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

   
손문숙
ǻ
힘찬북스
   
14800
2020�� 09��



 ■ 책 소개


‘책은 세상을 기억한다. 책이 내게 남긴 것을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모여서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한 여자의 전형은 아내, 엄마, 며느리, 아줌마이지 일하는 여자가 아니다. 여자들은 어렵게 회사에 들어가도 결혼 후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경력 단절 여성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여자들은 직장인이었다가 평범한 아줌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능력과 상관없이 모성이라는 굴레에 매여 육아에 매달리느라 조직과 사회로부터 단절된 채 살아간다.

육아와 직장을 병행해야 하는 한국 사회의 여자들에게는 독서를 통한 자아 성찰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과의 긍정적인 소통이 더욱 중요하다. 여자들에게 독서 모임을 통한 ‘함께 책 읽기’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어른의 책 읽기는 인생의 경험만큼 배경 지식이 생겨서 청소년기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을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책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아 제2의 인생을 만나기도 한다.

여자들이 독서와 독서 토론을 하면 자존감이 떨어질 수 있는 시기에 자아를 긍정적으로 형성할 수 있고 타인과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운영하는 독서 토론 모임에서는 토론할 책을 같이 의논해서 정하기 때문에 문학, 철학, 사회, 역사, 예술 등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자신의 고정 관념을 깨고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 저자 손문숙
인천광역시교육청에서 28년째 근무하고 있는 교육행정공무원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국어 교사나 사서가 되고 싶은 문학소녀였다. 사범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했으나 몇 년 동안이나 교원 임용이 적체되어 교원 임용고사 대신 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글쓰기 강사의 조언을 듣고 독서 학습 공동체 숭례문학당에서 독서 토론을 공부했다. 직장 내 독서 토론 모임을 만들어 여자 동료들과 4년째 독서 토론을 하고 있다. 동료들과 독서 토론한 내용을 주로 블로그에 남긴다. 퇴직 후에도 책을 쓰면서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지인들과 같이 운영하는 꿈을 꾸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여자들의 함께 책 읽기는 뭐가 다를까?
-디지털시대에 필요한 깊이 읽기 능력을 깨워주는 독서 토론의 힘 

Ⅰ 인간-태어나서 사는 동안의 예의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_《데미안》 헤르만 헤세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_《달과 6펜스》 서머셋 모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_《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교양인이 되는 법《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_ 페터 비에리 
여행은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는 마법같은 경험_《여행의 이유》 김영하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_《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Ⅱ 죽음-B와 D 사이, 그 어디쯤
아프다는 것은 그저 다른 방식의 삶이다_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나이 드는 것은 쇠락이 아니라 성장이다_《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자_《죽음의 에티켓》 롤란트 슐츠 
그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_《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_《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감염병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성실성_《페스트》 알베르 카뮈 

Ⅲ 여성-깨어나고 있는 힘
여성들이여,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라_《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이 세상 모든 김지영의 목소리를 꿈꾸며_《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나는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예요_《딸에 대하여》 김혜진 
새로운 시선으로서의 페미니즘_《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은 폭력_《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여성과 남성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자_《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Ⅳ 사회- 타인에게 공감하는 우리
평범한 시민도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_《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국민의 행복은 인간적 가치의 존중에 달려있다_《밤 산책》 찰스 디킨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_《소년이 온다》 한강 
그날 현장에 달려간 걸 후회하지는 않아_《거짓말이다》 김탁환
살아남아야 할 이유_《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가장 무서운 폭력, 모멸감_《모멸감》 김찬호 
평범한 아이도 악마가 될 수 있다_《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이 되살아나지 않게 하려면_《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재난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다_《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에필로그 일기 마니아 문학소녀는 오십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


인간 - 태어나서 사는 동안의 예의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_《데미안》헤르만 헤세/민음사/199
7

내 첫사랑은 데미안이었다.


