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인간의 심리를 파헤쳤다!
가장 안전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상한역설!
‘왜 역사상 가장안전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두려움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대한 역설에 최신 연구 결과로 답하는 흥미진진한 책.저자는 우리의 위험 인식 이면에 있는 심리를 살핌으로써 비합리적인 두려움이 어떻게 정치인, 기업, 사회활동가, 미디어의 영향을 받는지, 그리고우리 두뇌에 각인된 기질이 어떻게 비합리적인 두려움을 만들어내는지 밝히고 있다.
■ 저자 댄 가드너
대학에서 법과 역사를공부했고, 「오타와시티즌(Ottawa Citizen)」에 기고하며 저널리스트로서 이름을 알렸다. 자유주의자 혹은 보수주의자로 분류되기를 거부하는그는 다양한 관점을 가진 ‘의심 많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05년, 인간의 위험 인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던 세계적인 심리학자 폴슬로빅의 강의를 들은 후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슬로빅의 강의에 매료되어 심리학에 관심을 갖고 과학적 글쓰기에 몰입, 위험에 대한 깊은통찰을 담은 『리스크: 공포의 과학과 정치(Risk: The Science and Politics of Fear)』를 집필한다. 이 책은 전세계 11개국, 7개 언어로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캐나다과학저술가협회의 ‘사이언스 인 소사이어티 상’을 받았고, ‘내셔널 뉴스페이퍼어워드’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캐나다 미디어 어워드’ 등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심리학을 기반으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시작한 그는사람들이 좀 더 분별 있게 사고하고 결정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역자김고명
성균관대학교에서 영문학과 경영학을, 동대학원에서 번역을 전공하고 지금은 출판번역가 모임 바른번역의 회원으로 번역활동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더 리치: 부자의 탄생』(공역), 『부의 대물림』『마케팅』『기업전략』 등이있다.
■차례
추천의 글
서문
1장위험 사회
2장 공포의 본질
3장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착각들
4장 재앙 시나리오의 탄생
5장 확률과 통계, 그리고착각
6장 무엇이 집단적 오류를 낳는가
7장 두려움을 파는 사람들
8장 뉴스 보도실의 비밀
9장 사라진 정의
10장위험 바이러스
11장 테러의 망령
12장 두려움 없는 세상
후기
감사의 말
주석
참고문헌
이유 없는 두려움
위험 사회
사회적 공황을 부르는 이유 없는 두려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가 미국 32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할 당시, 미국 전역에는 두려움이 짙은 안개처럼 내려 앉아 있었다. 은행들이 줄도산하고 산업 생산량이 반 토막 났으며 농산물 가격이 무너졌다. 4명 중 한 명이 실업자였고 200만 명이 노숙자였다. 그런 나라의 통치권을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 그것도 고작 한 달 전에 간신히 암살을 면한 사람이 쥐게 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되고 처음 한 연설에서 그런 국민들의 염려에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용기를 내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할 때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직시한다고 해서 주눅이 들 필요는 없습니다. 위대한 미국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 위기를 견뎌내고 다시 일어나 번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무엇보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고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이름도 이유도 근거도 없는 두려움만 극복하면 후퇴를 전진으로 뒤바꿀 수 있습니다."
루스벨트의 이 현명한 이야기는 사실 미국보다 역사가 길다. 이 연설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을 인용한 것이며, 소로는 미셸 드 몽테뉴의 글을 인용했다. 몽테뉴는 350년도 더 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도 사회에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감정이 될 수 있다. 위험을 두려워하면 위험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합리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유 없는 두려움은 다르다. 이유 없는 두려움 때문에 미국은 대공황 속에서 무너질 뻔했다. 이유 없는 두려움 때문에 9.11 사태 이후 1595명이 비행기를 버리고 자동차를 택했다가 사망했다. 우리가 위험에 직면하여 내리는 결정이 어리석어지는 까닭도 바로 이 이유 없는 두려움이 날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번영에 따른 재앙의 증가
위험과 두려움은 사회학자들이 자주 다루는 주제다. 사회학자들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난날의 어느 세대보다 걱정을 많이 하며 산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심지어 두려움이 일종의 문화가 되었다고까지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최근에는 테러범, 인터넷 스토커, 필로폰, 조류독감, 유전자변형작물(GMO) 등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위협 요소들이 독버섯처럼 싹트고 있다. 기후변화, 발암물질, 유방 보형물, 비만 전염(가까운 사람에게 비만이 전염되는 사회적 현상), 농약, 웨스트나일 바이러스(어린이나 노약자에게 치명적인 뇌염),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살을 먹는 박테리아(괴사성 근막염) 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런던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울리히 벡은 현대 국가가 걱정꾼들의 나라가 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벡은 1986년에 위험(특히 현대 기술 때문에 생기는 위험)에 대한 염려가 고조되고 사람들의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커진 사회를 가리켜 위험 사회(Risk Society)라고 불렀다.
