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 껴안기

   
아남 툽텐(역:임희근)
ǻ
담앤북스
   
14000
2016�� 12��



■ 책 소개

 

일상에서 아무 기쁨도 떨림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티베트 린포체가 전하는 진정한 행복의 비결

 

죽음을 앞두고 “일을 더 많이 했어야 했는데” “돈을 더 많이 벌 걸…”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순간 껴안기』는 우리가 잊고 사는, 혹은 알지만 걱정과 두려움, 강박관념에 휩싸여 알아차리지 못하는 중요한 삶의 진실들을 일깨워 준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불교 명상수행을 지도하는 아남 툽텐 린포체. 일상적인 언어와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한 그의 가르침은 종교, 국적과 상관없이 많은 이들의 삶을 바꾸고 있다.

 

■ 저자 아남 툽텐
저자 아남 툽텐 린포체 Anam Thubten Rinpoche는 티베트에서 태어나 닝마빠(티베트불교 4대 종파 중 하나)에서 수행했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대부분을 사원에서 보내며 깨달음에 이른 여러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9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한 종파에 국한되지 않는 가르침으로 우리의 참모습과 행복하게 사는 지혜를 전하고 있다. 그는 평소 복잡한 불교 교리를 내세우거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일상적인 언어와 유머, 자신의 수행 경험을 통해 진리에 대한 통찰을 이끌어 낸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리치먼드에 설립한 다르마타 재단을 중심으로 현재 세계 곳곳에서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 지난 2014년부터 매년 방한해 불교와 명상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티베트 스님의 노 프라블럼』(2012) 『알아차림의 기적』(2014)이 있다.

 

* 린포체(Rinpoche)란 티베트어로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위대한 스승의 이름 뒤에 붙이는 칭호이다.

 

■ 역자 임희근
역자 임희근의 호는 정연靖淵, 불명佛名은 ‘소나’이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프랑스 파리3대학교에서 불문학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다. 여러 출판사에서 해외 도서 기획과 저작권 분야를 맡아 일했으며 출판 기획·번역 네트워크 ‘사이에’를 만들어 해외 도서 번역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티베트 스님의 노 프라블럼』 『달라이 라마, 나는 미소를 전합니다』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분노하라』 『인간이라는 직업』등 다수가 있다. 번역의 길과 수행의 길이 하나 되게 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다.

 

■ 차례
제1장 인생을 살면서 꼭 한번 던져야 할 질문_ 행복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
당신만의 두려움을 모두 인정하십시오. 불교의 가르침이란 당신 자신의 두려움을 알아차리는 것, 즉 자신의 한계를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게 다입니다.

 

제2장 ‘나’는 누구인가?_ 무아無我에 관한 통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생각, 마음속 환상, 거짓말을 깨닫고 그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면 슬픔, 죄책감, 비참함이 단번에 훌훌 떠나 버리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3장 평범한 것들에 바치는 찬가_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기쁨
붓다는 말했습니다. 숨을 들이쉴 때는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려라. 걸을 때는 걷는다고 알아차려라. 당신이 하는 일을 온전히 알아차리면 만물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4장 붓다의 사랑_ 자애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기
초월적 사랑을 언급하는 목적은 우리의 모든 두려움, 모든 미움을 녹이고 스스로를 꽉 조이는 집착을 느슨히 풀어 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제5장 확실한 것도, 안전한 것도 없다_ 실상에 대한 바른 이해
세상에 불변의 실체란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아차리고, 사랑하면 아무것도 놀랍고 두렵지 않습니다. 이별, 질병, 상실처럼 좋지 않은 일도 친구가 됩니다.

 

제6장 결국 사라지기에 소중한 것들_ 무상無常에 대한 명상
달력의 날짜 하나를 골라 ‘통찰의 날’로 표시해 두십시오. 그날, 자기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 명상해 보십시오.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제7장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사랑_ 자신의 한계와 신성함, 모두 알아차리기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두려움, 무너져 내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불안감으로 변합니다. 불안감은 때로 폭력, 성냄, 미움, 의심이 됩니다. 그때 사랑이 우리를 녹여 줍니다.

 

제8장 가슴에 박힌 가시를 뽑다_ 용서, 홀가분해지는 수행
용서하면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용서는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는 데서 옵니다. 해악을 끼친 사람들의 업, 배경, 고통, 망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9장 지금 재미있게 살고 있습니까?_ 움켜쥐지 않는 연습
재미있게 사는 비결은 움켜쥐지 않는 것입니다. ‘내 집’ ‘내 차’ ‘내 은행계좌’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움, 걱정, 분노 같은 감정을 움켜쥐지 않는 것입니다.

