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에 관하여

   
샤를 단치(역자 : 임명주)
ǻ
미디어윌
   
13000
2015�� 01��



■ 책 소개

 

불후의 명작, 불멸의 걸작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를 주름잡던 걸작들의 수수께끼를 밝힌다!

 

걸작이란 무엇인가? 어떠한 작품이 걸작이 되는가? 작가는 어떻게 걸작을 쓰게 되며 우리는 왜 걸작에 환호하는가? 걸작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문학사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한 시대를 빛내던 걸작들이 숱하게 많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그 걸작들을 죽 늘어놓고 보면 주제와 형식, 장르 등에서 걸작들의 수만큼이나 제각각으로 다양한 개성을 자랑한다. 그렇다면 걸작이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는 것인가?

 

《걸작에 관하여》는 걸작에 관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의문을 거침없이 하나씩 풀어나가는 책이다. 이름난 애서가이자 독서광인 프랑스 작가 샤를 단치는 이 책에서 호메로스를 비롯하여 디킨스, 보들레르, 도스토옙스키, 보르헤스, 파솔리니, 말라르메, 프루스트 등의 작가들이 쓴 200여 편의 문학 작품들을 독자에게 보여주면서 걸작에 대한 숱한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간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기존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걸작이라는 개념에 흔히 뒤따르는 여러 가지 편견과 오해를 통렬히 비판한다. 예를 들면 ‘걸작은 영원하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걸작의 시대는 끝났다’든지 하는 관념들이 독자가 걸작을 향유하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어떻게 왜곡하고 방해하는지를 지적한다.

 

또한 걸작에 대해 살펴보는 지은이의 시선은 단지 누구나 인정하는 걸작, 대가들의 대표작 등을 훑어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리 알려지지 않거나 폄하되는 작품에서 걸작다움을 찾아내기도 하고 걸작의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작품에 대해서는 “미개인을 위한 걸작”이라거나 “혐오스러운 걸작”이라며 신랄하게 풍자하기도 한다. 때로는 작품을 평가하는 비평가·학자·독자·작가의 서로 다른 처지에 대해 유머러스하게 너스레를 떨거나 독자들의 일반적인 독서 행태를 문제 삼기도 하면서 사회의 변화와 문학의 관계, 문학교육 등 다양한 주제로 막힘없이 이어진다.

 

이런 다양한 주제가 담긴, 73개의 비교적 짧은 장들로 구성된 이 책은 때로는 한 장이 단 세 줄로 끝날 만큼 빠른 호흡과 날렵한 전환을 보여주는데, 이는 다양한 각도에서 걸작들의 여러 가지 면을 살펴보되 거기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특히 지은이는 이 책에서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논리로 독자들을 설득하는 비평가의 시선과 함께,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때로는 환호를, 때로는 안타까움을, 때로는 비웃음을 던지는 열정적인 독자의 시선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러한 두 가지 각도의 시선은 문학비평과 개인적 독후감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특한 서술 방식에 녹아 있는데, 이를 통해 독자들도 걸작의 실체에 좀 더 쉽게, 입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독자들은 지은이가 던지는 수수께끼들을 함께 풀어가면서 감탄과 공감을 거듭하다 보면, “걸작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적인 지식을 넘어 무엇보다도 걸작이 주는 즐거움을 좀 더 제대로 만끽하는 방법을 확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읽지 않고 숭배하면 신성한 책은 굳어버린다.”
 
■ 저자 샤를 단치(Charles Dantzig)
저자 샤를 단치는 프랑스 출신의 작가로 의학교수 집안에서 자랐다. 17세에 프랑스의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획득할 정도로 영민했다. 이후 법학공부를 시작했으며 툴루즈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수 있었던 법대시절은 자신에게 최고의 시간이었다는 말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회고한다. 28세 때 처음으로 에세이 형식의 시집을 출간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자신의 책을 쓰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에는 고전 작가들의 미간행 작품들을 발굴하는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2년 3월에는 현대문학과 리얼리즘의 위험한 미적 행보를 비판한 논설을 〈르몽드〉에 실으면서 문학계의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전작 《왜 책을 읽는가》는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장지오노 그랑프리(Grand Prix Jean Giono)를 수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사랑의 영화Un film d’amour》, 《카라카스행 비행기 안에서 Dans un avion pour Caracas》 등이 있고, 이 작품들은 각각 로제 니미에상과 장 프로지테상을 수상했다.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 《프랑스 문학의 이기적인 사전》을 발표하며 아카데미 프랑세즈 에세이 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받기도 한 실력 있는 작가다.

