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

   
대니얼 클라인(역:김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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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퀘스트
   
15000
2017�� 03��



■ 책 소개

 

철학계의 우디 앨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대니얼 클라인이 말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는 대니얼 클라인이 젊은 시절 낡은 노트를 가득 채운 철학 명언을 80살 인생 경험으로 새롭게 읽은 책이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시절, 클라인은 어떻게 해야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그 힌트가 될 만한 글을 찾을 때마다 공책에 전부 적어 넣었다. 에피쿠로스, 파스칼, 니체, 사르트르, 흄, 비트겐슈타인, 카뮈, 베케트 등 철학자와 작가들이 남긴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인생 명언들은 클라인에게 오랫동안 적절한 해답을 주었다. 30대 중반이 돼서 그는 명언집 작성을 그만두었는데,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가 말한 “인생의 의미는 찾았다 싶으면 또다시 바뀐다”를 적고나니 모두가 순진하고 덧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클라인은 니부어의 명언 아래에 “진작 좀 알려주지 그랬어요!”라는 짧은 코멘트를 마지막으로 공책을 닫았다. 40여 년이 지나 다시 그 낡은 공책을 열어본 클라인은 처음에는 과거의 자신이 순진했다고 비웃었지만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문제는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인정한다. 우리의 인생이 거대한 우주 안에서 먼지보다 작은 것이라 해도, 넘어지고 흔들릴 때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워줄 문장들은 필요한 것이다.

 

■ 저자 대니얼 클라인
대니얼 클라인은 1939년 미국 델라웨어에서 태어났다. 26개 국어로 번역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술집에 들어온 플라톤과 오리너구리Plato and Platypus Walk into a Bar》와 같은 대중 교양서를 집필했으며 2009년에는 소설 《현재의 역사The History of Now》로 《포워드매거진》 올해의 책 은메달을 수상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여러 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방송계에서 코미디 대본 작가로 활동했다. 이미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저작들이 보여주듯 대니얼 클라인은 진지한 철학에서도 유쾌한 웃음을 끌어내는 훌륭한 ‘철학농담꾼’이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매사추세츠 주에서 살고 있다.

 

■ 역자 김현철
김현철은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자동차회사를 거쳐 영자 신문 <코리아타임스>에서 7년간 기자로 재직했다. 다른 삶을 경험해보고 싶어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혈혈단신 유럽으로 건너가 대학 교류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 문두스Erasmus Mundus’ 국제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지금은 베를린에 머물며 번역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마음챙김 학습혁명》 등을 번역했다.

 

■차례
들어가는 말

 

1. 완벽주의, 현재를 살지 못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
2. 쾌락주의자는 왜 불안에 몸을 떨었을까
3. 세상이 낙원이라면 인간은 지겨워 목을 맬 것이다
4. 삶이 누구에게나 추하다고 생각하면 소름끼치게 평안해진다
5. 인생의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6. 자유의지는 믿는 편이 낫다
7. 이미 다 정해졌다고 생각하면 편한가?
8. 진짜 자아를 꺼내는 위험한 방법
9. 인생은 거대한 농담이다
10. 철학은 ‘머리로 하는 자위’
11. 말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정해진 관계라고?
12. 사교모임보다 고독이 좋아지는 나이
13. 나도 소울메이트를 찾곤 했다
14. 이미 살고 있지만 삶의 의미를 고민한다
15. ‘나’라는 소우주를 즐기자
16. 때때로 허무한 농담은 냉정한 위안이 된다
17. 없는 의미를 찾아 헤매는 인생의 부조리
18. 침실에서는 삶의 무의미함도 훨씬 괜찮아 보인다
19. 일요일 노이로제
20. 왜 다른 사람에게 잘해줘야 할까?
21. 한숨만 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22. 보상 없는 선행은 쉽지 않다
23. 타고난 이타주의의 한계
24. 그때도 지금도 나는 나인가?
25. 거긴 이제 아무도 안 가. 사람이 너무 많거든
26. 모든 것은 찰나, 상실은 피할 수 없다
27. 내 믿음은 네 믿음보다 우월하지 않다
28. 너무 궁금해서 믿게 되는 현상
29. 냉소적인 너마저!
30. 종교라는 공포
31. 눈물이 완전히 씻겨나가다
32. 삶은 이미 기적이다
33. 우주에 흩어진 원자들이 내 안으로 모였다
34. 죽음이 찾아올 때 나는 이미 없다
35. 힘들어도 삶에 답해야 할 이유
36. ‘만약’을 생각할수록 삶은 트라우마가 된다
37. 쓸데없는 걱정은 넣어두자
38. 끈덕지게 과거에만 머무르는 사람들
39. 익숙한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맺음말
용어집
명언 노트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


