카치, 코르쉬, 그람시, 벤야민, 호르크하이머, 델라 볼페, 마르쿠제, 르페브르, 아도르노, 사르트르, 골드만, 알튀세, 꼴레띠 등이 서구 마르크스주의를 이끌어왔다. 이 이론가들의 사회적 출신 성분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지리적 분포는 엥겔스 사후에 두각을 나타낸 초기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루카치(1885~1971)와 루카치의 제자인 골드만(1913~1970)을 예외로 하면 대부분 서유럽과 연관돼 있었다.
1920년대 초부터 유럽의 마르크스주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 - 이 국가들에는 2차대전 이전과 이후, 주요 노동자계급 분파들을 하나로 규합할 수 있는 대중적인 공산당과 다수의 급진적 지식인들이 존재했다 - 에 집중되어 갔다. 이 중 한 가지라도 그 조건(대중적 공산당과 다수의 급진적 지식인들)을 충족시키지 못한 나라에서는 발전된 마르크스주의 문화가 등장하지 못했다. 이 세대의 마르크스주의는 (이전과는 달리) 정치적 실천과 구조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고전적 세대의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 실현된 이론과 실천의 유기적 통일성은 서유럽에서 1918년에서 1968년에 이르는 50여 년 사이에 분리되고 말았다. 루카치, 코르쉬, 그람시 세 사람이 각자 처해 있던 운명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계급투쟁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던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기 이전에 독일은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대중적인 공산당이 존재한 유일한 나라였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서독에서 독일공산당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반면, 프랑스에서 프랑스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주요 조직이 되었다. 1940~1944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 이때 프랑스에는 하나의 이론적 조류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일반화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됐다. 인민전선 기간 동안 대중의 주도로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한 프랑스공산당은 2차대전을 통해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2차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에 프랑스 노동자계급 내에서 프랑스공산당의 조직적인 권위는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적 성과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냉전이 시작되자마자 당내에서 문화적 통제가 강화되고, 냉전이 절정에 달하면서 프랑스공산당 지도부가 강력하게 문예정풍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차대전 이후 10년 사이에 새로 대두한 주요 현상은, 마르크스주의가 독일 점령기에 등장한 실존주의에 끼친 영향이었다. 실존주의는 사르트르, 메를로-퐁티(1908~1961), 그리고 시몬느 드 보부아르(1908~1986)의 저술에 힘입어 전후에 광범위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0~1965년에 알튀세의 저서들이 출간되면서 프랑스공산당 당내의 지적 논쟁에 불이 붙게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1947~1949년에 그람시(1891~1937)의 『옥중수고』가 출간됐다. 그람시의 이 저술로 정점에 달한 이탈리아만의 고유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가 냉전의 참화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람시의 이론적 업적이 사후에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람시의 이론적 유산은 급속하게 잊혀져갔다.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학파를 창시한 사람은 갈바노 델라 볼페(1895~1968)였다. 그는 전쟁 전 많은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파시즘에 타협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향으로 젊은 지식인 집단 - 피에트라네라, 꼴레띠, 로씨, 메르커 등등 - 이 이탈리아공산당 내에서 가장 응집력 있고 생산적인 학파를 형성할 수 있었다.
1924년부터 1968년까지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사르트르가 주장한 것처럼 ‘중단’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정치적 실천에서 끊임없이 우회하면서 발전했다. 파시즘의 여파 또는 전후 공산주의의 억압으로 대변되는 제도적 저해 요인들이, 서유럽이라는 무대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이 분야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또 다른 원인은 이 시기가 당시 산업화된 세계 전반에 걸쳐, 자본이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다진 시기라는 데 있다. 동시에 2차대전의 여파로 부르주아 지배 역사상 최초로 모든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보통선거권에 기초한 대의제 민주주의가 등장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이론적 분석이 없었다. 즉, 부르주아-민주주의 국가 같은 것은 마르크스나 레닌의 주요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생전에 그런 유형의 국가를 본 적이 없었으며, 레닌의 투쟁 대상은 러시아의 차르 체제였다.
3장 이론과 실천의 분리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주요 대상이던 경제구조 또는 정치구조에 대한 분석은 2차대전 종전 이후 점차 시들해져 그 자리를 철학에 내주고 말았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대학이라는 교육기관 - 한때 현실세계의 정치투쟁에서 비켜난 피난처이자 도피처였던 - 에 사실상 완전히 통합되었다. 같은 시기에 루카치, 르페브르, 골드만, 코르쉬, 마르쿠제, 델라 볼페, 아도르노, 꼴레띠, 그리고 알튀세 모두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었고 이들이 가르친 과목은 전부 철학이었다.
