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정심, 나를 지켜내는 힘

   
토마스 호엔제(역: 유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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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나무
   
13000
2015�� 02��





■ 책 소개


마음의 평화는 내 머릿속에서 시작된다!
철학과 심리학이 가르쳐주는 생각을 놓아주는 연습

 
당신은 지금 평온한가? 물론 유쾌한 환경에서는 누구라도 족히 5분쯤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다. 유쾌하고 스트레스 없는 상황에 있을 때는 자신이 굉장히 침착하고 차분한 사람인 줄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갑작스런 위기가 닥치면 평정심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릴 수 있다. 진정한 평정심은 어려운 순간에 비로소 드러나는 법. 중요한 것은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화가 치솟거나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순간, 마음속 스위치를 켜서 오래지 않아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정심은 과연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베를린에서 자기계발 분야 상담 코치로 활동 중인 저자는 이 책에서 스토아 철학부터 앨버트 엘리스의 심리치료까지 인간 내면세계를 다룬 다양한 이론들을 둘러보며, 평정심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소개한다. 상황에 위축되지 않고 강박에서 벗어나는 생각의 전환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삶이 힘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조건 의사나 심리치료사를 찾아갈 일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치유력과 회복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완벽한 건강과 완벽한 행복은 없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가장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삶의 자세의 문제이다. 이 책은 우리가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길을 탐색할 수 있도록 돕는다.
 
■ 저자 토마스 호엔제
1955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법률 고문으로서 수년간 채무 상담을 진행하다가,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독일 합리적 정서 및 인지행동치료 연구소의 교육과정을 수료했다. 『당당한 게으름』『부처님처럼 행복하게』를 비롯해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으며, 현재 베를린에서 자기계발 분야 상담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 역자 유영미
연세대학교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승자의 뇌구조』『개척자와 공상가들』『감정 사용 설명서』『박물관의 나비 트렁크』 등 다수의 책을 옮겼다. 『스파게티에서 발견한 수학의 세계』로 2001년 과학기술부 인증 우수과학도서 번역상을 수상했다.
  
■ 차례
프롤로그 - 내 마음은 어떻게 편안해지는가


1부 평정심은 어디서 오는가
다르게 살 수 있을까? | 평온하게 살고자 ‘이를 악물고’ 노력한다? | 마음 편하게 있다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봐 두려운가


2부 마음의 평화는 내 머릿속에서 시작된다
생각과 느낌은 연결되어 있다 | 필요 이상으로 괴로워하며 사는 사람들 | 내면의 독재자에 관하여 |
과장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 마음을 가라앉히는 생각의 순서 | 인간은 누구나 얼마간 비도덕적이고 신경질적이다 | ‘X’를 참을 수 없을까 봐 두렵다면 |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 삶이 힘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다른 생각이 필요해 |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 사랑과 이별을 할 때 도움이 되는 이야기 | 죽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 | 나이 드는 슬픔에 대하여 | 성공을 향한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 지금 무슨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는가 | 생각을 편안하게 바꾸는 첫걸음


3부 생각을 놓아주는 연습
생각의 휴식 | 원할 때마다 편안해진다 | 휴식을 방해하는 생각들 | 내면의 자유 사용법 | 나와 문제를 분리시키려면 | 외적 고요와 내적 고요 | 세계를 경험하는 30가지 가능성 | 들숨과 날숨이 가르쳐주는 것 | 좋은 것만 생각하는 능력 | 모든 것에 완전히 신경을 끄고 살 수 있을까?


4부 나를 다시 살게 하는 힘
문제가 미우면 밉다고 말하라 | 실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 이너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 자신감을 떨어트리는 생각의 오류 | 치밀한 낙관주의자가 되라 | 직관이 전해주는 말 | 그것은 왜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 삶을 누리기 위한 전제 조건


에필로그 - 마음이 주는 선물


 




평정심, 나를 지켜내는 힘


평정심은 어디서 오는가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경향에 대하여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성향이 있는 듯하다. 인류문화에서도 고통은 참으로 중요하고 매력적인 주제로 여겨져 왔다.


