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김열규
ǻ
비아북
   
14000
2008�� 09��






■ 책 소개
한국인의 죽음론과 인생론을 완성했다는 평을받고 있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한국인의 자서전』의 저자, 김열규 교수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 시골마을 북키드가 한국학의 석학이되기까지, 77년 세월 속에서 건져낸 참 독서의 세계, 그 세상을 읽는 기술을 담았다. 


크게 2부로 나눠져 있으며, 1부 "서(書)_ 책, 내게로 오다"에서는 저자의 자서전적인내용을, 2부 "독(讀)_ 읽기의 소요유(逍遙遊)"에서는 저자가 독자들에게 권하는 책을 풍부하게 읽는 법을 제시한다. 또한 그의 첫 고전 「언문제문」에서부터 『톰 소여의 모험』, 단테의 『신곡』,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릴케의 『말테의 수기』등 동·서양을 넘나드는 저자의 지식여행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요령 읽기에서부터 글의 메시지와 핵심을 잡아 작가가 유도하는 의미 잡기, 다양한 장르에서의 명확한 특징 찾기등 책 읽기의 노하우를 선사한다.


■ 저자 김열규
1932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학교국문학과를 거쳐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및 민속학을 전공했다. 서강대학교 국문학 교수,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명예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학’의 석학이자 지식의 거장인 그의 반백 년 연구인생의 중심은 ‘한국인’이다. 문학과 미학, 신화와 역사를 두루섭렵한 그는 한국인의 목숨부지에 대한 원형과 궤적을 찾아다녔다. 특히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한국인의 자서전』을 통해 한국인의죽음론과 인생론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 『메멘토 모리, 죽음을기억하라』『한국인의 자서전』『공부의 즐거움』『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한국의 문화 코드 열다섯 가지』『고독한 호모디지털』 외 다수가있다.


■ 차례
서문 - 탐독과 탐식, 그 짜릿한 지(知)적쾌락을 위하여
프롤로그 - 산다는 것, 읽는다는 것

Ⅰ. 서(書)_ 책, 내게로 오다
하나| 내 생의 첫 고전, 듣기_유년 시절
포에지의 싹이 트다_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내러티브의 미덕_할머니의 옛날이야기|한의 정서에눈뜨다_어머니의 제문 읽는 소리|천국과 지옥을 오가다_일요일의 듣기 교실


둘 | 낭독의 즐거움_ 아이 시절
제2의 탄생_내 삶의 유사시대가 열리다|보는 눈,읽는 눈_눈의 놀라운 역할|소리 내어 읽기_나의 목소리는 절규가 되어|탐독_세상에는 오직 나의 두 눈과 책뿐!|제3의 읽기_외워 읽기|누워읽기여 안녕!_나의 성을 갖다|마지막 조선어 수업_서러운 을사조약|신나는 웃음 읽기_코미디 입문|눈물과 함께 찾아든 울음 읽기_비극 입문|도둑읽기_“나는 의적이다”


셋 | 몰입의 유혹_ 소년 시절
8.15 해방_본격화된 문학 읽기|광복 학기_조국을향해 달려라|동맹휴학_도서관에서 보낸 달콤한 일주일|찬연한 사주팔자_읽기는 나의 운명|책은 또 하나의 세계_읽기로 희망과 동경을 키우다|친화력의읽기_“사랑해, 우린 하나야!”|방랑하는 영혼_신발의 의미를 읽다|읽기의 세 가지 신기술_되풀이 읽기, 돌려 읽기, 번개 읽기|차마 하지 못한이야기_깡패가 가르쳐준 교훈|나의 첫 번째 시_달콤 짭조름한 첫사랑의 맛


넷 | 책 읽기의 미학_청년 시절
영어 원전 읽기_전쟁의 폭음 속에서|단상집 읽기_그쾌적한 수면제의 맛|시도집 읽기_수영과 읽기 사이|두보 읽기_비참한 현실, 찬란한 시심|고독과 고통과 죽음 읽기_삶의 또 다른의미


