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도정일·최재천
ǻ
휴머니스트
   
25000
2005�� 11��



>■ 책 소개
"대한민국 지식 사회의 열린횡적 소통"이라는 개념으로 기획된 휴머니스트의 대담 시리즈 (휴먼아이티 : HIT, Human Interlogue Terminal)의 1차완결판. 인문학자 도정일과 자연과학자 최재천이 ‘생명공학 시대의 인간의 운명’을 테마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벌인 10여 차례의 대담과4차례의 인터뷰를 책으로 엮어낸 작품이다.


과학기술, 특히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우리들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무엇인가?’라는 전통적인 물음을 다시 던져준다. 생명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시기, 생물학과 인문학이 인간의 미래를 어떻게 구성할것인지를 가슴 터놓고 이야기한다.


■ 저자 도정일·최재천
도정일은 경희대영어학부 교수,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의 기획자로,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 상임대표, 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잡지편집장,동양통신 외신부장 등을 거쳐 1983년부터 경희대학에서 비평이론 강의를 시작했고 80년대 말부터 다양한 평론과 칼럼들을 발표하고 있다. 저서로『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등이 있다.


최재천은 동물행동학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과학과 대중의 소통을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와의 대화를 강조해 왔다. 다양한 사회성 곤충과 거미, 까치 등이 갖는 사회구조와성의 생태 등에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곤충과 거미류의 사회행동 진화』『개미제국의 발견』 등이 있다.


■ 차례
초대의 글

1. 즐거운몽상과 끔찍한 현실 
2.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3. 생명복제, 이제 인간만 남은 것인가 
4. 인간 기원을 둘러싼신화와 과학의 적들 
5. 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6. 인간, 거짓말과 기만의 천재 
7. 예술과 과학, 진화인가창조인가 
8.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9. 판도라 속의 암컨, 이데올로기 속의 수컷 
10.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11.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12. 다양한 생명체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 
13. 21세기형 인간, 호모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감사의 글




대담


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

유전자로 들썩이는 세상

도정일 : 지금 생물학은 세상을 바꿔놓고 있습니다. 다윈의 생물학이 19세기 사상의 세계를 흔들었다면, 20세기 후반에 와서 생물학과 그 연관 분야들은 인간과 그의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황홀한 생물학적 유토피아의 그림도 제시하죠. 생명공학은 지금까지 인간이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자연적 한계를 일거에 제거할 수 있다는 기대와 환상을 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과 인간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차이는 유한성과 불멸성입니다. 지금 생명공학은 인간이 불멸성의 문턱에 올라설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수명은 정말 얼마만큼이나 연장이 가능할까요?


최재천 : 제 생각에는 생명과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래는 모든 사람이 최대 수명인 120세까지 질병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생명공학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이 혹시 150세, 200세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바라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최대 수명이 120세를 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몇 십 억 년 동안 자연선택이 갈고 닦은 결과를 하루아침에 뒤집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그리고 그게 정말 좋은 일일까요?


도정일 : 사람이 늙고 병들어 마침내 죽어 없어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죠. 그 두려움으로부터 고통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현대 생명공학은 인간이 그 유한성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행복의 가장 간단한 정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일 텐데, 현대 생명의학은 바로 그런 해방에 대한 전망을 주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행복을 잡으려고 조바심치는 데 있죠. 행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아주 위험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오케이, 고약한 자들과 손잡고 약과 동맹을 맺는 것도 오케이라는 게 되거든요. 이게 행복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데올로기 앞에서 인문학은 지금 사실상 속수무책이죠.


최재천 : 과학은 거기에 더 속수무책입니다. 특히 진화생물학에서는 행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가장 힘든 주제 가운데 하나이죠. 유전자는, 혹은 자연선택은, 나의 행복 같은 것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거든요. 자연선택은 내가 번식을 잘 하게끔 도와줄 수 있는 수준까지만 나의 건강을 챙겨주는 거예요. 그래서 번식이 끝난 노인네들이 자주 병원에 가게 되는 겁니다. 진화생물학자가 제일 설명하기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왜 우리가 끔찍이 행복을 추구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이 문제는 인문학에서 먼저 설명의 물꼬를 터줘야 할 것 같습니다.


도정일 :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좋은 삶이지 행복 그 자체는 아닌 것 같아요. 생명공학 기술은 통증 없는 세계를 제시하지만, 공학기술이 도덕적 판단과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르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더구나 인간이 해결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문제도 아니거든요. 기술이 그런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기술사회의 행복 이데올로기입니다. 그 이데올로기 앞에서 아주 무력해졌다는 것이 인문학의 딜레마고요. 과학과 인문학 모두 이 지점에서 함께 물에 빠지는 거죠.


