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치유 식당

   
하지현
ǻ
푸른숲
   
13000
2011�� 03��



■ 책 소개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교수의심리 에세이로, 삼십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젊은 성인이 경험하고 있는 과거의 경험에 의한 후회와 자책, 남과 비교하면서 겪는 자존심의 상처,이상과의 괴리에 의한 좌절감 속에서 나름대로 대처를 해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겪게 되는 어려움을 삶속에서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좋을지 그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책 내용은 전직 정신과 의사철주가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른 여덟 명의 손님들과 엮어가는 각기 다른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카페를 찾는 인물들은 불면증, 음식중독,발기부전, 징크스, 공황장애, 우울증, 망상 등 저마다의 고민을 안고 있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이 ‘증상’들이 결국 우리 모두가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겪고 있거나, 겪을 법한 심리 상태를 반영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어떤 한계에 처해 있는지 가늠할 수 있고, 그러한 증상의 원인들을 새겨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하지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하지현 박사의 소통 &공감』『도시 심리학』 『소통의 기술』 『관계의 재구성』 『당신의 속마음』 『전래동화 속의 비밀 코드』 등이 있고, 『갈등 해결의 기술』『커뮤니케이션의 기술』 등의 책을 옮겼다.

■ 차례
프롤로그 - 당신의 마음속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 오늘 하루도 너무 열심히 살았다 - 감정받아들이기 
첫 번째 손님, 48일 동안 잠 못 든 남자 
#1 전직 정신과 의사, 하지만 이제는 "노사이드"의 주인장입니다.
#2 해가 지기 시작하면 걱정이 밀려든다 
#3 브래스 패러독스, 이성으로는 절대 풀 수 없는 문제 
#4 트랙에서 벗어난다고삶이 무너지진 않는다 
#5 이해는 그만,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세상 

난 성취감에 중독 된 게 아닐까? - 24시간 전투 모드 탈출 
두 번째 손님, 음식 중독에 걸린 여자 
#1해가 저물 무렵,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2 전 허전하면 배가 고파요 
#3 쓸모없는 사람은 버림 받아 
#4 모든 중독은강렬한 보상에 대한 욕망이다 
#5 몸과 마음이 당신을 믿게 해주세요 
#6 오늘 일을 내일 한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는다

꼭 남들처럼 살아야 하나? - 생긴 대로 살며 만족하기 
세 번째 손님, 밤이 무서운 요리사 
#1 우리 남자들끼리허심 탄회하게 애기해봅시다 
#2 해피엔딩을 믿은 순간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3 심인성, 마음에서 비롯되는 병 
#4당신은 여기 있을 때 빛이 나는군요 
#5 진정한 자존심의 원자로는 생겨먹은 데로 성질대로 사는 것 
성실한 사람이 걸리기 쉬운 함정 - 부정적 기억에 긍정적 기억 덧씌우기 
네번째 손님, 징크스에 갇힌 4번 타자 
#1 누구에게나 난공불락의 징크스가 있다 
#2 죄의식과 조급함을 부추기는 사회 
#3열심히 의미를 찾는다고 해결될까? 
#4 기억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5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 곳

오늘 몇 분이나 멍한 시간을 가져봤습니까?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기 
다섯 번째 손님, 공황장애에 걸린 남자 
#1 제가 원하는 건 최선이 아니라 베스트에요 
#2 난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어요. 그것도 죄인가요? 
#3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기 
#4 나는 사는 게 재미있다. 나는 별일 없이산다 
#5 그냥 서핑을 하듯 나를 맡기자 

지금가장 후회스러운 게 뭐예요? - 짜릿한 삶과 안전한 삶 사이에서 
여섯 번째 손님, 회사원이 된 천재 음악가 
#1 천재 예술가가뻔한 직장인이 되어 나타나다 
#2 이제 서른 살, 결국 네 인생이잖아 
#3 나는 실패보다 후회가 두렵다 
#4 링 안의싸움, 링 밖의 싸움 

