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1960 지식인을 찾아가다

   
서재관
ǻ
지상사
   
14000
2012�� 12��






color=#55555 STRONG>■ 책 소개
격변의 혼란기를 산 지식인이이 시대 젊은 지성들에게 남기는 메시지!

color=#55555 size=2 &>저자의 주장은명쾌하다. 이른바 ‘시대정신’을 견인하는 것이 지식인의 소임이라고 한다면, 우리네 현실과는 괴리된 이론과 당위성으로 현상을 재단해서는 안 되며,편협한 이분법으로 양극화를 부채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color=#55555 size=2&>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지식인의 사회적 발언의 실체가 좀 더 철저하게 우리네의 객관적인 현실조건에 대한 분석과 정신구조에 대한해명을 통하여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방향은 분명한 것이다.

color=#55555 size=2 &>일상적인 현실의 변혁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직시하고, 좀 더 투철하게 현실의 실상을 분석하고 파악토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균형 잡힌 양식(良識)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공성을 갖추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color=#55555 STRONG>■ 저자서재관
1930년 10월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에서 출생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950년6ㆍ25 동란이 발발하면서 잠시 학업을 접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1955년 소령 계급을 마지막으로 학창 복귀로 제대했다. 군 복무 초기 2년여동안은 육군병원과 육군보병학교 등에서 정훈장교로 장병들의 정신ㆍ사상교육을 전담했다. 이 시기 입대 전 문학평론가로 활동했거나 대학에서 강의를했던 동인들과 동인지 「회귀(回歸)」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후 육군본부 정훈감실 서울분실에 배속되어 현 「국방일보」의 전신인 「육군신문」의편집장으로서 신문 발행의 제반 업무를 총괄했다. 그 후로 다시 정훈과에 배속되어 장병교육용 정훈교재 개발과 시사해설 방송업무 등을 담당했다.1956년 한국상업은행에 입행했으며, 같은 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986년 퇴임하기까지 한국상업은행의 이사, 상무, 전무이사를역임했다. 은행 퇴직 후에는 롯데그룹에 초치되어 기조실 상임고문, 후지필름 생산 및 판매회사 대표이사 사장, 기조실 비상임고문 등을 역임했다.

color=#55555 size=2 &>지은 책으로는 생산성본부에서 발간한 『은행강좌 제1권 :예금』(공저)과 금융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은행업무소사전』 등이 있으며, 한국상업은행의 「행보」「천일지」「상은노보」 등을 비롯해「한국일보」「민국일보」「평화신문」「주간한국」「여원」「신여성」「은행계」 등 수많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color=#55555 STRONG>■ 차례
추천의 글: 정원식 전 국무총리
사회적 이슈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보여준다

color=#55555 size=2&>1. 1950, 60년대의 지적 풍속도
정신의 불감증상 : 지식이라는 이름의의장유행(衣裝流行)과 관련하여
공백의 연대, 그 실상 : 20대 후반 한 젊은이의 지적 초상
내 정신의 가난한 편력 : 저항형사상인텔리에서 실무설계형 개혁인텔리로
한국 지식인의 특성 : 그 좌경화 경향과 관련하여

2. 지식인의 사회적 발언
지식인의 대 사회적 발언 : 그논리적 발상법의 특이성에 대하여
원칙론의 지양 : 고발 논의와 관련하여
추종형과 도피형의 논리 : 지식인 발언의 무력화와관련하여
새 세대의 생활의식 : ‘속담에 대한 대학생의 반응조사’를 보고

color=#55555STRONG>3. 시대와 문학
판자촌 지역의 인간군상 : 손창섭 소설의 시대적 특성에대하여
상황, 저항, 현실참여 : 유행어의 사이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비평문학의 병리 : 비평가들의 엘리트의식에대하여

