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려다오

   
이가환 외(역자 : 안대회)
ǻ
태학사
   
8000
2003�� 11��



>■ 책 소개
18세기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이용휴,이가환 부자의 산문집. 착상이 기발하고 내용이 참신한 이용휴의 산문과 지사적 비애 등을 짧고 건조한 문체로 표현한 이가환의 산문 모두 전통적창작세계에서 탈피하여 당시 문단의 선구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기존 산문에 대해 "낯설게 하기"를 추구하면서도 아름다움과 격조를 잃지 않는 혜환의글과 이가환의 짧고 건조하지만 기발한 글이 잘 조화되어 함께 실렸다.


■ 저자 이가환·이용휴
이가환은 18세기를 대표하는문인이다.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당파로는 남인(南人)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성, 형조판서의 벼슬을 거치며 남인의 정치적 지도자로성장하였으나 신유박해 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전통적 창작세계를 탈피하여 참신한 시와 산문을 창작하여 문단의 선구자가 되었으며,『금대시문초』를 남겼다.


이용휴는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명(景命), 호는 혜환이다.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고인지법(古人之法)"에 맞는 문장을 이룩하는 데 노력을 쏟았다. 그러나 행장이나 묘지명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남인 문단의 영수로 30여 년을 재야 문단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남인 문단에서의 영향력뿐 아니라, 여항시단에도 많은 기여를 하여 이언진, 이단전 같은 시인들을 제자로 거느리기도 하였다. 지은 책에 『혜환잡서』『혜환시집』등이있다.


■ 역자 안대회
충남 청양 출생으로 연세대 국문학과 및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문학 박사이며,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를 거쳐, 2005년 현재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조선후기 시화사 연구』와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7일간의 한자여행』 등이, 옮긴 책으로 『역주균여전』『소화시평』『선집 한서열전』『궁핍한날의 벗』『조선시대의 한시 1·2·3』 등이 있다.


■ 차례
태학산문선을발간하며
일러두기
일침견혈의 산문미학


제1부 이용휴 산문선
내면을 보는 눈
나를돌려다오
금강산으로 떠나는 신문초를 보내며
연경에 가는 홍대부를 보내며
큰 지혜와 큰 재능
홍문백의 환갑을축하하며
허성보를 배웅하며
외손자에게 써 준 잠언
네 마음을 물어보라
하루가 쌓여 열흘이 된다 외


제2부 금대 이가환 산문선
기원이란 화원
잠자는창
독서하는 곳
낙청대에서 태평성대를 즐긴다
다섯 가지 가르침
"옥계청유권" 서문
"풍요속선" 서문
"옥천시사"시집 서문
"솔경시" 서문
"아희원람" 서문 외


원문 제1부
원문 제2부





나를 돌려다오


일침견혈의 산문미학

기라성 같은 문사들이 즐비한 18세기 문단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빛을 발하는 문사가 바로 이용휴(1708~1782)와 이가환(1742~1801) 부자(父子)다. 살아있는 동안 부자는 세인들의 찬탄과 질시를 받으며, 작가로 명성을 날렸으나 아들인 이가환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이후 문단의 전면에서 자취를 감춘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이용휴는 18세기 문단에서 소품문의 유행을 선도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그의 아들 이가환의 묘지명에서 정약용이 언급한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지은 글은 기굴하고 참신하고 교묘하였으니, 요컨대 전우산이나 원석공의 아래에 있지 않았다. 자호를 혜환거사라 하였다. 원릉(元陵, 英祖) 말엽에 혜환의 명성이 한 시대의 으뜸이어서 무릇 글을 새롭게 바꾸고자 수련하는 자들이 모두 와서 수정을 받았다."


