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의 심리학

   
에드 라이트(역자: 정미나)
ǻ
에버리치홀딩스
   
22000
2010�� 08��



 책 소개
스캔들에 휘말려 자신이 그동안 애써쌓아온 부와 명성을 무너뜨린 예는 비단 빌 클링턴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대통령, 성직자, 예술인, 억만장자, 스파이 등 유명인들이 남긴희대의 스캔들을 들려주면서 그 속에 담긴 인간의 욕망들을 조망한다. 유명 인사들이 자신이 애써 일구어낸 부와 명예를 어처구니없는 실수로무너뜨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인간의 9대 욕망, 즉 분노, 시기, 고집, 탐식, 탐욕, 허망, 정욕, 교만과 나태가 각각 인물에게 어떤영향을 미치며 또 그로 인해 어떻게 파멸에 이르는지를 다루었다. 

총 6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에서는 정치인들의 스캔들을, 2부에서는 살인과 미스터리를 다룬다. 3부에서는 거짓선지자들을, 4부는 도망자들을 조명하며 제5부에서는 이중생활을 지내면서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들과 스파이들을 다루었다. 마지막 6부에서는 밀한도착증에 빠진 유명 인사들을 다루었다. 이렇게 등장하는 31명의 유명 인사들의 스캔들은 때로는 뻔뻔스러움으로, 때로는 복잡성으로, 때로는 그어리석음으로 저마다 다른 충격을 던져준다.

■size=2> 저자 에드 라이트

시드니 대학교에서 미국문학박사 학위를 땄다. 사회 평론가로 「더 시드니 모닝 헤럴드(The Sydney Morning Herald)」「더 오스트레일리안(TheAustralian)」「더 오스트레일리안 파이낸셜 리뷰(The Australian Financial Review)」 등 일간지에 정기적으로 글을기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정치 및 문화를 자유롭게 풍자하는 잡지 「스트루스(Strewth!)」의 공동 창간자다. 저서로는 『왼손이 만든역사』『유명 인사의 가계도(Celebrity Family Trees)』『사라진 탐험가(Lost Explorers)』와 『유령 식민지(GhostColonies)』 등이 있다.

■size=2> 역자 정미나

출판사 편집부에서 오랫동안근무했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현재 번역가 에이전시 하니브릿지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와인 바이블 - 와인을 위한 단하나의 책』『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악마의 정원에서 : 죄악과 매혹으로 가득 찬 금기 음식의 역사』『엄마 미션스쿨 : 위대한 아이를 키우는위대한 엄마들의 학교』『기다리는 부모가 큰 아이를 만든다 : 부모의 조급함이 아이를 망친다』 외 다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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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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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정계 인물들의 비리
친부 여부를 둘러싼 의문 - 토머스제퍼슨과 샐리 헤밍스
위선적 절제주의자 - 자베즈 스펜서 발포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 워런 G. 하딩
유별난 사랑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프슨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 리처드 닉슨과 워터게이트
잊지 못할 정사 - 존 프러퓨모
해임당한총리 - 에드워드 고프 휘틀럼
대통령의 여인들 - 페르디난드와 이멜다 마르코스
자유당과 불안정한 정신의 마구간 지기 - 제러미소프
저는 그 여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 빌 클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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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살인과 미스터리
개화된 전제군주 - 예카테리나2세
인터뷰 - 애런 버와 건국의 아버지의 죽음
장성將星 살인자 - 대니얼 시클스, 죗값을 모면하다
거장의 우울증 - 표트르차이콥스키의 파란만장한 생애
욕실 안의 뚱뚱보 - "로스코 패티" 아버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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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거짓 선지자들
설교자와 창녀 - 지미스웨거트
바나나에게 강간당한 남자 - 카난 바나나 목사
신을 찬양하고 전리품을 나누어주라 - 짐 베이커, 신의 은총을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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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도망자들
도망자 - 카라바조의 쫓기는 삶
그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 로만 폴란스키
자취를 감춘 귀족- 루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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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이중생활
사기의 달인 - 테레즈 윔베르
어두운 초상 - 앤서니 블런트
선과 악 - 페트로프 부부
위장자살한정치인 - 존 스톤하우스

