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

Homo Aestheticus

   
엘렌 디사나야케(역자: 김한영)
ǻ
예담
   
25000
2009�� 07��



>& ■ 책 소개
예술이 끊임없이 진화해 온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라는 ‘진화미학’을 원시부터 문명사회에 걸친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통해 입증한 책이다. 저자는 예술이 문화의산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과 인간이 왜 선천적으로 미적이고 예술적인가를 다양한 이론적·실험적 증거를 가지고 밝혀냈다. 그리고 이렇게미를 추구하는 인간을 ‘미학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로 명명했다.


& 오늘날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명하게 갈린다. 특히 예술이 선택받은 소수의전유물이라는 견해 혹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장식물이라는 생각은 예술에 대한 오해를 낳고, 나아가 인간에게 의식주와도 같은 예술을 박탈하고 예술성발휘를 막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책은 예술은 말하기, 일하기, 사회화, 사랑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행동처럼 우리가 장려하고 개발해야 할필연적인 행동이며, 이를 개발하는 인간만이 도태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예술의 회복, 인간의 예술 본성을 잃지않는 미학적 인간의 귀환을 바라고 있다.


■ 저자 엘렌 디사나야케(EllenDissanayake)
원시사회부터 문명사회에 걸친 폭넓은 연구를 통해 인간이 선천적으로 미적이고 예술적임을 밝혀 온인류학자이다. 그녀는 연작 『예술의 존재 이유(What Is Art For)』 『미학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Aestheticus)』『예술과 정교(Art and Intimacy)』에서 예술은 수백 만 년에 걸쳐 진화해 온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라는‘다윈주의 미학’을 다양한 이론적·실험적 증거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예술이 선택받은 소수의 전유물이라는 견해, 혹은 무의미하고불필요한 장식물이라는 생각이, 인간에게 의식주를 박탈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임을 강조하며 진정한 예술의 회복을 주장한다. 그녀는 현재 뉴욕의뉴스쿨대학, 파푸아뉴기니의 국립예술학교,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 역자 김한영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고서울예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은 『빈 서판』『본성과 양육』『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사랑을 위한과학』『디지털 생물학』『이머전스』『미국의 거짓말』『마더 나이트』『갈리아 전쟁기』 등이 있다. 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부문을수상했다.


■ 차례
1995판 서문
초판서문
감사의 글


& 1장 그 많던 호모에스테티쿠스는 어디로 갔나 - 다윈주의 미학의출발
2장 예술이 주는 흥분과 쾌감은 무엇인가 - 생물학적 욕구 충족으로서의 예술
3장 예술의 핵심은 무엇인가 - 특별화하기의욕망
4장 예술은 자연의 정복인가 -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넘어서
5장 예술은 향상의 수단인가 - 인간적인 예술
6장 예술은어떻게 미적 반응을 일으키나 - 감정이입의 재고찰
7장 춤추고 노래하고 일하는 당신이 호모 에스테티쿠스 - 미학적 인간의 귀환 출처와주석


& 주석
참고 문헌
찾아보기
사진 출처
옮긴이의글





미학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


초판 서문

아프리카 대학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그곳 교직원들이 옷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당황하곤 한다. 교직원들은 조끼와 양복을 입고, 금시계를 착용하고, 심지어 구두에 광을 내 신고 다닌다. 그들의 말쑥한 차림과는 대조적으로 서양 사람들은 후줄근하고 덥수룩한 모습에 주름진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맨발에 끈 슬리퍼를 신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이 차이는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유행을 따르는 복장은 이목을 끌려는 욕구를 나타내는 것이고, 평상복은 편안한 것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 주거나 부나 지위의 과시욕에 대한 떳떳한 경멸심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복장을 갖추는 이유는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부락 사회에서 비롯된 믿음, 즉 차림새와 의복에 주의를 기울이는 공손함과 세련됨이라는 인간의 기본 미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공식 모임에 참석하면 외양의 호화로움과 위험을 확인할 수 있다. 공식 모임에서 그들은 남녀 모두 나풀거리는 레이스와 밝게 프린트되거나 레이스처럼 화려한 직물로 만든 멋진 의상을 입는다. 하나의 미적 행위로서 옷을 갖춰 입는 모습, 즉 자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행위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아프리카 후손들의 특징으로 존재한다. 미국 문화에서는 교회에 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서 그런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미국 백인들은 자연 환경, 천연 섬유, 자연 식품 같은 자연적인 것을 열심히 찾고 신성시한다. 우리 사회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거의 완벽하게 고립시킬 수 있는 정도로 자연을 통제하는 과학 기술이 발달해 있다. 우리의 발이 맨땅을 밟거나, 우리의 얼굴이 가공 처리되지 않은 공기 혹은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쐬거나, 우리의 눈이 조작되지 않은 광경을 보거나, 우리의 귀가 전자적이지 않은 소리 또는 기계적이지 않은 소리를 듣는 경우가 좀처럼 없을 지경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자연적인 것에 목말라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자연적인 것을 신비하고 희귀한 사물과 경험처럼 생각하고 경의와 경건한 관심을 표한다.


