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카, 체홉 그리고 백조의 호수

   
박명용ㆍ박 범 이고리
ǻ
이카루스미디어
   
9800
2005�� 09��



>■ 책 소개
러시아는 한국의 21세기보물이다! 정치, 군사, 문화, 경제 모든 면에서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러시아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 소극적이고 한시적이며, 시각 폭 또한좁다. 이 책은 평범한 러시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얘기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한 정치·경제 정보보다 더 중요한 정보를 담고 듬뿍 있다. 이 책을읽으면 왜 러시아가 우리의 보물이 될 수밖에 없는지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저자는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러시아 사람과 결혼해 10년을 살아온 현지인이다. 두 아이를키우면서 경험한 사소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폭넓은 지식과 방송, 신문, 잡지 등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들려준다.


단순히 러시아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를 비교하며 자기성찰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저자의 아들 범 이고리는 스스로 창작한 동화를 통해서 체홉과차이코프스키 전통이 살아 있는 러시아 문화를 보여준다.

■ 저자 박명용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아래 있는 역사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1997년 모스크바에서러시아인 니나 까이샤우리와 결혼해 지금 아들 범 이고리, 딸 알렉산드라 소영과 함께 살고 있다. 


■ 차례
글을 시작하며 - 러시아는 어떤나라인가, 우리한테 


1. 긴 겨울, 짧은 여름 그리고 구질구질 봄가을
밍크코트와 털모자 ‘대대장 동무’ 
두 겨울: 모진 겨울과 ‘찔찔 짜는’ 겨울 
독일인에게 해로운 것은 러시아인에게 이롭다


2. 명절은 술 취한 옐친과 함께 
성묘가는 부활절 
새해맞이와 술 취한 옐친들 
소비에트 명절과 옐친 명절 


3. 맥도날드에서 일본 레스토랑으로 
빵,감자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자랑 
마피아와 ‘고르바초프 반가워’ 
『생굴』과 개고기 


4. 가족 속에서 묻어나는 소비에트 냄새
결혼 사기꾼 
근육으로 유혹하는 소비에트 여자 모델들 


5. 문학 러시아에선 축복, 한국에선 저주
아이 낳고 기르기 
시 읊고 동화 쓰는 러시아 꼬마들 
러시아 기러기와 한국 기러기 


6. 모스크바 문화와 러시아 혁명 
자본은짧고 예술은 길다 
『닥터 지바고』와 ‘배신자 솔제니친’ 
파스테르나크 아파트에서 기록 영화 ‘안중근 의사’까지


7. 아파트로 둘러본 러시아 혁명사 
러시아혁명과 ‘공산주의 아파트’ 
거주 등록 - ‘이 사람들, 이혼한 다음에도 금슬이 좋은가 보군!’ 
아파트와 마피아 총격전


8. 되돌아보는 다차 
『벚꽃 동산』과 펜션
다차와 베드 타운 
‘파스테르나크 보따리’에서 고르바초프 몰락까지 


9. 다차로, 다차로! 
17세기 도덕교과서가 전하는 러시아 민간 의학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상관없다, 다차와 버섯만 있으면 
‘아브라모비치 다차’와 ‘감자 다차’
다차와 그래프 없는 경제학


맺음말




보드카, 체홉 그리고 백조의 호수


긴 겨울, 짧은 여름 그리고 구질구질 봄가을

어느 대중가수는 러시아 날씨를 이렇게 노래했다. 러시아에서 일년에 반은 날씨가 아니다. 5월에 몰아치는 매서운 추위만 그런 게 아니다. 가을은 구질구질하다. 중편 소설 『내 인생』에서 체홉은 가을 분위기를 이렇게 그렸다. 비만 오면 더럽고 어두컴컴한 가을이 찾아왔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러시아 사계절 중에서 가장 궁금한 계절은 역시 겨울일 것이다. 우리 얘기는 이 무시무시한 계절부터 시작해야 한다.


밍크코트와 털모자 "대대장 동무"

모스크바에서는 8월말에 겨울을 알리는 첫 번째 막이 오른다. 자모로즈끼라고 하는 이 가벼운 추위는 모스크바 시내에서는 별로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이 추위를 눈으로 볼 수 있다. 추위에 약한 농작물들은 이때 하루아침에 얼어죽는다. 대신에 양배추는 이 자모로즈끼를 딛고 큰다. 자모로즈끼는 0도에서 영하 5도 되는 추위를 말하는데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사이에 다시 찾아온다. 이 무렵부터 겨울을 따뜻하게 나기 위해 부산을 떨어야 한다. 먼저, 창문이 그렇다. 소비에트 시대에 건설된 모든 아파트 유리창은 손으로 깎은 듯 투박하게 만든 나무창틀로 되어 있다. 창틀 사이로 바람이 그대로 새어 들어온다. 따라서 창틀에만 쓰는 특별 테이프를 붙여야 바람 없는 겨울을 보낼 수 있다. 10월 25일을 앞뒤로 하여 첫눈이 내린다. 이날은 날씨 변화를 구분하는 절기 가운데 하나였다. 나한테는 첫눈과 함께 인정할 수 없는 러시아 가을이 끝난다. 10월에는 늘 머리가 아프다. 저기압 때문인데 별수 없이 타이레놀을 찾아야 한다.