 

■ 역자 임명주
역자 임명주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동 대학교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주한프랑스대사관 상무관실에서 근무했으며, 프랑스농식품진흥공사(SOPEXA) 대표를 역임했다. 옮긴 책으로 《점령하라》, 《경영 심리학》, 《1시간 기획》, 《좌파 이야기》, 《그림자 소녀》, 《왜 책을 읽는가》 등이 있다.

 

■ 차례
목차

걸작에 대한 논란
삶의 형식, 책의 형식
작가명표
작가명표에 없는 걸작
걸작의 기준
과정, 그 이상한 단어
걸작에는 모델이 없다
걸작의 즉흥성
걸작은 자신만을 대표한다
숨겨놓은 걸작
걸작을 지키는 보초병
벽돌공의 청구서
소설의 형식은 인물의 결과다
뜻밖의 걸작
걸작의 유쾌한 명확성
걸작은 언제나 젊다
걸작의 기적
걸작의 세 가지 주제
문학의 세 가지 상태
신과 기적
걸작은 화살이다
디테일이 걸작을 만든다
주제에서 벗어나기
의도된 형식
걸작과 동기
쓰고 싶다고 쓸 수 있을까?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다
완벽은 죽음이다
20세기의 조각 소설, 21세기의 회반죽 소설
읽을 수 없는 걸작
《 율리시스》,《 율리시스》를 심판하다
걸작도 산소호흡기가 필요할까?
걸작은 스스로 자신의 범주를 만든다
집요함에 대하여
휘파람을 부는 걸작
나만의 걸작
걸작은 갑옷이다
걸작은 제국주의자다
걸작의 부당성
코믹 걸작
걸작은 이성적이지 않다
이성적인 사람들과 걸작
부수적인 걸작
걸작은 행복한 파괴인가?
미개한 걸작, 미개인들을 위한 걸작
혐오스러운 걸작
환희의 걸작
진실과 허구의 환상
걸작은 누가 결정하는가?
아이들을 위한 걸작
걸작에 대한 어른들의 장광설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된다
상상의 벽과 진짜 돌담
비교할 수 없는 것 비교하기
영웅의 길을 가는 걸작
걸작의 위성들
왕국
걸작은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비물질적 기념물
걸작의 결과
걸작은 우리를 걸작이 되게 한다
달콤한 신성모독
1인 독자 클럽
왕은 누구인가?
샤카르와 볼링
정리
걸작은 어느 날 사라진다
우리가 폭격한 걸작
걸작과 죽음
걸작의 정의를 시도하다
걸작이 되자
참고문헌
독자의 탐욕

 




걸작에 관하여

걸작에 대한 논란<
/P>언제나 어느 것에나 논란은 있었다. 그건 좋은 일이다. 논란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천국에서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걸작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걸작’이라는 단어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공예품을 생각나게 한다.”(발레리 라르보Valery Larbaud<프랑스영역>) 그렇다. 걸작은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만든 것, 뭔가 유용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개성 없고 중세적이다. 실제로 걸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200년 무렵부터다. “걸작. 길드에서 직공이 장인이 되기 위해 해야 할 중요하고 어려운 작업.” 이 단어는 300년이 흐르고 나서 예술작품에 사용된다. “1508년. ......에서 가장 완벽한 작품......”(<그랑로베르 사전>)


각 언어에는 걸작을 뜻하는 말 또는 유사한 개념이 있다. Capolavoro. Obra maestra. Obra prima. Lan nagusi. Masterpiece. Meisterwerk, … 걸작, 傑作. 이 단어들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바스크어, 영어, 독일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노르웨이 보크몰어, 라트비아어, 에스토니아어, 체코어, 헝가리어, 그리스어, 터키어, 히브리어, 아랍어, 아프리칸스어, 아르메니아어, 한국어, 중국어, 베트남어, 일본어로 모두 최고의 작품을 뜻한다. 히브리어에서 걸작을 가리키는 말은 시인인 하임 나흐만 비알리크가 1908년에 만들었다(걸작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은 창조할 수 없으며 특히 완벽한 작품은 신의 전유물이다.) 그리고 위의 단어 중 외국어에서 유래한 단어는 없다. 러시아어에서 걸작을 뜻하는 ‘셰데브르shedevr’는 18세기에 파리의 패션과 함께 수입되었지만[이 셰데브르는 프랑스어에서 걸작을 뜻하는 chef-doeuvre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미 러시아에는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뜻의 ‘마르테르스키 이스폴네니아mastierski ispolnienia라는 말이 있었다. 정말로 걸작에 대한 개념은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신보다 더 보편적이다. 우리는 모두 걸작의 존재를 믿는다.



