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이유

   
갈렌 스트로슨(역:전방욱)
ǻ
이상북스
   
20000
2020�� 07��



■ 책 소개


죽음, 자유, 자아, 기억, 영언에 대한 잠들지 못하는 자들의 철학
원초적 괴로움의 심연을 찾아서…


1장 “자아의 감각”에서 스트로슨은 “나는 내 인생을…막 시작한 것 같은…지속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존 업다이크의 말처럼 자아의 감각이 끊임없이 새로워진다고 말한다.


2장 “우리 시대의 오류”에서는 평범한 인간이 삶을 경험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으며, 삶에 대한 풍부한 서사적 관점이 없다고 해도 진실하고 완전한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항상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쓴다.


3장 “나는 미래가 없다”에서는 죽음을 겪는 당사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에 죽음은 두렵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4장 “모든 것은 운에 달렸다”와 5장 “당신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없다”에서는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궁극적인 도덕적 책임의 불가능성을 밝히지만 실제로 이것을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6장 “가장 어리석은 주장”에서 스트로슨은 “의식의 존재, 즉 의식적 경험, 경험의 주관적 특성”을 부정한다. 7장 “진정한 자연주의”에서는 스스로를 물리주의적 자연주의자라고 밝히며 의식적 경험이 실제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방어하기 위해 다섯 살짜리도 그것을 알고 있다고 단언하며 거짓 자연주의자들을 논박한다.


8장 “이야기되지 않은 삶”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들 삶의 서사를 구축하고 나아가 그렇게 함으로써 더 완벽하고 만족스럽고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전제를 다시 한 번 부정하면서 모두가 서사적 정통성을 따르는 획일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더 좋은 생활방식도 있음을 알려준다.


9장 “2년의 시간”은 편집자의 강권으로 쓰게 된 자전적 에세이로, 간결하지만 웅변적이고, 감정적으로 솔직하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 저자 갈렌 스트로슨 
철학에 관한 일곱 권의 책을 출판한 작가이자, 현재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교의 철학과 총장석좌 교수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결정론을 옹호하는 물리주의적 자연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 역자 전방욱
서울대학교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강릉대학교에 부임해 학장(2006-2008)과 총장(2012-2015) 등을 거쳐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생명윤리학회장(2008-2009),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윤리위원장(2010), 아시아생명윤리학회 부회장(2010-2014)을 역임했고, 현재 아시아생명윤리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플로리다 대학 식물학과에서 박사 후 연수 과정(1991-1992)을 마치고 평범한 생물학자의 길을 걷다 학계에서 소홀히 다루어지던 생명윤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수상한 과학》을 썼고, 캘거리 대학 커뮤니케이션문화학부에서 과학커뮤니케이션을 연구했다(2004-2005). 이 연구 결과로 제1회 한국생명윤리학회 논문상을 받았다(2006). 새로운 생명공학 기술의 윤리적 함의를 연구하며, 최근에는 주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기술윤리, 신경윤리 등에 관심을 쏟고 있다.


*아시아생명윤리학회는 아시아 지역의 생명윤리분야 연구 성과와 생명윤리 교육의 전문성 강화, 생명윤리와 관련한 향후 도전과제 해결 방안을 논의하는 국제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95년에 창립하여 현재 아시아 전역(동남아시아 및 서남아시아를 포함)의 30여 개 국에 12명의 지역별 부회장과 10명의 지역대표를 포함하여 500여 명이 회원으로 있으며 회원국을 순회하며 연례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2017년 18차 학술대회는 전방욱 회장의 취임과 한국생명윤리학회 20주년을 가념하기 위해 10월 25-27일 연세대에서 개최되어 19개국에서 117명의 회원이 참가했다.


