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문학과 역사, 삶을이야기하다!
『길 위의 인문학』은 크게 두 장으로구성되어 있다. 먼저 1장 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은 우리나라의 지적 거장들의 흔적들을 찾아 떠난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과 신사임당, 허균에 이르기까지 문학, 역사, 철학 등 학문의 중심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그들의 삶과 기록들을그대로 따라 가는 일은 시공을 초월해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 저자
구효서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단편 『마디』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2005년 『소금가마니』로 이효석문학상, 2006년 『명두』로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저서로는 『저녁이 아름다운 집』『나가사키 파파』『랩소디 인 베를린』 등이 있다.
김도연
1991년 강원일보, 199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해, 2000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삼십 년 뒤에쓰는 반성문』『눈 이야기』 등이 있다.
박종기
성심여자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를 거쳐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고려시대 부곡제 연구』『5백년 고려사』『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등이 있고, 40여 편의 논문을발표한 바 있다.
신창호
현재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동양사상의 이해』『인간, 왜 가르치고 배우는가』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진시황 평전』『공자평전』『노자평전』『관자』 등이 있다.
이이화
민족문화추진회,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에 봉직하였고, 서원대학교 석좌교수,역사문제연구소 소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사 이야기』『한국의 파벌』『허균』 『인물로 읽는 한국사』 등이있다.
전우용
서울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상명대학교 강사와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교수,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청계천: 시간, 장소, 사람』『서울 20세기: 100년의 사진기록』 등이 있다.
정민
한양대학교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시 미학 산책』『청소년을 위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한시속의 새, 그림 속의 새』『미쳐야 미친다』『다산선생 지식경영법』『성대중 처세어록』
최석기
한국고전번역원 상임연구원을 수료하였고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경상대학교 인문대학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공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송원시대 학맥과학자들』 등이 있다.
한명기
규장각 특별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로 2000년 제 25회월봉저작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임진왜란과 한중관계』『광해군』 등이 있고,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한승원
1968년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목선(木船)』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김동리문학상등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아버지를 위하여』『화사』『추사』『다산』 등이 있다.
함성호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시를발표했다. 주요 저서로는 『56억 7천만년의 고독』『성타즈마할』『너무 아름다운 병』『허무의 기록』『만화당 인생』 등이 있다.
황병기
현재강진다산실학연구원에서 파견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다산박물관 개관 공동준비위원장과 지방공무원 연수 책임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동양철학의 세계』『조선의 주자학과 실학』『다산 정약용 명언림』 등이 있고, 다수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길에서 느끼는 인문학의 재미와감동
1부 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길위의 인문학
인문학, 퇴계의 길을 따라 걷다
지리산의 종소리, 남명 조식
추사 김정희 선생과의가상대담
강진 푸른 물에 다산의 마음이 흐른다
유배지의 삶, 김이재와 정약용
남존여비 시대의 세 여성과 불우한 사람들의 벗,허균
2부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길위의 인문학
서울 성곽, 그 역사를 걷는다
안과 밖에서 보는 강화도
남한산성에서 되돌아보는 병자호란
강릉가는 먼 길
금강 따라 흐르는 우리의 역사
은유와 상징의 집, 양동마을과 향단
길 위의 인문학
1부 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
인문학, 퇴계의 길을 따라 걷다
퇴계와 『자성록(自省錄)』
우리는 거의 매일 퇴계 선생을 만난다. 무슨 말인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1천 원권 지폐에 인자한 모습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지폐에 초상(肖像)이 사용되는 경우, 그 인물은 그 나라 역사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거나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역사와 삶에서 퇴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퇴계의 성(姓)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황(滉)이다. 어릴 때 집에서 별도로 쓰던 이름을 자(字)라고 하는데, 경호(景浩)라고 불렀다. 그리고 퇴계(退溪)는 호, 즉 또 다른 이름이다. 퇴계는 조선시대 연산군 7년(서기 1501년) 음력 11월 25일(양력으로는 1502년 1월 3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재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에서 진사였던 아버지 이식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유명한 인물이 될 징조를 보인 것일까? 어머니는 퇴계를 낳기 전에 유교의 창시자이자 동양 최고의 스승인 공자를 대면하고 그의 문하에 드나드는 꿈을 꿨다고 한다.