두툼한 가죽 잠바에 목도리를 칭칭 휘감고 검은색 털모자를 꾹 눌러 쓴 러시아인들. 러시아 사람 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중무장을 한데다 색깔마저 칙칙하다. 이것은 남자들에 대한 이미지일 뿐이다. 하얀색이나 밝은 갈색으로 화사하게 빛나는 밍크코트에 맵시 나는 털모자를 쓴 젊은 여자들은 정말로 칙칙한 모스크바 겨울 거리를 밝혀준다. 러시아에서 밍크코트는 사치품이 아니다. 툭하면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는 추운 날씨를 생각하면 필수품이다. 그래서 부인한테 밍크코트를 사주는 것은 남편들이 꼭 지켜야 할 기본 의무 가운데 하나다.


러시아에서 뽐을 내고 싶다면 잠바나 밍크코트와 함께 털모자도 제대로 된 것을 사야 한다. 소비에트 시대에는 털모자에도 계급이 있었다. 100달러 주고 산 내 털모자는 소비에트 시대만 해도 대대장 동무들만이 쓸 수 있었다.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털모자에 맞는 사회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아니면 그런 사람을 알고 있어야 했다. 대대장 동무는 좋은 털을 써서 만든 만큼 보들보들하고 디자인도 뛰어나다. 대대장 동무 없는 서울 겨울은 모스크바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러시아에서는 영하 날씨에 모자 없이 돌아다니면 한마디 듣는다 : 머릿속에 얼음이 생겨서 생각이 동상에 걸린다.


두 겨울: 모진 겨울과 "찔찔 짜는" 겨울

첫눈이 내리고 난 다음인 11월부터 겨울이 제대로 시작된다. 12월과 1월에 말 그대로 심한 추위가 찾아온다. 영하 25도에서 32~3도까지 갈 수 있다. 이런 때면 돼지기름, 곧 비계가 제격이다. 비계는 얼굴 세포가 동상에 걸리는 것을 예방해 준다. 사실 양고기 기름은 더 좋은 효과를 보인다고 하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는 일년에 길어야 10일을 넘지 않는다. 이런 추위는 대개 1월초와 말에 찾아온다. 이런 날 모스크바 지하철역은 마치 커다란 공장 굴뚝처럼 허연 입김을 뿜어낸다. 멀리서는 불이 난 것처럼 보인다. 역 안에 있던 더운 공기와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갑자기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실 강추위보다도 더 짜증나는 것이 지저분한 겨울이다. 모질도록 추운 1월이 지나면 체홉이 『늦게 핀 꽃』에서 얘기한 찔찔 짜는 2~3월이 기다린다. 이때 기온은 영상과 영하를 맴돌고 거리는 지저분해진다. 겨우내 내린 눈은 녹았다 얼기를 반복한다. 이맘때면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다닐 때에는 늘 머리 위를 조심해야 한다. 오랫동안 묵은 추위 때문에 생긴 팔뚝보다 굵은 고드름이 퍽퍽 떨어진다. 로케트 머리처럼 뾰족하고 길다한 고드름은 땅에 부딪치자마자 하얀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나간다. 해마다 몇 사람씩 부상당하거나 심하면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장모는 한번은 머리를 크게 다쳐 피투성이로 돌아왔고 또 한 번은 팔이 부러졌다. 이런 때 동네 병원에는 다친 사람들과 그 식구들로 북적거린다.



맥도날드에서 일본 레스토랑으로

러시아인들이 주로 먹는 음식은 계층에 따라 다르다. 하숙하면서 함께 살았던 네 가정은 모두 중산층보다 낮은 소득으로 생활을 꾸려가던 집안이었다. 돈 때문에 그들이 가장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은 빵이나 감자와 같은 음식이다. 중산층에서는 고기를 많이 먹는다. 반면에 가진 자들은, 적어도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야채와 과일을 많이 먹는다. 한국과 분명히 다른 것은 고기와 푸성귀 가격이다. 고기는 빵이나 감자보다 비싸다. 대신 겨울에 고기는 야채나 과일 값보다 싸거나 비슷하다.


빵, 감자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자랑

러시아에서 중요한 음식은 빵, 곡식으로 만든 죽, 감자, 고기와 가공 육류 그리고 우유와 유가공 식품, 이렇게 크게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생선은 조금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생선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모스크바에서는 커다란 노릇을 하지 못한다.


러시아 빵은 한국 제과점 빵보다 단조롭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밀로 만든 하얀 빵과 호밀로 만든 흑빵이 그것이다. 혁명 전까지 러시아에서 빵이라고 하면 시큼한 맛이 나는 흑빵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흑빵을 삭혀 여름에는 러시아인들이 사랑하는 음료 끄바스를 만들 수 있다. 밀로 만든 하얀 빵은 아무런 맛이 없는 "맹 맛"이다. 한국 제과점에서 파는 달착지근한 빵과는 조금 다르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19세기 말부터 도시 서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하얀 빵은 지금 흑빵을 밀어내고 "전국구 1번"을 차지하고 있다. 그냥 먹어도 괜찮은 하얀 빵은 서민들 도시락으로도 사랑 받는다.


