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잉

   
로즈 새비지(역: 김경)
ǻ
영혼의날개
   
14800
2014�� 11��



 

■ 책 소개


노를 저어 세계3대양을 횡단한 여성, 그녀의 인생, 꿈을 만나다!

 

내셔널지오그래픽지 2011년도 올해의 모험가로 선정된 로즈 새비지의 책. 저자는 홀로 노를 저어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을 모두 횡단한 최초의 여성 모험가로 대양 로잉 4개 부문 세계 기록 보유자다. 런던에 살며 평범한 사무직 일을 하며 살아가던 30세 여성이었던 저자는 자신이 누리고 있던 모든 물질적 풍요와 안락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실에 앉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던 중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이 하루하루를 살다간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의 형태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날 이후 그녀의 삶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청산한 다음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던 로즈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눈뜨게 된다. 어떻게 하면 환경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전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방법으로 대양 횡단 항해를 떠올린다.

 

■ 저자 로즈 새비지

영국 태생의 대양 로어이자 모험가로서 환경운동가, 작가, 강연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을 홀로 노를 저어 횡단한 최초의 여성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으며 네 개의 대양 로잉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다. 오직 인력만으로 노를 저어 24,140km 이상을 항해했으며 5백만 회 이상의 오어 스트로크를 기록하였다. 활발한 모험, 탐험, 환경운동을 통해 대영제국 훈위(MBE)를 수여받았으며, UN 산하 환경기구 선정 기후 영웅(Climate Hero)에 선정된 바 있다. 또한 텔레그래프지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인 모험가 20인에 선정되었으며 2011년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지가 선정한 올해의 모험가로 등극했다.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 뉴욕 탐험가 협회(Explorers Club of New York), 예일 세계 지도자 협회(Yale World Fellow)의 정회원이기도 하다. 다른 저서로는 대서양 횡단 항해를 주제로 2009년에 출간된 『Rowing the Atlantic : Lessons Learned on the Open Ocean』이 있다.

 

■ 역자 김경

연세대학교에서 신학과 물리학을 전공 중이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혼의 날개 미디어를 설립, 영혼의 날개 프로젝트(Project : Wings of Spirit) 전반의 기획과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주요 번역서로는 『영혼으로부터의 초대』 등이 있다.

 

■ 차례

저자 서문

 

제 1 장 실패를 마주하다. 그리고 끌어안다.

제 2 장 낯선 이들의 친절

제 3 장 궁극의 유연함

제 4 장 모든 것은 주어질 것이니,

제 5 장 미래란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

제 6 장 한계는 상상 저 너머에 있다

제 7 장 세계는 하나

제 8 장 자신을 이끌어 줄 리더는 내면에 있다

제 9 장 마침내,

 

맺음말 

 




로잉

실패를 마주하다. 그리고 끌어안다

2007년 8월 21일, 시련은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하룻밤 새에 보트가 두 차례나 전복되었던 것이다. 밤이 찾아오자 바다는 더욱 거칠어졌다. 다음날인 8월 22일 오전에 작성한 항해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하룻밤 새에 두 차례 전복되었다. 위성 GPS 수신기와 풍속계도 작동을 멈췄다.” 여러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머릿속을 스쳐가지도 않았다. 22일 오전 시간은 내내 선실에 머무른 채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 날 오후,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모든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새에 누군가가 미 해안경비대(Coast Guard)에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내 자신을 질책할 수밖에 없었다. 블로그에 올린 마지막 글에는 보트의 전복과 머리에 입은 부상, 시앵커의 분실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런 기록이 해안 경비대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조난 상황에 계신 것 아닌가요?“ 그들이 내게 물었다. 상황이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조난 상황에 처해있지는 않다고 경비대에 답했다. 도움이나 구조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어진 약 6시간 동안 해안경비대가 보내오는 무전은 점점 더 끈질겨졌고 구조를 받아들이라는 압박도 심해졌다. 해안경비대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나는 점차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어갔다.