color=#55555 STRONG>4. 몇 가지단상
자유와 숙명에 대하여 : 자유를 향유하는 지혜
위선과 예절에 대하여 : 역설적인 고찰
에고이즘에 대하여 :누구나 고독한 에고이스트
자살에 대하여 : 마조히즘은 곧 사디즘
광신과 관용에 대하여 : 혁명을 통해생각하다

color=#55555 STRONG>5.수상(隨想)
잡설, 다방 공덕론 : 커피족을 위한 다방 예찬기
음미(陰微)한 우정 : 원초적인 휴머니티의발견
판본방직과 인터뷰 소동 : 언론의 악덕과 미덕
결혼적령기 : 당혜(唐鞋)를 찾는 짚신의 넋두리
봄 우감(偶感) : 고금남녀 양성의 역할과 관련하여
영화 속에서 보는 국민성 : 미국, 불란서, 영국의 경우를 두고
영화잡감 : 영화감상자로서의 태도에대하여

color=#55555 STRONG>6.여행기
일본의 이모저모
첫날의 인상
은행경영에서 느낀 것
전후의 정신적 상황
첨단을 가는문명사회

color=#55555 STRONG>7.직장여성론
직장여성론 : 직장여성의 유형과 관련하여
자녀를 둔 재혼의 딜레마 : 자신의 행복을 위주로 자기의 길을선택해야
직장여성의 생활미 : 미추를 초월한 매력의 연원 탐구

8.편편잡상(片片雜想)
병든 사이비 인텔리 근성
남용되는 말의 허실
머나먼 개혁의 완수
돈으로부터의자유
코끼리와 파리의 예화
신문의 날에 즈음하여
소설 『아돌프』를 읽고
냉엄한 리얼리즘
전후 일본문학의 좋은안내서
자유의사와 통념

color=#55555 size=2&>마치며





1950 1960 지식인을 찾아가다


1950, 60년대의 지적 풍속도

정신의 불감증상 : 지식이라는 이름의 의장유행(衣裝流行)과 관련하여

다방 B에서의 일이다. 우연한 일로 내 친구 한 사람과 이 나라에서는 그래도 자타가 공인하는 지식인 몇 분과 자리를 같이할 기회가 있었다. 그 몇 분의 지식인이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오피니언 리더들이었다. 적어도 그러한 합석에 우리네 보통사람들로서는 죄송스러운 감을 느껴야 할 만큼.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서 어찌어찌하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나의 그 친구는 반공포로 출신이었다. 얘기는 자연스레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다음 얘기는 그가 말한 내용의 골자다.


K수용소는 빨갱이들이 훨씬 우세했던 캠프였다. 그래서 빈번하게 우익 청년들이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되었다. 이 전율할 만한 캠프에서 필사적인 탈출이 시도된다. 일주일에도 두세 건 정도로.


이 필사적인 심야의 탈주가 성공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흔히는 그 당장 미군 경비병들에게 발견되어 버리고 만다. 탈출에 성공한 반공청년들은 이제 살았구나 하는 미칠 듯한 기쁨으로 미군의 따뜻한 인도를 기대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갓 뎀!" 하는 어처구니없는 인사 세례(?)와 함께 총칼로 위협 받으며 방금 탈출한 캠프 안으로 재수용 당한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손안에. 애걸복걸해도 무가내하(無可奈何)로.


얘기하는 그 친구의 눈에 번득이는 것이 있었다. 분명 그는 그 당시의 그런 억울했던 기억에 마음속으로 울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러한 그의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같이하고 있던 어느 지식인 한 분이 개구일번(開口一番) 가라사대 "허, 거 참! 바로 한국판 『25시』가 아니오. 어쩌면 그리고 요한 모리츠의 경우와 흡사한 것이람?" 하고 감탄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것도 사뭇 자기의 그러한 발견에 자부자만하는 듯싶은 투로.