감자는 "국민타자"다. 18세기에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러시아 어디에서나 재배한다. 서민이나 가진 자들이나 모두가 먹고 전국 어디에서나 키우는 만큼 값도 엄청 싸다. 다만 겨울이 끝나갈 무렵부터 값이 솟구친다. 7월이 넘어가야만 "감자가뭄"이 해결된다. 감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한다. 삶고 삶은 것을 다시 지지고 볶는다. 요즘에는 유럽산 기계가 수입되어 기름에 넣고 튀길 수도 있다. 맥도날드에 가지 않아도 될 핑계가 하나쯤은 늘어난 셈이다.


고기는 중산층 주식이다. 국가경제에서 핵심 노릇을 하는 계층이 좋아하는 식품인 만큼, 모스크바시 정부는 이따금 광우병에 걸린 영국 쇠고기라도 대량으로 수입하여 값을 낮추는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는다. 고기 값은 부위가 아니라 뼈가 얼마나 들어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고기가 싱싱한가는 사는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냉장고도 없는 재래시장에서 고기 값은 신선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라는 소비에트 시대 전통을 지금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따라서 고기를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고기로 만든 러시아 음식 중에서 쌀라는 빼놓을 수 없다. 겨울이 유난히도 춥고 긴 러시아에서 돼지비계는 7~8cm에 이를 정도로 두껍다. 이 비계에 마늘 향을 입히고 소금을 발라 커다란 돌멩이 같은 묵직한 것으로 3일 정도 눌러 놓으면 쌀라가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비계는 익힌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눈으로 보지도 않고 내 얘기만 들은 한국인들은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별미다. 보드카와 함께 권하고 싶은 이 쌀라는 고르바초프가 한 자랑으로도 유명하다. 끄라스나다르에 살고 계셨던 그의 부모님은 겨울마다 정성스럽게 만든 쌀라를 모스크바에 있던 아들에게 보내주었다. 고르비는 이따금 이 소중한 선물을 터놓고 자랑했다. 부모님이 손수 만든 것이라 몸에 더 좋다나.


"생굴"과 개고기

음식에 반영된 자연 환경과 외국 영향은 어느 나라 음식 문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춥고 긴 겨울 때문에 러시아 사람들은 푸성귀와 과일을 많이 먹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지 러시아 음식을 보면 아주 단조롭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에트 시대 유산인 폐쇄성은 음식 문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점잖은 나이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이 외국 음식을 호기심이 아닌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본다. 같은 문화권이라고 자랑하는 유럽 음식조차도 이들에게는 껄끄럽다.


러시아인들은 조개와 같은 어패류에 대한 말만 들어도 몸을 부르르 떤다. 가을마다 생굴 먹고 싶다고 하면 장모는 마치 개고기 먹고 싶다고 들은 듯한 얼굴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혁명 전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생굴은 벌써 19세기 중반에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외부 세계와는 끊어진 채 오랜 세월을 살아온 러시아인들은 자주 현대 세계와는 동떨어진 자기들만의 관념을 보여준다. 그런 관념은 생활 관습 여기저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음식 문화에서는 생굴과 같은 것이 그렇다. 100년 동안 굴을 가까이서 보지 못하고 또 먹어보지 못해서 그런지 굴 얘기만 나오면 러시아인들은 "껍데기를 뒤집어 쓴 개구리"를 떠올리는 듯한 얼굴 표정을 짓는다.


생굴처럼 음식 문화 속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 없는 관념 또는 소비에트 전통은 "물 문제"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소비에트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러시아 정부는 지금도 수돗물 값을 "인두세"로 받는다. 따라서 정해진 요금만 내면 된다. 하숙할 때 함께 살던 10살짜리 꼬마는 언젠가 "아저씨는 왜 물을 아껴요?"하고 물은 적이 있다. "물을 아끼면 안 되는" 러시아 전통은 세탁기 없는 러시아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집에서는 빨아 놓은 옷가지를 헹굴 때 수도꼭지를 마냥 틀어 놓는다. 수도꼭지라도 망가지면 몇 날 며칠이고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물 값보다 수도꼭지 값이 훨씬 비싼 까닭이다.


언론에서는 이렇게 마구 버려지고 새나가는 수돗물 값이 일 년에 러시아 전국에 걸쳐 수백 억 달러는 될 것이라고 떠들어댄다. 너무 심한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국민들 생각이다. 연방 정부가 수돗물 값을 사용한 양에 따라 받겠다는 뉘앙스만 풍겨도 국민들은 아우성이다. 개혁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고민이 있다. 전국 가정집마다 계량기를 달 때 들어가야 할 돈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수돗물 개혁을 뒤로 미룬다. 이따금 내가 우리 한국에서는 사용한 양에 따라 물 값을 내려야 하고 그래서 물을 아끼면서 살아야 한다고 한 마디 하면 핀잔 섞인 대답이 멋지다 : "한국에는 비가 안 오는가 보지 뭐!"(모스크바 둘레 일 년 강수량은 800~900 밀리미터 정도다. 한국은 1200~1300 밀리미터 정도이다.)



