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아이와 대등한 관계로 시작하는 육아의 비밀!
미움을 믿음으로 바꾸는 자녀 교육의 모든 것
아이는 어떤 부모를 만나고 어떤 환경에 놓이고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 부모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라는 세계를 만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부모 자식 관계는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일방적 양육 관계가 아니라 부모 또한 아이를 통해 변화하는 상호 관계이다. 또한 상하 관계가 아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대등한 관계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아이가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교육 내용도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어른이 돼서도 많은 사람이 사랑받기 위해 타인의 눈치를 보고 신경을 쓴다. 미움받는 일을 두려워하며 행복의 기준 또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것에 맞춘다.
하지만 사랑받는 아이가 되기보다 사랑을 베푸는 아이가 되도록 하자.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눈치 보거나 신경 쓰는 것보다 주체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아이가 인생에 훨씬 더 적극적이며 성숙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기준이 타인의 사랑이 아닌 자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이들이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하는 힘이 제 안에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발굴하기 위해 애쓰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7년 반 동안 생생하게 경험하고 느낀 부분을 접목시켜 진정한 부모 자녀 관계는 무엇인지,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를 찾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한다.
■ 저자 기시미 이치로
1956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교토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서양철학사 전공)을 밟았으며, 전문 철학과 병행해서 20년 넘게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아들러 심리학 강의를 들으면 지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강의를 듣고 아들러 심리학에 빠져들어 연구에 깊이를 더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심리 상담 활동을 했다. 일본아들러심리학회가 인정한 카운슬러이자 고문으로, 아들러 원전의 대부분을 일본어로 번역하며 최고의 아들러 심리학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저서로는 『미움받을 용기』『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버텨내는 용기』『아들러에게 인간관계를 묻다』 등이 있다.
■ 역자 김현정
일본 유학을 거쳐 한양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출판사 에디터로 일하며 각종 에세이, 실용서의 편집 및 기획, 한류 아이돌 상품의 일본어 번역 및 번역 감수를 담당했다. 현재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KARA’s All about Beauty』와 『KARA 寫眞集 Je t’aime, KARA』(번역 감수), 『홍콩 대부호의 가르침 41』『아버지를 위한 상처받을 용기』(번역) 등이 있다
■ 차례
여는 말
제1장 육아의 목표
모르는 것 투성이 | 아이를 돕기 위해서 | 사랑만으로도, 기술만으로도 부족하다 | 자립을 향하여 | 육아에 마법은 없다
제2장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자
아이의 문제 행동 | 애정 부족일까? | 우격다짐식 문제 해결 | 숙제가 하기 싫어 | 주위를 끌다
제3장 아이를 혼내지 말자
혼낸다는 것 | 혼나면 어떻게 될까? | 비판의 문제 | 거리의 문제 | 반항기는 없다 | 혼내는 대신 할 수 있는 것 | 감정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 | 의연한 태도
제4장 칭찬하지 말자
부모가 할 수 있는 일 |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 칭찬하기 | 어른과 아이는 대등하다
제5장 아이에게 용기를 심어 주자
용기 부여 | 용기 부여의 목적 | 자신의 가치를 인정한다 | 남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기 | 장점과 단점을 보다 | 공헌감 |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오히려 베푼다 |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다 | 대등하다는 것
제6장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맺기
좋은 관계를 맺다 | 상호 존경 | 상호 신뢰 | 무엇을 믿을 것인가 - 과제 달성 | 무엇을 신뢰할 것인가 - 좋은 의도가 있다 | 협력 작업 | 목표 일치
제7장 지금부터의 육아
용기 부여의 문제
맺음말
엄마를 위한 미움받을 용기
육아의 목표
사랑만으로도, 기술만으로도 부족하다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여기든 아이는 성장하고, 반드시 자립하는 날이 옵니다. 아이를 자신과 별개인 인격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아이 인생의 모든 것에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이가 자기 품을 떠나는 일을 견디지 못합니다. 부모는 아이의 인생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 듣기에 좋을지 모르지만, 이는 아이를 좌지우지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아이로부터 무언가 대가를 기대하는 부모도, 아이가 자립하려고 할 때 적잖이 거부합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부모를 떠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 판입니다. 비록 부모에게는 슬픈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한편,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 품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앞치마 끈을 풀지 않고 부모에게 붙어 있는 아이를 상상합니다. 저는 육아의 목표는 아이를 자립시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모에 대해 살펴볼까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육아는 돌아오는 보상이 적은 일이라 느껴질 겁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에게 엄청난 말을 쏟으며 말대꾸한다면 대체 누구를 위해서(누구를 위해서일까요?) 이리 힘들게 일하는지 아느냐고 퍼붓고 싶어질 테지만, 그런 아이의 모습도 성장의 한 부분입니다.
