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고

   
박경리
ǻ
마로니에북스
   
12000
2013�� 08��



■ 책 소개
1926년 출생한 박경리는 만 20세까지의 시간을 온전히 일제 강점기 속에서 지내야 했다. 『토지』는 구한말에서 1945년 해방까지의 시공간을 온전히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일본 체험은 아픈 기억이자 굴레였으며, 한편으로 분석과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다. 『토지』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의 부침과 민족 담론의 양상, 일본의 식민 지배 전략과 한일 문화 비교론, 지식인들의 숱한 논쟁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이 책은 생전에 작가가 일본에 관해서 썼던 글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펼쳐지는 그의 발언은 단순히 한일 두 나라의 이해와 갈등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생명에 대한 존중과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에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저자 박경리
박경리 저자 박경리는 1926년 10월 28일(음력)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하였다.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을 비롯하여 『파시』(1964), 『시장과 전장』(1965)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26년 만인 1994년에 완성하였다. 2003년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수필집 『Q씨에게』, 『원주통신』, 『만리장성의 나라』,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생명의 아픔』 등과 시집으로는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등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연세대학교에서 용재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1996년부터 토지문화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현대문학 신인상, 한국여류문학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호암 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칠레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을 수여 받았다. 2008년 5월 5일 타계하였으며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 차례
편집의 글

1부
일본산고
1. 증오의 근원
2. 신국의 허상 I
3. 신국의 허상 II
4. 동경까마귀
5. 출구가 없는 것
6. 일본인들의 오해, 우리의 착각

 

2부
1. 진실의 상자 못 여는 일본
2. 신들이 사는 나라
3. 美의 관점
4. 신기루 같은 것일까
5. 다시 Q씨에게2―망상의 끝

 

3부
한국인의 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

부록 생명력 없는 일본 문화

 




일본산고


일본인들의 오해, 우리의 착각

재작년, 아니 1988년이니까 그보다 더 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의 평론하는 아무, 아문데 만날 수 있겠느냐는 내용의 전화였다. 다 같이 문학하는 처지, 못 만날 이유가 없고 좋다고 했는데 며칠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언제쯤 찾아가는 게 좋겠느냐는 상대방 얘기였다. 항상 집에 있으니까 내일이라도 상관없다, 했더니 내일 문예지의 편집장이 오기 때문에 모레면 어떻겠느냐 다시 물었다. 순간 단순한 내방이 아닌 것을 깨닫고 그때야 무슨 용무냐고 물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인터뷰라면 안 한다고 했더니 한참 있다가 그럼 그냥 찾아가겠노라 해서 용건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면 상관없다고 응낙했다.


<문예>라는 문학지의 편집장과 통역을 위한 한국인 여성과 학생, 그리고 젊은 평론가 가와무라미나토씨 네 사람이 약속된 날 원주로 찾아왔다. 키가 좀 큰 편집장은 보기에 따라 매우 냉철한 것 같으면서 선량한 약점이 있는 것 같이도 보였다. 나는 내 자신을 소개하기를 “철두철미 반일 작가다.” 두 사람은 약간 놀라는 것 같았다. 왜 충격을 받을까? 전에도 그런 얘기는 했었고 일본인들은 가만히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깨달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반일을 당연하다고 본 그들은 이제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들과 나는 꽤 오랜 시간 얘기를 했다. 남경학살 사건에 관한 말이 나왔을 때 그들의 안색은 변했고 실은 겁이 많은 것이 일본 사람 아니냐 했을 때는 당혹해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손님에게 너무 무례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그들이 지식인이라는 신뢰가 있었다. 지식인끼리는 옳고 그른 차원에서 얘기가 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믿었고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들과 내가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평론가나 편집인이나 작가는 뭐하는 사람인가, 적어도 진실에, 사실에 접근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인 것이다. 내심으로 찝찔했겠지만 그들은 과히 기분 나쁘지 않게 돌아갔다.