제6부 은밀한 도착증
고통을 통한 쾌락 - 사드 후작
채찍과 시골 정원 - 퍼시그레인저
강박증에 사로잡힌 억만장자 - 하워드 휴스




스캔들의 심리학


정계 인물들의 비리

"저는 그 여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 빌 클린턴

1998년 1월 초의 저녁, 린다 트립은 전화를 걸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국방부에서 일하던 중에 자신처럼 백악관에서 밀려난 뒤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동료 직원을 알게 되었다. 모니카 르윈스키라는 이름의 이 아가씨는 트립에게 자신이 유부남, 그것도 미국의 대통령이자 자유 진영에서 가장 막강한 지도자와의 관계 때문에 전근된 것 같다고 말했다. 트립이 동정 어린 관심을 보이자 르윈스키는 더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트립은 르윈스키 몰래 녹음기를 사용해 자신과의 전화 내용을 테이프에 녹음하기 시작했다. 린다 트립은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에게 전화를 걸어 이 내용을 발설했고 미국 역사상 가장 광적인 스캔들이 터졌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스캔들이 터질 무렵 승승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1년 전에 제2임기를 무사히 시작한 상태였고 지지율은 70퍼센트를 웃돌고 있었다. 한때 대통령이 속한 민주당이 의회 과반석을 차지한 공화당과 정부 예산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 다수의 정부 업무가 운영 자금 부족으로 사실상 휴업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 문제도 잘 해결되었다. 국민들이 국립공원들이 문을 닫고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없으며 생활보조비 지급이 지연될 수 있음을 깨달으면서 여론의 아우성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외교 분야에서도 성공을 거두며 보스니아 내전, 아이티 내전과 북아일랜드 폭력 사태를 중재하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태에 새로운 협의를 꾀했다.


그러나 단정치 못한 일도 있었다.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 시절에 제니퍼 플라워스라는 여성과 오랜 기간 불륜을 맺어왔다(아니, 적어도 그렇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아칸소에서 폴라 코빈 존스라는 젊은 여성도 클린턴이 자신을 유혹했다고 고발했다. 클린턴은 1월 17일에 법정에 나가 존스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진술을 하고 심문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1995년 정부의 휴업 사태 때 클린턴 행정부는 보란 듯이 상당수의 백악관 직원들을 일시 해고했다. 이때 르윈스키를 포함한 무보수의 인턴들은 계속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스물한 살의 르윈스키가 집무실에 혼자 있는 대통령에게 서류를 가져다주었다. 훗날 그녀가 말한 바에 의하면, 그때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다음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대화를 주고받은 후에 그녀는 치마를 추켜올려 속옷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이내 구석진 곳으로 이동해 키스를 나누었고, 르윈스키는 그에게 펠라티오를 하게 되었다.


르윈스키는 밤 늦은 시각이나 주말에 거의 텅텅 빈 백악관에 몰래 들어오곤 했다. 엄격히 통제되는 백악관 내에서조차 이 일에 대해 아는 이들이, 적어도 인정하는 이들이 소수 나왔다. 결국 1996년 선거를 앞두고 백악관 인사과는 르윈스키를 국방부로 전근시켰다. 르윈스키는 어머니와 친구 십여 명에게 대통령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린다 트립과 열혈적인 검찰팀 덕분에 간통은 공공연히 알려지게 되었다. 검찰팀은 클린턴이 르윈스키에게 존스의 소송에서 증언할 때 거짓말을 하도록 지시했는가를 궁금해했다. 매스컴은 야단법석을 피웠고 모든 신문의 1면에 트립과 르윈스키의 사진이 실렸다.


이런 와중에 팔레스타인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가 클린턴을 방문했다. 미국과 팔레스타인의 기자와 카메라맨 몇 명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두 지도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찍을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처음 질문한 기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협상 재개 노력에 대해 물었다. 그 다음 질문자는 미국 기자였는데, 그는 클린턴을 향하여 대뜸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르윈스키 양과 정확히 어떤 관계였는지, 그리고 부재중 메시지를 포함해 서로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는지를 분명히 밝혀주시겠습니까?"


