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톨로지

   
김정운
ǻ
21세기북스
   
18000
2014�� 10��



책 소개

 

유쾌한 인문학으로 돌아온 김정운의 신작!

에디톨로지Editology(지식×편집=창조)  

당신은 ‘변태’인가? 그렇다면 창조적 인간이다!  

 

모래밭에 나체의 여인이 누워 있다. 풍만한 가슴은 두 팔로 감싸고, 배꼽 아래 그곳은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 ‘그곳’을 가린 ‘그것’은 손바닥만 한 아이팟이다. 당신은 그곳을, 아니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변태다!  

 

쳐다본 게 변태가 아니라 안 쳐다본 게 변태라니, 황당한가? 억울해할 것 없다. 저자는 변태를 이렇게 정의한다. “창.조.적. 인간!”  

 

생식기에 집중하는 것은 동물적 본능을 가진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본능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자만이 남들과 다른,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시선은 곧 마음이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이 정의되고, 세계가 구성된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여태껏 살아온 방식이며, 이를 통해 자신만의 시각으로 저마다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익숙한 방식과 타성에 젖어 습관대로 사고하며 일상을 반복한다.  

 

창조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것도 아니다. 창조는 기존에 있던 것들을 구성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의 결과물이다.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라는 뜻이다. 그 편집의 과정에 저자는 주목했다. 그리고 편집의 구체적 방법론을 이렇게 명명했다. 에디톨로지(Editology)!  


■ 저자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디플롬, 박사)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전임강사 및 명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2014년 현재 일본 교토사가예술대학단기대학에 재학 중이다(일본화 전공). 저서로 『Kultur (in) der Psychologie』(독어, 공저)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등이 있으며, 『애무』 『보다의 심리학』을 번역했다. 현재 《조선일보》 ‘김정운의 감언이설-아니면 말고’와 《월간중앙》 ‘김정운의 창조학교’ 등을 연재 중이다.  

 

■ 차례

프롤로그 편집된 세상을 에디톨로지로 읽는다  

 

PART 01.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

01 왜 에디톨로지인가?

02 창조의 본질은 낯설게 하기다

03 지식권력은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

04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 쥐 때문이다!

05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06 노트와 카드의 차이는 엄청나다

07 편집 가능성이 있어야 좋은 지식이다

08 예능 프로그램은 자막으로 완성된다

09 연기력이 형편 없는 배우도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이유

10 클래식을 좋아한다면 절대 카라얀을 욕하면 안 된다  

 

PART 02.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

01 관점의 발견과 서구 합리성의 신화

02 우리는 윈도(창문)로 세상을 개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03 원근법은 통제 강박이다

04 권력은 선글라스를 쓴다!

05 시대마다 지역마다 달라지는 객관적(?) 세계지도

06 공간 편집에 따라 인간 심리는 달라진다!

07 독일인들의 공간 박탈감이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다!

08 19세기 프로이센 군대와 축구의 공간 편집

09 제식훈련과 제복 페티시

10 분류와 편집의 진화, 백화점과 편집숍  

 

PART 03. 마음과 심리학의 에디톨로지

01 개인은 편집된 개념이다

02 ‘나’는 내 기억이 편집된 결과다!

03 우리는 왜 백인에게는 친절하고, 동남아인에게는 무례할까?

04 천재는 태어나지 않는다. 편집될 뿐이다!

05 미국은 국가國歌로 편집되는 국가國家다

06 심리학의 발상지 독일에서 심리학은 흥행할 수 없었다

07 프로이트는 순 사기꾼이었다!

08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위대한 편집자였다!

09 항문기 고착의 일본인과 구강기 고착의 한국인

10 책은 끝까지 읽는 것이 아니다!  

 

에필로그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아주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프롤로그 | 편집된 세상을 에디톨로지로 읽는다

영어나 유럽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주변주 지식인’으로 살면, 가끔 참 억울한 일이 생긴다. 내 이야기할 때는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다가, 서구의 유명한 어느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바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경우다.


베를린 장벽이 동독 공산당 대변인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으로 무너졌다고 이야기를 하고 다녔더니, 다들 그저 재미있으라고 하는 농담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2009년 10월, 미국의 〈월 스트리트 저널〉 그렇게 보도하자 한국 신문에서도 보도했고 바로 ‘역사적 사실’이 되어 버렸다.