얼마 후 잡지 <문예> 하계호가 일본에서 왔다. 그들이 말한 대로 인터뷰는 취급하지 않고 가와무라 씨의 ‘반일과 향수의 틈새’라는 평론에 내 얘기가 삽입되어 있었다. 제목이 몹시 불쾌했지만 내용은 날카롭고 일단은 공정한 입장에서 성실하게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한국의 반일에는 항상 역사를 동반하며 그것을 증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유의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들 일본인은 소위 역사적 교훈을 배우지 않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혹은 역사는 역사로서 현재와 무연한 것으로, 방편으로 씌여지는 정신적 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만세일계를 주장해온 천황의 역사, 다시 말하자면 역사로서의 천황을 의미하고 있으며 같은 일본인의 ‘역사성’이야말로 근린제국, 제민족에게는 지극히 수상쩍게 보일 것이다.”


가와무라 씨의 지적은 타당하고 평론가로서의 신뢰감을 내게 안겨주었다. 바로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인근 민족에게만 수상쩍은 것은 아니다. 일본인 자신에게도 수상쩍은 것이다. 일본인의 역사성이 인근 민족에게 피해를 준 것처럼 일본인의 의식을 꽁꽁 동여맨 허위의 포승으로 피해자인 것은 매일반이다.


“박경리 씨의 『토지』는 근원적으로 ‘대지’를 소유하고 사유한다는 근대적인 토지소유의 관념 그 자체에 대한 의의를 머금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국유지라는 개념의 확대 부연하면 경작자로서의 조선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은 일본제국주의에의 비판이기도 하지만 그 기층에 있는 것은 토지란 누구의 것이냐 하는 근대적인 경제사회 그 자체를 흔들어내는 물음인 것이다.”


『토지』를 농민소설로 간주하려 드는 일부 시각에 늘 쓰거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고 구차스럽게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도 그러는 내 자신에 짜증을 내곤 했었는데 작가의 의중을 여실히 표현해준 가와무라 씨가 고마웠다. 그러나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 구절은 인용한 것은 아니다.


조선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은 일본제국주의에의 비판이기도 하지만 그 기층에 있는 것은 토지란 누구의 것인가 하는 근대적인 경제사회 그 자체를 흔들어대는 물음이라는 가와무라 씨의 말, 여기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지만 다른 표현으로 되풀이해 보면 민족주의 반일의 동기와 민족주의 반일의 목적, 그것에는 다 사람의 생존을 저해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즉 삶의 터전인 땅이 토지라는 소유의 개념으로 변하면서 역사는 투쟁과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고 작게는 개인에서 민족, 크게는 인류 모두가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제2차 세계대전 종결까지, 제국주의 식민지시대는 가장 가혹한 땅의 유린과 생명 학살의 도가니였고 우리 민족은 살아남기 위해서 민족주의의 불꽃을 간직해야만 했다. 그러면 광복 후 우리는 민족주의를 극복해야만 했는가. 그렇지가 않다.


세계의 현실은 여전히 약자의 호주머니를 강자는 털어내고 있으며 아흔아홉 섬의 곡식을 가진 자가 한 섬 가진 자로부터 빼앗아 백 섬을 채우려는 이것이 오늘날의 민족과 민족 간의 현실인 것이다. 뿐인가, 영토의 침략보다 더욱 악성인 것은 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장본인은 누구인가, 이득을 많이 챙기는 자다. 많이 벌어들이는 만큼 땅을, 지구를 파괴하고 황폐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팽창주의는 과거와 다를 바가 없다. 그 해악도 다를 것이 없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무관심을 나타내는 일부 지식층의 이상주의 혹은 지성을 나는 지적 허영으로 본다.


