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김열규
ǻ
비아북
   
13000
2011�� 02��



■ 책 소개
우리시대의 스승 김열규 교수가 전하는 참삶의 의미와 행복의기술!


한국학의 석학이자베스트셀러 작가인 김열규 교수가 김홍도 <빨래터&&에서 김소월 「산유화」까지, 괴테 『파우스트』에서 릴케 『두이노의 비가』까지,동ㆍ서양 최고의 고전과 예술을 넘나들며 행복에 대하여 엮어낸 책이다. 

‘왜 한국인은 복을 빌기 전에 덕을 먼저 내세웠을까? 달관과 체관이 행복의 극치인 이유는?’ 등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행복의 정서들을 작가 특유의 소박한 글로 엮어냈다. 또한 시와 소설, 그림과 르포르타주를 아우르며 행복을 짓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풋풋한행복을 전한다. 저자는 행복이 굴러들어오는 대상이 아니라 정성을 쏟고 열정을 바쳐야 하는 노력의 산물이며, 행복은 절대 그냥 찾아오지 않음을강조한다.

■ 저자김열규
1932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동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했다. 서강대학교 국문학교수,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연구 인생 60여 년을 오로지 한국인의 질박한 삶의궤적에 천착한 대표적인 한국학 거장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한국인의 자서전』을 출간하여 한국인의 ‘죽음론’과 ‘인생론’을완성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나이 이순(耳順)이 되던1991년에 데이비드 소로와 같은 삶을 살고자 고향으로 낙향했고, 그곳에서 해마다 한 권 이상의 책을 집필하고 특성화 대안학교인지리산고등학교에서 매주 글쓰기 특강을 한다. 지은 책으로 『독서』『공부』『노년의 즐거움』『그대, 청춘』『한국인의 자서전』『한국인의 화』『한국인의신화』『한국의 문화코드 열다섯 가지』『고독한 호모디지털』『기호로 읽는 한국 문화』 외 다수가 있다.
■ 차례
프롤로그- 행복은 어떻게오는가?

Ⅰ 행복의탄생                      
행복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정복, 맑고 깨끗한 우리들의 행복
행복의 다섯 가지 씨앗, 오복 
행복밭에서 어떤 열매가 열리는가?  

Ⅱ 일상과 행복이 만났을 때 - 한국인의 행복론    
우리 삶의 시작은?- 행복과 고통 
삶을 풍요롭게 사는 법 - 일과 행복 
삶의 진창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힘 - 집념과 행복 
흔들리는 날 연밭에 나간다 - 도전과 행복 
행복을 빚는 단서 - 행복과 갈등 
릴케가 말하는 알라인이란? - 고독과 행복 
파우스트의 땀 -행복과 노력 
동양적 행복의 극치 - 달관과 체관, 그리고 행복 
한국인의 행복, 그 실체는?&nbsp& - 행복과 정

Ⅲ 행복을 짓는 사람, 사람을 닮은행복-예술과 현장 속 행복 
내 마음 한편에 끝없는 행복이 흐르네 - 시 속 행복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의 의미 -소설과 동화 속 행복 
한여름, 아낙들의 신명 소리 - 그림 속 행복 
땀 흘려 행복을 빌고 짓는 사람들 - 르포르타주 속 행복
    
Ⅳ 행복한 에피쿠리언을 위한 제언           
흔들리는 에피쿠리언들
쾌락의 두 얼굴,제논이냐 에피쿠로스냐?  
행복한 에피쿠리언을 위하여 





행복


프롤로그- 행복은 어떻게 오는가?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행복은 삶의 지표이고 또 보람이다.


인생이며 삶을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행복은 그 모양새며 무늬며 빛깔이며 가치를 달리한다. 사랑이며 정이 행복을 맺어주듯이 사업이 행복의 열매를 맺게 할 수도 있다. 어른들 같으면 직업이 그리고 일거리가 행복을 잉태하듯이 아이들에게는 운동이며 공부며 놀이가 행복감을 자아낼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행복의 텃밭이 마음임을 일러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고비마다, 삶의 국면마다, 삶의 정황마다 행복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음도 일러준다. 삶은 살기에 따라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행복의 꽃동산이 될 수 있다. 그렇다. 행복은 각자 하기 나름이다. 크게는 살기 나름이고 작게는 행동하기 나름이다. 행복을 말할 때마다 그것이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다져두어야 할 것이다. 각자가 행복의 주인이고 주체이다.


오늘날 우리 인생은 경제적 풍요며 물자의 풍요에 얽혀 있다. 그것들에 매달려 있다. 우리는 그것에서 행복의 지표를 찾고자 한다. 요컨대 첫째로는 돈에 겹친 물질적 풍요, 둘째로는 피동적인 요행수, 그 둘에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도 바라마지 않는 행복이 걸려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타락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람직한 행복의 모습에 더한층 마음 써야 한다.


