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사상과 현대사회

   
문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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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정보
   
15000
2009�� 05��



■ 책 소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활약했던 공자, 노자, 장자, 순자, 한비자에 이르기까지 제자백가들의 유가사상을 조명해 보고 그들의 사상이 현대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자세히알아보는 책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유가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에 유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논의한다.

■ 저자문승용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중문과 박사를 졸업했다.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을 수료했으며,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연구과정도 수료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 한신대, 명지대, 평택대에 출강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중국어 왕첫걸음』『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중국어』 『중국고전의 이해』 『장자』(공역) 등이 있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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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우리 시대의 유가사상 읽기 

제1강 인간으로 태어나 성인(聖人)이 된 공자 
제2강 중국 유가(儒家)의 탄생 
제3강 『시경(詩經)』에 담긴유가의 정신 
제4강 유가에 나타난 학문(學問)의 본뜻 
제5강 보수와 진보-유가의 보수주의와 한비자의 공격 
제6강요순(堯舜)시절은 유토피아인가? 
제7강 인간의 타고나는 마음은 착한 것인가? 
제8강 왕다운 정치를 위하여 
제9강 백성은모름지기 배가 불러야 
제10강 아름다운 인간관계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위하여 
제11강 유가의 이단자들(1) - 묵자(墨子)
제12강 유가의 이단자들(2) - 순자(荀子) 
제13강 유가의 위기와 진시황의 말살정책 
제14강 근대화의 굴곡 속에서




유가사상과 현대사회

 

1. 중국 유가(儒家)의 탄생

유가, 유학 그리고 유교의 뜻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孔子: BC 551경~479경)가 창시했다고 하는 유가(儒家)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유(儒)자가 사람 인(亻)자와 필요할 수(需)자가 합하여 된 글자이므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이 풀이는 매우 그럴듯하다. 유가는 기독교와 달리 하늘에 계신 조물주보다는 주로 세상의 인간에 관련하여 논의를 하기 때문이다. 유가에서 주로 말하는 것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인데, 이는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3가지 강령과 사람이 행해야 할 5가지 실천덕목을 말한다.


유가의 유(儒)자의 사전 뜻풀이를 보면 흔히 명사로는 선비, 형용사로는 부드럽다(柔)는 뜻이다. 여기에서 선비란 학문을 임무로 여기는 자라는 뜻이며, 부드럽다는 삶에 있어서 유연한 태도를 가질 것을 말한 것이다. 삼강오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가 한 집안의 아버지이면서 남편이자 자식으로서 사회에 나아가서는 직장에서 누군가의 상사 혹은 부하가 되기도 하듯이, 내가 지켜야 할 삶의 태도가 유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유가의 주요 덕목 가운데 하나인 중용(中庸)의 뜻과도 통한다. 이 덕목은 배움을 통해서 습득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이를 선비, 즉 군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유가란 이처럼 세상을 사는 인간에게 가장 필수적인 도덕규범을 말한 것으로서 유연한 삶의 태도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유가는 종교(宗敎)가 아니라고도 한다. 종교란 신성하거나 거룩한 영적 존재인 신 혹은 조물주와 인간의 관계를 설정한 것인데 비해 유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영적인 존재로서 조상 신(神) 이외에 조물주로서 절대 전지전능한 신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가와 유교의 뜻을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가나 유학을 사상 혹은 학문의 방면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유교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하늘의 도를 밝히다

유가에서는 자연만물의 창조주로서 조물주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우주에는 원리로서의 하늘의 도리인 천도(天道)는 있다고 보았는데, 공자는 실증적이고 합리적이었던 만큼 죽음의 경우처럼 실제로 눈으로 보지 않거나 확증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하여 죽어서 어떻게 된다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하늘에 만물의 운행을 주재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하늘에 도(道)가 있고, 그 도가 실현되게끔 부여되는 명(命)에 의해 자연만물이 운행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살아 있는 존재인 자신의 근원자인 조상의 귀신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배해야 한다는 뜻에서 조상신으로서 귀신은 인정한 것이다. 이것 역시 공자의 실증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인문의 시대를 연 공자

