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동양철학

   
이동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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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
   
25000
2005�� 12��



>■ 책 소개
서구 근대문명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동아시아 국가의 성공적인 근대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철학의 기본적인용어, 개념, 쟁점과 분야에 대한 공동의 이해와 언어가 성립되지 않은 현실을 안타까워 한 소장학자들이 ‘우리 시대의 동양철학은 어디에 있으며어디로 가는가?’라는 명제를 60개의 키워드에 담아 살펴본 책이다.


전체를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어 제1부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제목으로 새로운세기에 동양철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내용으로 인, 의, 도, 천, 성인, 자연, 음양 등 동양철학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개념들의 본뜻은어떻게 풀이될 수 있으며, 오늘에는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를 알기 쉽게 제시한다. 제2부는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으로 21세기의 지적화두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 인간복제, 디지털, 생태, 몸 등의 개념들이 동양철학적 입장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분석되고 있는지를살펴본다.


■ 편저자 이동철·최진석·신정근
이동철
은 고려대학교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재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삼국통일과 한국통일』(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는 『기흐르는 신체』『오행의 새로운 이해』 등이 있으며, 『세계 지식인 지도』『위대한 아시아』를 기획한 바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현대중국의 미학대토론」「공자사상에서 ‘학’의 의의」 등이 있다. 

최진석은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중국 북경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부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노자의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등이 있고, 역서로는 『노장신론』『장자철학』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성현영의 장자소 연구」 등이 있다.


신정근은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현재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동양철학의 유혹』『동중서: 중화주의의 개막』『사람다움의 발견』『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등이있고, 역서로는 『백호통의』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중화주의와 ‘중국 철학’의 동행」「도덕원칙으로서 서(恕) 요청의 필연성」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일러두기


제1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공空조은수
공사公私 박재술
귀신鬼神 박성규
기氣 김시천
도道 한형조
리理 손영식
리利 임현규
명命김낙진
명名 정재현
무위無爲 최진석
미美 조민환
사단칠정四端七情 안영상
선禪 신규탁
성인聖人오석원
성정性情 조남호
신도神道 박규태
신선神仙 윤찬원
심心 최재목
유무有無 이권
윤회輪廻 고영섭
음양陰陽박석준
의義 박경환
인仁 신정근
자연自然 박원재
중용中庸 최영진
천天 문석윤
충효忠孝 김덕균
허虛이종성


제2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개벽開闢김용휘
개혁改革 배병삼
공동체共同體 김수중
노마디즘 이정우
놀이 김교빈
다원주의 김비환
도교이용주
동아시아 김석근
디지털 정세근
몸 정인재
법치 이재룡
생명윤리 박재현
생태 김용수
성性윤천근
소통 강신주
아나키즘 박철홍
악惡 이장희
양생養生 김낙필
욕망 정상봉
유토피아 강중기
인간복제김병환
인공지능 이효걸
인권 이승환
자유 장현근
전쟁 송영배
정보화 사회 김성환
죽음 오진탁
지식인황희경
진화 양일모
테크놀로지 김용현
페미니즘 이숙인
풍수 최창조


표제어 찾아보기/찾아보기/글쓴이 소개




21세기의 동양철학


제1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기氣

애초부터 기는 사상적 갈래를 달리하는 여러 문헌에서 다양하게 쓰였기에 기의 유래와 관련된 논의는 단순하게 말하기 어렵다. 게다가 기는 처음  출현하는 선진(先秦)시대의 문헌에서부터 명확한 개념적 함축을 갖고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심과 은유적 함축을 가지며 여러 가지 갈래로 변화, 발전하였기에 철학사적으로 단선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친근한 개념이며(인기, 기운, 기분, 공기, 감기, 열기, 경기 등), 동시에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라는 맥락에서 기는 구체적 경험의 장인 동시에 추상적 사유가 만나는 생활세계적 개념이다. 한기, 온기 등으로 표현되는 기는 내 몸이 주변 대상에 갖는 감각의 차원에서 성립되며, 희로애락 식으로 표현되는 감정적 차원에서 성립된다. 내외의 분리, 주객의 분리는 성립되지 않으며 상호소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기의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는 어떤 대상이나 객관적 사태라기보다 우리의 몸이 세계와 빚어내는 경험과 교류의 장에서 출현한다.