가족 속에서 묻어나는 소비에트 냄새

결혼사기꾼

지난 1997년 가을 나는 약혼식을 올리기 위해 집사람과 함께 서울을 다녀갔다. 모스크바로 돌아가자마자 나는 장인과 장모한테 사기꾼이 되었다. 약혼만 하고 결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증서 없는 결혼이란 러시아에서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두 사람이 합의만 했을 경우에는 "시민 결혼"이라고 해서 동거가 된다. 이런 러시아 사정을 잘 몰랐던 나는 약혼식 사진도 있고 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변명했지만 벌써 사기꾼이었다. 모자라는 러시아말 실력 때문에도 오해를 받았다. 한국에서 결혼과 약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작스"라는 러시아 예식장은 "러시아답게" 행정 기관 가운데 하나다. 한국과 같이 잇속을 챙기려고 운영하는 예식장은 러시아에 없다. 외국인과 결혼하는 러시아인은 모스크바에 단 하나만 있는 외국인을 위한 작스에서만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 결혼 당사자들은 식을 올리기 한 달 전쯤에 작스에 찾아가 예약을 한다. 국가 기관인 만큼 요일과 예식 시간은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그리고 저녁 6시까지만 할 수 있다. 주례는 국가 공무원이고 사회는 없다.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은 "선택사양"이며, 피로연은 작스에서 할 수 없다. 웨딩드레스도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 신혼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그런 개념이 없다고 봐야겠다. 결혼식장에 함께 온 사람들은 열 명 남짓이다.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간단하게 얘기한 다음 "… 평생토록 사랑하겠는가?" 국가 공무원은 신랑과 신부에게 따로 질문을 한다. 예라는 대답을 받아내면 증인을 불러내고 사인을 요구한다. 증인이 사인을 하면 결혼식은 끝난다. 뭉그적거리는 것이 특징인 러시아 행정과는 달리 여기서는 아주 빨리 끝나 속이 다 시원할 정도다. 작스에서 행사가 끝나면 예약된 레스토랑으로 간다. 양쪽 부모들은 대개 작스에 가지 않는다. 작스에는 몇몇 친구들만 참석한다. 혁명 전에는 피로연이 3일 밤과 낮 동안 계속 이어졌지만, 지금은 조촐하게 하룻밤으로 끝난다.


근육으로 유혹하는 소비에트 여성 모델들

신혼 여행이 없는 러시아에서는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신혼 생활이 시작된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살 집이다. 신혼 부부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가. 보통 사람들이 버는 소득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한국 서민들보다도 훨씬 적은 편이다. 결론은 얹혀 사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쪽에서. 러시아는 처가살이다. 혁명 전까지만 해도 신부가 시집살이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노동자 집안에서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자리를 바꿨다. 남편, 자식들과 함께 공장에 나가던 시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하고 대신에 며느리가 공장에 나가 돈을 벌었다.


처가살이 때문인지 몰라도 러시아 여성들은 억척스럽다. 어느 사회에서나, 더욱이 저개발 국가들에서 여성들 운명이 험난한 것은 흔히 보는 일이다. 하지만 러시아 여성들이 억척을 부리는 데에는 나름대로 독특한 면이 있다. 혁명 전까지는 현모양처가 러시아 남자들이 꿈꾸던 이상형이었다. 하지만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들한테 중요한 것은 자기 마누라가 돈 벌어오는 것이었다. 혁명 후에 여성 모델들은 거의 모두 스포츠우먼 타입으로 단련된 탄탄한 근육으로 남자들을 유혹한다. 현모양처는 말할 것도 없고 몸은 약하지만 마음은 굳건한 외유내강 이미지를 풍기는 여성도 환영받지 못한 듯싶다. 소비에트 모델들은 오로지 "튼튼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있을 뿐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근육질은 지금도 러시아 여자들이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는 이상이다. 돈벌이와 가정살림 그리고 출산과 육아와 같은 힘겨운 일들을 제대로 다하기 위해 튼튼한 육체는 필수 조건이다. 주부들은 러시아다운 사회 환경으로도 고통 받았다. 남편이 받아오는 월급만으로 먹고야 살 수 있었다. 그러면 "내 집 마련"은 영원한 꿈으로 남아야 했다. "잘 갖추어진" 사회 시스템 속에서 여성들은 일을 하도록 내몰렸다.


하지만 두 나라 가정생활 속에서 비교할 수 있는 큰 차이는 아이들을 키우는데 나타나는 관습과 생각이다. 한국의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큰다"라는 생각은 러시아인들한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다. 아이들은 언제나 부모 눈 밖으로 벗어나서는 안 되는 "움직이는 보물이고 폭탄"이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훔친 아이들을 내다 팔고, 아기들은 "앵벌이" 가족의 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부모가 제 손으로 아이를 넘기는 일은 거의 없다. 이혼율이 50%도 넘는 러시아에서, 미혼모들도 아이를 끝까지 책임진다. 아기들은 대개 시설이 형편없는 탁아소에서 훔친다. 이런 심하다 할 만큼 끔찍한 사회 환경에서 반나절 또는 격일제 근무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러시아 엄마들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을 터주었다.


 

문학은 러시아에선 축복, 한국에선 저주

우리 사회에서 문학은 "나부랭이" 취급받는 천덕꾸러기에 지나지 않지만 러시아에서는 위대한 문학 전통을 가지고 박노자와 같은 천재를 빚어내고 머리를 빳빳이 곧추 세운 채 코브라 쇼를 보여주는 수호이 전투기도 만들어낸다. 명문 대학에 들어가려면 뿌쉬긴의 『예브게니 아네긴』을 줄줄 외고 『전쟁과 평화』와 체홉의 열 댓 권 정도 되는 전집을 비롯한 러시아 고전을 잡듯이 꿰고 있어야 했고 지금도 그렇다. (노벨상 받은 다른 나라 작가들 작품은 이 목록에 끼지 못한다. 작품 수준보다는 번역이라 차별 대우 받는 것 같다)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할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음악이나 미술을 공부할 학생들도 그렇다. 하기야 치꼽스끼가 남긴 많은 작품들이 "황제" 뿌쉬긴을 "보드카 가락"으로 옮긴 것이니까.


