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조선의 지식인과 대한민국의 정치인, 연행길에서 만나다!
2008년 7월 김재원 의원에게는 큰 시련이 닥쳐온다. 마흔넷의 나이에 자신을 가다듬기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홀연히 떠난 그는 운명처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만났다. 조선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행기이자 최고의 문장으로 손꼽히는 <열하일기>에 홀연히 빠져든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게 된다.
230년 전 중국을 방문한 조선 지식인의 눈에 비친 중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박지원이 걸었던 연행길은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까? <열하일기>에서 고발한 조선의 문제점은 현 사회에도 유효한가? 열하일기에 담긴 박지원의 문제의식은 230년 후의 김재원에게도 가슴 깊숙이 자리 잡았다.
전략기획통으로 불리는 김재원답게 답사도 남다르게 계획했다. 1780년 6월 23일 압록강을 건넌 연암처럼 음력 6월 하순에 압록강을 출발했고, 8월 9일 박지원이 열하에 도착한 일정에 맞추어 그도 음력 8월 10일경에 하북성 승덕시(열하)에 도착했다. <열하일기> 속 등장한 장소와 현재의 지명과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내려고 중국의 포털사이트 바이두의 지도와 내비게이션을 활용하기도 했다.
■ 저자 김재원
서울대 법대와 동 대학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제31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무조정실에서 행정사무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제36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서울지검 · 부산지검에서 검사로 재직했다. 17대,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와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아 당의 주요 전략과 중장기적 기획업무를 총괄했다. 2015년에는 대통령정무특별보좌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연구학자와 푸단대 한국연구소 고급고문으로서 연구활동을 했다. 1964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산을 누비며 자랐다. 매사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 차례
막북행정록
四十四 건륭제의 명으로 급거 열하로 향하다 四十五 백하를 건너다 四十六 밀운성의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다 四十七 마부 창대를 남겨두고 남천문을 넘다 四十八 하룻밤에 아홉 번 강물을 건너다 四十九 한밤중에 고북구를 나서다 五十 삼간방에서 마부 창대를 다시 만나다 五十一 삼도량을 지나 화유구에 이르다 五十二 난하를 건너 드디어 열하에 도착하다
태학유관록
五十三 피서산장에서 건륭제를 알현하다(1) 五十四 피서산장에서 건륭제를 알현하다(2) 五十五 피서산장에서 건륭제를 알현하다(3) 五十六 피서산장에서 건륭제를 알현하다(4) 五十七 티벳의 성승을 친견하다(1) 五十八 티벳의 성승을 친견하다(2) 五十九 불세출의 간신 화신을 만나다 六十 열하에서 코끼리를 관찰하다 六十一 주점에서 한바탕 호기를 부리다 六十二 사신과 함께 열하의 문묘에 배알하다
환연도중록
六十三 예부의 문서날조를 항의하다 六十四 다시 연경에 도착하다
황도기략
六十五 자금성을 둘러보다(1) 六十六 자금성을 둘러보다(2)천안문 六十七 자금성을 둘러보다(3)오문 六十八 자금성을 둘러보다(4) 태화전 六十九 자금성을 둘러보다(5)체인각과 홍의각 七十 자금성을 둘러보다(6)문화전과 무영전 七十一 자금성을 둘러보다(7)문연각 七十二 자금성을 둘러보다(8)전성문 七十三 조선 여인의 한을 생각하다 七十四 종묘와 사직 이야기 七十五 만수산 이야기 七十六 태액지를 거닐다(1) 七十七 태액지를 거닐다(2)경화도와 금오교 七十八 태액지를 거닐다(3)오룡정, 구룡 七十九 천단 이야기 八十 옹화궁 이야기
알성퇴술
八十一 태학 이야기(1)공묘 八十二 태학 이야기(2) 국자감 八十三 순천부학 이야기 八十四 문승상사 이야기 八十五 관상대 이야기
앙엽기
八十六 보국사 이야기 八十七 천녕사 이야기 八十八 백운관 이야기 八十九 화신묘 이야기 九十 융복사 이야기 九十一 진각사 이야기 九十二 천주당 이야기 九十三 마테오 리치의 묘 이야기 九十四 석조사 이야기 九十五 약왕묘 이야기
마치며 길의 끝에서 또 다른 길을 찾다
막북에서 다시 쓴 열하일기 下
막북행정록 _연경에서 열하까지 5일간의 기록 (1780년 8월 5일 ~ 8월 9일)
밀운성의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다
연암 일행은 백하를 건너 얼마지 않아 빗발이 쏟아지고 천둥이 내리쳐 길가의 오래된 사당에 들어가 비를 피한다. 잠시 후 비가 그쳐 다시 길을 재촉했으나 앞에 큰 물이 막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린다. 이 장면을 <열하일기>에서 읽어본다.