다섯 | 농익은 책 읽기 _노년 시절
산책하듯 읽기_가다 말다 읽다 말다|나의 또다른 동반자_오랜 친구 같은 책들|달관과 체념의 읽기_노숙하게, 노련하게|노년에 찾아온 새로운 읽기_정성과 끈기로|완착을 향하여_끝이라는것


Ⅱ. 독(讀)_ 읽기의 소요유(逍遙遊)
하나 | 행복한지(知)적 놀이, 독서_ 요령 읽기
꼼꼼 읽기_창조적인 읽기로 통하는 문|클로즈 리딩_그게 뭔데?|꼼꼼 읽기와 클로즈 리딩_적게 넣고 많이씹어라|읽고, 읽고, 또 읽고_첫눈에 반한다는 것|속독과 숙독 사이_하나의 길에서 만나다|삼단뛰기와 장애물경주_읽기에도 비결이 있다|놀기 반읽기 반_책, 덮을까 말까|읽기의 쾌락주의_극과 극은 통한다


둘 | 카타르시스의 발견_의미 읽기
게임을 하듯이_실마리를 잡아라|물고기를잡듯이_하나도 놓치지 말라|이를 잡듯이_구석구석 뒤져라|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이_재미를 찾아라|사금을 캐듯이_까불고솎아내라


셋 | 골라 읽는 책의 유혹_ 장르 읽기
시 읽기하나_시의 멋, 시의 재미|시읽기둘_시의 구조|소설 읽기_알록달록 비단을 짜듯이|논설문 읽기_스스로 묻고 캐고 답하기


넷 | 내 것이 되어버린 책들_ 작품 읽기
도스토예프스키 『지하 생활자의 수기』_뻔한길은 싫어!|체호프 『내기』_돈으로는 살 수 없는 자유|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_나의 자화상|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_그 처절한 인간비극|릴케 『말테의 수기』_어느 도시민의 영혼|슈테판 츠바이크 『에빈스무스 전기』_편들지 말라, 혼자여라!


에필로그 - 책과 함께 우리가 될 그날을위하여




독서


프롤로그 - 산다는 것, 읽는다는 것

인생에는 무수한 가닥 길이 나 있다. 그 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무더기로 밟고 지나가서 반들반들 닳아빠진 길과는 무관한 길이 있기 마련이다. 가는 사람이 내딛는 걸음에 따라서 비로소 열리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생은 모름으로 시작해서 모름으로 이어지고 또 이어지곤 한다. 모르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일지도 모른다. 삶은 그런 것이다. 그러기에 삶은 앎이 되려고 무진, 무진 애를 쓴다. 삶이란 모르는 걸 하나하나 알아나가는 과정이다. 삶은 앎을 향한 행보(行步)이다. 아니, 아예 삶을 앎이라고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앎이란 무엇으로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한두 가지는 아닐 테지만 아무래도 읽기가 으뜸 중 으뜸일 것이다. 이건 읽기가 내게 심어준 신념이다. 읽기는 나를 위해서 세계 속으로 길을 안내해준다. 그래서 읽기는 아직 잘 모르는 삶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나침반이 되고 이정표가 된다.


우리들은 삶의 행보, 다시 말해 삶의 걸음걸이 그 자체로서 읽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삶은 앎이 되어간다. 누구든 인생론 한가운데 읽기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고, 그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읽기는 우뚝 솟아 있을 것이다.


내게 앎 없이 삶은 없다. 앎이 삶이고 삶이 곧 앎이다. 배워서 알게 되고 알아서 살게 되는 이치 또한 명백하고, 읽기 없는 배움이 없을진대, 읽기는 배움과 앎과 삶의 주춧돌이고 선봉장이다.