서양의 대표적 종교인 기독교 역시 구원이라는 기쁜 소식을 핵심으로 한다고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고통을 중시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은 교회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여, 기쁜 소식을 응당 기쁘게 생각하는 걸 힘들게 한다. 수백 년간 이어진 박해와 순교의 역사 또한 지금까지 기독교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고통의 문화는 예술에도 반영된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인간의 고통을 묘사한다. 회화, 연극, 춤, 영화, 음악, 소성 등 모든 예술이 인간의 고통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예술 분야에서 고통을 극복하거나 행복을 표현하는 일은 비교적 등한시되어왔다. 기쁨을 표현하는 것은 피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비평가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마음의 평화를 가꿔나가겠다는 계획은 어쩐지 추상적이고 어려워 보이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마음의 평화를 목표로 삼으면 삶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고, 일상은 그 자체로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한 연습 과정이 된다. 일상의 사건들은 이제 우리를 넘어트리고 훈련시키는 ‘트레이너’가 되고, 이 트레이너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바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는 초연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어떤 트레이너는 우리의 평정심을 깡그리 뭉개버리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한계와 강점을 깨닫고, 힘든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돈을 많이 버는 것? 좋은 물건들을 가능한 한 많이 소유하는 것? 엘리트 교육을 받는 것? 나이, 배경, 성별, 피부색이 중요할까? 자신의 감정을 조율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즐거움도 누리지 못한다면? 슬픔, 분노, 불안은 물론이고 행복과 안식도 견딜 수 없다면? 자신의 상상이나 밀려오는 엉뚱한 생각들을 견딜 수 없다면? 자신과 타인의 불완전한 모습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나는 인간이라면 태어난 이상 모두가 평화와 행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정심을 멀리하면서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능력을 자꾸만 잃어가고 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얻었다 해도 다시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마음의 평화를 확고히 해야만 모든 일의 부침을 고요히 바라보며, 두려움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가꿔나가고, 가능한 것들을 하고자 힘쓸 수 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얻은 것을 어느 순간 포기해야 할까봐 계속 걱정하며 살 필요도 없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의 목적은 배움과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일찌감치 깨닫고, 어떤 사람들은 뒤늦게 깨달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예 깨닫지도 못한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인생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건이 의미 없고 자의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면 계속해서 화가 나고 실망스럽고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때로는 마음이 설레고 피상적인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인간 실존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괴로움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마음의 평화는 내 머릿속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누구나 얼마간 비도덕적이고 신경질적이다

감정을 받아들이는 법

우리는 종종 자신의 감정까지 거부한다. 두려움이나 공포가 몰려오면 이런 생각이 든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 이리 두렵지?” 화가 나면 이렇게 생각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이리 화가 나지?” 그러면 화가 난 것 때문에 화가 나는 격이 된다. 감정도 역시 생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계속해서 이차적인 감정이 생겨난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으로 인해 화가 날 수도 있고, 초조할 수도 있고, 우울할 수도 있다. 그것 때문에 부끄러울 수도 있고, 기쁠 수도 있다.


사실 스스로 어떤 기분을 갖는 것은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내가 ‘부정적인’ 감정도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대부분이 부정적인 감정을 차라리 없애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마다 기능이 다르고, 우리의 삶을 수월하게 해주는 측면이 있다. 가령 두려움은 위험을 경고해주고, 분노는 강한 감정을 표출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관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슬픔은 삶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잃었음을 신호해준다.


감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감정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거나, 배웠다가도 다시 잊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거의 좀비처럼 세상을 살아가며 사사건건 사람들과 부딪힌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의사소통의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무감각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탄식이 종종 들린다. 그런 사람들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무감각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감정과 욕구를 지각하고 이해하는 데 장애가 있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방향 감각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상태라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 감정이 아예 없거나, 감정이 무방비 상태로 내맡겨져 있을 때만 문제가 된다.


