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세계 문학

   
오은하 외(엮음: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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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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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3��



■ 책 소개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에서 개설한 ‘세계 문학 특강’의 강의록을 정리하여 펴낸 책! 


강의의 현장감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다! 



이 책은 유명 작가들의 텍스트를 함께 읽으며 작품의 배경지식을 전달하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의미와 문학사적 의의, 현 시대에서 갖는 의미 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바리케이드의 유래, 『안나 카레니나』 기차의 함의, 『변신』과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를 통해 카프카가 현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 주는 1920년대 뉴욕의 모습 등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이 세계 문학 작품들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세계 문학 특강’은 강좌 개설 후 수강 인원의 네 배를 초과하는 신청을 받았고 강의 기간 내내 만원사례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 강좌였다. 강의의 현장감을 살려 수록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세계 문학에 대한 또 다른 매력을 느끼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 저자 오은하 


인천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이수했으며, 프랑스 파리Ⅲ대학에서 사르트르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저자 이병훈 


아주대학교 교수.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했고, 러시아 모스끄바국립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 등이 있다. 



■ 저자 권혁준 


인천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독문학, 영문학, 철학을 전공하고 카프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카프카 단편집』『소송』『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등이 있다 



■ 저자 최영진 


중앙대학교 영문과 교수.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뉴욕주립대학교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영화 이론 및 비평과 문화 연구 분야를 전공하였으며 미국 문화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 저자 우석균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대학교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인천AALA문학 포럼의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잉카 IN 안데스』『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사랑과 다른 악마들』, 세르히오 밤바렌의 『꿈의 바닷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등이 있다. 



■ 저자 김현균 


1964년에 강원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4년 현재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환멸의 세계와 매혹의 언어』(공저), 『라티노 라티나 ― 혼성 문화의 빛과 그림자』(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로베르토 볼라뇨의 『부적』과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파블로 네루다의 『네루다 시선』, 실비나 오캄포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 호세 카를로스 카네이로의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 ― 보르헤스 평전』, 호르헤 볼피 외 『아디오스』, 후안 룰포 외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 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시간의 목소리』, 루벤 다리오의 『봄에 부르는 가을 노래』, 존 H. 엘리엇의 『히스패닉 세계』(공역), 애덤 펜스타인의 『빠블로 네루다』(공역) 등이 있다. 



■ 저자 김응교 


연세대 신학과 졸업, 연세대 국문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분단시대』에 시를 발표하고, 1990년 『한길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1991년 「풍자시, 약자의 리얼리즘」을 『실천문학』에 발표하면서 평론 활동도 시작했다. 1996년 도쿄외국어대학을 거쳐, 도쿄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1998년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로 임용되어 10년간 강의했다. 2014년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로 있으며, 트위터(@Sinenmul)로 세상과 소통한다. 



■ 저자 김태성 


중국학연구공동체 한성문화연구소 대표.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타이완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대학에 출강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노신의 마지막 10년』『목욕하는 여인들』 등이 있다. 



■ 저자 김재용 


원광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이며 한국 근대 문학 및 세계 문학 연구자. 서구-비서구를 아우르는 지구적 세계 문학의 가능성을 고민하며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해 나가고 있다. 잡지 「지구적 세계문학」을 발행하고 있으며 인천 AALA문학 포럼의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고 있다. 



■ 저자 이석호 


카이스트 교수이며 아프리카문화연구소장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문학으로 첫 번째 박사 학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교에서 아프리카 문학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인천AALA문학 포럼의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고 있다. 



옮긴 책으로 『정신의 탈식민화』(응구기 와 시옹오)『검은 피부, 하얀 가면』(프란츠 파농)『식민주의에 대한 담론』(에메 세제르)『제3세계 문학과 식민주의 비평』(치누아 아체베)『지도』(누르딘 파라)『사르키 바트만』(레이철 홈스) 등이 있고, 엮은 책으로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문화론과 근대성』 등이 있다. 