동화를 듣고 읽지 않았다면 나의 꿈은 얼마나 허전했을까? 물으나 마나이다. 동화 덕분에 나의 꿈은 움트고 자랐다. 소년이 된다는 것은 동화가 소설로 바뀐다는 의미였다. 『엄마 찾아 삼만 리』『소공자』『소공녀』없는 나의 소년기는 길 잃고 집 잃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레미제라블』로 눈물을 배웠고 『이솝우화』로 웃음을 익혔다. 그러면서 나의 소년 시절은 희비쌍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 차갑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다는 것, 그래서 삶의 진실이 거기 어리곤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으면서 철이 들어가는 내가 대견하기만 했다. 더불어 웃음은 그 재미만큼이나 가르침도 여간 큰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챘을 때 훌쩍 조숙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청년 시절에 이르는 나의 삶의 궤적에서 읽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곤 했다. 무엇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나의 그 무렵 행적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건 그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50년 넘게 절박한 한국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온 것도 어머니의 「언문 제문」과 여러 문학작품의 영향이 컸으며, 16년 전쯤 홀연히 낙향을 결심했을 때도 소로의 『월든』을 길잡이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읽기는 내게는 삶이었다. 그건 날이 갈수록 전에 없이 더욱더 진실해져가는 진실이다.



서書_ 책, 내게로 오다

한의 정서에 눈뜨다_어머니의 제문 읽는 소리

시집간 후 이른바 출가외인이 된 딸이 친정 부모의 초상에 와서 상청(喪廳)에서 읽는 글을 경상남도 중서부에서는 언문(諺文) 제문(祭文)이라고 부른다. 언문 제문은 방금 돌아가신 분의 넋을 달래고 위로하는 위령(慰靈)의 역할과 돌아가신 이의 전기(傳記)를 겸하게 된다. 한평생 이렇게 저렇게 궂은 일, 어려운 일, 흉한 일을 이기면서 살아온 그 삶의 자취가 그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편히 저승길 가시라는 말로 마무리되게 마련이다.


딸은 어머니의 제문을 읽으며 이제 막 여읜 어머니를 애도하고, 상청 앞에 엎드린 자신을 서글퍼한다. 이렇게 언문 제문은 모녀가 살아온 자취를 새삼 눈물로 얼룩지게 한다. 마루며 뜰에 모여든 아낙들은 이 제문을 들으며 일순간에 울음바다를 이루고 만다.


어머니는 작은 궤짝 하나 언문 제문을 보관하고 계셨다. 친정과 시가 양쪽에서 전해진 언문 제문도 물론 거기 섞여 있었고 어쩌다 손에 넣은 다른 집안의 제문도 끼어 있었다. 또한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대필한 언문 제문도 더러 들어 있었다.


적적한 밤이면 어머니는 그 언문 제문들을 꺼내 읽곤 하셨다. 겨울밤에는 그런 일이 더 잦았다. 어머니는 때론 낭랑하게 때론 처연하게 마치 혼잣말을 하듯, 아니 속으로 웅얼대듯 제문을 읽어가곤 했다. 미처 잠들지 않은 나는 눈을 감고는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떨 때는 자다 깨서는 잠결인 듯 꿈결인 듯 그 소리에 흠씬 젖어들기도 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어머니가 낭독하신 것이라 더 넋을 읽은 것 같다. 서러움의 잔잔한 울림이, 애달픔의 고즈넉한 설렘이 어린 나를 사로잡곤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읽기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온 가슴으로, 온 마음으로, 그리고 온 감각으로 읽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서와 감정의 물살을 이루면서 내게 다가와 나를 깊이 잠기게 했다. 때로는 억눌린 흐느낌이 가만가만 전해져와 이불을 뒤집어쓴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렇게 어머니가 숨죽여 읽으시던 언문 제문 소리는 어린 시절 나의 밤 시간을 적셔주었고, 그렇게 읽기와 듣기는 점점 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갔다.


훗날 시를 읽게 되면서, 가령, 김소월을 비롯해서 박목월이며 서정주의 작품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로 애달픔의 시정을 익히며 내 어머니가 읽으시던 언문 제문의 여운을 느끼곤 했다. 어머니가 들려주던 언문 제문은 내가 읽은 수많은 시에서 메아리치곤 했다.