완벽주의, 현재를 살지 못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

네가 갖지 못한 것을 갈구하느라 네가 가진 것마저 망치지 마라. 기억하라. 지금 가진 것도 한때는 네가 꿈꾸기만 하던 것임을.

-에피쿠로스, 그리스 철학자(기원전 341~기원전 270), 쾌락주의자


낡은 명언집에 맨 처음 수록한 구절이다. 쾌락주의가 그저 자기중심적인 젊은 애송이의 망상이 아니라 유서 깊은 철학사조임을 깨닫자마자 나는 쾌락주의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나 자신이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되도록 많은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지만 도를 넘고 싶지는 않았다. 두려웠다. 에피쿠로스가 내 흥미를 끈 것도 이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신중한 쾌락주의자였다.


최근 들어 에피쿠로스가 생각 많은 학생들에게 다시 주목받는 듯하다. 에피쿠로스 사상에는 뉴에이지를 떠올리게 하는 뭔가가 있다. 사후 몇 천 년이 지나 바티칸 도서관에서 발견한 에피쿠로스의 격언을 보면 마치 자동차 뒷범퍼에 붙이는 선불교 풍의 스티커 문구 느낌이 난다. 한마디로 에피쿠로스는 명언의 왕자였다.


위 명언에서 에피쿠로스는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첫째, 갖지 못한 것을 갈구하는 것은 지금 갖고 있는 것의 가치를 깎거나 심지어 없애기까지 한다. 둘째, 갈구하는 뭔가를 실제로 얻었을 때 그 결과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부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또 다른 뭔가를 갈구할 테니 말이다. 교훈은 이거다. 현재를 즐겨라. 즐길 수 있는 만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에피쿠로스식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결과를 심사숙고해보는 것이다. 현재 가진 것 이상을 원할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 대가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욕구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웃집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 뒤에 복잡다단한 사태가 닥치더라도 여전히 해볼 만한 일일까? "원하는 것을 조심하라. 정말로 갖게 될지도 모르므로."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이 오래된 금언에 날개를 달아준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욕구를 버리라는 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충고는 오늘을 사는 많은 이에게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언제나 더 많은 것, 더 많은 성취를 원하는 삶에서 단점을 보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렇게 분투하는 삶의 가장 큰 문제점을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가장 최근에 무엇을 원했든 간에 일단 그걸 얻고 나면 또 원할 게 생길 테고, 결국 영원히 충족 불가능한 욕망의 덫에 빠져버린다. "새로 산 마세라티 차가 멋지긴 하지만, 이제는 옆좌석에 앉아 줄 금발의 키 큰 왕자님이 필요해."