시 읊고 동화 쓰는 러시아 꼬마들

풍성한 러시아 문화 전통은 꼬마들 교육에 한 몫 단단히 한다. 문학, 연극, 영화, 발레… 그래서 문화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풍요로운 문화가 없는 우리네는 찍기나 가르친다. 그런 교육이 꼴 보기 싫고 가진 돈 많은 사람은 기러기 아빠로 산다. 기러기 아빠는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인가를 잘 보여준다. 러시아 영재교육은 만 1살 때쯤부터 시작된다. 첫 교재는 아그니야 바르또가 쓴 『장난감』이다. 4줄 또는 6줄 정도로 된 시가 100편 정도 담겨 있다. 바르또 시 모음집을 두어 번 정도 읽어주면 바로 다음으로 추꼽스끼가 쓴 『전화』가 기다린다. 아동 문학을 많이 읽어주면 그 효과는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다. 아주 어려서부터 시를 읊어대는 러시아 꼬마들은 말을 잘한다. 리듬도 있고 정확한 문장을 줄줄 외고 또 그것을 부모나 손님들 앞에서 읊어대니 말을 못할 리가 없다. 또 부모들은 시를 제대로 외지 못한다고 핀잔주지도 않는다. 다만 잘하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커 가는 꼬마들은 남들 앞에서 말할 때 쭈뼛거리지도 않고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말한다. 러시아 아이들과 견주면, 한국 꼬마들은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징징거릴 때가 많다.


책만 러시아 꼬마들이 좋아하는 구닥다리가 아니다. 만화영화도 그렇고, 유치원에서는 연극도 보여준다. 비록 이름 없는 3류 극단이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모스크바에는 아이들과 함께 수준 높은 문화를 감상할 곳이 많아서 좋다. 러시아 꼬마들은 대개 화가다. 아주 어려서부터 가르친다. 우리 아이들은 만 두 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연필도 제대로 쥐지도 못한다. 하지만 러시아 꼬마들은 우리네 "젓가락 나이"보다 빨리 손가락에서 뇌로 이어지는 신경을 발전시키는 셈이다. 그림 그리기는 러시아 아이들 놀이 가운데 하나다. 자식 교육은 돈으로 땜질해야 한다는 듯 그림 그리는 것도 학원에 보내 가르치는 한국 부모들과는 아예 다른 러시아 풍경이다.


러시아 기러기와 한국 기러기

한국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정부 고위층에서도 "기러기"를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다. 돈도 많고 권력도 쥐고 있는 지배 계층이 젊기 때문이다. 뿌찐 대통령의 두 딸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다. 대통령 딸들만이 아니라 웬만한 장관 자식들도 유럽에 가있다. 또한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러시아 꼬마들은 어렸을 때에는 부모와 함께 살며 유럽 문화를 배운다. 혁명 전 귀족 자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 역사는 바로 이 귀족과 농민의 역사였다. 이 두 계층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한 갈등의 역사다. 그 갈등을 없애려는 러시아 지식인들 노력이 바로 러시아 문학이고 예술이다. 그래서 그들 문학이 위대한 것이다. 반면 조선은 그 양반과 "중국말 권력"에 다가가지 못한 일반 백성들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메우지 못하고 식민지로 굴러 떨어졌다. 권력이 중국말에서 일본말로 옮겨가자 사람들은 일본말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산문 "쾌청의 공중에 붕유하는 Z백호" 같은 시가 그런 것이다. 파란 하늘이라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그런 말로 유식한 채하며 식민지 백성 된 제 나라 백성들을 깔본 것이다. 파란 하늘이라고 쓰면 속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마디로, 쓰레기만도 못하다.


그까짓 문화를 가지고 너무 크게 해석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겠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러시아에서 내가 몇 차례 당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속 터지는 일이지만 지금도 이따금 여러 사람들한테서 듣는 소리다. 한국은 역사도 없고 문화도 없는 나라다. 그런 나라가 일본한테서 문화 배우고 미국이 멍청하게 수천 억 달러 뿌려준 덕분에 지금 전자 제품과 자동차 정도는 만든다. 그런 나라 놈들이 돈 좀 있다고 러시아 와서 까분다. 이런 소리는 러시아에서만 들을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폼 잡고 휴대폰 팔아봐야 속으로는 비웃음 사는 꼴이다. 그렇게 비웃는 나라에 가서 외교하려면 허구 헌 날 돈 갖다 바쳐야 한다. 그것도 15억 달러씩.



아파트로 둘러본 러시아 혁명사

모스크바에 가본 사람은 누구나 그곳 주택 양식에 조금은 놀랄 것이다. 우리네나 유럽에서와 같은 단독 주택은 보이지 않고 아파트 숲만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하늘색이나 고동색 타일로 장식된 고층 아파트, 후줄근한 5층 짜리 아파트, 그리고 9층 짜리 웅장한 아파트. 땅이야 넓은 모스크바인 만큼 아파트 사이의 거리가 멀어 시원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변화 없이 단조로운 아파트와 그런 아파트로 뒤덮인 모스크바. 아파트가 보여주는 그런 단조로움 속에는 모스크바와 모스크바 시민들이 안고 있는 눈물과 한숨의 역사가 숨어 있다.