나는 오래전부터 “창조는 편집이다!”라고 주장해왔다. 21세기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스티브 잡스의 탁월한 능력은 따지고 보면 ‘편집 능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 주장에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2011년 그가 죽고 유명한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은 디자인이나 비전이 아닌, 기존의 제품을 개량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편집 능력에 있다”고 주장하자, 여기저기서 그의 창조적 능력을 편집 능력과 연관시켜 말하는게 아닌가.


영어권, 특히 미국에서 논의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힐끔대야만, 비주류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변부 지식인의 슬픔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지식의 종속이다. 지식 체계 구축의 기본단위인 개념 하나 스스로 만들 수 없다면 ‘창조사회’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 맘대로 만들었다. ‘에디톨로지! editology!’ 먼 훗날 전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도록 영어로 만들었다. ‘창조는 편집’이라는 의미다. 내가 말하는 에디톨로지는 그저 섞는게 아니다. 그럴듯하게 짜깁기하는 것도 몰론 아니다. ‘편집의 단위 unit of editing’, ‘편집의 차원 level of editing’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인식의 패러다임 구성 과정에 관한 설명이다.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

왜 에디톨로지인가?

당신이 가장 먼저 바라본 곳은 어디인가? 시선이 곧 마음이다. 세상 모든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한 곳을 쳐다본다. 인간은 동물이다. 그러나 동물과 달리 인간은 매일매일이 발정기다. 존재 자체가 성욕 덩어리다. 이성의 벗은 몸을 보게 되면, 성기 쪽으로 시선이 가게 되어 있다. 저항할 수 없는 동물적 본능이다. 그 위에 아이팟을 올려놓은 것이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무서운 광고다.


그러나 아이팟을 보지 않고, 엉뚱한 곳을 먼저 보는 이들이 있다. 풍만한 가슴이나 허벅지 혹은 입술 등. 이런 이들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이렇다. 변태! 종족 번식과는 전혀 관계없는, 아주 엉뚱한 것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적 인간은 대부분 변태다. 남들과 똑같은 것을 보아서는 절대 창조적이 될 수 없다. ‘성기 중심주의’를 벗어나야만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극의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라고 한다. 세상의 엄청난 양의 자극에 대한 인간 인지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자극만 받아들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극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 창조적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가 벌어진다. 창조적 인간은 남들이 지나치는 자극을 확 잡아챈다. 위대한 창조를 그렇게 사소하게 시작된다. 선택적 지각의 반대편에는 ‘무주의 맹시(無注意盲視, inattentional blindness)’라는 현상이 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지식을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다. 그러나 이 첫 단계부터 ‘선택적 지각’이나 ‘무주의 맹시’와 같은 왜곡된 현상들이 이미 나타난다. 사안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소리다. 받아들인 자극은 정보를 구성하고, 그 정보는 서로 연합하여 지식으로 발전한다. 메타 지식과 지혜의 차원도 있다. 이는 내가 앞으로 설명하려는 에디톨로지의 주요 내용이다.


에디톨로지는 다시 말해 편집학(編輯學)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나는 한마디로 ‘편집’이라고 정의한다. 비슷한 개념은 많다. 통섭, 융합, 크로스오버, 최근엔 콜레보레이션까지. 세상을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최소 단위로 나누고, 각 부분을 자세히 분석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근대의 해석학은 그 한계를 드러낸 지 이미 오래다. 근데 왜 통섭이나 융합이 아니고, 에디톨로지인가? 통섭이나 융합은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내가 이야기하고픈 에디톨로지는 인간의 구체적이고 주체적인 편집 행위에 관한 설명이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아침형 인간이 성공하는 산업사회는 오래전에 끝났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는 잡는다면, 그럼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뭔가?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유희이자 놀이다. 이같이 즐거운 창조의 구체적 방법론이 바로 ‘에디톨로지’다.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나도 없다! ‘창조는 편집이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1984년, 반정부 시위로 제적당했던 사람들을 일관 구제해준다며 군사정권이 유화정책을 폈고, 해직되었던 교수 등도 제적된 학생들과 함께 복직되었다. 그런데 당시 해직 교수들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아주 특이한 교수의 이름이 학생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철학과 김용옥 교수였다. 그는 검은색, 흰색 한복을 번갈아 입고 나타나, 수업 시간에 욕설이나 성적 표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 온통 억압뿐이던 그 시절, 그의 언행은 ‘통쾌함’ 그 자체였다. 물론 이제는 많이 진부해졌다. 아니 별로 안 재밌다! 그러나 당시 김용옥 교수는 내게 아주 특별했다.