방심하면 누구나 이 덫에 빠지는데, 우리가 완벽주의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는 완벽주의가 고결한 인성을 상징한다고 믿으며, 아이들에게도 완벽주의자가 되라고 요구한다. 완벽주의의 결과로 우리는 자신과 자신이 만드는 것 모두를 계속 발전시키는 법을 찾아 헤맨다. 완벽주의란 온전한 성취감을 절대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데는 완벽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는 어떤 욕망도 갖지 않는 게 이상적인 삶이라고 주장하는 걸까? 지금 가진 것, 지금 하는 일에 그저 만족한 채로? 성욕부터 미트로프가 먹고 싶다는 생각까지 모든 갈망을 싹부터 잘라버리라고? 그렇게 해야만 가장 행복한 삶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렇다. 에피쿠로스는 분명 그렇게 믿었으며, 이를 말로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저하게 실행에 옮긴 흔치 않은 철학자였다. 섹스는 권태나 질투 같은 행복하지 않은 감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금욕생활을 했다. 부처가 하루에 곡식 한 톨로 버티던 것보다는 잘 먹었지만 빵과 물만으로 만족하고 살았으며, 정말 참을 수 없을 땐 렌틸콩 한 알을 물에 불려 특별식을 즐겼다.


선불교스러운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아직도 내 취향을 완벽히 저격한다. 보통 나는 현재를 외면하면서까지 더 많은 걸 원하지는 않지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상상하며 현재를 외면하는 일은 잦다. 이제는 안다. 지금까지 내 생에 대부분의 시간을 다음은 뭘까?를 생각하며 써버렸다는 사실을. 저녁을 먹으면서 다 먹으면 무슨 책을 읽을지 또는 무슨 영화를 볼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느라 정작 지금 먹고 있는 맛있는 매시포테이토를 음미하지 못한다.


다음은 뭘까?는 내 삶을 오랫동안 지배했다. 어렸을 때는 이다음에 커서 어른이 되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끊임없이 생각했고, 좀 더 큰 다음엔 대학을 졸업하면 내 삶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했다. 계속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더 충만한 삶을 살지 못했다. 랠프 월도 에머슨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언제나 살아갈 준비를 할 뿐, 정작 삶을 살지 않는다."


세계 여러 주요 종교가 갖는 기본 교의는 지상의 삶이란 영생, 곧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에 이르기 위해 거치는 보잘것없는 단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사명은 천국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천국을 누릴 자격을 얻어야 한다. 이것 말고는 현세의 삶은 큰 의미가 없고, 따라서 지상에서의 삶은 다음은 뭘까?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매 순간의 초점을 내세에 맞추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전도자들은 설교 중에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릭 워런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지상의 삶은 진짜 공연 전에 하는 리허설 같은 것입니다. 죽음 저 건너의 영원에서 여러분이 보낼 시간은 지금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깁니다. 현세는 준비 단계이자 예비 학교이며 영생이라는 본선으로 가기 위한 예선일 뿐입니다. 본 게임 전의 연습이며 경주가 시작되기 전에 하는 워밍업입니다. 지금의 삶은 바로 다음의 삶을 위한 준비입니다."


다음은 뭘까?라는 내 개인적인 강박은 워런 목사가 설교로 전달하는 것보다 범위가 훨씬 좁을뿐더러 위대한 내세라는 보상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결정적 보상 없이 내 강박적 습관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무언가를 후회하느라 시간을 쓰는 것 또한 바로 내 앞에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에 딱 좋은 행동 아닌가. 게다가 내 나이와 지극히 세속적인 내 세계관에 따르면, 이다음에 올 것이 뭔지는 뻔하지 않은가.


인생은 거대한 농담이다

자연이 주는 혜택 때문에, 인간의 삶의 이유를 빼앗기고 나서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있고, 생생한 쾌락을 누릴 수 없게 돼서야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자코모 레오파드리, 이탈리아 시인/철학자(1798~1837), 염세주의자


아리스티포스식 쾌락주의야말로 따라가야 할 길인데, 그러기에 내가 너무 나이 들었다면 어떡해야 하나? 아, 끔찍하다! 그렇다면 잠시 자코모 레오파르디의 사상에 몸을 맡겨보자. 레오파르디는 19세기 초에 명성을 얻은 이탈리아 시인이자 철학자로, 앞서 말한 난감한 상황을 특유의 우울한 색채로 멋있게 해결해줄 인물이다. 나는 최근 들어서야 이 명언을 접했다. 다시 말해, 뭔가 손을 쓰기에 이미 너무 늦어버린 이 시점에서야 말이다. 어쨌든 마조히즘적 희열을 느끼면서 명언집에 이 말을 옮겨 적었다.