8.15 해방_본격화된 문학 읽기

패전 후 일본인들의 이삿짐들이 오늘의 부평동 국제시장에서 경매에 붙여지는 일이 잦았다. 당시 고리짝이라고 부르던 짐들이 수도 없이 경매에 붙여졌다. 일본인들이 한자로 行李라고 쓰고 고리라고 읽던 것들이었다. 고리는 긴 나뭇가지나 질긴 넝쿨 같은 것으로 돗자리 엮듯이 만든 일종의 통 같은 것인데 위아래 두 짝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걸 미처 풀어보지도, 열어보지도 않은 채 경매를 해댔다. 낙찰이 되면 경매꾼이 소리 질렀다.


"돗따!"


일본말로 뭔가를 땄다거나 손에 넣었다는 뜻이다. 돗따 한 사람이 고리짝 뚜껑을 열고는 비로소 내용물을 챙기곤 했는데 별별 것이 다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고리짝 안에서 더러 책이 나오면 재수에 옴이라도 오른 듯이 패대기쳤다. 우린 그걸 노린 것이다. 난데없이 돈벼락이 아닌, 책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덕분에 나는 꽤 많은 책을 공짜로 또는 아주 싸게 얻을 수 있었다.


경매장에서 얻은 책 중에는 뭐니 뭐니 해도 문학 책이 제일 많았다. 몇몇 일본 문인의 작품집이야 이미 학교에서 그 이름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으니, 반갑기는 해도 신기할 것은 없었다. 그러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한스 카로사, 앙드레 지드, 아나톨 프랑스, 도스토예프스키 등등과 무더기로 첫 대면을 하게 되었을 때 뭐가 뭔지 몰라도 가슴이 설레었다. 현장에서 별로 멀지 않은 집까지 그들을 더러는 가슴에 품고 더러는 겨드랑에 끼고는 날 듯이 걷곤 했다. 그것은 내게 비로소 시작된 서구 문학으로의 행보였고 전진이었다. 동화를 떠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제 바야흐로, 정든 소년소설들과도 작별하게 된 것이었다. 이제 그야말로 세기의 문호들을 대상으로 한 나의 문학 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정말 탐독했다. 정신이 나가고 넋이 나가도록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위대한 정신을 읽어내고 위대한 영혼을 읽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어슴푸레하게나마 들곤 했다. 그때 읽은 그들의 작품 대부분은 지금도 그 느낌은 물론이고 줄거리까지 훤하게 기억난다. 주인공들을 흉내 내듯이 내 인생을 엮어가고 싶었다. 그들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또 행동하기를 꿈꾸었다. 감정이입 정도가 아니었다. 인격이입이며 정서이입을 간절히 바랐다.


읽는다는 것은 아는 것도 아는 짓도 아니었다. 그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뭔가가 되는 것. 그렇게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걸 실감하곤 했다. 그것은 문학 읽기에서만 얻어낼 수 있는 위대한 경험이 아닐까 한다. 문학 작품은 새로운 인격이나 인성의 탄생을 위한 모태일지도 모른다.


작품을 읽는 중간 중간 눈을 감는 것은 바뀌어가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한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눈을 뜨고도 꿈을 꾸었다. 내 주위의 세계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달라진 내가 나도 잘 모르는 신세계를 거니는 모습이 감고 있는 눈망울에 비쳐졌다.


그것은 단순한 정서적인 또는 지적인 성장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건 새로운 무엇으론가 바뀌는 것이었다. 변신(變身)이었다. 나는 크눌프가 되고 토니오 크뢰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읽기는 나의 재창조였다. 아니 신생(新生)이었다.


그런데 그 신생을 부추기듯이 하늘이 기적을 내렸다. 어느 여름 날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웅덩이 주위에는 피할 곳이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데, 보다 만 책들에 억수같이 비가 퍼붓고 있었다. 순간, 나는 책들 위로 몸을 던졌다. 마치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이 온 가슴으로 책들을 감쌌다. 다행히 소나기는 서둘러서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때 달걀이라도 된 듯이 뭔가가 부화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부화하는 건 책이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 품은 것은 내 가슴인데, 품긴 책의 정기를 받아서 내 가슴이 새로 부화하고 있었다.