토지의 일본인 오가타 지로는 코스모폴리탄이다. 그는 강자 편에서, 가해자 편에서 양심을 지켜 비판하는 세계주의자다. 그러나 피해자가 불이익을 안고 과연 평등의 세계주의로 갈 수 있는 걸까? 허구요 망상이다. 한국인의 반일이 모두 그런 논리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분풀이라는 본능적 감정인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정치적 차원이지만 일본인의 의식도 간과할 수 없는 만큼 일본은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된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보다 오늘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인의 분을 풀어주지 않았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였지만 그들은 거의 보상하지 않았다.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통분이 무슨 사과인가? 그러고도 욕을 안 먹겠다는 것은 뻔뻔스런 일이다. 가와무라 씨는 한글세대는 반일이라는 대전제를 전면에 세우고 있으나 구체적 체험과 연구 관찰이라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반일이라는 민족교육으로 길러진 지식과 근본적 이미지에 의해 일본을 단죄, 규탄하는 태도를 가지기 일쑤다 했는데 동감이다. 그러나 동감의 뉘앙스는 상당히 다르다. 도식적인 교육을 떠나 생생한 역사적 사실 역사적 입김에 접할 수 있다면 한글세대는 무조건 감정의 시비를 떠나 조목조목 따지고 넘어가는 사상적 강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일본의 전후세대도 우리 한글세대에 대한 불만을 사실에 입각하여 반박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관찰하고 연구해야만 한다. 대로(大路)는 결코 일방통행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의 상자 못 여는 일본

최근 핵실험을 감행한 프랑스에 대하여 몹시 강경했으며 역시 핵실험을 한 중국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낸 나라가 일본이었다. 핵문제에 관한 한 인류 모두가 분노하고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구의, 생명들의 종말이 그것에 달려 있고 절대로 허용해서도 안 될 심각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목소리를 높이는 데는 곱게 보아줄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최초로, 유일하게 핵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인지라 그럴 수도 있겠다. 혹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광복을 기념하는 우리들의 국경일 8.15는 해마다 그 감격과 의의가 희석되어가는 반면, 히로시마 원폭의 기념행사는 해가 거듭될수록 열기가 높아가는 것 같고 분함과 보복의 칼을 가는 듯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하는데, 그러나 그보다 좀 더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이 일본의 피해의식이다. 그것은 가해자라는 또 하나의 피해의식을 상쇄하는 데는 안성맞춤의 전략적인 것이기도 해서 대충 넘어가려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왜 하필 이론에 핵폭탄이 떨어져졌는가. 그 원인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남경의 30만 양민 학살에 대해서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한 적은 있었다. 한때 소설을 썼고 정치가로 변신한 이시하라라는 위인이 외국 기자에게 남경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어디 남경 학살뿐이랴. 그러나 그 비행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에 사실 우리는 지쳐버렸고 힐난하는 처지에서도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사건들, 하지만 그들은 거론하는 데 지친 것도 아니며 부끄러워서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열심인 것은 원폭의 기념탑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고 그들 자신이 피해자임을 세계만방에 고하는 일이다.


그러면 핵폭탄과 현재의 일본, 그 함수관계는 어떤 것일까. 전쟁 말기 청소년들을 자살 비행으로 내몰던 가미카제를 나는 기억한다. 사이판 유황도 등, 그들의 거점이 무너질 때마다 비전투원에게까지 소위 그 옥쇄라는 것을 강요했고 차마 자결하지 못하는 모친을 아들이 목 졸라 죽였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다. 그 무렵 일본은 본토 결전을 각오했으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서 옥쇄한다는 것이 흔들 수 없는 명제였다. 그러나 일왕은 깊고 깊은 지하에서 무조건 항복을 녹음했으며 군인들은 궁성으로 난입하여 항복을 막으려 했다. 어쨌거나 핵폭탄의 투하는 일본인 전원 옥쇄 전에 전쟁을 끝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폭 세례의 원인을 만든 것은 일본이다. 원폭으로 하여 일본이 지구상에 살아남았다는 것도 신빙성이 있는 얘기다. 끔찍스럽고도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치가 저지른 일을 청산한 독일과 청산하지 않는 일본, 오히려 침략을 정당화하며 초등학교 우리의 어린이까지 전선으로 차출하여 하루에도 수십 명 병사를 상대하는 지옥을 연출하고도 마이동풍, 미국이 성폭행을 했다 하여 지금 국론이 뒤끓고 있는 일본, 도대체 일본과 독일은 어떻게 다른가. 가스실과 위안부가 같지 않아 그럴까. 영육이 동시에 파괴되는 위안부가 가스실 참사를 상회하는데도. 그러면 동과 서의 차이점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옛날 일본은 아시아에서 고도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고아 같은 존재였다. 기능적이며 공리적인 특성은 차라리 서쪽에 가깝다. 그리고 일본은 서쪽을 등에 업고 동쪽을 배신한 유일한 나라다.


