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새로 읽기

   
임향란
ǻ
한국학술정보
   
38000
2010�� 05��



■ 책 소개
과학과 문명의 발달은우리에게 편리함을 가져옴과 동시에 물질만능주의를 야기했다. 개발과 발전, 경쟁과 지배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지배사상은 인간의 탐욕을자극하여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현대의 사람들은 이제 동양사상과 동양철학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동양사상은 유가사상으로 대변될 수 있으며 유가사상은 공자를 개조로 하여 발전한 중국의 대표적 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동양 사상의 중심에있는 인물이 바로 "공자"인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공자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해 담고 있다. 춘추시대라는 정치적·사회적 혼란기에 공자는 인을 통해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공자에 관한 책이라면많이 나왔지만 공자의 대한 해석은 후대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상이하다. 따라서 본서는 공자에 관한 원시자료나 이미 출판된 공자 관련 서적을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 책을 통해 이 시대 공자 사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동양사상을 되짚어 봄으로써 현재의 혼란을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를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임향란
1963년 중국 길림성 연길시출생으로 중국 길림성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동 대학교 도서관 사서를 거쳐 한국 경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를 문학석사로 졸업하고 한국 인천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국 사천외국어대학교 한국어학과 주임교수로조선-한국학연구센터 주임을 맡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중국조선족문학에 나타난 고향의식」「심연수 시에 나타난 자연세계와 삶의 조화」「중국서부지역에서의 한류」「한중 재자가인소설류 비교연구」「한국 고대 에로스 문학 연구」「한국 고려애정시가 연구」「한류와 한풍 연구」등이있다.

■ 감수 우상렬
1963년 중국 요녕성 출생으로 중국 길림성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한국학중앙연구원 문학박사를 졸업하였다. 주요 논문으로 「농업문화로부터 본 한국문학」「북한문학의 종합적 이해」「내가 본 한국과 조선」「필 가는대로」「우상렬 인간에세이」「인간성을 노래한 시인」「무속원형으로 본 조선고대시조신화」「한국고전미학사상연구」외 다수가있다.

■차례
출판에 부쳐

제1장 아침이슬에 몸 씻고 니산에 성인이 강생하다
제2장 중니가 예의를 배우는데 정재는 계몽자였다
제3장 효자는 방목을 시작하고(효자는 목동이되고……) 자모(慈母)는 정(鼎)을 물려주다
제4장 기원전 535년 공구가 17세 되는 해였다
제5장 취처하고 생자하니 최초성과보이다
제6장 배움에 훌륭한 스승이 없어 번뇌 속에서 헤매다
제7장 행단(杏壇)에서 인재를 육성하는데 덕이 자로에게강림하다
제8장 중유는 스승을 섬기고 연경은 입학하다
제9장 주에 구학 떠나 학문이 급진하다
제10장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에발붙이고 태산에서 슬픔을 목격하다
제11장 경공(景公)이 문정(問政)하고 중니(仲尼)가 "소"를 듣다
제12장 공자는 사라지고 추자는성을 울리다
제13장 고향에 돌아가 주혼(主婚)하고 제자를 가르치다
제14장 사수(泗水)에서 파도를 구경하고 태산에서 서정을토로하다
제15장 여번 쟁탈전에서 양호(虎)가 패하다
제16장 부자는 준비를 하고 가신은 배신하여 도망가다
제17장 공자는초사(初仕)하고 봄에 중도(中都)에 가다
제18장 협곡에서 회맹하여 공자가 장기 보이다
제19장 사구가 집법하여 백성들이 혜택을보다
제20장 공실을 강화시키고자 타삼도 행동을 취하다
제21장 왕경이 계책을 대어 군상을 색정에 빠뜨리다
제22장 공자가노나라를 떠나고 자공이 답현(答賢)하다
제23장 거문고를 타서 문제에 해답하고 검을 휘둘러 위기를 막다
제24장 사어(史魚)는주검으로 총고를 하고 괴귀는 제 어머니를 살해하다
제25장 공자 생신에 자공이 유설(游說)하다
제26장 남자는 미역을 감고 공자는입궁하다
제27장 공자는 강에 닿고 환퇴는 나무를 베어 버리다
제28장 민공은 경현하고 연구는 귀노(歸魯)하다
제29장 진채는식량을 중단시키고 유곡에서 난초 꽃을 흠상하다
제30장 은사는 조풍을 하고 엽공은 문정하다
제31장 공자는 정명(正名, 명분을바로잡다)하고 자로는 범을 잡다
제32장 자공은 오나라에 유설을 하고 연구는 제나라 군을 물리치다
제33장 공자가 귀노(歸魯)하고계씨가 문정하다
제34장 증삼(曾參)이 휴처(休妻)하고 연구가 조주(助紂)하다
제35장 류하 도척이 공자를 질책하다
제36장침식을 잊어가며 분발하고 악(樂)을 다루느라 걱정까지 잊었다
제37장 서부에서 수렵하다 기린을 잡았으며 공자가 집필을끝마치다
제38장 백우가 악질(惡疾)에 걸리고 안회가 몰세하다
제39장 자로가 모자 끈을 매고 공자가돌아가다