걸작은 언제나 젊다

유행. 새로움. 여기에 젊음을 추가하고 싶다. 심각해지려고 심각이라는 위선의 옷을 입을 필요는 없다. 자신이 없는 것일까? 칭찬이 필요한 것일까? 상투성은 언제나 정확성에서 한 발짝 옆에 있지 않던가? 유행, 새로움, 젊음은 어린 나를 흥분시켰고 성인인 나를 여전히 흥분시킨다. 유행, 새로움, 젊음은 인생을 다채롭게 한다. 걸작은 600살이 되어도 언제나 젊다. 책장을 열며 기운찬 걸작은 벌써 준비를 끝내고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간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자, 어서! 함께 날아보자고!


600살.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쓴 <서간집>의 나이다. 우리는 약간 의무적으로 이 책을 들추면서 이렇게 말한다. 흐음, 이 책이 1350년부터 끊임없이 찬양받은 책이라고? 이 시인이 올림픽 경기 시상식처럼 귀족들과 대중들 앞에서 계관시인으로 추대되었다고? 하지만 방투산을 오르는 등산 이야기나 사랑하는 여인 라우라에 대한 이야기는 틀어놓고도 듣지 않는 옛날 노래 같잖아! 하지만 이런 것에 조금이라도 감각이 있다면(관습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관습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열다섯 살에는 상상할 수 있는 감각이 있다면 여든 살에는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 작가가 아니라 칭찬이 진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가끔을 얻고 열정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하고 거기서 수많은 생각과 이미지, 유머(“왕들은 음식의 맛이나 새의 이동을 평가할 수 있지만 동시대인의 재능은 평가할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교만으로 얼굴이 커질 대로 커져 눈을 뜨지도 못할 것이다......”, “좋아서 글을 쓰는 것이냐 아니면 병이어서 쓰는 것이냐......”, “자네 글을 칭찬해달라고? 나가 죽으시게나!”)를 발견한다. 600년 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늘 아침 내게 일어난 일 같다. 영원한 젊음은 걸작의 특징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권태에 익숙해져 젊음을 증오한다. 젊은 정신을 사랑하는 것과 젊음을 파는 광고는 다르다. 걸작은 걸작을 읽는 사람을 젊게 하고, 잠시이지만 불멸성을 경험하게 한다. 걸작은 시간을 뛰어넘는다.


걸작은 화살이다

걸작은 화살이다. 한순간도 추락하지 않고 곧장 날아간다. <채털리 부인의 여인>(1928)은 무척이나 성공적이어서 지나가는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떤 책은 성공하고 어떤 책은 실패하는가? 알 수가 없다. D.H.로렌스의 <죽은 남자>(1929)처럼 가다가 떨어진 화살이 답을 찾는 데에 도움을 줄까? 이 소설은 초반의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내가 D.H.로렌스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위대한 사람은 그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라는 볼테르의 말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잠깐 비틀거렸을 뿐이다. 예수가 무덤에서 걸어 나와 인간의 병을 고치러 간다. 나는 1부를 읽으면서 “로렌스는 알레고리allegory를 피하는 데에 성공했고 진정한 허구, 길이 남을 허구를 창작한 진정한 작가야”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니었다. 1부만 걸작이었다. 만약 마지막에 구원자 의사가 순진하지 않았다면 전체가 걸작이 되었을 것이다. 1부에서 예수의 동정童貞 문제가 언급되었는데 나는 이것이 책의 주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주제는 지속되지 않고 2부에서 화살이 떨어진다. 로렌스는 갑자기 내용을 바꿔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을 만큼 갸우뚱하게 하는 인물들에게 너무 많은 장을 내주었다. 그 대신에 예수의 성性 문제는 너무 느리게 전개되었다. 로렌스의 실수는 말할 것도 없이 어휘가 완전히 변한다는 것이다. 처음 어휘와 나중 어휘가 마지막에 조화를 이루지 않고 끝난다. 걸작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인생에는 일관성이 없으므로, 문학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작가인 우리도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가끔 신이 나타나 우리의 작품 한구석에 한 줄기 빛을 슬그머니 비춰주기도 하지만 우리는 우리 눈앞에 번쩍이는 불꽃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독자와 관객의 몫이다. 독자의 걸작이 있다. 훌륭한 책만이 독자의 걸작이 될 수 있다. 테니스 경기를 할 때 좋은 상대를 만나야 나도 더 잘하는 것처럼(그렇다고 들었다). 좋은 책을 읽어야 더 잘 읽을 수 있다. 그래야 기계적으로 짜증내며 읽는 대신에 작가와 함께 하늘을 날게 된다. 브누아 자코Benoit Jacquot 감독의 <페어웰, 마이 퀸>(2012)은 디테일이 살아 있는, 재능이 번쩍이는 작품이지만 끝까지 파고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예를 들어, 베르사유 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귀족들이 쑥덕거리는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몇 번 더 나왔다면 프랑스 혁명 전의 광기와 환영을 더 잘 보여주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좁은 통로를 20초 동안 뛰는 장면이 있는데 너무 짧았다. 좀 더 길었다면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판화에 등장하는 맥베스Macbeth 부인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감독은 과장(디테일을 클로즈업해서 전체의 느낌을 전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영화 초반에 사람들이 폴리냑Polignac 공작부인에 대해 험담한다. 건방지고, 가증스럽고, 오만하고...... 폴리냑 공작부인 역할을 맡은 비르지니 르두아이엥Virginie Ledoyen의 첫 장면은 지나가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오만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리고는 한참 나오지 않다가(인물에 맞아 떨어지는 부채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소파에 앉아 있는 장면에 다시 나타난다. 폴리냑 공작부인을 좋아하는 왕비는 그녀 곁에 붙어서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공작부인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감독이 그 장면 뿐 아니라 영화 내내 공작부인의 입을 다물게 할 것으로 생각했다. 천재적인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비르지니 르두아이엥이 입을 열었고 그때부터 영화는 내리막을 걷는다(르두아이엥 탓이 아니다). 그녀가 계속 입을 다물고 교만한 모습을 유지했다면 얼마나 훌륭한 역할이 되었을까! 얼마나 훌륭한 극이 되었을까!