해안경비대의 무전은 계속되었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구조를 받아들여라.’ 해안경비대가 보내온 무전 내용의 요지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절규하면서 결정을 내릴 시간을 더 달라고 답한 뒤 교신을 끊었다. 구조되는 것은 내 천성적인 고집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보면 시앵커의 분실, 전자 장비들의 고장, 너덜거리는 낙하방지용 그물, 뽑혀져 나간 안전벨트 끈으로 엉망인 선실 내부 상태 등으로 인해 바다 위에서의 내 안전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았다. 좋게 생각하면 내게는 앞으로 더 나아가 돌아올 수 없게 되기 전에 보트를 재정비할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나는 해안경비대에 무전을 보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해버렸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와서 날 데려가요.” VHF 무전기를 끈 나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30분쯤 지나자 헬기가 도착했다. 나는 헬기에 끌려 올라가는 내내 너울에 시달리고 있는 보트를 바라보았다. 소중한 배를 버리고 왔다는 사실이 크나큰 실수처럼 느껴졌지만 더 늦기 전에 신속하게 그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그리고 맹세했다. “조금만 견디고 있어, 브로케이드. 금방 데리러 돌아갈게.”



궁극의 유연함

화이트 홀리 호는 선체 길이 133피트급(약 40m) 연구선이다. 해상에서 배를 수리하기 위해서는 굳건하고 안정적인 작업대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내가 화이트 홀리 호와 계약한 이유였다. 화이트 홀리 호에는 해상 부표 정비 작업에 필요한 모든 장비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이는 곧 내 보트를 바다에서 건져내 갑판 위에 옮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크레인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제 유레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지 겨우 이틀째였다. 지난 이틀간 나는 적합한 탐색인양선을 찾고, 수색 작업을 시작하고, 브로케이드를 수리하는 데 필요할 지도 모르는 모든 부품들을 철저히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에이너와 멜린다라는 50대의 두 친구에게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도움을 받았다. 화이트 홀리 호를 찾아낸 것도 에이너와 구글 검색엔진 덕분이었다.


워싱턴 주 화이트 샐먼 출신의 내 남자친구 에릭 샌포드도 탐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내가 헬기로 구출된 직후부터 그는 브로케이드에 부착된 송신기에서 보내는 해상 추적용 GPS 좌표를 통해 남쪽으로 흘러간 보트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파악하여 랩톱 컴퓨터에 저장해두고 있었다. 또한 브로케이드가 이동할 항로를 예측해 우리가 그녀와 마주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을 추론해내는 작업을 맡았다.


브로케이드의 위치를 추정해낸 에릭의 추측 항법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수많은 변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잃어버린 보트를 정확히 향하고 있었으며 실로 대단한 해상 측량 기술이었다. 우리가 근접할수록 그 작은 조각은 친숙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바다는 마치 물방아용 연못만큼이나 잔잔했다. 덕분에 빈스 함장은 화이트 홀리 호를 브로케이드 옆에 바싹 붙였고 이는 에릭과 내가 탐사선에서 밧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곧바로 보트의 갑판에 올라설 수 있을 정도였다.


크레센트 시티에서 출항했을 당시 이미 항해에 적합한 계절이 막바지에 이른 무렵이었다. 때문에 나는 해상에서 최대한 신속하게 수리 작업을 마친 뒤 더 이상의 지체 없이 모험을 재개하고자 했다. 우리는 곧바로 수리 작업에 착수했다. 나는 하루 종일 위성전화를 붙들고 웨더맨, 그리고 대양 로잉 협회(ORS)와 연락을 취하며 앞으로의 항해 전략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릭에게 전화를 걸어 출항 예상 지역과 시간대를 알려주며 예보를 부탁했다. 릭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계획해둔 항로의 한쪽 기둥을 옮기는 겁니다. 게다가 올해로 치면 이미 출항 시점도 늦었어요. 이대로라면 하와이 근처에 도달할 때쯤 겨울 폭풍을 맞닥뜨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어요.” 홍보 담당자로서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나는 니콜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로즈 당신이 내리는 결정을 지지할 겁니다. 하지만 일단 육지로 돌아와서 당신이 안전을 중시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편이 좋겠어요. 배도 확실히 수리하고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다시 출항하는 게 어떨까요.”