부록공자연보




공자 새로 읽기


아침 이슬에 몸 씻고 니산에 성인이 강생하다

오악 중에서 으뜸인 태산은 도복 차림을 한 선풍거인인 양 인간의 만경창파를 굽어보고 있다. 그 남쪽 기슭에는 문하와 사하가 풍덩한 도복의 넓은 관 띠인 양 저 멀리로 줄달음쳐 간다. 그 옆에는 니산, 역산, 방산 등 뭇 산들이 비단도포 위에 수놓아진 꽃과도 같이 아담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기원전 551년 음력 8월 27일 이른 아침 니산은 아침햇살에 듬뿍 감싸여 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것들은 그렇게도 조화롭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이때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니산의 정적을 깨뜨렸다.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그녀는 마치 심금을 울리는 연주곡 소리에 잠겨 있는 듯, 젊은 엄마 안정재의 볼에는 기쁨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부인! 어디 있소?"반백을 넘긴 위풍당당한 장군이 외치며 산 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고, 가시덩굴에 옷이 찢겨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이 땀투성이, 피범벅이 되어 달려오고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곳, 아내가 누워 있을 산굴로 달려왔다. 이 사람이 바로 숙량흘이었다.


"아이는 니산의 영기를 머금고 태어났고 또 항렬 중에 둘째이니 공구라 하고 자는 중니라 합시다."이 이름은 아마도 나이 어린 아내와 함께 처음 니산에 올라와 송자파파에게 공을 드릴 때 벌써 생각해 놓은 듯하였다. 그는 갑자기 얼굴색이 흐려졌다. 그것은 아기용모가 보통사람과 다른 점을 발견한 것이다. 공구는 생김새가 특이했다.


그는 몸을 돌려 양미간을 찌푸리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안정재도 공구를 넘겨받아 자세히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숙량흘은 아이를 받아 안고 아내를 견여에 부축해 태우고 하산 길로 향했다. 숙량흘은 대를 잇기 위해 갖은 고생 끝에 얻은 아들이 이런 못난이였으니 기가 막혔다. 절음발이 큰 아들 맹피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아들이다.


숙량흘 일행이 집에 당도하자 하인들은 안정재를 방에다 모셨다. 안정재는 아이를 데려오게 했다. 안정재가 아이를 안고 있지 않은 숙량흘을 보자 당황해하면서 아기는 어디 있느냐고 묻자 숙량흘은 어물어물하면서 아기가 죽었다고 말하였다. 안정재가 하인들에게 물으니 하인들은 선량하고 불쌍한 마님이 가엾어 나리가 아기를 니산에 버리고 온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안정재는 그들의 말을 듣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는 순간 그녀는 산후쇠약증도 마다하지 않고 니산으로 줄달음쳤다. 그녀가 헐떡거리면서 산을 오르니 멀리서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달려가면서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외쳤다. 공구야 -가엾은 내 새끼야-