인문학적 본성과 자연과학적 본성

도정일 : 학문분과들 사이에 높은 울타리를 쌓는 것으로 말하면 한국 대학들이 단연 최고 수준입니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전공의 순수성과 정통성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인접 학문끼리도 별 소통이 없습니다. 또 다른 설명은 영토 수호입니다. 내 영역과 남의 영역을 날카롭게 나눠놓고, 자기 영역을 누가 넘보나 신경을 곤두세우는 거죠. 그러나 학문세계에서 불가침은 없습니다. 불가침주의는 학문 아닌 밥그릇 싸움으로 치닫습니다.


최재천 : 이제 단순히 학제 간(inter) 연구로는 안 됩니다. 여러 학제를 단순히 통합하는 멀티(multi) 학문으로도 부족합니다. 이제 인터, 멀티라는 단순한 조합을 넘어서 트랜스(trans)를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분과가 활발하게 소통하고 서로 굳게 닫은 빗장을 열어젖힐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의 공간이 탄생해야 합니다.


도정일 :  20세기 후반 인문학과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영감의 한 원천은 생물학입니다. 생물학의 영향은 점점 더 커질 거예요. 이제부터 생물학 쪽의 발견들을 참작하지 않는 인문학은 불가능할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인간과 그의 문화적 성취에 관한 연구가 인문학인데, 지금 인간이라는 문제에 관한 과학적 발견 치고 현대 생물학을 능가할 학문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갈릴레오에서 시작되는 근대 과학의 방법이 인문학을 압도하고, 데카르트의 근대 철학이 그 방법을 옹호합니다. 실증주의 철학도 그 연장선상에 있죠. 인문학 영역인 철학이 근대시기에 오히려 인문학 전통을 내리누르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사의 맥락에서 보면 인문학과 과학이 완전히 별개의 문화인 것처럼 갈라서게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문학과 과학의 만남을 시도한다는 것은 이 300년의 해묵은 별거를 어떻게 넘어서는가 라는 문제가 되죠.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교미와 섹스는 어떻게 다른가

도정일 : 성적 대상을 선택할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세우는 말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겁니다. 사랑의 생물학적 의미는 번식의 유혹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이란 건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이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속에 인간 행위의 독특한 국면들이 있는 것 같아요. 수천 가지 별난 이유로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유전자의 명령을 벗어나는 이유가 수천 가지라는 이야기죠.


최재천 : 사회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사랑도 번식의 관점에서 분석하게 되죠. 그런데 보노보나 침팬지, 고릴라의 경우 신기한 데이터가 있어요. 으뜸 수컷의 처첩은 다른 수컷들과는 관계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암컷들 중에 2위나 3위의 수컷을 찾아가는 암컷이 있어요. 제가 발견한 것은 이렇습니다. 수컷들끼리 자주 싸움을 하니까 으뜸 수컷도 언젠가는 밀리겠지요. 그렇게 자리를 차지한 수컷은 이 전의 수컷이 가지고 있던 암컷들과 돌아가면서 다시 교미를 해요. 그 과정에서 그 수컷과 미리 짝짓기를 한 암컷은 그럴 필요가 없쟎아요. 어떻게 보면 암컷들 중에 몇몇은 앞을 내다보고 미래를 위해 투자를 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의 사회에서도 사랑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번식 때문에 생겨난 인간의 심성이라고 봅니다.


도정일 : 결국 이기적인 유전자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면 절대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죠.


최재천 :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근접 원인들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외모에 빠질 수도 있고, 권력에 빠질 수도 있고, 그밖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계산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부모님들인 것 같습니다. 자식이 결혼 상대를 이야기할 때 부모님들이 그 사람 돈은 있냐, 권세가 있는 집안이냐 등을 따지죠. 당사자는 대체로 어느 조건 하나만 보고 푹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데 이해하기 힘든 문제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도 결국 나와 유전자를 섞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상대를 고른답시고 고른 것이라는 겁니다.


동물들도 피임을 한다?

