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

   
찰스 핸디(역자: 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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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지21
   
15000
2008�� 03��



>■ 책 소개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니지먼트사상가, 찰스 핸디는 피터 드러커와 톰 피터스를 포함해 세계를 움직이는 50인의 사상가 리스트에 올라 있다. 『비이성의 시대』를 포함한 수많은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작가의 이 책은 그만의 특별한 지혜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리더들에게 비즈니스와 직장인들이 본받을 만한, 기존에는 볼 수없었던 비범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꼭 만들어야 할 모든 선택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찰스 핸디의 국제적인 활동 여정을 따라서 유쾌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그를 키웠던 아일랜드부터, 그가 셸 간부로 일하는 동안 보르네오에서 배운 것, 그가 마련한 낡은 집이 있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미국으로 가는모든 방법, 우리의 도덕적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해력을 뒤흔드는 최근 기업의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 모든 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직업 모델을 온전한 눈으로 바라볼 것과 우리가 진실로 성취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찾을 것을 부탁하고 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몇 년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직장에서 밀려나고직함이 사라진 후,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찰스 핸디는 그 물음에 대해 우리 모두가 자유로울 수 없다고 경고한다. 더 나아가 그는그것이 우리의 경력뿐 아니라 가정에서의 역할, 결혼과 자녀교육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또한 수단을 목적으로 혼동하는 기업을 비판하고,조직보다는 개인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이 책에서 그는 한 개인이 기업에 소속되거나 독립적인 1인 기업가가 된다 하더라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에대해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좁게는 기업의 공간 활용에서부터 가정의 내부 디자인, 넓게는 개인의 정체성 확립과 교육이 사회에미치는 영향 그리고 기업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기 경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 저자 찰스 핸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매니지먼트 사상가이다. 다국적 석유회사 셸의 간부를 거쳐 런던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가르쳤고, 이후 윈저성에 있는 세인트조지 하우스 학장,왕립예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BBC 라디오 방송 <투데이&&의 "오늘의 사색"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매니지먼트와 삶에 대한그의 견해는 수년 동안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교훈을 선사했다. 1994년 올해의 경제 평론가상을 수상한 『The EmptyRaincoat』비롯하여 『올림포스 경제학』『헝그리 정신』『홀로 천천히 자유롭게』『코끼리와 벼룩』 등 그의 책들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되었다.


■ 역자 강혜정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뒤출판사에서 기획·편집 업무를 거쳐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리더를 만드는 카리스마』 『노화를 막아주는 요가』 『평생 잊을수 없는 여행지 40』 『에비에이터 하워드 휴즈』 『키다리 아저씨』 등이 있다


■ 차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1. 정말입니까?
2. 아일랜드에서의 시작 
3. 그리스인의 지혜 
4. 보르네오에서 얻은 교훈 
5. 황금의 씨앗 
6. 경영을가르치는 학교 
7. 안티고네의 도전 
8. 아버지의 죽음 
9. 윈저성을 집 삼아 
10. 성 미카엘과 성 조지
11. 포트폴리오 인생 
12. 부동산과 소유권 
13. 주방과 서재 
14. 어린이 사육장 
15. 소중한 가족
16. 경영 구루가 되어 
17. 일을 겸한 여행 
18. 일흔 살 생일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


정말입니까?

몇 년 전 아내의 인도 차밭 사진 전시회에 나가 거들고 있을 때였다. 사진을 둘러보던 한 남자가 나한테 다가오더니 말했다. "찰스 핸디가 여기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남자는 다소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잠시 나를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정말입니까?" 나는 남자에게 좋은 질문을 해주었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버전의 찰스 핸디가 있어 왔고, 사실 그들 모두가 마냥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니까. 지금의 찰스 핸디는 60대에 들어서야 분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앞으로 다른 버전의 새로운 찰스 핸디가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감히 누가 장담할 것인가. 죽기 전까지 완전한 자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정체성이란 참으로 곤혹스러운 주제다. 나는 내 사진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사진 속의 나는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보는 내가 아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사진 속의 은발 노신사보다 자애로워 보이고 오히려 더 젊어 보인다. 사진도 이러할진대 타인이 보는 대로 자신을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렵겠는가?