귀족가문 출신에 보수적인 가톨릭 사제들에게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레오파르디는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의 제사장 같은 존재가 됐다. 그에게 인생은 끊임없이 실망스러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다음 격언으로 그의 사상을 요약할 수 있다. "모든 것은 결국 나빠질 뿐이고……그다음에는 더 나빠진다."


레오파르디는 삶 전체를 러시아 욕설에 나오는 결말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길에 1루불이 떨어져 있는 걸 봐도 줍지 못하게 관절염에나 걸려버려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욕. "네가 처먹어야 하는 약이 매년 천 개씩 더 나와 버려라."


레오파르디에게 삶이란 거대한 농담 같은 것이다. 우리에겐 약속으로 가득한 삶이 주어졌지만, 결국 우리가 얻는 것이라곤 실망 뒤의 또 다른 실망뿐이다. 하. 하.


철학적 염세주의는 단순히 삶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태도만이 아니라 진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염세주의는 더 완벽한 세상을 진지하게 계속 찾아나가야 한다는 서양의 정신을 비난한다.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을 추동했던 그 모든 이데올로기를 말이다. 모두가 한 번은 시도해보았을 자기계발 전략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실망과 절망의 폭탄을 닥치는 대로 떨어뜨릴 들창문이 우리 머리 위에 널려 있는 이 세상에서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건 농담 같은 일이다. 그것도 아주 심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적 염세주의는 자비롭고 선의에 가득 찬 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낙관주의를 무차별로 저격한다.


레오파르디가 염세주의자이긴 하지만 낙관적인 반전도 있다. 일단 삶이 실망의 끝없는 연속이라는 우울한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면 이에 대해 웃으면서 말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해방감이 생긴다. 역설적이고 달콤쌉싸름한 방식으로 인생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레오파르디의 관점은 존재의 덧없음을 노래한 1960년대 팝 찬가를 닮았다. "그것뿐인가요?"라고 페기 리는 노래했다. "정말로 그것뿐이라면, 벗들이여, 계속 춤을 추어요. 술병을 따고 파티를 벌여요."(페기 리의 그것뿐인가요? 가사:옮긴이)


레오파르디는 이렇게 말했다. "웃을 용기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주인이다." 자신의 저서 《실용철학 안내》에서는 행복의 추구를 향해 다음과 같이 조소를 보냈다. "무언가에서 그대가 찾는 것이 즐거움이라면 절대로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종종 노이아(존재의 권태)와 혐오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행위를 하든 간에 즐거움을 느끼려면 즐거움과는 다른 쪽을 따라가야 한다."


달리 말하면,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반드시 막다른 골목에 몰릴 수밖에 없지만, 행복을 좇길 포기한다면 다른 종류의 격렬하고 열광적인 시간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쾌락을 누릴 수 없게 돼서야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레오파르디의 말은 확실히 이 늙은이의 신경을 건드린다. 그래요, 레오파르디 씨, "생생한 쾌락"이라는 것 대부분은 나이를 먹으면서 힘이 빠진다오. 페기 리의 노래는 요즘 들어 더 감미롭게 들리지만, 말 그대로 듣는 것 자체가 갈수록 어려워지는구려. 그래도 새벽에 아내랑 함께 거실 소파에 누워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자크 브렐(프랑스 가수:옮긴이)의 노래 날 떠나지 말아요를 희미해져가는 내 청력에 맞춰 볼륨을 높여 듣고 있노라면, 가끔은 그 생생한 쾌락이라는 걸 넘어서는 평화를 찾았다고 느끼곤 한다오.