조정에 봉사하는 사대부들의 수중에 문학이 종속되어 있던 시기에 재야에 있는 선비로서 문단의 중추가 되어 문풍(文風)을 주도하였다는 언급은 그의 위상이 얼마나 막대하였는가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같은 위상은 그 자신의 위대함뿐만 아니라 그가 후배 문사들에게 미친 큰 영향력과 아들 이가환의 존재에 기인하기도 한다. 이 부자는 영정조 문단의 중심부에서 활약한 대표적 작가로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용휴와 이가환의 산문을 함께 번역하여 소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용휴는 관향(貫鄕)이 여주(驪州)이고, 자가 경명(景命), 호는 혜환(惠寰)이다. 혜환의 집안은 정릉 이씨로 불리는 남인(南人)의 명문가다. 이 집안은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때 유배당하고 장살(杖殺)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그러나 이씨들은 그들의 역량을 학문에 쏟아 부어 18세기에 뛰어난 학자와 문인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혜환은 섬계 이잠의 아우 이침의 아들이다. 생원시를 합격한 뒤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일생을 재야에 묻힌 선비로 보냈다. 성호 이익의 조카로서, 성호의 경세학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양명학, 불교, 도교에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학문을 바탕으로 문학에 전력하여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군림하였다.


이가환은 자(字)가 정조(廷藻), 호가 금대(錦帶) 또는 정헌(貞軒)이다.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정계에 진출하여 형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출중한 기억력과 재능으로 성호로부터 내려온 가학을 이어받아 당대에 짝할 이가 드물다고 할 정도로 학문과 문학에 뛰어났다. 그리하여 남인의 지도자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으나 바로 그 점을 극도로 미워하는 반대파들에 의하여 신유사옥 때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이후 혜환과 금대의 저작은 간행은커녕 불온한 글로 낙인찍혀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하지만 18세기 후반기의 문학을 거론할 때 이들 부자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다.


혜환은 출사(出仕)를 포기한 채 일종의 전업작가로서 한 평생을 보냈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한 전문 문인이라는 요건은 그의 문학의 전제조건이다. 정치적으로 몰락한 남인 명문가의 일원으로서 혜환은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문단 내 전통의 파괴에 작가적 역량을 쏟았다. 그의 사유체계 역시 주자학적 사유체계에서 이탈하여 양명학에 기울었다. 그가 조선시대 산문의 주류인 당송고문을 버리고 소품문으로 창작 방향을 잡은 것은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원심력의 표현으로 보인다. 우상화하고 획일적인 기존 문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혜환은 산문의 형식에서부터 미학이나 소재, 제재까지 철저하게 바꾸고자 하였고, 그것이 그의 소품문의 남다른 특징이다. 또한 작자의 주관과 감정을 드러내는 글자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건조한 문장을 구사한다. 길이가 짧고, 글자의 단련에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전통과의 결별을 통해 산문에서 낯설게 하기를 추구하되, 결코 산문예술의 아름다움과 격조를 잃지 않았다.


혜환의 글은 그 주제나 내용 면에서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는 정치나 국가, 학문이나 제도를 말하기보다는 언제나 인간다운 삶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내면을 보는 눈(贈鄭在中)」이나 「나를 돌려다오(還我箴)」「수려기(隨廬記)」「아암기(我庵記)」등의 글이 대표적이다. 자아발견과 깊은 관련을 맺는 이러한 글들은 타락한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를 지녔다. 그의 글은 철학적 개념의 사용을 극히 자제한 산문이지만, 글의 의미는 양명학의 사상적 이념을 발산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18세기 사회를 읽을 때에 혜환의 산문은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것이다.


혜환에 비하여 금대는 문학에 기울인 공력이 다소 떨어진다. 그러나 혜환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뿐이요, 그의 수준은 그 시대 어떠한 작가에 비해서도 우수하다. 그의 산문은 대체로 아버지 혜환의 자장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수사나 내용, 주제 면에서 혜환의 특징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독특한 그만의 개성도 지녔다. 그의 산문은 지사적 비애와 결벽적 정서를 자아낸다. 문체는 길이가 짧고, 건조하면서도 기발한 착상과 주제의 선명한 부각을 장기로 한다.