조하리의 창(Johari window)이라는 개념은 조셉 루프트와 해리 잉햄 두 교수가 고안해낸 것으로 네모난 유리창을 네 개로 나눈 모양이다. A는 타인과 본인이 인식하는 창이고, B는 타인은 인식하나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는 창이다. C는 타인과 본인 모두 인식하지 못하는 창이고, D는 타인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본인이 인식하는 창이다. 유리창 전체가 우리의 온전한 자아, 자신과 타인이 보는 자아 전체를 나타낸다. 자신은 내부에서 보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창밖에서 본다는 발상을 깔고 있다. 유리창을 네 개로 나누는 칸막이가 워낙 두꺼워서 누구도 전체를 꿰뚫어 볼 수는 없다. 타인은 A와 B를 통해 드러나는 부분을 보지만 C와 D는 보지 못한다. 한편 본인은 A와 D는 보지만 B와 C는 보지 못한다. 말하자면 A를 통해 보이는 모습은 모두한테 보이는 공통된 모습이지만 D는 본인만 보는 모습이며, B는 타인만 보는 모습, C는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 감춰진 영역이다. 조와 해리는 모두가 공통으로 인식하는 A영역을 늘릴수록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일찍이 "사람은 일생 동안 여러 역할을 소화한다"라고 말했지만 요즘은 시차를 두고 여러 역할을 소화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여러 역할을 소화하기도 한다. 나는 젊은 시절의 찰스 핸디와 다를 뿐만 아니라 장소에 따라, 함께 하는 사람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럴 경우 우리는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 우리를 바라보는 타인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혼동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사실이다. 전시에 집중포화를 받거나 하는 비상사태를 당하면 내가 과연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하다. 당당히 시련에 맞설까, 아니면 지레 포기하고 말까? 다행히 혹은 운이 나쁘게도 아직까지는 그런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최선은 조하리의 창에서 A 부분을 가능한 많이 개방하고 미지의 영역인 C를 탐험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고, 스스로에 대해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어찌 보면 거짓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했던 탓이다. 젊은 시절에는 술 좀 한다는 소리를 듣는 사교적인 사람이 되려 했고, 한때는 다부진 석유회사 간부가 되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항상 나와 뜻이 같은 것도 아닌 타인들을 때로는 억지로 끌고 가는, 의욕과 야심만 앞서는 리더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 본모습대로 살기로 마음먹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얼마나 마음이 놓이든지. 지금도 가끔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하고 바랄 때야 있지만, 더 이상 불가능한 소망에 헛되어 매달리지는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삶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진정 어떤 일에 재능이 있는지를 끝내 모른 채 죽는다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삶이란 정체성이라는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이고, 우리는 사다리를 오르면서 서서히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발견해 간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이를 욕구의 위계라고 불렀지만, 나한테는 오히려 사다리에 가깝지 않나 싶다. 첫 번째는 생존의 단계다. 둥지를 떠난 새가 스스로 날 수 있는가?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고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가? 생존이 보장되면 스스로를 표출하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사람과 분리되는 자신만의 독립된 정체성을 구축하고 싶은 욕구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년의 성공이란 바로 사다리에서 이런 단계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사다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든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한다. 좋든 나쁘든 우리가 이곳에서 한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은 달라졌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사다리의 마지막 계단은 자신보다 큰 무엇을 향한 기여의 단계, 불멸을 위한 노력의 단계이다. 영원까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오래 지속될 자신만의 기념물을 향한 여정. 누군가는 훌륭한 삶의 구성요소란 살고, 배우고, 사랑하고, 유산을 남기는 것이라며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을 나름대로 바꾸어 표현했었다. 그 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삶에서 이루려 했던 것을 집적해서 보여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황금의 씨앗

최근 오랜 친구의 장례식에서 몇 마디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팻 켄달(처음 만났을 때는 패트리샤 롤링스였지만)이라는 친구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아내보다 팻을 오래 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어 내가 생각보다 팻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문을 열고 전진할 수 있게 자극하고 도와주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한번 못했다. 결국 이렇게 사후에야 감사의 말을 전하게 되었다.