다이앤 크루거Dianc Kruger(마리 앙투아네트 역)는 아주 짧은 순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왕비가 도망갈 수 있도록 책 읽어주는 시녀가 왕비가 총애하는 폴리냑 공작부인의 옷을 입으려고 옷을 벗었을 때 왕비의 시선은 1초 동안 어두워진다. 욕망을 들키지 않으려고 숨는 시선이었다. 영화 역사에서 이런 장면은 유튜브 사이트(http://www.youtube.com)의 맨 처음에 올라가야 마땅한 명연기의 순간이다.


나는 순간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그때 멋진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멋진 일은 절대로 오래가지 않는다. 그 후에는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이며 그 일은 아주 오래간다.


걸작은 갑옷이다

콕토의 소설 <무서운 아이들>(1929)은 패배한 카드게임을 닮았다. 작가가 차갑게 내던진 카드는 표현주의 영화에서 보는 삼각형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누나 엘리자베트Elisabeth와 남동생 폴Paul은 넓은 아파트에서 단둘이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꿈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게임’이라고 부르는 연극을 하며 지내는데 그들에게 이 연극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그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엘리자베트는 강인하고 소유욕이 강하며 경직되어 있다(경직된 인물은 콕토가 만든 걸작의 특징이다. 콕토 자신도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보는 사제처럼 걸었다). 그녀는 부자 미국인과 결혼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과부가 된다. 그 후 미국인의 아파트에서 폴의 중학교 친구였던 남녀와 함께 살게 된다. 마치 운명이 남매를 항상 비극 속으로 몰아 넣는 것처럼 폴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엘리자베트는 음모를 꾸민다. 폴은 독약을 마시고 엘리자베트는 권총 자살을 한다. <무서운 아이들>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생각, 눈, 그림자다. 이 단어들은 좀 더 빠르게 진행되는 프리드리히 무르나우Friedrich Murnau의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매우 예리한 소설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콕토는 운명이라는 주제에 집중한다. “그는 레이스처럼 복잡하게 짜여 있는 운명을 보면서 운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냈을 것이다.” 희곡 <지옥의 기계>가 생각난다. 나는 열세 살 때 그 작품을 서문까지 포함해 여러 번 타자로 옮겨 적었다. 세 번, 다섯 번, 열 번...... 작가가 되기도 전에,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문학에 눈뜨는 것은 성에 눈뜨는 것과 같고, 문학은 성의 한 형태다) 열정적으로, 비밀리에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며 <지옥의 기계>가 내 것이 될 때까지 베꼈다. 창문 뒤 불투명한 세계가 어슴푸레 보였지만 열쇠가 없었다. “관객들이여, 나사를 끝까지 조여라. 그래서 인류를 확실하게 소멸시키고자 지옥의 신들이 만들어낸, 인생이라는 완벽한 기계의 용수철이 천천히 풀리도록!” <무서운 아이들>에서는 조연들도 운명의 조정을 받는다. 엘리자베트의 미국인 남편은 죽고 나서야 ‘게임’에 받아들여진다. “살아 있는 스카프가 그의 목을 조르면서 그에게 방문을 열어주었다. 죽지 않았다면 절대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신화를 되살리고 싶어 했던 콕토는 이 책 전체에서 여러 신화를 창조했다. 미국인 남편은 죽음으로써 신화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긴 스카프가 자동차 바퀴에 걸려 목 졸려 죽은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의 죽음을 재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도 신화가 되었다. “그녀의 고백은 그녀를 더 커 보이게 했고 교활한 옷을 벗기고 흰 천을 둘러주었다.”(루마니아 독재자의 부인 엘레나 차우셰스쿠Elena Ceausescu가 재판을 받는 모습이 생각난다.) 지나가던 소방관들도 신화가 되었다. “제라르Gerard는 괴성을 지르며 서로 쫓아다니는 조형물, 빨간 사다리, 알을 품고 있는 황금헬멧을 쓴 남자들이 알레고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장소 역시 신화가 된다. <무서운 아이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현대판 신화이다.