첫째, 행복의 궁극은 보람된 일의 성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 마침내 내가 해냈구나!" 바로 이 한마디, 그 감탄에 우리의 행복이 의지해 있다.


둘째, 누구에게나 행복은 긍정적인 자아실현이라는 것을 자기실천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사람답다는 것을 실감함으로써 각자의 행복은 보람을 거둔다. "아, 드디어 내가 여기에 이르렀구나!" 바로 이 한마디, 그 탄성에 우리의 행복이 기대고 있다.


셋째, 이처럼 일의 성취와 자아실현이 자기만족을 넘어 사회에 대한 베풂이 되고, 사회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아, 결국 내가 우리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바로 이 한마디, 그 다짐으로 우리의 행복은 완성된다.


이 세 가지를 마음에 새기고 행복을 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복 짓기가 된다. 복을 스스로 만들고 창조하는 것이 된다. 이 책은 이 세 가지 다짐을 전제로 한 복 짓기를 위해 쓰고 엮은 것이다. 그 자부가 곧 필자의 행복이 되기를 바란다.



Ⅰ 행복의 탄생                     

행복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덕이란 배 고물에 바치옵고

복이란 배 이물에 바치오니

덕이며 복이며 나아오소이다.


여기서는 고려가요 「동동」의 곰배와 림배를 배의 뒷전인 고물과 앞전인 이물로 옮겨보았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단출하게 현대어로 옮겨질 것이다.


덕은 뒤에 바치옵고

복은 앞에 바치오니

덕이며 복이며 나아오소이다.


그래서 이 고려가요는 표현은 간략하지만 속뜻은 대단하다. 덕과 복을 짝지어서 비는 것 자체가 이미 만만치 않다. 우리 누구나 빌지 말라고 해도 복을 빈다. 그러나 덕을 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복을 빌기에 앞서 덕을 먼저 빌고 있지 않은가. 복은 오히려 뒤로 미루고 덕을 우선 빌지 않는가. 정말 감동적이고 감격적이다.


고려가요 「동동」은 일 년 열두 달을 놓고 달마다 자연의 이치나 세상의 이치에 따라 인간의 생활이 곧고 바르고 아름답게 꾸려지기를 비는 노래로 그 서론과도 같은 맨 앞머리에서는 복보다 덕부터 빌고 있다.


일 년 열두 달 바라옵건대

인격이 갖추어지게, 덕을 행하게 해주소서.


그런 거룩한 소원이 「동동」의 서곡에는 메아리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복이 찾아와주기를 빌고 있다. 일 년 열두 달이 덕으로 살아지고 복으로 살아지기를 빌고 있다. 그렇게 「동동」은 "부디 덕이 갖추어진 복이 찾아와주소서"라고 축원하고 있다. 그렇게 덕을 비는 덕빌이와 더불어 복을 비는 복빌이를 「동동」은 담고 있다. 덕을 받들며 복되게 살기를 고려 사람들은 축수한 것이다.


한 해의 시작인 설날만이 아니라 모든 날이, 우리의 인생살이 전체가 덕빌이가 되고 또 복빌이가 되기를 고려 사람들은 노래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인생 자체가 덕빌이고 또 복빌이였던 셈이다.


1,000년도 더 지났지만 우리 역시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 까마득한 세월이 갔든 말든 여전히 우리 삶에서 복빌이와 덕빌이의 몫은 압도적이다.



Ⅱ 일상과 행복이 만났을 때 - 한국인의 행복론   

파우스트의 땀 - 행복과 노력

잠시 잠깐의 우연한 행운이나 요행은 몰라도 제대로 된 행복은 노력의 소산이다. 땀을 흘린 만큼 행복이 가까이 다가든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파우스트가 그랬듯이 우리는 누구나 땀을 인간이 빚은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땀의 긍정은 행복의 긍정이다.


우리가 흘리는 땀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노역의 땀방울이다. 그것은 우리가 흘리는 구슬방울이다. 영롱하고 귀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일함으로 흘리는 땀, 애씀으로 흘리는 땀, 노동으로 흘리는 땀, 그것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무엇을 이룩하고 무엇을 성취했을까?


그래서 파우스트는 인간으로서 누릴 모든 가치의 궁극에, 그리고 정상에 땀을 모셔 받든 것이다. 인간으로서 긍정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 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 온갖 일을, 온갖 시도를 한 파우스트에게 결국 남은 것은 실망이고 좌절이었다. 신의 힘과 악마의 힘까지 빌려가면서 해낸 일은 결국 허사였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 긍정을 바칠 것이 찾아들었다. 일하는 사람의 이마에 어린 땀이었다. 그에게는 구원이었다. 살아 있는 보람 그 자체였다. 인간으로서 누리는 행복의 극치였다.