공자는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내 나이 50에 하늘의 명을 알게 되었다"라고 했는데, 공자가 50세에 알게 되었다는 천명(天命)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명(命)이란 흔히 명령이라는 뜻으로 새기는데, 본디 명(命)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귀하고 천함 또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과 같은 운명을 말한다. 이 말은 매우 숙명적인 의미를 갖는데, 여기에 변화의 개념을 가진 운(運)의 존재도 믿었다. 만물이 숙명적으로 부여받는 명(命)과 함께 후천적인 노력이나 환경의 변화로 인해 그 명이 어느 정도는 바뀔 수 있다는 뜻에서 흐른다는 뜻을 보탰던 것이다. 공자는 어디까지가 명이고 어디까지가 운이라고는 하지 않아서 분명히 나누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공자 역시 인간이 그들의 역사를 모두 관장할 수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유가에 나타난 학문(學問)의 본뜻

인류 문명의 시작과 교육

인간은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 이 지구상에서 인간만의 독특한 문화와 문명을 형성하며 살아왔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독특한 교육제도를 통해서 인간들이 일구어놓은 문화와 문명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서주 초기부터 관학(官學)의 형태로 교육제도를 갖추고 있었는데, 사학을 성립한 공자에 이르러서 교과 과목과 가르치는 목적도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공자는 교육을 중시하였는데, 공자의 어록이 담긴 『논어』를 중심으로 당시 교육과 관련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공자가 배움과 관련하여 여러 말을 한 것처럼,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사회는 무엇보다도 공부하는 것에 한 마디로 인생을 걸었다고 할 만큼 공부를 되뇌며 살아왔다. 우리 사회의 전통이 공부가 그 사람 인생의 대부분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며 이것은 바로 공자에서 시작되었다. 공자는 매우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창고지기, 목동, 장례일 등을 하면서 학문을 늘 가까이 해 선생이 되고 결국 인류의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모두 학문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인간이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공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인간은 타고난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학습이 그들을 매우 다르게 한다"며 공부를 강조했다. 인간이 타고나는 본성과 자질이 서로 유사하다고 한 언급이야말로 당시 지배와 피지배계층이 엄연하던 혹독한 사회분위기에서 아마도 파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달리 유가에서 성인(聖人)은 완전한 인간이면서 신의 경지에 살짝 발을 걸쳤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 본성에 대해 좀 애매한 입장을 취했는데, 성선설을 말한 맹자는 인간이 학문 수양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 역시 인간이 선하다는 증거라고 하였지만, 성악설을 말한 순자가 보기에 이것은 본성(性)과 인위(人爲)를 구별하지 못해서 생긴 오류하고 여겼다. 맹자가 성상근(性相近)에 찬동하여 인간이 타고나는 착한 본성을 잘 계발할 것을 말했다면 순자는 습상원(習相遠)에 주의하여 인간의 무한한 욕망으로 인해 악한 데로 빠지게 되는 것을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서 제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은 본디 타고나는 것이니, 학문 수양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위적으로 꾸미는 것이 필요치 않은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인간은 타고난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학문 수양을 통해서 인간의 악한 본성을 제어해가야 한다고 보았다.


공자, 맹자, 순자의 각각의 논의는 좀 애매한 측면이 없지 않은데, 그들은 공통적으로 교육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것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교육가로서 공자

『논어』의 첫 편인 「학이(學而)」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선생님께서 "배우고 늘 그것을 익히면 참으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셨다.


공자의 주(周)나라는 봉건사회로서 사람은 태어나면서 인생의 길이 대부분 결정이 나던 때였는데, 공자가 나타난 때는 그런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이념과 가치관이 나타나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개인의 능력이 자신의 인생과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공자가 귀족의 자손이기는 했지만 집안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고, 70세가 다 된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세 살 때 그나마 아버지를 여의고 게다가 후실의 아들로서 별다른 능력이나 후원이 없던 상황에서 어쨌거나 오늘날까지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을 받는 성인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배움의 중요성을 깊이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공부하는 것이 정말 기쁠까? 공자 스스로는 "생이지지(生而知之)" 곧 나면서부터 모든 이치를 깨달은 성인이기를 자처하지 않았고, 그냥 늘 힘쓸 뿐이라고 했던 것처럼 아마도 공자 역시 공부하는 자체가 즐겁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공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과 대체로 공부를 통해 얻어지는 결과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기쁘고도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를 가르칠 것인가?