그는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 쓴 사람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김용옥이 처음이다. 그 방식은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한국 교수들이 두려워하는 자기 생각 말하기, 즉 주체적 글쓰기가 김용옥에게 가능했던 것은 그의 ‘크로스 텍스트(cross-text)’적 사유 때문이다. 동양적 텍스트의 근본적 이해와 더불어 서구 해석학적 방법론이라는 그의 무기는 해당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 문화, 언어, 정치적 콘텍스트(context, 맥락)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크로스 텍스트적 독해는 당연히 주체적 글쓰기로 이어지게 된다. 일단 김용옥에게는 동양고전이라는 무한한 무기가 있었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가 확실하고, 아울러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는 항상 변한다. 같은 이야기라도 콘텍스트가 바뀌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편집된다는 말이다. 해석학의 본질은 ‘에디톨로지’이다. 김용옥이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동서양을 넘나드는 크로스 텍스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는 반드시 텍스트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를 떠나면 ‘순 구라’가 되는 까닭이다. 목사나 신부가 『성서』라는 텍스트를 떠나면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 텍스트는 반드시 해당 콘텍스트에서 생성된다. 언제가 한국에 와서 강연한 하버마스는 정작 뜬금없는 이야기만 하다 갔다.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 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옳은 소리다. 한국의 콘텍스트에서 새로운 텍스트가 가능하려면 기존의 텍스트를 해체해야 한다. 텍스트의 해체와 재구성은 김용옥 식 크로스 텍스트로는 불가능하다. 탈텍스트, 즉 하이퍼텍스트가 가능해야 한다. 한국에도 그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온 사람이 있다.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솔직히 나는 누군가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만 만나고 나면 열등감에 풀이 죽는다. 매번 좌절이다. 도대체 그런 새로운 이야기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어령은 아주 단순하다고 했다. 그는 기호학적 개념인 ‘선택(paradigmatic)’과 결합(syntagmatic)’의 구조를 설명했다.


음악을 작곡할 때 7음 중에 한 음을 뽑고 이어지는 음을 또 뽑고 멜로디를 만드는 과정이 선택과 결합이다.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주어, 술어, 목적어 등으로 구성되는 문장의 결합 구조를 해체하고, 동시에 주어, 술어, 목적어가 선택된 각각의 맥락에서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고민한다는 말이다. 이어령은 자신의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의 핵심은 텍스트를 해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다들 텍스트를 받들고만 있을 때, 자신은 이 텍스트를 해체하는 일부터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자신의 태도가 뭐 그리 특별하냐고 되묻는다.


클래식을 좋아한다면 절대 카라얀을 욕하면 안 된다

클래식 음악을 좀 듣는다는 이들 앞에서 카라얀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졸지에 아주 우스운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김광석, 성시경을 이야기하는데, 나훈아를 좋아한다며 끼어드는 경우라고나 할까? 나름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이들은 카라얀 이름만 나오면 삐죽거린다. 클래식 음악을 조금 안다면 카를로스 클라이버나 볼프강 자발리쉬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표정이다. 어찌 그 천박한 쇼맨십의 카라얀을 들먹이냐는 거다.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화려한 카라얀의 동작과 표정이 음악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음악은 절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일찌감치 눈치 챈 카라얀은 음악과 영상의 편집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카라얀이 세계 최초의 뮤직 비디오 제작자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뿐만 아니다. 스스로 예술 감독, 영상 감독을 자처한다. 당시 기껏해야 공연 실황으로 연주되던 클래식 공연을 카라얀은 다양한 영화적 기법을 동원해 최초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지나친 나르시시즘은 욕먹어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보는 음악’을 창조해낸 업적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음악과 영상의 편집’이라는 21세기적 에디톨로지의 선구자다. 그가 없었다면 클래식은 그야말로 늙은이들의 음악으로 20세기 중반에 사라졌을 확률이 높다. 그가 만들어낸 그 폼 나는 영상들이 클래식에 대한 대중적 환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클래식은 우아하게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카라얀은 클래식의 황제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그 숱한 음악가들이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 폼 나게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