그리고 또한 그의 그러한 발언은 동석하고 있던 다른 모든 지식인들에 의해서도 즉각적으로 전폭적인 찬동을 얻었던 것이다. 이어서 이를 계기로 하여 전개되었던 담론풍발(談論風發). 이를테면 토인비의 사관이라든가, 까뮈의 『이방인』이나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논평이 화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이러한 예화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지적인 풍속, 말하자면 커피 잔에 안주 삼아 『25시』가 뜻해 주고 있는 메커니즘의 세계라든지, 사르트르의 이른바 앙가주망을 구론(口論)하는 풍습은 일견 알로하 족속의 만보조(調)를 따라가려는 유행보다는 월등 문화적인 인상을 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진보적인 양상마저 지니고 있다. 조고약의 약효가 잊혀가고 페니실린과 마이신의 시대로 의학의 진보가 있어 온 바와 한가지로, 지드나 발레리의 권위가 퇴색하고 대신하여 까뮈나 파스테르나크의 이름이 성론되는 현상이란 이른바 진보의 관념을 앞세워 얼마든지 옹호할 수 있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결코 그런 지식인들의 진보적인 인상을 주는 지적인 풍속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결국 사물을 정상적으로 감지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감각의 상실태(喪失態)를, 또한 사실의 의미를 정당하게 파악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사고능력의 결핍상을, 나아가서는 그들 정신의 불감증상을 말해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상적인 감각이나 합리적인 사고능력의 소유자로서 그런 기막힌 얘기를 듣게 된 경우라면 다만 몇 분 동안만이라도 침묵하고 심사숙고하였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재빨리, 그것도 남이 창작한 유행어를 빌려다가 해석함으로써 만족할 노릇이 못 된다. 하기야 그 재빠른 연상의 솜씨엔 감탄할 만도 하나, 그렇다고 그러한 능력의 불성실한 비생산성에 대해서까지 맹목적일 수는 없다.


유식이라는 이름 아래 감행되고 있는 이 무신경한 요설(饒舌), 그러한 언어의 인플레 현상에서 이른바 사상 면에서의 전시효과 현상을 보게 된다. 이를테면 경제적인 후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제 면의 전시효과라는 게 화폐의 용도가 사치스러운 소비행위에 경사됨으로써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 현상이 생겨나게 되듯, 또한 정신적인 후진국가인 이 나라의 언어 인플레 현상 하에서 지식인의 지적인 노력이라는 것이 지드에서 사르트르, 사르트르에서 파스테르나크라는 식의 유행에만 민감한 사상의 전시효과 현상(풍속화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땅의 사상의 역사가 그렇듯 왜곡된 상모(相貌)를 지니게 된 이유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리라. 추상적으로 개괄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낙후된 근대 그 자체에 주인(主因)이 있을 것이다. 늦어진 스타트라인에서 선진제국을 따라가려는 조급스럽고도 무방도한 흡수행위가, 그것도 당초 일제의 서민정책의 테두리 안에서 의타적으로만 허용되고 있었던 데서, 우리의 지적인 노력을 그렇게 소화불량의 외발화(外發化)로 시종케 했던 것이겠다. 그 결과로 사상이라는 게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하는 현실 개변의 기능과 책임윤리를 상실케 된 것이리라.


게다가 저 우리네 지식인들의 심정 속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전통적인 정념(情念)인 그 허무감과 같은 것이 우리들의 논리적인 노력 일체를 피상적으로 풍화시키고 있는 점도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논리적인 사고라는 것을 끈기 있게 지속할 줄 아는 습성, 이른바 데카르트류의 정신지도의 규칙과 같은 자율적 정신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원인의 적지 않은 부분이 객관적인 조건에서 비롯되고 있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해결이 결코 쉽지 않음을 또한 이해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거창한 문제 전반에 대해서는 향후 여러모로 적극적이며 진지한 검토가 있기를 기대하고, 여기서는 단지 오늘날 우리 지식인들 간에 시현(示現)되고 있는 이른바 관념의 악순환 현상과 관념과 전통(현실)의 괴리 형태를 지적하고, 이 문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성실한 자기성찰을 제기하는 데 그친다.