중니가 예의를 배우는데 정재는 계몽자였다

안정재는 만부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과 벽을 사이에 두고 3칸짜리 초가를 세 얻어 추읍에 가서 맹피를 데려왔다. 이때부터 세 모자는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갔다. 안양은 딸이 아이를 데리고 곡부성에 살길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수소문 끝에 거처를 찾아 데려가고자 하였으나 안정재는 부친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녀는 자기의 두 손과 땀으로 아들을 쓸모 있는 사람으로 키우려 결심하였다. 그녀는 문 앞에 있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오곡과 야채를 심어 근근이 끼니를 때웠다. 그는 빨래와 온갖 삯일을 맡아하였다. 겨울철 밤을 지새우며 식물기름등잔 아래서 짚신을 엮어 팔아 푼돈을 마련했다.


공구가 오자 만부는 짝꿍이 생겨 기뻐하였다. 하루는 짝꿍이 합창놀이에 열중하는데 갑자기 북소리,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더니 많은 사람들이 장엄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만부는 제꺽 공구와 함께 서쪽 행랑에 숨어 그쪽을 주시하였다. 그는 공구에게 아마 조상제사를 지내는 것 같은데 이제 참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질 거라고 하였다.


장엄하고 굉장한 정경을 훔쳐보던 공구는 어리벙벙했다. 비록 그 나이에 무엇이 예인 줄은 아직 몰랐지만 그의 어린 마음에는 예가 깊이깊이 새겨졌다. 갑자기 시 씨의 흉악한 얼굴과 어머니의 선량하고 웃음 짓는 얼굴, 그리고 어렸을 때 배웠던 <당예가, 산앵두> 노래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렴풋이 아버지의 구레나룻과 녹슨 갑옷들이 떠올랐다.


제사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온 공구는 곧장 어머니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끝없이 물어보았다. 안정재는 아들이 무척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매일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줄 테니 반드시 기억해야 된다고 다짐을 받았다. 공구는 너무도 좋아서 토끼처럼 퐁퐁 뛰었다. 안정재는 자신이 책에서 본 것과 친정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죄다 공구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하루 점심때 공구는 맨땅에 앉아 수심에 잠겼는데 점심 먹을 생각도 잊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걱정되어 머리를 짚어 보면서 어디 아픈 데가 있는지 물었다. 공구는 걱정 말라고 만 할 뿐이었다. 안정재는 아들이 혼자 생각에 잘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어떤 것들은 어른들도 미처 생각 못 하는 것들이었다. 공구는 입을 내밀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매일 형아한테 글공부를 가르치는데 왜 저는 안 가르쳐 줘요? 형아에게는 너무나 잘 해 주고 저를 박대하면 주례에 어긋나지 않나요?"어머니는 아들의 질문에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아들의 엉뚱한 질문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거기에 주례까지 연결시키다니. "얘야, 넌 아직 어려. 아직은 서당에 가 공부할 나이가 되지 않았어!""어머니 나 아직도 어려요?"공구는 어머니의 대답에 반박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맹피한테로 가서 맹피를 일으켜 세우고 형아보다 키가 더 크다고 우쭐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공구는 벌써 형인 맹피보다 귀 하나는 더 컸다. 물론 아들놈이 글공부를 배우겠다는데 어머니로서 너무나도 기쁜 일이라 즉석에서 승낙하였다. 안정재는 200여 개 올챙이 글자를 준비하여 한 달 안에 읽을 줄 알고, 쓸 줄 알며, 뜻풀이를 하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며 표시를 하였다. 그런데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반나절도 못 되어 어머니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안정재는 아들이 남달리 총명한 것을 보고 너무도 기뻐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취처하고 생자하니 최초성과 보이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남루한 초가에서 반딧불 같은 불빛 아래서 공구는 열심히 『상서』를 보고 있었다. 삼경의 징소리가 나면 그는 기지개 한 번 펼 뿐, 수탉 울음소리가 나면 하품 한 번 할 뿐, 햇살이 창문에 기어오르면 그는 또 생기가 넘쳤다.