■ 편자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쉽고 재미있게 배우고 즐기는 모두에게 열린 문학관”을 모토로 하는 한국근대문학관은 인천의 옛 개항장 창고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2013년 9월 개관했다. 한국근대문학관은 1890년대 근대 계몽기부터 1948년 분단고착기에 이르는 기간에 전개된 우리 근대 문학의 역사적 흐름을 쉽게 보여주는 국내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이다. 이인직, 이광수, 김소월, 정지용, 염상섭, 백석 등 훌륭한 작품들을 남긴 우리 근대 작가의 작품 세계를 당시 발행된 원본을 통해 직접 접할 수 있다. 또한 인천의 근대 문학과 근대 대중 문학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도 마련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전시를 관람하면서 정보 검색, 노래 듣기, 요지경 장치 등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근대 문학을 체험할 수 있다. 한국근대문학관은 인천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인천문화재단이 직영하고 있다. http://lit.ifac.or.kr 



■ 차례 


이 책이 나오기까지 



Lesson 1 『레 미제라블』과 혁명기 파리 



Lesson 2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진정한 행복의 의미 



Lesson 3 프라하의 이방인, 카프카의 『변신』과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 



Lesson 4 『위대한 개츠비』와 1920년대 뉴욕 



Lesson 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의 백마술과 흑마술 



Lesson 6 파블로 네루다, 움직이지 않는 여행자 



Lesson 7 치유와 단독자의 하루키 놀이공원,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 



Lesson 8 모옌과 중국 당대 문학 



Lesson 9 타고르와 지구적 세계 문학의 길 



Lesson 10 아프리카의 관점으로 본 세계 문학




우리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세계 문학


『레 미제라블』과 혁명기 파리

『레 미제라블』이라는 서사와 한국 사회의 만남

다 아시다시피 『레 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입니다. 1862년 프랑스에서 발표되었으니 150년 정도 된 작품이네요. 이 소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화제가 된 것은 2012년 겨울에 영화화되어 굉장한 흥행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외국 영화, 그것도 뮤지컬 영화가 그렇게 흥행 가도를 달리는 예외적인 상황이 이상해서 당시 왜 그럴까?에 대한 추측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영화의 감독 역시 우리나라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자기도 왜 한국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본인도 신기하니 이유를 알면 좀 설명해 달라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영화 『레 미제라블』의 인기에 대한 해석으로 가장 유력했던 의견은 대선 결과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영화였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원작 『레 미제라블』의 배경인 혁명기의 파리와 2012년 대선을 치러 낸 우리나라의 상황에 역사적 유사점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저는 본 강의를 통해 이 영화가 2012년 2013년의 한국 사회에서 왜 그렇게 반향을 일으켰는지 설명하기 위해 원작이 탄생한 시대로 돌아가 몇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레 미제라블』에 나타난 혁명기 파리의 모습

혁명기 거리의 상징: 바리케이드와 혁명기 파리 사람들의 에너지

바리케이드는 파리에서 계속된 혁명·반혁명 중 파리 시민들의 봉기나, 대도시에서 일어나던 소요 사태에서 상징처럼 등장합니다. 바리케이드는 기본적으로 약자들이 만드는 구조물입니다. 아무리 시민들이 많이 모인다 해도 조직적인 면으로 보나, 무장의 면으로 보나 상대가 안 되죠. 그래서 바로 맞서기보다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숨었다 싸우다를 반복하기 위해 만드는 겁니다.


시내에서 벌어지던 무장 투쟁이 늘 바리케이드를 쌓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2월 혁명 때는 골목마다 세워진 바리케이드가 파리 시내에 1,00여 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정부 입장에서는 얼마나 거슬렸을지도 상상이 되시죠?


당시 중산층 이상의 시민이 가장 두려워하는 두 가지 중 하나는 전염병, 나머지 하나는 도시의 폭동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에 하수구 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바닥이 오물로 가득한 사진을 보신 적 있나요? 파리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지만 기반 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도시 정비 사업을 벌였지만, 숨겨진 의도 중 하나는 반정부 세력이 바리케이드를 쉽게 만들지 못하게 하고 군대의 진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지요. 얼마나 바리케이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지 느껴지시나요?


혁명기 사람의 상징: 가브로슈의 등장과 7월 왕정 시대의 모습

영화에서 노래하는 꼬마 이름이 가브로슈입니다. 가브로슈라는 아이는 그냥 길에서 사는 아이예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부랑아인데 길거리를 집으로 삼아 자유롭게 살아요. 영화에는 거지들과 가브로슈의 친구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위고는 가브로슈가 부르는 노래로 당시의 사회상을 많이 그리는데, 이후에 가브로슈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부랑아나 자유롭게 다니는 꼬마를 이르는 고유 명사가 됩니다.


7월 혁명 이야기를 조금 하지요. 7월 혁명 이후, 비록 공화정은 아니었지만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고, 산업 혁명으로 급격한 산업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루이 필리프가 산업자본가들에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에게는 훨씬 힘든 시기가 된 거죠. "혁명으로 인해 잘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더 힘들어지나? 지난번 왕보다 나아진 게 없다. 지난번에는 자유를 위해 싸웠다면 이제는 빵을 위해 싸운다." 이것이 7월 왕정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가브로슈의 노래입니다.