누구에게나 그 비슷한 순간은 있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할 테지만 그건 보편적인 순간이다. 쉼 없이 노력해서 드디어 찾은 행복, 애쓰고 땀 흘린 보람과 더불어 찾아오는 행복감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할 것이다. 그런 경험 속에서 노력이야말로 행복의 온상임을 절실하게 깨닫는 것이다.


노력은 애씀이고 힘들임이다. 아등바등하기이다. 이를 갈고 견뎌내고 이겨내야 비로소 노력이다.


그런데 노력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미리 가능성을 내다보고 힘쓰는 노력과 가능성이 짚이지 않는데도 땀 흘리는 노력이 있을 것이다. 물론 두 가지 다 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은 아무래도 엄청난 고난과 장애가 예상되는데도 오히려 억척을 부리는 노력일 것 같다. 될까 말까 하는데도 바로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나서는 노력이야말로 보다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노력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도전일 것이다. 노력이 도전과 맞물릴 때, 포기와 굴복이 없는 계속적이고 끈질긴 도전일 때 노력은 더한층 기를 돋우고 사기를 드높인다.


이럴 때 우리가 자주 입에 올리는 "죽기 살기로!"라는 그 한마디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죽자 살자!"라고 해도 다를 것은 없다. 두 말 모두 목숨 걸고 또는 결사적으로 일에 달라붙는다는 의미이다. 그럴 때 우리의 노력은 그리고 우리의 땀은 어둠을 밝히는 광명이 될 것이다.


노력은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에 바쳐질 때 필경 생사를 넘어서야 한다. 땀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적 행복의 극치 - 달관과 체관, 그리고 행복

동양인의 행복은 달관과 체관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지를 설명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달관과 체관을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의 마음부터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우리는 흔히 마음이 좁다거나 마음이 넓다는 말을 쓴다. 마음이란 말 대신 품을 써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좁으면 스스로 고생한다. 품이 좁으면 스스로 외돌아진다. 마음을 열면 소망이 이루어진다. 품을 열면 꿈이 미소 짓는다. 소견이 짧으면 세상이 비좁아진다. 소견머리가 트이면 온 세상이 환해진다. 그래서 마음이며 품이 좁고 소견이 궁색하면 스스로 행복을 해친다. 성질머리가 까다롭고 성깔이 모나면 스스로 복을 내치고 만다. 반대로 도량이 크고 넓으면 복이 지레 알아서 찾아든다.


도량(度量)이란 말에서 도(度)는 도수(度數)의 도로 길이를 재는 자를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량(量)은 양을 재는 되를 가리킨다. 그런데 도량은 사람의 마음을 두고도 사용된다. 누군가 생각의 길이가 길고 마음의 부피가 크면 그걸 두고 도량이 넓다고들 한다. 큰 마음 먹는다고 할 때의 그 큰마음이 바로 도량이다.


도량이 크면, 도량이 넓으면 사소한 일에 매이지 않는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심중을 이해할 줄 알고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게 된다. 너그럽고 다사로운 마음씨가 된다. 그럴 때 국량(局量)이 크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큰 아량이 깊은 국량과 견주어서 쓸 수 있는 말로 달관(達觀)과 체관(諦觀)이 있다. 달관은 사리에 밝은 뛰어난 식견으로 널리 보고 크게 살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외통수로 고집을 부리지 않고 편견에 얽매이지 않음도 의미한다. 무엇이든 한 가지 관점에 사로잡히는 대신 아량을 가지고 넓고 멀리 보는 것이 곧 달관이다.


체관의 체(諦)는 단념한다는 뜻을 지닌 체념의 체이다. 그런데 체는 원래 살필 체이고 자상하게 알 체이고 이치 체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이치를 자상하게 살피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다름 아닌 체이다. 그래서 달관과 거의 같은 뜻의 말이 된다.


누군가 무엇에든 달관하고 체관하게 되면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속 시원하고 자유롭게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마음의 여유를 누리게 된다. 해가 비치면 해그림자 짓고, 달이 뜨면 달그림자 짓고, 바람이 불편 바람 따라 설레는 널따란 호수 같은 마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달관이다. 이런 달관에 이르면 진정 복된 마음의 경지가 열릴 것이다.