퇴계는 조선 역사에서 국보급 유교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공자가 유교를 창시한 이래 맹자, 주자를 거치고 난 이후 유학자 중에서 특히 뛰어난 지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우리의 자화자찬이 아니다. 중국 청나라 말기의 대학자인 양계초(梁啓超, 1873~1929)와 신해혁명 때 혁명군 수령이었던 려원홍(犁元洪, 1868~1928)과 같은 사람들의 찬가(讚歌)를 보면 알 수 있다. 1920년 중국 상덕여자대학에서 퇴계의 주요 저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간행했는데, 이때 양계초는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은 찬양시를 붙였다고 한다.
높디 높으신 / 우리 이퇴계 선생님 / 옛 잇고 뒤를 열어 / 과거와 현재를 꿰뚫으셨습니다. / 열 폭 그림 속에 / 공부의 요점을 전하시어 / 백세에 길이길이 / 인심을 여시었습니다.
려원홍도 다음과 같이 퇴계를 찬양했다.
중국이 다른 민족과 다른 까닭 / 사람과 짐승이 다른 까닭 / 모두 여기에 담겨 있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중국의 최고 지도자요, 사상가였던 그들이 왜 퇴계의 학문에 그토록 감탄하며, 칭송하는 시를 지었을까?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인품과 사상적 깊이가 어떤 유학자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성록』을 통해 일본의 유교가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이렇게 외형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 퇴계라는 이름만으로도 우리가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그의 학문성은 이미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중국·미국의 저명한 동양학자들이 ‘퇴계학 국제 학술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이 어떠했기에, 21세기 현재에도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퇴계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냐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형식적 삶이 아니라 그의 공부와 내면세계, 삶의 자세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퇴계는 ‘스스로 마음을 다진다’는 의미의 『자명(自銘)』이라는 시를 써서 자신의 삶을 읊었다. 자신의 삶을 시 한 수에 담아, 경건하게 스스로 명심한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퇴계는 타고난 성품이 고결하고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상을 지녔던 듯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여파로 사림의 의기가 꺾인 시기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정치인들이나 지식인, 즉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고초를 당하게 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당시의 학풍은 정치적으로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시문(時文)이나 탐닉하면서 좀 가볍고 정치적 색채가 적은 풍조로 흘렀다. 이때 퇴계는 도학(道學), 즉 유교에 대한 깊은 의지와 모범적인 행실로 학풍을 새롭게 일구기 시작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교의 근본을 두고 방황했다. 이런 상황에서 퇴계는 정치적 실천보다는 산림에 은거해 강학(講學)하는 일을 택했다. 즉, 고요히 물러나 교육에 힘쓰려는 뜻을 굳혔던 것이다. 오죽하면 호를 ‘물러날 퇴(退)’, ‘시내(산골짜기) 계(溪)’ 두 글자를 써서 ‘시내에서 물러나 조용하게 살겠다’라는 뜻으로 지었을까! 그러기에 퇴계와 더불어 조선 유교의 양대 산맥으로 볼 수 있는 율곡 이이도 퇴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선생은 세상에서 유교의 최고봉이다. 정암 이후로는 서로 견줄 만한 분이 없다. 그 재주와 배짱은 정암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겠으나, 의리를 탐구해 자세하고 은미한 데까지 드러내는 것은 정암이 미치지 못한다.”