억눌린 사람들의 이상을 그린 작품 『레 미제라블』, 오늘날 감동으로 다시 쓰이는 맥락

혁명기, 억눌린 사람들의 이상이 존재하던 시기

사실 행복할 것이라고 했던 20세기를 이미 보내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이토록 강한 믿음은 어떻게 보면 순진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혁명기 청년들은 역사의 진보를 강하게 믿고 있고,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인류가 그때까지 이뤄 낸 진보가 굉장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이제까지 인간을 억압하던 많은 미신들과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게 하던 땅, 하늘, 바다, 괴물을 모두 정복한 시기가 19세기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땅은 증기 기관차로, 바다는 증기선으로 정복했고, 하늘도 막 정복하려는 찰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기술 발달에 의한 자연 정복은 이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진전되었지요.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이상, 사회적 진보로 옮겨 가면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이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숙제이기도 하고요. 지금 우리는 앞날을 저렇게 밝게 전망하지 못합니다. 인류의 힘에 대한 믿음,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의지, 인류애와 자기희생 정신. 이는 오늘날 21세기 우리에게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다른 정서로 느껴집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진정한 행복의 의미

『안나 카레니나』살펴보기

『안나 카레니나』는 두 가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축입니다. 또 다른 축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빈과 러시아의 순수한 영혼을 대변하는 여인 키티의 사랑입니다. 읽다 보면 안나와 브론스키의 이야기와 레빈과 키티의 이야기가 계속 번갈아 나오며 소설 구성의 근간을 이루는데요. 이렇게만 되면 소설이 단순할 수도 있는데, 여기에 끊임없이 당대 러시아의 사회 문제에 대한 레빈의 사색이 끼어들고, 농민들과 벌이는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삽입됩니다. 이로 인해서 자칫 귀족 중심 이야기가 될 뻔한 이 소설이 러시아 민중, 농민의 진솔한 삶을 조명한 전체 러시아 이야기가 됩니다.


톨스토이가 왜 현재 이야기를 하는가라는 질문이 『안나 카레니나』를 이해하는 키포인트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의 붕괴된 세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파탄은 하나의 상징인데요. 톨스토이는 그것을 러시아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사용합니다. 단순히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당시 러시아 사회, 러시아 전체의 정신적, 도덕적 위기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은 없지만 이 시대를 살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안고 있는 해답이 없는 문제를 작품이 깊이 있고 방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고전으로서 『안나 카레니나』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측면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안고 있는 해답 없는 문제란 무엇일까요?


1873년 겨울의 끝자락, 모스크바의 오블론스키 집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고 사람들은 집주인의 누이인 안나 카레니나를 기다리고 있다. 가정불화의 원인은 오블론스키가 가정 교사와 바람이 났기 때문이다. 34세인 오블론스키는 아내 돌리에게 진정으로 사과했지만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깊게 뉘우치고 있지는 않았다. 선하지만 철이 없는 스티바(오블론스키의 애칭)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섯 아이의 어머니인 아내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고 믿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장면 중 왜 이 장면으로 소설을 시작했을까요? 소설은 오블론스키 가정의 불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작품이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는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이 작품은 불행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 점에서 첫 장면이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이죠. 불행의 씨앗은 무엇이며 해결은 어떻게 되는지, 그런 관점에서 독자들은 작품을 좇아가게 됩니다.


모스크바에 있는 한 관청의 책임자인 오블론스키는 자신의 일에 매우 무관심하다. 그는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지만, 실수도 하지 않는다. 스티바는 오랫동안 가정의 무질서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괴로움을 겪지만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습관은 버리지 못한다. 그는 모스크바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동갑내기에다 시골에서 올라온 오랜 친구인 레빈을 만나 식사를 한다.