클린턴은 1월 22일에 PBS 방송의 간판 프로그램인 <뉴스아워>에 출연해 짐 레러와 한 시간 동안 대담을 나누기로 되어 있었다. 레러는 그날 정해진 대담 주제, 즉 곧 있을 대통령의 연두교서에 대해서가 아니라 성관계 의혹에 관한 질문으로 대담을 시작했다. 클린턴은 "성관계 사실은 없으"며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시킨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날 일찍 클린턴은 수석 보좌관에게 자신에 대한 혐의는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정적들이 파렴치한 공격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의 아내 힐러리도 클린턴의 말을 믿었다.


대통령 선거의 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연두교서는, 스캔들이 터진 지 일주일 후인 1월 27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클린턴은 스캔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경제 호황의 시기에 대해, 재정 적자를 줄이는 문제와 의료 관련 상정안에 대해, 그리고 교육과 환경에 대해 거론했다.


그러나 스타의 팀은 결코 르윈스키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르윈스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고 르윈스키의 변호사 윌리엄 긴즈버그는 르윈스키가 대배심에서 증언을 하면 기소를 면제해준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녀는 검사들의 압박에 못 이겨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생생히 증언했다. 르윈스키는 클린턴의 정액 얼룩이 묻은 푸른색 원피스를 가지고 있다고 했고 스타의 팀은 대통령에게 혈액 샘플을 요청했다. 검사 결과 논의의 여지가 없이 두 샘플은 일치했다. 


클린턴은 수개월 동안 질문을 교묘하게 피했지만 1998년 8월에 이르면서부터는 더 이상 얼버무릴 수 없었다. 그는 백악관에서 심문을 받았고 대배심원들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이를 지켜보았다. 로버트 비트먼은 이렇게 물었다. "대통령 각하, 모니카 르윈스키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셨습니까?"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친교를 갖긴 했으나 성교는 없었으므로 존슨의 재판에서 인정된 정의에 의거할 때 성관계에 해당되지는 않았다고 시인했지만, 오럴섹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트먼 검사는 클린턴의 변호사가 존스 소송의 진술서에서 "어떤 식으로든, 어떤 형태로나 형식으로든 육체적 관계는 없다"고 주장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그것이 완전히 잘못된 주장이었음을 동의하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클린턴은 미소를 지으며 그 유명한 대꾸를 했다. "그건 없다는 시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만약 지금까지의 과거 시점에서 없다고 해석하면 그건 틀린 주장입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전적으로 맞는 주장일 것입니다."


클린턴은 그날 아침에 결국 힐러리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클린턴이 그의 자서전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에서 언급했듯이, 그녀는 충격을 받고 격분했으며 그를 힐난했고 그는 6주 동안 소파에서 잤다고 한다. 그는 TV에 중계된 대국민 담화에서 회개와 변명을 늘어놓다가 스타 검사 팀에게 화살을 돌리며 그들이 한 사람을 파멸시켰다고 비난했다. 이 일을 계기로 형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은 이미 지난 8개월 동안 모니카게이트를 지켜본 터라 이제는 화제를 다른 데로 옮기고 싶어 했다.


특별검사 스타는 의회에 445쪽 분량의 보고서와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클린턴의 증언을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는 위증과 사법 방해 같은 기소 범죄들을 비롯하여 탄핵의 근거에 해당될 만한 사항들을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잇따른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은 클린턴에게 실망한 것 못지않게 스타의 조사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스타와 그의 팀이 정치 무대에서 클린턴에게 굴욕을 안기려고 기를 쓰는 모습에 분개했다.


11월 선거에서는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민주당이 클린턴의 스캔들로 인해 참패하기는커녕 하원에서 네 개의 의석을 얻었던 것이다. 하원의 공화당 의원들은 재빨리 탄핵안을 통과시켜 상원에 회부하여, 하원의 의석을 확보한 민주당 의원들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전에 탄핵 재판이 치러지도록 서둘렀다. 그러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헌법에 의거할 때 클린턴에게 유죄를 선언해 해임시키려면 100명의 상원의원 중 3분의 2를 넘는 표가 필요했다. 하지만 위증 혐의에 대해서는 45대 55표, 사법 방해에 대해서는 50대 50표가 나오면서 클린턴은 마침내 자유인이 되었다.