혜환과 금대, 두 부자의 글은 조선 후기 산문사에 높은 성취를 일구어냈다. 산문에서 보여준 그들의 시도와 실험정신은 현대의 산문 예술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제1부 이용휴 산문선

내면을 보는 눈(贈鄭在中)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부의 사물을 살피는 외부를 보는 눈이고, 다른 하나는 이치를 살피는 내부를 보는 눈이다. 어떤 사물이고 간에 이치가 없는 것이 없고, 외부를 보는 눈에 의하여 현혹된 자는 반드시 내부를 보는 눈에 의하여 바로잡혀야 하므로 눈의 기능은 온전하게 내부를 보는 눈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외부를 보는 눈이 도리어 내부를 보는 눈에 해를 끼친다. 옛날 사람이 장님이던 처음 상태로 나를 돌려다오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재중은 올해 나이 사십이다. 사십 년 세월 속에서 눈으로 본 것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부터 시작하여 팔십 노인에 이른다 해도 예전에 본 것과 다르지 않을 터이니, 뒷날의 재중이 현재의 재중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재중은 외부를 보는 눈에 장애가 생겨, 사물을 보는 데 방해를 받아 오로지 내부를 보는 능력만을 얻었으므로, 이치를 더욱 훤하게 터득할 것이다. 그러므로 뒷날의 재중은 오늘날의 재중과는 기필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눈동자의 백태를 없애는 처방은 말할 것도 없고, 금비(金篦)로 각막을 깎아 눈을 뜨게 만드는 의술조차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 정재중의 이름은 문조로, 서울 사람인데, 나이 사십을 전후하여 눈이 먼 모양이다. 그를 아는 자는 당연히 참담한 심정으로 위로해야 한다. 하지만 이용휴는 평범한 위로의 말을 하지 않고 의외로 축하의 말을 건넨다. 육체는 장님이 되었지만 이제야 진리를 볼 수 있는 내면의 눈을 얻게 되었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서 외물(外物)보다 내면의 진실을 중시하는 이용휴의 사상이 드러난다. 그리고 내면에 눈을 뜨라는 논지의 글이 혜환 이후 적지 않게 등장하였다.


살구나무 아래 작은 집(杏嶠幽居記)

늙은 살구나무 아래 작은 집 한 채 있다. 방에는 시렁과 책상 등속이 삼분의 일을 차지한다. 손님 몇이 이르기라도 하면 무릎을 맞대고 앉는 너무도 협소하고 누추한 집이다. 하지만 주인은 아주 편안하게 독서와 구도에 열중이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 작은 방에서 몸을 돌려 앉으면 방위가 바뀌고 명암이 달라지네. 구도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바뀌면 그 뒤를 따르지 않을 것이 없지. 자네가 내 말을 믿는다면 자네를 위해 창문을 밀쳐주지. 웃는 사이에 벌써 밝고 드넓은 공간으로 올라갈 걸세."


* 원문이 87자에 불과한 짧은 글이다. 손님 몇이 앉으면 무릎이 서로 닿는 지극히 협소하고 누추한 집이지만 그 속에 살고 있는 주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편안하게 독서하고 구도한다. 현실이 매우 어렵다고 해도 그 현실을 견디며 마음을 다스리며 구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재야문사의 삶이 보인다. 불만을 토로해야 할 슬픈 현실을 감내하는 집 주인을 따뜻하게 다독거리며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비좁은 집안도 광대한 우주와 같다고 위안하는 작가의 유머가 문장 후반부에 전개된다.


어린 조카딸을 묻고서(亡女壙銘)

죽은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전판관 완산 이극성이다. 그 선대에는 저명한 분이 계셨으니 지봉 선생 이수광이다. 어머니는 여주 이씨 성호 선생 이익의 딸이다. 죽은 아이는 나면서부터 조숙하고 지혜를 갖추었다. 대여섯 살 때 언문을 통했고, 구구단을 잘 했다. 때때로 고금 역사의 성패를 따져보고, 인물의 장단점을 논하였고 간간이 정확하게 짚어냈다. 또 성품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말씨와 웃음이 적었으며, 시끄럽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여, 여사(女士)의 풍모를 가졌다고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다.