그래도 나도 때로는 궁금해질 때가 있음을 인정한다. 내 감각이 아직 완전한 상태였을 때 쾌락주의의 한계에 도전해봤다면 어땠을까? 내 하나뿐인 삶은 그로 인해 더 풍성해졌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자 후회만 들 뿐이다. 그 주제에 관해서라면 나는 우디 앨런의 말에 동의한다. "내 삶에서 유일한 유감은,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숨만 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개선할 방법 없이 세상을 개탄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대안이 없다면 책 같은 건 쓰지도 마라. 열대 휴양지에서 일광욕이나 즐길 일이다.

-피터 싱어, 오스트레일리아-미국 철학자(1946~), 도덕철학자


몇 년 전 피터 싱어가 동물의 윤리적 처우에 대해 강력한 발언을 언론에 내놓고 나서야 나는 그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관련 글 몇 편을 읽어보니 이 철학자는 내가 좋아하는 동물인 인간의 윤리적 처우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싱어의 사상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분야 모두에 걸친 도덕철학 문제를 구체적인 윤리적 딜레마를 통해 정면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반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으니,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자주 죄책감이 든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 둘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보통 이 죄책감은 싱어가 내놓는 구체적인 도덕적 각본을 내가 실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하지 않아서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싱어가 이야기한 브라질 영화 중앙역 줄거리를 보자. 영화에서 가난한 여인 도라는 갑자기 몇천 달러를 벌 기회를 얻는다. 떠돌이 꼬마 하나를 꼬드겨 부유한 외국인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데려가 그들에게 입양만 시키면 된다. 도라는 이렇게 번 돈으로 컬러 텔레비전을 산다. 하지만 누군가가 도라에게 진실을 알린다. 그 꼬마는 입양된 것이 아니라 장기밀매용으로 암시장에서 거래되며, 장기를 적출당하고 나면 그대로 죽고 말 것이라고.


이 시점에서 모두 경악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도라는 결국 자신이 초래한 이 끔찍한 현실을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 올바른 도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봐, 어차피 걔는 아무도 상관 안 하는 거리의 부랑아고 도라는 새로 산 텔레비전을 즐기고 있는데, 뭐 어쩌라는 거야" 따위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비양심적이니까.(영화에서 도라 역시 양심적이고 올바른 선택을 한다.)


여기서 싱어는 제대로 한 방을 날린다. 제1세계에서 우리는 컬러 텔레비전처럼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물건을 사는 데 가진 돈의 3분의 1가량을 소비한다. 대신 그 돈을 옥스팜 같은 단체에 기부하면 리우데자네이루의 집 없는 아이들에게 음식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데 말이다. 싱어가 보기에 도라의 선택과 우리의 선택 사이에 궁극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으며, 이때 적용되는 도덕적 원칙도 같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해야 한다.


이 주장은 반박하기 힘들다. 적잖은 이들이 반박을 시도했지만 반박 대부분은 도덕보다 현실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옥스팜이 그런 일을 정직하고 올바르게 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자선은 결국 의존과 나태함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이런 논거에는 나도 사실 잘 이끌리지 않는다.


싱어는 단순히 유사성에 기초해 도라가 꼬마에게 한 행동/비행동을 옥스팜에 대한 우리의 행동/비행동에 대입한다. 이를 지적한다면 철학적으로 의미가 좀 더 다른 반박이 될 것이다. 싱어의 유추는 불완전하다. 예를 들어 옥스팜에 기부하지 않기로 해도 이것이 누군가가 죽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반면 도라는 꼬마를 외국인에게 데려감으로써 자기 자신은 원치 않았지만 꼬마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원인을 제공했다.


그렇다. 사실 엄격히 말하자면 어떤 유추도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다면 그건 유추가 아니라 동등 비교다. 어쨌든 나는 이 적극적 대 비적극적 주장에도 공감하지 않는다. 어떤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어떻게든 인지하고 있다면 적극적이냐 비적극적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나는 싱어의 유추와 주장을 받아들이는 쪽이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집에 두고 살면서도 나는 옥스팜에 한 푼도 기부해본 적이 없다. 인정한다. 그러니 싱어에 따르면 나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당연히 기분 좋다고는 말 못 한다. 사실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끔찍하다. 분명 이에 관해서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다. 아니면 옥스팜에 십일조를 내든지 그냥 행동에 옮길 수도 있다.