예민할수록 인생이 피곤하죠 -행복 생산하기 
일곱 번째 손님, 자신감 없는 여자 
#1 왜 자신을 믿지 못하는가? 
#2 사실은 병이 두렵다 
#3모든 것이 부담스럽고. 두려운 까닭 
#4 너무 많은 경우의 수가 당신을 후회로 몰아간다 
#5 인생의 레이더 감도 줄이기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혹은 열병 - 수동적인 삶에서능동적인 삶으로 
여덟 번째 손님, 직장인 사춘기에 걸린 여자 
#1 뒤늦게 찾아온 직장인 사춘기 
#2 그 배우가 제남자친구라고요! 
#3 두 분 서로의 거울이 되어주는 건 어떨까요? 
#4 감탄사의 삶에서 쉼표의 삶으로 
#5 이 가게도 이제접을 때가 되었나 

에필로그 - 당신의 삶에도 변화와행운이 함께하길!




심야 치유 식당


프롤로그 - 당신의 마음속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료실을 찾아오는 이들 중에는 굳이 많이 바꾸지 않고, 지금껏 살던 대로 살아도 인생에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트랙을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정상이라는 확인을 받고, 부모나 보호자가 이끄는 대로 뻔하지만 안전한 길로 돌아가게 만들어 달라고 병원으로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병리의 잣대로 보면 정상 범위 안에 있다. 정확히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알고 있다. 답답하고 길이 안 보인다는 것을. 그러나 가기 싫은 길은 가고 싶지 않을 뿐이다. 어느 한쪽의 주관이 뚜렷하면 정면돌파할 수 있다. 트랙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지만 어느 쪽도 되지 못할 때, 즉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그저 공부하고 있어요, 준비 중 푯말만 걸어놓고 있거나, 뭔가를 하고 있기는 하나 지금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고 있을 때 삶은 행복에서 한 발짝씩 멀어져가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살고 있지만, 떨려나지 않기 위해 하라는 것은 하고 있지만 어딘가 미진하고, 삐걱거리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뚜렷한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건강검진을 해도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공을 해도, 많은 연봉을 받아도, 집을 장만해도, 원하는 것 이상의 성취를 해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의 문제는? 너. 무. 열. 심. 히. 살. 았. 다. 는. 것.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여전히 인생은 하나도 재미가 없고, 갈수록 빡빡해지고, 조금씩 여기저기가 힘들어진다. 이러다가 결국 벼랑 끝이 보이고 낭떠러지로 확 떨어져버릴 것 같은, 그게 언제 어디일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묘한 불안감.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이때부터 증상이 시작된다. 증상은 제각각 모두 다르다. 그런데 이게 모두 잘못된 증상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결국 증상으로 보이는 이 모든 이상행동들은 어떤 면에서는 이들이 자기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해 막아내다가 어느 선에서 나름 타협을 본 차선책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관점은 이래야 한다. 오죽하면 이런 증상에 매달리게 되었을까, 그 증상이 이 사람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고 난 다음 그런 비합리적이지만 그에게는 도움이 되었던 증상적 행동을 대신할 것을 찾도록 돕는다.


도시는 원초적 외로움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외롭다, 외롭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정작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옆집의 문을 두드려볼 엄두는 못 내고, 친구에게 선뜻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쿨한 관계가 현대인의 기본 태도니까. 그런데 그러다가 얼어 죽게 생겼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이 함께 모여 밥과 술을 먹는 식당을 차린다는 설정을 했다. 거기에 모인다고 외로움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얼어 죽지는 않을 온기를 나눌 수 있고, 혼자 끙끙 앓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공간과 관계가 있으면 좋겠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삶이 전보다는 덜 힘들고,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길 테니까.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공간과 관계다. 