 

공구가 진창 속에서 말 수레를 몰고 질풍같이 달리면 만부는 그 옆에서 부단히 채찍 쥐는 자세와 날리는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비가 구질구질하고 가을바람 휘몰아칠 땐 공구는 사수 강변에서 활쏘기를 연마했다. 공구는 이렇게 부지런히 학문을 익혀 갔는데 고정된 스승이 따로 없었다. 그 후 남궁경숙과의 담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는 법이요."이것이 바로 공구가 자신의 배움에 대한 생애 총화이다.

 

기원전 533년 공자는 19세였다.

 

어느 날 오전 공자는 맨땅에 앉아 죽간에 글을 새기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갑자기 만부가 뛰어들어 다짜고짜로 오른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어서! 중손 대부가 왔다."공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만부네 집에 들어가니 종모도 맹피 형은 싱글벙글 웃으며 중손 대부에게 차를 접대하고 있었고, 중손대부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소공은 중손 대부의 얘기를 듣고 나서 송과 의좋게 지내기 위해 혼사에 대해 대찬성이었으며 중손 대부에게 책임지고 하루빨리 추진하라고 했다.

 

결혼 전 중손 대부는 공자를 위리로 추천했는데 이것은 창고관리인에 불과한 작은 관직이었다. 공자는 부임한 후 장부가 엉망인 것을 발견하였는데 알고 보니 전임 위리와 부기들이 단짝이 되어 사리사욕을 채웠던 것이다. 공자는 자신이 배웠던 수학지식을 이용하여 물건정리를 하였으며 장부를 심사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반년도 못 되어 창고에 물건이 꽉 찼고 장부와 물품이 일치가 되었다. 계평자는 공자의 충성과 재능을 칭찬하여 승전으로 승진을 시켰는데 소와 양을 관리하는 작은 관직이었다.

 

결혼한 후 공자 부부는 금슬이 좋았으며 서로 존경했다. 공자는 낮이면 밖에 나가 양이나 소를 관리했으며 아내 기관씨는 천을 짜고 가사를 돌보았다. 저녁이면 공자는 촛불을 켜고 책을 보았으며 아내는 그 옆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동무했다.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생계를 위해 부잣집에 가서 소 먹이는 일을 했기 때문에 가축의 습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취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련의 구체적인 관리 조치들을 취했다. 1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축사에는 소와 양들로 가득 찼는데 하나같이 살찌고 덩치 큰 좋은 놈들이었다. 그해의 교사 제사와 종묘사 예식에는 전례 없이 좋은 가축들을 썼다. 이렇게 되자 공자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자는 못하는 일이 없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고, 뜻이 크고 학문이 깊고 안목이 높아도 보통 귀족의 후손들처럼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노소공도 극찬했다.

 

기원전 532년, 그때 공자는 20세였다. 공자가 집으로 달려가니 아내가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내는 피곤한 안색이 가시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어머니가 된 기쁨을 금치 못했다.

 

맹피가 아내에게 잉어 탕을 끓여오라 하자 공자는 정색하며 말렸다. "형님! 이 잉어는 선조들의 음덕입니다. 그놈이 금방 태어나서 어떻게 이런 대은을 받을 수가 있겠어요? 때문에 이 잉어는 절대 먹을 수 없소! 우리는 대왕의 하늘과 같은 이 은정을 명기해야 하는 까닭에 아들놈의 이름을 이(鯉)라고 하고 자를 백어(伯魚)라 하여 영원히 명기해 두어 군주가 내린 하사품을 영예로 삼는 것이 도리라 생각합니다."맹피 부부는 둘째(공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더 이상 군말을 하지 않았지만, 온 집안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소공송어-소공이 잉어를 보내 준 얘기-는 따스한 춘풍인 양 곡부성은 물론, 노나라 전체에 퍼졌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공자를 더욱 존경하였다.