생각을 다루는 것을 배우면 감정을 다루는 것 또한 배울 수 있다. 감정은 생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뀌어야 해. 이래서는 안 돼”라는 생각은 불가피하게 긴장과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반면 “좋지는 않아. 하지만 괜찮아”라는 생각은 무슨 일이 생기든 상당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생각은 자유롭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다. 때로는 자신의 생각이 놀랍고, 부끄럽고, 실망스럽게 느껴질지라도, 뭐 어떤가? 긍정적으로 보라. 이런 현상은 우선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두 번째로 당신이 온전한 도덕성의 소유자임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얼마간 비도덕적이고 신경질적이다. 하지만 진짜 이성을 잃어버린 놈들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그에 대해서는 별로 흥분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흥분하든 하지 않든, 사람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의견이 있다. 간혹 좀 거슬리기도 하지만 정말로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우리도 우리 의견을 제시하면 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대부분은 기존 상태를 유지할 것이고, 우리는 다만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작은 일로 인해 뚜껑이 열려 화를 낼 수도 있지만, 평정심을 지킬 수도 있다. 평정심을 지킬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행동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번에는 곧바로 흥분하는 대신 평정심을 선택하기도 마음먹을 수 있다. 우리가 평정심을 잃어버리면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감정, 생각, 행동과 더불어 현실을 모두 현실로 인정하면서 우리는 변화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려움, 실망, 분노를 비롯해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들이다. 모든 문제들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그러하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나쁘지 않다.


생각을 놓아주는 연습

원할 때마다 편안해진다

생각을 완전히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늘 무엇을 지각하거나 평가한다. 하지만 주의력을 조종할 수는 있으며, 이 능력을 활용해 고대하던 휴식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 생각 자체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불쾌한 지각, 안 좋은 기억, 미래에 대한 어두운 상상이 계속 반복될 때 신경이 녹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쾌한 주제에서 관심을 돌리고, 유쾌하거나 중립적인 대상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런저런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상상을 자주 한다. 여러 일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휴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주제가 생기면(더구나 스트레스 속에 있을 때는 갑자기 모든 일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해 보인다). 우리는 계속 속으로 갑론을박하며 골똘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생각은 같은 자리를 맴돌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생각을 계속 맴돌게끔 만드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생각에 자율적인 힘을 허락하여 스스로 희생자처럼 행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일이 이러저러하게 전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강하게 몰두하면서 우리는 부질없이 삶을 힘들게 만들곤 한다. 그런 순간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과 바람, 요구를 일단 한번 놓아버리는 것이다. 주의를 돌려 다른 일이 신경을 쓰면 몰두하던 주제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일시적으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굳이 휴가를 갈 필요는 없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환경에서 익숙한 사고와 행동 패턴을 버리기가 더 쉽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도 변화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내면세계는 어디든지 당신과 함께 가기 때문이다. 친숙한 환경에서도 신경을 끄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 ‘신경을 끈다’는 것은 유쾌하거나 중립적인 주제로 우리의 주의를 돌린다는 의미이다.


외적 고요와 내적 고요

신경을 끄고 생각을 쉬어주기 위해 조용한 환경이 필요할까? 환경이 조용하면 생각을 쉬어주기가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주변이 고요하면 마음이 더 불안해진다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생각을 편안하게 바꾸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외적 고요가 불쾌하게 다가오는 것은 고요함이 낯설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애써 시끄러운 곳으로 피하기보다는 고요함에 점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외적 고요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시끄러운 장소 한 가운데에서도 내면의 고요를 발견할 수 있다. 주의력 훈련이나 다른 적절한 방법을 활용하면 주변이 아무리 번잡스러워도 신경을 끌 수 있다.


