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격

   
페터 비에리(역: 문항심)
ǻ
은행나무
   
16000
2014�� 10��



■ 책 소개
삶의 품격을 높이는 단 한 권의 책!
품격 있는 삶의 방식과 존엄한 삶의 의미를 다시 묻다


독일 최고의 철학 부문 에세이상 트락타투스상 2014년 수상작. 철학자이자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인 페터 비에리 교수의 역작이다. 『삶의 격』은 삶의 형태로서 다양한 존엄성을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8장에 걸쳐 제시하고 그 의미를 천착한다.


본래 저명한 철학자로서 저자의 역량과 열린 세계관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 책은 철학적인 무게와 깊이를 오롯이 담고 있다. 그러나 인간 존엄성을 다루는 일반적인 철학서와 달리 서양 고전 문학과 영화, 그 등장인물 간 가상의 대화 및 논쟁을 예시로 들면서 줄거리나 배경을 자세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특별한 예비지식 또는 철학적 바탕 없이 흥미진진하게 따라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독자의 삶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새롭게 한다는 데 있다. 연인 또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 직장 생활 등 공적인 삶과 상처받기 쉬운 자아의 내적인 삶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삶 전체를 돌아보고 이를 존엄성의 관점으로 새롭게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게 하는 것이다.


■ 저자 페터 비에리
1944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났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버클리 대학, 하버드 대학, 베를린 자유대학 등 여러 곳에서 연구 활동을 했으며, 마그데부르크 대학 철학사 교수 및 베를린 자유대학 언어철학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작으로 『자유의 기술』(2001), 『어떻게 살 것인가?』(2011) 등이 있다. 창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페를만의 침묵』(1995), 『피아노 조율사』(1998), 『리스본행 야간열차』(2004), 『레아』(2007) 등 여러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현재 인간의 정신세계, 철학적 인식의 문제, 언어철학 등 폭넓은 인문학 분야를 아우르며 연구 및 저술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 역자 문항심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마기스터 학위를 받았다. 베를린 자유대학 도서관과 훔볼트대학 도서관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독일에 거주하면서 독일문학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베를린 대왕』, 『비를 먹는 사람들의 도시』, 『사로잡힌 꿈들의 밤』, 『미무스』,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 『패배자들의 도시』, 『시간을 여행하는 소녀』(3부작) 등이 있다.
 
■ 차례
서문: 삶의 형태로서의 존엄성


1장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
주체되기
존재 자체로 목적되기
도축장
그러나 만일 자발적인 것이라면?
무력감을 일부러 보여줌으로써 굴욕 주기
내면의 요새로의 도피>권리 갖기
후견인 노릇
진심 어린 개입
타인과 그들의 개입에 대한 존중
종속: 부탁과 구걸>감정 구걸
내적 독립: 생각하기
내적 독립: 의지와 결정
내적 독립: 감정적 동요>내적 독립: 자아상과 검열
예속을 통한 굴욕
자아 인식을 통한 독립
치료가 필요할 때
일을 통한 존엄>돈


2장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주체끼리의 만남
개입하기와 거리 두기
인정
평등
전시
욕정의 대상
인간이라는 상품
무시
나랑 말 좀 하세요!
비웃음
알 권리조차 없을 때
조종
속임수
유혹
압도
치료
동정은 싫소!
독립된 주체가 서로 만날 때
상대방에게 미래를 열어주기
존엄성을 지키는 이별


3장 사적 은밀함을 존중하는 존엄성
은밀함의 두 얼굴
타인의 시선
결함이란 무엇인가?
수치심의 논리학
수치심에서 굴욕으로
수치심을 극복함으로써 존엄성 지키기
사적 영역
내면 가장 깊숙한 곳
품위 있게 드러내기
품위 없게 드러내기
친밀함의 공유
배신으로 인한 존엄성의 상실
용기가 결여된 은밀함


4장 진정성으로서의 존엄성
타인에게 거짓말하기
자신에게 거짓말하기
정직과 그 한계
사물을 이름으로 부르기
체면 지키기
어리석은 허언


5장 자아 존중으로서의 존엄성
한계 짓기로서의 존엄성
변화하는 자아상
파괴된 자아 존중
희생된 자아 존중
분열된 자아 존중>자기 자신을 책임지기


6장 도덕적 진실성으로서의 존엄성
자립적 도덕성
도덕적 존엄성
죄와 용서에서의 존엄성
벌: 파괴가 아닌 발전
절대적으로 넘어선 안 될 도덕적 경계가 있는가?