48일 동안 잠 못 든 남자

해가 지기 시작하면 걱정이 밀려든다

민수는 오늘도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이로써 49일째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잠을 못 잔 적이 없었다.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불가피한 회식 자리가 없다면 바로 퇴근해서, 저녁식사를 하고 아홉 시 뉴스를 보고 나면 모든 불을 끄고 잠을 자는 생활이 벌써 5년이 넘는다. 현재 회사로 옮기고,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온 후의 삶은 단조로우면서도 나름대로 바쁜 편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민수는 만족도 불만도 없었다. 남과 비교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원래 삶은 이런 것이려니 여겼기 때문이다. 두 달 전에 인사이동으로 본부장이 바뀌기 전까지는 최소한 그랬다.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된 본부장은 1년 내에 파격적인 실적을 올려 재계약을 해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부서로 들어왔다. 본부장은 개별 면담으로 한 명 한 명을 각개격파했고, 민수에게도 이유 불문하고 영업 실적을 30퍼센트 더 올리는 업무계획서에 사인을 하라고 강요했다. 이번 본부장은 그의 성실성과 근면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더 쥐어짜면 뭐가 더 나올 것이라 여겼다. 오죽하면 본부장의 별명이 스테로이드 권이겠는가. 운동선수에게 스테로이드를 투약해 단기적으로 근육을 키우듯이 실적을 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하지만 그 뒤에는 부작용으로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하기 어려워진, 버려진 낙오자들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수는 불안했다. 민수는 그날 저녁 집에 오는 길에 갑자기 가슴이 확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호흡을 해도 가라앉지 않고 뭔가 걸려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누워서 잠을 자려 해도 잠을 잘 수 없었다. 결국 밤을 새우고 말았다. 한번 밤을 새고 나자 그의 머릿속에서 본부장과 실적에 대한 걱정은 도리어 뒤로 밀려나버리고 말았다. 그날부터 오늘 밤에는 잘 수 있을까?라는 화두로 머릿속은 욕심껏 꽉 채운 쓰레기 봉투처럼 터지기 일보직전이 되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걱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좋다는 것은 다 해봤지만 잠은 더 오지 않는다.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하니, 낮에는 일을 해도 멍하고, 회의 시간에도 집중을 하지 못한다. 민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시고 죽어버릴 용기까지는 없었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었다. 그래서 들어간 것이 노사이드였다.


트랙에서 벗어난다고 삶이 무너지진 않는다

민수의 집은 철주가 예상했던 대로 단출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거실과 방.


"자, 지금 시간이 열 시입니다. 그런데 열한 시까지는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돼요. 내가 지키고 있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열한 시는커녕 열두 시가 돼도 잠이 오지 않는데. 어제도 겨우 잘 만하다가 두 시부터 날밤을 샜다고요.”

"그러면 잘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열한 시까지는 절대 자서는 안 돼요. 자 나와요.”


철주는 부엌 의자를 마루에 갖다 놓고 민수를 거기에 앉게 했다.


"지금부터 여기 앉아서 저랑 같이 텔레비전을 봅시다. 그리고 열한 시가 될 때까지는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돼요. 그 시간 전에 졸기 시작하면 제가 깨울 거예요. 알았죠?”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열한 시에 가까워지고 시침과 분침이 모두 하늘을 향해 등반을 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절대로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라던 민수의 고개가 어느 순간 땅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열한 시가 되자, 민수의 눈은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스르르 감기더니 고개를 떨어뜨리게 되었다. 철주는 민수를 살짝 부축해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침대에 눕히고는 방문을 닫고 나와 알람을 맞춰주고 집을 나왔다.


이해는 그만,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세상

철주는 패러독시컬 인텐션 테크닉(Paradoxical Intention Tech-nique)을 이용했다. 이런 사람의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의 잘못된 믿음을 교정해야 한다. 잠을 못 잘 것이다라는 굳은 믿음의 해결은 넌 잘 수 있어라는 위로나 암시가 아니라 너는 자면 안 돼라는 정반대 방향의 명령으로 풀 수 있다. 역설적인 방법으로 특히 민수와 같이 강박적이고 논리적이며 상대적으로 시야가 좁은 성격의 사람에게 성공적이다.


민수는 강박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강박의 특징은 정서를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한 가지 사고에 골똘하는 것은 바로 억압하고 있는 내재적 무의식적 정서가 의식으로 치고 올라와서 자아를 집어삼킬까 봐 두려워 이성을 적극적인 방어기제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즉, 감성을 막는 최고의 무기는 이성이다. 이들은 평소와 다른 감정을 느끼면 자신이 그것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쓴다.