러시아 혁명과 "공산주의 아파트"

1913년 모스크바는 인구 200만 명이 살고 있던 세계 10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모스크바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아기를 많이 낳아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지방에서 마구 올라왔다. 임대료가 정신 차리기 어려울 만큼 빨리 올라갔고, 당시 신문에서는 한 해에도 40%씩 집 값이 올라간다고 쓰기도 했다. 집 값이 비행기 이륙하듯 올라가니 집 짓는 일이 돈 되는 사업이었다. 그래서 1870년대까지 전원을 떠올리는 통나무 오두막집이 특징이었던 모스크바는 아파트촌으로 변해갔다.


시골에 가족을 남겨두고 돈 벌러 올라온 노동자들은 수십 명이 함께 아파트 하나를 임대했다. 63명이나 되는 독신 노동자들이 방 4칸 짜리 아파트에 함께 살았다. 간단히 말해 빈민굴이었다. 모스크바 빈민굴은 이렇게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이는 모스크바 대중 교통이 그만큼 발전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노동자들이 마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것은 너무 비싼 사치였다. 그 결과 모스크바는 몇몇 구역을 제외하고 아파트촌이자 빈민굴로 변해갔다. 그러나 1917년 혁명과 함께 모스크바와 삐쩨르 주택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먹고살길 없는 대도시를 떠났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하던 노동자들은 덩그러니 남아있는 빈집을 그냥 차지했고, 주인집 식구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괜히 떠들어봐야 반동 분자로 끌려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소비에트 시대를 수놓은 까무날까가 주거 패턴으로 등장했다. 공동 주택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부엌과 화장실 하나를 두고 여러 가족 심하게는 수십 가족이 한 아파트에 사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이렇게 사는 것이 공산주의 방식이라고 소리 높여 노래했다. 까무날까는 지금도 남아있다. 외국 관광객들이 볼쇼이 극장을 보고 스쳐 지나가는 바로 그 중심부에 가장 많다. 돈 많은 사람들은 주거민을 모두 이주시키고 유럽식 내부 수리로 호화스럽게 꾸민다. 100년 전에 워낙 튼튼하고 또 아름답게 지었기 때문에 지금은 가진 자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거주 등록 - "이 사람들, 이혼한 다음에도 금슬이 좋은가 보군!"

아파트 문제를 둘러싸고 볼 수 있는 가장 신기한 현상은 부부가 이혼했을 때다. 간단히 말하면, 꼴 보기 싫어 이혼한 부부가 살던 집에 그냥 눌러 앉아 사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유는 둘 중의 한 명이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으로는 처가살이하던 남편이 나가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처갓집에서 나갈 마음도 없고 나가봐야 갈 곳도 없다면? 희한하게도 러시아에서 버티기 작전은 법으로 보호받는다. 법에 따르면 일단 어떤 사람이 신고를 끝낸 거주 등록을 취소하려면 본인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그 사람이 동의하지 못하겠다면 쫓아낼 수 없다.


거주 등록을 빌미로 이혼한 사람을 쫓아낼 수 없도록 만든 법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살집도 모자라는데 쓸데없이 이혼 같은 것 하지말고 오순도순 잘 살라는 혁명가들의 따뜻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수도세를 비롯한 세금 문제다. 수도세를 식구들 머릿수대로 받으니 거주 등록이 세금을 받아낼 수 있는 단 하나 근거가 된다. 세 번째 이유는 러시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옛날부터 인구 이동을 철저하게 통제해왔다.


거주 등록을 둘러싼 이런 속내를 몰랐던 나는 결혼 초기 장인과 장모에게 여간 짜증을 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장인 장모가 몇 번이고 다짐받은 말이 이런 것이었다. 당신, 우리 아파트 노리고 우리 딸과 결혼한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장인과 장모 처지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나쁜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결혼을 하고 거주 등록을 끝낸 다음 이혼하여 그 아파트에 눌러 살겠다고 우기는 경우다. 정 꼴 보기 싫으면 처갓집 식구들이 나가야 한다. 사위가 아파트 소유권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쫓아낼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혼한 사위가 날마다 술 퍼마시고 집안을 뒤엎는다면 처갓집 식구들은 아파트를 앉아서 빼앗기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되돌아보는 다차

다차는 주말농장이다. 텃밭이 딸린 오두막집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금은 형편없는 품삯을 받는 많은 국민들이 부족한 벌이를 채우는 곳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다차를 없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부시 대통령이나 독일 총리 방문 때마다 뿌찐 대통령은 다차를 정상 회담 장소로 이용한다. 다차에서 뿌찐과 만나는 영광은 국가원수라고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법 무게 있는 나라의 지도자들만 다차로 초대한다.