주에 구학 떠나 학문이 급진하다

공자가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은 다른 강단과 많이 달랐다. 일부의 강단은 여기저기 손을 대 계획성이 없었지만 공문의 강단은 엄격한 계획으로 어떤 면에 있어서는 몇 년이란 시간을 투자하여 전문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교육실천에 비추어 주례를 깊이 연구하는 과정에 허다한 난제에 봉착하였는데 그것은 학생들이 평시에 질문한 문제들이었다. 그는 늘 원만한 해답을 주지 못하면 괴로워했다. 소문에 노담이 예악의 오묘함을 통달하여 도덕의 정수를 깨달았다고 하기에 공자는 배우러 가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어 소원을 성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용이 옆에 있어 꿈을 이루기에 무리가 없었다.

 

하루는 공자가 자신의 생각을 남용에게 말했더니 남용은 흔쾌히 대답했다. "1년에 한 번씩 있는, 주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계절이 돌아왔사옵니다. 이전에는 부친이 내왕하셨는데 금년에는 제가 군주에게 아뢰어 스승께서 저와 함께 가시면 꿩 먹고 알 먹기가 아니겠사옵니까?"라고 말하였다. 남용은 이 일을 지체할세라 소공에게 알렸더니 생각 밖으로 소공이 쾌히 응낙했다. 소공은 즉시 공자에게 마차 한 대, 말 두 필, 어수 한 사람을 은사하고 남용과 함께 가도록 했다.


공자 일행이 앞으로 걸어가는 데 앞쪽 한가운데 체격이 웅장하고 골격이 튼튼하며 근육이 발달한 노자가 서있었다. 노자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이(耳)이며 외자는 담인데 시호가 담이라는 일설도 있다. 초나라 고현 사람인데 수장실지사직을 담당했다. 그는 역서에 정통하며 주례와 천도에 능숙하고 역수에 통달했다.

 

다음 날 공자와 남궁경숙(남용)이 노자의 댁으로 가니 시종이 스승께서는 외출하시고 계시지 않다고 했다. 그다음 날도 먼동이 트자마자 노자 댁을 방문했지만 여전히 노자가 집에 없다고 했다. 그 다음 날 공자와 경숙은 여전히 노자의 댁으로 갔는데 입도 열기 전에 시종이 댁의 스승이 태묘에 계시오니 어서 그곳으로 가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급히 태묘로 걸음을 옮기자 고령의 장자가 절 앞에 서 있는 것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그 모습은 아주 초연해 보였다.

 

공자가 장홍 노인 앞으로 가서 인사를 올리고 가르침을 받으려 할 때 노담이 언제 와 있었는지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 또 악경을 가르쳐 주려 하옵니까?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며, 오미는 사람의 입맛을 죽입니다. 만물은 무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소리가 크면 희성이 되고, 형체가 크면 무형이 되며, 도가 은폐되어 있으면 무명이 되니, 도가 있어야만 선이 되는 것인 줄로 압니다.”

 

공자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두 분 스승님께서 악과 도를 담론하셨기에 공구는 많은 것을 터득하였사옵니다. 논의는 서로 다르지만 노담 선생님께서 도의로 악을 노하시며 도의 위치를 높이 세우고 악사님께서는 악으로 도를 논하시어 악의 위치를 높이 세우시니 두 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갈래는 서로 다르지만 도리에 있어서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쟁론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두 늙은이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재주가 보통이 아니라더니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구먼.”

 

공자는 또 노담에게 예법의 지식을 물었는데, 노담은 사실과 정리에 비추어 명확한 해답을 주었고, 공자는 고맙다며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노담은 미소를 지으면서 세간에 난 우리들의 소문은 헛소문일 뿐이고,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돌아가서 스스로 터득하라고 했다.