<무서운 아이들>의 과장된 장면 같은 불완전성은 걸작의 인간미를 보여준다.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길고 ‘소박한’ 이브닝드레스처럼 천을 걸치고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는 이 프랑스 작가가 거둔 성공은 얼마나 대단한가! <무서운 아이들>을 지탱하는 것은 이미지다. 이미지 소설이고 인물도 이미지다. 우아하게 축약된 눈부신 이미지다. 눈[雪]은 “가벼운 것이 담긴 무거운 상자다.”


<무서운 아이들>은 출판되자마자 젊은이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은 노인들이 지배했다. 아버지들은 전장에서 죽고 할아버지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유령과 참전용사들이 있었다. 콕토는 젊은이들을 다시 존재하게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젊은이들도 비극을 경험할 권리가 있다. <무서운 아이들>은 아첨하지 않는 어린 시절에 관한 드문 소설이다. 학대받고 냉혹하게 솔직하고 인위적인 어린 시절이다. 콕토는 엘리자베트와 폴이 “어리게 살도록 만들어졌다”라고 썼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그 운명에서 벗어나야 했지만 그들은 원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열한 어른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엘리자베트와 폴은 계산할 줄도 모르고 교활하지도 않다. 열정만 있다. 그들은 ‘게임’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장애물과 게임하는 방법은 몰랐다. 장애물을 피할 줄 몰랐기에 장애물에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이것이 젊음이 안고 있는 위험이고 그것을 책에서 보여준 것에 대해 젊음은 콕토에게 고마워했다. 젊은이들은 우리에게는 ‘젊은 왕자’[princes de la jeunesse: 로마 시대에 ‘젊은 제1인자’를 뜻한 라틴어 ‘프린키페스 유벤투티스principes iuventutis를 번역한 말]가 없다고 한탄했다. 그런데 문학의 왕자들이 나타나 절망에 싸인 젊은이들에게 말했다. “여기에는 벽에 밀어붙이고 브레이크를 걸고 때리는 어른은 없고 그 대신에 젊음을 좋아하고 젊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만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아무데나 널려 있는 양말과 낙서가 적힌 공책 사이에서 걸작을 찾았고, 걸작은 그들에게 그림책을 대신해 젊은이가 게임의 주인으로 남을 수 있는 영원한 방이 되어주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인생을 살게 해주는 갑옷이 되었다.


걸작은 이성적이지 않다

아무도 걸작을 기다리지 않는다. 걸작의 불필요성은 수십억의 사람들이 늘 하는 일에 짓눌린 몇천 명의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몇천 명의 소수는 그 자체로 존재 이유가 있다. 소수에게 존재 이유를 주지 않으면 나비는 탱크에 의해 짓이겨진다. 단순하고 편리하고 이성적인 다수는 아주 미세한 차이도 경계하며,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게 된다.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낮잠을 자고 있는 개는 코앞에서 날리는 꽃잎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는가. 그들은 소수에게 침묵하라고, 눈에 띄지 말라고, 조심하라고 요구한다.