 

제10장 일상에서 발견하는 열반_ 온전히 받아들임
좋든 싫든 삶은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삶을 우리 마음대로 해 보려고 할수록 고통만 더해집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움과 희망을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의 미지 속으로 뛰어들 때 잃을 것은 고통뿐입니다.

 

제11장 이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_ 깊이 생각하는 힘
깊은 성찰에는 많은 형태가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성찰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희유한지를 숙고하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제12장 우리 모두는 특별하고 유일한 에너지_ 최고의 수행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자신이 매우 신비롭고 다차원적이며 복합적인 개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자기 존재의 바탕이 있는 그대로 이미 완벽하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제13장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두라_ 생각과 감정을 놓아 버리는 습관
오늘 하루를 평화의 날로 삼읍시다. 이날은 우리의 생각, 감정, 인식을 믿는 것을 잠시 멈추어 봅시다. 참된 내면의 평화는 자신의 마음을 믿는 것을 멈출 때에만 생겨납니다. 

제14장 단지 살아 있음을 즐겨라_ 고통을 인정하고 들여다보기
고통의 뿌리인 갈애는 신경증이 되어 버린 욕망의 한 형태입니다. 명상으로 우리 몸과 마음이 완전히 평온해지면 더 이상 갈애도 두려움도 없는 터전에 선 느낌이 듭니다.

 

제15장 다시, 마음이 춤추게 하라_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기
어린 시절을 기억해 보면 우리 마음은 언제나 춤추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은 미움, 욕심, 후회를 몰랐습니다.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면 우리 마음은 다시 조건 없는 사랑, 기쁨, 평화 속에서 춤출 수 있습니다.




모든 순간 껴안기


평범한 것들에 바치는 찬가_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기쁨

붓다는 말했습니다. 숨을 들이쉴 때는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려라. 걸을 때는 걷는다고 알아차려라. 당신이 하는 일을 온전히 알아차리면 만물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영롱합니까. 여러분이 솜씨 좋은 사진가라면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그 작은 이슬방울에 맞춰 사진을 찍겠지요. 그러면 정말 멋진 사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순간 그 이슬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포착합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건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 이슬과 마찬가지로 정말 기막히게 아름다우면서도 취약한 것입니다.


고통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수많은 사람이 맞닥뜨리는 고통의 보편적 형태 중 하나는 내면의 깊은 공허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공허함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결핍이 있습니다. 스스로 그것을 완전히 느끼게 하면 매우 괴로워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쓸 수 있는 수단은 뭐든 써서 그런 알아차림을 차단하려고 애씁니다. 초콜릿이나 커피, 사탕, 술 등을 먹습니다. 이런저런 여흥이나 오락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속으로 끝없이 혼잣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일종의 정신적 잡담입니다.


우리가 이 생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멋진 환상이 무척 많습니다. 성취한다는 것, 안전하다는 것, 이런 류의 그럴 듯한 거품들 말입니다. 한재산 모아서 어쨌든 인생에서 성공하고 꿈을 모두 이루었다고 자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 모두 멋진 환상일 뿐, 그 자체로서 전혀 구체성이 없습니다. 마치 공중에 쌓은 성과 같아서 언제 와르르 무너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처럼 내면적 공허감을 느끼며, 그러기에 늘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우정, 사랑, 성취를 찾아다닙니다. 우리 마음은 항상 이 채울 수 없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면적 깨어남의 첫 단계는 마음 안으로 들어가서 가슴속에 숨겨진 모든 것 - 고통, 외로움, 내면이 풍성하지 못해 텅 빈 괴로움 - 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곧 이 마음속 공허감이 만물에 스며 있고 온 우주에 스민 아름다운 진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진리는 모든 것에 스민 신성함입니다.


신성함이란 어떤 믿음 체계가 아닙니다. 시간을 초월한 진리입니다. 신성함이란 하늘의 구름처럼, 산에서 자라나는 나무처럼, 신성함은 늘 거기에 있습니다. 이 삶의 일부입니다. 이 진리와 이어짐을 잃어버린 결과는 때로 상당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상실하면 우리는 세상 안팎과 매우 기계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게 됩니다. 우리가 이해를 상실하면 인류와 기계적 관계를 이어 나가게 되고 남들에게 사랑을 느낄 줄 모릅니다.