공자는 가르치는 데에 부류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정신은 인류 교육사에 있어서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이다. 서주(西周) 당시 배움은 지배계층의 전유물로서 완벽한 통치를 위한 수단을 익히는 과정이었는데, 공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배우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공자의 제자 가운데에는 평민은 물론 그 이하 천한 신분 계층의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이란?

공자는 성인의 길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 학문을 통해서이긴 하였겠지만, 이렇듯 지식의 습득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삶에 배부름과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고, 행동은 적극적으로 하되 말은 신중히 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인간으로서 나아가야 할 길인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성인에게로 가는 길이 평범한데, 어째 우리는 성인이 못되는 것일까? 평범한 도덕 속에 깊이 있는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에 대하여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고 했던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라는 말이기도 한 것인데, 공자는 안다는 것에 대하여 안다는 것 자체로서 완성의 단계를 중시한 것이 아니라 앎의 과정을 더 중시한다. 누구든지 세상사 모두를 다 알 수는 없는 것이기에,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인정할 때 역시 아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는 72명의 수제자와 3,000명이나 되는 일반 제자들을 교육하여 그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공자는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사회규범으로서의 예(禮)라는 형식을 익혀야 하며, 학문 수양에도 힘쓸 것을 특히 중시했다. 이렇듯 유교적 전통과 학문을 익히는 것을 통해서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을 굳건히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학문과 공부에 대한 그 밖의 말씀

· 옛날에 공부하던 이들은 자기만족을 위하여 하였는데, 오늘날 배우는 이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다.

· 세 사람이 길을 가는 데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될 만한 이가 있다. 그 훌륭한 이를 보고는 따를 줄 알고, 그 자신보다 못한 이에게는 그것을 고칠 줄 알아야 한다.

· 배우되 궁리할 줄 모르면 배우는 것이 없게 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

 


3. 왕다운 정치를 위하여

공자의 정치사상

서주(西周)시대 말기인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나타나면서 인간 중심의 인문정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공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정치는 오로지 전제정치의 주체였던 왕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 환경에서 공자는 과연 정치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공자의 인류에 대한 기여는 기존의 왕만을 위한 정치로부터 그것의 수혜자로서 백성을 거론하였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를 단순히 정치가라고만 부르지 않고,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자는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무엇이든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의 정명(正名)이라고 하였으며, 정치를 비롯해서 모든 일의 시작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그 직분을 바르게 수행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공자는 「위정」편에서 정치는 집안을 편히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과 같이 자기 자신부터 잘 수양하는 것을 통해서 집안을 다스린다는 제가(齊家)에 이어서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가에서 군자가 되기 위한 도를 다르게 말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이다. 즉 군자는 안으로는 스스로 성인이 되고자 힘쓰며, 성인의 단계에 오르고서는 밖으로 세상 다스리는 일로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기에서도 공자는 바로 성인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다다르는 경지이며, 이것을 세상을 위해서 펼 줄 알아야 한다고 한 만큼 공자의 학문과 사상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있었다.


맹자의 정치사상

제자백가 중 한 사람이었던 맹자는 여러 모로 공자의 뒤를 밟은 이였다.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 나라를 유세하고 돌아다니며, 당시 왕들에게 도덕정치를 펼 것을 주장하였으나, 끝내 어떤 제후도 인정해주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면서 저술과 교육에 힘썼다. 제후들이 원하는 것은 부국강병과 외교적인 책략이었는데, 맹자가 주장한 도덕 중심의 왕도정치는 당시 제후들에게는 너무 이상적일 뿐이었다.