이 때문에 기는 객관화, 수량화라는 근대적 기획에 포섭되기가 쉽지 않다. 전통적 기의 용례가 이와 같은 생활세계-내 몸이 살아 움직이는 세계-속에서 일어나는 체험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전통적 사유에서 어떤 식으로 운용되고 있는가에서 찾는 것이 수월하다. 이와 관련해서 기는 대체로 두 가지 맥락을 중심으로 운용되어 왔다. 생명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천지와 만물의 세계, 그리고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인간 생명의 주체인 몸과 마음의 세계가 그것이다.


천지란 오늘날의 말로 세계에 해당하며, 그 사이의 공간인 우주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이 기라고도 하였다. 한나라 시대의 위서나 기원전 4세기와 3세기의 책 『관자』『여씨춘추』에서 기는 세계와 생명의 근원이자 그 힘이다. 기의 또 다른 차원은 인간의 생명과 마음의 현상과 관련된다. 인간의 신체는 하나의 소우주로서 대우주인 천지세계의 축소판이다. 인체 안에서 기가 마르거나 넘치거나 막히면 질병이 일어나게 된다.


기는 정신 혹은 마음의 세계에서는 정(精)으로 나타난다. 정은 인간의 행위와도 관련되는데,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마음이 외적 상황(物)에 처하게 될 때 일정한 반응이 뜻(意)과 의지(志)로 구체화되면서 구체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한다. 이때 의와 지로 이어지는 마음의 반응은 곧 정의 반응이며, 이를 둘러싸고 조선시대의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 벌어졌다. 즉 이기(理氣)는 각각 성정(性情)에 해당하는데, 정만이 기로서 발할 수 있는 것이므로 기가 발동하면 리가 그것을 일정하게 제어함으로써 올바른 도덕적 행위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기의 사상이 싹터왔던 중국이나 기 연구가 활발한 일본에는 기론(氣論)만 있지, 모든 것을 망라하는 종합적 학문체계로서 구상된 기학(氣學)의 전통은 없다. 이는 조선조의 기나긴 학문적 토론이 낳은 커다란 성과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조선의 철학자 최한기는 전통 유학인 이학(理學)을 넘어서 기에 근거하여 동서고금의 사상을 포괄하려 했던 기학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또 의자(醫者)이자 유학자였던 이제마는 독특한 사상의학을 통해 유학적 사유와 의학의 통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기론이 기학으로 자리매김되는 독특한 한국의 철학적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는 오래된 옛것이지만 기학은 이제 막 시작된 새것이라 할 수 있다.


도道

천도(天道)의 상징적 역할과 결별하고, 인도의 독자성에 입각한 휴머니즘을 제창한 공자는 인간의 덕성이, 추상적 이념과 가치를 의식화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이웃이라는 구체적 관계의 장에서 실천적으로 육성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치의 관건은 제도나 규율이 아니라 이렇게 배양된 인격이었다. 그는 이 인식을 "도가 사람을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만이 도를 넓힐 수 있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한편 법가는 공자의 길이 너무 더디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는 이기심이기에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채찍과 당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대 시민사회는 노골적으로 법가적 인식 위에 세워진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 바탕에는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것, 그 사이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어떻게 법적․제도적으로 조정하고 일탈을 방지할까 하는 고민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 원칙을 너무 각박하게 시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법이 정의와 공정의 수호자라기보다 부당한 형벌과 강제로 인식되어온 것도 그 역사성의 흔적이다.


노장은 전체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비인간적 탄압과 가족의 유린을 목도하고, 어떤 형태의 사회 참여도 거부하고 자연과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불교도 노장과 더불어 인간의 본성이 오랜 이기적 습관과 사회적 순치에 의해 가려지고 켜켜이 때가 덮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불순물을 제거하고, 자신의 얼굴과 대면할 때, 삶을 대하는 태도 전체가 바뀌는 영적 전환을 겪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노장과 불교는 이원론적 통찰 없이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어떤 외적 조건도 이 근원적 요청을 대신할 수 없다. 이 존재론적 요청을 깨달은 사람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인정 투쟁에 헛되이 기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나 부 등에 신경을 덜 쏟기에 그의 삶은 자연스럽고 단순해진다. 노장은 이 근검과 자비가, 불교는 무소유와 보살행이 세상을 건지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유교, 노장, 불교의 세 길은 서로 달랐지만 그러나 이상주의적이고 로맨틱한 발견(discovery)의 길이라는 점에서 서로 깊이 연대하고 있었다. 공자는 노장의 은둔과 유희에 공감했고, 장자는 공자의 길에 내면과 깊이를 부여했으며, 불교는 노장의 자연적 지혜와 자신들의 초월적 지혜를 동일시했다. 세월이 흐른 후, 주자학과 양명학은 이들 세 갈래 길을 종합한 새로운 길을 열어 보여주었다.


