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경고

   
엘리자베스 파렐리(역자: 박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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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직북스
   
15000
2012�� 11��



■ 책 소개
“미래의 사람들은 자유의부재가 아니라 자유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초고도 산업의 딜레마인 ‘과잉 선택’의 희생자가 될지도모른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만들어진 이미지에 갇혀서잘못 알고 있거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분해해서 펼쳐 보여준다. 저자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그토록 열심히 뛰어다니며 일하는지, 더 많은 것을 위해 정작 소중한 하나를 놓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자고 한다.

우리 자신이 일군 성공의 희생자가 되어 절뚝거리고피투성이가 된 지구의 맥박소리를 듣게 되기 전에 우리는 행복에 대한 진짜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간절하게열망하던 바로 그 풍족한 의미, 모두가 행복한 세상, 모두가 만족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되찾아야한다.

■ 저자 엘리자베스파렐리(Elizabeth Farrelly) 
시드니에서 활동하는 칼럼니스트이며, 오클랜드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런던과브리스톨에서 건축 실무를 보다가 시드니 대학에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시드니 대학에서 겸임 부교수직을 맡고 있다.

파렐리는 건축 잡지 「건축 평론(TheArchitectural Review)」 런던지점에서 편집 조수 업무를 했고, 시드니 시의 고문 위원직과 호주 도시설계 시상식에서 취임식을진행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파렐리의 저서는 매리언 마호니 그리핀 상(Marion Mahony Griffin Award, 2002년), 파스칼비평가 상(Pascall Prize for Critical Writing, 2001년), 애드리언 애쉬턴 상(Adrian AshtonAward, 1994), CICA 파리 국제 비평 상(1992) 등을 수상했다. 1993년에는 『글렌 머컷: 세 개의 집(GlennMurcutt: Three Houses)』을 출간했다. 『글렛 머컷』은 2003년 건축가 상인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엘리자베스 파렐리는배우자와 두 자녀와 함께 시드니에서 살고 있다. 

■ 역자 박여진
한국에서 독일어를 전공하고 호주에서 비즈니스를 공부했다. 기업경영컨설팅 회사를운영하며 CEO직을 맡았고, 이후 영어 관련 일을 하다가 영미 문학에 이끌려 문학책을 기획번역 하면서 번역가가 되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활동하면서 번역가 모임인 ‘번역인’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직언』『정의로운 교육이란무엇인가?』『작가가 사랑한 작가』『승자의 편견』 등이 있다. 

역자 이메일: didibydidi@gmail.com 

■ 차례
서문
프롤로그 

1장 육체의 갈망: 지금 당장, 전부를 원하다
녹색도화선을 통해 꽃을 피우는 힘 | 왜 우리는 과잉 만족해야 하는가? | 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는가?: 즐거움 | 시기심 |안전함과 두려움 | 물질 | 완벽함 | 선택과 과잉 선택 | 비뚤어진 욕망 | 그릇된 욕망을 품게 만드는 BIS | 4번째 굶주림

2장 아름다움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기위한 
아름다움, 실재 혹은 상상 | 아름다움, 권력, 연결성 | 아름다움과 고대의 유물들 | 아름다움과 모더니즘 |인간의 아름다움 | 건축에서의 아름다움 | 아름다움이 우리를 선하게 할 수 있는가?

3장 아름다움에 반대하다: 추함에서 정직함 찾기
있는 그대로를 추구하다 |필요성, 작품과 와비 사비 | 진정성과 노동 | 아름다움에 반대하는 교회 | 그림의 미학적 가치의 근거 | 예술: 진실이라고 거짓말하기

4장 가면으로써의 집:연결고리
거짓말, 파묻힌 보물 | 영혼의 사원, 육체 | 마음의 창, 얼굴 | 옷 그리고 본심 | 집의 기능과 역할 |투명함 

5장 비만과가정
맥맨션랜드 | 팻 | 뚱뚱한 도시 | 뚱뚱한 삶 | 맥맨션주의 현상 | 키치와 해변의 오두막 | 키치와 흔들리는 배| 맥맨션주의, 공동체, 두려움 