이 신성함을 어떻게 하면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 지혜 전통에 존재하는 의식과 의례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우리 마음을 흔들어 이 신성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평범한 침묵조차도 하나의 의식으로서, 우리를 쉬게 하고 조건화된 마음에서 한걸음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에 스민 신성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삶은 의례와 의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의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풀베기도 신성한 의식이 될 수 있습니다. 차 마시는 일도 의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숲속 산책도 의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조건 없는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이 진리, 미묘하고도 온갖 것에 스민 진리, 즉 모든 것의 신성함에 주파수를 맞춰 감응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관계가 생생히 살아있게 되고 존경과 사랑으로 가득 차며 더 이상 사람들을 대상화하지 않게 됩니다. 마침내 조건 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집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비록 가끔씩 불완전한 구석이 많다고는 해도 말입니다.


확실한 것도, 안전한 것도 없다_ 실상에 대한 바른 이해

세상에 불변의 실체란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아차리고, 사랑하면 아무것도 놀랍고 두렵지 않습니다. 이별, 질병, 상실처럼 좋지 않은 일도 친구가 됩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통찰은 세상에 확실한 것도 안전한 것도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삶과 사건들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 영향이나 통제도 결코 행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또 하나의 망상은 이른바 안전이라는 망상입니다. 여러 방법으로 안전을 얻고 싶어 합니다. 온갖 형태의 관계를 통해 그것을 성취하기를 원합니다. 또 돈으로, 성공적이고 장래성 있는 경력으로 안전을 얻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안전이란 없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건강을 포함해 우리가 사랑하는, 애지중지하는, 집착하는 모든 것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아무 경고도 없이 스러져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길, 진정한 행복, 조건 없는 행복, 조건 없는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확실한 것도 안전한 것도 없다는 근본 실상, 이 진리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처음에는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들거나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근본 실상의 진리에 깨어나면 심지어 실존적 불안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개인으로서 우리에게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안전이나 확실성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온 세상, 전 실존, 우주 전체에도 역시 기본적 확실성과 안전은 없습니다.


일단 우리가 만물의 근본 진리, 만물에는 확실함도 안전도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면 그 새로운 실상과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그 진리를 완벽히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전에 안전과 확실성이라는 환상을 사랑했듯이 그 진리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환상을 좇으면 단지 고통과 괴로움이 생길 뿐이라는 것을. 환상을 좇으면 사람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 됩니다. 비합리적이 됩니다. 우리의 존엄성과 오롯함을 몽땅 잃게 됩니다. 진실은 이겁니다. 우리는 대부분 실제로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의 환상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느라 숱한 고통과 괴로움이 따릅니다.


제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행복을, 참된 행복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나는 행복을 느꼈던 기억이 여러 번 있는데."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10년 전 신혼 시절에는 행복했어." 혹은 "3년 전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행복했던 기억이 나네." 다시 질문해보겠습니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진짜 행복, 즉 어떤 형태의 성공, 이득, 성취, 안전, 안락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 행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참된 행복은 매우 이상한 현실에서 생겨납니다. 불확실한 것을 사랑하기, 안전하지 못함과 사랑에 빠지기, 이런 데서 참된 행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일단 이 진리를 사랑할 줄 알면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겁먹을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여러분은 두려움을 다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두려움이 녹아 버리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친구가 됩니다. 이별, 질병, 상실처럼 좋지 않은 상황들까지도 모두 친구가 됩니다. 삶이 여러분의 친구가 됩니다.



지금 재미있게 살고 있습니까?_ 움켜쥐지 않는 연

재미있게 사는 비결은 움켜쥐지 않는 것입니다. 내 집 내 차 내 은행계좌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움, 걱정, 분노 같은 감정을 움켜쥐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삶이 재미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재미있게 살지 못합니다. 여기서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술에 취하고 파티만 찾아다니면서 흥겹게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비록 아주 가벼운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더한 무엇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가슴속에 무게를 느끼고 있습니다. 매일의 삶이 고달프다는 느낌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아무 기쁨도 떨림도 성스럽다는 느낌도 찾지 못합니다. 이처럼 나날이 살아가는 고달픔은, 음식을 해 먹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잔디를 깎고 똑같은 사무실에 나가고 천편일률적인 생각을 하는 등 반복되는 일들로 규정됩니다. 집 청소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룻바닥을 빗자루로 쓸어 낸다고 말입니다. 그저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게 그리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까요? 바닥을 비로 쓸면서 빗자루를 들고 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재미있습니까?는 강력한 물음입니다. 이 몸으로 태어나 살아가면서 조화와 참된 평온을 느끼고 있습니까? 여러분 몸이 스스로 머물고 싶은 성전이나 사원이라는 느낌이 듭니까? 여러분 몸이 머물고 싶은 곳 노래하고 싶은 곳, 성스러움과 은총에 폭 안기는 느낌이 드는 그런 곳입니까?