7장 사물의 경중을 인식하는 존엄성
삶의 의미
스스로의 목소리
균형을 유지하는 침착함
끝에서부터 거꾸로 보기


8장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타인이 소멸해감을 바라볼 때
탈출
스스로가 소멸해감을 바라볼 때: 거부
스스로가 소멸해감을 바라볼 때: 날이 저물어감을 인정하기
죽음
죽을 수 있게 놔두기
삶에 종지부를 찍다
고인을 대할 때


참고문헌
옮긴이 후기


 




삶의 격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

무력감을 일부러 보여줌으로써 굴욕 주기

타인으로부터 우리가 주체라는 사실을 무시당하거나 수단으로 악용당할 때 우리는 굴욕을 느낀다. 굴욕은 우리에게서 존엄성을 앗아 가는 행위이다. 이 행위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무력감은 특정한 힘을 갖지 못하는 것, 즉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굴욕으로서의 무력감은 이와는 다른 것이다. 굴욕이 주는 무력감은 장애물을 극복하거나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는 등 자신의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않을 때 느끼는 종류의 것과는 다르다.


굴욕이 주는 무력감은 타인과 관련이 있다. 의미를 잘 따져보면 굴욕에는 굴욕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 무력감을 안겨줌으로써 굴욕이 생기는 것이다. 이때의 무력감은 우발적으로나 무계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굴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무력감을 느끼게 할 때 성립된다.


그렇지만 단순히 무력감을 안겨주는 것으로 충분치는 않다. 굴욕이 굴욕으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 일부러 만들어져야 한다. 무력감이 단순한 무력감이 아니라 굴욕으로 성립되려면, 당하는 쪽에서 굴욕감을 느끼게끔 누군가 자신에게 어떤 상황을 일부러 불러일으켰다고 분명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굴욕은 상대방의 무력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굴욕은 단순히 무력감을 드러내기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나에게 굴욕을 주는 자는 자신이 굴욕을 선사하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스스로의 무력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며 그 장면을 만끽한다는 것을 내가 알게끔 한다. 여기서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당하는 자의 무력감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가해자의 즐거움이다.


권리 갖기

권리라는 것은 전횡에 의한 종속에 맞서는 성벽과 같다.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립이라는 의미로서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게 된다. 권리가 있는 사람은 요구를 할 수 있다. 권리가 없는 사람은 이리저리 떠밀리지만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다. 내가 어떤 것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는 것은 나를 위해 어떤 것을 해주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타인에게 지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권리는 무력감으로부터 나를 막아주는 방화벽이다. 그것은 내가 내 뜻을 밀고 나갈 수 있도록 권력을 준다. 그러므로 권리는 굴욕으로 부터의 보호책도 된다. 내가 받는 굴욕을 세상에 내보이고 즐기려는 자들의 활동 범위를 제한한다. 더는 손쓸 수가 없다고 생각될 경우 소송을 제기하면 된다. 법정에서 내 손을 들어주고 뜻이 관철되면 나는 존엄성을 확인받고 다시 바로 세워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아 인식을 통한 독립

내적 독립을 향한 욕구는 자아 인식을 향한 욕구와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느낌이 어째서 그런지 이해하고 싶은 욕구다. 앞의 두 욕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내적 독립성의 부재는 내 안에 있는 강박적인 생각들, 유별나게 격한 감정들, 그리고 자꾸만 제어되지 않는 성가신 욕구들을 왜 잠재우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같은 느낌을 동반한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해서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어떠한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 우리 자신은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종류의 인식을 가지지 않으면 부족한 독립성과 잃어버린 내적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힘들다.