감정을 가두는 것 외에도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한 노력은 여러 가지가 있다. 민수는 매일의 일상을 똑같이 반복한다. 루틴이 중요하다. 강박적인 사람들에게는 루틴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루틴 안에 있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고민을 한다는 것,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은 감정적 판단을 할 가능성을 높인다. 그런데 감정적 판단은 과거의 감정과 연관된 기억과 경험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게 싫다. 그래서 최대한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만들어 지켜나가려 한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들의 무의식 속 감정은 가두려고 노력하는 만큼 강해진, 날것의 공격성을 탑재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맹수 한 마리를 마음에 가둬두고 그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상황. 민수의 경우 아직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들였고, 일상적 삶의 여유를 포기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 잠까지 못 자게 되었으니, 민수의 경우 자기가 만든 덫에 빠져버린 셈이었다. 민수의 불면을 해결하는 길은 궁극적으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민수는 그동안 감정이라는 것을 괴물로 여기고 무서워했다. 대신 이성에 철저히 의지했다. 그의 감정부전증상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봇처럼 살아온 민수는 감정을 느끼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희미한 기억이 철주를 만나 작은 불씨와 같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것은 판도라의 상자였을까? 내일부터 민수의 삶은 조금 달라질 것이다. 감정이라는 맹수를 길들여서 자신을 지키는 충견으로 만드는 것이 이제부터 민수가 해야 할 일이다. 쓰러지고, 할퀴어지고, 물릴지도 모른다. 그 아픔을 민수가 견딜 수 있다면 그의 인생은 신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징크스에 갇힌 4번 타자

누구에게나 난공불락의 징크스가 있다

올스타전 이후 휴식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되었다. 처음 박태조의 컨디션은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누상에 주자가 있고 스리볼만 되면 또 어이없는 타격을 하는 것이었다. 매번 병살타를 치게 되니까 도리어 의도적으로 공을 띄우려고 하게 되었고, 그러니 머리가 먼저 들리는 바보 같은 스윙이 나오면서 삼진이 되거나 투수 앞 땅볼로 아웃된 것이 벌써 열 번째다. 이렇게 되니 상대 투수들은 일부러 스리볼로 만들어놓고 승부를 시작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감독도 박태조가 부동의 4번 타자임에도 이런 상황이 되면 대타를 생각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그날 밤 박태조는 덕 아웃을 나온 뒤 집으로 가지 않고 선수단 숙소로 돌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잠이 오지 않자 연습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생각에 옥상으로 올라가서 몸이 부서지게 스윙 연습을 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지만 정신은 갈수록 또렷해지면서 그날 상황이 하나하나 상세하게 복기가 되어 잠을 들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귀신이 곡할 상황이 태조는 견딜 수 없었다. 누가 머릿속 컴퓨터를 다시 리셋해주든지 확 밀어버리고 윈도우부터 새로 깔아줬으면 좋겠다는 절박감마저 들었다.


열심히 의미를 찾는다고 해결될까?

그렇다면 징크스가 잘 생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바로 기억력과 집중력이 좋은 사람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 벌어진 사건이 매번 새로울 것이다. 그런데 매번 너무 열심히 교훈을 얻으려고 하고, 교훈을 통해 변화를 꾀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에게 어떤 예기치 않은 실패가 닥쳤다고 치자. 그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론적 틀로는 지금의 실패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럴 때 인간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기대거나 이론적 틀 밖의, 전혀 의외의 변수가 지금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을 내리는 수가 있다. 박태조도 그랬다.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스윙 폼이 잘못되면 열심히 분석해서 고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를 지금의 위치에 서게 한 것이었다. 특히 야구라는 종목이 그렇다. 야구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데이터를 판단과 행동의 근거로 이용하는 스포츠는 없을 것이다.


좋은 징크스는 결과에 대한 통제감을 높일 수 있다. 김성근 감독이 그랬고, 이봉주가 그랬듯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조금만 불편해서 결과가 좋아질 수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 불편함이라 여길 수 있다. 문제는 박태조처럼 안 좋은 방향으로 징크스가 만들어진 경우다.