아이는 어렸을 때의 일을 모두 기억하지 못합니다. 고생해서 어딘가 멀리 놀러 갔던 일도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요. 지하철 안에서 칭얼대 부모에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도, 아이는 다 큰 다음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걸 보면 육아에는 정말 보상이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만약 아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도, 그때그때 아이의 성장을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하겠지요. 꼭 아이에게 감사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가 감사하길 기대한다면, 그 기대는 반드시 실망으로 끝나고 말 겁니다.
심지어 아이는 언제나 부모를 기쁘게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의 아이임에도 때려주고 싶을 만큼 화가 났던 경험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두 번 세 번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도 아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부모에게 심한 대우를 받거나 혼나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겨지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아이가 성장한 뒤 부모가 자신을 소중히 대한 일에 대한 기억은 잊더라도 그때 느낀 감정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아이를 혼내지 말자
혼나면 어떻게 될까?
아이는 부모가 보았을 때 문제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그만두지 않고 부모도 아이를 혼내기만 합니다. 이렇게 혼나는 아이는 어떻게 될지 이제부터 생각해 봅시다.
우선, 부모의 안색을 살핍니다. 심하게 혼내면 아이는 부모에게 혼날 만한 짓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적절한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부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할 수 없게 됩니다. 가정이든 학교든, 자신이 있을 곳이라고 느끼길 비단 아이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든 바랍니다. 그런데 아이는 혼나면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니라 느껴 혼내는 사람을 피합니다. 혼내는 부모와 혼나는 아이와의 거리감이 커지게 됩니다.
관계가 가깝지 않으면 아이를 돕기란 불가능합니다. 부모가 하는 말이 옳더라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혼내며 관계를 멀리하면서 돕기란 불가능합니다. 혼내더라도 나중에 사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중에 사과할 일이라면 처음부터 혼내지 않는 게 좋습니다.
부모가 무서우면 아이는 적극적으로 반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아이는 직접 반발하지 않고 뒤에서, 부모가 화나기보다 싫어할 만한 일을 합니다. 어떤 아이는 부모에게 맞을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평생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복수의 기회를 노립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자식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워집니다.
들키지 않고 혼나지 않으면 된다고 부모가 보지 않는 곳에서 문제 행동을 할 경우 더 난처합니다. 또한 부모에게 혼나는 일이 무서워 착한 아이로 지내는 아이는 문제 행동은 하지 않지만 무언가를 스스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실패로 인해 혼나는 게 무섭기 때문입니다.
만약 개선할 필요가 있다면, 자기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하려 하지 않는 소극적인 아이에게 적극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보다 행동하는 아이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게 훨씬 쉽습니다. 에너지를 쏟을 방향을 바꾸기는 쉽지만, 애당초 에너지를 쏟는 일부터 시작하는 건 좀처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저는 부모에게 아이를 혼내지 말라고 권하지만, 그렇다고 방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혼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가령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을 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이의 그런 행동에는 주의를 시켜야 하지만 혼내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이 있음을 아셨으면 합니다.