6장자연과 문화
자연과 문화: 도시 | 자연결핍장애 | 거품, 자동차, 움벨트 | 움벨트로써의 자동차 | 미끄러운 도시 |도시의 틈, 다공성 | 자연과 문화, 질서와 혼돈 

7장 페미니즘과 미래의 식습관
비만 | 소비 주체로서의 여성 | 쇼핑, 지갑, 방 | 자아의확장: 자동차, 집, 아이들 | 여성 건축가들 | 안전과 행복에 대한 병적인 집착 | 여성의 존재감 

8장 건축공포증과 블러버랜드 정책
우리의 목표는민주주의일까? | 교외생활의 허상 | 건축공포증 | 취향: 선택의 자유 | 결정권 | 도심의 스프롤 현상 | 속도 낮추기와 두드러진 변화: 실제비용 

9장 내가 꿈꾸는도시

역자 후기





행복의 경고


육체의 갈망: 지금 당장, 전부를 원하다

욕망은 삶의 근본적인 힘이다. 아마 대부분 그럴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욕망에서 비롯된다. 음식, 사랑, 돈, 섹스, 권력 등에 대한 욕망은 물론 더 높은 수준의 더 관념적인 것에 대한 욕망, 즉 진실, 질서, 신 등에 대한 욕망도 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욕망은 우리가 행하는 행위 자체이자,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며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욕망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유이며, 스스로 결정짓는 방식이자, 더 크게는 미래를 형성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욕망하기 때문에 존재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욕망한다.


철학자 윌리엄 어빈은 "욕망은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고 말했다. 욕망이 우리의 신화적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부터 <베니티 페어>의 베키 샤프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왕 아합부터 싯다르타까지 모두 반드시 무언가를 원한다. 욕망은 영화의 줄거리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삶을 그렇게 조정하듯이, 나이든 사람이나 병자들, 불자들처럼 욕망이 없는 상태를 우리는 두려워한다.


왜 우리는 과잉 만족해야 하는가?

욕망의 종착점은 물론 행복이다. 우리는 단순히 욕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서 행복까지 이르는 연결고리를 추측하도록 굳어져버렸다. 이 연결고리는 서양 문화와 경제에 너무도 깊숙이 자리잡아 이제는 명확히 구분해 읽어낼 수조차 없다. 또박또박 읽어도 포스트 히피들의 엉성한 만트라 주문 같다. 만족은 기쁨과, 기쁨은 행복과, 행복은 거의 모든 것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만약 이 연결 고리 중 하나가 잘못된 것이라면?


실제로 욕망 = 만족 = 기쁨 = 행복이라고 하는 논리의 연결 마디마디가 명백히 거짓이다. 욕망이 늘 만족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만족은 종종 우리의 기대보다는 덜 기쁜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 짧다. 기쁨을 성취했다 해서 행복이 오지는 않는다. 대부분 기쁨의 순간은 기껏해야 우울함과 우울한 증상에서 벗어난 잠시의 기분전환일 뿐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끔찍한 고통을 더욱 강화시키기도 한다.


소비, 기후변화, 비만 등과 유행처럼 번지는 우울증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나오면서 이 연결고리의 거짓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대중문화에서는 만족에 대한 강박증이 여전하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종교는 거부 대상이고, 계몽운동은 실망스러웠지만, 서점에는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책들이 넘쳐난다.


심리학자 존 슈마허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학원, 행복캠프, 행복클럽, 행복강좌, 행복여행, 행복워크숍, 행복피정 등이 도처에 널려 있다. 대학들은 행복을 연구하고, 개인의 행복은 큰 사업이며 모두가 행복을 사고 판다. 녹아내리고 있는 이 지구에서 말이다."


마치 비만이 확산되면서 마른 몸을 숭배하는 현상이 퍼지듯 서양 문화에서는 전염성이 강한 우울증이 확산되면서 행복 중독증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알기를 거부하면서 행복은 여전히 성배에 모셔둔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행복의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바로 행복추구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명백하다. 만약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실은 이 행성에 대재앙을 촉발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그릇된 욕망인 과잉 만족에 그토록 휘둘리는 것일까?