중학교 때 문학반에서 《데미안》을 처음 읽었다. 중학생 때는 단순히 스토리 위주로 내용을 이해했다면 중년이 되어 독서 모임에서 다시 읽었을 때는 인생의 나이테만큼 이해력도 깊어져 문장마다 곱씹게 되었다. 같이 토론한 오십 여교사가 ‘중학교 때 데미안이 첫사랑이었다’라고 했을 때 데미안을 처음 읽었던 때가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어렴풋이 ‘내게도 데미안처럼 생각이 깊고 어른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전은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에 대한 보편성을 이야기한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변기다. 하지만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에 현대인들도 공감할 수 있다. 헤세는 데미안의 말을 통해 ‘어디서나 연합과 패거리 짓기가 기세를 떨치고 있다고, 그러나 그 어디서도 자유와 사랑은 없다’라고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을 비판했다.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개인들이 공동체로 도피하면서 패거리 짓기를 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대학 입학 논술고사를 치르러 가는 아들을 데리고 남편과 그 대학에 갔다. 아들을 시험장에 들여보내고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를 거닐며 잠시 낭만을 느껴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리고 말았다.


“촛불집회 나오는 빨갱이 새끼들은 싸그리 다 죽여버려야 해!”


말로만 듣던 ‘태극기 부대’ 아저씨였다! 우리한테 하는 말이 아닌데도 너무 무서워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빨리 가자며 남편 옷소매를 끌고 그 자리를 피했다. TV에서 매일 보던 태극기 부대와 직접 마주치니 기분이 착잡했다. ‘내 생각만 옳고 나만 애국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오만한 일인가!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이나 21세기인 지금이나 불안한 개인들이 패거리 짓는 혼돈의 세상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비단 태극기 부대뿐만 아니라 진보와 보수로 분열되어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요즘의 한국 사회를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헤세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상은 무엇일까? 헤세는 데미안의 입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혼돈기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누구나 나름으로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면서도 자신을 알고자 노력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개인들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p.9』

한 사람 한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개인들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어떤 경우에도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라고 헤세는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우리도 모르게 허물을 벗고 알의 껍데기를 부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_《달과 6펜스》서머셋 모옴/민음사/2000

“월급이 들어오는데 어느 순간 하나도 기쁘지가 않은 거예요.”


매월 꾸준히 들어오는 고액의 월급과 번듯한 회계사로서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비로 가득한 도시의 생활은 공허하고 그녀는 하루하루가 불행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그녀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산골로 들어가 생태운동연구소에 몸담고 살면서 '대안적인 삶'을 실천하고 있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로 산속 나무들과 야생초 이름을 외우며 산골에서 자급자족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내게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환한 미소는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보였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 또한, 청년 앨리스와 비슷한 선택을 한다. 그는 타성적 욕망을 암시하는 ‘6펜스’의 세계를 떨쳐버리고 본원적 감성의 삶을 지향하는 '달'의 세계로 도망쳐 나온 독특한 인물이다. 이 책에는 스트릭랜드가 최후의 그림을 완성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는 안정적인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오직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무일푼으로 떠돈다. 나병으로 죽어가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른 원시적인 영감을 쏟아 낼 그림을 완성하는데 마지막 영혼까지 쏟아붓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건 행복한 삶이 아닌데…’ 하면서도 변화 없이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간다. 모든 것을 돈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자존감이 떨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돈이 넘쳐나는 사람들도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힘들어서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도 못 한 채 살아간다. 스트릭랜드처럼 현실을 포기하고 꿈을 좇아 떠날 용기도 없다.


바로 그런 순간, 책 읽기는 현실에 안주한 채 꿈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꿈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해봄으로써 잊었던 자신의 꿈을 소환할 수 있다. 《달과 6펜스》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어느 회원이 남긴 멋진 소감이 떠오른다.


“우리는 월급쟁이 ‘6펜스’지만 마음에는 ‘달’을 품고 살아갑시다!”