내가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즉 미학적 또는 예술적 인간에 대한 연구를 이렇게 상반된 태도의 예로 시작하는 이유는, 그 속에 예술은 어디서 그리고 왜 오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 개의 결정적 열쇠가 압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주목할 만한 열쇠는, 개인들과 문화들은 실천하고 숭배하는 대상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열쇠는 종종 자연적이라 불리는 것(주어진 것)과 최소 수십만 년 동안 우리 인류의 특징이었던 문화적인 것(인간이 부과한 것) 사이의 관계, 또는 본래적 긴장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중요한 열쇠는 다른 어떤 생물종보다 인간은 색다르고 특별한 것에서, 즉 평범하거나 일상적인 틀 밖에서 매력을 보고, 그래서 그것을 경험하고 더 나아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각별히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언뜻 보기에 예술 및 그와 관련된 미적 태도들이 사회마다 크게 다르다는 사실은 그것이 생물학적이거나 자연적(나는 이 점을 증명할 것이다)이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학습되거나 문화적 기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언어에서 유추할 수 있다. 아이들의 언어 학습에서 비록 각 아이들은 나고 자란 곳이나 양육하는 사람들의 특정 언어를 배우지만, 말을 배우는 것은 모든 아이가 가진 보편적이고 선천적인 능력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자연적, 보편적 성향이고, 이 성향이 단지 춤, 노래, 연기, 시각적 표현, 시적 화법 같은, 문화적으로 학습되는 특성으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의 가장 현저한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사회가 예술과 막대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질을 소유하는 법이 거의 없는 유목민도 보통 자신의 작은 소유물에 장식을 하고,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특별한 행사를 위해 공들인 시적 언어를 사용하고, 음악과 노래와 춤을 만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회는 서양에서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들을 적어도 한 가지는 행하고, 각 사회의 많은 집단들이 예술에 가장 큰 노력을 쏟아 붓는다. 예술을 만들고 즐기는 이 보편 특성은 인간의 중요한 욕구나 필요가 예술에 의해 표현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지난 백여 년에 걸쳐 인간과 예술 사이에는 뚜렷하고도 점진적인 분리가 진행되어 왔다. 이전 세대들에게 예술은 신성하고 신비로운 두드림이었다. 그 후 예술은 투사된 소망(정통 프로이트 이론), 상부 구조(유물론 철학)처럼 개인적 사물이나 문화적 산물로 강등되었다. 오늘날 예술은 인간과 더욱 더 멀어져, 표상, 모사본(원본과의 관계성이 단절된 새로운 이미지로, 그 자체가 또 다른 실재가 되며 이를 바탕으로 재현태를 생성해 낼 수 있는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짐),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발견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친밀성은 예술이 인간의 삶에 대단히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예술은 결코 주변적인 것, 역기능적인 것, 사소한 것,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가장 진지하고 필수적인 관심사의 일부였다. 만약 오늘날 예술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단지 그 개념의 잘못된 형이상학적 지위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현대 예술과 현대의 삶은(근대적 형태든 근대 이후의 형태든) 철학, 사회학, 역사, 인류학, 심리학 또는 정신분석학의 관점보다는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예술이 인류에게 근본적이라는 선언이 단지 정치적 수사나 희망 사항으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우리는 지난 3,4백만 년 동안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한 인간 본성을 이해하고 그 틀 안에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예술의 생물학적 기원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예술이 무엇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많던 호모에스테티쿠스는 어디로 갔나 - 다윈주의 미학의 출발