일단 마음이 찌푸려지면 재미있게 살 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속이 눈 녹듯 녹아내리고 넉넉하면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몸과 존재가 성스러운 사원이며 우주는 최상의 낙원이라는 깨달음과 체험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해동하고 녹아내리고 마음이 넉넉해지고 널리 확장되게끔 하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지 말입니다. 비결이 하나 있지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거머쥐지 않는 지혜입니다.


티베트불교의 쬐(Chod. 번뇌와 업, 아상을 완전히 소멸하고 완전한 자비를 구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한 수행) 전통에는 네 가지 장애의 힘이 있습니다. 형상에 집착하는 악마, 형상 없음에 집착하는 악마, 즐거움에 집착하는 악마, 개념에 집착하는 악마입니다. 거머쥐는 것은 악마와도 같습니다. 여기서 악마란 단지 비유일 따름입니다. 보통 악마는 그림자처럼 도망칠 수 없게 늘 여러분을 따라다니는 힘입니다.


이 비유에서 첫 번째 악마는 형상을 꽉 움켜쥡니다. 우리의 소유물, 우리 집, 우리 재산, 우리 옷이나 차, 우리의 관계, 이런 현상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런 것들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 영역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관계에 집착할 때는 관계도 악마가 됩니다.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홀로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어둠을 찾아낼 것이고 마침내는 자신의 신성, 본모습, 내면의 무한함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관계들을 움켜잡고 있을 때는 자신에 대한 이러한 자세를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관계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 악마는 형상 없음의 악마,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악마가 아니지만, 그것에 매달리는 강박관념은 악마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을 넘어선다거나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 애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을 제어하거나 초월하려 노력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움켜쥐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얼어붙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우주가 낙원이 아니라 매우 비우호적인 세상이어서 이에 맞서 투쟁하고 싸워야 할 것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려움은 그저 인간 실존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랑과 기쁨이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재미있게 사는 비결은 움켜쥐지 않는 것입니다. 움켜쥐지 않는 지혜를 알게 되면 여러분은 이와 같이 사람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을 진정 원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에 가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언제까지라도 여기에 있고 싶은 기분일 겁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제게 마음 수행법을 알려달라고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 수행은 매우 단순합니다. 진공청소기와 함께 춤추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특별하고 유일한 에너지_ 최고의 수행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자신이 매우 신비롭고 다차원적이며 복합적인 개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자기 존재의 바탕이 있는 그대로 이미 완벽하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유성은 받아들이고 기꺼워하면서 남들의 고유성은 그렇게 여길 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우 의식하는데, 나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물론 커다란 축복입니다. 자의식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개별성을 느낍니다. 우리는 자기만의 특성과 향내와 결을 갖춘 감성과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마다 꿈과 전망이 있으며 자기만의 인생행로가 있습니다. 자기만의 욕망도 있습니다. 남들의 꿈을 성취하는 것으로는 결코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들의 갈망을 채운다고 우리 자신의 갈망을 절대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인생행로가 있습니다. 그 행로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행로에 방향을 제시하거나 영향을 끼칠 절대적 힘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개별적 인간으로, 이 거대한 우주에서 하나뿐인 개체로 의식하는 데서 많은 축복이 옵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는 습성을 키워왔습니다.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는 이 지속적 습성은 인간 습성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이 습성이 우리의 비참함, 불만, 심지어 증오의 뿌리가 됩니다. 우리는 그 어느 누구와도 자신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고유하며, 모든 이가 이렇게 고유하면서 완벽합니다. 모두가 신성하고 거룩하며 있는 그대로 온전합니다. 아무도 누구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덜 온전하거나 덜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심신 양면에서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 우주 전체에서 여러분이라는 버전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습 그대로 참으로 희귀하고 소중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변의 모든 사람도 온전히 희귀하고 소중합니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고유하고 여러분의 정신과 의식도 그러합니다. 여러분의 개인사도 고유합니다. 모든 이의 살아온 이야기가 온전히 고유합니다.