셸의 직원으로 채용되어 싱가포르로 해외 근무를 나갔을 때 팻을 처음 알게 되었다. 팻은 셸이 해외 근무자들의 개인 생활을 챙겨주고자 고용한 유능한 여직원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숙소며 여행 준비를 비롯해 거주 국가가 바뀌었을 때 생기는, 개인 생활을 번거롭게 만드는 잡다한 업무를 도와주었다. 해외 근무자들은 이들과 절친한 친구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안락했던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어찌할 줄 모를 때 큰 힘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팻이 런던으로 돌아갔을 때 무척 아쉬웠다.


그로부터 6년 뒤 나는 팻처럼 런던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제 꿈같은 생활을 누리는 해외 주재원이 아니라 국내 거주자에게 맞는 임금을 받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릴 어떤 권한도 없었다. 아무리 좋게 말하려 해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종일 시계만 들여다보는 게으른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가 문으로 머리를 디밀고 말했다. "잠깐 내 사무실로 올 수 있겠나?" 무슨 일이지? 싶었다. "상부에서 특이한 요청을 받았네, 자네를 회사 산하 관리자훈련센터 부책임자로 보내라고 하는군." 센터에서 새로운 상사와 그의 아내를 만난 뒤에야 어찌된 일인지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상사는 켄달 씨로 그는 내가 팻 롤링스라고 알고 있던 여자와 결혼을 한 몸이었다. 내 기억으로 팻은 셸 본사 인사부에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과거 싱가포르에서 보살폈던 친구를 다시 챙겨주고 싶어서 힘을 써주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젊은 관리자에게 향후 직면할 넓은 세상을 알리고 준비시키는 교육 업무는 나한테 무척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천직을 찾았음을 알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라이베리아 지사 관리 업무를 맡기자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회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로 나는 최초의 사직서를 썼다. 난생처음 나는 사회제도나 기관의 보호 밖에 있었다. 하지만 아내와 팻은 나한테 알리지 않은 채 나름대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내 의향을 감지한 두 사람은 신드바드 싱클레어와 연락을 취했다. 싱클레어는 셸에서 퇴사하고 경영교육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싱클레어는 훗날 런던경영대학원의 학장으로 임명된 아서 얼 박사에게 나를 추천했다.


이리하여 나의 미래가 결정되었다. 이런 일이 흔히 그렇듯 타이밍과 연줄이 적절히 결합된 결과였다. 특히 팻의 도움이 컸다. 이제야 그 진가를 제대로 알았다는 생각이 든다. 팻은 내가 원하는 방향을 알자 고문 같던 본사 생활에서 나를 구해주고, 훨씬 맞는 생활로 이끌어주었다. 팻은 그런 사실을 말한 적도 없고, 충고를 한 적도 없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주제넘게 나서지도 않았다. 그저 이것이 도움이 되겠구나 생각하면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자신이 한 역할을 떠벌리지 않았다. 워낙 나서지 않는 팻의 성격 때문에 내가 고맙다는 인사할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엘리자베스와 나는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 현대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공동집필했다. 창조적 정신을 가진 진취적 사업가들을 다룬 책으로 이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의미로 연금술사라고 불렀다. 이들 연금술사들의 삶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인생 초반에 존경하는 인물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입의 내용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이런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에 이들은 과감히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택해 연금술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책을 쓴 다음에야 프로이드가 이것을 황금의 씨앗(golden seed)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씨앗은 우연한 의견 형태로 제시될 때가 많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소개나 추천, 기회 부여 등을 통해 확실한 믿음을 보여주는 형태로 표출될 수도 있다. 능력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는데도 잠재력을 믿고 나한테 경영대학원 교수직을 맡겨준 짐 볼 학장님의 경우가 그렇다. 연금술사 중 한 명인 디 도슨은 선생님이 무심코 흘리는 말로 자신이 과목 최고 점수를 받았다고 한 말을 평생 잊지 않았다. 황금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도슨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대에 과감하게 의대에 지원했다. 본인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팻 켄달은 황금의 씨앗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지만 무의식중에 나에게 황금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팻이 보여준 나에 대한 믿음과 힘닿는 데까지 도우려는 의지는 10년간 다니던 회사를 접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던 내게 크나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새로운 인생의 서막은 미국에서 펼쳐졌다. 싱클레어가 있는 경영교육재단에서 나처럼 미국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1966년 우리 부부는 6주 된 딸애와 함께 보스턴으로 날아갔다. 당시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미국은 미지의 나라였다. 미국의 번영은 아직도 곤궁한 영국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기대로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는 돈이 모든 것의 척도인 것 같았고 내가 다니는 경영대학원은 더욱 그랬다. 미국인들은 자유와 평등을 모두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경제적 평등을 기꺼이 희생할 사람들로 보였다. 그런 태도 때문에 미국은 선진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심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불평등 속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를 감수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아메리칸 드림(누구든 자신의 노력으로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의 힘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개인의 자유에는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책임진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내 미래가 온전히 내 노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1년이 지적으로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값진 준비의 시간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967년 1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런던에서 미국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배운 몇 가지 교훈만은 확실히 가슴에 새겼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며, 충분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개인의 창의력 활용을 장려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오랫동안 나는 해마다 미국에 가서 특유의 활력과 낙관주의를 보충하곤 했다. 미국에서 보낸 1년은 삶에 대한 내 태도를 바꿔놓았다.