동물 분류군에 따르면 사람과(科) 원인(原人)은 아주 최근인 약 4백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4백만 년 중 40분의 39의 기간 동안 우리는 비록 점진적으로 진화했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똑같은 환경에서, 기본적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대략 스물다섯 명의 소규모 집단을 이루고 사바나를 방랑하는 수렵 채집인으로 살았다. 문화적 다양성이 출현한 것은 아주 최근이어서, 기본적으로 균일한 그 환경과 생활방식 속에서 390만 년 동안 우리에게 일어난 것들이 지금도 우리의 가장 깊은 본성을 건드리고 가장 강렬한 감정들을 고조시킨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래된 표현을 인용하자면, 진화의 환경으로부터 인간을 제거할 수는 있지만, 인간에게서 진화의 환경을 제거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존재 양식에 대해 관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철학적․역사적 견해들 그리고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그 견해들이 내놓은 해답들은, 애처로울 정도로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간 본성을 신, 사회, 문화의 산물로 생각하지만, 종중심적 입장은 정반대의 관점에서, 신, 사회, 문화가 이미 존재하는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필요와 잠재력에서 나온 산물, 해답, 구현물이라 주장한다. 먼저 이 사실을 인식한 후에야 우리는 원한다면, 문화적 차이를 고찰하고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의 사회생물학 이론에서는 인간 개인은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인정한다. 지금까지 법률, 경제, 정치, 윤리 또는 범죄학 분야에서 인간의 행동과 진화에 대한 연구들은 공격성과 지배에 우위를 두어 왔다. 살인, 강간, 전쟁, 성 갈등, 독재 같은 주제들 그리고 시기, 경쟁심, 지위 획득, 사기 같은 특성들이 단골 메뉴였고, 그 결과 사회생물학의 기본 법칙에서 개인의 자기 이익 추구 인간사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황폐한 측면이 너무 쉽게 부각되었다.


아무리 이것이 엄연한 사실일지라도, 우리는 인간의 진화에서 한 집단을 이루는 개별 구성원들 사이에 협동, 조화, 통일을 향상하기 위한 행동 수단의 발전 역시 공격성과 경쟁심의 발전 못지않게 중요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예술은 제의, 놀이, 웃음, 이야기, 일치된 동작, 자기 초월적인 무아의 감정 공유 등과 협력하면서, 진화상으로 개인적 이해의 충돌 못지않게 우리의 인간성에 고유하고 현저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나처럼 다윈주의적 견해 또는 종중심적 견해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인간은 진화하는 동안 다른 동물보다 본능적 반응에 덜 의존하게 되었으며, 언어, 관습과 신앙, 전통적인 작업 방식, 세계의 본질 등에 대한 설명 등을 갖고 있는 문화적 환경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그 밖의 무엇인지 또는 자기 자신을 그 밖의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상관없이, 인간도 동물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서 출발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다른 동물들도 종종 놀라운 일반화, 추상화, 도구 사용, 소통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이런 능력 면에 있어서 인간이 비록 대단히 우수하긴 하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져 발전한 것이 아니고 다른 동물들이 보여 주는 능력들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심지어 몇몇 하위 동물들이 문화라고 부를 만한 것의 원초적 형태들을 소유하고 있음이 입증되기도 했다.


모든 동물이 그렇듯이 인간도 진화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지난 10만여 년 동안 생각하고 말하고 작업을 수행했던 능력을 처음부터 항상 갖고 있진 않았다. 인간의 그런 능력들은, 우리의 직립 자세와 정교한 손재주, 친구들과의 군집성, 낯선 자들에 대한 의심처럼 생물학적 적응으로부터 생겨난 유용한 적응 형태인 것이 분명하다.


종중심적 견해는 또한 문화 발전이 현저해진 이후의 짧은 기간에 비해, 인간의 생물학적 형태, 해부학적 구조, 행동을 담은 인간의 그랜드 캐니언이 얼마나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졌는지를 인식한다. 사실 문화나 문화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진화의 과정 중에 발생한 행동상의 적응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문화적 환경을 잘 수용할 수 있도록 인간은 타인과 유대를 맺고, 남을 모방하고 즐겁게 해 주기를 원하고, 동료들의 믿음을 받아들이고, 외부인과 그들의 방식을 거부하고 의심하는 유전적 경향들을 갖고 태어난다.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은 삶에 필요한 것들을 배울 때 선천적인 자원에 덜 의존하고 동료들에게 훨씬 더 많이 의존하지만, 분명히 동료들로부터 배우는 선천적 성향과 어떤 것들을 다른 것들보다 더 쉽게 배우는 선천적 성향을 타고났다. 문화와 문화적 행위는 인간 특유의 이 생물학적 성향 또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이다. 가장 신뢰할 만한 입장은 본성과 양육, 유전자와 환경 중 하나를 선택하는 입장이 아니라, 둘 다 우리의 인간성을 형성하는 데에 필연적이고 불가분하게 기여한다고 보는 입장일 것이다.