가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 출항하여 태평양을 횡단한다는 계획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겨울 폭풍 속으로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니콜의 의견이 옳은 지도 몰랐다.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갖고 바라보면 단기적이기 보다는 장기적인 성과를, 성급한 돌진보다는 성숙한 책임과 같은 가치를 품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이룰 수 있는 목표였다. 내 결정은 명확해졌다.


“다들 정말 미안해요. 밤새 고심한 결과 오늘 출항은 무리일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항해를 재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준 여러분에게 정말로 감사해요. 그렇지만 모든 상황을 다 따져보아도 항해를 밀고 나가기엔 예상되는 앞길이 너무나도 위험해요. 일단 샌프란시스코로 귀환한 다음 보트를 충분히 수리해서 내년에 다시 도전할 생각이에요. 실망시켜서 미안하고 너무나 송구스러워요 여러분.”


“궁극의 유연함,” 멜린다가 끼어들었다.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확보해두고 그 가운데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 하나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해. 제아무리 배가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해도 다른 요소들이 받쳐주지 않는 상태라면 시작을 미루는 건 당연한 거야.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모든 것은 주어질 것이니,

태평양 횡단을 향한 내 도전이 멈추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마침내 5월이 왔고 오랜 꿈을 이룰 시간이 다가왔다. 2007년에 희망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금문교에서의 출항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나는 만조 때 조류가 둔해진 틈을 타 먼 바다로 치고 나갈 계획이었다. 금문교 바로 아래에는 빠른 물살이 먼 바다로 빠져나가는 매우 좁은 구간이 주기적으로 생성되곤 했다.


주 항구에서 튀어나온 말굽 모양의 만을 벗어나 노를 저었다. 나는 금문교 바로 아래를 지나가려고 애썼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물이 들어오고 있는 듯 했다. 거의 반 시간동안 격렬히 조류에 맞서 싸우며 최선을 다했지만 고개를 들어 다리를 올려다보니 기둥들은 정확히 이전과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배의 항로를 약간 더 해안과 가까운 방면으로 변경한 덕분인지 아니면 조류의 흐름이 드디어 바뀐 것인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결국 금문교를 통과해 대양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밤새 노를 저었다. 도저히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던 그날의 늦은 시간 무렵, 내 보트는 드디어 파랄론 제도를 지나고 있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은 초반부터 어김없이 찾아왔다. 선체와 시앵커를 연결하는 밧줄이 자꾸만 주 낙하산줄과 뒤엉키는 바람에 나는 매일 소금물로 가득한 시앵커를 야만적으로 힘을 써서 끌어올려야했다. 그렇게 시앵커를 끌어올리기 위해 분투하던 어느 날, 갑작스런 파도가 낙하산을 덮치는 바람에 밧줄을 잡은 채 끌려가다가 손가락이 선체 어느 모서리를 강타했다. 충격을 입은 손가락은 골절되었는지 평소의 두 배 이상 부어올랐고 나는 급히 조정용 글러브를 찢어야만 했다. 어느 날 밤에는 시앵커가 통째로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그보다 더 위급하고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바다 위에서의 내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장비는 바로 담수 제조기이다. 문제는 항상 전자기기와 소금물이 지독하게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내가 구매한 PUR06은 분명 사용한 적이 없는 새 제품이었고 출항 전에 시험 가동도 무사히 마쳤다. 이처럼 최악의 상황에 갑작스럽게 고장이 난다는 것은 기이할 정도의 불운이었다.