관점의 발견과 서구 합리성의 신화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을 배우는 일이다. 세상을 ‘좌’ 아니면 ‘우’로만 보고, 내 편이 아니면 바로 적이 되어버리는 형편없는 시대이기에 인문학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잡스가 강조한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항상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기계발서의 대부분은 ‘관점을 바꿔라!’로 요약할 수 있다. 도대체 관점이 무엇이기에? 사전적 의미로 관점은 ‘보고 생각하는 위치’다. 관점은 영어로는 ‘퍼스펙티브(perspective)’다. 퍼스텍티브는 ‘원근법’ 혹은 ‘투시법’과 그 어원이 같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실이다.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보는 위치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점, 즉 원근법을 바꾼다는 것은 ‘세상을 구성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뜻이다.


지난 세기 왜 서구 문명이 느닷없이 이토록 강해졌을까? 원근법의 발견 때문이다. 이것도 뭐, 순전히 내 가설이다. 여기서 원근법은 선원근법(線遠近法)을 뜻한다. 서구 과학문명은 바로 이 원근법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근대 이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서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몰락했던 이유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늦었기 때문이다. 동양은 왜 과학기술의 발전이 늦었을까? 과학적 사고의 부재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는 ‘객관성’과 ‘합리성’이다. 이 두 가지가 원근법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세계의 구성 원리의 전제가 된다.


서구 원근법의 전제는 두 가지다. 첫째, 세상을 보는 눈은 하나여야 한다. 이때부터 서구 ‘객관성의 신화’가 시작된다. 둘째, 3차원 세상은 소실점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비례하여, 2차원의 평면에 그대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합리성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 서구 객관성과 합리성의 신화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소실점, 즉 객관성과 합리성의 기준이 철저하게 ‘자의적’이고 ‘권력적’이라는 사실이다. 소실점을 누가 찍느냐에 따라 2차원에 투사된 결과물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철저히 권력적이다. 서구의 과학적 사고는 바로 이 권력을 아주 은밀하게 은폐하는 데서 출발한다.


원근법은 통제 강박이다

좌표가 잡히지 않는 공간은 ‘공포’다. 도무지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인류는 이러한 공간에 대한 공포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재현(representation)’이다. 재현의 대부분은 3차원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환원시키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무한한 공간’을 통제 가능한 ‘유한한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자리 지도, 땅의 지도를 갖게 되면서 인간은 무한한 공간의 공포에서 마침내 해방된다.


재현 가능성이라 반복 가능하다는 뜻이고, 반복 가능성은 곧 통제 가능하다는 뜻이다. 규칙과 질서를 부여해 무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시도는 시간과 공간, 두 영역 모두에 해당된다. 그러나 시간의 경우, 달력의 규칙성과 반복성만으로 시간의 공포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달력이 반복될수록 늙어가고,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달력은 어설픈 자기최면에 불과하다. 그래서 시간과 관련된 축제와 제의가 그토록 요란한 것이다. 그만큼 두렵기 때문이다. 시간과 비교하면 공간에 대한 공포는 비교적 쉽게 극복된다. 2차원적 환원을 통해 규칙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시선이 하나여야 하는 서양의 원근법은 근대 이후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 잡았다. 모든 현대식 교육은 이 원근법에 맞추어 이뤄진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방식이 오직 한 가지일 수는 없다. 동양 회화에서도 전혀 다른 형태의 원근법을 볼 수 있다. 가까운 물체는 작게, 멀리 있는 문체는 크게 그리는 ‘역원근법(逆遠近法)’이다. 책가도(冊架圖)가 그 예다. 책가도에 나타난 역원근법과 서양의 선원근법의 차이는 기법이 아닌 인식론의 차이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시선, 혹은 제3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역원근법은 지금 그림을 보고 있는 내 반대편의 시선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 또한 역원근법을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이다. ‘시선’이 하나이어야만 한다는 선원근법적 전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주장이지만 동양의 역원근법은 서구 원근법의 전제가 되는 주체적 시선이 상대화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동양회화에 나타나는 관점은 제3의 초월적 시선을 전제로 한다. 대개 이 관점은 마음의 관점, 즉 상상의 관점이 된다. 관점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다양한 관점이 섞이는 것이다. 르네상스 선원근법의 확립 이후, 서구에서 구성된 모더니티의 핵심은 바로 ‘관점의 통일’에 대한 강박이다. 이는 객관성, 합리성, 표준, 통일성의 철학으로 전개해나간 근대 서구 사상사의 핵심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오면 서구의 이 같은 세계관은 권력과 맞물리며 ‘식민지주의’라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다. 시선 자체가 권력이 된다.