살인과 미스터리

개화된 전제군주 -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2세는 1729년 4월 12일에 포메라니아(현재 폴란드 영토)의 슈체친에서 태어났다. 제왕자였던 아버지는 프로이센 군대에서 고위 장교였고, 어머니는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요한나 공주로 스웨덴 왕가의 직계 후손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자유롭고 솔직하며 거침없는 성격으로 자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유혹의 기술을 배우게 하려는 의도에서 예카테리나 2세보다 열 살 많은 그녀의 삼촌과의 연애를 그녀 몰래 부추겼다.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여제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로서 사촌 관계에 있던 표트르 페도로비치 대공과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예카테리나 2세는 매혹적인 미소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법을 배웠지만 실제로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법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로 첫날밤을 치러야 했다. 표트르는 예카테리나 2세보다 경험이 더 없었다. 스물일곱인 그는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 그는 프로이센 군대를 열렬히 찬미하며 장난감 병정과 요새, 그리고 모형 대포들을 갖추어놓고 전쟁놀이를 했다. 부부 침대는 인형이나 장난감 또는 나무 병정들이 가득한 놀이터가 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성적 좌절을 달래기 위해 육체적 활동과 말타기에 몰두했는데 궁정에는 예카테리나 2세가 성적인 쾌락을 느낄 때는 말에 올라탈 때뿐이라는 식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추문은 엘리자베스 여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표트르의 아들을 고대하고 있던 여제는 몇 년이 지나도록 임신 소식이 없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그렇게 말이나 타니까 임신을 못하는 거라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이런 태도에 분개했고 차츰 마음을 모질게 먹게 되었다.


결혼하고서 6년이 지난 스물세 살에 이르러 그녀는 자신의 성욕을 죄고 있던 고삐를 완전히 풀었다. 그녀는 궁정의 시종이던 세르게이 살티코프를 시작으로 젊은 정부들을 수없이 거느리기 시작했으며 그 사실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정부를 두는 것은 남성에게는 흔한 일이었지만 여성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1754년 9월 20일, 예카테리나 2세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궁정 안의 누구도 표트르가 아기의 생부일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 무렵 결혼 생활은 끔찍한 상태였다. 표트르는 기회가 될 때마다 예카테리나 2세를 학대했다. 그는 자신이 황제가 되자마자 그녀를 처치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엘리바제타 보론초바라는 정부를 두었는데, 그녀는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퍼져 있는 데다 왕궁 안에서 최고의 추녀로 이름나 있었다. 게다가 시끄럽고 천박하며 술에 절어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장래에 가장 큰 위협 요소가 남편임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착수했다.


표트르는 대중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았던 반면 예카테리나 2세는 아주 민감했다. 1762년 1월 엘리자베스 여제가 사망하자 예카테리나 2세는 대중에게 사랑을 받게끔 행동했다. 그녀는 아주 과장되게 조의를 표했다. 이와는 반대로 새로 황제로 등극한 그녀의 남편은 광대처럼 행동하며 장례식 전의 철야 기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궁정 안에서 영향력이 높은 세 영역에서 강한 유대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군대에 놓은 연줄은 새로운 애인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였다. 오를로프는 전쟁 영웅이었고 그의 5형제가 근위대를 쥐고 있었다. 외교 부문에서 얻은 동맹자는 고위 외교관이자 교활한 정치인인 니키타 파닌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파닌에게 궁정에서의 고위직을 약속하면서 그 대가로 그의 정치적 식견과 영향력을 이용했다. 그는 내밀히 로비를 펼치는 한편 그녀가 여론의 시류에 뒤처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표트르의 정부인 보론초바와 자매인 예카테리나 다쉬코바 공주와 가깝게 사귀어 남편을 감시했다.