결국 이러한 자기성찰이 없는 한, 명동의 여인네들이 외장(外裝)의 유행에서 낙오하게 되면 숙녀의 이름을 박탈당하는 것과 같이, 지식인 사회에서도 자신을 꾸미는 의장의 역할을 담당하며 눈부시게 공전(空轉)하고 있는 관념의 유행 궤도에서 벗어나게 되면 지식인의 자격을 상실케 되는 그런 사상의 액세서리화 현상 역시 지양(止揚)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까뮈나 카프카를 운운하는 인텔리라는 사람이 집에 돌아가면 존대(尊大)한 가부장 행세를 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겉(이론)과 속(전통적 생활감각) 사이의 그 거대한 구조적인 틈도 메워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일보, 1959년 3월 8, 9일」



시대와 문학

비평문학의 병리 : 비평가들의 엘리트의식에 대하여

기묘한 유행이 시작되고 있다. 정치주의의 비평 방식의 부활이 그것이다. 또 다시 한국 문단에 한 개의 유령(코뮤니즘적 비평 방식과 그 논리발상법이 동음이곡이라는 데서)이 배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현실참여라고 하는 슬로건적 기준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신앙하고, 이에 의거하여 작가와 작품의 우열을 재단하려 드는 소박한 논리주의자라고 하는 게 마땅하다. 그들은 문학작품의 비평을 무슨 사체해부(死體解剖)와 같은 행위의 일종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은 사회를 반영(폭로)하고 비판(고발)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문학에 어떤 실천적 목적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적 공식 하에 황순원 씨의 냉엄한 리리시즘이나 오영수 씨의 따스한 정감의 세계가 단지 동면족(冬眠族)의 퇴영(退嬰)으로 일도양단된다. 또한 염상섭 씨의 서민적인 에고이즘의 인식이나 서정주의 유연한 자연감각이 한낱 사진사의 기교나 치자(癡者)의 백일몽으로 가볍게 일축되는 것이다.


반하여 일부 시인과 작가의 예술 이전의 작품도 그것이 155마일의 휴전선을 노래하고 있다든가 정치적 폭력의 세계가 취급되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우수한 문학작품이 그런 식의 소박한 논리주의적 기계론과는 얼마나 무연한 존재인가 하는 점에 그들은 전혀 색맹(色盲)이다. 비평가가 대상으로 삼게 되는 작가나 작품은 다종다양한 것이다. 그가 우수한 작가일수록 그 작품은 독창적이기 마련이다. 그 창작의 수법이나 내용에 있어서.


비평가의 역능은 그러한 작가나 작품의 여러 특성을 최대한도로 향수하고 그것에 측(側)한 구체적인 발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의 우리 평단에 요망되는 바는 비평 기준의 폭이 넓어져야 하겠다는 점이다.


주어(主語) 없는 존재가 우리들이라는 말이 있다. 서구적인 최신 문학사조론의 흡수를 강조하는 말이다. 동일한 경향을 지닌 일군의 비평가들에 의해서 표명되고 있는 발언의 골자다.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는 소견이다.


주체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남의 사상이 소화될 수 있다는 얘기일까. 자기가 없다면 남도 없는 것이다. 무질서한 혼란이 있을 뿐일 것이다. 시 분야에서 보는 언어의 장식화 경향, 소설 세계에서 보게 되는 경박한 아프레풍, 비평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공허한 논리적 편향 등, 그 모두가 필경 이에 근원하는 것이겠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문학이란 항상 그 최첨단부만으로 문제되어 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외국의 새로운 작가의 이름과 그 작품의 다이제스트식 소개가 유행되고, 또한 그 모방이 성행했다. 비평가의 주된 활동은 우리 작가의 작품 활동을 그와 같은 외래 신식의 관념에 의거하여 새롭다든가 낡았다 든가 하는 투로 재단하는 것이었다. 서글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반성해도 좋을 만한 시기가 왔다고 본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령 최근 문단의 일부에서 민족적 특성이나 한국적 현실이 문제되고 있는 일부 경향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필자는 현대의식(정치주의적 진보관념)의 결핍을 운운하면서 이런 문제의 검토를 안이하게 처리하려 드는 일부 첨단적인 비평가들에게 대하여 반성을 구하고 싶다.