현실적으로 내가 물을 공급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은 내 항해가 비롯된 이념 자체를 거스르고 있었다.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가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이에 대한 적합한 해결책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라는 직감이 든 나는 선실 침상 아래에 보관해 둔 드로메더리 가방들에 한동안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여분의 물이 담겨 있다고 어머니에게 알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예감은 적중했다. 어머니와 위성 전화로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블로그 방문자 중 한 명이 래프트선인 정크 호가 내 위치로 접근 중이라는 댓글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정크 호에 관한 이야기는 전에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기지를 둔 알갈리타 해양연구재단 소속의 두 남성이 한 팀을 이루어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에 대한 환경문제 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모험을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온전히 쓰레기로만 만든 래프트선을 타고 캘리포니아 주의 롱비치에서 출항하여 하와이까지 항해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담수제조기가 고장 난 지 6주가 지난 8월 8일의 오후 늦은 시간, 나와 정크 호의 마커스 에릭샌 박사, 그리고 항해사인 조엘 파스칼의 연락이 처음으로 성사되었다. 우리는 매일 교신하면서 각자 항로의 합류지점으로 조정해 나갔다. 합류에 성공하자마자 우리는 우선 가장 중요한 일부터 처리했다. 조엘은 브로케이드의 선실 한 쪽에 놓아둔 식품 주머니를 가지러 배를 건넜다. 식품을 정크 호로 옮긴 뒤, 마커스와 조엘은 함께 식수를 가득 담은 컨테이너를 브로케이드로 운반해주었고 텅텅 비어버린 드로메더리 물 가방들도 가득 채워주었다.


저녁 시간. 빈 물병들로 만든 선박이 하와이 동쪽 해상 수백 마일 지점에 떠 있고, 그곳에서 저녁 식사 파티가 열리는 초현실적인 일이 벌어졌다. 정크 호의 선원들은 정말 환상적인 친구들이었고 그들 덕분에 나는 배를 가득 불린 채, 다시 노를 쥐고 미소를 지으며 석양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기존의 물 비축고는 8월 18일에 고갈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정크 호에서 보급 받은 물을 사용해 9월 1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같은 주 목요일, 정크 호의 친구들과 나는 와이키키 수족관 앞뜰의 잔디밭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가졌다. 우리는 25명 정도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작은 버스를 타고 수족관에서 오아후섬 북동쪽 해안이 위치한 카후쿠 해변으로 이동했다. 인적이 드문 카후쿠 해변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해초가 무성할 거라고 예상했던 해안선이 온통 플라스틱 폐기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에 널려 있는 플라스틱 잔해들 가운에 일정량밖에 주울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한계는 상상 저 너머에 있다

드디어 나는 태평양 횡단, 그 두 번째 단계 항해를 위해 출발했다. 항해 45일째, 나는 적도 기준 북위 8도선을 돌파했다. 항해 50일째, 나는 북위 6도선을 돌파해 열대수렵대(ITCZ)에 진입했다. 이 지역은 흔히 무풍지대로 알려져 있으며 태평양으로 치자면 중간대에 속했다. 그 사이 포르투갈 리스본에 체재하고 있는 리카르도라는 친구로 웨더맨이 교체되었다.


항해 86일째, 담수제조기가 또다시 고장을 일으켰다. 담수제조기가 작동을 멈춘 다음날인 항해 87일째, 리카도르는 내게 닥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기상여건과 조류를 종합해봤을 때 투발루까지 무사히 당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항해 89일째, 국제 날짜 변경선을 통과했다.


날짜 변경선을 지나 8월 31일에서 9월 1일인 세상으로 넘어가는 순간, 나는 여전히 적도에서 북쪽으로 46마일(약 74km) 떨어진 지점에 떠 있었다. 날짜 변경선 통과 세레머니는 매우 조용한 편이었다. 성공에 대한 기쁨보다는 기항지에 대한 고민이 더 깊었다. 항로 입력장치의 화면을 돌려보던 중 투발루의 위치로 잡았던 숫자 좌표가 본섬이 아닌 바깥쪽에 위치한 섬의 것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리카르도는 내가 아직 서쪽으로 142해리(약 263km)를 이동해야 하며 그와 동시에 남쪽으로도 항행해야 한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서쪽으로 약 100해리(약 185km)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짐작하고 있었던 나의 계산착오였다. 모든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다.