친구들은 처음에는 작가가 되겠다는 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네가 하는 말이 허황되게 느껴지지 않아. 넌 정말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열심히 해, 장하다. 내 친구!”라며 응원을 해주고 있다. 내 꿈을 지지하다가 그녀들도 자연스럽게 내가 운영하는 독서 토론 모임의 열성 회원들이 되었다. 나와 친구들은 책을 통해 같이 성장해나가고 있다. 가슴 속에 꿈 하나씩 품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는다. 늙은 마음을 품고 살면 노인이 되고 젊은 마음을 품고 살면 청년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 - B와 D 사이, 그 어디쯤

나이 드는 것은 쇠락이 아니라 성장이다_《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미치 앨봄/살림출판사/2010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인정하라.”, “과거를 부인하거나 버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타인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라.”, “너무 늦어서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p.51』


이것은 모리 교수의 아포리즘이다. 모리는 루게릭으로 죽어가면서도 매일 죽어가는 삶에 대한 단상들을 아포리즘으로 적어갔다. 모리의 아포리즘이 알려지면서 미국 ABC TV의 유명한 토크쇼 ‘나이트라인’ 방송에까지 소개되었다. 미치 앨봄은 방송을 통해 모리가 루게릭병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16년 만에 은사님을 찾아간다. 미치는 대학 시절에 사회학을 가르쳤던 모리를 코치라 부르며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자신의 꿈도 잃어버린 채 디트로이트에서 성공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칼럼니스트로 살아가고 있었다.


책 속에서 모리와 미치는 화요일마다 인생의 의미를 주제로 열네 번의 수업을 한다. 대화의 주제는 사랑, 일, 공동체 사회, 가족, 나이 든다는 것, 용서, 후회, 감정, 결혼, 죽음 등이다. 모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지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어.”(p.129)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언젠가 자신이 죽을 걸 안다면 사는 동안 자신이 인생에 훨씬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보낸다. 목숨이 남아있을 때 사랑하는 이들과 치른 장례식 장면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이 드는 것은 단순한 쇠락이 아니라 성장이야. 그것은 곧 죽게 되리라는 부정적인 사실, 그 이상이지. 그것은 죽게 될 거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덕분에 더욱 좋은 삶을 살게 되리라는 긍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네.” -p.173』


그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실천하고 있는가?'라고 나에게 질문해본다. ‘코로나 19’가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을 때 독서 토론 모임 회원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집단 감염에 관한 뉴스 때문에 사람들은 장례식장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기를 꺼렸다. 하지만 독서 토론 모임에 열심히 나오는 회원이라서 몇 명이 마스크를 쓰고 조문을 했다. 장례식장에는 평소보다 훨씬 적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조문을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초상을 치른 회원도 독서 토론 모임 회원들의 위로에 무척 고마워했다. 내가 떠난 후에도 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갈 수 있으려면 ‘여기 있는 동 안에 사랑하는 이들을 만지고 보듬으라.’는 모리의 가르침처럼 내 주변 사람들을 더욱더 보듬고 사랑해야겠다.



여성 - 깨어나고 있는 힘

여성들이여,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라 _《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솔/2019

《며느리 사표》(영주, 사이행성, 2018) 라는 재미있는 책이 있다. 9남매 장남인 시아버지와 3남매 장남인 남편이 일군 시월드에서 23년간 살다가 시부모님에게 며느리 사표를 내고 남편에게는 이혼을 선언한 50대 여성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며느리, 아내, 엄마가 아닌 자신만의 꿈을 찾기 위해 독립하기로 결심한다.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글을 쓰고 낮잠 자고 책 읽고 영화를 봤다고 한다. 명절을 앞두고 며느리 사표라고 쓴 봉투를 내밀었을 때 화를 낼 줄 알았던 시부모님은 오히려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아무런 부담 없이 편한 마음이 들 때 온다면 좋고, 안 와도 괜찮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때 저자는 깨달았다고 한다. 그동안 나를 가둔 건 가부장제나 시어머니, 남편이 아니라 나 스스로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만의 꿈을 찾기 위해 며느리 사표를 내고 자기만의 공간을 얻어 책을 썼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연상되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9년 출간된 페미니스트 평론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이 지적 자유를 갖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실재 reality를 파악’하라는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일 년에 오백 파운드’가 필요하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가 당부했던 것처럼 여성들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써 내려갈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자신의 글을 쓰면서 인간들과의 관계로 인해 상처받지 말자. 글 쓰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글이 때로는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우리 각자가 연 오백 파운드와 자신의 방을 가진다면, 우리가 자유의 습관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써 내려 가는 용기를 가진다면, 우리가 공동의 응접실에서 조금은 빠져나와 인간을 늘 서로서로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실재와의 관계에서 보게 되고 또한 하늘과 나무를 혹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그 자체로서 보게 된다면 (…) 다만 우리는 홀로 나아가고 우리는 남자와 여자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실재의 세계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직면하게 된다면, 그러면 그 기회는 올 것이며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그렇게 자주 내던졌던 육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 p.157』