■ 차례
저자 서문


0. 서론
1. 자아의 감각
2. 우리 시대의 오류
3. 나는 미래가 없다
4. 모든 것은 운에 달렸다
5. 당신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없다
6. 가장 어리석은 주장
7. 진정한 자연주의
8. 이야기되지 않은 삶
9. 2년의 시간


주와 참고문헌
역자 후기


 




불면의 이유


나는 미래가 없다

만약 어른이 되어서 내가 내일 아침에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나을까 자문한다면, 그리고 내가 죽으면 어떤 사람들이 불행해질까 하는 사실을 제쳐둔다면, 삶의 정상적이고 우울하지 않은 기간에, 살거나 죽거나 상관없다는 것을 나는 숙고 끝에 깨달을 것이다.


내가 책을 끝내려고 하거나, 휴일이나 행복, 사랑에 빠지거나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사실은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고, 내 죽음이 즉각적이고 고통 없는 소멸,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문제라고 가정할 때, 내가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나/GS는 나라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아무것도 잃어버리거나 잃지 않는다. 나의 미래의 삶과 경험(지금 죽지 않는다면 내가 겪을 삶과 경험)은 나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는, 그런 식으로 내게 속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지금 죽지 않으면 갖게 될 삶과 경험은 죽음이 빼앗을 수 있는 소유물로 생각될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곰곰이 생각한다. 삶으로부터 생명이 박탈될 수 있고, 삶이 그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무언가가 존재하는 끈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하기 쉽다.


나는 이 견해를(미래에 대한) 무소유(No Ownership)라고 불러왔지만, (미래의) 무손실(No Loss)이라고 부르는 것이 종종 더 나을 때도 있다. 이 명칭들은 서로 다른 함의를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 단일한 견해에 사용될 수는 없지만, 일반적인 생각이라면 충분히 명확하게 사용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자아나 경험의 주체나 인간이 가장 본질적으로 덧없고 일시적인 것이며, 단명한 실체라고 간주한다면(나는 이 견해를 매우 심각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무소유나 무손실을 즉시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일시적인 견해를 벗어나 인간을 비교적 수명이 긴 것으로 간주하는 보편적 개념이 옳다고 해도, 심지어 어떤 사람들이 믿듯이 우리가 불멸의 존재라고 해도, 무손실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손실이 정말 사실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죽든지 간에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즉각적이고 고통 없는 무, 경험한 바 없는, 완전히 예상치 못한 소멸에 주의를 집중할 것이다-나는 이를 IPU 소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경우에는 두려움이나 고통이 없다. 모든 것이 사멸 직전까지 완전히 정상적이다. 아무런 나쁜 것을 겪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생명은 그 순간까지 또는 그 순간에도 빛을 내며, 그런 의미에서 완벽하게 끝난다.


아마도 IPU 소멸을 충분히 정확하게 상상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자신이 죽음이 상상하는 것의 일부라는 점을 감안할 때, 완전히 예기치 않은 죽음을 상상하기란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을 지성적으로 생각하기는 쉽지만 감정적인 간섭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이 IPU 소멸의 경우에도 무손실이 명백하게 허위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나는 그것을 어떤 사람이 완벽하게 상상하고 잘못된 것으로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한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무손실이 실제로 분명 허위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의미하는 바를 즉시 깨닫고 명백하게 진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아마도 전부 일관되지는 않지만, 어느 경우든 다양한 성찰을 기록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무손실이 진실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운에 달렸다

궁극적인 책임 개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분명하다. 극적으로 그것을 밝히는 한 가지 방법은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들 중 어떤 사람은 지옥에서 고통으로 벌하고 다른 사람들은 천국에서 더없이 행복한 것으로 보상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 일리가 있는 그런 종류의 책임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그것은 일리가 있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책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천국과 지옥의 동화를 믿을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일리가 있는”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궁극적인 책임을 믿기 위해서는 동화를 믿을 필요가 없는데, 많은 무신론자들도 그렇게 한다.


궁극적 책임을 밝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실용적이거나 실제로 심미적 정당성을 갖지 않고 처벌과 보상이 공정할 수 있다면 존재하는 그런 종류의 책임이다.