길고 지루했던 백여 일간의 패들링 끝에 마침내 적도 종단의 날이 밝았다. 물결은 잔잔했고 바람이 전혀 도와주지 않아 나는 하루 종일 노를 저어야 했다. 오전 6시 30분부터 노를 젓기 시작해 저녁 5시 05분, 나와 브로케이드는 드디어 전설적인 적도선을 돌파했다.


다음날 아침, 적도선 돌파 이후로 미뤄뒀던 모든 고민과 걱정거리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투발루까지는 이제 500해리도 남지 않은 상태였지만 거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온종일 리카르도가 제시한 계획에 따라 동쪽으로 노를 저었다. 그러나 잠시 쉬려고 패들링을 멈추기가 무섭게 보트는 서쪽으로 떠밀려 내려갔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투발루 상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닥 희망을 잡고자 기를 쓴 것은 가야만 하는 이유가 즐비하기 때문이었다. 기항하고자 했던 목적지이기 때문에, 내가 곧 당도할 것이라는 소식이 지역 라디오를 통해 전해졌기 때문에, 투발루 정부 인사들과 만날 계획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보트를 정박할 장소까지도 마련을 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어떻게 투발루가 세계 최초의 탄소중립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그날 밤 나는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투발루인가, 타라와인가?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세계는 하나

타라와까지 20마일(약 32.2km)밖에 남지 않은 지점. 나는 지난 48시간동안 6시간도 채 수면을 취하지 못한 상태였고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타라와까지 이제 9마일(약 14.5km)가량 남겨둔 시점. 두 번째 단계 항해를 시작하고 총 3,000마일(약 4,828km) 넘게 노를 저어온 나는 전날 밤도 꼬박 지새운 상태였다. 천천히, 착실하게 한 스트로크씩 나아가며 두 번째 항해의 마지막 몇 마일을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타라와의 남쪽 끝, 결승 위도선을 돌파했다. 마을의 둑 근처로 향하던 나는 500명 넘게 운집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총 인구 10만 명이 사방 2,000마일(약 3,200km) 거리에 흩어져 살아가는 나라에서 이는 엄청난 규모의 인파인 셈이었다. 타라와의 주민들을 돕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나의 연설을 끝으로 몰려든 인파는 해산하기 시작했다.


섬에서 대부분의 생활은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집은 그저 밤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머무는 공간에 불과했다. 이튿날 저녁, 우리는 데이빗 램번과 테시 램번 부부가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되었다. 데이빗은 쾌활한 성격의 호주 태생 남성으로 법무 차관직을 맡고 있었으며 그의 아내인 테시는 키리바시 출신의 우아한 여성으로 외무 장관직을 맡고 있었다. 데이빗은 내가 타라와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부터 우리 팀을 지원해 주고 있었다.