역사를 보면 인류는 언제나 한두 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더 많이 두려워하는가? 울리히 벡의 말을 들어보면 그 답은 자명하다. 우리가 어느 때보다 두려움이 많은 까닭은 현대 사회가 어느 때보다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기술은 우리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고 환경은 파괴되었으며 사회적 압박은 커지고 있다. 큰 난리의 조짐이 보인다. 미래를 내다보고 끔찍한 결과를 있는 대로 상상해보는 일은 지식인들의 유희가 되었다. 역사를 조금만 공부하면 어느 시대에나 인류 멸망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식인들의 예지력은 모두 삼척동자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의 문제는 당연히 알아야 할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1900년에 태어난 아기의 평균수명은 46년이었다. 하지만 그 아기의 증손자, 즉 1980년에 태어난 아기의 평균수명은 74년이다. 2003년에 태어난 고손자의 평균수명은 80년에 가깝다. 다른 서양 국가도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를 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출산은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모험이었다. 지금도 개발도상국에서는 신생아 10만 명이 탄생할 때마다 여성 440명이 출산 중에 사망한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그 수치가 20명으로 크게 줄어든 상태이다. 산모 사망률만 아니라 신생아 사망률도 마찬가지다. 1900년 영국에서는 신생아와 유아의 14퍼센트가 사망했지만, 1997년에는 그 비율이 0.58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삶의 질도 향상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연구 사례를 보면 심장병, 폐병, 관절염 등 만성질환의 발병 위험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발병 시기도 과거보다 10~25년 늦춰졌고 병의 심각성도 줄어들었다. 신체장애를 입는 사람 수도 줄었고, 사람들의 체구도 커졌다. 미국 남성은 100년 전에 살던 조상들보다 키가 7.5센티미터 더 커졌고 몸무게는 22.5킬로그램이 더 나간다. 인류는 IQ도 꾸준히 향상되어 조상들보다 지능도 좋아졌다.
우리가 신문에서 보는 기사 제목과 달리 인류의 정치제도도 긍정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950년에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22개뿐이었다. 20세기 말에는 그 수가 120개국으로 늘어나 인류의 약 3분의 2가 선거에서 의미 있는 표를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유혈 사태와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조지메이슨대학의 몬티 마셜 교수는 2005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날 위험은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적고, 내란이 일어날 위험도 1960년대 이후 어느 시기보다 적다."
개발도상국의 상황도 이전에 비해 크게 개선되었다. 1980년 이후 20년 동안 개발도상국에서 영양실조를 겪는 사람의 비율은 28퍼센트에서 17퍼센트로 줄어들었다. 지금도 터무니없이 높은 수치이기는 하지만, 예전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아졌다. UN의 인간개발지수(HDI)도 좋은 증거다. 인간개발지수는 소득, 건강, 교육과 관련된 핵심 자료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인류의 현주소를 평가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177개 국가를 망라한 인간개발지수에서 최하위에 있는 나라는 아프리카의 니제르다. 그런데 2003년 니제르의 인간개발지수도 1975년보다 17퍼센트나 증가했다. 극심한 가난을 겪는 다른 나라들도 똑같은 추세를 보여 말리는 31퍼센트, 차드는 22퍼센트 향상되었다.