현재의 삶의 자리에서 찾아야 한다

현대 사회는 어딜 가나 시끄럽고 빠르게 돌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도 고요하고, 느리고, 성찰이 가능한 장소들이 있다. 태풍의 눈 속처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평화가 깃드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지하철역, 백화점, 거리 축제, 축구 경기장처럼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는 대부분 시끄럽고 분주하다. 그러나 자연으로 간다고 고요와 평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도 시끄럽게 들썩이고 불안할 수 있다. 거센 파도나 태풍, 지진, 화산 폭발을 생각해보라. 자연은 평화롭고 인간은 시끄럽다고?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대도시의 지하철역도 늦은 밤에는 고요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풍긴다. 붐비는 시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다. 백화점도 오전 이른 시간에는 한적하고 쾌적하다. 반대로 시골에서는 농부들이 이른 아침부터 농기구를 돌리는 소리가 시끌벅적하여, 평온한 전원에 대한 환상이 무참히 깨질 수도 있다. 정글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 인간들의 손이 닿지 않는 숲속이라 해도 새 소리와 다른 동물들 소리로 만만치 않게 시끄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요와 소음은 생각만큼 도식적으로 분배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나란히 존재한다. 복잡한 대도시에서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가운데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나를 다시 살게 하는 힘

직관이 전해주는 말

직관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기존의 모든 정보가 그다지 도움이 안 될 때 직관은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경험은 한정되어 있고 이성적인 사고만으로는 우리의 제한된 시각을 극복하기 힘들 때가 많다. 이럴 때는 과거에 축적된 모든 정보 및 새로운 창의적 발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런 부분에서 직관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신체와 감정, 꿈, 내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새로운 정보에 접근해보라. 내면의 음성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목소리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내면의 음성은 사실 다정한 조언자다. “한번 해볼래?”라고 권하는 직관의 음성은 우리를 친절하게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꿈 역시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전문적으로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해석하기가 힘들다. 잘못 해석했다간 엉뚱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고, 자칫 꿈에 담긴 원래의 메시지가 가려지게 된다. 외국어를 배우듯 꿈의 언어를 조금씩 배워나가는 것도 재미있다. 관련 책들을 읽어보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몸이 보내는 메시지는 특히 신뢰할 만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신체와 소통하는 방법을 ‘포커싱(focusing)’이라고 부른다. 신체의 가운데 부분에서 느껴지는 불특정한 느낌들을 해석하는 연습이다. 이를 통해 신체에서 당신의 모호한 감정과 부합하는 표현을 발견할 수도 있다.


감정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아주 다양하다. 기쁨, 슬픔, 두려움과 같은 확연히 분별할 수 있는 감정은 특정 생각의 표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모호하고 쉽게 정의가 안 되는 감정들도 있다.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분간이 안 되는 감정 말이다. 신체와 소통하면서 이런 모호한 감정을 해석하는 과정은 우리를 새로운 해결책으로 인도해줄 수 있다.


그러면 문제 해결에 직관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당신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는데 세 개의 회사가 물망에 올랐다고 하자. 운 좋게도 세 회사 모두 당신을 채용하고 싶어 한다. 자, 어떤 회사를 선택할까? 당신은 일단 이성적으로 각 대안의 장단점을 열거해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 회사의 장단점을 견주어보니 엇비슷하다. 당신은 세 친구를 찾아가 묻는다. 그런데 그들도 각각 서로 다른 회사를 추천한다. 이제 어떻게 하지? 주사위를 던져봐? 하지만 그 방법은 왠지 미덥지 않게 느껴진다. 바로 이 시점에서 당신은 직관이 전해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선택을 암시하는 꿈을 꾸지는 않았는가? 내면의 음성은 뭐라고 말하는가? 신체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았는가? 각각의 회사를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좀 우습고 의심스러워 보일지도 모른다. 처음엔 나도 그랬다. 직관을 신뢰하는 건 왠지 비이성적인 일로 보였다. 하지만 직관과 지성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미국의 심장 전문의 딘 오니쉬(Dean ornish)는 중증의 심장병을 치료하는 데 요가가 수술이나 약물보다 효과적일 수 있음을 증명한 바 있다.


건강한 식사, 운동, 명상, 사회적․영적 유대감이 중증 심장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다행히 오니쉬가 학문적 명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꼼꼼한 임상 연구로 자신의 가설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니쉬는 계속적으로 연구들을 결집하여 중병에서도 사회적․영적 유대감이 치유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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