1844년의 파리수고(『경제학-철학 수고』)가 1932년에 모스크바에서 최초로 출간됐는데 이때부터 마르크스의 초기 철학적 저술들에 관심이 집중됐다. 마르크스의 초기 저술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적 분석으로 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리고 변혁하는 데) 체계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인식론적 원리를 제공하는 원천으로 간주됐다. 이런 생각은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장기간 동안 마르크스의 저술들에 복잡하게 산재해 있는 방법 논쟁으로 치우치는 결과를 낳았다. 용어는 점차 전문화되었고, 급기야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성격을 띠게 됐다.
장기간에 걸친 (이론과 실천의) 분리는 서구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 형태를 만들었고, 서구 마르크스주의에 또 다른 흥미로운 영향을 끼쳤다.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나침(羅針)은 점차 당대 부르주아 문화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의 스탈린주의화와 더불어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가 안정을 되찾았다는 것은, 부르주아 사상의 주요 분야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활기를 띠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부르주아사상의 문화적 변화와 발전 능력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마르크스의 중심축이 (게르만계에서 라틴계 지역으로, 정치경제학에서 철학으로) 뒤바뀌면서,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범위를 한정해 준 마르크스주의의 실질적인 통일성도 내부에 존재하는 분열이나 적대를 제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편 이런 분열과 적대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경계가 분명해지면서, 이 전통이 내부적으로 생명을 얻고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그렇지만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지적 배경에 대한 정확한, 또는 적절한 범주를 설정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서구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분명한 전선(battle-line)들을 만들어내려는 노력들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60년대에 적어도 두 개의 전선(헤겔파와 반헤겔파)이 알튀세와 꼴레띠에 의해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서구 마르크스주의 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할 여지는 없다. 오히려 각 이론 체계의 독창성과 앞선 역사유물론의 고전적 유산을 대조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할 듯 싶다. 왜냐하면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대차대조표에서 새로 등장하는 개념이나 새로 발견되는 주제가 하나의 역사적 전통으로서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성격과 힘을 평가하는 가장 비판적인 척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4장 개념의 혁신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방법에 대한 의문을 넘어 실제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거의 상부구조에 대한 연구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더욱이,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많은 관심을 두던 특수한 상부구조들은, 엥겔스가 언급한 경제적 하부구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즉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들이었다. 다른 말로,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주된 연구 대상은 국가 또는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화였고 예술이었다. 루카치와 아도르노, 벤야민, 골드만 등이 이에 관련된 저서를 남겼다. 결국 미학은 이 전통의 가장 지속적인 집단적 성과물이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사용한 개념들은 매우 새롭다. 가장 먼저 손꼽히는 것이 그람시의 헤게모니다. 그람시는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에서 유래한 이 개념을 차르 체제하의 러시아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자본주의 권력장치의 구조들을 이론화할 목적에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탈바꿈시켰다. (군주의) 힘과 교활함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분석을 연상시키고, 전술적으로 이것들을 뒤바꿔놓은 듯한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서유럽 부르주아의 계급지배의 공고함과 복잡성을 지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구체적인 시대 구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철저한 이론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발전시킨 인간과 자연에 대한 구상이었다. 이것은 셸링의 역진화론적 형이상학에서 기원했다. 모든 기록된 역사를 태초의 신성이 현세에 ‘수렴’된 이후, 신과 우주가 재통합해 궁극적으로 자연이 ‘재생’되기에 앞서 인간이 고등한 상태에서 하등의 ‘타락한 자연’의 상태로 후퇴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교리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해 변형되어 세속적인 ‘계몽의 변증법’에 적용되었다. 여기에 마르쿠제가 특수한 변화를 가했다. 프로이트를 직접 수용했던 마르쿠제에게 인간에 내재한 본성은 본질적으로 성적 본능이었다. 프로이트의 초심리학을 받아들인 마르쿠제와는 다르게 알튀세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이론을 구성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을 받아들였다.
각각의 이론체계가 아무리 서로 불규칙하게 변화했을지라도 하나의 기본적인 상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잠재된 염세주의였다.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의 모든 주요한 출발점들 또는 실질적인 발전들이 역사유물론의 고전적 유산과 구별되는 특징은 그 함의하는 바나 결론이 모두 암울하다는 것이다.