아름다움에 반대하다: 추함에서 정직함 찾기

있는 그대로를 추구하다

어쩌면 키츠가 옳았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아마 아름다움일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모더니즘 때문에 진실 탐구의 열정이 생겼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는 거의 신경강박증 환자처럼 추함을 찾게 되었다. 고전예술사학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추함의 징조는 타락의 징조이다. 예를 들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추구하는 자연주의의 영향으로 완벽한 자연 미에 대한 합의를 하지 않았던 헬레니즘문화의 그리스 조각과 4C 로마 예술은 이들 문명의 쇠퇴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비단 문명의 쇠퇴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20C의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1C의 로마의 자연주의나 추한 것을 묘사하려는 의지 때문에 특정한 것을 찾아 탐구했다.


모더니스트 화가들에게는 추함을 추구하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한 차례 소동을 일으켰다. 이후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은 매춘부 취급을 받았다. 프랑스 화가 툴루즈-로트렉과 인상주의 화가 드가는 완벽하게 꾸미려는 의도 없이 매춘부와 발레리나의 모습을 그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폴 세잔은 아름다운 그림을 잊고, 진부함을 부숴버리고, 진실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 지독하게 노력했다. 진실에 닿으려는 그의 필사적인 노력이 실패했다고 해서 그 실패가 매도당한 것은 아니다. 파울 클레 역시 그림의 기교를 잊고 어린 아이처럼 다시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기술 함양 그 자체가 진실추구의 장벽이 된다는 관념이 현대의 주요 사상으로 널리 퍼져 있다.


20C 건축에서 진리와 추함은 예술에서보다 더욱 무자비해졌다. 르 꼬르뷔제에게 진리의 발견은 원초주의자의 근본주의였다. 즉, 기하학에서부터 비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원초성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소위 문명화의 편견에 치우친 사람들 때문에 깨닫지 못한 창의적인 원칙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 탈학교 유형의 르네상스형 인물들과 함께 등장했다. 바우하우스(독일의 디자인 학교)를 세운 발터 그로피우스는 목조건축의 세계에 심취한 이후 1921년 베를린에 좀머펠트 하우스를 지었고, 더 단순하고 기능적이며 더 솔직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 프리미티비즘(자연이나 자연주의적인 것을 인간적 가치의 기준으로 보고 소박하고 단순한 것을 추구하는 사조)으로의 이행을 거부했다. 르 꼬르뷔제와 마찬가지로 그로피우스는 공학자를 미학 교육에 때 묻지 않고 객관적인 원인에 따라 움직이는 이상적인 전문가로 보았다.


이는 건축가들의 실증주의로의 초대였다. 약간의 자본주의의 도움을 등에 업은 실증주의는 40년 동안 공학과 공학의 반미학적 정서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오늘날 건축에서 공학이 그다지 사랑을 받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주 진지한 현대 예술 세계에서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여전히 후한 점수를 받는다. 현대 예술의 주된 기능은 일상적으로 과잉자극과 시각적 충격을 받는 관중들을 놀래주고 충격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미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지프가 말한 대로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추함을 추구했다. 이러한 시도는 주변에서만 겉돌지 않았다.


영국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부패하고, 더럽고, 일그러지고, 썩어가는 육체를 그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성적인 매력을 혐오했던 것으로 유명한 영국 화가 루치안 프로이트는 제리 홀이나 케이트 모스와 같은 모델들이 그의 작업실에 있는 누추한 의자에 엎드릴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프로이트를 그토록 아름다움 이면의 것을 찾도록 만들었을까?


호주 예술부 장관 리차드 알스턴은 74억 달러를 들여 2001년 호주 국립 미술관에서 <에프터 세잔(2000년, 유채)>을 공개하며 프로이트적 특성을 자랑스레 언급했다. 알스턴 장관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은 추함의 극대화라고 했다.


데이브 히키는 인간의 육체를 강요하고 때론 공격적이기도 한 로버트 메이플소프와의 사진과는 달리 불완전한 인간의 삶과 추한 인간의 육체를 움츠러들지 않게 포용함으로써 진실을 추구하는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재탄생이라고 옹호했다.


복잡하고, 날카롭고, 우리 시대와는 정반대인 이것이 우리 사회가 모색하는 미의 기준인가? 아니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나 사랑하는 공간들을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너무도 위압적인 사실을 부인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전략에 불과한가?