포트폴리오 인생

1981년 윈저성에서 열린 송별파티에서 그가 쭈빗쭈빗 나한테 다가왔다. "한 마디만 충고하겠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반드시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거네. 안 그러면 은퇴 여파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그와 그의 회사는 세인트조지 하우스의 최우량 고객이었다. 이른 나이에 죽은 친구들을 많이 봐온 터라 그는 그쪽으로는 나름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듣는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은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겨우 마흔아홉이었고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은퇴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일종의 전술상의 실수를 저질렀다. 계약 기간인 5년이 아니라 4년이 흐른 뒤에 세인트조지 하우스의 학장 자리를 그만두고 후임자에게 일을 맡기겠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주임 사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자 갑자기 나는 매인 데 없는 자유계약 선수로서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사회철학이 나의 새로운 천직이라고 마음을 정했지만 아직은 시기가 아니었다. 대부분은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포트폴리오 인생으로 내몰린다는 말이 진정 옳다. 무심코 일을 저질러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내 엘리자베스는 길길이 뛰었다. 하지만 현명한 아내는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보려 했다. "이제 정말로 집필에 집중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나의 저작권 대리인은 엘리자베스 같은 믿음이 없었다. 점심식사 자리에 함께한 그는 "본업을 포기하지 마세요." 하고 말했다. 나한테 다른 직업을 가지라고 간청하다시피 했다. "아니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포트폴리오 생활자가 될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프리랜서, 그러니까 독립 생활자가 되겠다는 겁니다. 전일제 직장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으로 삶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서 사는 사람 말입니다. 물론 집필을 중심에 두면서 말입니다."


대리인이 침울한 표정으로 떠났다. 자유에 대한 기대가 이제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포트폴리오 생활자가 되는 것이 이론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다. 더구나 첫 시도일 때는. 평생 나는 해야 하는 의무, 걸려오는 전화, 전달되는 이런저런 서류 등에 대처하면서 살았다. 나름대로 창의력을 발휘하며 주도적으로 살아보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내 인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지시, 외부에서 나한테 기대하는 바에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갑자기 외부에서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서류함에는 신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참석해야 하는 회의도 없고, 답신해줘야 하는 전화도 없고, 지켜야 할 약속도, 목표도, 평가도 없었다. 다이어리는 텅 비어 있었다. 너무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당해보니 기쁘지 않았다.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안전히 보장되었기에 나름 안락하고 비좁은 동굴에서 나와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밑바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는 허공에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명확한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이 더욱 불안했다. 이 새로운 찰스 핸디는 누구인가? 포트폴리오 생활자라는 말은 내가 택한 삶의 방식은 말해 주지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담고 있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남에게 말해줄 꼬리표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너를 어떻게 설명할 생각이야? 마냥 전직 학장이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 한 친구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포트폴리오 인생을 시작한 초기 7년은 모든 것이 만만치 않았다. 우선 머릿속에 몇 가지 근심이 있었다. 가장 절박했던 것은 거주할 집이었고, 수입 관리, 물리적인 생활공간의 관리, 특히 10대인 아이들의 교육 등. 하지만 어떤 것도 무엇에 초점을 두고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유는 당연히 좋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묻는다면 대답이 쉽지 않았다. 서서히 사업적인 성공보다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자유가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면 삶의 목적과 우선순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했다. 구체적으로는 물리적인 생활공간을 정리하고 시간을 배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했다. 내가 정말로 생활에서 철학이란 것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지금 하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중요한 진리를 깨우쳤다.