예술의 핵심은 무엇인가 - 특별화하기의 욕망

예술 행동의 깊은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 1백만 년 내지 4백만 년 전에 존재했던 초기 원인이 소유하고 있었을 행동 경향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조상인 그 원인은 두 다리로 걷고,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소규모 유목 집단을 이루고 살던 사람과 동물이다. 그들은 식량을 사냥하고, 채집하고, 청소하고(음식찌꺼기를 먹고), 채집하고 살다가, 기원전 1만 년 무렵부터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 농업 사회를 이루고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이 사람과 동물의 진화 과정 중 어느 시점에서 특정한 행동 경향, 즉 그것을 소유한 개인에게 생존에 도움이 되고(그 연장선상에서, 구성원들이 그것을 소유한 집단에게도 도움이 되고), 그렇지 못한 개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 경향이 출현했을 것이다. 예술의 이 핵심 또는 공통분모는 오늘날의 예술과도 양립하지만, 또한 우리의 사람과 조상의 특징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예술의 생물학적 핵심, 즉 모든 인간의 행동 골간에 깊이 채색되어 있는 그 염료는, 내가 특별화하기(making special)라 명명했던 것이다. 복잡한 개념을 명명하거나 요약하기 위해 사용되는 중요한 표현들(쾌감 욕구 원칙, 적자생존)이 그렇듯이, 특별화하기도 공을 들이지 않거나 맥락이 없으면 시시하고 애매하게 들릴 수 있다.


나의 명제는 "세계 모든 곳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세속적이거나 평범하거나 자연적인 질서, 영역, 분위기, 존재 상태와 유별나거나 비일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질서, 영역, 분위기, 존재 상태를 구별한다"는 주장에 기초해 있다.


많은 인류학 연구들이 다른 세계를 묘사한다. 수많은 인류학 논문 중에서, 어떤 부족이 일상적 현실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굳이 신적인 차원은 아니더라도 어떤 특별한 차원에 대한 인식을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은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진화하는 인간은 어떻게 그리고 왜 일상과는 별도로 다른 세계를 지각하거나 창조하게 되었을까? 비일상적인 영역을 인정하려는 성향은 유희의 고유한 행동이다. 유희에서의 활동들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놀 때처럼, 우리는 유희의 가정성(假定性)을 융통성이 있고, 상상적이고, 혁신적인 행동들이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는 저장고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제의의 경우에도(동물의 제의화된 행동과 인간의 제의 모두에서) 평범한 행동이 형식화되고 과장되며, 그럼으로써 (특히 인간의 경우) 그것은 또 다른 의미와 무게를 획득하여 일상적인 것과 다른 것이 되고 특별해진다. 진화하는 원인은 어느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일상생활 속에서 유희와 제의에 익숙해져서 메타 현실 또는 가정적 현실을 인식하고 심지어 창조하는 선천적 경향을 지니기 시작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할 점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일상성과 비일상성을 구분하는 능력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동물에게는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중립적인 것과 극단적인 것을 구분하는 장비가 갖춰져 있다. 복잡한 생명체들뿐만 아니라 도롱뇽이나 모기도 일상을 벗어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는 변화, 즉 갑작스러운 그림자, 날카로운 소음, 예기치 못한 움직임 따위를 알아낸다. 결국 생명은 습관적인 생존에 일어나는 변화에 반응(또는 반응할 준비)하는 능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 외에도 많은 동물들이 유희를 하지만, 어떤 종류의 예술 또는 상식적인 작품을 창조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동물들의 형식화되고 제의화된 행동들이 희귀하고 비일상적인 자세, 향기, 소리, 동작을 사용하는 인간의 제의와 닮은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동물들에게는 널리 존재하면서도 마땅히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발생되지 않았다.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정교한 다른 세계들, 유희에서 발명되거나 제의에서 창조되거나 예술 속에서 조작되는 특별한 공상의 세계들을 인식하고 추구하도록 자극하거나 허용한 것은 인간의 어떤 측면이었을까?