<열하일기> 마북행정록 8월 6일
비가 좀 멎기에 곧 길을 떠났다. 밀운성 밖을 감돌아서 7~8리를 갔다. 별안간 건장한 만주족 몇 사람이 나귀를 타고 오다가 손을 내저으며, "가지 마시오. 5리쯤 앞에 시냇물이 크게 불어서 우리도 모두 되돌아오는 길이오" 라고 했다.
또 채찍을 이마에까지 들어 보이며 "물이 이만큼 높으니 당신네들 날개가 있으면 모를까 못 건넙니다요"라고 한다. 이에 우리 일행이 서로 돌아보며 낯빛을 잃고 모두 길 중간에 말에서 내려 섰으나, 위로는 비가 내리고 아래로는 땅이 질어서 잠시 쉴 곳도 없다.
통관과 우리 역관들을 시켜서 먼저 물에 가보게 했다.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물 깊이가 두어 길이나 되어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 버드나무 그늘이 음침하고 바람결은 몹시 서늘한데 하인들의 홑옷이 모두 젖어서 덜덜 떨지 않는 자가 없다.
역관과 제독, 통관이 서로 "지금 앞으로 가서 강물을 건널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물러나 밥을 해 먹을 여관도 없는데 날은 저물고 있으니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걱정했다. 이에 오림포가 "여기서 밀운성까지는 5리 정도에 불과하니 우선 그 성에 들어가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오림포는 이미 나이 70세가 넘어 추위와 굶주림을 더욱 견디지 못했다.
내가 먼저 말을 달려 밀운성에 이르렀더니 길가의 물은 말 배에 닿았다. 성문에서 말을 세우고 일행을 기다려서 함께 들어가니, 뜻밖에 말을 탄 군관 10여 명과 함께 쌍등과 촛불을 들고 밀운현의 지현이 몸소 와서 맞이했다. 통관이 먼저 가서 주선하였는데 그 일처리가 재빨랐다. 중국에서는 비록 왕자나 공주의 행차라도 민가에 머무르지 못하므로 그 숙소는 반드시 여관이나 아니면 사당이다. 이제 이 고을에서 우리 일행의 숙소로 정해준 곳은 관제묘이다. 지현은 문 앞까지 와서 곧 돌아갔다. 관제묘에는 인마를 들일 수는 있으나 사신이 묵을 방이 없었다.
밀운현의 지현이 조선의 사신일행을 위해 지정해준 숙소는 관제묘였다. 그러나 정사와 부사 서장관 등 조선의 사신은 관제묘에서 숙박할 수 없어서 직접 민가를 찾아 나섰는데 겨우 소씨 성을 쓰는 집을 찾아냈다. 이제 연암 박지원은 중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 사신 일행의 모습을 이방인의 눈으로 묘사한다. 다시 <열하일기>를 읽어본다.
밤이 이미 깊어서 집집마다 문을 닫아걸었으므로, 오림포가 대문을 백 번 천 번 두드리고 소리쳐 주인을 불러내니 겨우 문을 열고 내다보는 집이 있었는데, 소씨 성을 가진 이의 집이었다. 이 고을의 아전의 집인데 행궁에 버금갈 정도로 훌륭했다. 집 주인은 이미 죽었고 열여덟 살 된 아들이 있는데, 세상의 풍상을 겪지 않은 깨끗하고 수려한 얼굴이었다. 정사가 불러서 청심환 하나를 주니, 그는 무수히 절하나 몹시 놀라서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잠을 자고 있을 시각에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어 나가보니, 사람 지껄이는 소리와 말 우는 소리가 요란한데 모두 생전 처음 듣는 소리요. 급기야 문을 열자 벌떼처럼 뜰에 가득 들이친 이 사람들이 누구란 말인가? 조선 사람이라고는 이곳에 온 일이 없으므로 아마 안남 사람인지 일본, 유구, 섬라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쓰고 있는 모자는 둥근 처마가 지나치게 넓고 이마 위에 검은 일산 같은 것을 걸치고 있으니, 처음 보는 것이라서 이게 무슨 모자인가? 이상도 하다라고 했을 것이다. 입고 있는 도포는 소매가 몹시 넓어서 너풀너풀 춤이라도 추는 것 같으니 옷을 보고도 이 무슨 옷인가? 이상하게도 생겼네라고 했을 것이다. 소리는 남남 하고 혹은 니니 또는 깍깍 하니 이 역시 처음 듣는 소리라서 이게 무슨 말인가? 이상도 하구나 라고 했을 것이다.