Ⅲ 행복을 짓는 사람, 사람을 닮은 행복-예술과 현장 속 행복

내 마음 한편에 끝없는 행복이 흐르네 - 시 속 행복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시를 즐기는 사람들 입에 너무나 자주 오르내리는 소월의 「산유화(山有花)」이다. 피고 지는 꽃은 혼자지만 홀로는 아니다. 흘러 가는 세월이 함께이고 작은 새의 노래가 함께이다. 거기 시인의 정서가 어울린다. 계절의 변화와 새와 꽃, 그것들이 이루는 삼위일체와 시인의 가슴도 하나가 된다. 그 심경에 젖어들면서 시인은 더없이 행복하다.


김영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시인 김영랑은 작품에 굳이 제목을 달지 않았다. 시집에 담은 시들에 순서대로 오푸스(opus), 곧 작품 번호를 붙여놓았는데 이 시에는 1번이 매겨져 있다. 모르긴 해도 독자들이 작품의 제목에 매이지 말고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작품 1번도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음악으로 또 노래로 읊조려진다. 시인이 말하듯이 도른도른 노래 불러지는 것이다. 그 노래하는 서정에 더해서 심금(心琴)의 서정이, 거문고의 서정이 가락을 울리고 있다. 마음이 악기가 되어 잔잔하게 연주되고 있다. 그 서정의 가곡(歌曲)이야말로 이 시의 바탕이다.


그 곡조(曲調)를 따라서 시인의 가슴에는 강물이 흐른다. 그것도 끝없는 강물이 되어 도도하게 흐른다. 시인의 가슴은 그래서 문득 광야가 된다. 그래서 드넓은 푸른 들이 그 가슴에 펼쳐진다.


그 도른대는 강물에 아침 햇살이 어리면 은빛 물살이 인다. 눈이 부시다. 그렇듯이 시인의 가슴에 강물이 흐른다. 이 색조, 이 곡조는 원래 강물이 흐르는 광야, 그 드넓은 들판의 몫이다. 그것과 시인의 가슴속에서 울리는 고동(鼓動), 그 심장의 율동은 한 치의 빈틈이 없다.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있다. 이것을 실감하는 마음에는 물밀 듯이 행복감이 넘칠 것이다.


   

Ⅳ 행복한 에피쿠리언을 위한 제언          

쾌락의 두 얼굴,제논이냐 에피쿠로스냐? 

일방적인 쾌락은 삶의 허비이고 낭비이다. 그러나 모든 쾌락이 그렇게 못된 것은 아니다. 쾌락도 쾌락 나름이다. 가령 영어로 에피쿠리아니즘(Epicurianism)은 쾌락주의를 의미하는데 그 말의 뿌리는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ouros)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에피쿠로스의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이 곧 에피쿠리아니즘인 셈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가 생각한 쾌락은 오늘날의 향락적인 쾌락과는 달랐다. 당대에는 쾌락주의자라 매도당했던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이란 친구들과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면서 담론하는 것이었다. 즉 조선시대의 고고한 선비들이 즐기던 청유(淸遊)가 에피쿠로스에게는 쾌락이었던 셈이다.


사실 말썽 많은 단어인 쾌락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쾌감이나 쾌적(快適)이란 낱말이 그렇듯이 쾌락은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때는 즐거움이나 기쁨과 거의 같은 뜻을 지닌다. 그러나 앞서도 보았듯이 쾌락은 천대를 받는 경우가 더 많다. 쾌락에 빠진다느니 쾌락을 탐한다느니 할 때에는 타락의 낌새마저도 끼어든다. 이 지경이면 쾌락과 향락은 오직 그 음지만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그리스의 두 철학자 사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쾌락주의의 원조인 에피쿠로스와 그를 거부한 (Zenon ho Elea)에게 쾌락은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철학과 생활 방식을 과격할 정도로 부정하고 거부했다.


제논은 그 풍모가 엄격했고 옷차림은 단출했다. 그리고 욕심을 삼갔다. 향연, 곧 잔치판에 끼어드는 일이 없었고 음식도 소박한 것을 즐겼다는 제논에게 물질적 쾌락, 감각적 쾌락은 인간의 악덕 바로 그 자체였다.


어쩌면 우리는 쾌락에 대해 제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싶을 테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에피쿠로스의 편을 드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쾌락에는 타락하는 쾌락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긍정적인 쾌락도 있을 수 있다. 육체적 쾌락이라고 전적으로 부인할 것도 아니고 정신적 쾌락이라고 해서 오직 그것만을 고집할 일도 아니다. 육체와 정신, 그 둘이 조화를 이룬 쾌락이라면 마다해서는 안 된다. 가령 운동이나 산책 등에서 누리게 되는 쾌락에는 육체적인 쾌감과 정신적인 즐거움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을 테니. 이때 우리는 긍정적인 의미로 에피큐리언, 곧 에피쿠로스다운 쾌락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영혼과 정신의 즐거움에서 행복을 만끽한 에피쿠로스를 본뜨게 될 것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