권력은 선글라스를 쓴다!

근대성, 즉 모더니티는 권력의 시선을 숨긴다. 푸코의 원형감옥 파놉티콘은 이 모더니티의 간지(奸智, 간사한 지혜)를 잘 설명해준다. 죄수들은 간수가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이 항상 관찰당하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당연히 감옥 안의 규율을 스스로 알아서 다 지킬 수밖에 없다. 외적 규율의 내면화다.


이렇듯 시선은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자만이 시선을 소유할 수 있다. 5·16 쿠데타 당시 선글라스는 낀 박정희 장군이 주는 메시지는 확실하고 단순했다. 또한 강력했다. ‘나는 너희들을 본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볼 수 없다.’


근대 권력의 시선은 사람들의 삶을 아주 구체적이고 정교하게 지배한다. 시선의 지배가 구체화된 공간이 바로 감옥, 학교, 군대, 병원이다. 근대 교육의 목표가 되는 ‘성장’과 ‘성숙‘ 혹은 ’발달‘의 본질은 타율적 규제의 내면화에 있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 근대가 늦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늦은 게 아니다. 달랐을 뿐이다. 동양에는 더 오랜 기간 지속된 절대왕정이 있었지만 단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사회의 모든 문화와 가치가 회귀하는 전방위적인 단일 체계는 아니었다. 동양의 시선은 서양 근대의 ‘싱글 퍼스펙티브(single perspective)’, 즉 과학주의나 객관주의와는 전혀 다른 문화심리적 구성 체계에 근거한 ‘멀티플 퍼스펙티브(multiple perspective)’였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 과정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는 관찰자의 시점이 사방으로 되어 있다. 관찰방향에 따라 시선의 주체가 달라지도록 그려져 있는 것이다. 서구의 싱글 퍼스펙티브는 주체의 관점이 하나이며, 변함없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관점이란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그리고 한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동양의 편재적 관점, 즉 멀티플 퍼스펙티브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관이다.


근현대 세계사는 서구 관점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21세기의 환경문제, 빈곤 문제와 같은 전 지구적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싱글 퍼스펙티브의 서구 모더니티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싱글 퍼스펙티브의 한계는 곧 서구 세계관의 한계다. 그렇다고 지금의 동아시아가 대안이 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요즘같은 상태의 한국, 중국, 일본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마음과 심리학의 에디톨로지

‘나’는 내 기억이 편집된 결과다!

2003년 내가 처음 책을 내며 소개한 내 이력을 보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이력을 폼 나게 보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책 내용도 부끄러워 일찌감치 내 스스로 절판시켰다. 그런데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라는 책에서 “‘김정운’은 팔뚝 굵은 아내가 차려준 아침 밥상에 감사하며” 등으로 쓴 2009년의 자기 소개는 불과 6년 사이에 확연히 달라졌다. 대학교수지만 수컷으로서는 여타 중년 사내들과 하나 다를 것 없음을 서술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텍스트를 어떤 사람들이 읽을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항상 해당 콘텍스트에서 기록된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는 반드시 그 텍스트가 쓰인 문화적·역사적 콘텍스트를 포함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텍스트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가 바로 ‘나’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아이덴티티(identity), 즉 자기 정체성이라고 정의한다. 자기 이야기, 자신에 관한 서술, 자기 서사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내러티브 심리학(narrative psychology)은 ‘자신에 관한 텍스트’가 바로 자신의 실체라는 정의에서 출발한다. 자신에 관한 텍스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 이야기, 즉 기억으로 구성된다. 나는 ‘과거 기억의 편집’이다. 문제는 그 기억이란 항상 자의적이고 편파적이라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구체적 내용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콘텍스트에 따라 ‘전혀 다른 나’가 편집된다는 소리다. 예를 들어, 여인들 앞에서는 내가 청년 시절 얼마나 터프하고 사내다웠는지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대고, 다른 교수들과 대화할 때는 내가 공부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했는지를 설명한다. 터프한 나와 학구적인 나, 모두 내 실체다.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일리(一理)를 이해하려면 상대방이 처한 콘텍스트에서 구성되는 텍스트 형성 과정에 관한 이해와 통찰이 있어야 한다. 이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 기억으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편집되는 자아에 대한 성찰을 통해 가능하다.