우리와 관계가 있는-대략 25만 년 전의- 원인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지적이고 영리했다. 그들의 뇌는 다른 동물들보다 더 컸고 구조는 더 복잡했으며, 그 덕분에 부여받은 정신적 감정적 복잡성이 폭넓은 감정을 이끌어냈다. 다른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어제 일어난 일이나 내일 일어날 일과 무관한, 진행중인 현재에만 머물지만, 인간은 구석기 중기나 신석기 초기에 점차로 과거와 미래를 고통스럽게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만일 우리가, 예술을 장대하고, 희귀하고, 위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예술을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교묘하고, 도발적인 것으로 보는 서양의 협소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패러다임에서 한 걸음 벗어난다면, 더 크고 더 포괄적인 실체인 특별화하기(예술, 제의, 유희를 포함한다)를 하나의 보편적 행동으로 인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개념을 예술이나 심지어 특별화하기로서의 예술에서, 특별함을 만들고 표현하는 마음 기능으로 확대한다면, 우리는 예술들(특별화하기의 사례들)이 최초에 어떻게 생겨났고 예술들이 왜 미적 인간인 우리의 개인적 삶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생물종으로서의 진화에 필수적이었는지를 인간에 기초한, 인간과 유관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예술에 대한 종중심적 견해란 이름으로 제시하는 급진적인 나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진화론적으로나 사회적․문화적으로나 중요했던 것은 예술(지난 2세기 동안 들러붙은 그 모든 의미들이 내포된) 이 아니라 특별화하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양에서 최근까지 그 어떤 예술 또는 예술 작품에서든 사회적, 문화적, 진화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종이나 사회나 문화에게 중요한 어떤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떤 연극이나 연주회 공연이 유희인지 제의인지 예술인지를 판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 셋은 종종 상호 침투하는데, 왜냐하면 메타 현실과 특별함은 대개 유희(그리고 예술)와 관련된 자유, 예측 불능, 가장, 상상, 기쁨을 전제로 하거나, 제의(그리고 예술)의 특징인 형식성, 양식화, 공들이기, 황홀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춤추고 노래하고 일하는 당신이 호모 에스테티쿠스 - 미학적 인간의 귀환 출처와 주석

예술을 갈수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 만들고 감상함에 따라 예술은 분리된 어떤 것이라는 현대적 의미가 생겨났다는 점이 중요하다. 규모가 작고, 분업이 발달하지 않은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고 행할 줄 알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추상적인 예술 개념이 없었지만, 그래도 모든 구성원들에게 몸과 소유물을 장식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짓고, 연기를 함으로써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물론 전통 사회에서도 일부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재능이나 기술이 더 뛰어나다고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 소수의 특별한 재능이 다수의 예술 제작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과학 기술이 덜 발달한 사회에서 예술은 항상, 집단의 가장 심오한 믿음과 관심사를 표명하고, 표현하고, 강화하는 제의의 한 부분을 이룬다. 집단적 의미 부여와 단결력 강화의 수단으로서 예술이 결합된 제의는 집단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을 행하는 법이다.


물론 고도로 전문화된 우리 사회에서 예술은 독립된 전문 분야가 되었고, 제의를 비롯한 "이면의" 목적과 떨어져서 존재한다. 근대화된 사회 또는 "선진" 사회에만 존재하는 이 분리는 예술을 대문자 P의 문제(Problem)로 만들었다. 예술의 전문화가 남긴 유산과 예술 스스로가 최근에 삶과의 무관계성을 선언한 탓에 예술은 정부의 예산 편성 담당자에게 "불필요한 허식"으로 취급당한다. 예술의 전통적인 신성한 후광 그리고 예술과 특권층의 결합으로 인해 예술은 사회의 일부 계층에게 대단히 탐나는 일용품이 된 동시에 나머지 사람들에겐 신랄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이렇게 예술은 신성한 취급과 쓰레기 취급을 동시에 받고, 복잡한 해설이 필요한 대상인 동시에 완전한 무시의 대상이 되었으며, 경매장에서는 수백만 달러를 호가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해졌다.