일본 전설에 우라시마라는 어부 얘기가 있다. 용궁에서 옥함 하나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고향에는 모두 낯선 사람뿐이요, 외로워진 그는 열지 말라는 당부를 어기고 바닷가에서 옥함을 여는 순간 백발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백발은 정확한 시간의 표상이다. 그러나 일본은 옥함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열어야 한다. 백발이 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질서이며 진실이기 때문이다.


美의 관점

근대사조가 일본으로 밀려들어 온 후 특기할 만한 현상의 하나로 문인들의 빈번한 자살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명치원년(明治元年)에서 패망까지 백 년이 채 못 되는 시기에 그같이 많은 문인이 자살한 것은 유례를 찾기 좀 힘들 것입니다. 기억나는 대로 거물급만 대충 챙겨보아도 수월찮은데, 낭만파 시인이며 평론가였단 기타무라 도코쿠는 자기 집 마당가에 있는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으며, 지순한 감성의 소유자인 시인 이쿠다 슌게쓰는 세토 나이카이에 투신자살했지요. 소설가로서는 가와카미 비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가 있으며 아리시마 다케오는 유부며와 함께 별장에서 정사를 했습니다. 문인들의 자살이 다른 나라에서도 더러 있는 일이지만 유독 일본에서 현저하게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도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향해 발돋움했으며 전승국으로서 영토를 확장하고 생활수준도 향상되어 소위 좋은 시절이었는데 말입니다.


흔히 칼의 문화, 죽음의 미화라는 일본 전통에다 원인을 두는 안이한 생각도 하는 모양인데 물론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후에 자살한 미시마 유키오의 경우는 노골적인 그런 흔적을 보게 됩니다만, 얘기의 방향을 잠시 꺾어야겠어요. 칼의 문화라는 말에 대해서, 내 자신도 가끔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일이 있습니다만, 과연 칼의 문화가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죽음의 미화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배를 가르고 죽는 그야말로 몬도카네식의 처참한 셋푸쿠(하라키리)가 진정 아름다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살에도 여러 방법이 있는데 하필이면 생선 배 가르듯 내장이 드러나는 그같은 것을 미화하고 의식화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문화는 삶을 위한 틀이며 본이지 절대 죽음이나 칼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본질적으로 칼의 문화, 죽음을 미화(기만)하는 문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방편상 강변하고 있는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미시마의 자살에는 노골적인 전통의 흔적이 있다 했지요? 아마 내 기억에는 배를 가르고 죽은 것으로 남아 있는데, 어쨌거나 칼은 생명을 끊는 것이 그 본질이나 인간에게 칼은 생활을 위한 기능적 일면도 있는 것이며 삶의 필연이 죽음일진대, 죽음의 미화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정직하게 말하여 그 문제는 상당히 유혹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라 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는 삶을 위해 있는 것이며 연속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고요. 여기서는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역학관계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반문화적 테두리 속에 갇혀진 예술가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어느 땅에서든 반문화적인 억압을 받으며 그것과 마주하여 투쟁하는 것은, 억압의 힘이 어디서 오든, 또 강약이 어떠하든 투쟁 자체가 예술행위의 활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문화 자체가 그렇고 창조자의 경우도 그러한데, 승리의 물결 패배의 물결을 넘으며 융성과 쇠퇴, 복고와 신생, 그러한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시간을 질러왔고 역사는 이룩되었으며 정립할 것은 하고 버릴 것은 버리며 발자취를 남겨왔던 것입니다. 결국 절대적인 것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그 절대적 진리를 향해 몸부림치며 전진해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의 풍부한 경험이며 사고의 폭의 넓이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특수성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절대적인 가치관에 매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절대적이라는 그 자체가 기만이지요. 본질적으로 그것이 허위이며 허위이기 때문에 내용이 공동상태로서 빈곤을 면치 못하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웃에서 틀과 본을 빌려다가 내용을 채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것은 이미 너무 상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내 어릴 적에도 남의 흉내를 잘 낸다 해서 일본을 원숭이라 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국체와 질풍같이 밀려드는 외래사상 사이에서는 압사당한 것이 문인들의 자살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면으로는 그들 자살자는 의식의 한계를 느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좁은 정원에서 황막한 벌판으로 나온 미아였을 수도 있고 심오한 바다에서 헤엄칠 수 없어 익사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하며 틀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뭔가 모르지만 본성으로 돌아가려고 초조하면 할수록 길은 아득했을 것입니다. 진정 그들을 위하여 애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