가면으로써의 집: 연결고리

집의 기능과 역할

가면과 마찬가지로 집 역시 자아를 대신하고 질서 정연한 세계에서 자신의 공간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집과 자아를 동일시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어떤 면에서는 한쪽 성으로 치우친다. 어두움, 수용적인 실내 장식, 방어, 따스함, 적당한 그림자 등이 있고 잠을 잘 수도, 가면을 벗고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는 연인으로서의 집, 어머니로써의 집에는 구석구석 신화와 문학이 흐른다. 체코의 시인 밀로츠는 이러한 감성을 포착해 이렇게 표현했다. "어머니, 저는 당신을 그리고 아, 집을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의 아름답게 어두웠던 여름을 보낸 집을."


일본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여성과 집의 외형상의 동일성에 관해 언급한다. 그에 의하면 일본 여성에게 집 밖에서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일본의 전통 인형극 분라쿠는 곧 일본 여성인 셈이다.


"과거에는 실제로 여성이 옷깃과 소매 끝으로 머리와 손만 내놓고 살았다. 나머지 부분은 어둠 속에 숨기고 살았다. 사회는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여성은 어둡고 깊숙한 가마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자신을 보호했다. 여성은 대부분 삶을 집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살았다. 낮이나 밤이나 어두운 덮개를 쓰고서."


니체의 영향을 깊숙이 받은 영국 작가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는 남성은 행하는 반면 여성은 존재한다고 했다. 여성은 중심을 잃지 않는 고요함을 상징하며, 그저 남성의 밤 시간에 속해 있고, 남성이 낮으로부터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칼 융도 비슷한 말을 했다. 융은 집을 둥지로 보았고 남성은 횃대 끝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바깥일을 하는 반면 여성은 내내 둥지에 앉아있다고 했다.

이 관계는 단지 집의 내면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중심으로서의 역할, 즉 자궁으로서의 집과 관련된 것이다. 이론가들은 전통적인 주거형태 중 상당수의 주거지는 둥글고 내면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원뿔형 천막집부터 고대 스코틀랜드의 돌로 지은 원뿔 형태의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집의 그 어원은 숨는다는 말과 연관이 있다.


캐나다의 비평가 마가렛 비서는 난로, 가정이라는 의미의 영어 하스(hearth)의 라틴어 어원은 난로, 화덕이라는 의미의 포쿠스(focus)임을 주목한다. 가정에서 요리용 화덕의 중심성은 요리사로써 여성의 전통적 역할뿐 아니라 음식과 생식의 자연스러운 관계에서도 나온다고 본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은 가정과 긴밀한 여성의 모습을 거부한다. 하지만 젠더에 대한 선입견을 버린다 하더라도 집과 자아와의 관계는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건축물을 의인화해서 대할 뿐 아니라 대다수의 아이들이 그린 집의 모양에서 볼 수 있듯, 본능적으로 두개의 창문과 하나의 문 혹은 두 개의 눈과 하나의 입 등 대칭적인 전면의 모습을 선호한다.


알랭 드 보통은 이탈리아에 있는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빌라 로톤다와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택들 대다수는 갑옷 혹은 가면으로 이상화된 자화상이라는 인식이 있다고 말한다. 18C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암 바티스타 비코는 한 가정의 아버지라는 사람 혹은 가면 아래에는 그의 자녀들과 하인들이 모두 숨겨져 있다는 로마의 속담에 함축된 개념을 더욱 확장시켰다. 그는 비단 집에만 국한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사무용 건물들 역시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다. 사무용 건물은 단순한 겉치레뿐 아니라 대중 영역을 향한 관대함과 소위 문화라고 하는 합작 프로젝트의 방식으로 그 건물의 이용자들을 대변한다. 파사드(건물의 당당한 또는 장식적인 정면)는 외부 세계에 읽을 거리를 줌과 동시에 내부 행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윈스턴 처칠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건축물을 만든다. 그리고 건축물은 우리를 만든다."