『벚꽃 동산』과 펜션

러시아에서 다차 생활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표트르는 유럽 귀족들이 전원 생활하는 것은 본받아야 한다고 러시아 귀족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러시아 귀족들도 도시 바깥에 별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다차는 이렇게 명령으로 시작되었지만 귀족들 오락으로 자리잡았다. 또 귀족들만 누릴 수 있는 권리로까지 여겼다. 가진 자들 특권을 상징하던 다차는 자연에서 즐기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었다. 실제 생활이나 문학에서 귀족들만이 하던 전원 생활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넓은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자본가 계층이 다차에 뛰어들면서 다시 시장이 형성되었고, 동시에 다차 가격도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다차와 영지는 러시아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다. 예술가들이 러시아 자연과 만나는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온 세계 연극 무대를 휘젓고 있는 체홉의 『벚꽃 동산』은 체홉 집안 이야기와 다차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주인공 로빠한은 체홉 아버지나 마라조프 할아버지처럼 농노 출신 자본가다. 나한테는 이 작품 안에 빠르게 변화하던 19세기말 러시아 사회 모습이 녹아 있어 마음에 든다. 귀족과 농노의 뒤바뀐 처지, 배운 것 없으면서도 점잖은 태도로 사업 전망을 설명하는 로빠한과 고집불통 주인님 가족, 자본주의 발전을 상징하는 철도와 도끼 소리, 앞날을 내다보며 새로운 사업인 펜션 단지 건설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로빠한...


『벚꽃 동산』 하나만으로도 체홉의 천재성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자본주의와 그 사회를 끌고 가는 자본가 그리고 그 폭풍과 같이 내다보기 어려운 미래 앞에서 부들부들 떠는 러시아 귀족. 이런 삼각 구도가 일품인 이 작품에서는 끝 모르고 발전하는 IT 산업과 그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 재미있다. 또 체홉과 같은 천재가 우리한테서는 나올 수 없는가 한숨 지어 본다.


"파스테르나크 보따리"에서 고르바초프 몰락까지

혁명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빠져나갔다. 어디로 도망갔는지 지금까지 제대로 연구된 것은 없지만 시골이나 다차로 갔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파스테르나크 가족은 이때 처음으로 다차에 감자 심고 살아남을 궁리를 했다. 파스테르나크는 이때 땅파서 감자 심는 재미에 푹 빠졌다. 후에 사회가 안정되고 먹을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때에도 그는 모스크바 남쪽에 있던 삐리젤끼노에 있는 다차에 살며 감자를 심었다. 또 그는 혁명초기에 지방 출장을 다녀오면 감자를 한 보따리씩 끌고 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남대문 시장을 오가던 러시아 보따리 장사꾼. 파스테르나크도 했던 일이다.


혁명 초기 소비에트 정부는 모든 재산을 국유화했다. 하지만 다차는 건드리지 않았다. 반혁명군인 백군과 벌이던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다차는 그럭저럭 자유롭게 거래되었다. 다차가 감자 심는 다차로 굳어진 것은 2차 대전 때부터다. 전쟁통에 먹을 것 공급하기 어려웠고, 전쟁 후에는 계속된 흉년으로 식량 위기를 맞았지만 다차 감자로 해결할 수 있었다. 다차는 노동자들한테 혁명으로 얻은 열매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프로파간다 대상이기도 했다. 혁명 전에 지은 귀족이나 자본가들 호화 다차를 사나또리아라는 이름으로 바꾼 다음 노동자들한테 개방했다.


소비에트 시대에 사나또리아는 공산당 엘리트, 중간 관리자 그리고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설로 세분되었다. 엘리트를 위한 사나또리아는 얄타와 소치를 비롯한 흑해 연안에 마련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바로 이 흑해 사나또리아 덕분에 출세한 사람이다. 그는 사나또리아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잘만 하면 중앙당 엘리트와 친분을 두텁게 할 수 있고 또 중앙무대로 진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촌뜨기 고르바초프는 사나또리아 덕분에 모스크바로 들어올 수 있었고, 사나또리아에서 권력을 날렸다. 1991년 8월 모스쿠바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던 바로 그 날, 그는 연락이 끊긴 흑해에 있는 한 사나또리아에 갇혀 권력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을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했다.



다차로, 다차로!

이 다차는 러시아에서 하나의 경제 영역으로 굳어져 간다. 감자 캐서 겨울을 땜질하는 그런 다차 경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석유 달러와 경제 발전 덕분에 점점 늘어나고 있는 부유층과 아직까지는 있는지 없는지 뚜렷이 느끼기는 어려운 중산층한테 다차는 필수품이다. 그들한테 다차는 러시아 사회 속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징표다. 게다가 다차는 그들에게 특별한 주택이고 소비재이며 동시에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상관없다, 다차와 버섯만 있으면

다차를 얘기하면서 버섯을 빼면, 사실 앙꼬 없는 찐빵이 된다. 우리네와 달리 러시아에서 말하는 버섯은 자연산이고 숲에 들어가서 따야 하기 때문이다. 그 숲에는 곰, 늑대, 여우, 토끼, 쥐와 같은 동물들이 오두막집을 짓고 산다. 어린 시절 엄마가 또 할머니가 읽어주던 동화 속 주인공들을 숲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적어도 그런 환상을 가지고 주말마다 자동차를 타고 다차로 달리고 또 숲으로 달려간다. 러시아 사람들한테는 나이가 들어서도 그런 낭만이 남아있다.