이렇듯 작품세계의 다양성에 편협하고 전통의식에 무지하다는 것은 결국 그들 일부 비평가들이 엘리트의식의 소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평 기준이 최신의 박래품종이라는 점에 자지(自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안목에 한국적인 체취를 지니고 있는 작가가 원시적인 존재로, 또한 향토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 토속품의 일종으로 보이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이 무기로 삼고 있는 그러한 서구 신식의 비평관념이나 수법이라는 게 궁극적으로 그 얼마나 그네들 서구인 자신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불감증인 것이다.


그저 안연(晏然)하게 앉아서 저쪽의 최신 기성 비평 개념 그 외양만을 수입해 가지고는 이를 기준으로 작가나 작품을 재단하기에 급급하다. 비평가의 관념적인 해석과 작가나 작품의 내용에 괴리(乖離)가 생겨나게 되었던 연유다. 또한 비평 행위가 실질적으로도 작가의 창작 행위나 작품 이해에 아무런 작용도 가질 수 없었던 이유이겠다.


그런데 천진난만하게도 그들은 이렇게 발생한 그 갭을 자기들의 두뇌의 우위성 혹은 선진성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일군의 비평가들이 이른바 엘리트의식을 가지게 된 원인은 결국 이런 데 있다.


물론 나의 이러한 견해는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나는 결코 우리의 평단이 지니고 있는 서구적인 성격 그 자체를 단순하게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관념 형태의 대부분이라는 게 서구적인 그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관념 형태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양식에 있어서도 그 영향은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나는 오늘의 우리 문화 일반의 그 서구적 성격에 대해 이방적(異邦的) 위화감을 느낀다(실은 오늘의 우리는 우리 고유문화의 향토적 성격 그것에 대해서도 일종의 이방적 위화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도시 우리의 문화가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까지 그와 같은 이방적 위화감을 주게 되는 원인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근래 우리들의 문화적인 행위가 우리 민족 자체의 원망이나 고뇌를, 또한 우리나라의 산하를 투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학문이나 예술이 단지 외래적인 사조, 그 최첨단적인 기성 결과에만 편승하고 이를 추종하며 눈부시게 관념적인 공전(公轉)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평단이 하루속히 그 유독한 엘리트의식을 지양했으면 싶다.

「한국일보, 1958년 11월 8일」



수상隨想

영화 속에서 보는 국민성 : 미국, 불란서, 영국의 경우를 두고

어떤 족속(族屬) 사이에서는 오늘의 문명사회에서라면 여자들이 하는 일을 남자들이 하고 있다. 이를테면 어린애를 돌보는 일이라든가 집안 살림을 꾸리는 따위의 일을 남자들이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여자들은 밖에 나가서 밭을 갈거나 물고기를 낚아 온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문화인류학의 연구를 통해서 알고 있다. 결국 이러한 사례는 환경, 곧 문화의 차에 따라 국민성도 각각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겠다. 그 점 우리가 미국의 문화가 어떻고 독일의 국민성이 저떻고 하는 일은 충분히 합리적인 일이 된다.


이런 국민성의 차이는 또한 영화에도 반영된다. 따라서 우리는 각국의 영화를 통하여 그 나라의 국민성이라는 것을 이해해 볼 수 있다.