이것은 약간의 성찰을 필요로 하며,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인 책임의 종류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유용하다. 그러나 궁극적인 책임에 대한 우리 믿음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가 되는 일상적인 상황을 기술할 때 그것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마지막 10파운드짜리 지폐로 케이크를 사기 위해 국경일 저녁에 가게를 향해 출발한다고 가정해보자. 모든 것이 팔리고 10파운드짜리 케이크만 하나 남았다. 가게 계단에서 누군가 자선냄비를 흔들고 있다. 당신은 멈춰서고, 무엇을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 같다:


당신이 선택하는 무엇이든 궁극적으로 당신이 책임을 진다는 방식으로 당신은 진정으로 근본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 당신은 돈을 냄비에 넣거나, 들어가서 케이크를 사거나, 그냥 떠나거나 할 수 있다. 당신은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다.


이 입장에서, 결정론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다. 5분 안에 지금 처한 상황을 돌아보고 그다음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할 수 있다. “내가 그것을 했어야만 했던 것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신이 전심으로 지금 당장 이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해도, 당신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의 절대성에 대한 현재의 감각은 건드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한 상황에서 결정론이 사실이라고 실제로 믿지 않으면서, 또한 그 허구성이 자유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것을 진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궁극적인 책임감의 느낌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을 지기 위해서(최소한 결정적인 정신적 측면에서) 아무도 자기 원인이 될 수도 없고 자기 원인이 될 필요도 없다는 비자유이론가의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인다고 가정해보자.


이 입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궁금해 할 때, 이것은 한 사람의 근본적인 자유와 책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의 근본적인 책임은 그가 자신의 상황을 완전히 의식하고, 선택할 수 있고, 어떤 행동이 다른 행동보다 도덕적으로 더 낫다고 믿는다는 사실에서 단지 비롯되는 것 같다. 이것은 완전하고 궁극적인 책임을 지기에 바로 충분한 것 같다.


하지만 비자유이론가들에 따르면,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하든 간에,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 때문에 하는 일을 할 것이고,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은 자신이 존재하는 상황을 스스로 의식하더라도 책임질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없다

탬러 소머즈와의 대화

탬러 소머즈(Tamler Sommers): 사실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주 어렵게 이루어 질 수 있다면, 꼭 그래야만 할까요? 다른 말로 하면, 누군가가 근본적인 도덕적 책임(deep moral responsibility)이 불가능하다는 기본 주장의 결론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그가 이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권고하겠습니까?


갈렌 스토로슨(GS): “사실대로 살기” 위해서는 수년간의 영적 훈련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실제로는 평범한 세속적인 숙고를 통해 상당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추를 누름으로써 그것을 즉시 달성할 수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은 당신이 그 단추를 눌러야 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엄청나게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정상적인 인간관계의 범위 밖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인단 거기에 있었다면 그 결과를 거리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한때 그곳에 있었던 것이 옳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분명히 확신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돈독한, 사람을 위로하는 동료를 모두 남겨두고 그곳에 가려고 애쓰는 것은 두려운 일 같습니다. 슬프고 진정한 개인적인 관계를 배제하는 이 측면은 우울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평소에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낭만적인 사랑을 수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민의 능력을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고, 감사와 같은 감정적인 태도도 제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들을 내부에서 깊이 바꿀 것입니다. 그것들을 도덕적 태도에서 심미적 태도로 바꿀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바로잡히게 됩니다.


TS: 정말 낭만적인 사랑이 배제될까요?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랑이 어느 정도 완벽하게 남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낭만적인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근본적인 도덕적 책임(deep moral responsibility)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죠?