율곡이 지적한 것처럼 퇴계는 일생을 의리(義理) 탐구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정치적으로 사회 개혁을 강력하게 부르짖었다기보다는 자연과 인간, 사물과 행위세계에 대한 원리와 이치를 끝까지 캐물어 들어가는 공부에 몰입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외면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내면적으로 자기 성찰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혼란의 시대를 감내하는 그의 삶은 산수(山水)를 왕래하며 사색과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사색과 연구의 결과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퇴계는 영남학파의 태두이자 위대한 스승, 교육자의 모범이 되었다. 퇴계는 제자가 물으면 한참 생각한 후에, 자상히 일러주는 친절하고 겸손한 스승이었다고 한다. 이는 늘그막에 새파란 청년이던 고봉 기대승과의 그 유명한 사칠논변(四七論辯)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기에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은 그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배우는 자를 이끌어주고 붙들어주며, 병통에 따라 약을 주고 사방으로 응하되 궁색하지 않아서 정밀하고 깊고 간절하며, 다듬어진 학문이 문자 사이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니, 그 덕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자성록』은 특히 이러한 퇴계 선생의 덕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저술이다. 많은 편지 가운데 자신의 사상적 원숙기라고 할 수 있는 58세 때 22통을 직접 엮은 『자성록』은 형식적으로는 선생의 ‘자기 성찰’, ‘자기 반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유교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으면서, 유교의 공부론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훗날 일본의 야마자키와 오오스카, 다카가에게 전해져 일본 유교의 기초가 된다. 야마자키는 이 책을 숙독함으로써 마음의 눈을 뜨고, ‘신명과 같이, 부모와 같이’ 『자성록』을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오오스카는 본래 양명학자였는데, 『자성록』을 읽고 정주학의 참뜻을 깨달아 주자학으로 전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카가는 ‘읽을수록 그 학문의 순수함과 용공의 주도함에 진실로 스승으로 우러러볼 만하다. 그 깊고 빼어난 기상은 종이와 먹 위에 넘쳐흐르고, 조잡하고 오만한 단점을 치료하기에 충분하다’고 평했다. 이렇게 퇴계의 『자성록』은 일본 유교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퇴계의 학문은 유교가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기본으로 한다.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데, 인격함양을 위한 수양과 더불어 사회생활을 위한 올바른 도리와 질서를 탐구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다. 자기의 재능과 본분을 알고 그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자기 공부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함께 나누는 공부이다.
‘위기지학’과 반대되는 의미의 학문이 ‘위인지학(爲人之學)’이다. 위인지학은 자신에게 충실한 공부를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공부를 의미한다. 내면을 닦기보다는 외면에 치중해, 유행에 따르거나 욕망에 따라 공부하기 쉽다. 이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파악하거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보다는 남들에게 보이거나 과시하기 위한 겉치레 공부이다. 이런 공부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게 만든다.
퇴계는 마음공부, 이른바 심성의 수양이나 의리의 인식과 실천을 중심 문제로 잡고 있었다. 그 핵심이 바로 ‘경(敬)’ 공부이다.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며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늘 강조한 것이다.
『자성록』은 그런 공부에 관한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사람은 사람답기 위해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어떻게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가?’ 등 공부를 향한 반성과 열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자성록』은 인간의 내면적 ‘성찰의 기준’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데, 특히 정밀하면서도 심오한 철학적 사색, 열렬한 구도자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퇴계 스스로의 수양 과정은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간곡하고 친절한 설득과 교화, 배려 정신은 그의 인간적인 겸손과 성실성, 의리 정신으로 넘쳐흐른다.
현대를 지식 정보화 사회라고 하는데 우주 첨단 과학은 발달하고 있으나 정신세계는 상당히 메마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컴퓨터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 통신 혁명과 지식으로 일컬어지는 현재에 21세기 인간 성찰의 잣대를 과연 무엇으로 삼아야 할까? 퇴계는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기록’, 『자성록』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자성록』은 퇴계가 제자와 주고받은 22편의 실제 편지이다. 그렇다고 단순한 안부 편지는 아니다. 편지를 통해 삶의 의미와 예술, 인간의 자기 성찰과 유교의 공부론을 보여준다. 그것은 삶의 예술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학문적 토론의 마당을 공개하며, 조선사회의 삶의 모습과 인간적 교류, 교육의 실제를 담고 있다.