툭하면 비가 오는 8월 말부터 조용하던 다차 분위기는 술렁거린다. 체홉은 몇몇 작품에서 멜랑콜리한 가을 분위기를 얘기했지만 이것은 모스크바 시내 얘기일 뿐이다. 이때 다차에서는 버섯 몇 송이를 땄는가 하는 경쟁이 벌어진다. 가을 손님인 가랑비가 살짝 내리면 하룻밤 새에도 버섯이 부쩍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 온 다음 버섯 자라듯 이라는 러시아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도 있다. 9월은 온 러시아가 버섯으로 술렁이는 달이다. 도로마다 다차로 가는 자동차로 붐비는 것은 여름에도 그렇지만 이때에는 구석으로 들어가는 조그만 도로에도 자동차 행렬이 이어진다. 버섯 따러 가는 행렬이다.


나는 숲에 들어가는 것이 무섭고 싫다. 버섯이 많은 숲에는 대개 물기가 많은데 질퍽거리는 땅 위를 걸어 다니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물기가 많은 만큼 모기도 많다. 멀리서 온 이국 음식인 내가 아주 맛이 있는지 물지 않는 곳이 없다. 폭격 맞은 자리는 벌에 쏘인 것처럼 부어오른다. 한국에 있는 산이 그리워지는 때가 바로 버섯 따러 숲에 가자고 할 때다. 하지만 버섯 따러 숲에 가는 것은 남자와 여자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오락이다. 그래서 다차가 좋다. 그래서 주말마다 달린다. 자동차로 꽉 막혀서 미어터지는 도로를.


다차와 그래프 없는 경제학

그럼, 이제 우리 처갓집 다차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모스크바 아파트에서 우리 다차까지는 차를 타고 200km 정도 가야한다. 자동차 속도는 도로에 차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달라진다. 주 5일 근무제가 시작된 지 벌써 수십 년 된 러시아에서 다차로 떠나는 날은 금요일 오후다. 여기에 장인이 다니는 회사 직원들은 평일에 점심 시간을 15분씩 저축한다. 금요일에 다른 날보다 빨리 집에 가기 위해서다. 오후 4시쯤 장인이 집에 돌아오면 미리 사 둔 1주일 동안 먹을거리를 차에 재빨리 싣고 출발한다. 두 아이와 집사람 그리고 장모는 다차에서만 여름을 보내기 때문에 먹을 것 챙기는 일은 남자들 몫이다.


처갓집 다차 오두막집은 한 10년 전쯤에 만든 것이다. 장인이 아는 사람을 통해 구한 무르만스끄 소나무로 만들었다. 어떤 나무를 썼는가 하는 것이 다차 가격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1층 면적이 50평방미터인 처갓집 오두막집은 크기가 비슷한 다른 다차 오두막집보다 2~3배 정도 비싸다. 오두막집 안에 있는 뻬치까는 네덜란드 식이다. 뻬치까는 늘 살지 않으면 겨울에 쓸모 없는 장식품이 되고 만다. 바깥 기온이 영하 30도나 되는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뻬치까에 급하게 불을 피우면 뻬치까가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모스크바 시민들은 대개 겨울에 다차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그 추운 곳에서 하루 종일 불을 조금씩 피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있는 사람들은 겨울에도 다차를 즐긴다.


러시아 다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경제 영역이라고도 볼 수 있다. 휴대폰뿐 아니라 많은 건축 자재들이 다차로 쏟아져 들어간다. 다차 경제라고 부를 만할 텐데, 기업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만한 것이 바로 다차 현상이다. 러시아에서도 아직 연구된 것은 없지만 휴대폰 판매 증가와 다차는 분명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농촌에는 일반 전화가 거의 없는 러시아에서 휴대폰은 다차를 오가는 사람들한테는 특별한 필수품이다.


넓은 다차 한쪽 구석에는 바냐가 있다. 러시아 목욕실을 바냐라고 한다. 이 목욕실 구석에는 사우나가 있다. 사우나는 물기가 많은 러시아식과 매우 건조한 핀란드식 두 종류가 있다. 우리 다차에는 핀란드식 사우나를 설치했다. 목욕할 때는 많은 물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 다차에는 우물이 있고 그 속에 펌프를 달아놓았다. 전기만 꽂으면 물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대단한 CEO도 아닌 장인이 사우나를 만들고 우물을 판 이유는 부동산 투자를 겸한 것이다. 쌈짓돈 모아 은행에 넣어봐야 은행이 망하면 예금한 돈도 함께 날아가는 것이 러시아다. 그런 은행보다 다차는 훨씬 믿을 만한 투자 대상이다. 물론 목돈 가지고 아파트 투기를 하면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한테 그럴만한 돈은 없다. 그런 사람들이 다차에 투자만 잘해놓으면 다차 가격은 올라간다.


러시아와 러시아 시민들 행동 양식은 철학자 아담 스미스가 천 페이지 가까운 『국부론』에서 그래프도 없이 말로만 경제를 설명한 이유를 어렴풋이 나마 깨닫게 해 준다. 그가 얘기하려고 한 것은 경제 원리가 아니라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사회 조건인 것이다. 그는 사회 조건을 제대로 이해하면 그 사회를 움직이는 경제 원리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는 러시아만이 가지고 있는 사회 조건과 경제 원리가 있다. 그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한테는 아파트가 짓누르는 메뚜기 마빡 경제학이 필요하다. 그러면 러시아에서는. 보드카와 〈백조의 호수〉가 넘실대는 러시아에서는.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