표트르는 새로 얻은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역할에 심취했다. 그는 군대가 자신의 장난감 병정들인 것처럼 여겼다. 그는 적군인 프로이센군 스타일의 제복과 규율을 강요하여 병사들에게 모욕감을 주었고,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대포를 쏘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렸다. 1762년 4월 24일, 표트르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프로이센에 점령지를 모두 반환하겠다는 조약에 서명했던 것이다. 러시아군은 격분했다. 그들은 7년전쟁(1756년부터 1763년까지 일어난 영국, 프로이센 연합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작센 연합과의 전쟁) 중에 막대한 손실을 겪으면서도 조국 러시아를 위해 그 모두를 감수해왔다. 그런데 표트르가 그들의 노력을 수포로 돌려놓고 말았다. 결국 군대 내에서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러시아 혁명은 집안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공식 만찬 자리에서 축배를 들라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예카테리나 2세에게 격분한 표트르는 그녀의 측근을 체포하며 그녀를 압박했다. 그녀의 나이 서른세 살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1762년 6월 28일의 이른 아침,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교외 외곽으로 나가 그리고리 휘하 연대인 이즈마일로프스키 근위대의 진영지로 향했다. 병사들은 그녀를 환호로 맞이했고, 그녀는 단 세 문장으로 극적인 연설을 했다. "나는 보호를 구하러 왔노라. 황제가 나를 체포하도록 명했다. 그가 나를 죽이려 할까봐 두렵다." 병사들은 달려와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입을 맞추며 충성을 맹세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곧바로 여제 취임 선서를 한 뒤에 기뻐하는 군중에 둘러싸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군 본부들을 향해 나아갔고, 그렇게 하여 그날 중으로 도시는 그녀의 수중에 들어왔다. 표트르는 아내를 상대로 실제적 군사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군대가 그를 버리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순순히 체포되는 굴욕을 치른 뒤 일주일 후에 사망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체면을 지킨 동시에 권좌도 지켰다. 그녀는 학식이 높고 총명했으며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 여러 개혁을 펼침으로써 대제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소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37년 동안을 뒷말과 스캔들에 시달렸다.



도망자들

그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 로만 폴란스키

로만 폴란스키는 동정을 받기에 충분할 만한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는 1933년 폴란드 태생의 아버지와 러시아 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당시 그들의 정착지이던 파리에서 태어났다. 폴란스키 가족은 유대인이었는데 로만이 자라던 시기는 아돌프 히틀러가 유럽을 지배하고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공식화하던 때였다. 그들은 아버지의 고향인 크라쿠프로 돌아가는 바람에 나치 침공을 정면으로 겪게 되었다. 폴란스키 가족은 나치군이 마음대로 유대인을 총살시키던 크라쿠프 게토(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에 갇혔다. 여섯, 일곱 살이었던 어린 로만은 무자비한 총살을 직접 목격했다.


나치가 게토를 정리할 즈음 가족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로만은 결국 시골로 보내져 한 농부 가족과 살게 되었다. 안전한 곳이었지만 먹을 것이 문제였다. 폴란스키는 1971년에 한 인터뷰에서, 숲에서 딸기와 버섯을 찾아다니고 꽃을 삶아 먹었던 시절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그는 열세 살이었는데도 여섯 살짜리 정도의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폴란스키는 키가 165센티미터까지밖에 자라지 못했다.


1969년 3월, 찰스 맨슨이 베니틱트 캐니언의 시에로 드라이브에 있는 폴란스키의 집을 찾아왔다. 전주인인 테리 멜처를 찾아온 그는 유명한 음반제작자인 멜처가 자신을 퇴짜 놓았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폴란스키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8월 8일 오후 11시경, 찰스 맨슨은 패밀리의 일원인 찰스 왓슨, 수전 앳킨스, 퍼트리샤 크렌빈켈과 린다 카사비안이 LA의 시에로 드라이브 10050번지에 사는 부자놈들을 죽이러 떠날 때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날 밤에 폴란스키는 영화 <돌고래 알파> 작업차 런던에 있었다. 집에는 큰 키에 관능적인 몸매, 긴 금발머리와 커다란 갈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아내 샤론 테이트와 그녀의 친구 네 명이 있었다. 당시 샤론은 출산 예정일을 2주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폴란스키의 집에서 총소리가 들렸지만 이후엔 조용했다. 이웃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가정부가 부엌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피로 얼룩진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샤론은 등과 가슴 쪽을 열여섯 차례 찔렸다. 이 소식을 들은 폴란스키는 망연자실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돌아와 몸을 숨겼다. 살인자들이 아직 잡히지 않은 상태라 자신도 그들의 표적이 될까봐 두려워서였다.