범죄영화라는 것을 두고 생각해 보자. 미국은 물론 불란서영화에서도 죄없는 인물이 용의자로 취급되는 경우가 퍽 많다. 이런 경우 미국영화에서는 잘못되어 피의자가 된 인물이 자기가 받게 된 혐의를 없애기 위하여 경찰보다 더 능동적으로 대응,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낸다. 흔히 이들 주인공들은 머리도 좋고 힘도 세서 결국 그를 위협하고 있던 위험을 이겨내고 종국적으로는 범죄자를 체포한다.


그러나 불란서영화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대개의 경우 그렇게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잘못되어 체포된 인물은 자살하게 되든가, 아니면 그 일을 계기로 암담한 처지로 함몰되고 만다. 물론 경찰당국은 실망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영국영화의 경우는 어떤가. 처음에는 경찰에 의해서 혐의를 받았던 인물도 그 후 경찰의 민활한 활동을 통해 그 혐의를 벗어나게 되고, 범인은 인과응보로 정당하게 벌을 받기에 이른다.


물론 범죄영화의 전부가 이상과 같은 분류에 해당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예외를 빼놓고는 영화의 주축은 이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극히 단순한 예로서도 우리는 어느 정도 그 나라의 문화적인 환경을, 따라서는 그 국민성의 일단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결국 이렇듯 미국의 범죄영화에서 그 주인공이 자기의 힘으로 끝내 자신의 혐의를 벗어나는 일이 많은 것은, 그만큼 아직까지도 미국에서는 개인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깊고 자기 미래에 대해서 국민 일반이 희망과 자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불란서 범죄영화의 결말이 선량한 주인공에 대해서도 대개가 가혹한 것은 불란서인들이 자기들의 능력에 대해서 회의적일 뿐만 아니라, 인생 그것 자체에 대해서도 극히 비관적인 운명론자들인 데 이유가 있다 하겠다. 환언하여 그것은 또한 미국의 운명이 신흥적인 데 반해서 불란서의 문명은 이미 노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리라.


한편 영국의 범죄영화에선 처음 혐의를 받게 된 주인공들의 대부분이 경찰관에 의해서 구제받게 된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영국 사람들이라는 것이 경찰당국을 신뢰하고 있으며, 또한 국가의 질서에 의심이 적은 보수적인 국민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은노보, 1961년 4월 15일」



편편잡상(片片雜想)

남용되는 말의 허실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다. 해방 이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린 말인지 모른다. 독재주의자도 입을 열면 민주주의였고 공산주의자들도 이 말을 자기네들의 것인 양 마구 사용해 왔다.


따지고 보면 이 말과 같이 애매모호하게 사용되어 왔고, 그리하여 온통 때가 묻어버린 말도 없으리라.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자기대로 이렇듯 오욕되고 막연한 말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처리해 왔다. 민주주의라는 말로 구체적으로 무엇에 반대하고 무엇을 주장하려는지 밝히고 있지 않는 이상, 이러한 말의 남용자들은 딴 뜻이 있어서 그것(민주주의라는 말)을 이용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한가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무작정 남발, 오용되고 있는 말이 있다. 4·19혁명정신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이즈음에 와선 이 말을 듣기가 역겨울 지경이다. 듣기가 그럴 뿐 아니라 이 말을 쓰는 데도 어떤 저항감 없이는 쓸 수가 없을 정도다. 그만큼 이 말이 주는 인상이 슬로건화 하고 정서적인 부호로 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와선 이 말로서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기란 전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분간 이 말을 좀 삼가 쓰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대신 좀 더 명확한 언어, 구체적인 방법이나 수단을 가진 말을 사용하는 습성을 가지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언어의 마술이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마구 득세하고 있는 고장도 없지 않은가 싶다. S 하야가와의 적절한 지적에 따라 우리들도 지도(말로 나타낸 것) 그것보다도 현지(객관적인 사실)에 보다 주의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겠다.


이름이 좋다고 물건 그것도 좋다는 법은 없다.

「상은노보, 1960년 12월 1일」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