데이빗은 키리바시 공화국이 어째서 다른 국가들 보다 기후변화에 유독 취약한지 설명해주었다. 키리바시 공화국은 바나바 섬에 위차한 해발고도 81m짜리 언덕을 제외하고는 지면이 해수면으로부터 6피트(약 1.8m)이상 솟은 곳이 없다. 주민들은 개울은 물론 샘도, 강도 없는 환경에서 대부분의 식수를 담수 렌즈층에 의존하고 있었다. 문제는 지구온난화로 해수면 상승이 진행 중이라는 데 있었다. 해수면이 상승해 소금물이 담수 렌즈층을 덮으면 키리바시의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식수 공급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브로케이드의 정비를 돕기 위해 이안 툴러가 섬에 도착했다. 우리는 공항에서 이안과 합류하자마자 곧바로 브로케이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곳 타라와에는 승무원 후보생들이 기초 훈련을 받는 해양 선원 양성소(MTC)가 있는데, 이 시설은 내가 태어난 해인 1967년 설립되어 효율성, 조직력, 군대식 규율을 바탕으로 다소 방만했던 타라와 섬 전체의 분위기와 균형을 다잡았다고 한다. 브로케이드가 머물 곳은 바로 이 양성소 안의 한 건물이었다. 이안과 나는 그 주 대부분의 시간을 양성소에서 보내며 장비들을 점검, 정돈, 보관하는 작업에 전념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준비하며 출항일을 기다리던 어느 날, 나는 키리바시 공화국의 대통령인 아노트 통(Anote Tong)의 집무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날씬한 체형에 깔끔한 모양으로 콧수염을 기른 통 대통령은 낮은 커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깍지 낀 손을 앞으로 한 채 그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근심을 털어놓았다.


가장 먼저 그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해수면 상승에 맞설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금전적인 지원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했다. 통 대통령은 또한 국제 사회에 방파제 건설을 부탁할 생각이라고 했다. 해수면 상승으로 점점 높아져 가는 파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그는 지면이 낮은 국가들이 더 이상 자신들과 같은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온실가스 배출 제한 규제를 적극 시행하도록 간청할 계획이라고 했다.


코펜하겐 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묻자 통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제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현실로는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발 우리 모두가 이 문제를 상식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모든 발전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발전의 풍요를 누리는 이들이 곧 대가를 치른다는 법은 없습니다. 분명 다른 누군가가 희생될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 모두는 더욱 큰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진 그의 마지막 말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슬픈 표정의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북극곰들의 생존에 대한 문제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인간의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의.”


키리바시 국민들은 최저 생존 수준에 가까운 삶의 방식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제 이들에게 있어 기후변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문제들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다. 그리고 나는 이 문제가 사람들의 얼굴 위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타라와에서 처음 목격했다. 이대로 가면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모든 이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질지 모르는 일이다. 기후변화에는 국경이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마주한 이 최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전 인류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마침내,

항해 기간을 약 100일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세 번째 항해가 당초 계획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어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출항 후 4주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목적지까지의 남은 예상 소요시간은 2~3주밖에 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솔로몬 해에 진입하면 파푸아 뉴기니까지는 금방이었다. 그와 동시에 태평양 횡단의 가장 크고 중요한 항로들을 통과해 이번 여정의 최종장으로 접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호주 대륙의 케언스를 항해하겠다는 당초 계획은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투발루가 아닌 타라와로 방향을 전환한 순간부터 사실상 퀸즐랜드(Queensland)항로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천운이 따라 태평양과 호주 대륙의 동쪽 해안 사이에 놓인 산호 해(Coral Sea) 진입에 성공한다 해도 조류와 계절풍이 보트를 사정없이 북쪽으로 밀어낼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나는 터키 출신 모험가 에덴 이룩이 택한 파푸아 뉴기니 항로를 따르기로 결정했고 이 선택에는 다행히 행운이 따랐다. 서태평양의 조류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내가 올라탄 조류의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46일간 주파한 거리가 무려 2,248마일(약 3,618km)에 달했다. 하루 평균 49마일(약 79km)씩 전진한 셈이었다. 이전까지 내 일일 최고 항행거리가 42마일(약 68km)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경이적인 속도였다.