도정일 : 인간의 경우에는 번식 목적 이외의 성행위에서는 콘돔에서부터 수많은 도구들이 등장합니다. 가임 기간의 성행위는 불가피하게 수태로 이어지죠. 그런데 인간은 고의적으로 수태를 피하는 겁니다. 이건 콘돔 같은 피임기구가 없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최재천 : 인간을 빼놓고 산아 제한을 하는 동물이나 식물을 관찰한 경우는 지금까지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스스로를 자제해야 하는 순간에 와 있는 유일한 생물이죠. 우리 인간은 어느 순간에 번식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인데, 그건 사실 종족보다는 내가 애를 낳아 키울 수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할 줄 알게 된 것뿐이죠.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많이 낳아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것보다 적게 낳아 잘 키우는 게 훨씬 유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인간은 이런 결정을 부부간의 대화를 통해 상당히 이성적으로 내리지만 다른 동물들은 진화적 적응 메커니즘을 통해 이런 결정을 내립니다. 먹이가 많지 않은 해에는 새들이 알을 적게 낳는데, 그 해의 환경에 가장 적절한 전략을 세워 실시한 새들이 가장 성공적으로 새끼들을 길러내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도정일 : 사회적 강자가 자손을 더 많이 퍼뜨릴 수 있다는 건 일반적으로 진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강자라고 해서 마음놓고 자손을 퍼뜨리고, 약자라고 해서 자기 유전자를 퍼뜨릴 기회를 아주 박탈당하는 것도 아니죠. 자연도태, 자연도태 그러지만 사실 도태의 가능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 문명 사회입니다. 휴버트 험프리라는 미국 대통령에 출마했던 사람이 한 말이 있습니다. "노인, 병자, 사회적 약자들을 얼마나 보살펴줄 수 있는가가 문명의 품질을 결정한다." 강자만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소리는 자연의 명령을 어기는 것 아닙니까?


최재천 :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프로이트에 대한 판결문

최재천 : 프로이트의 이론은 저 같은 진화생물학자의 입장에서는 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일종의 신화에 불과해요. 한마디로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근거를 주려고 해도 도저히 줄 수 없는 이론이죠. 프로이트가 뱀이 길게 생긴 것이 성욕의 표상이라는 식으로 말했다면, 이것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옹호해줘야 할지 참 어렵습니다.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을 뽑는 어느 설문조사에서 프로이트가 2위로 뽑힌 걸로 기억합니다. 과학 하는 저의 입장에서 보면 참 신기한 일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요.


도정일 :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세 줄로 요약될 수 있어요. "내게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나의 무의식이다." 이건 과학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합리적이고 앞뒤가 딱딱 맞고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의 세계에서 보면 그 합리적 이야기들은 구멍이나 틈새, 모순, 생략, 은폐 같은 걸로 가득합니다. 이건 문학 창작이나 비평, 이론에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통찰이에요. 20세기 후반의 읽기 이론은 거의 다 이 통찰에서 나오거나 그 통찰에 힘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문쟁이들이 "프로이트는 죽었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거죠.


유혹하는 무의식

도정일 : 조선 왕조를 보세요. 프로이트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들이 참 많아요. 아비와 아들 사이의 갈등을 최고조로 보여주는 것이 영조와 그 아들 사도세자의 경우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뒤집어놓으면 거세 충동은 아비의 것이기도 합니다. 아들놈이 언젠가 자기를 거세하려 들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거세 공포는 아비의 것이기도 하고 아들의 것이기도 해요. 권력 승계를 둘러싸고, 또는 아비를 거세한 연후에 형제들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에 대해서도 프로이트는 그럴듯한 통찰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사회적 적용이 가능한 정신 심리적 가설과 통찰들을 그토록 광범위하게 내놓은 사람은 프로이트말고는 없어요.


최재천 : 제가 보기에는 그의 이론은 명백하게 과학적이지 못했던 것인데도 버젓이 과학적인 것처럼 설명되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프로이트는 과학을 이용해먹은 사람이에요. 그의 가설들 대부분은 검증이 불가능하고, 검증 과정도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물론 프로이트가 어떤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는 과정 그 자체는 과학적인 방법일 수 있겠죠.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갖게 되는 가장 큰 반감은 가설 그 자체에 있다는 겁니다. 신의 존재는 검증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이드나 에고의 존재를 설정하는 자체가 신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요. 과학자 입장에서 볼 때 이 점이 결정적으로 프로이트를 받아들이기 힘든 점입니다.


도정일 : 프로이트에게서 제일 큰 가설은 욕망의 가설, 그러니까 인간 행동의 밑바닥에는 성적 욕망과 그 욕망의 억압에서 생긴 무의식이 있다, 무의식의 지옥으로 내려앉은 성적 에너지는 폭발할 틈만 있으면 머리를 내밀고 분출할 기회를 노린다는 생각입니다. 이 가설 때문에 프로이트가 욕을 많이 먹습니다.


최재천 : 과학도 무의식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고 인식하는가는 분명 생각해볼 부분입니다. 프로이트가 생각한 꿈의 정체와 신경과학자들이 생각한 꿈의 정체는 상당히 달라요. 현대 뇌과학의 한 이론에 따르면 꿈이란 기억을 재정리하는 과정입니다. 필요 없는 건 과감히 삭제하고 남길 건 남긴다는 학설이죠.