한참 골똘히 듣던 공구는 흡사 현문 속으로 들어가 주위의 모든 것을 죄다 잊어버리고 자신이 인간 세상과 현실생활의 모든 번뇌를 초탈하여 만경창파의 세계로 간 듯했다. 공자의 사색은 재빨리 명석한 이지의 현실 속으로, 사랑과 미움, 악과 선의 세계, 바로 자신이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노담은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귀담아 듣고 있는 공자를 보고 칭찬하면서 "나는 도를 가르치지 않은 것으로 도를 전수했으며, 자네는 도를 묻지 않는 것으로 도를 물어왔었네. 나는 가르칠 것이 더 이상 없으며 자네는 도를 완전히 통달 하였네.""제가 어떻게 감히 도를…… 선생님은 저의 종신 스승이오니 더 많이 더 오래도록 스승님의 도를 배우고자 하오니, 노성에 오신다면 스승의 교의를 더 열심히 듣겠나이다."


노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더 많은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어서 떠나라고 하였다. "스승님! 평안하옵소서!"공자와 경숙은 삼배구구하고 나서 마차에 올라 아쉬워하며 길을 떠났다. 부연 먼지를 흩날리며 딸깍딸깍 말발굽소리를 내면서…….

 

노자와 공자는 중국문화역사에 있어서 아주 걸출한 인물로서 그들의 회견은 고대문화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남겨 놓았다.


공자는 정명(正名, 명분을 바로잡다)하고 자로는 범을 잡다

공자는 할 일이 없어 한가하게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 하루 사사부에 고재의 정적을 살피러 갔다. 고재는 어디 가고 없고 부사사가 영읍재를 심문하고 있었다. 영읍은 벌써 꼬박 2년째나 전세를 내지 못해 국고수입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공문자는 부관에게 법에 의해 처리하라 영을 내렸다. 영읍재는 울상을 해 가지고 "폐읍은 산간지대에 위치해 이 몇 년간 맹수가 출몰하여 사람을 해쳤기 때문에 밭이 묵고 소와 양들이 부지기수로 실종되었나이다. 상한 사람도 부지기수인데 농민들은 얼마 남지 않고 죄다 이사를 가 버렸습니다."부사사는 목탁을 하늘땅이 진감할 정도로 두드리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몇몇 호랑이와 같은 무사들이 영을 듣고 달려와 마구 영읍재를 끌어냈다. 부사사는 노기등등했다. 공자와 자공은 심판청의 한쪽에 있는 객실에서 고재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심판하는 소리를 아주 똑똑하게 들었다. 한식경이 지나자 고재가 돌아왔다. 고재는 부자님이 정적을 시찰하러 온 것을 보고 방금 보고 들었던 일을 상세하게 회보하였다. 고재는 "이 일은 전적으로 제자의 실직으로서 부사사에게 심사에 주의하라고 권고하지 못했던 탓이 옵니다. 부사사는 사람이 정직하고 일을 열심히 하오나 성질이 거칠고 조포하여 사단을 일으키기 한창이옵나이다.”

 

"고재야, 네가 볼 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지?"공자가 물으니 고재는 "영읍에 들어가 조사하여 경작수확의 실정을 알아내어 농부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질고를 알아내어 국군에게 아뢰어 상황에 따라 부세를 감면하도록 하겠나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포수들을 조직하여 산에 들어가 야수를 잡아 해를 없애 이사 간 농부들을 귀가하게끔 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고 농사에 부지런하게끔 하여 백성이 부유해지면 전세야 못 받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공자는 흡족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고재의 말이 맞아. 내 생각과 꼭 맞구먼. 산에 들어가는 날에 이 선생을 잊지 말아다오. 우리 함께 백성들의 질고를 헤아려 보자꾸나.”라고 했다.