칭찬하지 말자
어른과 아이는 대등하다
칭찬에는 문제가 많지만 가장 본질적 문제는 칭찬이 상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등한 관계라면 상대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혼내는 일에서 알 거라 생각합니다. 대등한 관계라면 상대를 혼내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어딘가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혼낼 수 있는 거지요.
간혹 상대가 아이라면 칭찬해도 되는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몇 살까지라면 칭찬해도 좋은지를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상대가 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습니다. 아이를 자신과 대등하다고 보는 사람은 아이가 태어난 첫날부터 칭찬하지 않습니다.
어른과 아이가 같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당연히 아이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주 많습니다. 부모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져야 할 책임의 양도 다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어른과 아이는 대등합니다. 어쩌다 보니 태어난 시기가 달랐던 거고, 한쪽은 부모, 한쪽은 아이로 이 세상에서 만난 것뿐입니다. 아이들을 대등한 관계로 보고, 존경하고, 전폭적인 신뢰로 대한다면 억지로 억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혼내거나 벌을 줄 필요도 없겠지요. 또한, 아이들을 아래로 보고 치켜세워 주거나 칭찬할 필요도 없습니다.
로린 마젤이라는 지휘자가 11살 때 토스카니니를 대신하여 NBC 교향악단을 지휘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미 8살 때 지휘자로서 데뷔했는데, 단원들은 어린아이가 지휘대에 서는 일을 분개하여 노골적으로 불쾌감이나 적의를 드러냈습니다. 일부러 다른 음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악보를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지휘를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윽고 리허설이 진행됨에 따라서 베테랑 연주자들과의 관계를 쌓아, 연주가들은 경의를 갖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날로부터 어른과 동등한 만큼 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재능을 갖고 있지만, 마젤을 대한 연주가들이 처음 그랬던 것처럼, 아이의 힘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그저 보이는 모습만으로 자기보다 부족한 존재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어른보다 부족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존재로 볼 수 있다면 아이와의 관계는 크게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에게 용기를 심어주자
공헌감
다른 사람과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 관계가 자기에게 유용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독립해서 살아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행동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없이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때 관계를 어떻게 볼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적대적으로 볼지, 우호적으로 볼지에 따라 삶을 대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다른 도구라면 새로 살 수 있겠지만, 나라는 도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새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 나름의 맛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가 이런 나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아이의 인생은 행복하지 못할 겁니다. 부모가 아이의 단점이나 결점만 주목하는 행동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자신을 좋아할 수 없게 이끄는 셈입니다.
앞서 소속감이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고 했습니다. 이 소속감은 단지 가족에 소속되어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도 다른 가족에게 소속감을 주고 있고 공헌한다고 느낌으로써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런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칭찬하는 게 아니고 용기를 주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마워"라는 인사를 제안하는 목적입니다. 즉, "고마워"라는 말은 그런 말을 들은 상대가 다른 사람의 도움이 되었다고 봄으로써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용기 부여의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은 적이 아니고 친구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친구란, 필요하다면 도와줄 용의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친구라고 보지 않는 아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고, 틈이 있으면 자기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경계를 게을리할 수 없다. 그렇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전통적인 육아나 교육의 사고방식으로는 아이가 자신을 혼내는 부모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또 혼나는 건 아닐까 항상 겁내는 아이는 적극적으로 도전하려 하지 않습니다. 설령 부모나 교사가 시켜서 어떤 일을 끝까지 해냈다고 해도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편 칭찬받으며 자란 아이는 칭찬을 기대하고 한 일이 칭찬받지 못하면 금세 적절한 행동을 그만두고 자신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을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칭찬을 목표로 하면 무언가를 배우기보다는 커닝을 해서라도 일단 결과만을 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결과를 내서 칭찬받더라도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지요.