이 세상 모든 김지영의 목소리를 꿈꾸며 _《82년생 김지영》 조남주/민음사/2016

2016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56쇄라는 엄청난 판매 부수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19년에 원작소설이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현상은 21세기 현대사회에서도 여성들의 처지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1999년에 남녀차별금지법이 생겼는데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여자들은 차별받고 있다. ‘강남살인사건’ 같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보면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보인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맘충, 김치녀라는 조롱과 여성 혐오적 시각에서 비롯된 폭력이 난무한다. 전문가들은 여성에 대해 폭력을 가하는 남성들의 심리에는 여성을 자기 통제하에 두려는 가부장적인 사고가 있다고 말한다.


나는 1923년생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11년을 살았다. 시어머니가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들을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키워주셨고 시어머니와 엄마와 딸처럼 지냈다. 하지만 결혼 후 처음 몇 년은 한 건물에 살면서 시어머니 시집살이로 마음고생을 많이 해야만 했다. 마흔셋에 얻은 막내아들밖에 모르는 여든이 넘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남편과 손자는 끔찍하게 아끼면서도 직장 생활하느라 살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며느리를 늘 못마땅해하셨다.


시어머니는 생활력 없는 시아버지를 만나 평생 살림을 혼자 책임져왔다. 남편이 대학교 2학년 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되신 후 칠 남매를 키우느라 더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할머니뻘 되는 시어머니의 생각이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같이 살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시어머니의 인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정규 교육도 못 받고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만 하다 돌아가셨다. 시어머니도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난 죄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었던 가엾은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부터는 시어머니께 진심으로 잘 해드리려고 노력했다.


김지영이 시댁 어른이나 남편 앞에서 친정엄마나 결혼 전 남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여자에 빙의된 채 속말을 뱉어내는 장면들은 섬뜩하다시피 하다. 평소 가슴 속에 쌓인 분노를 말로 제때 표현하지 못해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아서다. 김지영을 대변해서 나오는 그녀들의 미처 못다 한 말… 처음부터 김지영이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정, 직장, 사회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손해를 보고 차별받으면서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잃었고 정신까지 이상해졌다.


공원에서 만난 어떤 남자는 그녀에게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러 다니는 맘충’이라고 했다. 전철 안에서 어떤 젊은 여자는 임신한 김지영에게 마지못해 자리를 비켜주며 상처 주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김지영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여성 혐오를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같은 여자이면서도 상처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지영은 육아를 전담하고 있지만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가정, 직장, 사회에서의 은밀한 차별에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조차 없는 현실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현실에서도 소수의 용기 있는 여자들은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성 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여자들이 스스로를 지킬 힘은 이 세상의 모든 김지영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연대하고 행동하는 일에서 나온다. 다른 여자기 겪는 고통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 - 타인에게 공감하는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_《소년이 온다》 한강/창비/2014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87년은 광주학살 규탄과 노태우 정부 타도를 외치는 학생들의 데모로 대학가가 불길처럼 들끓고 있었다. 고 이한열 열사가 데모하다 죽음을 맞이한 때가 그 해다. 그때는 사회 분위기가 운동권 학생이 아니어도 정치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광주 시민 학살 사진집을 처음 본 나는 우리나라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참하게 학살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87년에 마주한 80년 5월 광주는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 있었던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시민 학살과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과 고통을 이야기해주는 한강 작가의 소설이다.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죽음을 맞게 된 중학생 동호와 주변 인물들의 고통 받는 내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작가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군중의 힘을 빌려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발현될 수도 있고,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극대화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95』


80년 광주학살에서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고 전하며 작가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과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이었다고 말한다. 시민들을 학살한 군인들은 부조리한 군부의 명령에 따라 죄의식도 없이 군중의 힘을 빌려 야만적인 학살에 가담했다. 한편으론 시위에 가담했던 시민들이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국가의 부조리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힘도 군중의 힘을 빌린 숭고한 양심이었다.