나는 도덕적으로 적극적이지 못하지만 싱어는 옳다. 세상에 정의롭지 않다고 불평하면서 정작 이를 바꾸기 위해 편안한 의자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이들에게 싱어가 가하는 저격에 전심 전력으로 동의한다. 위선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사실 가장 기만적 형태의 위선이라고 해도 좋다. 자신이 위선이라고 부르는 대상에게 위선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목청껏 외쳐대는 것만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책무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불평꾼들 편은 절대로 들 수 없다. 그들의 제1세계 머리 위에 제3세계의 물 한 양동이를 흠씩 끼얹고 싶다.



익숙한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인생의 의미는 찾았다 싶으면 또다시 바뀐다.

-라인홀트 니부어, 미국 사회철학자/신학자(1892~1971), 기독교 현실주의


진작 좀 말해주지 그랬나! 나는 30대 중반에 이 글을 읽고 명언집을 접었다. 그런 걸 만드는 일 자체가 순진하고 덧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만하면 됐지.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라인홀트 니부어가 한 이 말을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 당시보다도 더 당혹스럽다. 니부어 교수도 이런 반응을 의도했으리라.


자신의 멘토였던 신학자 파울 틸리히와 마찬가지로 니부어 역시 인간이 처한 곤경을 실존주의적 언어를 통해 분석했다. 틸리히와 니부어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할 극단적 자유가 있다면 어째서 인간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가?였다.


이 질문에 니부어는 인간이 영성에 대해 생각할 때조차도 자신의 유한한 마음에 묶여 초월적인 가치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따라서 죄라는 것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적 이중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도덕과 선악,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이 모두를 포괄하는 진정한 큰 그림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도구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니부어는 자신이 인간의 곤경이라고 정의한 부분을 유머러스하게 설명하곤 했다. 한 번은 자신의 설교를 이렇게 마무리한 적이 있다. "이 무슨 모순이란 말입니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으면서도 지상에서는 벌레보다 하등 나을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니 말이지요." 무릎을 탁 칠 만큼 대단한 유머는 아니지만 설교치고는 꽤 괜찮지 않은가.


니부어는 내재된 세계, 곧 문화/사회/정치적 신조의 세계 내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나치즘이 출현한 뒤 니부어는 니체가 그토록 혐오했던 군중의 사고방식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치즘에 순응하는 당시 사람들의 행동을 보며 그는 인간의 나약함에 관해 깊이 생각했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니부어도 인간은 문화의 산물이므로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치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인생의 의미는 찾았다 싶으면 또다시 바뀐다"라며 신랄하게 지적하지 않았나 싶다. 정치적 신조나 광고 문구처럼 인생철학도 문화라는 맥락 안에서 떠오르고 저문다. 내가 명언집에 맨 처음 적어넣었던 문구들을 기억해보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인기 있던 철학사조에 내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말하면 알베르 카뮈와 장 폴 사르트르의 권태, 우울함과 더불어 올더스 헉슬리와 티모시 리어리의 사회적 허무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그 말은 나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군중의 사고방식에 휩쓸렸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가 철학이란 삶을 이끌어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지금쯤 애덤 필립스가 나를 힐난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과거에 그만 연연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만약 …라면 어떡하지? 같은 가정법 시나리오도 그만 좀 쓰라고 말이다. 그러니 니부어의 관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말하면 족할 일이다. 삶의 의미란 지금 이 순간 언제든 바뀔 것이다. 또다시.


그리고 모든 건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원문에서는 Caveat emptor!, 즉 구매한 물품의 하자 유무는 사는 사람이 확인할 책임이 있다는 뜻의 라틴어 문장을 사용했다: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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