정해년에 병으로 죽으니, 태어난 해인 을해년과는 겨우 13년밖에 떨어지지 않는다. 면천의 방축동 갑좌에 묻으니 집 가까이에 두어 나무하고 소치는 아이들이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는 심사다.


명을 쓴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는 네 부모가 꿈을 꾸어도 너를 본 적이 없었으니 아무 인연이 없어서였지. 네가 죽고 난 뒤에는 네 부모가 앉으나 누우나 늘 너를 보게 되니 인연이 있어서다. 심하여라! 사람을 얽어매는 인연이란 이다지도 질기구나.


아! 이웃집 호호백발 노파는 가난에다 병들어서 날이면 날마다 "죽어야지, 죽어야지" 원하는데도 그토록 오래 산다. 그러니 오래 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눈을 감는단 말인가?


* 13살에 죽은 종질녀를 애도한 글이다. 간단한 이력과 행적, 그리고 죽은 사실을 서술하였다. 본문 그 어디에서도 조카의 요절을 슬퍼하는 글자를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냉랭하게 글을 썼다. 그러나 집 가까이에 묘를 쓴 이유를 든 데에서 부모의 저린 아픔을 전해준다. 이 글의 핵심은 명사(銘詞)에서 찾을 수 있다. 죽은 딸과의 질긴 인연을 말함으로써 아프도록 잘 드러냈다.



조물주에게 집을 사다(爲鄭德承戱作買宅券)

집을 지은 다음에는 계약서를 만든다. 집을 지은 지 몇 년 뒤에 해가 신(辛)의 자리에 있고, 달이 병(丙)의 자리에 있어 문서를 만들어 집과 교환하기에 알맞은 날이었다. 문서를 작성하니 그 내용은 이렇다.


"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아무개가 조물주로부터 집 한 채를 샀다. 집은 모두 몇 칸이고 집 둘레는 여러 종류의 나무 몇 그루가 두르고 있다.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왼편은 진좌(震坐), 오른편은 태좌(兌坐)로 남향이다. 집 값은 동전 몇 백 냥이다. 이 문서를 작성한 이후로 세상이 다하고 우주가 끝날 때까지 영원토록 집을 달라고 하는 자가 없으리라. 혜환도인이 남해대사의 옛 일에 따라 보증을 선다."


* 원 제목을 풀이하면 정덕승을 위해서 장난삼아 집을 사는 문권을 짓는다이다. 자기 소유의 터에 집을 지을 경우 누구에게 집을 살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 문서는 실제로는 만들 필요가 없는 문서다. 조물주로부터 집을 산다는 문건을 작성한다는 발상이 흥미롭다. 모든 것은 조물주로부터 잠깐 빌려서 사용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제2부 금대 이가환 산문선

잠자는 창(睡窓記)

허자는 몹시 가난하여 튼튼하고 조용한 집이 없다. 대신에 골목에 초라하고 자그마한 집 한 채를 겨우 갖고 있다. 집은 사방이 한 길쯤 되는 넓이지만 허자는 겨우 칠 척 단신에 불과하므로 방에서 발을 뻗더라도 남는 공간이 있다. 이보다 넓어 비록 천만 칸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더구나 창 안으로는 먼지가 들어오지 않고 서책이 죽 꽂혀 있어 마음은 즐겁고 기분은 쾌적하다. 창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른다. 얼마나 상쾌한가!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한다. "창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허자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설사 안다 해도 그가 간여할 일이란 없다. 따라서 잠을 잔다는 핑계를 대고 창 안에 숨어서 잠자는 창(睡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잠을 깨우는 사람으로는 오직 가끔 찾아오는 희황상인이 있을 뿐이다.


* 잠자는 창(睡窓)이란 이름의 집에 붙인 기문이다. 골목 집에 붙어 있는 작은 집,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독서하는 가난한 선비의 삶과 정신을 표현하였다. 창의 안과 밖은 전혀 다르다. 창 밖의 현실에 참여하지 못하므로 창 안에서 잠이나 자겠다는, 뇌락한 선비의 심기를 다독거린 작품이다. 혜환의 산문정신을 되살려 쓴 문장이다.