하지만 고결한 철학과 명상,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무소속으로 일하기 시작한 초기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역시 돈이었다. 주체적인 삶을 산다고 해서 반드시 삶의 가장 필수적인 부분, 즉 재정 문제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직장에 고용되어 있을 때 내가 사실상 나의 모든 시간을 조직에 팔았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나 자신을 위해 고용된 포트폴리오 인생에서는 보통 돈이 많은 공급되는 일일수록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독립 생활자로 일하는 상황에서는 비용편익 계산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돈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거나 싫은 일을 해야 하거나 장소가 적절치 않거나 부도덕할 가능성이 있다면, 돈이 많아도 반가울 것이 없었다.


돈이 결코 성공의 유일한 척도는 아니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다. 희한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돈이 성공의 유일한 척도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에게 돈이란 것은 원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이다. 가족에게 좀 더 나은 생활을 제공하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수단. 하지만 돈을 갖고 싶다는 이유로 싫은 일을 하는 덫에 빠지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의 거래로 변하고 만다. 반면에 대가가 너무 빈약해도 소명에 따라 사제, 간호사, 예술가 등이 되는 사람도 있다.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면 거의 공짜로 일을 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삶이 훨씬 간소하고 편안해질 것이다. 우리에게 충분한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금액으로 규정하지 못한다면 - 그리고 규정하기 전까지는 - 우리는 결코 진정 자유로울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자유롭게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표를 정할 수가 없다. 대신에 자발적으로 고용주의 노예가 되어 타인의 우선순위에 복종하며 살게 될 것이다.


충분하다는 기준을 정한다는 의미는 돈의 다른 용도를 머릿속에서 폐기한다는 의미다. 돈은 이제 성공의 상징으로도, 스스로의 가치를 규명하는 방법으로도, 진정 원하는 삶을 포기한 것에 대한 변명 또는 보상으로도 기능하지 못한다. 그러려면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정의하고 싶은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봐주기를 바라는가 등을 마음에 터놓고 솔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이미 그런 시도를 해봤고 나름의 결론도 있었다. 경험자로서 이런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정직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정직한 반성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부한테는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소중한 가족

아들이 결혼을 생각할 무렵 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명심해라. 너는 평생 사랑할 배우자하고만 결혼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가족 전체와 결혼하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처신해야 한다. 너도 알게 되겠지만 가족은 무엇보다 소중하단다."


이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정말 활기가 넘치는 분이었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은 우리 부모님과 상당히 다르게 사셨다. 나는 그 점이 좋았고 두 분도 나한테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딸에게 청혼할 때까지는 그랬다. 딸의 애인이자 구혼자로서 나는 검열을 통과했지만 가족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런던으로 돌아온 우리가 약혼을 했으니 부디 기쁜 마음으로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을 때, 두 분의 답장은 부정적이었다. 나는 최적의 신랑감은 아니었다. 두 분은 외동딸에게 맞는 좀 더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원했다. 장인은 농담조로 셸 사의 연금 계획을 보니 내가 생전보다 사후에 더욱 가치가 있어 보이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초기 몇 달 동안 나는 아내 될 사람의 환심을 얻으려고 아내의 가족에게 공을 들였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가족을 알기 전에는 결코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다는 사실도 더불어 깨달았다. 사람 됨됨이와 많은 부분이 유전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많은 부분이 어린 시절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가까운 가족을 만나고 나면 사람들이 좀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그제야 외적 인격(public persona)이라는 보호막을 벗은 상대방의 진면모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벗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상대를 알았다 싶을 때까지는 자신을 보호하는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한다. 누군가 나한테 보여주는 최고의 경의는 나를 부모나 형제자매에게 소개시켜주는 것임을 이제는 알고 있다.