더구나 사신 이하의 복장이 모두들 달라서 역관들의 복장, 비장들의 복장, 군뢰들의 복장이 각기 따로따로 되어 있고, 역졸과 마두의 무리는 맨발 벗고 가슴을 풀어 헤치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고 옷은 해져서 엉덩이를 가리지 못하였으며, 왁자하게 지껄이며 대령하는 소리는 너무도 길게 빼니 이 모두 처음일 것이니 "이 무슨 예법인가? 이상하고 야릇한지고"라고 했을 것이다.
필경 그는 우리가 같은 나라 사람으로 함께 온 줄 모르고, 사방의 오랑캐들이 떼를 지어 자기 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고 겁이 나서 벌벌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세상일을 싫도록 겪은 여든 살 노인일지라도 놀라서 와들와들 떨며 졸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겨우 유숙할 민가를 구해 들어간 조선의 사행단에게 밀운성의 지현은 음식을 보내어 대접하려고한다. 그러나 고지식한 조선의 사신은 그간 황제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익힌 음식을 제공받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음식을 거절하고 만다.
역관이 와서 "밀훈현의 지현이 밥 한 동이와 채소와 과실 다섯 쟁반, 돼지, 양, 거위, 오리고기 다섯 쟁반, 차와 술 다섯 병을 보내왔고, 또 땔나무와 말먹이도 보내왔습니다"라고 했다. 정사는, "그래, 땔나무나 말먹이는 받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마는, 밥과 고기는 주방이 있으니 나에게 폐를 끼칠 게 있겠는가. 받든지 안 받든지 간에 부사와 서장관에게 결정하게 하라" 고했다.
이에 수역은, "중국에 들어와 책문에서부터 으레 음식을 제공받았지만 이렇게 익힌 음식을 제공받은 적은 없습니다. 이제 이곳으로 되돌아 온 것도 뜻밖의 일이었습니다만 저들이 이곳 지현의 체면으로서 제공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다. 이때 부사와 서장관이 들어와서, "황제의 명령도 없었는데 어찌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돌려보냄이 옳겠습니다"라고 했다. 정사도, "그렇겠소"라고 하고는 곧 영을 내려 그를 받기 어려운 뜻을 밝히게 하였다. 그러자 음식을 지고 온 인부들이 끽 소리도 없이 다시 지고 가버렸다. 서장관이 또한 하인들에게, "만일 한줌의 땔나무나 말먹이를 받는다면 반드시 곤장을 칠 것이다"라고 하고, 엄히 단속했다.
얼마지 않아 조달동이 와서 "군기대신 복차산이 당도하였답니다."라고 보고했다. 황제가 특히 군기대신을 파견하여 사신을 맞이하게 한 것이었다. 그는 "황제께옵서 사신을 고대하고 계시오니 반드시 9일 아침 일찍 열하에 도달하여 주시오."라고 하며, 두세 번 거듭 부탁하고 가버린다. 군기대신은 늘 황제 앞에 모시고 앉았다가, 황제가 군기대신에게 명령을 내리면 군기대신이 하나하나를 의정대신에게 전달하곤 한다. 그가 비록 계급은 낮으나 황제에게 가까운 직책을 맡았으므로 대신大臣이라 일컬었다.
오늘날 북경에서 승덕사(열하)까지는 고속도로로 4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이지만 당시 밀운성에서 열하까지의 거리는 꼬불꼬불한 산악지대의 길을 감안하면 근 200㎞가 넘고, 험준한 산악지대에 백하, 조하, 난하의 험한 물줄기가 사방을 휘감고 있으며 만리장성을 넘어 변방에 나가야 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걸어가기에도 무척 힘든 여정이었다.
더욱이 비를 만나 예정에도 없이 밀운성의 민가에 하룻밤을 지새우게 된 것이 8월 6일 밤인데 다시 황제가 군기대신을 보내어 8월 9일 아침까지 열하에 당도할 것을 명한 것이다. 결국 이틀 만에 만리장성을 넘어 열하까지 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도 사신은 전례가 없다며 밀운현의 지현이 보내온 음식을 거절한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을 다시 읽어본다.
이때 하도 피곤하기에 잠깐 자리에 누웠다. 별안간 온 몸이 가려워 견디기 어렵기에 한 번 긁자 굶주린 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곧장 일어나 옷을 털고 나서, 밥이 익었는지 물어보니 하인 시대는 "애초부터 밥을 지은 일이 없습니다." 하면서, 빙그레 웃는다. 이미 밤이 깊어 곧 닭이 울 때가 되었으니 한 그릇 물이나 한 움큼 땔나무도 사올 곳이 없다. 비록 사자의 어금니 같은 흰 쌀과 높게 쌓인 은화가 있다 한들 밥을 지을 길은 없었다.