지금, 어느 도를 쓸 것인가. 이를 위해 이렇게 취사하면 어떨까. 유학에서는 인격의 이상은 살리되 변화된 시대의 지식과 사회관계를 고려하고, 법가는 제도와 규율에 대한 현실감각은 살리되, 공공의 선과 시민들의 복리라는 최종 목적을 잊지 않도록 하고, 노장에게서는 인간존재의 우주적 의미에 대한 심원한 통찰을 배우되, 그것을 사회 정치적 공간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불교는 자아의 편견과 독선을 넘어 세상의 진실과 투명하게 만나는 법을 배우되, 삶의 의미는 세상과의 절연에서가 아니라 적극적 사회참여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완하고, 현실주의적 감각을 지녔던 사마천과 혜강에게서는 인간의 자연적 욕망을 승인하고 그 행복의 실현에 주력하는 실용적 마인드를 배우되, 재능의 부족과 환경의 불리로 소외되고 그늘진 곳에도 빛을 비추는 공동체 정신을 발양하면 좋겠다.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고, 천만 영원하지 않고 임시적․선택적이다. 그것은 전통과 상황의 실제 위에서 선택되고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와 있는가. 위의 길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욱 절실하고 유효하며, 그 축 외에 무엇을 보태 새 길을 열어갈 것인가.


인仁

공자는 『논어』를 통해 인에 대해 적어도 주위 사람을 이용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와 사랑을 해야 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이제 인은 종족 간의 충돌로 인해 자기 집단의 보존에 기여하는 인물을 가리키는 처음 의미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이해나 생존을 넘어서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극기복례는 사람다움의 특정을 한층 더 분명하게 제시해준다. 극기복례는 행위자에게 예(禮)를 통해 요구하는 것을 나타낸다. 물론 예가 신분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측면도 있지만 여기서는 사람의 행위를 보다 더 아름답고 품위 있게 만드는 문명화의 과정을 나타낸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극기복례의 초점이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평화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규칙이 사람을 억압하며 특정한 방식으로 길들이면서 사람들이 규칙의 존립근거를 묻자 맹자는 인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칙이며 그것의 기원은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서 인은 우리의 도덕감정이 이끌어가는 대로 하게 되는 연대의식이 된다.


그리고 신유학자들은 위진시대 사상가들의 물음 의식을 계승해서 세계를, 개별적 현상 사이의 관계 양상이나 상호 의존으로 조망하지 않고 본질과 현상의 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개별적인 사태(존재자)는 또 다른 사태(존재자)와 맞물려서 생성되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사태를 넘어선 보편적 절대의 재현(실현)으로 간주되었다. 종래의 규범적 가치들도 재해석되면서 인은 효도와 공손만이 아니라 사랑․정의․지혜․문화․신뢰 등을 가능하게 하는 규칙 중의 규칙이 되었다. 즉 인은 모든 규칙이 규칙으로서 성립될 수 있는 생명을 부여하는 절대적 가치가 되었다. 인의 이러한 변신에 신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이견이 존재했다.


인은 자아와 타자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일구는 운동을 함축하고 있으므로, 바로 그 핵심에서 평화와 화해, 그리고 생명의 존중이라는 현대의 물음을 푸는 자원이 풀려나올 수 있다. 이 작업은 인이 가진 여러 전통 중에서 놀이의 규칙 지키기․고통의 공유․전체의 사유 등을 새롭게 종합하는 길을 통해 진척될 것이다.



제2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개혁改革 

개혁은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오늘날 쓰이는 개혁이란 말의 의미는 경제적 효율성을 제고하는 쪽으로 조직과 체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양사회에서 개혁이란 말은 그 용례가 없진 않지만, 거의 쓰이지 않았던 말이다. 오히려 중국에선 변법(變法)이, 조선에선 경장(更張)이, 그리고 근대 일본에선 유신(유신)이라는 말이 대신 쓰였다. 개혁이란 말이 변법, 경장, 유신 등을 제치고 대체 개념이 된 까닭은 서양어인 reformation의 번역어로 확정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재형성, 재구성을 뜻하는 리포메이션은 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을 지칭하였다.