『맹자』에는 특히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요체는 백성의 행복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통치자가 사랑(仁)과 정의(義)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을 때는 천명(天命)이 그에게서 물러난 것이므로 그런 통치자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한 대목이 매우 급진적인 논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는 덕과 힘으로써 남을 복종시키는 것을 구분하여 왕도와 패도로 나누어 왕다운 왕과 그렇지 못한 왕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왕도와 패도는 단지 왕이 백성을 어찌 다스리는가 하는 그 자체보다는 그러한 정치행위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 즉 민본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왕도정치이며, 패도정치는 왕의 개인적인 욕심과 명예만을 위한 정치행위라고 정의하였다.


맹자는 민본주의의 실천 방안으로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제시했다. 왕 된 자가 백성에 대하여 마치 어버이와 같고 백성은 임금을 제 부모와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된다면, 임금과 신하 사이의 도덕 규율인 정의(正義) 이외에 부모자식 간의 친애(親愛)로 나라를 다스려 나아가게 될 것이니 어느 누구인들 왕 노릇 못하는 이가 있겠냐고 강조한다.  


군자의 진정한 세 가지 즐거움

맹자가 평소 하던 말 가운데 군자삼락(君子三樂), 즉 군자 된 이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말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세상에 왕 노릇 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부모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들이 아무 탈이 없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둘째 즐거움이다. 세상의 훌륭한 인재를 얻어서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셋째 즐거움이다.



4. 근대화의 굴곡 속에서

중국 근대화가 유가에 남긴 상처

중국의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맞은 시기를 들자면, 뭐니 뭐니 해도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전개되었던 근대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순시대로부터 따지자면 약 4,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보다 더 심한 격동의 시기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서양식 민주주의와 과학정신, 사회주의 이념의 전래와 중국화 등 참으로 많은 변화 속에서 시련과 고통을 넘어 이른바 근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아편전쟁 이래 1966년 문화혁명을 거치는 동안 유가는 또 시련을 겪게 된다.


중국은 유럽에 비해서 비교적 고립된 채로 발전해왔다. 중국은 여러 차례 분열되어 분란을 맞았으면서도 결국은 통일된 채 수천 년을 이어왔다. 중국은 유가를 중심으로 하는 한족(漢族)의 문화가 주류를 형성하며 각 민족이나 지역 간의 경쟁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혹은 정체된 채 유지, 발전해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화의 고비에서

서양에서는 중세 봉건제도가 무너진 다음에 근대사회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근대라는 개념은 흔히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서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실현하려는 사회를 말한다. 근대라는 말의 본뜻이 가까운 시대라는 의미이듯이, 시기적으로는 현재의 우리와 가까운 시기이면서 인간사회에서 이루어야 할 이상사회는 아니겠지만, 그 이상에 근접하려고 애쓰는 가까운 시대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유럽에서 정립한 이들 개념들은 중국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주류로 여겨오던 유가의 이념과는 충돌되는 측면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정치적인 민주주의는 일단 사람들마다의 평등을 기본 요소로 삼고 있으며, 경제적인 자본주의는 사람마다 능력껏 노력해서 이윤을 극대화하자는 논리인데, 고대 중국의 주류 사상인 유가는 윗사람과 아랫사람 간의 위계질서의 준수와 경제적인 이익보다는 도덕적인 인의(仁義)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이다 보니, 유가적 이념체제 안에서 널리 사랑한다는 뜻의 박애(博愛)를 제외하고 자유와 평등을 실천한다는 것은 참으로 간단치 않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중국은 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반 등 많은 과학문명을 일구어놓았었는데도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공자의 유가 때문이라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유가에서는 이익보다는 의리를 중시하느라 구태여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산업을 발전시키고 많은 돈을 벌려는 의욕도 없었기 때문에 평등을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나 과학발전을 통한 산업화나 자본주의 발전까지도 유가가 틀어 막아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지만 근대 이전 중국에서 과학의 발전에 중대한 장애가 되었던 것으로 유가적 이상주의를 드는 것 이외에도 이런 유가 이념을 지탱할 수 있게 한 것은 결국 한자(漢字)와 과거제도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자는 너무나 어렵고 복잡해서 과학기술자들이 그들의 과학기술을 글로 옮겨 적어야만이 다음 시대의 과학기술자가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인데, 대개는 중인 이하의 과학기술자들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글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 사회적으로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유가에서 금하는 이익을 탐한다고 하여 상인이 환영을 받지 못하였고, 과학기술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기술을 통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 기술을 대가로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생활을 할 수도 없었으니, 기왕에 발명이 되어 있었던 과학발명품까지도 더욱 발전시킬 의욕이 없었던 것이다.