하인들이 모두 춥고 굶주려서 지쳐 쓰러졌다. 나는 그들을 채찍으로 갈겨 깨웠으나 일어났다가 곧 쓰러지곤 한다. 하는 수 없이 직접 주방에 들어가 보니 영돌이 홀로 앉아 공중을 쳐다보면서 긴 한숨을 뽑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종아리에 말고삐를 맨 채 쓰러져 코를 곤다. 마침 간신히 수숫대 한 움큼을 얻어서 밥을 지으려 했으나 한 가마솥의 쌀에 반통도 못되는 물을 부었으니 애당초 물이 끓을 리도 없었다. 이윽고 밥상을 받아 본즉 물이 쌀에 스며들지도 않았다. 한 숟갈도 들지 못한 채 정사와 함께 술 한 잔씩을 마시고 곧 길을 떠났다. 이때 닭은 벌써 서너 홰를 쳤다.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조선의 사행단이 하루 밤을 머물고 간 밀운성의 오늘날 모습을 살펴본즉 밀운현 시가지가 현대적으로 개발되면서 옛날 연암 일행이 묵고 간 밀운성의 성벽은 없어지고 옛날의 건물도 모두 사라졌다. 옛적의 모습은 밀운도서관 앞의 문묘의 중심건물이었을 대성전만이 홀로 우두커니 남아있을 뿐이다.
태학유관록_열하의 태학에서 머문 6일간의 기록 (1780년 8월 9일 ~ 8월 14일)
티벳의 성승을 친견하다
1780년 8월 9일 오전 조선의 사행단이 열하에 도착하여 열하의 분묘에 마련된 숙소에 들었다. 그날 오후 청나라 통관이 조선의 당번 역관에게 "당신네 나라에서는 부처를 공경합니까? 나라 안에는 사찰이 얼마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다. 주자학을 국교로 삼고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의 사신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다. 청나라에서는 처신이 귀국 후에 문제가 되어 탄핵을 당하거나 형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사 박명원 등 사신은 의논 끝에 "우리나라 풍속이 본래 불교를 숭상하지 않으므로 시골에 절이 있기는 하나 도성에는 없다"는 엉터리 대답을 통관에게 전달하게 했다.
다음날인 8월 10일에는 군기처 대신이 직접 숙소인 태학관으로 와서 티벳의 성승(판첸라마 6세)을 만나보겠느냐고 권하는 황제의 뜻을 전달한다. 이에 사신은 "황제께서 소국을 사랑하여 중국과 동등하게 대하여 주시니, 중국 사람들과 왕래하는 것이야 무방하지만, 그 밖의 다른 나라사람에 대해서는 감히 서로 사귀지 않는 것이 본래 저희 같은 소국의 법도입니다."라고 하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역시 유교국가인 조선의 사신으로서는 조심해서 처신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건륭제는 기어이 조선의 사신에게 반선을 만나보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제 <열하일기>를 읽어본다.
<열하일기> 태학유관록 8월 10일
군기대신이가고 나자 사신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찼다. 당번 역관은 마치 술이 덜 깬 사람처럼 분주하다. 비장들도 공연히 성을 내며, "황제가 고약하네, 반드시 망하고 말거야. 오랑캐니까 그렇지, 명나라 때는 어디 이런 일이 있었나?"라며 투덜거린다. 수역이 그 황망한 중에도 비장을 향하여, "춘추대의를 논할 때가 아니네"라고 핀잔을 준다. 잠시 뒤 군기대신이 또 말을 달려와서 황제의 명을 거듭 전한다. "성승은 중국 사람과 같으니 즉시 가보도록 하라"
사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한쪽에서는, "가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예부에 글을 올려서 이치로 따져 봅시다"라고 하는데, 당번 역관은 말끝마다 "예, 예"라고 한다. 나는 한가하게 구경할 뿐, 사신들의 일에는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나한테는 묻는 일도 없었다.
이때 나는 마음속에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정말 좋은 기회이다. 사신이 거부하는 상소를 올린다면 의로운 명성이 천하에 떨치고 나라를 크게 빛낼 터이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군사를 내서 조선을 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사신 개인의 허물을 그 나라에 대고 화풀이를 하겠는가? 그러나 그 빌미로 사신들을 운남이나 귀주 쪽으로 귀양을 보내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되면 내가 혼자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서촉이나 강남의 땅을 밟게 되리로다. 강남은 오히려 가깝지만, 저 월남이나 광동 지방은 북경과 만여리나 되는 먼 길이니, 내가 구경할 일이 어찌 낭만적이지 않겠는가.
마음속으로 기뻐서 곧 밖으로 뛰어 나가 마부 이동을 불러내어, "얼른 술을 사오너라, 돈은 아끼지 마라. 내 이제부터 너와 이별이다."라고 하였다.