도정일 : 프로이트식 꿈의 해석은 과학적 검증을 거쳐야 할 데가 많을 겁니다. 뇌신경학 쪽에서는 꿈이 기억을 재정리하는 과정이다, 버릴 건 버리고 남길 건 남기라는 말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립니다. 그 꿈이란 녀석은 불쾌한 사건의 기억이나 상처, 다스리기 어려운 트라우마의 기억 같은 걸 자꾸 떠올린단 말이에요. 꿈은 왜 불쾌한 기억을 버리지 않는 걸까? 악몽은 왜 사라지지 않고 자꾸 나타나는 것일까? 이게 프로이트의 의문이었죠. 그래서 반복충동이니 억압된 것의 회귀니 하는 이론들이 나온 겁니다.


최재천 : 그런데 선생님, 왜 제 꿈을 해몽해주는 할머니는 인정을 못 받고, 프로이트는 인정을 받습니까? (하하하) 저는 프로이트의 명성은 상당부분 허구이고 신화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프로이트가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합니다. 하나만 더 질문할게요. 프로이트를 신화라고 할 수 있다면 프로이트 신화는 분명 그 자체로 엄청나게 성공한 신화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성공한 신화가 우리 인류에게 어떤 면으로 도움이 됐습니까?


도정일 : 인간의 자기 이해 방식을 수정하도록 도왔다면 그건 큰 공로가 아닐까요? 인간 이해를 확장시킨 부분도 큽니다. 가족 로망스 이론, 우울과 자기 학대와 애도에 관한 통찰 등등 그가 인간 이해를 확장한 공로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예술의 경우에는 프로이트가 도와준 것도 많고 망쳐놓은 것도 많아요. 서구 인문학의 기원 지점, 즉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공간에서 말하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확실히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진리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플라톤은 알 수 있다고 호언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이런 걸 다 엎어놨어요. 인간은 자기를 알 수 없고, 그러므로 확실한 자기 지식이란 건 환상이 되고 맙니다.


프로이트식의 사유는 한 문명이 늙고 지쳤을 때 보이는 말기 증상의 일부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자기 반성은 귀중한 거지만, 프로이트가 촉발한 서구의 자기 반성과 해체 충동은 유럽 문명의 조락과 황혼을 알리는 징후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유럽의 핵심 지역들은 창조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예요. 병든 문명이 자빠지도록 툭 건드려주는 것도 기여가 아닐까요? 프로이트가 성공했다면 그건 장의사의 성공 같은 거죠. 서구 문명이 그 말기적 피로를 어떻게 수습할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자기를 추스러낼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죠. 유럽은 자기를 바꾸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고, 미국은 자만과 무감각에 빠져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 이해 방식을 전복하다

도정일 : 인문학적 인간 이해와 생물학적 인간론이 뇌과학의 중재를 받아 어떤 조우 지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최재천 : 생물학자가 생각하는 의식이나 혼은 모두 뇌에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지나친 중앙집권화예요. 동물 세계를 보면 모든 동물이 다 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작은 동물들은 뇌 없이 다분히 흐트러진 신경계만 갖추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뇌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현대 생물학이 모든 것을 다 뇌에다 맡기고 있다는 약간 도발적인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뇌가 모든 일을 다 하는 게 아니라, 저 바깥 신경계 말단이 하는 일이 따로 있을 거라는 거죠.


도정일 : 끝내기 전에 한마디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성에 대한 최 선생님의 이야기도 그렇고 생물학의 전반적인 설명도 그런데, 큰 틀에서 생물학은 결국 동물과 인간 사이의 유비와 유사성, 그러니까 "동물과 인간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인간과 동물들은 가깝다. 인간이 개미하고 얼마나 가까운가?" 이런 소릴 하는 데 온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동물의 기준에서 인간을 설명하는 건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게 하는 데 기여해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사성만 자꾸 세워나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같은 문화나 문명권에 속한 사람들은 국가나 인종이 달라도 문화적 유사성 때문에 유대감도 높고, 가치나 태도, 행동의 유사성도 높아요. 그런데 사회생물학은 이런 차이에 대해서는 좀체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최재천 :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이른바 형질의 진화라는 관점이 등장합니다. 형질 자체가 어떻게 진화해왔느냐를 추적하는 것과, 실제로 그 생물 진화와 형질이 맞아떨어지느냐 하는 것을 검증하는 연구를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는 상당히 큰 진보를 하고 있어요. 다만 이런 분석이 아직까지는 동물 연구를 중심으로만 이뤄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인간과 동물이 다르지 않다고 줄기차게 떠들었지만, 왜 다르지 않겠습니까? 생물학이라고 해서 같음만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름도 많이 연구해요. 다만 다름이 다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결국 같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하나의 DNA로부터 진화한 집안 식구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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