 

며칠 후 고재는 공장에게 입산할 것을 요청했다. 사도 일행 십여 명이 산속동네에 와 보니 다락 밭에 쑥 천지여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잡초들이 꽉 찬 속에는 독사들이 꿈틀거리고 산비탈에는 승냥이 떼들이 출몰하였다. 몇 호 남지 않은 마을들에는 도처에 담벼락이 허물어져 있고 굴뚝에서는 연기라고 볼 수 없었다. 마을이라고 들어가 보니 산토끼와 꿩들이 놀라 도망가는 것이었다. 이 정경은 읍재가 거짓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돈과 식량이 없으면 부세를 내지 못한다는 것은 실로 이치에 맞는 얘기라는 것을 절감했다. 이 모든 것은 한시바삐 조치를 대어 이 읍의 백성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산에 올라가 멀리 내다보면서 흉금을 넓히라고 하였다. 오늘 그는 고재를 도와 문제를 해결하게 되어 읍재가 더는 머리를 손에 들고 사사를 만나지 않아도 되었으며, 이곳 백성들도 곧 구원을 받아 기쁨이 넘칠 것이니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 그래서 그는 노쇠도 아랑곳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등산을 하자고 제자들에게 제의하였던 것이다.

 

산마루에 올라서니 눈앞에 깊은 골짜기가 나타났다. 골짜기의 격류가 길을 막았으므로 공자 사도는 다른 산봉으로 톺아 올랐다. 제자들은 부자를 부축하고 크고 작은 산등성을 몇 개 지나 주봉으로 향했다. 때는 바로 정오였는데 불같은 햇볕이 내리쪼이는 바람에 공자는 목이 마르고 입술이 까칠해 나무 그늘 밑에서 좀 쉬었다 가자고 하였다. 그러고는 자로더러 물통을 들고 샘물을 길어 오라 했다.


자로는 물통을 들고 곧추 앞으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훅하더니 이마에 백색무늬가 돋친 호랑이가 밀림 속에서 뛰쳐나와 입을 쫙 벌리며 자로에게 덮쳐들었다. 자로는 급히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고 호랑이와 생사결판을 하였다. 호랑이의 체대는 너무 육중하여 미처 돌지도 못했는데 자로가 어느새 왼손으로 그놈의 꼬리를 잡고 오른손에 든 검으로 내리 찔렀다. 맹호는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자로는 이 기회를 빌려 단숨에 산으로 뛰어올라 갔다.

 

공자는 자로의 그 용감성과 진취정신에 대해 매우 흡족해하였다. 즉, "하지 못함을 번연히 알면서도 해 나가려는 성미”, 이것이 바로 공자가 평생 높이 받든 좌우명이기도 했다.


자로가 모자 끈을 매고 공자가 돌아가다

공회는 공괴를 핍박하는 한편 석걸과 맹연을 시켜 가병을 거느리고 밤에 출공의 궁궐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위출공은 침상에 올라 코를 골고 있는데 갑자기 한 시종이 뛰어 들어와 반란군들이 궁궐을 포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출공이 시종들에게 어서 공괴를 불러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 난을 일으키고 있는 자들이 바로 공씨네 가병이며, 태자의 명령을 받고 반역자 잡으러 왔다고 한다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출공은 청천벽력을 들은 것처럼 스스로 끝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라고 심복시종들에게 급히 명령하여 보물을 거두어 두 마차에 꽉 박아 싣고 가속을 거느리고 밤 장막을 빌려 뒷문을 빠져 노나라로 도망을 갔다.

 

변란이 일어나는 그날 출성하여 사무를 보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자정이 지나서 옷 벗고 쉬려 하는데, 난녕이 보내온 편지를 보고서야 괴귀가 공씨 댁을 야습하고 공괴를 협박했으며, 오래전부터 밀모해 왔던 부자간 국군자리 쟁탈전의 유혈사건이 시작된 것을 알고 마차를 타고 나는 듯이 성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상부로 뛰어가 승상을 구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고재는 다시 출성하여 곧추 서쪽방향으로 가 자로에게 정변이 일어났으니 잠시 어디론가 피하고 돌아오지 말라고 알려 주려 했던 것이다. 고재는 자로가 온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었다. 아침 햇빛 아래에서 자로는 끌채에 앉아 사정없이 채찍으로 굴레의 말을 내리치고 있었다.