우리 인생에서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생각과 감정과 기억과 공상과 소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이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것들이다. 이 모습들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무의식적인 정신적 사건을 의식적 경험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결국은 내 안에 있는 나를 좀 더 잘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더 큰 자유로의 변화와 내적 독자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과거에 이물질처럼 느껴지던 것들이 이제는 그것을 이해함으로 해서 더는 낯설거나 불편하게 여겨지지 않고 내 안에 통합될 수 있다. 즉 정신적 정체성의 당당한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그것이 무엇이 됐든 내가 가진 내적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다. 자아 인식의 범위를 내면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무력감과 굴욕을 당할 위험이 줄어든다. 앞으로는 협박당하거나 예속당하지 않는 것이다. 내적 권위를 다시 회복하면 존엄성도 따라서 바로 선다.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인정

인정은 일단 타인의 행위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정한다는 것은 우선 능력을 인지하고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내가 네 노고를 인식했으니 됐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알려야 하는, 보이는 인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인정한다는 것은 노고의 당사자에게도 와 닿는 일종의 선언적인 성격을 띤 것이다.


상대방이 인정했다는 것을 나도 느끼려면 그가 내 능력을 인지했다는 것을 넘어선, 능력의 높은 평가가 뒤따라야 한다. 인정은 존중이다. 인정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무시다. 그러나 평가를 보여주었다고 해서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내가 인정했다는 것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인정이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정의 효과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다.


진정한 인정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란 달라진 태도로 인해 야기되는 대인 관계의 전반적인 변화가 외형적으로만 아니라 감정적인 차원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상대방의 노고를 인정함으로써 관계는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진다. 이것이 바로 존엄성에 끼치는 긍정적 효과다.


우리는 굴욕을 당하면서 본인의 무력감을 경험한다. 이때 경험되는 무력감은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는 불가능성이란 사실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러한 소망 가운데 하나가 인정에의 욕구이다. 이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심각한 내면적 피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진정한 사람 간의 만남을 거부하는 것이다.


비웃음

누군가를 비웃는다는 건 무엇인가? 누가 우스운 행동을 할 때 웃는 것과는 다르다. 웃음을 자아내는 착각 같은 경우에도 웃음의 대상은 어떤 에피소드다. 그에 반해 비웃음은 그 사람 전체에 대한 것이다.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해 웃는다. 비웃는 계기 자체는 단지 개별적인 하나의 사건이다. 그런데 비웃음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우리가 사건에 대해 웃으면서 사람 전체를 끌어넣는다는 것이다.마치 그 사람 전체가 그 하나의 사건처럼 웃긴 듯이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런 의미에서 비웃는다면 그것은 그를 무시하는 요란한 방법이 된다. 그는 존중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한다. 이것은 사람 전체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그는 비웃음을 당하는 캐릭터로 전락한다. 이러한 비웃음은 무력감을 야기한다. 그리고 웃는 사람들은 당연히 나의 무력감을 즐기며 자기네들의 즐거움을 나도 느끼도록 한다. 굴욕을 주는 것이다.


이럴 때 유머와 자조(自嘲)가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타인이 나를 보고 웃을 때 내 인격 전체가 아니라 서투른 행동 때문이라면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냥 같이 웃어버리면 된다. 그것은 여유로움의 산물이다. 스스로에 대해 웃는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서 필요한 거리를 두고 타인이 나를 보고 조롱할 수 있다는 시선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긴다. 최악의 선택은 모욕을 당한 것처럼 자존심 상해하는 것이다.


존엄성을 지키는 이별

이별의 존엄성은 인정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둘 사이의 관계를 위해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인정해주고 만일 그를 하찮게 여긴 적이 있었다면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관대할 필요도 있다. 관대함은 상대방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어주었던 사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관대함은 오직 자아 성찰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관계에 몰입했던 과거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이를테면 자신의 잘못을 바로 보고 나태함과 모짐과 부당함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해 무조건 자기가 옳다는 맹신의 사슬을 끊는 것이다. 존엄성은 화해와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비난과 책임 소재 찾기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



사적 은밀함을 존중하는 존엄성

수치심의 논리학

여기서 수치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모두 억지로 숨기려고 하는 노력이 수반된, 탄로 날 것에 대한 공포이다. 내 결함이 다른 이에게 공개되는 것이 왜 그토록 두려운 걸까? 폭로에 대한 두려움의 정확한 대상은 무엇이며 당장의 수치심이 유발하는 강력한 정신적 붕괴 상태의 순간에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실이다. 우리는 자신의 체면과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신망을 상실하는 것이다.