원칙상 마르크스주의는 보편과학을 표방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 이외에 순전히 민족적이라거나 대륙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서구’라는 용어는 불가피하게 제한된 판단을 함축한다. 보편성의 결여는 진리의 결여를 의미한다. 따라서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서구에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보편적 의미의)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역사유물론은 오직 지역적 편협성에서 해방될 때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제 그 힘을 복원해야 한다.
5장 서구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
현재 노동자계급 운동은 과거에 이론과 실천의 단절로 인해 초래된 장기간의 계급정체를 불식시키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 1968년 5월 프랑스혁명(68혁명)은 프랑스만의 고립된 현상에 그치지 않았다. 1920년대 초반의 상황과는 달리, 이 봉기는 이듬해에 국제적인 노동자계급 봉기의 물결이 되어 제국주의 세계로 퍼져 나갔다. 1969년에 이탈리아의 프롤레타리아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업의 물결을 일으켰다. 1972년에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영국 경제를 마비시킬 정도로 자본가계급에게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공세를 가했다. 그리고 일본의 노동자계급은 1973년에 자본에 맞서 당시까지 볼 수 없던 거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1974년에 세계 자본주의경제는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동시 다발적인 경기침체에 빠져들었다. 산업노동자계급의 실질적인 투쟁으로 재개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대중투쟁 간의 혁명적 결합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런 이론과 실천의 재통합은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에서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여러 측면에서 유럽의 좌파 지성사라는 무대의 전면을 장식한 것은 루카치와 코르쉬에서 그람시 또는 알튀세로 이어져 내려온 서구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전혀 다른 성격을 띤 마르크스주의 전통 - 68혁명 시기에, 그리고 그 이후에 처음으로 폭넓은 정치적 관심을 받은 - 이 ‘이 무대 뒤에서’ 전면으로 부상했다. 다름 아닌 트로츠키주의였다.
레닌 사후에 트로츠키는 국제 노동운동을 관료주의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하고자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트로츠키는, 국제 노동운동이 전세계적 규모에서 자본주의를 성공적으로 전복하기 위한 투쟁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당시 독일 나치즘에 대한 트로츠키의 저술은 사실상 20세기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다.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과 스탈린 치하 소련의 운명에 대해서도 엄밀하고 포괄적인 이론화를 시도했으며,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에서 이것을 증명하고 발전시켜나갔다.
트로츠키의 이 전통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철학이 아닌 정치학과 경제학에 초점을 두고 있다. 또 철저히 국제주의적이었으며, 그 관심이나 지평에 있어서도 단일 문화나 국가에 한정되지 않았다. 이 전통에 속한 이론가들은 명료하고 한결같은 언어로 말했으며, 정제된 문장은 다른 전통의 문장에 비견되는, 또는 그것보다 더 우수한 문학적 자질을 보였다. 이 전통은 대학이라는 교육제도와는 전혀 상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수배자였거나 범법자였다.
트로츠키주의의 전통은 변화된 시대적 상황에 저항했지만, 자신을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구별하면서 특별히 더 불리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사회주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여러 사건들에 맞서 자신의 유효성과 현실성을 재확인하려던 시도는, 본의 아니게 이 전통을 보수주의로 기울게 만들었다. 트로츠키주의 전통은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교리를 보존하는 것에 항상 우선순위를 두었다. 냉철한 지성보다는 의지가 앞섰던 노동자계급을 위한 승리 지상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끝까지 굽히지 않던 (경제적) 파국론은 이 전통이 지닌 전형적인 취약점이었다.
1960년대 말에 나타난 변화의 조짐이 서구 마르크스주의에도 영향을 주었다. 관료주의적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대중의 혁명운동에 이론과 실천이 재통합된 것은 사실상 이런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서 다룬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이론가들 중 대다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지적 자원은 이미 고갈된 것으로 보인다. 혁명이론은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투쟁이 바탕이 될 때라야 비로소 올바르고 궁극적인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물론 근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듯이, 단지 형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정당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소규모 혁명가 집단의 투쟁정신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현실의 대중과 연합이 필요하다. 대중들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게 될 때, 이론가들 - 지난 50여 년 간 서구 세계에 존재해왔던 그런 이론가들 - 은 반드시 침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