 

자로는 성안으로 들어가 상부로 곧추 달려갔다. 자로는 당당하게 상부인 공씨 댁으로 들어가 곧바로 정면 대청을 향했다. 명연 등 세 무사가 장모, 화극, 대도를 들고 용상에서 내려와 자로에게 달려들었다. 자로는 삼면의 공격을 받았지만 홀몸으로 너끈히 감당했다. 용맹은 젊은 시절 못지 않았다. 줄곧 우세에 처해있었다. 허나 맹호도 승냥이 무리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자로는 구경 회갑년이 넘었고 게다가 보검인 짧은 병기로 장모 등 장병기를 대처하다 보니 맥이 곱절 들었다. 갑자기 공괴가 용상 위에서 자로 뒤를 조심하게 라고 소리를 쳤다. 공괴의 고함 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자로는 맹연의 대도가 뒤에서 내리찍는 것을 감촉했다. 자로가 급히 몸을 피했지만 모자가 땅에 떨어지고 왼팔이 대도에 찍혀 피가 용솟음쳐 나왔다.

 

자로는 "잠깐만! 공부자님이 일컬었는데 군자는 죽어도 모자는 벗지 않는다고 이 중유가 모자를 바로 쓴 다음 죽여도 늦지 않다.”라고 말했다. 세 명의 무사들은 그 소리에 전율하며 뒤로 몇 발 물러서기까지 했던 것이다. 자로는 허리 굽혀 모자를 주어 먼지를 털고 나서 똑바로 썼다. 자로의 이 행동은 모든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자로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모든 수식이 끝난 후 그는 불시에 보검을 뽑아들고 자결했다.

 

자로의 묘지에서 돌아온 후 공자는 몸져누웠다. 온 겨울 침상에서 몸을 일구지 못했다. 여덟 번째 날 아침, 공자는 자공을 시켜 곡부성 안에 있는 제자들을 전부 불러오게 하였다. "공구는 은나라 후손이니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은 고례에 의해 관을 두 기둥 사이에 놓아다오.”라고 분부했다. 제자들은 맑은 물을 떠와 얼굴과 손을 씻어 주었으며, 무엇을 들겠느냐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자공아, 너의 거문고 재주는 제자들 중에서도 으뜸이니 나에게 한 곡 켜다오.”라고 청을 들었다.

 

자공은 칠현금을 가져와 음조를 바로잡은 후 켜기 시작했는데, 공자는 악곡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공자의 노랫소리는 가면 갈수록 낮아져 나중에 귓속말로 방불케 하다가 끝내 중지되고 말았다. 그는 바른 차림대로 위좌하고 앉아 눈을 감아 버렸다. 그는 조용히 잠들었다. 영원히 잠들었다. 자공의 손가락이 불시에 떨리더니 뚝하고 거문고의 시위가 끊어져 버렸다. 기원전 479년 2월 11일 중국 역사상 위대한 사상가이고 정치가, 교육가이며, 인류 역사상의 문화거인 공구는 73세의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뜬 후 많은 제자들이 복상 3년을 하였다. 3년이 된 후 그들은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유독 자공 한 사람만이 공자의 능묘 옆에 초가삼간을 지어 놓고 또 수상 3년을 하였다. 일부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은 공자를 추모하여 공자 능묘 옆에 이사를 왔는데 백여 호나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공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공자의 집과 강당, 그리고 제자들의 숙사를 공묘로 개건하여 공자를 기념하는 성역으로 되게 하였으며, 그곳에 공자가 생전에 사용하여 왔던 옷, 모자, 거문고, 책, 차 등 물품들을 수장하였다. 그때로부터 공자는 해마다 사람들의 봉사를 받았던 것이다. 지금 곡부에 있는 3공-공묘, 공부, 공림은 바로 그때로부터 형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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