GS: 철학자답게 조심스럽게 낭만적인 사랑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대로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낭만적인 사랑은 감사를 느낄 가능성, 진정함, 자유를 전제하는 감사, 단순히 심미적인 느낌으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감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가 《자유와 신념》의 마지막 장에서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낭만적인 사랑, 기독교의 사랑보다 구체적인 개인에 대한 사랑, 일반적인 선행은 감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실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미셀 드 몽테뉴와 요절한 에티엔 드 라 보에티와의 널리 알려진 깊은 우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그들의 우정에 대해 묻자 그는 “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였기 때문에”라고 간단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동일합니다. 나는 이것이 깊고 진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좋습니다. 나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했거나, 적어도 대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당신은 그 단추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TS: 내게 만약 돌아올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꼭 누를 것입니다. 내가 걱정하는 한 가지(낭만적인 사랑을 잃는 것 이상의 것)는 스포츠를 즐기는 능력을 잃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론을 제치고 내 삶의 한 부분입니다. 레드 삭스가 지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죠!


GS: 당신이 다시 돌아올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난 상상하지만, 이번 단 한 번만, 당신을 위해서, 좋아요, 하지만 당신이 돌아오리라고 기대하진 않아요. 그리고 당신과 레드 삭스는 괜찮을 겁니다.



이야기되지 않은 삶

서사가 되는 것은 “자신의 삶, 시간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 이야기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 또는 아마도 이야기의 모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이 개념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경험하거나 생각하는 자연스런 성향”이다.


서사적 관점의 인기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실재와 거의 관계가 없는, 자신에 대한 많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서사적이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로잘린드가 말한 것처럼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흘러가며”, 그것은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이동한다.


우리 중 일부는 삶의 경험에 대해 당연히 서사적이지 않다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 중 몇몇은 자연적으로, 근본이고 긍정적으로 비서사적이라는 것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우리 중 일부는 근본적인 기질에 의해 뼛속부터 반서사적이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연장된 일련의 사건들을 기억하려 할 때조차, 우리에게 전달되는 기억이 절망적일 정도로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기억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헨리 제임스가 “삶의 대혼란”이라고 부르는 것의 모든 부분을 아우른다.


이 문구는, 제임스나 나에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력을 완벽하게 잘 알고 있고, 삶의 생물학적 시간 순서(출산, 유아, 소아, 청소년, 성인, 황금기, 성숙, 쇠퇴, 노년, 죽음), 그리고 관련된 문화적·시간적 순서 또는 통과의례(이 부분에서 운전, 결혼, 음주, 투표, 입양 은퇴, 무료 버스승차권 획득 포함)를 완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규모의 인간 존재를 더 잘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


삶의 구조에 대한 이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비서사적인 사람들은 가장 평범한 아침이나 확실한 시간적 압박(직장에 지각) 속에서, 그리고 생생한 꿈을 꾸는 것만이 아닌 때에도 “영원히 허우적거리는” 그들 자신을 발견한다.


비서사적인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정신의 잠을 깨웠는지”, 즉 그들이 과거를 몽유병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깨웠는지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런 종류의 경험은 어떤 서술적 일관성 또는 서술적 자기 결정 또는 “자기주도의 느낌과는 특별한 관련이 없다.


“자기주도”의 경험, 즉 “삶-쓰기”나 서사적 자기구성의 어떤 과정을 통해 자기결정에 참여한다는 느낌은 나 같은 부류에게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열망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근본적인 자기창조의 가능성을 믿는 것 같다.


자기의 생각에 대해 “주도적 감정”을 가진 사람과, 나처럼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단지 일어날 뿐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잘 검증된 실험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 차이는 매우 클 수도 있고, 자기자신을 자기구성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추적할 수 있다.


어쨌든 자기구성, 자기주도의 경험은 충분히 실제적인 것 같다. 그러나 자기주도의 실제 존재에 관한 한, 삶에서 자기결정의 어떤 과정의 실재를 삶-쓰기로 보는 것에 나는 회의적이다. 메리 맥카시(Mary McCar-thy)는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에 당신이 나이가 들었을 때 느끼는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찾는 것은 전혀 쓸모없고, 찾을 수 없을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만들 수는 있다. 나는 마스크, 예이츠의 마스크를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마침내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자기 자신을 만들고 선택하기 시작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그녀가 어떤 일을 경험하는 방식이고, 흥미로운 정도의 주의력으로 그녀가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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