멸망을 부르짖는 자들은 가난한 나라의 인구 급증으로 대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해주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오늘날의 인구 급증이 출산율 증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류가 급증하는 까닭은 유아 사망률이 과거보다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고약하기 짝이 없는 맬서스주의자만 아니면 누구나 박수 치며 기뻐할 소식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역사상 가장 건강하고 부유하며 장수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두려움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리 시대에 이만한 역설이 또 있을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착각들
끊임없이 조작되는 기억
사람들은 기억이라고 하면 마치 카메라처럼 어떤 장면을 찍어서 나중에 다시 볼 수 있도록 보관해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크게 다르다. 기억은 생체 활동(organic process)라고 하는 편이 옳다. 기억은 계속해서 쇠퇴, 소멸, 변화한다. 때로 그 과정은 극적이기까지 하다. 가장 강력한 기억, 즉 우리가 무엇인가에 열중하여 감정이 용솟음칠 때 형성된 기억조차도 변화를 피할 수는 없다.
기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흔히 9.11 테러 같은 대형 사건을 실험 소재로 삼는다. 대형 사건이 터지면 학자들은 곧 학생들에게 사건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이를테면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어떤 경로로 소식을 접했는지 묻는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똑같은 학생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응답을 비교한다. 대부분의 경우, 응답이 일치하지 않는다. 대개 1차 응답과 2차 응답 사이에서 사소한 차이만 나타나는데, 당시 상황이나 관련자에 대한 기억이 크게 다른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1차 응답 결과를 보여주며 기억이 바뀌었다고 말하면 대부분은 현재 기억이 정확하고 지난 기억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이를 보면 우리는 무의식이 아무리 비합리적인 말을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신이 기억을 꾸며내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여러 자리에서 자신이 전쟁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나중에 그 이야기의 출처가 할리우드 영화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레이건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의 장면을 자신이 직접 겪은 일로 기억하게 되었을 뿐이다.
사례의 법칙(가슴은 어떤 일의 발생 사례가 쉽게 떠오를수록 그 일의 발생 확률이 높다고 판단)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기억의 작동 방식 때문에 이 법칙이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최근에 일어난 사건, 감정과 깊이 관련된 사건, 생생한 사건, 새로운 사건을 다른 사건들보다 더 잘 기억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성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사건들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편향성이 문제가 되는 때는 가슴이 사례의 법칙을 사용하여 판단을 내릴 때다. 지진 발생 확률이 가장 낮을 때 지진보험에 들고, 발생 확률이 가장 높을 때 지진보험을 해지하는 역설적인 판단이 좋은 예다. 만일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최근에 지진이 일어났다면, 그 일은 생생하고 오싹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므로 가슴은 어서 보험에 들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반대로 거주지에서 몇십 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가슴은 지진의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과학자들이 경고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가슴은 과학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위험 인식의 왜곡
지구에는 70억에 가까운 사람이 산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 요인 때문에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때로는 끔찍한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한 번 사건이 터지면 즉각적인 통신 수단 덕분에 모든 사람이 그 소식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위험들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분명히 가슴은 사례의 법칙에 입각해 답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 경우에 답은 자명하다. 두려워하는 게 옳다는 답이다.
위험 인식을 연구한 결과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점은, 사람들이 저녁 뉴스에 나오는 위험 요소 때문에 죽을 확률은 과대평가하고 저녁 뉴스에 나오지 않는 위험 요소 때문에 죽을 확률은 과소평가한다는 사실이다. 저녁 뉴스에 나오는 위험 요소는 무엇인가? 살인, 테러, 화재, 홍수 등 드물게 일어나지만 한 번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뇌리에 선명하게 박힐 만큼 끔찍한 것들이다. 저녁 뉴스에 나오지 않는 위험 요소는 당뇨병, 천식, 심장병처럼 평범한 사망 요인, 곧 한 번에 한 사람의 목숨만 앗아가되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도 않는 것들이다.