과거제도 역시 중국의 근대화에 발목을 잡은 주범으로 지탄을 받는다. 이 제도는 계급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을 통해 관리를 임용하는 아주 이상적인 제도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고급공무원을 선발하는 과거의 주요 과목이 유가의 경전과 시문을 잘 짓는 것에 치우쳐 있었다. 그렇다 보니, 훌륭한 학자나 시인이 훌륭한 행정가나 정치인이 되는 것이 아닌데도 유가의 경전은 관리가 되기 위한 교재로 받들어지고 말았다. 이렇듯 과거제도가 유가경전의 이념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49년 중국에 인민들에게 계급이 없는, 평등하게 누구나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유가는 중국인들의 사고에서 좀 더 이탈해갔다. 이러한 사정은 1966년 모택동에 의해서 중국을 광풍 속에 몰아넣었던 문화혁명(文化革命)의 와중에서 한 층 더 공자의 유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본래 문화혁명은 50년대 말에 있었던 대대적인 사회주의 운동이었던 대약진운동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모택동이 정권을 다시 탈취하기 위해서 벌였던 일종의 친위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유가는 이때에도 그간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암적 존재로서 공격의 대상이 되어 탄압을 받았다. 1976년 모택동이 죽어서야 문화혁명이 종식될 때까지 중국이 1949년에 이미 사회주의 국가로 탄생하였으면서도 당시까지 고루한 유가의 봉건전통을 완전하게 씻어내지 못하고 계급사회의 잔영과 함께 부르주아적 성향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이것을 완전히 쓸어버리는 그날까지 혁명의 길로 매진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공자가 종교적인 색채를 띤 성인(聖人)으로 추앙을 받는 존재인데 반해, 얼마 전까지 중국에서의 공자는 성인으로서가 아니라 춘추시대에 있었던 주요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 중국은 종교적으로나 윤리사상적으로 비인격체로서 누군가를 종교적으로 받드는 일을 금기시하기 때문이다.   


유가는 진정 근대화의 장애물인가

근대화가 아무리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이 범인류적인 가치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근대화는 서양의 역사발전을 통해서 생겨난 가치일 뿐인데도,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누구나 반드시 근대화를 이루고야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요즘 중국에서 유가와 관련하여 새로운 분위기가 움트고 있는 듯하다. 공산당의 최고 영도자가 공자와 맹자를 새로이 평가하여 중국 전통사상의 우월성을 일깨워야 한다고 하면서 『논어』나 『맹자』 같은 유가 경전을 읽으라고 독려하자 전 중국에 유가경전 읽기 붐이 일고 있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사상이념을 알아야 한다는 의식에서 그런 조류가 나타나는 듯하다. 어찌 보면 아편전쟁 이래 서구의 핍박, 근대화운동, 국민당과의 내전 그리고 어떻게든 이루어보고자 했던 이른바 중국식 사회주의와 그리고 개혁과 개방을 통한 자본주의에로 치달으면서 보낸 지난 150년 동안 중국인들은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돌아볼 기회도 없었는지 모른다. 이제 돔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이름도 갈게 되고 나니, 과거를 돌아볼 만큼 여유가 생겼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중국인은 중국인의 정신세계가 있는 것이니, 자신들의 정신적 문화유산의 대표인 유가 사상의 실체를 알아야겠다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 역시 여러 분야에서 이미 서구적인 의미의 근대화의 길에 들어서서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또다시 1860년대에 있었던 절충주의로서 중세서용을 이념으로 하는 양무운동의 실패를 재현해서는 안 된다. 물론 지금은 우리나라나 중국이 19세기처럼 서구 열강에 압도되어 있는 급박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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