반선을 만나보라는 황제의 명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중국의 남쪽 변방인 귀주성이나 운남성으로 귀양을 갈 것을 상상하며 혼자 축배를 들던 연암의 유쾌한 풍류가 그려진다. 허나 연암이 바라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조선의 사신들이 반선을 친견하러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들어가니 회의는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고, 예부의 재촉이 빗발친다. 겨우 말과 안장을 준비하는 사이에 이미 날이 기울었다. 일행이 성의 서북쪽 길을 따라서 반쯤 갔을 때 황제의 조칙이 왔다. 금일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사신은 돌아가서 다른 날을 기다리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사신은 놀라서 서로 돌아보며 숙소로 돌아갔다.
청나라 통관 박보수가 예부의 사정을 돌아보고 와서, "황제께옵서, 조선은 예의를 아는 나라인데 사신만 예법을 모르는구나라고 했답니다"라고 아뢴다. 통관 무리들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이제 죽었네"라고 한다. 통관들은 원래부터 털끝만한 일이라도 황제와 관계되는 것이면 죽는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이번에는 황제의 불편한 심기를 알려주고 있으니 완전히 공갈은 아닐 것이다.
저녁 무렵이 되자 예부에서 "내일이나 모레는 황제께서 불러 물어보실 터이니, 사심은 일찌감치 반선을 만나라"고 하였다.
건륭제의 칠순연을 축하하기 위해 열하에 왔던 판첸라마 6세는 반선 또는 티벳의 성승으로 불렀다. 그는 티벳의 라싸 서부지역에서 출생하여 판첸라마 5세의 전세영동으로 확인받아, 세 살이 되던 해에 시가체의 타시룸포 보좌에 오른 인물이다.
환연도중록_열하에서 연경으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1780년 8월 15일 ~ 8월 20일)
예부의 문서날조를 항의하고 연경으로 향하다
1780년 8월 14일 오후 건륭제로부터 조선 사신은 연경으로 돌아가라는 명이 떨어진다. 사행단은 밤늦게까지 짐을 꾸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조선의 사신들은 청나라 예부에서 사신이 황제에게 올린 글을 마음대로 고쳐버린 사실을 알게 되어 이를 바로잡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 경위를 살펴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1780년 8월 9일 조선의 사신이 열하의 태학관에 도착하자, 청나라 조정의 군기처 장경이 와서 "조선의 정사는 2품 끝의 반열에 서도록 하라"는 건륭제의 조칙을 통보하였다. 이어 청나라 예부에서는 전례 없는 황제의 은혜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글을 써서 예부로 보내라는 요구를 해 왔다. 이에 부사와 서장관이 의논하여 이날 중에 글을 지어 예부에 보냈고 황제에게 아뢰도록 했다.
사신들이 조선으로 출발하기 위해 청나라 예부 주개사로부터 그간 양국에 오간 문서 사본을 전달받았다. 그런데 그 문서 중에 조선의 사신이 올린 글을 예부에서 조작해서 황제에게 보고한 것이 드러났다. 8월 9일 조선의 정사가 올린 문건과 조작된 내용이 <열하일기> 행재잡록行在雜錄에 실려있다.
<열하일기> 행재잡록
엎드려 아뢰옵나이다. 조선국 국왕이 황상의 만수절을 당하여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신 등으로 하여금 국서를 받들고 와서 경하하게 하였는데, 열하에 이르러 예를 거행하도록 해 주시니 영광스럽고 행복하옵니다.(예부는 여기에다 성스러운 승려를 뵈옵고 복을 받았다라는 내용을 첨가 했다. 이하 모두 연아 박지원의 주석).
또 파격적인 성은이 작은 나라의 천한 사신에게 미쳤으니, 영광된 바는 실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예부는 이 구절을 국왕과 사신과 따라온 사람들에게는 비단과 은을 더 주었다는 말로 바꾸었다).
돌아가서 마땅히 국왕에게 아뢰어서 황제의 은혜에 감격하게 할 것이니, 예부의 대인들도 대신 아뢰주시기 바랍니다(예부에서 표문을 갖추어 감사의 뜻을 올렸습니다라고 첨가하였다).
예부에서 조선의 사신이 올리지도 않은 구절을 첨가한 것은 현실적으로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유교 국가인 조선의 사신이 아무리 청나라 황제가 라마교 신봉자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라마의 성승을 운운하는 것은 귀국 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반대파로부터 탄핵을 당할 가능성이 큰 사안이었다.