변법은 법가적 뉘앙스가 짙게 묻어나는 말로, 법가적 의의를 갖고서 제도와 법률의 개선이라는 뜻을 강하게 품고 있다. 일본의 경우 유신이란 "모든 일을 변화시키고 고쳐서 새롭게 하는 것. 묵은 폐단을 일소하여 혁신하는 것"이란 뜻이다. 한편 조선의 경우 경장이란 고쳐서 바로잡다는 뜻이다. 조선에서 이 말은 국가의 변화과정을 표현하는 창업-수성-경장이라는 연쇄 속에서 자주 쓰였다. 이런 역사의식 속에서 자기 시대를 개혁기로 파악하고 당대의 정치․경제․국방 전반의 개혁정책을 제시한 사상가가 율곡 이이(1536~1584)다.


그가 제시하는 개혁정치론, 즉 경장론의 특징은 유교적 이상인 요순정치 모델을 당시 조선의 현실을 면밀히 검토한 바탕 위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유교적 이상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감안하는 사유구조가 율곡의 개혁론을 특징짓고 있다. 그는 당시 조선이 봉착한 정치적 위기는 마땅히 개혁을 해야만 할 터인데도 개혁을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 까닭을 그는 고위관료들의 무사안일, 즉 타성과 습관화를 든다. 관료들의 타성과 습관적 일처리를 해체하고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는 일이야말로 개혁정책이 요구되는 근거다.


그가 제시한 개혁안의 방향은 인적개혁과 제도개혁 양 방면에 걸쳐 있다. 우선 인적 개혁의 목표는 훈구관료집단을 해체하고 대신 사림으로 충원함으로써 성리학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한편 제도개혁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제도개혁 방안으로는 경비절감, 작은 정부론, 국가이념의 단일화, 그리고 이상의 목표들을 위한 경과 조치를 제시했다.


이상 동양의 사례를 통해 개혁 추진은 인간 중심적이고 도덕적 의의를 획득할 때 성공할 수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상앙과 왕망 그리고 왕안석의 개혁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은, 그것이 제도를 앞세우고 인간을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에 경제 중심, 효율성 위주의 개혁론은 그것이 인간의 얼굴을 한 개혁으로 재규정되지 않고서는 개혁추진 그 자체가 개혁을 배반하게 되리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소통

남성과 여성 사이, 문화와 문화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에도 소통이 문제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점에서 현대사회만큼 소통이란 개념이 인구에 회자된 적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역으로 우리가 소통이 부재한 시대에 살고 있고, 따라서 그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절박한 요구에 대해 서양은 어떤 식으로 논의를 전개해왔는지 살펴보자.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서양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하이데거의 손 안에 있음이라는 개념을 긍정하는 데서 이루어졌다.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을 보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 투명하게 인식하는 자기의식이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 속에서 이미 타자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 즉 세계-내-존재라고 규정된다. 이 규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있지 않음이란 개념이다. 문이나 문을 열려는 자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우리가 자연스럽게 문을 여는 일상적인 경우가 전자의 사례라면, 반면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아 우리가 문이나 문을 열려는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예외적인 경우가 후자의 사례가 될 수 있다. 하이데거가 주목해야만 했던 것은 친숙하게 열었던 문이 어느 순간에 열리지 않는 문으로 변하는 사태, 손 안에 있지 않음이란 사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태가 우리 인간에게 낯선 타자가 도래하는 지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이데거의 손 안에 있음이나 생활 세계 속에서의 합리적 의사소통을 강조했던 하버마스의 생활 세계에는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이 함축하고 있는 긴장과 위기라는 역동적 그림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커뮤니티를 지향하는 서양의 커뮤니케이션 논의는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소통이란 핵심적 문제를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손 안에 있어서 이미 친숙한 생활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 소통에는 진정한 의미의 타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동양의 소통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타자와의 소통을 사유했던 장자의 사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자는 어떤 경우에도 밀어야 열린다는 식의 무의식적인 생각을 성심(成心), 즉 이루어진 마음이라고 간주했다. 이런 성심을 가지고서 타자와 소통하려는 시도는 당겨야 열리는 문을 계속 밀려고만 하는 어리석음에 비유될 수 있다. 이 문을 열기 위해서 우리는 성심을 비워내야만 한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 친숙한 세계를 버린다는 것은 내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자가 보았을 때 과거와의 이런 단절이 없다면 우리는 친숙한 세계에 영원히 포획되어 새로운 삶으로 생성될 수 없게 될 것이다.