서로 주고받은 삶에 대한 진솔한 성찰은 영혼의 소리로 다가오며 학문에 대한 깊은 사유는 온몸의 온기로 느껴진다. 여기에서 학문(學問)은 단순히 글을 배우는 학문(學文) 행위가 아니다. 인생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적절하게 예방하고 처방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방식을 의미한다.
학문은 결국 ‘배우고 묻는 행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을 맹자는 “해이해진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일”이라고 했고, 율곡은 “일상생활의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운용”으로 설명했다.
『자성록』은 일상생활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적절한 삶의 기준, 공부의 양식을 제시하고 있다. 퇴계는 『자성록』을 엮으면서 어떤 마음가짐을 하고 있었을까? 그 진정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가슴에 퇴계의 마음을 다시 끌어와 담아 볼 때이다.
2부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
안과 밖에서 보는 강화도
내 안의 강화와 바깥에서 보는 강화
나에게 강화는 그런 곳이었다. 동에서 뜬 해가 종일 푸른 산천을 비추다 서해로 풍덩 빠지는 곳, 새벽 감을 줍기 위해 동네 누구보다 먼저 눈 비비며 일어나던 곳, 바다가 있고 펄이 있고 바람이 있던 곳이 나의 강화였다. 개울가에 눈 큰 체를 담그면 은빛 참붕어와 갈겨니떼가 잡혀 올라오던 곳, 삘기가 봄 들판을 붉게 덮고 찔레며 상아가 산기슭에 향기를 더하던 곳, 혼자 따려고 산딸기 덩굴 숲을 내내 혼자만 알고 있던 곳이 나의 고향 강화였다.
왕복 20리 넘는 산길 등하굣길은 얼마나 멀고 지루했던지. 우산도 우비도 없던 시절, 어머니는 집을 나서는 나에게 못자리 온상 하고 남은 비닐을 온몸에 둘둘 감았다. 집을 나선 지 5분도 안 되어 비닐은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개울에 물이 불고, 소낙비는 하냥 내려 온몸이 함빡 젖기 일쑤였다. 학교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온몸이 물에 불어 추웠다.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다 그랬다. 교실 바닥은 온통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었다.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지루했다. 온갖 노래, 온갖 놀이, 온갖 장난을 해도 돌아갈 집은 멀기만 했다. 세상은 온통 푸르고 푸르러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오줌 멀리 누기, 똥 많이 누기, 지나가던 운 나쁜 뱀 토막 치기, 개구리 살리고 죽이고 살리고 다시 죽이기, 메뚜기 잠자리 다리 하나씩 차례로 뜯어 걷게 하기……. 잔인하다고 하기엔 너무나 길이 멀고 심심했던 유년의 하굣길이었다.
칡뿌리 캐고 개암 따고 겨울엔 가오리연 날리던 곳, 유난히 맛있는 보리똥이 열리던 곳, 콩떡 잘 찌던 이웃집 할머니가 언제나 사람좋게 웃어주던 곳이 나의 강화였다.
그러나 강화 바깥에서 바라보는 강화는 그런 강화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고향이 강화라고?” 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그러면 사람들은 말했다. “좋은 데구나.” 물론 좋은 곳이었다.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바깥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곳’의 뜻은 조금 달랐다. 낚시하기에 좋은 곳(강화도에는 여러 개의 저수지와 수로가 있다), 당일 여행 코스로 좋은 곳, 인삼·순무·황복·사자발쑥 등 건강 먹을거리가 많은 곳, 심지어는 밴댕이회가 유명한 곳.