독(讀)_ 읽기의 소요유(逍遙遊)

놀기 반 읽기 반_책, 덮을까 말까

삼단뛰기가 아무리 장쾌하고, 장애물경주가 아무리 신난다 해도 늘 그런 식으로 책이며 글을 읽을 수는 없다. 때로는 놀기 반 읽기 반, 그렇게 책과 글을 대할 수 있다. 그러면 책이 금세 정겨워지고 다사로워진다. 아무리 겉모양이 모난 사각형이라도 그것이 주는 느낌은 둥그스름하게 푸근하다. 책장마다 정든 이의 손길이 느껴진다.


원칙적으로는,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에 넣고 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어서 입에 넣듯이 해야 하는 것, 그렇게 음식을 먹듯이 읽어야 하는 책도 있는 법이다. 숟가락, 젓가락 그 둘을 함께 놀리듯이 우리는 단거리경주식의 읽기와 마라톤식의 읽기, 이 둘을 다 해내야 한다.


그런데 읽기에는 여태 보아온 것 말고도 서로 상반되면서도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읽기 방법들이 또 있다. 놀기 반 읽기 반의 독서와 잠언을 섬기듯 하는 독서, 이 두 가지가 그렇다. 그중 어느 하나만 편애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의 것은 느릿느릿 산책하듯이 글을 읽는 것이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게 산책이다.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기분으로,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그래서 꼭 산책하듯 읽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래야만 잠언을 읽고 외우듯이 글의 가려진 속내가 겨우 잡히기도 하는 것이다. 잠(箴), 즉 침이 바르게 꽂히듯이 말이다. 읽기란 이렇게 절묘한 것이다. 읽기에서는 모순과 모순이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놀기 반 읽기 반의 독서!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놀이가 반이고 읽기가 반이라고 해서 업신여길 수는 없다. 얕잡아 보거나 깔볼 수도 없다. 그건 그것대로 독서삼매(讀書三昧)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일 기말시험을 앞둔 학생이 놀기 반 읽기 반으로 공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라면 얼마든 놀기 반 읽기 반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느긋함이 오히려 글의 숨겨진 경락(經絡), 이를테면 침놓을 자리를 드러내 보이고 그래서 글의 핵심을 잡아내게도 하는 것이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다는 것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책을 읽다 보면 책갈피 사이를, 그 행간을 눈으로 산책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책이 문득 마을 가까운 숲정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알맞게 우거진 그 오솔길을 뒷짐 지고 천천히 거닐 듯이 책 읽기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산책하듯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굳이 서서 읽자는 것은 아니다. 놀이 반 읽기 반은 누워서 하는 것이 천하일품이다. 팔다리를 펴고 편안하게 누워서 읽어야 제격이다. 그게 안성맞춤이다. 더러 사탕이나 쿠키 따위의 군것질거리를 지근지근 씹어댈 수도 있다. 가벼운 음악이 독서의 반주자가 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그러다가는 언제 책에 홀렸던가 싶게 베갯머리에 책을 엎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읽다 만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설핏 잠에 빠져도 좋다. 그럴 때 종이 냄새와 활자 냄새가 어루어진 그 실팍한 책 냄새에 풋잠이 익은 잠이 되었던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여름 한낮, 거기에 대청마루라면 익은 잠의 단내가 더 한층 절실했을 것이다. 아! 책이라는 그 기막힌 수면제여!


얼마나 잠에 빠졌던 걸까? 문득 눈이 떠진다. 길게 켜는 기지개라니! 몸이 가볍고 머리가 한결 상쾌하다. 몇 번 껌벅대니 눈도 사뭇 산뜻하다. 베갯머리에 엎어져 있던 책을 다시 집어 든다. 읽다 만 대목에 다시 눈을 박는다. 아! 그건 헤어졌던 임과의 재회와도 같은 것! 포옹하듯 책 읽기가 또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읽기 반 놀기 반의 책이야말로 독서 쾌락주의의 정수일지도 모른다.