가족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의 결속과 구성원의 독자성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예민한 감각과 적절한 타협을 필요로 한다. 이런 균형은 부부관계, 더 나아가 모든 관계에서 핵심이다. 결혼생활은 부부가 각자 별도의 공간을 가지면서 동시에 부부로 결속되어 있을 때 가장 잘 돌아간다. 나와 아내는 밀접하게 지내면서도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하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우리 작업 공간을 보면 두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도 다르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나 일상생활의 습관도 다르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챌 것이다. 우리는 둘 다 요리를 하지만 나는 시골에서 지내는 기간에 하고, 아내는 런던 집에서 한다. 우리는 요리하는 방식도 다른데, 그것이 식사 시간에 묘미를 더해 주고 단조로움을 피하게 해준다. 우리는 늘 함께 하지만 지나치게 가깝지는 않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낡은 봉투 하나를 주셨다. 봉투에는 에드워드 1세의 사생아로 태어난 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가문 가계도가 들어 있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선조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자손을 낳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빼고는. 선조들이 자손을 낳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날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조들의 피는 나한테까지 이어졌고, 이제 나는 그것을 두 아이한테 전하며 중임을 다했다. 엘리자베스와 내가 오랜 사슬을 계속 이어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나님이 결혼을 정히 명하신 이유를 다음의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공회 결혼식은 맥락을 올바로 짚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 자식의 출산과 양육을 위해서고, 둘째 합법적인 섹스를 위해서고, 셋째 번성할 때나 역경에 처할 때나 서로가 서로에게서 구하고 베풀어야 할 상호 사귐(mutual society)과 도움과 위안을 위해서다.


모든 영역에서 파편화되어 간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세상에서 누구한테나 당연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기업을 비롯한 조직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 조직은 그렇게 오래가지도 않으려니와 사람의 능력이 고갈되면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 이웃은 이사 가면 연락이 끊긴다. 당시에는 죽고 못 살지만 금세 시들해지는 남녀관계는 어떤가? 너무도 많은 남녀관계가 시간이 지나면 짧은 유통 기한을 가진 식품처럼 허망함만 남긴다. 하지만 가족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가끔 가꾸고 다져주어야 할 필요는 있지만 변함없이 우리 곁을 지키는 것이 가족이다. 과거 많은 이들이 가족의 쇠퇴를 예언했지만 틀렸음이 밝혀졌다. 형태가 변할 수는 있지만 가족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족은 소중하며, 그만큼 자양분이 필요하다. 가족을 가꾸는 자양분의 핵심은 대화다. 의심과 질투는 침묵 속에서 활개를 친다. 우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우리가 가족임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결혼식, 제례, 생일, 기념일,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무슨 구실을 대서든 거나한 식사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함께 잘 먹는 가족이 오래 살고 함께 사이좋게 지낸다는 믿음 아래.