『옥계청유권』서문(玉溪淸遊卷序)

상말에는 천 리마다 풍습이 다르고, 백 리마다 풍속이 다르다(한서[漢書) 왕길전[王吉傳]에 나오는 말)는 말이 있거니와 천 리 백 리마다 다른 데 그치겠는가? 지척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현재 도성은 사방 10리로 뻗어 있는데, 북쪽은 백악이요, 남쪽은 목멱산(남산)이며, 중간에는 개천(청계천)이 있다. 개천의 북쪽에는 운종가(雲從街)가 횡으로 나 있고, 길을 끼고 저자가 늘어서 있다. 이 지역에 사는 백성들은 시정인(市井人)으로 이익의 추구에 능하다. 개천의 남북쪽에는 모두 역관과 의원들이 거주한다. 높은 벼슬아치가 되는 길이 막혀 있는 그들은 이익을 중시하고 문학을 가벼이 여긴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대를 이은 명가 집안이 있어 자중자애할 줄을 안다.


경복궁의 남쪽은 육조거리이고, 그 서쪽은 빈 땅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이서(吏胥)가 많이 사는데, 업무에 노련하기는 하지만 질박하고 성실한 자가 적다. 도성의 동남쪽은 땅이 비습하고 평탄하고 넓기 때문에 군인들이 거주한다. 남새밭을 가꾸고 수예(手藝)로써 먹고살기 때문에 시골 사람과 비슷하다.


도성의 동북쪽은 성균관 지역으로 유생들과 더불어 친하기 때문에 완악하면서도 의기가 있다. 서북쪽에는 내시가 살고 있어서 깊은 건물과 꼭 닫힌 문으로 집안을 단속한다. 서남쪽은 삼문에 가까워서 미천한 백성들이 조그만 이익을 영위하기 좋아한다. 사대부들은 곳곳에 섞여 산다.


각 지역 사람들은 제각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어 그 기호가 심하게 다르다. 그들의 차이는 복식과 언어, 행동거지로써 구별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백악 아래 지역이 가장 외진데, 생리(生理)를 영위할 것이 드문 대신에 시내와 바위, 숲의 경물이 아름답다. 따라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생업에는 큰 관심이 없고, 결사를 맺어 동료들과 운을 나누어 시 짓기를 좋아한다. 곧잘 맑고 빼어난 시가 지어져 후세에 전할 만하다. 이 시권은 그 중의 하나다.


* 18세기에는 여항인들이 집단적으로 성황리에 문예활동을 벌여서 적지 않은 시사(詩社)가 만들어졌다. 그 여항인들이 모여 만든 시 모임의 하나가 옥계시사다. 이 시사는 1786년 천수경과 장혼 등의 주도 하에 현재의 인왕성 아래 지역에서 결성되었다. 그들이 시집을 엮고 금대에게 서문을 요청하였다. 금대는 당시 서울이 지역과 신분, 경제력으로 서로 분리되어 구성된 현상을 포착하여 시사의 형성이 그러한 서울의 도회지 환경에서 만들어졌음을 서술하였다. 당시 서울의 문화를 이해하는 좋은 글이다. 현재도 1791년 유두날 송석원에서 시회를 열고 이를 기념하여 엮은 시화첩이 남아 있다.


서북방의 인재(定州進士題名案序)

국가에서는 실시하는 진사시험이 끝나 임금님께서 대궐에 임석하셔서 합격자를 발표할 때에는 언제나 200명 모두가 대궐 뜰에 들어가 머리를 수그린 채 차례에 따라 호명하는 대로 절하고서 교지를 받는다. 모두가 기러기처럼 앞으로 나아갔다가 물고기처럼 줄지어 뒤로 물러 나오는데, 그때까지는 서로 아무런 차별이 없다.