고정된 자아 같은 것이 있다는, 그래서 그것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멋진 놈이라고, 아니면 별로 똑똑하지 못하고 매력도 없는 놈이라고 인식하는 자아는 환상입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을 무엇으로도 규정하지 못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여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온전히 존재하지만 흐르는 에너지입니다. 무어라 규정하고 빚어내고 어떤 범주로 묶거나 묘사할 수 있는 정태적 개체가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정된 자아는 전적인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만 존재합니다. 그 밖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단 자신에 대한 이 모든 고정된 개념, 고정된 정체성을 놓아 버릴 수만 있으면 여러분은 안으로 자유롭습니다. 마침내 여러분 자신과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남들과 자기를 비교하는 것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참본성이 온전하고 완벽하고 가장 성스러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때 여러분이 오직 하나뿐인 존재임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탄트라불교에서 전하는 지혜의 요체입니다. 탄트라불교는 지고한 사다나(수행), 가장 높은 가르침이 자신을 완전히 숭배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탄트라불교는 가장 높은 수행이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 자신의 마음을 사랑하는 것, 자신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모든 결함과 영광을 위없는 붓다의 둘도 없는 현현으로, 여래장(如來藏)으로, 법신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이 할 일은 우리 모두가 여래장의 표현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나뿐임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 결점, 약점을 자신의 지성, 힘, 거룩함과 마찬가지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두라_ 생각과 감정을 놓아 버리는 습관

오늘 하루를 평화의 날로 삼읍시다. 이날은 우리의 생각, 감정, 인식을 믿는 것을 잠시 멈추어 봅시다. 참된 내면의 평화는 자신의 마음을 믿는 것을 멈출 때에만 생겨납니다.

옛 명상 수행자들은 인간의 마음이 보통은 문제가 많고 다루기 힘들고 파괴적이고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들은 이런 마음을 원숭이 마음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원숭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숭이 마음을 가졌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힘이 되는 통찰은 우리가 원숭이 마음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이 원숭이 마음이라 불리는 것을 발견하십시오. 우리 모두에게는 원숭이 마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원숭이 마음이 우리를 쥐락펴락해 왔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이 원숭이 마음에 말 그대로 통제를 받고 그 노예가 되어 왔습니다. 참된 숙고, 참된 명상은 정말이지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 숙고를 통해 우리는 바깥세상에만 정신이 팔려 넋을 놓고 지내 왔음을 마침내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결코 참된 성취와 기쁨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우리 각자 안에 지저분한 것들, 심지어 마음의 쓰레기가 많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수행 길이 순조롭다는 진정한 신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제대로 방향을 잡아서 가고 있다는 지표입니다. 또 우리가 명상하는 법을 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명상할 때 우리는 깨달음의 신성한 신호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는 이 원숭이 마음, 이 마음의 쓰레기를 찾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쓰레기는 해묵은 감정, 파괴적 생각, 욕심, 두려움, 미움 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단 그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을 초월하고자하는 자연스러운 충동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뛰어넘을 수 없고 우리의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깊은 참구입니다. 여기서 깊은 참구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우리의 생각과 감정들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참구를 통해 우리는 그곳에 그다지 견고함이나 참됨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 생각, 감정, 마음의 바탕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 없이 헛되며 텅 비어 있습니다. 실재와 실체가 없기에 우리는 마음이 쌓아 올린 이것들을 당장 놓아 버리든가 아니면 매달리고 싶을 때까지 매달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십 년을 아니 여생을 다 바쳐 생각에 매달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생각과 감정에 대한 집착을 떼지 못해 괴롭겠지요. 우리는 원하는 기간만큼 마음과 생각을 믿을 수도 있고, 당장 그 믿음을 멈추고 그런 마음과 생각을 탁 놓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그 생각을 믿으며 고통 받을 수도 있고, 그 믿음을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자유입니다.


마음이 실재하고 구체적인 것이라고 계속 믿는 한 이 아주 단순한 일, 즉 마음을 그냥 놔두는 법을 알 수 없습니다. 생각들을 그냥 두십시오. 따라가지도 말고 집어 들지도 마십시오. 이러한 깨달음은 참구를 통해 찾아올 것입니다. 전통적인 참구란 마음속으로 들어가 마음의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어디서 사라지는가? 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몇 분 동안의 이런 참구일 뿐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바탕이 비었음을 알게 됩니다.


옛날의 많은 큰스승들은 "결국은 찾아낼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티베트의 한 이름난 스승은 "찾지 않음이 큰 찾음"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믿는 노릇을 멈추면 찾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찾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마음을 믿는 짓만 멈추었을 뿐입니다. 깨달음도, 열반도, 영원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믿기를 멈추면 활짝 열림이 있습니다. 이 활짝 열림은 말하자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서, 거기서 사랑과 평화가 솟아납니다. 참된 내면의 평화는 자신의 마음을 믿기를 멈출 때에만 생겨납니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 한 평화는 안에도 밖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인식을 믿는 것을 잠시 멈추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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