또 국왕과 사신과 아울러 따라온 사람들에게는 비단과 은을 더 주었다는 구절은 귀국 후 왕에게 황제로부터 받은 하사품의 목록을 제출해야 하는데, 받지도 않은 하사품을 받은 것처럼 기재되어 있어 마치 사신들이 황제로부터 받은 상급을 횡령한 모양새가 될 가능성이 큰 대목이었다. 뿐만 아니라 표문을 갖추어 감사의 뜻을 올렸습니다는 구절은 조선 국왕의 권한을 사신이 마음대로 대신한 것으로 규정되어 반대파로부터 역모죄로 규탄받을 수 있는 구절이기도 했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조선의 사신들에게는 이 문건이 장래에 큰 폐단이 될 것임이 틀림없는 사건이었다. 이제 8월 15일 열하를 떠나는 날 아침의 사정을 <열하일기>에서 읽어본다.
<열하일기> 환연도중록 8월 15일
사신들이 의논했다. "이제 우리는 연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나, 예부에서 우리 사신을 거치지 않고 황제에게 올린 표문을 고쳤다니 해괴한 일이다. 이를 그대로 두고 변명하지 않는다면 장래에 큰 낭패가 있을 것이므로, 마땅히 다시 예부에 글을 제출하여 그들이 몰래 고친 사실을 밝힌 후에 길을 떠나야겠다." 이에 역관으로 하여금 예부에 글을 제출하게 했다.
조선 사신들은 열하를 출발하기 이전에 이미 청나라 예부에서 문서를 조작한 사실을 알고 항의했으나 전혀 시정되지 않았다. 결국 열하를 출발하는 날까지 담당 역관을 예부의 조방으로 보내어 조작된 문서를 바로잡아보려고 했으나 면박만 당하고 왔다. 그래서 사신이 직접 글을 올려 예부상서 덕보에게 항의했으나, 그는 사신이 보낸 글을 펴지도 않고 청나라 통역관인 제독에게 역정을 내며 책임을 떠넘긴다.
예부상서 덕보는 제독에게 "이 일에 대한 허물을 예부에 떠넘기고자 하는 것인가. 예부에서 문책을 당하면 너희 사신인들 좋겠는가. 그리고 너희들이 오린 표문에는 전혀 성의를 표한 내용이 없고 모호하여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해 영광스럽고 감격한 뜻을 펼쳐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렇게 한단 말이냐. 이는 실로 제독의 과오가 더 크다"라고 하고는 우리가 올린 글을 익어보지도 않고 물리쳤다.
사신이 제독을 맞이하여 예부에 대한 모든 사정을 상세히 물어보니, 이야기가 몹시 장황해서 알아듣기 어려워 한참 동안을 멍하고 있을 뿐이다. 예부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즉시 연경으로 출발할 것을 재촉하며, 사신 일행이 떠나는 시간을 적어서 위에다 아뢰겠다라고 압박한다. 이렇게 빨리 출발하라고 재촉하는 것은 다시 글을 제출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 틀림없다.
1780년 8월 15일 정오무렵, 사행단은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은 청나라 예부의 위세와 겁박에 등 떠밀려 조작된 문서를 바로잡지도 못하고 열하를 출발한다. 이때 연암 박지원은 공자의 제자로서 그간 머물던 태학관을 떠나는 감흥을 표현했다.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났다. 해가 벌써 정오를 넘긴 시각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뽕나무 아래에 사흘 밤을 묵은 일도 추억으로 남는다는데, 나는 공자님을 모시고 엿새 밤을 지났을 뿐 아니라, 숙소인 태학관이 깨끗하고 화려하여 잊혀지지 않는다. 내 일찍부터 과거를 포기하여 하찮은 진사도 되지 못하였기에 성균관에서 수양할 수도 없었다.
이제 우리나라를 떠나 만 리 밖 머나먼 변방의 이곳 태학관에서 엿새 동안 생활한 것이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니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또한 조선의 선비로서 중국을 두루 유람해 본 사람으로는 신라 시대 최치원이나 고려시대의 이제현 같은 분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비록 서촉과 강남을 두루 밟았지만, 이곳 만리장성 북쪽의 변방까지는 와볼 기회가 없었다. 앞으로 조선에서 천 년이 지나더라도 과연 몇 사람이나 다시 이곳까지 와볼지 모르겠다. 아 슬프다. 이 세상에 태어나 기약이 없음이 이와 같단 말인가?
황도기략_북경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기록
자금성에서 조선 여인의 한을 생각하다
영락제는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홍무제의 넷째 아들로서, 1398년 정난의 변을 일으켜 조카인 2대 황제 건무제를 죽이고 명나라 3대 황제에 올랐다. 이어 건국 당시의 명나라 수도인 남경을 떠날 목적으로 자신의 본거지인 북경에 자금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421년에 자금성이 완공되자 영락제는 남경을 버리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명나라 건국 초기에는 원나라의 풍습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조선에서 온 여인 중에서 후궁이나 궁인들을 간택하는 것이었다. 이미 원나라 궁정에서 조선에서 온 여인들이 많았고, 원나라 순제의 생모도 고려의 여인이었다. 영락제의 생모로 알려진 공비 이씨 역시 고려에서 건너간 여인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명나라 건국 후에는 태조 홍무제나 영락제가 매년 조선에서 후궁을 간택했다.