1970년대 말 폴 슬로빅과 사라 리히텐슈타인은 미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많은 경우 인식과 현실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조사에 응답한 사람들 대부분이 사고로 죽을 확률과 질병으로 죽을 확률이 거의 같다고 답했는데, 실제로는 질병으로 죽을 확률이 약 17배 더 높다. 응답자들은 자동차 사고로 죽을 확률이 당뇨병으로 죽을 확률보다 350배 높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실제로는 350배가 아니라 겨우 1.5배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자동차 잔해가 활활 타오르는 광경은 날마다 뉴스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지만, 당뇨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이야기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만 전해지기 때문이다.
편향적인 뉴스 보도가 위험 인식의 왜곡 현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꽤 많지만, 정보와 영상을 쏟아내는 매체는 신문, 잡지, 뉴스 말고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와 드라마다. 영화와 드라마는 감정을 자극하고 선명한 인상을 남겨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위험을 소재로 삼는다. 예를 들어 황금 시간대에는 범죄 드라마와 의학 드라마가 항상 방영된다.
심리학자들이 사례의 법칙을 연구하여 밝혀낸 바에 따르면 영화와 드라마는 위험 인식에 뉴스만큼 강렬한 영향을 끼친다. 어쩌면 뉴스 이상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화와 드라마를 단순한 오락거리로 여겨서 비판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슴만 깨어 있고 머리는 잠을 자는 셈이다.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위험과 안전에 대한 서양 국가들의 집착이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1970년대는 대중 매체가 급격히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정보 홍수가 거세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중대한 두 가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다고 해서 그 두 가지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못 박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의심을 품고 더욱 깊이 연구해볼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
확률과 통계, 그리고 착각
시한폭탄이 된 실리콘 유방
실리콘으로 유방을 확대한 것은 일본 매춘부들이 처음이었다. 1950년대 일본 주둔 미군들을 상대하는 매춘부들이 가슴에 실리콘이나 유동 파라핀을 주입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부터 실리콘 유방 보형물이 제조되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미국식품의약국(FDA)에 의료용품 관리권이 생기면서 의료용품의 판매 허가를 받으려면 제조업자가 안정성을 입증하는 자료를 FDA에 제출해야 했다. 유방 보형물도 의료용품 중 하나였지만 꽤 오랫동안 불만 신고 없이 판매, 사용되었기에 FDA는 추가 조사 없이 판매를 승인했다.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유방 보형물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풍문이 시작된 곳은 일본의 의학 학술지였다. 몇몇 일본 여성이 교원병(류머티즘성 관절염, 섬유근육통, 낭창 같은 질환) 판정을 받았는데 이 여성들이 여러 해 전에 실리콘 보형물을 삽입한 적이 있어 의사들은 실리콘과 교원병이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1982년에는 실리콘 유방 보형물을 한 오스트레일리아 여성 3명이 교원병 판정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아직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보형물이 새거나 터질 수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실리콘이 체내로 스며들어 교원병을 유발한다는 증거는 없었다. 일부 의사는 실리콘이 문제라고 확신했다. 같은 해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여성이 건강 악화에 대한 책임을 물어 보형물 제조업체에 손해배상금으로 수백만 달러를 청구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일이 언론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지자 여성과 의사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더 많은 사례가 의학 학술지에 보고되었고, 보형물과 관련된 질병의 수가 늘어나면서 언론 보도도 늘어났다. 그리고 두려움이 확산되었다.
1990년 교원병을 앓는 여성들이 CBS 프로그램 <코니 청과 함께>에 출연하여 자신이 겪은 고통과 상실감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들은 고통의 원인이 유방 보형물 때문이라고 했다. 곧 유방 보형물과 교원병의 연관성을 알리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국회청문회가 열렸다. 랄프 네이더의 퍼블릭시티즌 같은 소비자보호단체는 가슴 보형물을 최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았고, 유방 확대술을 여성성 거세술로 여긴 페미니스트들은 유방 보형물이 현대 사회의 그릇된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992년 초, 중압감을 느낀 FDA는 보형물 제조업체들에 90일 안에 보형물의 안정성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제조업체들은 급하게 자료를 만들어 제출했지만, FDA는 자료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 사이에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유방 보형물이 교원병을 유발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한 여성에게 제조업체인 다우코닝이 734만 달러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1992년 4월 FDA는 실리콘 유방 보형물의 판매를 금지했지만, 제조업체들이 안정성을 입증하지 못해 금지하는 것일 뿐 보형물 자체가 위험해서 금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오히려 손해배상과 판매금지 조치로 보형물의 위험성이 입증된 셈이었다.