일흔 살 생일

2003년 7월 25일, 일흔 살이 된 나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이제는 나의 앞길에서 중요한 실체가 되었다. 죽음은 마침내 우리 세대의 삶에 파고들었다. 부모님, 이모, 고모, 이모부, 고모부들의 죽음이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때가 되어 그리 되었으려니 하는 마음도 있었다. 동년배들이 죽기 시작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의 부고란을 보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이름을 보면 제일 먼저 그 사람이 몇 살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부부는 요사이 전에 없이 많은 장례식과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다. 항상 슬프지만 주변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편안함과 기쁨이 느껴지기도 한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모인 추억을 공유한 익숙한 얼굴들을 보면 고인이 잘살다 갔다는 생각이 드는 탓이다. 동시에 내 장례식도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며 자리를 뜨곤 한다. 신변을 정리해야 할 시점이야, 생각하면서. 그러고 나면 잠시 밝아졌던 마음이 다시 어두워진다. 계획은 영원히 살 것처럼 세우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라고들 말한다. 물론 훌륭한 말이지만 궂은 날에는 그렇게 열심히 살기가 쉽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임종시험이라는 걸 해보라고 충고한다. 죽을 날이 되었다고 상상하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도 오십 대에 이런 연습을 해보았다. 당시 경험으로 남들한테 인상 깊은 이력서를 만들고자 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국에는 시간 낭비일 뿐임을 깨달았다. 초기 경력에서 내가 이룬 것들이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한때는 내 말에 따라 움직이고 내 이름이 누구보다 중요하던 곳이라도 시간이 지나서 가보면 아무도 나를 모르고, 이름이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교훈도 없다.


그럼 경력 따윈 잊자. 수십 년 동안 그렇게나 집착해온 것이지만. 책도 잊자. 땅 속에서 썩어갈 육신도 잊자. 태어나기 전의 일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굳이 사후의 일을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개인으로서 나에 대한 기억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 즉 가족과 몇몇 절친한 친구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이 전부이리라. 어떤 식으로든 불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나를 기억하는 타인의 마음과 가슴속에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25년이 흐른 지금, 나는 오히려 살아계실 때보다 많이 생각하고 그리워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다소 소름끼치기도 하지만.


가족들은 내가 너무 죽음에 집착한다고 놀리곤 한다. 죽음에 집착하기 때문은 아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자신의 인생을 진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일 뿐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예상하면서 남은 시간을 내가 상상하는 송덕문에 부합하게 살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보통은 그렇게 살 마음의 각오가 되었을 즈음 이미 상상 속의 임종이 아니라 진짜 임종을 맞게 된다. 정말 시간이 없다는 절박함이 밀려오기 전에는, 재고정리 하듯 인생을 꼼꼼히 돌아보기가 쉽지 않다.


임종 훈련은 내가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하도록 해준다. 다들 그렇듯이 나도 항상 결심한 대로 지키지는 못하지만. 다행인 것은 나이가 들수록 결심을 지키기가 한결 쉬워진다는 사실이다. 야망이 시들해지고, 겉보기에 나보다 성공한 것 같은 타인에 대한 시샘도 마찬가지로 시들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잘 보이고 싶은 대상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본 대로 말하고, 바라는 대로 살고, 자신의 가치에 따라서만 시간을 쓰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생을 유혹의 사다리에 비유했다. 순서대로 한 발 한 발 밟으며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인데 단계마다 유혹을 깨부수면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보통의 오르막길과는 반대로 인생의 사다리를 오르는 발걸음은 나이가 들고 성장할수록 가벼워지는 것 같다. 대부분의 유혹을 오래 전에 끊어버린 탓은 아닐까.


침대에 누운 채로 나는 새삼 생각했다. 삶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우리의 주제넘은 안간힘은 또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얼마나 소중한가. 전체적으로 보면 삶은 나한테 관대했다. 애정으로 나를 키워준 부모님, 훌륭한 자식들, 존경하는 아내(내가 이룩한 모든 성공은 아내 덕택이다), 좋은 친구들, 그리고 건강(아직까지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낸다는 것은 분명 생가지 않은 선물, 즉 보너스다. 그러니 나는 냉소적이어서 안 된다. 프로이드 이후 위대한 심리학자로 꼽히는 에리히 프롬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존재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만족스러운, 그리고 유일한 해답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누구나 - 내가 그랬던 것처럼 - 시간의 모래 속에 족적을 남기겠노라는 원대한 희망과 야망을 품고 결연하게 길을 나선다. 그리고 결국에는 볼테르의 철학 소설 『캉디드』의 주인공 캉디드처럼, "내가 하는 일은 중요성을 따지면 너무나 보잘 것 없지만, 내가 이 일을 하는 것 자체는 무한히 중요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말 그렇다. 이제 나는 침대에 편안히 누웠다. 흡족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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