이미 영락제는 자금성으로 천도하기 이전인 1408년(영락 6년)에 황엄 등을 조선에 칙사로 파견해 미녀를 뽑아 올리라고 요구한다. 이에 조선 태종은 전국에 금혼령을 내려 자색이 조금이라도 뛰어나면 모두 한양으로 보내라고 명한다. 몸을 숨기거나, 얼굴에 침을 찔러 얼굴을 붓게 하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얼굴에 고약을 붙이는 방법으로 선발을 피하면 국법으로 엄히 다스렸다.
그해 11월에 공조전서 권집중의 딸인 18세 권씨, 인녕부 좌사윤 임첨년의 딸 임씨, 공안부 판관 이문명의 딸 이씨, 호군 여귀진의 딸인 16세의 여씨, 중군 부사정 최득비의 딸 최씨 등이 하녀 12명과 함께 남경의 명나라 황궁에 입궁했다.
이후 권씨는 현비, 임씨는 순비, 이씨는 소의, 여씨는 첩여, 최씨는 미인에 책봉되었다. 그녀들의 부친과 오라비들도 모두 명나라의 관직을 받았는데 권씨의 부친 권집중은 광록사경 벼슬을 받고 녹봉은 조선 국왕으로부터 받았다.
영락제는 역사상 많은 업적을 남긴 황제이다. 그러나 고집이 세고 시기심과 의심이 많았으며, 살인을 밥먹듯이 한 인물이기도 하다. 영락제는 말년에 궁녀와 환관을 많이 죽였는데 그 하나는 영락 12년에 일어난 권비독살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자금성으로 천도한 이후인 영락 19년 발생한 궁중 유혈 사건인 여어의 난이다. 이두 차례의 참살 사건에서 죽은 궁녀만 3,000여 명에 달하며 조선의 여인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명나라 궁정 역사에 있어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
영락제의 궁녀 참살 사건은 조선 여인인 현비 권씨 독살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407년(영락 5년)에 황후 서씨가 사망한 후, 영락제는 소주 출신의 귀빈왕씨와 조선에서 온 현비 권씨를 가장 총애했다. 공조전서 권집중의 딸인 권씨는 1408년 11월에 명나라 황궁에 입궁하여 이듬해 2월 현비로 책봉되었는데, 미모가 뛰어나고 총명했으며 노래와 춤에도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 역사책인 <명사明史>는 권비에 대해 "아름답고 순수하며 옥피리를 잘 불어 황제의 총애 받았다고"라고 평한다.
1410년 영락제는 현비 권씨와 함께 몽골에 원정했다. 전쟁터에서도 그녀를 데리고 갈 정도로 총애한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아꼈던 현비는 영락제가 이듬해 남경으로 개선하는 도 중, 산둥성의 임성에서 돌연사망하게 된다. 방년 21세였다. 영락제는 비통한 시정으로 그녀를 산동성의 역현에서 장사를 지냈다. 당시 현비 권씨의 친오빠인 권영균을 남경으로 조치하여 만났을 때는 밀려드는 슬픔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갑자기 현비가 죽은 일에 관해서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그녀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건의 전말은 권씨가 사망한 지 몇 해 가 지난 1413년(영락 11년)에 밝혀졌다.
앞서 현비 권씨와 함께 뽑혀온 여씨는 정3품 첩여에 봉해졌으나,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권씨를 늘 시기했다. 질투심에 휩싸인 여씨는 조선 출신 환관과 내통하여 은을 다루는 장인으로부터 극약인 비상을 얻어 현비 권씨가 자주 마시는 호도차 안에 몰래 넣어 독살했다. 본래 사실은 아는 이가 없었으나, 여씨와 권씨의 노비들이 말싸움을 하던 중 밝혀진 것이다. 경위를 조사하니 첩여 여씨가 현비 권씨를 독살한 것이 사실로 들어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락제는 격분한 끝에 첩여 여씨와 관련된 수백 명의 조선인 궁녀와 환관을 처형했다.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록> 태종 14년(1414년) 9월 19일에 조선 약관 원민생이 명나라에서 들고 온 여씨의 어미와 친족을 의금부에 가두라는 영락제의 명령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영락제의 조칙을 실록에서 읽어본다.