용기를 얻은 아이는 공헌감을 가집니다. 공헌감을 가지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한 일을 인정받지 못해도 충분합니다. 물론, "고마워"라는 말을 듣는 건 기쁜 일이지만, "고마워"라는 인사를 기대하여 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헌감을 가지는 일과 다른 사람을 친구로 보는 일, 이 두 가지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와 좋은 관계 맺기
상호 존경
"그 사람이 입원했을 때 내가 병문안을 갔었거든? 그런데 내가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안 왔지 뭐야." 어느 날,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길 "그 사람은 빈손으로 왔어. 하지만 나는 병문안을 갈 때 선물을 사 갔지"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걱정돼서 부랴부랴 달려가지 않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과연 자기가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왔던 사람인지를 생각할까요? 병문안뿐만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언제나 일방통행이고, 그런 의미에서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거래는 절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쁜 것은 상대방이다(예를 들면, 아이가 나쁘다)라고 생각하는 한 상대와의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관계를 어떻게든 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이 먼저 바뀌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야기를 돌리자면, 상호 존경이라 해도 내가 먼저 존경하는 것입니다. 존경은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명심해야 합니다. "나를 존경해라"라고 말한다 해서 존경하게 될까요? 이 세상에 강요해서 얻을 수 없는 게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존경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을 듣는다 해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요?
그럼 구체적으로 존경은 어떤 걸까요? 존경에 대해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상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을 유일무이한 존재, 즉 다른 누군가와 바꿀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상대가 상대답게 성장, 발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원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라고 부모는 자주 아이에게 말하지만, 정말로 "너(아이)를 위해서"인지는 의심스럽게 느껴집니다. 존경은 사랑의 요소 중 하나라고 프롬은 생각했습니다만, 사랑에 존경이 빠져 있다면 쉽게 상대를 지배하거나, 소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도 툭하면 잊어버립니다. 존경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respect라고 하는데, 원래 의미는 다시 보다나, 되돌아보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되돌아보느냐 하면 "이 아이는 나에게 있어 둘도 없다" "우리 아이는 지금은 이렇게 함께 살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만 한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사이좋게 살아야지"라는 것을 되돌아본다는 뜻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금방 잊어버리지만 이러한 것을 되돌아보는 행위부터 존경이 생겨납니다.
지금부터의 육아
용기 부여의 문제
육아가 어른이 생각하는 대로 아이를 조종하는 것, 기대하는 아이로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기 위해서 어른이 아이에 대한 의식, 혹은 견해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를 어른과는 같지 않지만 대등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기술적인 부분은 나중에 따라옵니다. 반대로 기술을 응용문제의 해답을 외우듯 배운대도 대등하다는 의식이 없으면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유해할 수 있습니다.
어른과 아이가 대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아이가 어떤 식으로 해도, 무엇을 해도, 조금도 정점에서 흔들림 없이 항상 아이를 도울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있어서 한 명이라도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그 아이의 인생은 반드시 변합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부모일 필요는 없지만,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게 있어서 그런 존재가 되는 일이 바람직하겠지요.
이렇게 부모자식 관계에 생각의 차이가 있어도 혹은 아이의 행동을 문제라고 느끼는 일이 있어도 부모와 아이는 대등한 관계니 혼내거나, 비판하거나, 벌을 주거나, 칭찬하거나, 치켜세우는 일 없이 대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전통적 육아 방법에 기대지 않고, 감정적으로 되지 않고 냉정하게 말하는 방법은 분명히 시간도 수고도 들지만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부모의 생각과 다를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입니다.
부모와 아이의 생각이 대립하는 경우는 자주 있는 일이고 부모가 틀린 경우도 많습니다. 아이가 틀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 누군가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일을 강요하지 않고 대화 방법을 배운다면 부모자식 관계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엇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는 분명 기성 가치관에서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말을 골라 정중하게 말해야 함을 아는 일이 이미 큰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말을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알지 못한다면 아이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아이에게 말을 걸면 어느 날 깨닫게 됩니다. 내가 아이에게 용기를 주는 게 아니라, 이런 생활을 하면서 아이에게 얼마나 용기를 얻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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