1994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보형물 제조업체는 집단소송 역사상 가장 큰 합의금을 물게 되었다. 합의금은 모두 42억 5000만 달러에 이르렀는데, 그중 10억 달러는 보형물 관련 소송을 번듯한 산업으로 일구어낸 변호사들의 몫이었다. 유방 보형물을 삽입한 여성의 절반 정도가 합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그중 절반이 보형물 관련 질병을 앓고 있다고 주장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막대한 합의금으로도 사건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다우코닝이 파산 신청을 하면서 합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실리콘 보형물은 위험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실리콘 유방 보형물이 실제로 교원병 같은 질병을 유발한다는 과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1994년까지 한 차례의 역학 검사도 없었다. 사건이 이렇게 극적으로 전개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실리콘의 화학 성분도 가슴의 생물학적 특징도 아니었다. 또한 사회운동가들의 집요함도, 변호사들의 탐욕도, 기업인들의 냉담함도, 언론의 무책임한 선정주의도 아니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아주 간단한 데 있었다. 바로 이야기에는 능하고 숫자에는 서툰 인간의 특성이었다.
이야기의 힘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사람들이 이야기와 숫자에 매우 다르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안데스 산맥에서 관광버스 전복으로 35명 사망, 방글라데시 홍수, 구호단체 추산 사망자 수천 명에 이르러 같은 보도를 접하고 놀라서 찻잔을 떨어뜨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려면, 즉 사람들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끼게 하려면 개인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2001년 9월 화창한 아침에 약 3000명이 사망했다. 수치 자체로는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수치를 보고 혹시라도 사건 장면(폭발, 건물 붕괴, 잿더미를 헤치고 절뚝거리며 나오는 생존자들)이 떠오르면 어느 정도 감정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 개인의 모습이다. 추락으로 머리를 땅에 찧고 사망한 어떤 사람의 끔찍한 사진, 서류가방을 들고 멍한 눈으로 걸어가는 회사원의 사진 말이다.
다이애나 오코너 같은 개인의 이야기도 그랬다. 브루클린의 한 가정에서 16명의 형제 중 15번째로 태어난 오코너는 아르바이트를 3개나 하면서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성공 가도를 달려 세계무역센터 꼭대기에 있는 중역 사무실에까지 이르렀다. 9.11 사건 당시 향년 37세. 어떻게 보면 오코너는 그날 죽은 수천 명 중 한 사람일 뿐이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약 3000명이 사망했다는 구절을 읽을 때와 달리 마음이 움직인다.
이렇게 개인의 이야기에 큰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왜 신문과 방송의 특집 보도가 정해진 방식을 따르는지 알 수 있다. 특집 보도는 먼저 심금을 울리는 개인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그 이야기를 큰 주제와 연관 짓고 통계 자료와 분석 자료를 들어 그 주제에 대해 논의한 다음, 다시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쓴 약에 설탕을 묻히는 셈인데, 이를 잘해야 훌륭한 언론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동시에 주제 이해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듣는 것도 좋아한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진화심리학에서는 이야기하기(storytelling, 말하기와 듣기 모두 포함)가 인간의 두뇌에 각인되어 있는 특징이라고 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진화론적으로 볼 때 이야기하기에 어떤 강점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야기하기는 훌륭한 정보 교환 수단으로,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서로 경험을 나눈다. 또한 이야기하기는 강력한 사교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실이 아닌 이야기도 있다. 이 말이 너무하다면, 진실을 보여주기에는 불완전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실리콘 유방 보형물 판매금지 조치를 이끌어낸 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그래서 보형물이 질병을 유발한다는 말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다시 말해, 가슴이 느끼기에는 진실이었다. 1995년 ABC 뉴스의 <나이트라인>에 출연한 코키 로버츠는 이렇게 말했다. "유방 보형물을 삽입한 후 견디기 힘든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이 수백만 명입니다. 이 사람들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보형물이 금지되었을 때 미국의 성인 여성 인구는 약 1억 명이었다. 그중 약 1퍼센트가 보형물을 삽입했고 약 1퍼센트가 교원병을 앓았다. 실리콘 보형물을 삽입한 여성들과 교원병을 앓는 여성들의 슬픈 이야기만으로는 보형물이 교원병을 유발한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보형물과 교원병의 연관성을 입증하려면 역학 검사로 보형물 삽입 여성과 미삽입 여성의 교원병 발병률을 비교해야 한다. 역학 검사에서 보형물 삽입 여성의 발병률이 높게 나와도 그것만으로는 보형물이 교원병을 유발한다고 확증할 수 없지만(둘 사이에 제3의 요인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래도 연관성이 있다고 짐작하고 추가 조사를 벌일 근거는 공고히 다질 수 있다.