스티브 잡스의 내러티브는 매우 예술적이다. 이리 튀고, 저리 튄다. 하버드 대학 졸업 연설에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죄다 쓸모없고, 고작 ‘서체 수업’하나 쓸만했다고 쿨(!)하게 말한다. 졸업생과 교수들은 그 모욕적인 이야기를 그저 참고 들어야 했다. 스티브 잡스였기 때문이다.


그의 평생 라이벌 빌 게이츠가 2년 후에 한 하버드 대학 졸업 연설은 잡스와 전혀 다르다. 그는 격조 있는 연설을 했다. ‘창조적 자본주의’를 선언하며, 빈곤 퇴치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환경문제 등을 언급한 빌 게이츠의 연설은 가히 도덕 교과서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


빌 게이츠의 이야기는 백 번 옳다. 훌륭하다. 그리고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도 안 재미있다는 거다. 별로 흥미롭지 않다. 반면 기부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관해 어떠한 이야기도 한 적 없는 잡스의 이야기는 뭔가 감동이 있다. 울림이 크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계몽’이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스스로 의미를 편집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일방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재미없는 거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내러티브는 진리를 강요할 뿐, 일리(一理)의 해석학이 빠져 있다.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낼 때만 의미 있다. 진리를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위대한 편집자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위대한 이유는 일단 인간의 마음을 ‘이드(Das Es)’, ‘자아(Das Ich)’, ‘초자아(Das Über-Ich)’로 나누고, 맥락에 따라 각각 달라지는 마음의 현상학을 이들의 역동적 관계로 설명했다는 데 있다. 인간 심리에 관한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를 만든 것이다.


사실 근원적 욕망을 나타내는 ‘이드(id)’ 혹은 ‘그것(Es)’ 또한 프로이트의 창작물이 아니다. 이 역시 ‘무의식’의 경우처럼 남의 것을 가져다 쓴 것이다. 그러나 이드의 경우에는 프로이트답지 않게(!) 원래 누구의 개념인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드 개념을 처음 만들어낸 이는 바로 프로이트를 열렬히 추종하던 게오르그 그로데크(Georg Groddeck)라는 의사였다.


수많은 비판자들이 주장하듯,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미국식 심리학’의 좁디좁은 과학성을 기준으로 파악하자면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그따위 과학적 심리학의 좁은 범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유 체계가 아니다. 심리학, 정신의학, 철학, 문학, 사회학의 범주를 포괄하는 메타의 영역이다. 뿐만 아니다. 프로이트의 개념은 끝없이 편집되고 재편집되면서 진화한다. ‘편집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콤플렉스’, ‘나르시시즘’, ‘억압’, ‘트라우마’, ‘리비도’, ‘투사’, ‘치환’ 등과 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데 아주 풍요로운 이론적 토대가 된다. 근대 학자들 중 프로이트만큼 풍요로운 개념의 편집 가능성을 열어준 학자가 있다면, 어디 한번 이름을 대보라!


프로이트 사후,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이 주로 철학적 영역에서 개념 편집이 이뤄졌다면, 영국에서는 발달심리학과 연관되어 이론적 편집이 이뤄졌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대니얼 스턴(Daniel Stern)은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아주 특별한 방향으로 확장했다. 발달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접합점을 찾는 과정에서 그는 외부의 타자가 어떻게 자아 구성과 관계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핵심은 상호작용이다. 유아가 어머니를 비롯한 타자와 맺는 초기의 상호작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아의 심리로 내면화되는가를 추적한다. 이를 위해 그는 ‘활력 정서’와 ‘정서 조율’의 핵심 개념을 편집해낸다. 흥미롭게도 스턴과는 전혀 다른 이론적 배경을 갖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리듬 분석(Elements de rythemanalyse)’을 유작으로 남겼다. 르페브르의 ‘리듬’과 스턴의 ‘활력’은 개념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


역시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스턴의 활력 정서와 정서 조율을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과 연결시킨다면, 음악과 심리학, 철학, 사회학이 서로 교차 편집되는 아주 흥미로운 영역이 창조될 것이다. 이런 식의 ‘학제적(interdisciplinary)’ 에디톨로지를 통해 급격히 꺼져가는 정신분석학의 편집 가능성을 되살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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