밴댕이회를 말하면서 ‘심지어’라고까지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강화 사람들은 밴댕이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을 회로 먹지 않았다. 소금 듬뿍 넣어 푹 삭히는 것으로 끝이었다. 밴댕이젓으로 김치를 담그면 그만이었다. 김치도 전적으로 밴댕이젓으로 담그는 게 아니었다. 주로 앞바다에서 잡히는 품질 좋은 오젓이나 육젓으로 담그되, 독특한 맛을 내기 위해 곤쟁이젓과 황석어젓과 밴댕이젓을 각각 조금씩 넣었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강화’ 하면 밴댕이회로 유명해졌다. 지금은 중국에서 밴댕이를 수입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밴댕이를 먹지도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강화 사람들로서는 강화가 밴댕이로 기억되는 것을 좋아할 리 없다. 지금도 강화 사람들은 밴댕이회를 거의 먹지 않는다. 밴댕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강화 사람들은 아직도 밴댕이를 생선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워낙 바깥사람들이 밴댕이회를 찾으니 수입을 해서라도 팔지 않을 수 없다. 자칫하면 강화의 대표적 명물이 될 판이다. 강화 사람들이 원한 것은 아니나 그리되었다. 어디든 그렇겠지만 강화 사람들로서 보는 강화와 강화 바깥사람이 보는 강화가 따로 있는 것 같다.
내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 사람들이 하던 말. “좋은 데구나.”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그런 차이가 있었다. 강화 안이 아닌, 강화 바깥에 의해 규정되는 또 다른 강화가 있었다. ‘좋은 데구나……’ 이 말에는, 음식과 여가와 풍물은 물론이요, 강화라는 지역이 매우 유서가 깊은 곳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가 그냥 유명한 곳이 아니지 않은가. 상고시대 단군왕검 관련 신단이 있는 곳이 강화였다. 몽고가 침입해 고려왕조는 강화에 피몽정부인 강도(江都)를 세웠다. 다른 지역과 다름없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과 정묘재란을 겪었다. 최초로 프랑스군 미군과 국제전을 벌인 곳이며, 일본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빼앗기는 출발점이 되었던 곳이 바로 강화였다. 한국전쟁 중 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곳이고, 휴전 뒤로도 부속 도서 주민들이 간첩으로 체포되어 징역을 살았으며, 최근 재심이 받아들여져 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 받은 억울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곳이 강화였다.
강화에 살고 있을 때 나는 그런 사실들을 몰랐다. 너무 어렸고,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시야가 특별히 더 좁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좁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고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다. 사람 사귈 줄도 모르고 친구를 먼저 찾을 줄도 모른다.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국사도 배우고 지리도 배웠으나 내 고향에 대해 각별한 애정은 생기지 않았다.
외려 고향이란 좀 귀찮고 성가신 곳이었다. 나는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 익명으로 숨어 있는 걸 편하게 생각했다. 서울은 그런 곳이었다. 누구도 나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고향은 그렇지 않았다. 깨복쟁이 친구들, 이웃들, 집안 어른들이 수두룩했다. 내가 어떤 놈인지 너무 잘 알았다. 숨으려고 해도 숨을 수 없는 곳이 강화였다. 낯가림 많았던 나는 나를 아는 사람이 많은 고향이 성가셨다. 어린 나이에도 참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벌초, 성묘, 시제, 집안의 대소사가 기다리는 곳. 늘 흔쾌히 달려간 적이 없었던 곳. 지루하고 지겨웠던 곳. 그곳이 강화였다.
요즘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금은 다른 의미의 “좋은 데구나”라는 말을 듣는다. 강화는 서울에서 가까운 시골이라는 것, 섬이라서 바깥과의 경계가 분명하고 사면이 바다며 공기가 좋다는 것. 따라서 별장이나 전원주택을 짓고 노후를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뜻이다. 그런 용도의 부동산 투자도 해볼 만한 곳이라는 말이다.
바깥사람들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나에겐 아직 강화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강화는 내가 태어난 곳이며, 낯익은 산과 들이 있는 곳이며, 폐교된 초등학교 터가 남아 있는 곳이며, 배앓이를 하며 비를 맞으며 통학하던 아련한 산길이 남아 있는 곳이며, 바라보노라면 아직도 무작정 슬퍼지는 수평선이 있는 곳이다.