정확히 8년 후, 폴란스키는 열세 살 소녀 사만다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미 증언과 물증을 확보해 유죄 판결은 피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폴란스키는 법원으로부터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는 미국 시민이 아니라 프랑스 시민이었음에도 법원에서는 그의 여권을 몰수하지 않았다. 또한 촬영지 물색을 위한 해외여행을 비롯해 일을 계속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심지어 검사 측, 폴란스키의 변호사와 담당 판사는 판결과 관련해 서로 비공식적인 합의를 보아, 폴란스키가 비합법적인 성관계에 대해 죄를 인정하는 대가로 징역 90일에 처하기로 정해두기까지 했다. 판사는 폴란스키에게 캘리포니아 주 교도소에 가서 정신감정을 받도록 명령했다. 42일의 이 기간은 90일의 형량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감정이 끝나자마자 프랑스로 떠났다. 영국은 미국과 범인 인도협정이 되어 있으나 프랑스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주 길에 오른 후 폴란스키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1979년에 개봉되어 샤론 테이트에게 바쳐진 영화 <테스>(샤론이 폴란스키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토머스 하디의 소설책이었다)는 뛰어난 작품성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오스카상 최고 감독상 후보로도 지명되지 못했다. 그 후의 영화들은 평론가와 관객들로부터 대체로 냉혹한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2002년에 상영된 <피아니스트>는 달랐다.


이 영화는 평론가와 관객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전 세계에서 44개의 영화상을 휩쓸었다. 언론은 폴란스키의 업적을 찬양하는 동시에, 그가 성폭행을 저지르고 정의의 심판으로부터 도망쳤으며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가책을 느끼지 않는 점을 들추어냈다. 영화계 관련자들과 대중은 과연 그런 사람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 폴란스키에게 뜻밖의 지원자가 나타났다.


이제는 서른여덟 살이 된 사만다가 나선 것이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자녀의 엄마가 된 그녀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다음과 같은 칼럼을 기고했다. "나는 폴란스키 씨와 그의 영화가 작품성에 합당한 영예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실력은 나나 그가 내게 저질렀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과거의 사건을 그의 작품과 결부 짓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영화협회 회원들은 영화를 보고 표를 던져야지 그 사람의 인기를 따져 표를 던져서는 안 될 것이다."


사만다의 은총에 힘입어 할리우드는 폴란스키에게 <피아니스트>로 오스카 감독상을 수여했다. 폴란스키는 도망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시상식에서는 해리슨 포드가 로만 폴란스키를 대신해 상을 받았다.

 

 

은밀한 도착증

고통을 통한 쾌락 - 사드 후작

사드는 1740년 6월 2일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조숙한 아들에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사랑이나 애정을 표현하는 것의 중요성을 믿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역시 차갑고 정이 없었다. 그는 양성애자였는데, 아들이 보건 말건 개의치 않고 자신의 욕정을 거리낌 없이 채우곤 했다. 사드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으나 그의 헌신적 사랑은 보답받지 못했고, 이것은 그에게 뿌리깊은 영향을 미쳤다.


사드는 다섯 살 때 할머니와 다섯 고모들의 손에 맡겨졌다. 고모들 중 넷은 수녀였지만 난교 파티에 어울리곤 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동성애가 불법으로 정해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귀족들 상당수가 동성애를 즐겼는데, 사드의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후에 삼촌 아베 드 사드와 함께 살게 되는데, 아베는 성직자라는 신분이 무색하게도 정부를 두었으며 매음굴도 운영했다.   

 

열 살이 되는 해 그는 유명한 예수회 학교로 보내졌다. 그곳에서의 엄격한 종교 교육은 체벌과 함께 실시되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형태의 채찍질이 행해졌다. 사드는 이런 채찍질에서 강렬한 희열을 느끼게 되었고 차츰 그 시간을 고대하기 시작했다. 사드는 이 시기에 처음으로 고통과 쾌락을 결부시키게 되었으며 동성애를 경험했다.