걸작은 회계사 같은 세상에 반대한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다가 우울하게 죽는 것에 반대한다. 이성을 최상의 것으로 찬양한 볼테르의 걸작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시류에 영합해 쓴 일시적인 걸작이나 앙리 4세에 대한 무훈시 <앙리아드> 같은 사회적 성공을 위해 쓴 걸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손한 화승총의 총알 같은 <철학사전>, <관용론>, 그리고 역사를 분석하는 척하면서 침묵을 비판한 <풍속시론>을 말한다. 미친 이성에 대한 비판, 바로 이것이 이 책들의 제목이 되어야 한다. ‘미쳤다’라는 뜻의 근사한 중세 단어 ‘fol은 발자크와 그의 옷처럼 ’미쳐‘버렸다.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 막스 자코브의 <흑생 방>처럼 미친 작품은 이성의 광기 속으로 곤두박질하는 순간에 날아오르는 사람들의 시다. 볼테르는 권력에 그토록, 그토록, 그토록 저항하는 책을 쓰고자 경망한 척하면서 대담해야 했고 다른 사람보다 두 배나 더 미쳐야 했다. 별다른 배경이 없는 가문 출신에 아는 사람도 없고 노는 것을 좋아한 볼테르는 권태에 대항해 싸우는 유쾌한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승리했다.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걸작을 쓴 보마르셰는 뻔뻔한 속임수 때문에 엉덩이라도 맞아야 하지만 그 역시 솔직했고 조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유쾌했다. 나는 보마르셰를 좋아한다. 절대 조심하지 않고 질린 얼굴을 하거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다. 위선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은 그의 비상한 술책이었다. 당시 어느 귀부인도 회고록에서 그렇게 말했다. 문 반대편에서 마룻바닥에 부딪히는 구두굽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고 달콤한 바람고 함께 귀부인이 들어온다. 그리고 물결치는 비단 옷자락을 바스락거리며 의자에 앉는다. 부인, 말씀하시죠.


(......) 멋진 얼굴에 개방적이고 영적인 정신을 소유한, 그리고 조금은 무례한 보마르셰씨를 나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나무랐다. 그가 건달임을 나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비범한 머리에,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강한 의지가 있다. 매우 훌륭한 장점이다. 훌륭한 인물들이 그러하듯 시계공의 아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그를 조롱했던 사람들은 당황한 것이다. 그는 장애물을 뛰어넘어 큰 재산을 얻었다.

- 오베르키르히Oberkirch 남작부인, <회고록>


귀족 중에 더 한심한 건달들이 많지만 그들은 공격받지 않았다. 보마르셰 만세! 베르사유 궁의 작은 종이 극장 만세! 트리아농 별궁 뒤 정원으로 가려진 곳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자신만의 극장을 만들어 보마르셰의 작품을 공연했다. 혁명파 대표들이 왕비의 극장에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복수의 꿈이 절망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했다. 순금과 다이아몬드는 어디 가고 종이와 유리로 된 극장이라니! 타락과 난교파티는 어디 있는가? 아! 다른 곳을 뒤지러 가야겠다. 그래서 그들은 모자 끝을 만지작거리며 베르사유 궁 안에 있는 ‘거울의 방’으로 환상을 쫓으러 갔다. 여왕의 극장처럼 걸작은 다수의 사람들 눈에 다이아몬드가 보이지 않는 덕분에 다치지 않고 살아남는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진지함이다. 볼테르와 보마르셰는 진지한 사람들이었다. 걸작은 진지하다. 밝고 명랑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진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글자가 춤을 추면 숫자는 이빨을 간다.


우리는 반대로 보이는 것으로도 걸작을 만들 수 있다. 자연을 거슬러 원뿔 모양으로 나무를 정리한 프랑스 정원은 옹졸한 이성의 절정이다. 그처럼 반복되고 과장되고 비이성적인 책도 놀라운 작품이 될 수 있다. 에르베 기베르Herve Guibert의 작품은 어느 것도 걸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몇몇 구절에서 히스테리를 부릴 때, 자존심의 상처에서 꽃이 피어날 때 걸작의 순간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작품에서 이러한 순간이 모여 작은 걸작을 만든다. 로널드 퍼뱅크Ronald Firbank(영국, 1886~1926)의 작품 전체나 E.T.A.호프만E.T.A.Hoffmann의 이야기(독일, 1776~1822)가 그렇다. ‘작은’ 걸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야심이 크지 않아서가 아니라(이들 작가에게는 거대한 야심이다) 극도로 과민한 기베르처럼 쩨제한 것에 야심을 품기 때문이다. 훌리오 코르타사르Julio Cortazar의 몇몇 단편소설, 예를 들어 <교통 혼잡>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상화했다. 베르사유 궁전에는 앙토냉 아르토의 작품보다 더 광기가 번뜩였다. 작가를 파멸시키는 광기가 아니라 작가를 꿈꾸게 하는 광기였다.