<태종실록> 태종 14년 9월 19일
황후가 죽은 뒤에 권비에게 명하여 육궁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여가가 권씨에게 자손이 있는 황후가 죽었는데, 네가 맡아 보는 것이 몇 개월이나 가겠느냐며 무례하게 말했다. 고려 출신의 내관 김득, 김양 등이 저들과 친형제처럼 지냈는데, 한 놈이 은장에게서 비상을 얻어 여가에게 주었다. 영락 8년에 남경으로 돌아가는 도중 양향에 이르렀을 때, 여가는 그 비상을 갈아 호도차에 넣어 권씨에게 먹여서 죽였다.
당초에는 내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지난해 양가의 노비가 서로 욕하고 싸우면서 폭로되어 이때서야 알았다. 사건의 경위를 묻고 꾸짖으니 과연 그러하므로, 저 몇 놈의 내관과 은장을 모두 죽였고, 여가는 낙형에 처하였는데, 낙형한 지 1개월 만에 죽었다.
1420년(영락 18년)에는 영락제가 아끼던 왕귀비까지 죽고 만다. 영락제는 다시 비통에 잠긴다. 한편 당시 명나라는 궁중에는 권씨 독살사건에 연루 되었던 첩여 여씨 외에도 또 다른 조선인 궁녀 여씨가 있었다. 그녀는 상인의 딸이었다. 사서에서는 그녀를 장사꾼의 딸이라는 의미로 장사꾼 고를 붙여 고여라고 부른다.
영락제가 슬픔에 잠겨 있던 1421년(영락 19년)에 고여와 궁인 어씨가 어린 화관과 간통한 사건이 들통난다. 큰 충격과 슬픔으로 심신이 피폐해지고, 자제력을 잃은 상태에 있던 영락제는 격노했다. 고여와 궁인 어씨는 어차피 화를 당할 것이라 짐작하고 목을 매어 자살했다. 후궁의 간통사건이 자살사건으로 비화되자 영락제는 이를 기화로 직접 고여의 시녀들을 심문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고여의 궁녀들로부터 그녀가 황제를 모살하려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영락제는 친히 궁녀들에게 혹형을 가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어떤 궁녀가 국문을 받는 자리에서 영락제를 욕하기도 했다. "그대의 양기가 쇠하여 젊은 환관과 간통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죄인가?"라며 독설을 퍼 부은 것이다. 영락제는 화공으로 하여금 환관과 궁녀가 서로 끌어안은 모습을 그리게 하여 궁녀들에게 모욕을 가하고 모두 죽여 버렸다.
당시 이 사건에 연관되어 주살된 궁녀가 2,800여 명에 이르렀다. 조선 출신의 후궁 고여로부터 시작된 여어의 난으로 조선 출신의 여씨, 유씨, 임씨, 황씨, 이씨 등 수많은 후궁과 궁녀들이 자살하거나 살해되거나 냉궁에 연금되었다. 당시의 사정을 후에 조선으로 돌아온 궁녀 김흑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 10월 17일
그 뒤 상인의 딸 여씨가 궁인 어씨와 함께 환관과 간통하였는데, 황제가 알게 되자 두 사람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황제가 화가 나서 여씨의 시녀를 신문하니, 서로 모략하면서 황제를 시해하고자 하였다고 하였다. 황제가 국문을 계속하니 그 일에 연루된 자가 2,800여 명인데, 모두 친히 죽였다. 어떤 이는 황제의 면전에서 욕하기를 "그대의 양기가 쇠하여 젊은 환관과 간통한 것인데, 누구를 허물하느냐" 고까지 했다.
이 난이 처음 일어날 때, 본국의 임씨, 정씨는 목을 매어 자살하고, 황씨, 이씨는 국문을 받아 참형을 당했다. 황씨는 다른 사람을 많이 끌어넣었으나, 이씨는 말하기를, "죽기는 마찬가지라, 어찌 다른 사람을 끌어넣겠는가, 나 혼자 죽겠다" 하면서, 끝까지 한 사람도 무고하지 아니하고 죽었다.
이에 본국의 여러 여자가 모두 죽었는데, 홀로 최씨는 남경에 있었다. 황제가 남경에 있는 궁녀를 부를 때, 최씨는 병으로 오지 못하고, 난이 일어나 궁인을 거의 다 죽인 뒤에 올라왔으므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한씨는 난이 일어났을 때 빈방에 가두어 두고 여러 날 동안 음식도 주지 아니하였는데, 문을 지키던 환관이 불쌍이 여겨 때때로 먹을 것을 넣어 주었으므로 죽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 황제가 왕씨를 총애하여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씨가 죽게 되자 황제가 크게 슬퍼하고 상심하여 그 후의 처사가 모두 빗나가니 형을 집행함이 참혹했다. 여어의 난을 한참 처리할 때, 벼락이 봉천전에 떨어져 모두 타버렸는데,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면서, "황제가 반드시 천변을 두려워하여 살육을 그치리라" 하였으나, 황제는 마음대로 주륙하기를 평일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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