하지만 역학 조사는 없었다. 사람들이 유방 보형물에 대해 걱정하면서 적극적인 연구 활동을 펼친 까닭도 유방 보형물이 교원병을 유발한다는 이야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무엇인가 증명하려면 데이터, 그것도 정확하게 수집하고 분석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두려움 없는 세상
가장 안전한 시대의 가장 불안한 사람들
역사상 가장 안전한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겁에 질려 사는 까닭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원인은 세 가지로 첫째는 두뇌, 둘째는 대중 매체, 셋째는 두려움을 부채질해서 이득을 얻는 개인과 조직이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이어지면 두려움 회로가 만들어진다. 셋 중 하나가 경보를 발령하면 다른 하나가 이를 받아들여 다시 경보를 발령하고 나머지 하나가 또 이를 반복한다. 그러면 경보가 첫 번째 발령자에게 돌아와 더욱 강화된다.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이다. 각각의 위험에 각각의 경보가 발령되어 날로 악순환이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루스벨트가 경고한 이유 없는 두려움이 일상에 자리를 잡는다.
어떻게 보면 이는 현대 사회에서 필연적인 현상이다. 구석기 시대의 두뇌는 변하지 않고, 우리는 정보기술을 포기할 수 없으며, 두려움 장사의 이득은 날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려움 회로를 끊어버릴 수는 없더라도 소리를 줄일 수는 있다. 그러려면 일단, 수없이 많은 개인과 조직이 여러 가지 이유로 위험을 부풀린다는 사실, 대부분 언론인이 이런 과장을 바로잡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새 오히려 확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회의적인 자세로 정보를 수집하고 신중하게 사고하여 스스로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신중한 사고의 주체인 두뇌에 심리학적 약점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이는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편향되어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편향의 정도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도 편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사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두뇌의 편향성을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연구자들이 편향성을 제거하기 위해 편향이 무엇이고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설명해주어도 소용이 없다.
명령을 내리는 곳은 머리인데 머리는 가슴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무의식을 잠재우지 못한다. 하지만 가슴이 어떻게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잘못을 저지르는지는 알 수 있다.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럴듯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바로 이런 태도를 바꾸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가슴은 훌륭한 기관이지만 완벽하지 않다. 이유 없는 두려움에 빠지지 않으려면 머리를 깨워서 제 할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깊이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머리와 가슴은 대체로 뜻을 같이한다. 이 경우에는 우리의 판단이 옳다고 믿어도 좋다. 하지만 이따금 머리는 이렇다고 하는데 가슴은 저렇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위험 중 대부분은 신속하게 최종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으므로 머리와 가슴의 뜻이 같지 않을 때는 판단을 미뤄야 한다. 더 많은 정보를 모으고 더 많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도 머리와 가슴의 뜻이 어긋나면 이를 악물고 머리의 말을 따라야 한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인 수백만 명이 이와 정반대로 움직여 비행기를 버리고 자동차를 선택했다. 그 바람에 1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머리를 가슴보다 우선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두려움을 줄이고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면에서 본다면 분명히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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