그래서 우리가 걸작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걸작은 적막함에 저항한다. 우울한 병사들 뒤로 태양이 떠오른다. 날카로운 웃음이 들려오고 병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행진을 하던 병사 한명이 공중제비를 돈다. 젊잖은 연설에 소년이 혀를 내밀며 야유한다. 그리고 파드되pas de deux 춤이 이어진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고 춤추는 행렬이 오며 팡파르를 울리고 폴카 춤을 춘다. 걸작은 군대의 정해진 대열을 무너뜨린다. 키스해드릴게요!



걸작은 누가 결정하는가?

비평가, 학자, 독자, 이렇게 세 부류가 문학을 심판한다. 비평가들은 신간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걸작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판단력이 흐려질 때가 잦다. 그리고 나쁘지 않지만 삐걱거리는 책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칭찬하는 경향이 있다. 오! 불쌍한 작가들. 재주가 없고 대담하지 않더라도 도와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절대 1등이 될 수 없어...... 훌륭한 책에 대해서는 작가가 비평가의 기를 꺾을 만큼 연륜이 있지 않은 이상 평가를 유보하거나 불성실하게 대한다. 반대로 학자들은 책은 많이 읽지 않으면서 과도하게 평가한다. 하지만 절대 과도하게 찬양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살아 있는 작가에 대해서는 인색할 뿐 아니라 무시하기까지 한다. 학위도 없는데 인정을 받아서일까? 독자는 학자나 비평가보다 편견이 덜하다. 하지만 취향이라는 기준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면 좋은 책이 되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한 거지? 도대체 내가 뭐라고 한 거지? 세 부류라니! 정신 나간 것 아냐? 한 명의 심판관이 더 있다. 비평가, 학자, 독자, 그리고 작가다. 그중에서 누가 가장 정당한 심판관인가? 걸작의 이름을 높이는 데에 누구의 입김이 가장 약한가?


미켈란젤로는 그에게 직업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 직업을 가진 사람 말고 누가 더 좋은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 조르조 바시리, Giorgio Vasari <미켈란젤로 편>, <예술가의 생애>


걸작은 많이 읽고 훌륭한 것을 식별해내는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의 합의로 정해진다. 우리를 흥분시키고 유혹하고 거칠게 다루며 고양시켜주는 걸작 덕분에 우리는 인생을 더 강렬하게 살 수 있다. 걸작은 우리를 자신의 위치로 올려놓는다는 점에서 평등주의자라 할 수 있다.


걸작은 오랫동안 존재한다. 수십 년 동안, 수세기 동안 영원히 파낼 수 있는 금광이다. 좋은 말을 들을 수도 있고 나쁜 말을 들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계속 말한다는 것이다. 걸작은 학계의 해석, 현학자衒學者의 의견, 거짓 설명에서 살아남는다. 더 대단한 것은 훌륭한 의견에도 견딘다는 것이다.


어떤 칭찬은 가장 상냥한 사람조차 도망가게 한다. 예를 들어, 구조주의가 잘나가던 시절 구조주의자들은 프루스트를 가지치기하고 다듬고 해체하고 소금을 뿌리고 통시적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실험용기 안에 갇혀 있던 마르셀 프루스트는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탈출했다. 걸작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신에게 오는 것이면 모든 것을 흡수하는 빛이다. 별에게 나쁜 것은 없다.


걸작은 우리가 하는 어떤 비평에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걸작은 절대성에 가장 가까이 있고 오래오래 거기 있을 것이다. 걸작은 지상에서 구현된 이상이다.



걸작은 우리가 걸작이 되게 한다

반박할 수 없는 유일한 걸작의 기준은 우리를 걸작으로 변신시키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걸작이 우리 곁을 지나면 우리는 더는 같은 사람일 수 없다. 보통의 작품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걸작은 우리를 지배하고 변신시킨다. 양식 없는 사람이나 건달을 빼고 프루스트를 읽고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걸작은 무엇인가? 걸작은 그림*시*조각*영화*음악을 보거나 듣는 사람을 걸작으로 변모시키는 속성이 있다.