예술이 무엇인가 또는 무엇으로 회복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인류 역사의 9분의 1(혹은 르네상스 이후로만 본다면, 80분의 1)이라는 짧은 기간 너머로 눈을 돌려 읽기와 쓰기를 배우기 이전에 미적 인간이 발휘했던 미적 성향의 증거를 찾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 존재하는 식자 이전의 사회들 그리고 모든 사회의 어린아이들을 관찰하면서 그로부터 발견한 정보를 구석기의 인공물들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들과 결합한다면, 예술은 오늘날의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보다 더 다면적인 동시에 더 단순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예술이 상이나 텍스트-재현-와 관계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이론가들과 우리의 공통된 전제다. 그러나 읽고 쓰는 접근법에서는 단어를 물체로 간주하듯이 예술을 객체-물체-로 당연시한다. 그러나 예술을 시각적 재현 또는 문학적 재현에 국한시키지 말고, 몇 가지 행동의 종류, 몇 가지 일하기 방식으로 간주해 보자. 근대와 서양 그리고 서양의 영향을 받은 사회라는 제한된 범위 너머로 눈을 돌릴 때, 그 사람들이 우리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부합하는 예술 같은 일들을 아주 많이 행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즉, 그들은 탐험하고, 유희하고, 모양 짓고, 꾸미고, 형식화하거나 질서를 만들었다. 이것은 인간 활동에 고유한 방법들이어서,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다.


예술을 일종의 행동-특별화하기의 사례-으로 간주하면, 예술을 객체나 성질로 보는 모더니즘의 관점 또는 예술을 텍스트나 일용품으로 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으로부터 강조점이 행위 자체(제작 또는 행하기와 감상하기)로 이동하게 된다. 행위에서는, 근대 이전의 많은 사회에서 객체는 기본적으로 제의 참여를 위한 기회이거나 제의의 장식품 역할을 한다.


특별화하기는 기초적인 인간의 성향 또는 욕구이다. 우리는 중요한 때에 특별한 음식을 만들고 특별한 복장을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말할 때 특별한 방식을 사용한다. 제의와 의례는 일상적인 삶을 모양내고 꾸며서 일상적인 것 이상으로 만드는 기회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전문화된 방법으로 열과 성을 다해 행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고 즐겁게 행하는 것을 과장하고 확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술, 즉 자신의 관심사를 특별하게 만드는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기초적이고, 전통 사회에서처럼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정상적이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들은 장려되고 개발돼야 한다.


예술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흔하고 도처에 편재되었다는 말은, 모든 기준이 창 밖으로 날아가고 어떤 기준이 들어와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것을 특별화한다는 것은 시간을 들여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인상적이고, 심금을 울리고, 만족을 주는 결과를 생산하기 위해 마음을 쓰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술을 통해 경험이 강해지고, 고양되고, 보다 기억할 만해지고 유의미해진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똑같이 의미 있거나 타당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의 예술 작품에서 이해하기 쉽고, 인상적이고, 심금을 울리고, 만족하는 느낌을 받는 데에는 문화적으로 획득한 것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부여받은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단지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과 삶을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이해하는 개인적 기초로서 종중심적 견해를 채택할 때 우리는 자신과 예술 제작이 자연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서양 사회는 예술적 행동과 반응을 장식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사치로 취급하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 본성의 필수 부분이다.


예술이 우리의 종적 특이성-인간의 인간성-에 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일단 인식한다면, 우리들 각자는 능률을 추구하고 나만 즐거우면 된다는 소비자 사회의 냉정하고 환원적인 실용주의 원칙에 사로잡히는 대신에,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삶의 질에 마음과 생각을 기울이면서 살 수 있는 권리와 정당성을 허락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예술적 행위들은 모든 사회, 모든 계층에 존재한다. 예술 특유의 신성함과 자유보다 오늘날 더 절실히 필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인간의 보편적 선천성인 예술이 단지 예술계의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학교와 지역사회를 비롯해 사실상 모든 사람의 삶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지원받고 장려될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미국국립예술기금위원회(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뿐만 아니라 연방정부, 주 정부, 교육과 지역사회 발전을 담당하는 지방 부서들은 모든 국민이 예술-특별화하기-을 통해 개인의 삶과 공동의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처럼 개인의 삶과 공동의 삶이 취득하고, 소비하고, 해석하고, 문제 삼고, 파괴하고, 냉소적으로 거부하는 상황으로 흐르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느끼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적인 불만족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포스트 모던 세계에 대한 뿌리 깊은 반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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