기억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조의 징크스 탈출 전략의 첫 번째는 사람을 흩트리는 것이었다. 일단 술 마신 다음 날 연습을 못 나가게 했다. 아침부터 조조 영화를 같이 보러 가고, 드라이브 가서 장어를 구워 먹으면서 낮술로 맥주도 한 잔 했다. 태조는 서서히 말이 많아지면서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단단히 굳어져 있던 그의 일상에 빈 공간을 만들어냈다.


징크스는 그 기억을 지우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런 바람을 가지면 가질수록 일반적 기억은 정서적 기억으로 강하게 전환되어서 아무리 씻어도 씻겨나가지 않는, 돌 위에 새겨진 기억이 되고 만다. 하지만 기억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나, 다른 기억으로 대체하는 것은 가능하다. 아니면 그 기억의 중요성을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기억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건을 기억의 다용도실 찬장 안에 깊어 넣어두는 것이다. 징크스를 없애기 위해서는 새로운 좋은 버릇, 혹은 징크스를 만들면 된다.


철주는 며칠 동안 춤 선생을 초빙해서 태조에게 그루브 타는 법을 가르쳤다. 태조가 타석에 등장할 때 음악을 틀어주면 그가 그 리듬을 타면서 타석에 나가도록 한 것이다. 타석까지의 거리를 계산해서 거기까지 복잡하게 스텝을 밟으면서 가도록 했다.


나갈 순서가 되어 스윙 연습을 하는데, 어디선가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태조는 자기도 모르게 며칠 동안 배운 춤을 서서히 따라 하기 시작했다. 잘 틀리던 엇박자 스텝이 나오기 전이라 거기에 집중을 하느라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게 어느새 배트 박스 안에 서 있었다. 음악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고, 자기가 스텝을 잘 밟고 리듬을 탔는지 복기했다. 그러고 나서 배트를 한두 바퀴 빙빙 돌린 후에 엉덩이를 한 번 털어주고 타격 자세를 취했다. 투수가 공을 던졌다. 좋아하는 코스가 들어오자 아무 생각 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느낌이 좋았다. 가운데에 제대로 맞았다. 펜스를 넘어가는 홈런이었다.


그는 다른 것에 집중하느라고 징크스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타순이 돌 때마다 철주는 등장 음악을 틀었고, 그는 매번 안타를 칠 수 있었다. 심지어 스리볼 이후에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스윙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한번 생긴 징크스를 없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돌 위에 새겨진 비석 같은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인간에게는 신경가소성(neural plasticity)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 특정 부위의 세포는 인체의 성장이 멈춘 후에도 외부 자극에 의해 세포수가 늘어날 수 있고,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한번 일어난 신경 접속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환경 변화와 자극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겼다. 그런 만큼 우리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인식과 믿음 그리고 부정적으로 해석해서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도 어떤 노력에 의해서 충분히 변화할 수 있고, 새로 만들어낸 기억으로 덮어씌워서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태조가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정적인 결과와 연관된 징크스에 매몰되어 침몰해버리지 않는 길은 그 기억을 들어내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새로운 기억으로 이전 기억을 적극적으로 덮어씌우고, 새로운 기억이 마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반복 강화하며 감정이라는 가치 판단으로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태조에게는 한 단계가 더 남아 있다. 연습벌레로, 야구장 귀신으로 살던 그가 인생을 즐길 수 있게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다. 인생을 즐길 줄 알아야 길이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법이다.



자신감 없는 여자

왜 자신을 믿지 못하는가?

대학을 졸업하고 홍보대행사에 들어온 지 벌써 햇수로 5년째. 회사는 유진이 들어왔을 때보다 몇 배는 커졌다. 처음의 아기자기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사장 얼굴 못 본 지가 몇 달은 된 것 같다. 그래도 어느 날 갑자기 망하는 회사가 부지기수인 마당에 회사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이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비교적 강한 유진이지만 그녀의 고민은 세칭 홍보녀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클라이언트나 기자에게 먼저 다가가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클라이언트나 언론사 양측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안 되는 것도 되게 해야 하는 홍보녀의 기본 태도가 5년이 되어도 몸에 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업 공신까지는 못 돼도 나름 회사 짬밥으로는 중간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회사 내에서 그리 인정받지 못하고 뒤켠에서 서포트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 되어버렸다. 속상하고 아쉬울 때도 있지만 유진은 만족해했다. 무슨 일에서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하고, 그것도 훌륭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야 속이 편해지니까. 지금까지 그래왔기에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너무 많은 경우의 수가 당신을 후회로 몰아간다