- 장 콕토, <정의된 과거>(5권)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프루스트가 된다.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셰익스피어가 되고 푸시킨을 읽으면 푸시킨이 된다. 그들의 인물이 되고 그들의 배경이 되고 그들의 감정이 되며, 그들이 된다. 문장을 꼼꼼히 읽으면 그들의 문장과 재능도 될 수 있다. 걸작은 인식하지 못했던 창의력의 창고에 빛을 비춰준다. 걸작은 형식이 없는 인생에 형식을 부여하고 어느 순간 우리를 예언자로 만들어준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 사랑과 예속을 혼동하기도 한다. 걸작에 존경을 표하면 걸작은 살아 있는 것이기를 멈춘다. 우리가 걸작을 따른다고 믿지만 실제는 걸작과 함께 살고 있다. 말을 걸고, 반박하고, 흔들고, 거부하고,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 껴안고 사랑한다. 조용한 관계도 있다. 조용한 사랑이 있지 않은가. 걸작과 나와의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결정된다. <전쟁과 평화>는 나를 안정시키고 <죄와 벌>은 나를 동요시킨다. 사실 <죄와 벌>은 걸작이라 할 수 없다. 여전히 전성기라고 믿는 퇴락한 걸작에 가깝다. 아마도 <죄와 벌>에서 광신주의의 정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광신주의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을 망쳤다. 장거리 주자인 그의 소설은 열심히 뛰다가 갑자기 멈춰 설교를 한다. 또 한계까지 열심히 기어오르지만 결국에는 한계가 된다. 위대한 재능이 더는 재능을 보이지 못하면 그때는 우리를 위한 책이 아니다. 좋은 독자는 한곳에 갇혀 편안함을 느끼려고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다.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상위형태의 지성을 통해 새로움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놀라운 속도로 달려온 상상력은 기대하지 못했던 여러 이미지에 빛을 비춰준다! 도스토옙스키는 일장연설보다 더 지독한 무례함을 저지르고 우리를 멀어지게 했다. 그는 자신의 광신주의에 분을 발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소설이라는 수단을 함부로 다뤘다. 추함과 거짓이 매력이 되고 악의만큼 긴 성공을 누리기도 한다. 이들 작가는 훌륭한 독자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다루고 자신들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종자들은 의심 없이 그들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간다. 마른 사람, 뚱뚱한 사람, 영리한 사람 모두. 그리고 다정함은 폭력으로 바뀐다. 이것이 문학의 냉소주의다. 이들 작가는 술책에 강하고 그들의 술책은 폭력이다. 상스러움은 그들의 글쓰기에도 영향을 미쳐 갈수록 페이지는 늘어나고 책은 두꺼워진다. 북채에 달려있던 꽃은 행진하는 동안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문학은 글쓰기를 타락시키고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작가들에게 복수한다.


문학의 목적은 종교(도스토옙스키)도 아니고, 권력에 아첨하는 것(코르네유)도 아니고, 사회를 배우는 것(꽤 많은 수의 출판물)도 아니고, 독자의 소일거리가 되는 것(또 다른 꽤 많은 수의 출판물)도 아니라 문학(얼마 남지 않은 책) 자체다. ‘얼마 남지 않은 책’, 문학의 전기로 얼마나 멋진 제목인가!


우리 문학은 18세기 말, 유럽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새틴 천으로 만든 실내화를 살찐 발끝으로 돌리고 향수에 중독된 후작부인이고 아버지는 열일곱 살의 농부로 머리에 짚을 달고 다니는 목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날 것이다.

이제 우리 문학은 머리가 희고 몸은 마르고 성질이 완고한 노인이 되어 멍하니 걸작을 흩뿌리고 있다. 돌볼 것이 자신밖에 없는 우리 문학은 모든 것을 이겨냈다.


걸작의 정의를 시도하다

‘걸작’만큼 잘못 붙여진 이름도 없다. 적어도 항상 같이 다니는 함축된 의미가 잘못되었다. 어떤 단어도 혼자 존재할 수 없다. 단어에는 오래도록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생긴, 우리가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생각이 따라다닌다. ‘걸작’에 따라다니는 생각은 노동, 일, 수공업이다. 노력과 유사한 것이다. 나는 이 외피를 벗기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걸작에서 수공업보다는 창작력을, 반복적인 행위보다는 독창성을, 비인격성보다는 감수성을 더 많이 발견한다. 웅변적으로 설명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흔히 붙이는 신의 후광도 벗겨내려고 했다. 걸작에서 우리는 무책임보다는 섬세함을, 신보다는 양식 있는 재능을, 마법보다는 포기를 더 많이 발견한다. 숙련의 의미가 직접 표현된 색슨 언어의 ‘Meisterwerk, masterpiece만큼 진정한 의미가 부재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걸작은 ’예술‘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으려고 ’숙련‘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오만도 포기하는 것인가? 그렇다. ‘위대한 작품’이 훨씬 나을 것 같다. 걸작에 대한 정의를 시도해본다.


이렇다.


걸작 : 남성명사. 문학에서 걸작은 고유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따라 평가할 수 있는 예외적인 책이다. 인물을 가장 대담하게 표현한 걸작은 모두 독창적이다. 걸작이 되는 주제, 걸작이 되는 형식은 없다. 걸작은 인류를 더욱 열정적이게 하는 창작물이다. 이 단어는 ‘위대한 작품’으로 대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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