이 땅에 유서 깊은 곳이 어디 강화뿐이겠는가
강화가 아무리 유서가 깊다 한들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유서 깊은 곳이 어디 강화뿐이겠는가. 이 강토 방방곡곡이 다 유서 깊은 곳 아니겠는가. 사람이 태어나 살고 그곳에 뼈를 묻었다면 다 유서 깊은 곳 아니겠는가. 살며 싸우며 울며 웃고, 계곡과 들판에 사람들의 땀과 숨결이 흐르고, 숱한 사람들의 숱한 삶의 시간과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면 유서 깊지 않을 곳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 고향이 강화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다. 네 고향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라. 가져도 좋을 만큼 강화는 우리나라 역사의 중앙을 지탱한다. 알면 알수록 너는 네 고향 강화가 얼마나 예사롭지 않은 풍운의 시공간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르쳐준 것이 단군이 제사를 드리던 참성단과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해 쌓게 했다는 삼랑성이었다. 연개소문이 태어난 곳이 강화며, 고려 때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삼별초가 생겼다는 사실들이었다.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 장수가 프랑스군을 물리쳤다고 말하면서, 프랑스군이 퇴각하면서 왕실 관계 서적을 보관하던 강화의 외규장각 도서들을 약탈하고 불 질렀다고 했다. 아직도 그 도서들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그리고 강화도는 지정학적으로 외세에 의해 가장 먼저 가장 빈번히 침탈당하던 곳이었으므로, 우리나라 근세 국제관계사 또한 강화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강화 사람인 내가 강화 사람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강화에 대해 들어야 한다는 게 조금은 어색하고 창피했다. 일행들과 강화를 갈 때도 나는 강화를 안내하는 입장이 아니라 듣고 구경하는 입장이었다. 누군가 열심히 설명을 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강화 사람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강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그러하단 말일까. 늘 나를 괴롭히는 질문이었다.
내가 강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강화가 아닌 강화 바깥에서 듣고 배운 것들이다. 그러니 강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알고 잇는 강화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말하자면 나는 강화에서 강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강화 밖에서 강화를 보고 있다. 강화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강화는 이러저러한 곳이다’라고 바깥에서 배우고 전해 들었다. 바깥에서 배우고 전해 들은 것을 강화에 와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정말 그렇구나.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어려서 미국으로 입양된 사람이 미국에서 배우고 알게 된 한국을, 어느 날 한국에 여행 와 확인하면서 ‘아, 그렇구나’라고 고객 끄덕이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갓난아이로 서울에 입양된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열다섯 살까지 강화에서 부모 형제와 살며, 제기 차고 노래하고 술래잡기하며 놀았다. 내 뇌리에 박혀 있는 강화, 내 기억 속의 강화라는 게 분명 있다. 물론 내 기억 속의 강화란 성장기 토속적 자연환경과 관련된 게 대부분이다. 그리고 밖에서 배워 안 강화도란 대개는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지식에 한한다. 그 둘을 직접 비교해 진위와 시비, 우열을 가릴 사안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언제나 어느 정도 거부감이 든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 쓰여 있고, 바깥사람들이 알고 있는, 얼마간은 매우 기능적으로 정리되고, 오랫동안 되풀이되어 기록되거나 이해되었던 사실들에 대해.
그래서 고향에 갈 때마다, 특히 바깥사람들과 함께 강화에 갈 때마다 나는 늘 망설인다. 민망하다. 아는 게 없는데다 제대로 알 자신도 없다. 강화에 대해 결코 섣부르게 말할 수 없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
그러나 한 가지, 이제는 더 이상 창피해하지는 않을 거라는 건 누구에게라도 약속할 수 있다. 이렇게 두렵고 민망한 마음을 안고 고향 강화를 끝없이 끝없이 방문한다는 것이, 비록 평생을 그리해도 모자랄지언정, 그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강화를 알아가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