작품은 불행과 행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시작은 불행입니다. 불행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호소력이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전략은 불행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소설 미학의 핵심은 콘트라스트인데요. 그는 긍정적 인물과 부정적 인물을 끊임없이 대비시킵니다. 한 인물에 대한 반대 인물, 또 그에 대한 반대 인물을 아주 촘촘하게 구성하죠. 그렇게 소설의 구성을 축조해 나갑니다. 작품을 읽으면 금방 감지할 수 있을 거예요. 소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콘트라스트는 오블론스키와 레빈의 만남입니다. 둘은 동갑내기 친구고 가치관, 삶의 관습, 세계관 등 모든 취향이 서로 정반대예요. 이는 소설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블론스키와 대비를 이루는 레빈의 등장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레빈은 오블론스키와 비교하면 행복의 아이콘이지만 개별적 상황에서는 불행합니다. 한 개인, 모든 인물이 개별적인 삶의 상태에서 끊임없이 다양하고 다채로운 행복과 불행을 체험하죠. 소설에 나오는 모든 에피소드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사람들이 삶 속에서 경험하고 풀지 못하는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죠.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행복은 지루한 포즈로 우리를 바라봅니다. 눈앞에 보이는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것, 흥미로운 것을 좇으면서 그 안에 행복이 있는 줄 알지요. 하지만 그 속엔 아주 쓰디쓴 불행뿐이죠. 나중에 깨닫게 되는 건 오히려 불행의 실체입니다. 불행이라는 화려하고 매혹적인 세계를 좇아가야지만 행복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행복을 좇는 사람은 없어요.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 중 결국 행복의 품 안에 안기는 사람은 불행이라고 하는 엄청나게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들뿐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와 1920년대 뉴욕

제이 개츠비,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 소설은 개츠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줄거리도 생각보다 간단하죠. 5년 전 정말 사랑했던 여인인 데이지를 잊지 못해 엄청난 거부로 돌아온 개츠비가 그 여자와 관계를 되돌리려고 노력하다가 비극적으로 총에 맞아 죽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통속 소설 같기도 한 이 이야기가 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개츠비라는 인물은 1920년대 물질적 풍요와 욕망을 대표하는 주인공이었습니다. 지금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시대의 욕망을 대변하는 주인공이었던 셈이죠. 이렇게 사라져 버린 시대의 물질적 욕망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개츠비가 최근까지 영화로 제작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 매력적인 인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주법의 시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개츠비

제임스 개츠. 이것은 개츠비의 본명이며, 법률상의 이름이었다. 그는 또한 실패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위의 인용은 개츠비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 내용을 닉 캐러웨이가 서술한 대목입니다. 개츠비는 미국 중서부 출신의 가난한 집 아들이었죠. 그는 호숫가에서 낚시질이나 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호숫가에 나타난 백만장자 댄 코디의 요트를 관리해주기 시작합니다. 개츠비는 코디의 충실한 심복으로 일했지만 그가 죽었을 때 한 푼의 돈도 보상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개츠비는 코디의 그늘에서 일을 하면서 돈 버는 법을 똑똑히 배웁니다. 개츠비가 부를 거머쥐게 만들어 준 것은 결국 사회였습니다. 금주법이 없었다면 개츠비는 그렇게 큰돈을 벌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 셈이죠.


이 자와 그 울프 사임이라는 작자는 뉴욕과 시카고 골목길에 있는 약국을 통해서 공공연하게 술을 팔고 있었어. 그것이 이 자의 사업이라는 거였지. 난 이 작자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주류 밀매를 할 것 같은 낌새를 알아차렸어. 그런데 내 예상이 꼭 맞더군.


데이지의 남편인 톰 뷰캐넌이 개츠비를 비난하는 이 대목에서처럼 불법적이고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벌던 개츠비는 자신을 포장하는데 익숙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개츠비가 왜 그런 일들을 꾸몄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개츠비가 그런 일들을 한 이유는 데이지를 예전으로 돌려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개츠비는 그 옛날의 사랑을 지금 현재 시간으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죠.


기적의 시대, 기적의 상징 개츠비

그는 신의 아들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처럼 인간도 기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개츠비라는 인물은 1920년대를 반영하는 인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닉 캐러웨이가 언급한 이 대목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츠비는 자신의 신념을 사랑에도 적용하려 하였죠. 그는 5년 전의 상태로 데이지를 완전히 돌려놓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생각만큼 잘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신념 자체가 물질에 기초해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의 신념이 사람의 감정까지 온전히 조종하기는 힘들었던 것이죠.


이렇게 보자면 이 작품은 1920년대 물질 풍요와 도덕적 해이에 강력하게 경고를 보내는 작품입니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반성을 촉구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러한 측면은 작품이 출간된 당시의 평론가들에게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서 그 시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1950년대 이후가 돼서야 비로소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더 정확하게 읽히기 시작했던 것이죠.