잠시 후 철주가 흰 종이를 들고 오더니 그림을 그렸다. 그러고는 그림을 보여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회사에서 회식을 갔어요.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이 제일 윗사람 자리예요.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해서 아무 데나 앉을 수 있어요. 어디 앉을래요?”



유진이 머뭇거리다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7번, 2번, 3번만 아니면 괜찮아요. 가능하면 5번이나 9번?”


"유진 씨는 느낌으로는 1이나 4인데, 어쩌면 5나 9를 선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1과 4는 스키조이드 포지션(schizoid position)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에요.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절대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선택하는 자리죠. 거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게 좋고,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에 대한 욕구가 적은 편이에요. 그에 반해 5나 9는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똑같아요. 하지만 필요한 경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남아 있어요. 그래서 고개를 돌리면 주빈과 눈이 마주칠 수 있는 포지션에 가 있는 것이죠. 유진 씨는 그런 면에서 회피성이나 의존성 기질이 많다고 할까요? 경계심도 많고 신경도 많이 써요. 밥을 먹는 내내 가운데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신경 쓰고 있겠죠. 도리어 자기 테이블 사람들과는 별 대화가 없을지도 몰라요. 혹시 자기 얘기를 하거나 자기를 불러주지 않을까, 아니면 부를까 걱정하는 그런 상태로 있는 거예요. 애매하고 피곤한 인생이죠. 그렇지만 1이나 4를 선택한 사람에 비해서는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저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간절히 원한다면 변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변하기란 쉽지 않겠죠.”


인생의 레이더 감도 줄이기

"유진 씨는 사람들의 시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요. 그리고 그 진의를 파악하는 데 분주하죠. 그러다 보니 도리어 타이밍을 놓치게 돼요. 하나하나 순서대로 파악하다 보니 정말 중요한 큰 배는 놓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후회하겠죠. 그런데 후회하고 나면 사실은 이렇게 레이더의 감도를 현실적으로 수정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거꾸로예요. 가혹할 정도로 높이는 거죠.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말이에요. 이러면 일일이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돼요. 그러니까 인생이 피곤해지는 거죠.”


"안타깝지만 사람은 잘 안 변해요. 그게 문제죠. 기본적으로 외부의 인정이 있어야 움직이기 시작해요. 우주 소년 아톰처럼 가슴에 원자로가 탑재되어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하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마도 관성을 잘 이용해서 재빨리 응달을 통과하는 것, 또한 좋은 배터리를 장착해서 달리는 동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추운 응달과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해놓는 거예요. 심리학 용어로 그런 배터리를 자존감이라고 하죠. 유진 씨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이 배터리예요. 유진 씨에게는 좋은 레이더가 있어요. 그러니 태양열이 어디에서 올지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태양열이 있을 때 충분히 그 빛을 만끽하고 즐기세요. 그 힘으로 달리세요. 그러면 어두운 곳에 왔을 때에도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을 거예요. 그 힘이 지속되면 달리는 힘으로 두 번째 배터리를 하나 더 달아서 번갈아서 가는 거예요. 어때요? 괜찮은 아이디어죠? 사실 제가 얼마 전에 배터리를 새로 주문했어요. 전에는 너무 커서 무게 때문에 달 수 없었는데 기술이 좋아져서 가볍고 센 놈이 나왔어요.”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배터리가 없거나 닳아버려 성능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이 정도면 잘한 거야”라고 말해주는, 자신 안의 배터리가 돌아가야 세상의 응달을 통과해 나아갈 수 있다. 배터리가 없는 사람은 응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일단 멈추고 나면 낮은 자존감은 더욱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이제 철주는 유진의 배터리에 점프 케이블을 연결해 시동을 걸어주려고 한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제대로 보는 것이 변화의 확실한 방아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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