그러나 대궐문을 나서면 사정이 다르다. 서울과 서울 부근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차례대로 관리에 임용이 되어 현령이나 목사(牧使)에 이른다. 그들은 영화와 부를 누리다가 인생을 마치는 반면에 먼 지방에 사는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져 출중하다고 하여도 하나같이 벼슬 없이 베옷을 입고서 산골짜기에 처박혀 살다 죽는다. 슬픈 일이다.


성상이 등극하신 지 10년이 되던 해에 나는 정주의 수령으로 부임하였다. 이 고을에 진사제명안(進士題名案)이란 것이 있어 가져다 검토해 보니 경태 경오년(1450)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올린 자가 약간 명이었고, 그 가운데 관리에 임용된 자가 겨우 약간 명이었다. 아! 하늘이 이들을 벼슬자리에 제한하려고 했는가? 그렇다면 무엇 하러 재능을 부여하여 진사의 이름을 얻게 만들었단 말인가? 국가가 이들의 임용을 막으려 했는가? 법령을 뒤져보았으나 그런 조항이 없다. 게다가 성상께서는 관료를 임용하는 시기가 되면 언제나 서북의 인재를 거두어 쓰라는 당부를 지극히 간절하게 내리곤 하신다.


따라서 나는 이 책자를 일부러 드러내어 소개함으로써 하늘은 사사로이 인재를 차별하지 않고, 국가 또한 차별하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관료의 임용을 맡은 사람들은 두려워해야 함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고 싶다.


이 고을에서 관료에 임용된 자가 약간 명인데 그들 모두는 백 년 이전에 임용된 자들이요, 현재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또 이 사실을 드러내어 소개함으로써 풍습의 잘못됨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심해지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 현실에 대한 금대의 인식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진사제명안이란 한 고을 출신의 진사의 명단을 순서대로 기록한 책자다. 금대가 수령으로 재직한 정주 출신의 진사 급제자가 모두 그 안에 등재되어 있다. 그 책자를 보고 당시 위정자로 하여금 서북 지방 인재에 대한 조선 정부의 차별상을 고발하기 위하여 이 글을 썼다. 벌열에 의하여 국가의 모든 것이 독점되던 조선 후기에 관료 임용정책이 얼마나 폐쇄적으로 운영되었는지를 선명하게 폭로한다.


낙취첩에 부친다(題樂吹帖)

어린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수수께끼 장난을 하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그 내용을 다 깨우치고 종신토록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면 입에 가시가 돋친 듯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대여섯 번을 반복해도 깨치지 못한다. 그리고 날이 새도록 글을 외게 하고 다음날 아침에 외도록 하면 벌써 많은 것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서당 훈장의 호된 회초리를 번번이 맞는다. 재능이 민첩하고 둔한 차이가 그렇게도 현격하기에 그럴까? 그 까닭은 선(善)을 밝히는 일은 그토록 힘들고, 악한 일에 물들기는 그토록 쉬운 데 있다.


어린 아이들을 깨우치는 방법으로는 그들을 일찍 공부하는 데로 유도하는 길이 가장 낫다. 일찍 유도하면 뜻이 집중되고, 뜻이 집중되면 학업에 전념하고, 학업에 전념하면 성취를 거두게 된다. 학업에 성취를 거둔다면 예전에 어렵던 것은 도리어 쉽게 하고, 예전에 쉽던 것은 도리어 하기가 어렵게 된다. 타고난 재질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습관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다.


『예기(禮記)』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직 학도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때에 저지하는 것을 예방이라 한다. 학도가 공부할 만할 때 공부시키는 것을 때를 잘 선택했다고 말한다. 잘못을 저지르고 난 다음에 저지한다면 차이가 나서 학도가 학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적절한 때가 지난 다음에 배우려고 하면 아무리 애를 많이 쓰더라도 학업을 이루기가 어렵다."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 박의상의 어린 아들을 위해 훈장인 신의칙이 일상에 필요한 사실을 적은 『낙취첩』을 엮고서 금대에게 발문을 부탁하였다. 이 글에서 금대는 어린 아이를 공부로 이끌기 어려움을 말하고, 무엇보다 일찍이 공부로 유도하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요즈음의 상황과 비교해 봐도 좋을 문장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