비만과 가정

뚱뚱한 삶

도시가 무질서하게 확산되건 그렇지 않건 비만과 풍족함 사이에는 명백한 관계가 있다. 부유한 국가들은 살찐 국가이다. 국제먹기연맹(IFOCE)은 국제적인 단체이지만 이 단체의 영혼의 고향이자 발원지는 미국이다. 1996년 플로리다 보석 디자이너인 다이애나 듀이서가 치즈 샌드위치를 굽다가 빵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의 상을 플라스틱 통에 고이 담아 구운 치즈 샌드위치 먹기 세계 대회에 진열한 나라도 미국이다. 하지만 서양 국가들 사이에서 비만의 사회적 현상이 역전되었다. 비만은 여전히 사회 경제적 지표이지만 지금은 그 양상이 달라졌다. 미국과 유럽, 호주의 경우 현재 마른 사람과 비만을 극복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은 부유층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여전히 호의호식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부유층들이 많이 사는 시드니 모스만 주민들이나 런던의 첼시, 뉴욕의 웨스트체스터 카운티 주민들이 평균적으로 차지하는 공간만큼 차지하고 산다면 우리는 7개의 지구가 더 필요하다고 「시드니 모닝 헤럴드」지는 경고한다.


뚱뚱하면 가난하고 덜 교육받은 사람처럼 보인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이 단순히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식을 하는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몸무게를 줄이는 산업이 약이며, 주사, 유전자 접합 등 인간의 본능을 거스를 수 있는 것들을 무제한 찾는 것이다. 많이 먹고 마른 몸을 유지하는 방법을 말이다.


물론 몸이 비만이라는 의미가 삶도 비만이라는 의미와 동일하지는 않다. 실제로 체지방은 마녀사냥의 대상이다. 마크 스테인도 지방과의 전쟁은 다른 방식의 테러와의 전쟁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비만 전쟁은 생태학적 관점과 상징적 관점 둘 다 연관이 있다. 육식을 기본으로 과식을 하는 생활을 생태적 의미로 보자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이산화탄소 및 메탄에서 비롯된 온실효과와 토양오염 문제가 있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소비자들에게 채식주의로 바꾸면 온실효과가스를 세 배 이상 줄일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자동차 연료를 80%까지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비만 전쟁의 상징적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인간은 영장류이다. 아무리 인간이 원숭이와 같은 사촌들을 초월했다고 생각해도 과학적 근거로 보면 인간은 원숭이와 더욱 가깝다. 예컨대 최근 과학 자료에 의하면 인간의 DNA가 침팬지와 99% 동일하다는 사실과 흰목꼬리감기 원숭이들이 주기적으로 성 상대를 바꾼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돈이 권력을 드러내는 편리한 지표라면 비만은 영장류가 필요한 것을 넘어 과잉섭취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체지방이 음식 과잉섭취를 나타낸다면 거대한 주거지는 집, 옷, 편안함, 도구 등에 대한 게걸스러운 원시적 욕망을 나타낸다.


이러한 영장류의 속성은 큰 이점을 주기도 하지만 인류와 지구에 훨씬 더 큰 문제를 안겨준다. 미국의 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자신과 대다수 그의 동료들은 육식성 영장류와 동물적 모습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영장류의 행태가 지구의 지배권 행사에 대대적인 돌파구를 만들었다는 점은 이 세계의 불행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우리의 생존본능이 유용한 정도를 넘어 더 오래 지속되면 인간 뇌의 구피질 깊숙한 곳에서 뭔가 좋은 것이라면 분명 많을수록 좋을 거야 하는 원초적인 목소리를 계속 내기 때문이다. 지구에 마지막 남은 신선한 공기가 있다면 내가 그 마지막 공기를 마시고 싶어. 나는 그 공기를 너무도 원해. 모든 사람에게 장기적으로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기 위해 내 쾌락을 억누르는 대신 그 공기를 얻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할 거야 하는 목소리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많이 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희미한 대뇌의 인식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 인간으로써, 한 종으로써 무언가에 도전을 받을 때 고작해야 우리는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욕망으로도 알려진 이 스트레스 때문에 우리는 계속 무언가에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영장류 유인원의 뇌는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많을수록 좋은 거야. 많을수록 좋은 거야 모든 경제가 성장이라고 하는 불가침의 원칙에 기반을 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많을수록 좋다. 많을수록 좋다