예상보다 입항 시기가 앞당겨지면서 어머니는 몇 주 내내 나를 맞을 준비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타라와에서 신세를 진 데이빗 램번의 주선으로 우리는 전직 마당 주지사였던 피터 바터 경(Sir Peter Barter)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그는 기꺼이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정식 환영 행사를 주선하겠다면서 내게 예상 도착시간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피터 경에게 선약이 있어서 6월 3일 입항을 피해야 했지만 여러 차례 계산을 해 보아도 6월 3일 도착이 확실해 보였다. 나는 피터 경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고, 그는 오전 중으로 모든 약속을 마치고 오후 시간을 비울 수 있도록 조치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즉, 목표는 6월 3일 오후 입항이었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노를 저었다. 피터 경은 도착 예정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이용한 주기적인 연락을 부탁했고 나는 가능한 한 자주 연락하기 위해 노력했다. 피터 경은 내가 순항하고 있는지 체크하기 위해 해질 무렵 방문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늦은 오후 무렵, 정말로 커다란 요트 한 대가 내게로 다가 왔다. 새하얀 크루저요트의 옆면에는 ‘칼리보보 스피릿(Kalibobo Spirit)’이라는 선박명이 푸른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요트에서는 이미 성대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피터 경은 몸소 스윔 덱으로 나와 각각 해산물과 과일이 담긴 거대한 접시 두 개, 그리고 샴페인 한 병을 내게 전달해 주었다. 피터 경은 이어서 파푸아 뉴기니 해양대학교장인 리처드 콜먼 씨와 그의 아내 테클라 씨 등 여러 사람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해가 지면서 요트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하선을 위해 항구로 복귀했다.


오후 11시, 나는 마침내 역사적인 등대 지역을 통과했다. 물론, 입국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아직 마당에 상륙할 수 없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출입국 사무소 직원들은 퇴근한지 오래였다. 때문에 나는 브로케이드를 요트 뒤편에 정박시키고 칼리보보 스피릿 호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다섯 시간의 짧은 숙면은 순식간에 끝났다. 나는 노크 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어 입항 기념식에 임할 준비를 했다. 브로케이드를 요트에서 다시 바다로 끌어낸 다음 어머니와 짧은 통화를 했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다음 나는 다시금 노를 쥐고 여정의 마지막 조각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두에 가까워질수록 인파는 늘어만 갔다. 마당 리조트를 돌아서 들어간 항만 방파제 위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인파가 가득했다. 결코 과장이 아니라 5,000명은 족히 되어보였다. 드디어 나는 노를 놓고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여권을 건네고 몇몇 간단한 질문들에 답한 다음 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끝으로 모든 공식적인 입국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마침내 상륙 허가를 받은 것이다.


피터 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눈이 닿는 곳 모두 구경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피터 경은 물가에 설치된 연단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환영식이 끝나자 피터 경은 나를 마당 리조트 별채 건물에 위치한 방으로 안내했다. 내가 언제라도 브로케이드를 볼 수 있도록 피터 경이 일부러 마련해준 방이었다. 브로케이드는 항구에서 옮겨져 긴 밧줄에 연결된 채 작은 석호 가운데에 떠 있었다.


보트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의 방문 행렬은 하루 종일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리조트 주변을 거닐며 수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축하 인사를 받았다. 마당 지역에 입항하면 반갑게 맞이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거라며 노심초사하던 얼마 전까지의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주지사와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게시물을 작성했다.


영원히 기억될 날이다. 모든 것이 장관이었다. 이 뜻 깊은 하루에 도움을 준 마당 지역의 모든 분들, 피터 바터 경, 현 주지사, 마당 리조트 직원들, 비록 이 자리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사랑으로 나를 도와준 어머니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이다.


또한 전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모든 응원과 격려, 질타와 축하의 메시지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태평양 횡단 항해에서 모두가 보여준 사랑, 관심, 온정, 친절, 그리고 성원은 내 항해에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힘이었다. 모든 부침, 시련과 역경을 함께 견디고 마지막 축포를 터뜨리기까지 내내 곁에 있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번 항해의 결과를 전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총 4년의 시간, 대양 위에서의 250일, 항해 거리 8,000마일(약 12,875km), 약 250만 차례의 오어 스트로크가 투입된 나의 태평양 횡단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나는 홀로 노를 저어 태평양을 횡단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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