반일도 대중화시대로

말하기가 거북합니다만 통속민족주의가 성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저는 한국의 품위가 떨어져 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이렇게 경제가 성장하고 올림픽을 성대히 치러서 세계의 한국이 되었는데 어쩐지 기왕에 있었던 고귀한 것이 자꾸만 사라져가는 감이 있습니다.


어릴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저는 1933년 2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소학교, 중학교시절의 11년간이라는 인격형성기를 서울에서 보냈습니다.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식민자의 자식들은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볼 수도 없는 불령선인(일제에 저항하던 조선인들을 일컫는 말)에게 대해서 외경의 염을 품은 공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물적이라 할까, 본능적이라 할까 그런 감각이었습니다. 밖에서 침입한 타민족의 지배를 받으면 자기도 반드시 분개하겠지, 그리고 반항심을 일으키겠지―그런 단순하지만 뚜렷한 상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강원도의 오지에 출장 간 친구 어머니가 밤이 되어 마을 사람들이 뿔뿔이 나가므로 따라가 봤더니 반일독립의 연설회를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가슴 두근거리며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잠자리에 든 후에 자기가 겁쟁이임을 되뇌면서 만약 잡혀서 고문을 당했을 때 나는 과연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저 서글퍼지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지사들은 내가 도저히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다!고 감탄하고 또 외경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패전 후 긴 격절의 시기를 거친 뒤에 제 이목에 들어온 한국인의 반일은 무언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왜?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지금의 반일은 옛날과 달라 같은 상황에 처하면 저라도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반일가(反日家)는 제가 어른이 되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외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용기나 담력, 희생정신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반일도 양산 대중화의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외경의 염은 일어나지 않고 시대가 변했구나 하는 감회만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적의 반일과 지금의 반일은 기본적인 성격에 있어서도 다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자를 거부하는 반일이라고 하면 후자는 끌어들이는 반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전자의 반일은 일본의 사람도 물자도 이 땅으로부터 물러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반일의 중심목표는 독립의 쟁취이었으므로 반일은 즉 배일로, 여기에는 아무런 의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반일은 “우리들의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일본이 동조하지 않는 것은 괘씸하다”라는 투의 반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이 요구하는 선에 일본은 가까지 오라’는 것이어서 거기에는 ‘너하고는 인연을 끊는다’라는 거부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여서 일본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그것이 뜻대로 안 되면 비난하는, 그런 반일입니다.


가령 대일무역의 적자를 줄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일본은 성실치 못하다, 우리나라로부터 착취만 하고 있다고 온갖 비난을 퍼붓지만 거래정지같은 행동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끌어들이는 반일의 특징은 자기의 요구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때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현실타개정책을 고안하기보다, 오로지 상대방을 성토하는 데에 몰두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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