앤디 워홀은 말했다. "사고하는 것보다 구매하는 것이 훨씬 더 미국적이다" 여기서 워홀은 미국적이라는 말을 좋은 의미로 사용했다. 워홀은 속옷을 사러 어느 상점에 가야 하는지에 관한 주제로 그의 논문 지면 대다수를 채웠다. 그가 죽었을 때 그는 어마어마한 물건들, 그리고 한 번도 열어보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았던 상자들로 가득찬 방들을 남겼다. 이러한 탐욕은 단순히 필요가 아닌 결핍 때문에 사냥하고 모으는 원초적 쾌락 행위가 승화한 것일까? 무언가를 얻으면 근심어린 마음에 위안이 된다. 쇼핑중독이 현대의 가장 중요한 질병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화가 난다면? 뭔가를 사라. 그러면 당황스럽고 불쾌한 감정에 효과가 있을 것이다. 잠시 동안은 말이다.


필요하다는 말이 원한다는 말과 같다는 것과 원하는 것을 충족하는 것이 행복과 같다는 숨겨진 전제들에 광범위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공공정책을 연구하는 호주 연구소 소장 클라이브 해밀턴은 우리가 이전보다 부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최상위 부유층 20%는 자신들이 정말로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지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이 비만인 진짜 이유이다. 토니 캐폰은 "비만은 에너지 불균형의 결과이다. 즉, 다이어트로 사용하지 않은 에너지가 육체적 활동으로 소모해야 하는 에너지를 훨씬 넘어섰다"고 말했다. 너무 많이 안으로 축적하고 너무 적게 밖으로 내놓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이 소유하고 너무 적게 내놓는다. 과도하게 지방이 축적된 우리 삶의 방식이 우리의 몸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호주인들 5명 중 1명이 이 문제로 우울함이나 근심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부자병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치달아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알다시피 고통과 박탈의 시기가 가장 좋았던 시절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럭저럭 지내는 것이 행복한 경우도 많다. 하버드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 조지 베일런트는 지금껏 밝혀진 우울증 최고의 치료법은 이타주의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 소비에 몰두하는 행태, 그 자체가 거의 새로운 도덕이 되고 있다. 우리는 뉴에이지(New Age, 기존 서구의 가치와 문화를 배척하고 종교, 철학, 천문학, 환경, 예술 등의 발전을 추구하는 신문화 운동), 호주, 원주민, 아미시교(Amish, 보수적 프로테스탄트 교파로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극도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종교 집단) 등 물질주의에 참여하지 않는 단체를 체제 전복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우리의 탐닉에 먹이를 준다. 먹이를 주는 것이 증상이 아닌 치료라고 생각하면서.



자연과 문화

자연과 문화, 질서와 혼돈

건축 예술을 포함해 모든 예술에서 질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자연에서 질서를 추출하는 것이 삶의 본질적인 행위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독일의 화가 게오르게 그로츠는 이런 말을 했다. "삶에서 혼돈을 쫓아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혼돈에서 필요한 것을 추출할 필요도 있다. 우리는 습관과 진부함, 억견(doxa, 플라톤이 사용한 용어이며, 일종의 판단력으로 감각이나 지각보다는 넓은 대상은 인지하지만 지식이나 사고에 비해서는 근거가 없는 지식)의 혼돈상태에서 자신을 보호하면서 결합의 긴밀성에 따라 혼돈을 분류하고 조직한다."


노르웨이 출신의 실존주의 철학가 베셀 자프페는 문명화를 우리 자신을 제정신으로 유지하는 엄격한 자기검열체제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질서일 수도, 예술일 수도, 문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명화는 끝없이 생성되는 혼돈에 의존하고, 혼돈에 의해 자라며, 끊임없이 혼돈을 만들어낸다. 혼돈은 위협이다. 하지만 혼돈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혼돈은 예술의 기능이다. 예술은 우리가 혼돈에 빠지지 않고 슬쩍 맛만 보게 해준다.


도시는 혼돈과 질서가 모두 필요하며 양자 사이의 적절한 균형에 의존한다. 지나치게 혼돈스러우면 아테네나 멕시코시티 같은 도시가 될 것이고, 지나치게 질서를 지키려다 보면 브라질리아, 캔버라, 싱가포르처럼 예술의 불모지가 될 것이다. 계획에 따라 좋은 도시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은 사실 모순이다. 이러한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혼돈은 가공하지 않은 에너지와 같아서 도시가 끊임없이 활기차게 문화의 중심이 빛이 되도록 변화시켜야 한다.