기존의 친숙한 세계를 해체해야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마치 기존의 물줄기를 새롭게 터버려야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양의 소통 논리에서 트임이란 개념이 가진 중요성이 이제 분명해진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이렇게 물을 때 우리는 비움과 트임의 중요성 내지는 비움과 트임이 얼마나 힘든 자기수양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동양의 소통 논리가 항상 수양론을 함축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수양론이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타자와의 소통은 철저한 자기수양을 강제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결국 트임과 연결로 구성된 소통이란 개념은 과거 삶의 양식을 비우고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양식을 구성하려는 의지를 함축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유가철학, 불교철학, 도가철학 이 세 철학적 경향들이 공유하고 있는 수양론적 전통이다. 수양론은 기본적으로 트임의 논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동양의 소통 개념은 단순한 철학 범주를 넘어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소통은 동양철학의 모든 범주들의 무의식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동양철학이 아직도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 전통이 서양의 그것보다 심층적인 소통의 진리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보화 사회

오늘날 정보는 컴퓨터와 통신․자동제어 동의 정보처리 기술을 통해 생산․가공․유통되는 모든 종류의 표현형식을 가리킨다. 그것이 정보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변수는 더 이상 실용성이나 유익함 같은 의미내용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를 표현하는 기술적 형식이다. 즉 정보기술의 가공을 거친 일체의 표현형식, 이것이 오늘날 새롭게 정의된 정보의 함의이다.


정보사회에 관해 가장 두드러진 이론적 쟁점은 정보사회가 이전의 사회와 어느 정도로 구별되는가를 해명하는 것이다. 정보사회의 성격에 관해 분분한 논의가 전개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담론이 불확실한 미래를 들여다보는 일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시작된 혹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일지도 모르는 정보사회에 대한 논의에서 근대적 인문사회과학이 구축한 치밀한 분석의 예봉은 그 날이 무뎌지기 일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동양철학의 상상력으로 정보사회를 전망할 틈이 열린다. 과학기술과 시장경제 그리고 근대적 인문사회과학 등이야말로 서구 근대의 대표적인 발명품인 동시에, 아시아의 사상적 전통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보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근대산업사회와 구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엽을 거치며 개별적 컴퓨터의 기능보다 확장된 지적 능력들 간의 연계, 즉 정보 네트워크가 정보사회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런 변화를 선도한 것은 물론 인터넷이다. 인터넷의 확산은 공간적인 제약을 넘어 모든 장소를 하나로 연결하는 연결망사회(network society)를 출현시켰다. 철학의 눈으로 볼 때, 연결망사회의 출현은 근대사회의 성립을 가져왔던 핵심적 원리, 즉 고립된 자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이성에 대한 신념의 붕괴, 그리고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을 알리는 징후로 읽힌다. 연결망사회는 서로 긴밀하게 결합된 존재들, 상대적이고 다양한 의식(지성)의 연계 위에 구축된다. 그것은 상호의존적이고, 상생적이고, 유기체적이고, 순환적인 구조를 가진다. 그리하여 연결․분산․포용․개방 등의 원리가 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연결망사회의 이런 구조적 특징은 거의 예기치 않게, 아시아의 전통적 세계관을 재해석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아시아의 전통사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연결망사회의 특징들로 세계와 만물을 파악해왔고, 그 가치들을 강조해왔다. 정보사회는 일견 아시아적 가치의 르네상스를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치 않고 문제는 보다 중층적이다. 정보사회의 도래는 고립된 자아를 넘어서는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그러나 네트워크 자체가 선하다거나 그것이 여러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고립된 자아에 대한 신념이 극단적 개인주의를 낳는다면, 유기체적 일체성에 대한 신념 또한 얼마든지 다른 유형의 병폐를 낳을 수 있다.


정보사회가 유토피아일지 아니면 디스토피아일지는 결국 인간이 결정할 것이다. "만약 인터넷이 삐거덕거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술․전망․동기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함께 미래를 개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 미래의 관건은 인터넷이 아니라, 인터넷으로 이어진 세계와 자신을 통찰하는 인간의 각성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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