치유와 단독자의 하루키 놀이공원,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

하루키와 여행하기

이번에 나온 하루키 장편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하루키 문학에는 어떤 비슷한 논리가 흐르지 않는지요? 10권 읽으나, 20권 읽으나 비슷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지요? 여러분은 하루키 소설을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하루키 소설은 마약인가요, 비타민인가요, 코카콜라인가요? 아마 읽는 사람마다 하루키 소설에 대한 평가는 다를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 중에 많은 독자는 하루키 소설을 잠깐의 시원한 콜라로 여기거나, 현실 도피 의식을 주입하는 마약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제가 만났던 몇몇 일본인은 하루키 소설을 비타민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었어요. 일본에 살아 보니 일본 사람들이 하루키 소설을 왜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하루키 소설의 핵심에는 일본인을 위한 힐링이 있더라고요. 치유, 치유 말이에요. 천천히 설명하겠지만 치유의 문학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하루키 문학은 가장 일본적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인의 심리를 잘 읽어 내는 작가라는 말이지요.


『위대한 개츠비』에서 졸부가 된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겪은 일본 사회와 비슷하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갑작스럽게 부자가 된 일본 사회에는 부패가 만연했고, 전공투는 실패합니다.


1980년대에 번역되어 나왔을 때의 우리나라 상황과 비슷했죠. 왜 우리나라에서 『노르웨이 숲』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요? 『위대한 개츠비』가 겪었던 실패, 『노르웨이 숲』의 주인공들이 겪었던 좌절을 1980년대 말 우리나라의 젊은이도 겪은 것이 아닐까요? 전공투 후 좌절했던 일본 젊은이들과 1987년 민주화 투쟁을 하고 난 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결핍이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민주화 실패의 환멸 속에서 발견한 게 하루키였던 것입니다. 누구에게는 콜라나 비타민이었을지 모르나, 어떤 이에게는 위로제 정도는 되었다는 이야기죠.


가장 일본적인 문학

그렇다면 하루키 문학이 왜 일본인들에게 힐링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재미있게 읽지만, 일본인들은 하루키 문학을 심각하게 읽을 수밖에 없어요. 요시모토 바나나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자살자를 막기 위함이라고 해요. 재미있게 써서 소설을 읽는 동안이라도 자살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고 바나나 씨는 말했어요. 그 정도로 일본에는 좌절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요. 일본의 종교 전체주의를 보며 하루키 역시 아픈 마음으로 피해자를 생각하면서 글을 쓴 거죠.


『1Q84』를 보면 달이 두 개 나오는데요. 해가 아닌 달은 정통이 아니라 이단이에요. 그리고 어떤 우상을 상징하죠. 우상이 두 개가 있는 거고요. 그 속에서 옴진리교뿐만 아니라 다른 괴상한 종교들의 피해자 입장을 떠올려 볼 수 있겠어요.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해자를 다시 만날까 두려우니 자살의 충동을 느껴 결국 자살하는 거예요. 평생 달이 두 개로 보이는 거예요. 이게 진짜인가, 저게 진짜인가 하는 거죠. 잘못된 이단의 교주이니 두 개로 보이기도 하겠죠.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는 헷갈리는 상황이 지속되고 너무 힘들어서 사람들은 자살을 하게 되는 거예요. 실체가 없고, 실체를 모르겠는 것들에게 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거죠.


치유와 단독자, 힐링의 문학

하루키 소설은 어떻게 보면 전 세계적 루저(loser)를 겨냥하는 책이죠. 그의 문학은 마취제, 콜라, 마약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비타민이 없어요. 꿈이 없고, 정치적 비관주의, 이상적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갈 길은 자살뿐입니다. 이 책은 이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하루키는 구세주예요. 핵심은 힐링, 치유입니다.


하루키의 모든 소설이 겨냥하는 것은 치유입니다. 일본 사람들에겐 잠깐 힐링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 거짓성은 플라톤이 이미 경고하지요. 동굴이 어둡다는 걸 이야기해 주고 나가야 한다고 말해줘야 해요. 쉽게 희망을 갖고 긍정하라고 이야기하면 안 되죠. 그런 점에서 하루키는 일본인에게는 거짓된 힐링으로 느껴지지 않겠죠. 진정한 힐링으로 감동으로 다가오겠죠. 그의 소설은 일본인들의 아픔에 깊게 가 닿았죠. 우리는 그러한 치유에 당연히 공감할 수 없는 것이고요. 역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 일본인들에게는 치료가 되고 눈물이 나는 거죠.


하루키 소설은 소설 놀이공원입니다. 롯데월드에 역사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애당초 코드가 다른 말인 것 같아요. 다만 『해변의 카프카』처럼 반(反)역사로 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루키는 더도 덜도 말고 잘 짜인 하루키 놀이공원, 환상의 하루키 시뮬라크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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