그는 열다섯 살이 되는 해에 일류 사관학교로 전학해 근위 경기병에 들어갔다. 그러다 7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용감하고 늠름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7년 전쟁 후 사드는 군직을 그만두었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유명한 여배우들을 따라다니거나 창녀들과 성적인 실험을 하면서 보냈다.


사드의 아버지는 기복이 너무 심한 아들이 걱정되어 서둘러 아들과 르네-펠라지 드 몽트뢰유 부인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사드와 펠라지는 1763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고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사드는 아내를 설득해 함께 가든파티를 열었다. 이 파티는 훗날 온갖 변태 성행위, 특히 그룹 섹스와 동성애 성행위 등을 거행하는 모임이 되었다. 그러다가 1763년 10월, 마침내 사드는 첫 번째 대형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었다.


장 테스타르 부인은 매력적인 창녀였다. 사드는 그녀의 호의를 얻어 그녀를 임대해놓은 아파트로 데려갔다. 그녀가 카톨릭교도라는 이야기에 자제력을 싹 잃은 사드는 그녀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으면서 성찬배와 십자가를 가지고 성행위를 했다. 그녀는 두려움과 혐오감에 떨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다음날 아침에 경찰에 그를 신고했다. 결국 열흘 후에 마레 경감이 사드를 체포해 그를 뱅센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마레는 사드의 행동에 경악한 나머지 도시의 모든 매음굴 포주들에게 사드에게 여자들을 보내지 말도록 경고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드를 예의주시하면서 그 뒤로도 수차례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집어넣었다.


1767년 1월에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부터, 다시 말해 그의 도를 넘는 행동을 억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면서 사드는 점점 더 잔인무도해졌다. 그는 자신의 성 라 코스트를 새롭게 고치고 방 하나를 성행위에 쓰이는 장난감 전용 방으로 만들었다. 사드의 행동은 로즈 켈러를 폭행한 일로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더욱 심해졌다.


1772년은 사드에게 불운한 해였다. 7월의 모임이 화근이었다. 그가 제공한 최음제를 먹고 일부 손님이 심하게 탈이 난 것이다. 그중 한 명인 마르게리트 코스트는 모임에서 독약을 먹었으며 강간과 동성 성관계도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이번에는 동성애 죄로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는 도주 길에 올랐다. 반년 후 그는 사르디니아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모범수처럼 행동하며 간수들의 경계를 늦추어놓고 1773년 4월 30일에 탈출했다.


그는 설득력을 십분 발휘해 아내 펠라지가 자신을 다시 받아주도록 했다. 하지만 곧 예전으로 돌아가 아이들의 순수함을 타락시키는 데 매달렸다. 1774년 6월과 8월 사이, 그는 아내를 이용해서 성적 유희의 상대로 데리고 놀 십대 소녀 여섯 명을 구했다. 그는 수배자의 처지인 데도 소녀들을 성에 가두어 자신의 첩처럼 다루었다. 이 일이 그중 한 소녀의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위험해지자 펠라지는 소녀들을 근처의 수도원으로 보냈고 사드는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2년간 숨어 지냈다.


1777년 2월 13일, 마레 경감은 사드를 붙잡았다. 사드는 강간, 고문과 수간에 대하여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징역 13년형에 처해져 뱅센에 갇혀 있다가 1784년에 바스티유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펠라지는 마침내 남편의 기벽에 넌더리가 나서 이혼을 신청했다. 사드는 이 투옥 기간에 다수의 포르노 소설을 집필하는 데 열중했다.


1790년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 사드는 국민 공회에 극좌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시민 사드로 변신해 중추적 혁명가 중 한 명인 마라를 칭송하는 글을 씀으로써 프랑스혁명의 절정기에 영리하게 처형을 면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쓴 포르노 소설들 때문에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1년에 『쥐스틴』『쥘리에트』를 읽은 후 사드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그는 처음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요새로 보내졌고, 급기야 1803년엔 정신이상 선고를 받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드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일각에서는 그를 성적 자유 및 정치적 자유의 선구자로 여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를 초현실주의, 정신분석학과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프랑스 문학 역사상 최악의 타락자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가 이처럼 극심하게 견해를 양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가 놀랍고 왕성한 독창성의 소유자임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으로서 거의 모든 것을 시도해봄으로써,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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