오늘날 뉴욕에는 지하철 문제가 있듯 고대 로마에는 쥐 문제가 심각했다. 로마제국의 중심지 아래 지하에 있는 배수관들과 하수구, 지하통로 등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쥐떼가 어마어마하게 들끓었고,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통제도 불가능했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 문제는 시민들이 가슴을 치며 통탄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희망의 징표였다. 도시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복잡하고 크고 작은 일들이 있다고 하는 희망이었다. 누구에 의해서건, 어떤 목적이건 인터넷의 가장 주요한 힘과 잠재력이 통제불능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도시 문화들은 항상 존재하는 혼돈 속에서 생겨난다.


혼돈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창의력은 놀이와 관련이 있고, 놀이는 모험과 관련이 있으며, 모험이 재미있으려면 열린 결말, 즉 예기치 않은 결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통제의 멍에를 짊어질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무언가 통제될 수 있다면 정부건, 체제건, 정통성이건 분명 누군가는 권위자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통제를 하려 들 것이다.


통제는 안전과 안락함의 힘이자 응집력과 보수주의의 힘이다. 통제는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통제는 평범함의 힘이기도 하다. 이 힘은 재미있는 길거리 공연을 지루하고, 안전하고, 판매할 수 있는 정부 취향의 영국 웨스트엔드 지역처럼 만들어버린다.


샘솟는 혼돈의 물줄기를 박탈당한 도시, 혼돈이 완전히 플라스틱으로 덮인 도시, 위협의 가능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거품의 덫에 빠진 도시에는 재미있는 일이 생길 가능성도 없다. 가면이 불투명하고 광택이 나게 되면, 모두 끝난 것이다.



페미니즘과 미래의 식습관

안전과 행복에 대한 병적인 집착

안전은 여성에게 중요한 문제다 어쩌면 당연한 소리인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로 더 공격당하기 쉽고, 더 방어적이어야 했던 여성들은 남성들이 위험에 매력을 느끼듯 안전에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여성들이 큰 자동차와 큰 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안전하게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성에게 쇼핑문제가 있듯 남성에게는 도박문제가 있다. 즉, 안전에 대한 본능은 분명 진화적 측면에서 어느 정도 가치가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안전 역시 좋은 것이긴 하지만 너무 과할지도 모른다. 요즘, 안전은 거의 병적인 수준의 강박관념이 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안전한 오늘날, 그리고 장기적으로 안전하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안전을 희생 제물로 삼는 오늘날, 역사는 안전 강박증에 빠져 있는 우리를 가혹하게 판단할지도 모른다.


요즘은 아이들이 방과 후 집에 올 때,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오는 일이 거의 없으며, 우리 세대처럼 길거리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일도 거의 없고, 매 시간 아이들에게서 감시의 눈길을 떼는 일도 좀처럼 없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의 안전이 그토록 급격하게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이들 가까운 곳에서 맴돌며 늘 감시하는 헬리콥터 육아와 폐쇄적인 단체들, 희생적 사고방식, 범국가적인 유모체제, 부채위기 등 길거리 공연을 죽이고, 공원에서 놀이 도구들을 없애버리는 모든 행위들은 비용이 얼마가 들건 안전을 확실히 하고, 아이들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한 강박적 관념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용은 삶의 방식이 된다. 위험이 거의 없는 어린 시절에는 재미 또한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누에처럼 만족의 고치 안에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좋은 삶인가? 위험은 어쩌면 놀이의 범위를 규정짓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위험이 커야 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공을 가지고 노는 아기에게 유일한 위험은 공이 굴러가버릴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이다. 공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놀이를 하면서 즐거울 수 있는 것처럼 놀이는 본질적으로 결말이 열려 있으며 모험적이다. 결말이 알려져 있으면 지루하다. 예측 가능한 놀이는 처음부터 싫증이 나며 쉽게 따분해진다. 완벽한 예측이 가능한 안전은 모든 것을 지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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