결과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가하는 행위의 변화다. 나를 보는 시선도 변했다. 그것은 멸시의 시선이며 성경적으로 말해서 추방과 배척의 시선이다. 바로 이처럼 배척당하고 따돌림 당하고 내쫓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나는 과오로 인한 결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것이다.


수치심이라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만 느껴졌다가 그들이 물러가면 다시 사라져버리는 순간적인 경험이 아니다. 정체가 폭로된 사람의 수치심은 잊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수치심으로 야기된 삶의 변화는 그전보다 더욱더 극명하게 다가와 괴롭힌다. 꿈속에서도 평온하지 않다.

수치심이 왜 이렇게까지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나 자신이 직접 무력감에 한몫을 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파괴력을 가진 것은 내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굴복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시각을 내면화한다는 말이다. 그들의 파괴적인 판결에 순응한다. 나는 외부의 파괴적 판단을 그대로 덮어쓴 그 순간 이후로는 내적 권위를 상실한, 판단력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으로 살아간다.


수치심을 극복함으로써 존엄성 지키기

존엄성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될 권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존엄성을 굴욕을 느끼지 않을 권리로 이해하는 것이다. 만일 자신에게 숨기고 싶거나 노출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어떤 부끄러운 결함이 있다고 생각될 경우, 이 부끄러움은 타인의 판단 또는 자신의 판단, 둘 중의 하나에 기인한 것이다.


현재 느끼고 있거나 앞으로 느낄지도 모르는 수치심과 관련해 자기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하는 투쟁은 바로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름을 똑바로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데서 출발한다. 남들이 볼 때 결함이다, 수치다, 치욕이다 하는데 그 관점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불가피한 이유가 내게 있는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다시 찾은 사람은 외부의 판단을 반드시 자신의 판단과 동일시해야만 할 불가피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어째서 나 자신을 타인의 눈을 통해 바라봐야만 하는지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이전에는 결함으로 생각되던 것들이 이젠 그렇지 않다. 나는 당당하다. 이제 나를 내 모습 그대로 보는 타인들 앞에서 고개를 수그리지 않는다. 이러한 내면적 발전은 잃어버렸던 권위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게 해준다.


친밀함의 공유

우리는 때때로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타인에게 열어 보이고 싶은 필요를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 내 공간에 들어와서 살기도 한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의 집에 초대받아 그의 개인적인 공간에 발을 들여놓기도 한다. 이를 통해 친밀한 관계라고 불리는 어떤 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관계에는 각 단계가 있다. 어느 정도 자신을 열 것인지, 또 얼마만큼 내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것인지의 문제다.


단순히 사적인 공간을 공개하는 것에서 좀 더 들어가 내면세계, 즉 자신의 사고와 감정과 미래의 희망을 담아두는 가장 깊숙한 영역을 얼마나 상대방에게 허락할 것인지에 따라 친밀함의 정도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내밀한 관계란 상대방과 연관된 사고를 하고 감정을 느끼고 기대를 하며 또한 상대방의 감정과 사고와 기대에 영향을 받는 그런 관계다.


내밀한 관계는 타인의 배제라는 형태를 지닌다. 각 관계는 하나하나가 모두 다 다르며 하나의 관계가 다른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 두 사람의 내면세계가 서로 교차하여 얽히면 강도나 분위기가 색깔 면에서 유일무이한 정신의 연결고리가 형성된다. 그와 함께 존엄성과 관련된 의식도 생겨난다. 그러나 내밀한 관계도 깨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공유되었던 사적 비밀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도 존엄성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관계가 끝났더라도 그의 비밀을 지켜줄 것인가, 아니면 끝나버린 내밀한 관계를 떠들고 다님으로써 배신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관계가 종료된 후 상대방이 적으로 돌아섰을 경우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한 화두가 된다.