5·18 광주 민주 항쟁 후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년이 온다》를 여전히 읽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어느덧 그 시절을 잊고 무심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소설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인간은 군중 심리에 의해 상황에 따라 야만적일 수도 있고 숭고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근원적인 야만성 대신 숭고함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늘 질문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상황이 인간을 만든다.’라는 나약한 명제에 나의 선택과 행동을 합리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 면의 담금질. 그러기 위해서는 군중 심리나 상황 따위에 내몰리지 않고 나 자신을 지켜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깨어있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날 현장에 달려간 걸 후회하지는 않아 _《거짓말이다》 김탁환/북스피어/2016

《거짓말이다》는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유해 수습에 참여한 고 김관홍 잠수사와 공우영 잠수사의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쓴 소설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거대 여객선이 침몰한 맹골수도로 향한 잠수사들이 병원을 거쳐 법정까지 가게 되는 일을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풀어간다. 잠수사 나경수는 동료 잠수사로부터 심해에 가라앉은 배의 내부로 진입할 잠수사가 부족하니 도와 달라는 다급한 연락을 받는다. 나경수는 좁은 선내를 어렵게 헤치고 들어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다. 하지만 몸에 무리가 올 정도로 해저에서 아이들을 끌어안고 올라온 나경수를 기다린 것은 시체 한 구당 오백만 원을 받지 않았느냐는 비난과 동료 잠수사 류창대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 소식이었다. 류창대 잠수사의 재판에서 나경수 잠수사가 그를 위해 쓴 탄원서가 주 내용이다.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심해에서 선내에 진입해 실종자를 수습해야 하는 업무의 고난이도 때문에 해경 잠수사들이 아닌 민간 잠수사들이 투입되었다. 하지만 잠수병을 얻으면서까지 실종자들을 수습한 민간 잠수사들에게 국가는 달랑 문자 한 통으로 현장 철수 명령을 내리고 치료비 중단도 통보했다. 민간 잠수사들은 무리한 세월호 실종자 수습으로 얻게 된 잠수병으로 인해 평생 질병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법대로 한다면, 저나 잠수사들이 맹골수도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징집 대상이 아닙니다. 법 때문이 아니라 돕겠다는 마음으로 간 겁니다. (…) 잠수사들이 마음으로 한 일을 정부는 법으로 판단한 겁니다. 이 나라는 마음이 없습니까. 이 정부는 잠수사들의 마음을 법으로 짓밟아도 됩니까. 국가부터 정직해야 합니다. 맹골수도로 달려간, 혹은 달려가려는 잠수사들에게, 여러분이 혹시 잠수병에 걸리면 올해까지만 치료비를 지원한다고, 산업 재해로 인정받을 수도 없다고, 현업에 복귀하지 못하더라도 나라에선 따로 세워 둔 대책이 없으니 각자 살길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맹골수도 그 거친 바다로 하루에 세 번씩 뛰어들 잠수사는 없었을 겁니다. - p.225』


그날 선원이든 해경이든 한 사람만 선내로 들어가서 가만있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다면 승객 대부분은 살았을 것이다. 수습자 강나래의 마지막 모습을 이야기한 생존 학생은 “선내로 물이 차오르는데도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 나왔다”고 증언했다. 작가의 가슴에 파고들었다는 목소리,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에서 예은 아빠 유경근 씨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말고 정부가 먼저 알아서 하라.”


세월호 유가족, 생존자, 민간 잠수사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는 정부는 국가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무능한 국가에 의한 재난 사고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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