체호프 『내기』_돈으로는 살 수 없는 자유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읽히지 않는 체호프(Anton Chekhow)의 단편 작품이 하나 있다. 그 줄거리를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대로 옮겨놓으면 다음과 같다.


작은 사교 모임에서 돈 많은 은행가와 젊은 변호사가 사형제도에 관해 논쟁을 벌인다. 은행가는 사람을 천천히 죽이는 무기형이 사형보다 더 고통스럽고 잔인하다고 주장하지만 변호사는 인간에게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며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한다. 감정이 격해진 둘은 내기를 하게 되는데, 변호사가 15년 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단 책 반입은 허용) 견딘다면 은행가가 거금을 주기로 한 것이다.


드디어 은행가의 집에 가짜 감옥이 만들어지고 변호사는 감금생활을 시작한다.


처음 일 년 동안 변호사는 소설 등 가벼운 책을 주문한다. 그 다음 일 년은 술을 주문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철학책을, 그 후에는 성서를, 그 후에는 종교 서적을, 그리고 마지막 3년 동안은 온갖 인문서, 과학서, 철학서 등을 주문한다.


드디어 15년이 되기 하루 전날, 그동안 무리한 투자로 재산을 탕진한 은행가는 변호사에게 약속한 돈을 주면 자신이 파산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변호사를 살해하려 감옥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변호사의 메모를 발견한다. 거기에는 오늘이 가기 전에 탈출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메모를 읽고 은행가는 자괴감에 빠진다. 다음 날 아침 변호사는 사라지고 은행가는 그 메모를 챙겨 금고에 소중히 보관한다.


단편이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인간 존재만큼 무거운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인간의 자유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일까, 아니면 절대 가치인 생명에 미치지 못하는, 부차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을까?


작가 체호프는 이 무거운 질문을 변호사와 은행가의 무모한 내기로 풀어낸다.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변호사와 자유의 가치를 역설하는 은행가. 그들은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을 걸고 내기를 벌인다. 그리고 변호사가 사설 감옥에서 썩어가는 그 긴 시간들이 마치 구도의 과정처럼 그려진다. 자유를 빼앗긴 채 억압받는 삶조차도 살아 있음으로 의미 있다는 생각을 하던 그였지만 점차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다시 삶의 이유를 찾고자 철학에 매달리고,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면서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 그런 결론을 내린 그가 내기의 마지막 날 탈출을 감행하는 대목을 읽으며, 의외의 상황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요즘 잘나가는 드라마보다 더 충격적인 반전이었기 때문이다.


작가인 체호프는 창작 활동에 위기가 오자 죄수들의 유형지인 사할린 섬을 찾아가 제정 러시아의 감옥을 조사했다고 한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새로운 시대가 닥쳐오는 과도기를 겪고 있었다. 봉건제도와 농도(農奴) 제도가 무너져가는 한편에서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민들은 농노제도의 압제에 여전히 시달리는 한편, 새로이 대두한 자본가들의 착취에도 시달려야 했다. 두 겹의 고난과 고난에 갇힌 꼴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러시아 소설을 읽어보면 가혹한 형벌에 희생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사소한 잘못으로도 사형에 처해지거나 유형을 떠난다(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도 유형에 처해졌었다). 변호사와 은행가의 내기도 이런 시대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린시절에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하루만 참으면 부자가 될 텐데, 왜 탈출하는 거야라는 생각에 가슴을 치기도 했고, 작가에게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기왕 14년하고도 364일을 감옥에서 보냈으니 하루만 더 버티고 돈이라도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물론 은행가가 변호사를 죽이러 오지만 그런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치기 어렸던 것 같다.


자유를 빼앗겨보지 않으면 자유의 소중함을 알 수 없다. 자유란 게 공기와 같아서 마음껏 향유하고 있을 때는 그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자유를 빼앗기면 삶 그 자체가 의미 없어진다. 더 이상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물질에 자유를, 인간의 가치를 팔아넘기지 않은 변호사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서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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