자아 존중으로서의 존엄성

한계 짓기로서의 존엄성

자아 존중의 측면에서 본 인간의 존엄성은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릴 줄 안다는 것과 관련을 가진다. 이 존엄성을 가진 사람의 행위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 이 한계 안에서 머무른다. 만일 그가 선을 넘으면 자아 존중감을 잃게 된다. 어느 날 자아 존중감이 지속되도록 하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의 존엄성은 균형을 잃게 된다.


개인의 정체성에 깊이 관여하며 자아 존중감을 결정짓는 이 한계선은 도덕적 한계선을 동시에 겸하는 경우가 많다. 설령 이 선을 넘는다고 해서 반드시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며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닌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넘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을 존중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자아 존중과 존엄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타인에 의한 한계선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스스로 그은 경계다. 우선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 보고 남들도 다 비슷한 잣대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존엄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상은 그저 자아상에 불과할 뿐이다.


즉, 특정한 배경과 문화적 조건을 토대로 만들어졌으며 언제든지 변화가 가능한 내적 기준이다. 자아상에 연결되어 있는 존엄성의 기준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것들이 당사자가 처한 문화적 환경에 매우 의존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염두에 두어야만 타인의 자아 존중심과 그에 따르는 존엄성을 비난하며 자신의 사고를 강요하는 우를 피할 수 있다.


변화하는 자아상

자아 존중을 결정하는 자아상은 빈 공간에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이는 양육, 교육, 문화적 형성 과정이 합쳐져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만들어낸 산물이다. 이들을 존중하는 것은 내 존재의 당위성을 형성하는 데 하나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을 비판하고 무시하면 자아상이 묻힐 수 있으며 결국 무너질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아 존중은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자아 존중심에 따른 존엄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자아상이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발생한다는 것은 자아상이 변화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자신을 이런 사람이라고 이해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와 다른 자아상이 들어서면서 과거의 자아상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전에는 내면의 갈등과 불일치로 인식되었던 것이 훗날 일치감과 조화로움으로 느껴져 존중감이 향상될 수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격렬한 감정이 내면의 경계선을 밖으로 밀어내는 가능성의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면 어떨까? 사랑, 감동, 감사의 마음 같은 것들이 사물을 보는 눈을 변화시켜 자아 존중심이 새로운 상황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어떨까? 이러한 변화는 계산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있다.


가치관의 변화가 새로운 삶의 테마와 가능성 자체와는 상관없는 내적 변화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판단의 기준이 새로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에 의해서 경계선이 앞뒤로 왔다 갔다 한 것뿐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변화를 가능케 한 원인이 되는 인간관계 안에서의 허용치와 그 인간관계를 벗어났을 때의 내적 허용치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생기게 된다.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

내면의 경계선을 넘어갈 때에만 자기 존중감을 잃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도 그것은 쉽게 상실된다.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서 스스로를 돌보는 것은 여러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자기의 건강과 능력을 돌보는 것, 내적 강박에서 벗어나서 더 큰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 자신의 삶이 가진 논리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것, 그리고 그 삶에 의미와 방향을 찾아주는 것 등이 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포함한다. 신념, 감정, 의지, 살아가는 총체적 방법 등이 이에 들어간다. 이것은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짓는 능력과 용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 다른 면에서 갈등을 회피하지 않는 강함을 뜻한다. 여기서 자기 존중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어떠한 것에 저항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우리는 거대하고 위험한 충돌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존중은 언뜻 보면 사소하고 우습게 보이는 작은 일 때문에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특정한 인물과 한 식탁에 앉지 않으려고 한다든지, 친구들과 같이 들어간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다가 영화가 도무지 역겨워서 혼자서 극장을 나온다든지 하는 일말이다. 상황이 어떻든 원칙은 항상 똑같다. 타인의 동의를 얻기 위해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것, 존엄성을 걸면서까지 남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자아 존중심이란 자신의 능력에 걸맞은 것을 요구할 줄도 아는 것도 포함한다. 이것 또한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행위의 하나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 존중이란 특정한 종류의 인정을 마땅히 요구할 줄 아는 의식이다. 마지막으로 다룰 또 다른 차원의 자아 존중은 인생을 살아나가면서 정신적 정체성이 변화를 거듭한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타인이 소멸해감을 바라볼 때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예전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고통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존엄성의 상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점점 쇠퇴하는 능력이 상대방의 정신적 정체성을 갉아먹는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예전의 자아상 중에 관연 얼마만큼이 남아 있는 지 확신하기 힘들다.


시간이 더욱 진행되면 우리는 그들의 정신이 뚝뚝 단절되는 현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의식의 일관성이 점차 사라지는 듯한 그들을 보며 우리는 쇠약이 붕괴로 전이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국면을 맞은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공허를 흔히 볼 수 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의 과제는 환자, 그리고 소멸해가는 자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를 잃어버린 자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을 밀어내서도 안 되고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어서도 안 된다.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그들을 독립적 인간으로 대하며 스스로의 삶을 운영할 수 있도록 능력을 자극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점점 더 힘들어지고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의 독립성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그들이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들과 마음을 함께한다는 것, 유한한 인간들끼리의 연대감을 그들이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에게 닥친 일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존엄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다. 그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것이다. 다른 연결 고리가 모두 다 무너졌다고 해도, 굳이 말하지 않고 함께 웃는 가운데 인간의 소중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죽음

사람이 죽으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생명을 유지하는 육체 기능이 정지되고 경험 주체로서의 인간이 소멸된다. 타인은 임종을 앞둔 사람의 존엄성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죽는 당사자는 죽음이 그 자신이 생각하는 존엄성과 조화될 수 있도록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체 여기서 말하는 존엄성은 안팎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죽는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한 인간의 독립성이 상실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 사건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말인가? 자립성을 자립적으로 잃어버린다는 것, 자기 결정권이 상실되는 과정에서 그것에 대해 여전히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모순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 내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때 훗날 내 독립성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그래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지 스스로 결정한다고 해야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죽는 과정은 삶의 마지막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삶은 개인마다 다르다. 한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인생과 그의 마지막 모습이 서로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 죽음의 존엄성이 가지는 기본 개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각자 서로 다른 개별적 죽음의 과정, 자신만의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뜻이다.


죽음은 사람과도 관련이 있다. 그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생의 전반을 살아가는 데 같이 힘쓴 사람들이다. 죽을 때 그들이 옆에 있었으면 하고 바랄 수도, 또는 마지막 순간에 홀로 있고 싶을 수도 있다. 어떻든 간에, 그들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을 인생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면 존엄성 있는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


질병으로 아픈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숨겨서는 안 된다. 임종을 앞둔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왜일까? 외적 행위나 내적 생각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숨기고 알려주지 않는 다면 그것은 무지막지한 간섭이다. 그런 행위는 인생을 마감할 기회를 강탈하는 것과 다름없다.


고인을 대할 때

우리는 죽은 사람의 존엄성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고인은 그냥 육신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사고와 감정을 교차시켰던 존재로서 인간관계를 맺었던 한 인간이었다. 육신은 허물어지고 존재하기를 멈출 것이다. 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먹거나 판매하거나 육신에게 장난을 치는 행위다. 이러한 금지 사항들은 그 육신이 한때는 주체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용되거나 도구화되어서는 안 될 목적 자체로 존재했다는 사실과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호기심 어린 눈길이나 말초 자극을 기대하는 심리로부터도 고인을 보호해야 한다. 사고를 당해 사망한 이의 시신을 덮어주는 것은 고인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추측 때문이다. 비록 고인은 느끼지 못할지언정 이런 행위는 은밀함에 대한 존중이라는 면으로서의 존엄성에 관여된다. 고인의 시신이 보존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그의 모습을 보며 명복을 빌어주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고인의 존엄성을 보호할 때는 그의 존재가 깃들어 있던 육신만을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고인이 남긴 것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그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진다. 그가 생전에 소망했던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행동은 존중심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모두 다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또 있다. 고인의 특정 비밀을 공개하거나 그의 돈을 유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살아 있다고 상상한 상태에서 그에게 자신의 행위를 설득하거나 정당화한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인에 대한 우리의 존엄성은 고인이 자신의 삶의 논리에 순응하며 살아온 방식과 고인의 유지를 존중해주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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